산 제사를 드리라(로마서 12:1-21)
이제 앞서 개요에서 말한대로 사도의 권고를 살펴 보자.
Ⅰ.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임무. 경건이 무엇인가?
1.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후 8:5). 이것이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임무와 순종의 원천으로 강조되고 있다(1, 2절). 인간은 몸과 혼으로 이루어졌다(창 2:7; 전 12:7).(1) 우리는 몸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1절). "몸은……주를 위해 있는 것이며 주는 몸을 위해 계십니다"(고전 6:13, 14, 새번역). 이 권고는 아주 열정적으로 시작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그로 말하면 뛰어난 사도이지만 미천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만큼 애정과 관심을 표명하는 말이다. 그는 간청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간구하노니"(고후 5:20). 그는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간청하고 있다(몬 5:8, 9)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잠 18:23). 이렇게 말하는 것은 권고를 완곡하게 말하므로 좀 더 기분좋게 먹혀 들어가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사람들은 좀더 친절하게 말을 하면 쉽게 먹혀 들어가고 끌어당기는 것보다 앞서 가게 하는 게 더 쉽다.
[1] 의무에 대한 강조. 그것은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으로 율법시대에 제단에서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준비된 제물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너희 몸", 네 온 몸이다. 여기에 몸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율법시대에 짐승의 몸이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20). 이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혼을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제물은 제사장이 잡아 제사 드리지만 가져다 바치는 것은 그 제물의 임자다. 이 제물 임자는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자기의 모든 권리, 자격, 그리고 관계를 하나님께 일임한다. 여기서 제사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에 따라 가져다 바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벧전 2:5 참조). 그리스도께서 그의 특유한 제사드림에 있어서 그랬듯이 우리는 성전이요 제사장이요 제물이다. 구약시대에는 속죄 제물도 있었고 화목 제물도 있었다. 단번에 수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속죄 제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제사장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 인격과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화목 제물과 같은 것이다. 바친다는 말에는 자발적인 행위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의지가 몸과 지체에 대해서 행사하는 독단적인 절대적 힘을 다 행사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유 의사에 따르는 제물이어야 한다. 네 몸이라 했지 네 짐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저 율법 시대의 제물은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받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게서 끝난다.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건 이 몸과 함께 저지른 죄를 피할 뿐 아니라 그 몸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영혼의 종으로 사용하라는 얘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고전 6:20). 즉각적으로 예배하는 데 우리 몸이 참여하는 것이요, 우리의 특수한 임무에 근면하게 집착하는 것이요, 또 부름을 받으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위한 고통을 자원해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다(6:13). 물론 육체의 단련 그 자체에만은 별 유익이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을 드린 증거요 소산이다.
첫째,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다. 율법 시대처럼 죽여서 드리지 말라는 얘기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지 않고도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려진 몸은 산 제물이다. 산 제사라는 말은 죽어 있어서 먹을 수도 없고 더욱이 제물로 드리기엔 부적당한 제물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신 14:21). 또 그것이 반대로 의미하는 것은 "제물은 도살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너희는 제물로 드리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피제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야만적인 이방인들은 자기 우상에게 자녀를 죽여서 바쳤으나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자비를 원하신다. "산"제사란 영적 생명의 의중에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몸으로 하여금 산제물이 되게끔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영혼 속에 살이 계시는 그리스도다(갈 2:20). 거룩한 사랑은 제물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우리의 본분에 생기를 북돋아 준다(6:13 참조). "살아 있는" 곧 하나님께 사는 것이다(5:11).
둘째, 우리의 몸이 거룩해야 한다. 제물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상대적인 거룩이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 우리 마음과 생활이 통째로 강직하며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거룩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죄와 불결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되지만 한 걸음 더 나가 성전의 그릇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져 거룩하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지고 거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거룩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은 그것이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몸에 거룩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몸의 행동이 거룩하면 그 몸도 거룩한 것이다. 이 몸은 "성령의 전"(고전 6:19)이니 만큼 "몸을 성결하게 간직하라"(살전 4:4, 5).
[2] 이것을 강경히 뒷받침하는 이론. 이것은 세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라." 하나님의 자비를 두고"(dia. tw/n oivktirmw/n tou/ qeou/) : 이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요청인가! 우리는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더없이 설득력이 넘치는 힘찬 논증이다. 하나님에게 있는 자비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비가 있다. 곧 샘에 있는 자비와 물길에 흐르는 자비니 이 양자가 다 여기 말하는데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나 특별히 그것은 복음의 자비이니(9장에 있는대로)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잃고 이방인에게 넘겨 준 그 자비요(엡 3:4-6)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자비다(사 55:3).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인 만큼 우리의 몸을 그에게 드리도록 하자. 그는 이걸 사랑으로 써 주실 것이요 무한 동정의 하나님이기에 또 우리의 체질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매일매일 그의 자비의 열매, 특별히 몸에 대한 자비의 열매를 그분으로부터 받아 먹고 있을 정도로 그는 우리 몸을 만드셨고 유지하시며 되사셔서 거기에 큰 영광으로 덮어 씌우셨다.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 것 곧 우리 영혼이 생명에 붙어 잇는 것은 여호와의 자비 덕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대한 자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로 삼으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으니 곧 그 자신을 우릴 위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내 맡기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호와께 뭘 드려야할까 하고 곰곰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드릴 것인가? 우리 자신을 이 모든 은총의 감사 제물로 드리자. 우리의 현재, 우리의 소유, 우리의 능력 모두를 말이다. 사실 그것은 풍성하게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 것 없는 반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가진 것 전부이기에,
둘째,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하나님께서 받아들일 만한)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수고하는 모든 목적은 여호와에게 인정을 받고(고후 5:9) 우리의 인격과 행동으로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있다. 이제 이 산 제물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는 것이요 악한 자의 제물은, 그게 제아무리 살쪄 있고 값이 나가도 여호와에게 가증스런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뭘 받아 주신다는 것 부터가 하나님의 위대한 자기 비하인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만을 즐겁게 하려고 욕심부릴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유용하게 쓰여질 수 없다.
셋째, 그것은 우리의 "합당한 예배"(reasonable worship)이다. 이 예배에는 이성의 행동이 따른다. 몸을 바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헌신, 곧 몸을 길러 준 어머니와 유모를 무시하는 그러한 헌신은, 눈이 달렸으나 보지 못하는 저 쓰레기 같은 우상에게나 합당한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으로 섬겨야 하고 이해하면서 섬겨야 한다. 여기에 찬성하는 이성은 이 세상에 꽉 차 있다. 여기에 반대하는 이성이란 생겨 날 수도 없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reason) 하자"(사 1:18). 하나님은 우리에게 턱 없이 힘들거나 부당한(unreasonable) 일을 더 맡기시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의 원칙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일을 맡기신다. "너희의 영적 예배"는 "말씀에 입각한 너희의 예배"(th.n logikh.n latrei,an u`mw/n)라고 읽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예배에 있어서 몸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에 입각한 예배라야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 예배요 그 이유(reason)를 쉽게 댈 수 있는 예배이니 우리가 거기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상대하고 계신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신분에서 당신과 상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2) 마음이 그에게 적합하도록 새로워져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곧 너희 속에 구원의 변화가 일어나 그것이 진행되도록 하라." 회개와 성화는 마음의 갱신이니 영혼의 겉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속의 변화다. 그것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혼으로 만드는 것이요, 새로운 경향과 성향, 새로운 호감과 반감, 이해의 확대, 양심의 누그러짐, 사고의 강직성, 하나님께 머리 숙인 의지, 영적이요 천성적인 애착, 이 모든 것이니 현재의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요 만사가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되는 것이며 새로운 원칙, 새로운 준칙, 새로운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마음은 우리를 다스리는 주된 부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갱신이야말로 전 인간의 갱신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이다(잠 4:23). 갈수록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만큼 갈수록 의에 대해서는 사는 성화의 과정은 그것이 영광 가운데 완성될 때까지 이 갱신 작업을 진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변화"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모양과 모습을 덧입는 것과 같다. "변화되어라"(Meta morf ou/sqe). 이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덧 입으셔서 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게 하던 변화와 같은 단어다(마 17:2). 그리고 동일한 단어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라"(고후 3:18)는 말에서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변화가 우리의 임무로 강조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자력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겔 11:19; 36:26, 27). 그러나 "너희는 변화를 받으라," 곧 "하나님께서 그걸 위해 구비해 놓은 방법을 사용하라".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요 그럴 때만이 우리는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위가 돌아가게끔 해"둬야 한다(호 5:4). "네 영혼이 복된 영의 변화시키는 감화력을 받아 이 모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라." 새로운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면 우리는 그것을 덧 입고(엡 4:24) 완성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한다. 몇 가지 더 살펴볼 게 있다.
[1] 이 갱신에 있어서 우리가 피해야 할 원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과의 일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주님의 제자와 신자들은 모두 이 세상과는 불일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따라 "네 모습을 갖추지 말라"(Mh. suschati,zesqe). 이 세상 물정은 변하는 것이요 그 유행은 한때뿐이니 거기에 일치해서는 안된다. 또한 육신의 정욕이나 눈의 정욕에 일치하지도 말라.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의 인간들을 본받아서도 안되며 "이 세상 풍속"(엡 2:2)을 따라서도 안 되니 다수를 따라 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얘기다(출 23:2). 설령 죄인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아니 그 자체로서는 무관해 보이고 죄스러워 보이지 않는 일이라도 우리는 세상의 습관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다간 세상이 우리의 최고 준칙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우리의 최고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참된 기독교는 소박한 외고집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무례하고 무뚝뚝한 정도까지 나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연의 빛과 세상 나라들의 습관이 우리의 지침이 될 수 있으나 앞서 말한 경우에 있어서는 복음의 준칙이 모순된 준칙이 아니라 방향제시의 준칙 구실을 한다.
[2] 우리가 힘써야 할 이 갱신의 효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임무에 관한 계시된 뜻이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하나님의 뜻이니 곧 우리의 성화요 천사들처럼 우리도 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바로 그 뜻이다. 특별히 그것은 말세에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신약에 계시된 대로의 뜻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며(acceptable), 완전하다." 이 셋은 율법의 뛰어난 특징이다. 그것은 선하다(미 6:8). 그것은 선과 악을 영원히 구별하는 데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선하다.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선하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복음의 율법이 "선치 못한 율례"(겔 20:25)로 이뤄진 의식 율법과 구별되어 선하다고 얘기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것은 받아들일 만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의 은총을 최고 목표로 획득하는 유일한 길은 그의 뜻을 유일 준칙으로 삼고 거기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덧붙일래야 덧붙일 게 없는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신앙과실제의 충분한 규범으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선한 일에 몰두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다(딤후 3:16, 17).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곧 그것을 판단할 줄 알고 인정할 줄 아는 것이요 그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그것에 일치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우월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빌 1:10) 분별하는 것이니 여기에 사용된 sokima,zein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걸 "시험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어서 재빨리 이해하는 것"이다(사 11:3).
셋째, 마음의 갱신으로 변화를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은혜의 산 원칙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 비뚤어진 판단을 갖지 않고 바로 튼튼히 서 있는 한 영혼 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영혼으로 하여금 신의 의지에 계시를 받아들이고 영접하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인지 알리라"(요 7:17)고 약속이 되어 있다.
2. 이것이 다 되면, 복음의 모든 순종 양식에 따라 그를 섬기는 것이다. 여기에 "주를 섬기라"(11, 12절)는 대목이 들어와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리는 건 그를 섬기기 위함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또 있겠는가? "내가 그에게 속한다"(Whose I am)면 (행 27:23), "내가 그를 섬긴다"(Whom I serve)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어떻게?(1) 우리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세상 일도 있지만 우리의 특수한 소명이 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살전 4:11). 그러나 여기서 부지런하라는 말은 주님을 섬기는 일, 곧 우리 아버지의 일(눅 2:49)을 뜻하는 것 같다.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입증하려는 자들은 신앙을 자기 업무로 삼아야 한다. 그걸 택해서 배우고 거기에 몰두하며 그걸 최고 업무로 사랑하고 거기에 머물러 살며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일단 그걸 우리의 일로 삼았으면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안일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그게 우리 자신의 다른 일과 중복이 되면 그걸 먼저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에 있어서 게으른 달음질은 없다. 게으른 종들은 악한 종들로 간주될 것이다.
(2)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한다. 하나님은 영으로(1:9; 요 4:24), 성령의 감화 아래, 섬겨야 한다.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의 영이 섬길 때 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에는 영의 열심히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한 열심이요, 뜨거움이요 열정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혼뿐 아니라 우리의 온 마음과 모든 혼을 다해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제물에 불을 붙여 하늘나라에까지 가지고 가서 향내나는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불이다. "주를 섬김"(tw/| kairw/| delevuonej)을 "시간을 섬김"으로 번역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회를 선용하여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라는 뜻이다.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소망과 신뢰로 말미암아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특별히 우리가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그 신뢰 가운데 자족할 때 그러하다. 이것은 곧 그 실제에 대한 큰 확신과 소망하는 위대한 선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환난 중에 참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일하라고 부르실 때 그를 위해 일할 뿐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고 부르실 때는 잠잠히 앉아 있으므로 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의 뜻과 영광을 주목하고 그를 위해 참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은 환난 중에 인내하기 마련이다. 모든 외형적인 압박 중에도 영혼을 붙들어 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기쁨을 믿음으로 내다보는 그것이다.
(5) "기도에 항상 힘쓰며" 기도는 소망과 인내의 친구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을 섬긴다. 본문의 의미에는 기도의 열정과 인내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기도 임무에 있어서 냉담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그것을 싫증내서도 안 된다(눅 18:1, 살전 5:17; 엡 6:18; 골 4:2). 이것은 하나님을 중히 영기는 우리의 임무다.
Ⅱ. 우리 자신에 관한 태도. 이것은 온건이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온건한 평가(3절). 이것은 아주 엄숙한 서론으로 시작되고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 그것은 이 본분의 필연성과 탁월성을 이해할 수 있게 했던 지혜의 은혜요, 이런 말을 감히 강조하고 명령할 수 있었던 권위를 준 사도직의 은혜다.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있게 임명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너희는 부정하지 말라"는 식이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는 말이다. 교만이란 우리 모두가 천성으로 타고난 죄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고 여기에 무장을 갖춰야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 우리의 판단, 능력, 인격, 그리고 실천에 대한 과대평가를 삼가야겠다. 스스로 기만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지혜나 업적을 너무 추켜 세운 나머지 스스로 위대한 척해서는 안 된다(갈 6:3). 물론 우리 자신이 죄의 종과 세상의 품팔이가 되기에는 너무 귀한 존재이기에 이 점에 있어서는 마땅히 스스로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능력, 은사,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대로만 생각할 것이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의심스러운 논쟁에 있어서 너무 자만해서도 안 되며 능력 밖으로 뻐기는 것도 안되며 우리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도 안 되며 육신으로 자랑을 삼으려 해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자신에 대한 온건한 평가에서만 얻어지는 열매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인간도 그가 마땅히 지혜로워야 할 그 이상으로 지혜로워서는 안 되고 온건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 머리 이상의 것에 신경을 써서는 안되고(시 131:1, 2),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넘나들려 해서도 안되며(골 2:18), 우리 분야가 아닌 비밀한 것들을 기웃거려서도 안 되며(신 29:29) 기록된 것 이상으로 더 지혜롭기를 탐해서도 안 된다. 지식 가운데는 금단의 열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며 뽐내는 지식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삼가고 온건하게 하는 지식을 쫓도록 하며 마음을 바로잡고 생활을 새롭게 하도록 해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의 위치와 자리에서 남의 은사와 직분을 넘나들지 않도록 하는 온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더 없이 귀한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이 온건하고 겸손한 배려를 우리는 본받아야겠다(고후 10:13-15). "스스로 지혜있는체 말라"(16절)는 권고도 이러한 의미에서 해석할 것이다. 지혜가 있는 것은 좋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쁘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우물안 개구리는 실로 바보 이상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의 얼굴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자신, 자신의 능력, 및 업적에 대해 온건한 평갈을 가져야할 이유를 다음으로 살펴보자.(1)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은 그게 뭐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 주신"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내려 오기"(약 1:17)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위로부터 받지 않은게 뭣인가? 받은 거라면 자랑할 이유가 뭔가?(고전 5:7)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선하고 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만들어 놓는 것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우리 손으로 그것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더라? 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친절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걸 주셨더라? 하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떠한 선이든 그걸 행할 힘을 주시는 이는 그분이요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전 충족성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사를 일정한 분량에 따라 나눠 주시기 때문이다. 곧 "믿음의 분량대로"다. 영적 은사의 분량을 가리켜 믿음의 분량이라고 부르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후자는 기본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거나 우리가 행하는 선은 그것이 믿음에 기초한 것이요 믿음에서 흘러 나오는 것일 때만이 바른 것이요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다. 이제 이 믿음과 그에 따르는 다른 특별 은사는 무한한 지혜(Infinite Wisdom)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대로 분량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실 때 분량에 관계없이 받으셨지만(요 3:34) 성도들은 분량에 따라 받는다(엡 4:7). 분량에 관계없이 무한한 은사를 지니셨던 그리스도께서도 겸비하고 온유하셨는데 모자라서 안타까와하는 우리가 교만하고 우쭐댈 것인가?
(3)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셨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우리만이 성령을 독점하고 우리만이 영적 은사를 독점할 수 있는 특허권을 가졌다면 스스로 교만해 할 그럴싸한 핑계가 있는 셈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남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걸 다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덕으로 사는 성도들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common) 아버지요 그리스도는 한(common)뿌리다. 따라서 우리만 하늘의 총애를 받는 백성이요 지혜가 우리에게서 끝나는 것마냥 우리 자신을 추켜세우며 남을 멸시하는 건 잘못이다. 이것을 그는 몸의 지체를 들어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고전 12:12; 엡 4:16 에서처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4, 5절).
[1]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니 그분은 이 몸의 머리요 그들의 통일성의 중심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 되는 대로 무질서하게 나딩구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함께 짜여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한(one common) 성령에 의해서 한 머리에 연합되고 생기를 얻기 때문이다.
[2] 각각 신자는 이 몸의 지체 곧 구성원으로서 머리로부터 생명과 영을 받는 가운데 전체와 유대를 갖는다. 몸에 있어서 어떤 지체는 다른 지체에 비해 더 크고 더 유용하며 각자는 그 분량에 따라 머리로부터 영을 받을 뿐이다. 새끼 손가락에게 다리에게 필요한 영양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해괴망칙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전체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품이요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3]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4절) 각자의 위치와 업무가 할당되어 있다. 눈의 직분은 보는 것이요 손의 직분은 일하는 것……등등이다. 신비적인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러는 이런 일에 자격이 주어지고 부름을 받으며 또 더러는 저런 일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으며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연방제국에 있어서 권세자나 사역자들이나 백성은 각각의 직분을 따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의 직분 행사에 있어서 남을 간섭하고 충돌해서는 안 된다.
[4] 각 지체는 전체와 다른 각 지체의 유익과 혜택을 위해 각자의 위치와 임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 아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우리는 서로 상호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서로를 위해 최선의 유익을 끼치도록 해야 하며 서로의 공통된 혜택을 위해 힘을 합해 행동해야 한다(고전 12:14 이하에 이것이 잘 설명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업적에 속아넘어가 우쭐댈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받은 것이요 그것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대한 온건한 용법. 한편으로 우리의 가진 자질을 뽐내서도 안 되지만 또한 우리는 이것을 매장해서도 안된다. 겸손이니 자기 부정이니 하는 구실로 타인의 유익을 위해 우리 자신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게을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겠습니다" 하는 식이 아니라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은혜의 힘을 입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하는 식이어야겠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의 제도적인 직분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각자는 이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위치와 업무를 알고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맞도록 각자 임무를 다 해야 할 것이다. "받은 은사가"있으면 이걸 사용하도록 하자. 목회 업무의 권위와 능력도 하나님의 은사다. "은사가 각각 다르니," 당장의 목적은 달라도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다. "은혜대로"(car i,smata kata. th.n ca,rin),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의 원천이요 본 고장이다. 직분을 주고 사람에게 자격을 구비케하며 그럴 마음이 있게 하는 것 곧 하고저하는 의지와 행동을 주는 것은 은혜다. 초대 교회에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와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는 여기서 일상적인 은사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전 12:4; 딤전 4:14; 벧전 4:10). 일곱 가지의 개별적인 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6-8절)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의 현명한 구성원 대다수의 각각 뚜렷한 직능이었던 것 같다. 우선 예언과 섬기는 일이라는 두 가지로 이것을 대변할 수 있으니 예언은 감독의 임무요 섬기는 일은 집사의 임무로 당시 상설 직분은 이 둘뿐이었다(빌 1:1). 그러나 이들 각자의 임무는 그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 일반의 동의와 찬성에 의해 할당되고 구별되었을 것이요 그래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온갖 사람의 일은 아무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요(every body's work is nobody's work), 일인일무(a man of one business, vir unius negotii)라야 그 일이 신속히 처리되기 때문이다. 이래서 다윗도 레위인들을 따로 구별했었다(대상 23:4, 5). 지혜로운 처사였다. 따라서 나머지 다섯은 이 둘로 축소할 수 있다.
(1) "예언."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자. 이것은 앞일을 내다보는 예외적인 은사로서가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는 일상적인 직분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예언이 이런 의미로 지적된 곳은 많다(고전 9:1-3; 및 이하 11:4; 살전 5:20). 구약의 예언자들의 임무는 장차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죄와 임무를 알려 주는 것,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되생각나게 하는 인물의 역할도 했다. 이처럼 복음 전파자들은 말씀에 계시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장차 일을 예언하는 예언자라고 볼 수 있다. 말씀 전파는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인 만큼 미래의 상태를 직접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전파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kata. th.n a`nalogi,an th/j pi,stewj)하는 것이 마땅하다. 곧
[1] 우리의 예언의 태도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은혜의 분량에 일치해야 한다. 그는 이미 각자에게 나눠진 믿음의 분량이란 말을 했다(3절). 전파한 자는 그가 가진 모든 신앙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요 무엇보다도 그가 전파하는 진리를 자신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해야겠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면 잘 듣지 못하듯이 전파하는 자도 믿음이 없으면 잘 전파할 수 없다. 먼저 믿고 다음에 말하라(시 116:10; 4:13). 믿음의 분수라는 말을 살펴 보자. 이 말은 모두가 믿음을 가진 건 아니지만 우리말고도 많은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만큼 우리 말고 남들도 가르치는 지식과 능력의 몫을 차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대에게 믿음이 있는가? 그대 자신이 간직하라. 그걸로 타인을 재는 척도로 삼진 말아라. 그대가 가진 믿음은 오직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라."
[2] 우리의 예언의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교의에 따라야 한다. 곧 신 구약에 계시된 그대로여야 한다. 성경에는 일괄적으로 명백하게 가르치는 주요진리(prime axiomata)가 있는데 이것이 복음전파의 시금석이요, 이것에 따라(우리는 예언을 멸시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모든 것을 분간하여 좋은 것을 굳게 잡아야"한다(살전 5:20, 21, 새번역). 보다 애매한 진리는 보다 명백한 진리에 의해 검토를 받아야 하며 그것이 신앙의 유추에 합치하는 것으로 판단될 때만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진리가 진리를 거스려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복음 전파자들이 아주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곧 건전한 교의를 건전한 말씀의 모양에 따라 전파하는 것이다(딛 2:8; 딤후 1:13). 예언하는 일이 기교나 논리, 수사학의 규칙에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믿음의 분수에 따라야 하는 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믿음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언하는 사람이 특별히 생각해야 하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일과 권고하는 일로서 한 사람이 동시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사람이 이걸 하면 저걸 생각하고 저걸 하면 이걸 마음에 두도록 해야할 것이다. 만약에 교회 사역자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이것이 구별되어, 한 사람은 가르치고 다른 한 사람은 권고하는 일을 분담하게 된다면 각자는 믿음의 분수에 맞게 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 해야겠다. 가르치는 것은 실제 응용에 관계없이 복음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목사와 교사"는 동일 직분이지만 각자의 업무는 다르다. 가르치는 기능을 가지고 그 분양의 일을 시작한 사람은 거기에 집착하도록 해야겠다. 그것은 훌륭한 은사인만큼 그걸 사용하고 거기에 마음을 쏟도록 하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고 일에 거하도록 하라"(o dida,skwn evn th/| didaskali,a|)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일에 고정되어 열심을 다하라는 뜻이요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여 그것이 자기의 요소인 것처럼 그 속에 있으라는 뜻이다. 디모데전서 4장 15, 16절에 보면 "이 일에 머물러 있으며"(e,n tou,toij i;sqi) "이 일을 계속하라"(evpi,mene a,utoi/j)는 두 말로 구분되어 설명되어 있다.
둘째, "권면하"는 자는 "권면"에 힘써야겠다. 그 자신을 거기에 송두리째 드리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이 교사의 일이라면 이것은 목사의 일이다. 곧 복음 진리와 규칙을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에 보다 밀접하게 적용시켜 그들에게 보다 실제적인 것을 강조시켜 주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정교한 사람들이, 권면하는 일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미숙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보다 더 예리한 머리를, 후자는 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은사가 분명하게 구별된 곳에서는 이 일을 구분하는 것이 덕이 된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건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의 업무에 충실한다는 것은 그 일에 우리의 최선의 시간과 생각을 거기에 바치는 것이요 그것을 위해 모든 기회를 다 포착하는 것이요 그걸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잘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2) "섬기는 일." 사람이 "집사의 직분"(dnakonivan), 곧 목사와 교사의 보필의 임무를 받았으면 그 임무를 잘 수행해야겠다. 가령 교구위원, 장노, 빈민 감독자 같은 경우가 그것이며 초대 교회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아는 바 이상으로 이 임무를 강조했으며 신경을 썼다. 여기에는 교회의 ta, e'xw 곧 "하나님의 전 바깥 일"(느 11:16)에 관계되는 모든 직분이 다 포함된다. "식탁을 시중드는 일"(행 6:2)이란 말도 있다. 이렇게 섬기는 일이 맡겨진 자는 성실과 근면을 다해 그 일에 충실해야겠다.
[1]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교회의 구제 직분을 맡은 자들은 돈을 모아서 빈민의 필요에 따라 그걸 분배했다. 이들은 그 일을 "후하게"(evn a`plovthti) 그리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자기들이 받은 것을 자기 용도에 쓰거나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해 가며 분배해서도 안 되고 가난한 자에게 괴팍하게 굴며 그들을 옭아 매려는 목적으로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끼쳐 드리는 이외의 목적을 두지 말고 모든 정성과 성실을 다해야 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모든 구제행위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가진 자는 주되 풍성하고 후하게 주라(고후 8:2; 9:13). 하나님은 즐거이 후하게 주는 자를 사랑하신다.
[2]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아마 그는 목사들을 도와 그들의 손, 눈, 입이 되어 교회 기강을 바로잡던 자들이나 회중 가운데서 이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던 사역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자들이 다스린다는 대목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딤전 5:17). 이런 사람들은 이 일을 근면하게 해내야 할 것이다. 이 말에는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걸 발견해서 잘못가는 자들을 바로잡고 넘어진 자들을 훈계하고 계도하며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정성을 다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신뢰를 다 이행하는 데 있어서 충성스럽다는 말을 들으려면 여간 힘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될 뿐 아니라 이 일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기회든 그냥 지나치게 해서도 안 된다.
[3]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비를 베푸는 일로 본다. 자비를 베풀되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하나님은 즐거이 바치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교회의 특수 직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싶다. 곧 병든 자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다. 이런 일은 대개 교회의 일군들인 과부들이 맡아 했으니 곧 여집사들이다(딤전 5:9, 10). 물론 다른 사람들도 여집사로 임명받은 게 사실이다. 이제 이 일을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일을 맡은 자들의 즐거운 표정이야 말로 수혜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잽싸게 행동하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병들고 상처입은 자들, 일반적으로 불행한 자들을 상대로 일하는 자들을 인내할 뿐 아니라 즐거워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이 일이 더욱 즐겁고 부담없게 해주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해야겠다.
Ⅲ. 우리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임무. 이에 대한 예가 간략한 권면속에 담겨 있다. 상호간의 임무에 대한 전부가 한 마디로 요약되고 있으니 곧 "사랑"이라는 멋있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임무의 기초이기에 사도는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제복이요 우리 종교의 위대한 법률이다. "사랑엔 거짓인 없나니," 입발림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요일 3:18). 올바른 사랑은 꾸밈이 없는 사랑이요 속임수를 쓰는 원수의 키스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반가이 맞아야 한다(고후 8:8).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친구에게 신세지고 있는 사랑과, 원수에게 신세지고 있는 사랑이 있다. 그는 이 양자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우리 친구들에 대해서. 친구가 있는 자는 그 친구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들은 서로 사랑을 빚지고 있으며 이것을 갚아야 한다.(1) 정다운 사랑(10절). "형제애(filo,jorgoi)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새번역). 이것은 사랑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랑하려는 마음의 준비이니 곧 샘에서 물이 흐르듯이 더 없이 순수하고 풍성하게 흐르는 사랑이다.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니 이거야말로 더 없이 부드럽고 더 없이 자연스런 사랑이다. 억지가 없고 마지 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 상호간의 사랑도 그래야 하며 또 새로운 성품이 생겨 마음에 사랑의 법률이 기록될 때 이러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서로"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은혜를 입게 할 것이다.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듯이 남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다. 서로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물을 뿌리는 자는 자기도 물뿌림을 받게 마련이다.
(2) 존경의 사랑. "존경하기를 서로먼저하며," 서로 잘났다고 싸울 것이 아니라 앞을 다퉈가며 남에게 그 높은 자리를 물려 주도록 하자. 이것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는 말씀으로 설명되어진다. 이것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더욱 자신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은사, 은혜, 업적을 먼저 알아내서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보다 그들이 칭찬받는 것을 더 즐거워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을 "존경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앞서 가며"(th/| timh/| avllh,louj prohgou/menoi)하는 식으로 읽는 이들도 있다. 곧 존경을 받는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주는 일에 있어서 앞서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제일 먼저 남을 존경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네 형제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직분을 먼저 시행하는가 경주해 보시라. 더 없이 겸손하고 소로에게 유용하며 양보하는 정신을 네 모든 싸움의 중심으로 삼으라." 디도서 3장 14절도 마찬가지 의미다. "좋은 일에 앞서 가는 걸(proi,stasqai)배우게 하라." 우리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우리보다 더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는 걸로 내세우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핑계 삼아 그들이 다 할 것이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일과 게으름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곧 이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11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3) 풍성한 사랑(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우리 형제들의 궁핍은 실제적인 공급이 뒤따라야하고 그걸 할 능력이 우리 손에 있는데도 말로만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데서 그치면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
[1]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해 쓸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이상한 얘기가 아니다. 당시 초대 교회로 말하면 계속되는 박해 때문에 고통받는 성도들이 대부분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있다. 물론 이 세상의 것들이 최선에 것들은 아니다. 그게 최선의 것들이라면 하늘의 총아니 성도들에게 그걸 안 주실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2] 따라서 가진 자들은 이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걸 "공급"할 의무가 있다. 배고픈 자들을 보고 영혼을 꺼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지갑을 꺼내는 게 옳은 일이다(약 2:15, 16; 요일 3:17). "나누다"(koinwnou/ntej) 이 말은 우리 불쌍한 형제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그들의 궁핍에 대한 동료 의식에서 나와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베푼 사랑을 그는 자신의 고통에의 동참이라고 부르고 있다(빌 4:14). 우리는 능력과 기회가 닿는 대로 궁핍한 자들을 도와, 짐을 덜어 줘야 할 뿐 아니라 그 성도들과 동거동락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들과 같은 묻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일반적인 사랑도 사랑이지만 특별히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빚진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다(갈 6:10). "더욱 믿음의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쓸 것"(tai/j creivaij)이 아니라 그들의 "추억"(tai/jmnei,aij)을 나눠 가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한 자들을 기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추억을 값있게 하고 변호하며 향기롭게 할 빚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의로운 자들의 기억이 복되도다(잠 10:7)는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어 이 넘치는 사랑의 다른 면을 언급하고 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선을 행하러 돌아다니거나 박해 때문에 은신처를 찾아서 방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기꺼이 접대해야 한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여관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방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곳을 찾아들지 않았다. 아니 그럴 비용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부담 없이 친절하게 맞이하는 일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캐캐묵은 지난 얘기가 아니라 기회 있는 대로 손님을 접대해야한다. 우리는 나그네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하는 얘기가 자비를 얻는 자들의 자비로운 증거로 제사되어 있다. "손님접대를 추구하며"(th.n filoxnivan diwvkontej), 이 말은 우리가 자비를 보여 주는 기회를 포착할 뿐 아니라 그걸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천막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과(창 18:1) 소돔성 어귀에 앉아 있던 롯은(창 19:1) 여행자를 기다려 접대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하였다(히 13:2)
(4) 동조적인 사랑(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신비적인 몸의 지체 사이에 오가는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에는 이런 동료의식이 따르기 마련이다(고전 12:26 참조). 참된 사랑은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우리의 것으로 삼도록 가르쳐 준다. 이 세상에는 시련 때문에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은 은혜를 감사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에스라 시대처럼, 스 3:12, 13)뒤섞여 있다. 따라서 여기에 형제애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료애가 필요하다. 이 말은 죄악의 기쁨이나 탄식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정당하고 합당한 기쁨과 슬픔에만 참여하라는 것이요, 잘되는 사람을 시기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즐거워하라는 것이요, 남들의 우리가 갖지 못한 성공과 위로를 맘껏 반가워해 주라는 것이요,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도 육신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을 즉시 도와 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이니 그는 "그 종들의 형통을 기뻐하시며"(시 35:27),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신"(사 63:9)분이다.
(5) 통일된 사랑.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16절), 곧 할 수만 있으면 생각을 같이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애정을 같이 하라는 말이다. 서로 치고 받고 물고 늘어질 게 아니라 모두 하나가되어 평화의 노끈으로 성령의 통일성을 지키도록 힘쓰라는 것이다(빌 2:2; 3:15, 16; 고전 1:10). 이 대목을 네가 네 자신에게 원하는 만큼 남에게도 "동일한 유익을 원해주는 것"(go. auvto eivj avllh,louj fronou/ntej)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우리 형제를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니 우리 자신처럼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6) 공손한 사랑. "높은 것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16절, 흠정역), 참된 사랑은 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엡 4:1, 2; 빌 2:3).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형제애를 가르쳐 주시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는데(요 13:5, 14, 34) 그것은 서로 올바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제 아무리 천박한 직분의 친절이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우리에게 시사해 주시는 것이다. 사랑은 공손하게 만드는 은혜다. 즉 권세와 사랑은 서로 잘 부합하지 않기 마련이다.
[1] "높은 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 우리는 명예와 대접받는 일을 너무 욕심내서도 안 되고 이 세상의 영화와 위엄을 무리하게 과대평가해서도, 그걸 무리하게 바라서도 안 되고 거룩한 멸시를 보내야 한다. 다윗이 출세의 가도를 달릴 때 그의 영혼은 겸비하였다(시 131:1).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만국의 제왕 위에 군림하며(계 17:18) 영화의 절정기에 있던 로마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자기들이 더 잘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거룩한 씨앗에도 이러한 누룩이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걸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마치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을 업수이 여기듯이 로마 교우들도 다른 교우들을 업수이 여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사도는 종종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11:20 비교). 이들은 궁정 가까이 살았으며 그 호사로움과 위용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하고 그는 말한다."그걸 마음에 두지 말라. 거기에 빠지지 말라"고.
[2]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라"(???????????????????????????????)
첫?, "낮은 사람들에게"라는 말을 우리는 "천한 것들"로 보고 거기에 공손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 가련하고 천해도, 우리의 쾌락이 거칠어지고 줄어들어도, 우리의 직업이 천하고 멸시를 받아도 우리는 여기에 마음을 두고 여기에 자족할 수 있어야겠다. 그래서 난외에는 "천한 것들로 만족하라"는 게 삽입되어 있다. 그게 어느 자리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놓아 두신 그 곳에 만족하도록 하자. 우리는 죄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든 달갑게 여길 줄 알아야겠다. 그게 우리의 몫이라면 천박한 습관에 머리를 굽힐 줄도 알고 가련한 생활에 자족할 줄도 알며 허름한 옷도 걸칠 줄 알며 불편한 숙식도 참아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옛 타락한 성품이 높은 데로 올라갈 때 우리의 새로운 성품의 힘에 휩쓸려 낮은 데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천한 데도 자족할 수 있어야겠다. 우리는 높은 데보다 낮고 천한 것을 우리의 바램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이제 우리는 앞서 번역한 대로 이것을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라"는 쪽으로 의미를 돌려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천하고 낮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들과 어울려 같이 지내야 한다. 다윗은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런 자들을 친구로 삼아 지냈다(시 119:63).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도 이런 자들을 찾아 천상천하를 마다 않으시고 찾아 오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이들과 지내는 걸 수치로 여기겠는가. 참된 사랑은 누더기나 진홍색 예복을 기리지 않는 데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진주는 그게 수렁에 딩굴어도 진주인 것이다. 이 공손에 위배되는 걸 성경은 꾸중하고 있다(약 2:1-4). "공손하라." 곧 그들의 유익을 위해 네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라. 바울이 그러했다(고전 9:19).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여행자들의 용어라고 한다. 곧 발이 빠르고 튼튼한 사람들이 앞서 가다가도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을 생각해서 발검음을 멈추고 그들과 보조를 맞춘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여행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을 더욱 고무하기 위해 그는 곧 이어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3절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 속에 속임수가 있는 한 우리는 남에게 공손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따르고 있다. "네 혼자 지혜롭지 말아라"(Mh. gi,nesqe fro,n imoi parV e.autoi/j). 네 자신의 지혜면 충분한 걸로 생각하고 남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이 네게 필요 없는 걸로 여기지 말라(잠 3:7). "네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눠 갖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우리는 서로 지체로서 서로 의지하고 있으므로 네 혼자 지혜롭지 말아라. 네가 가진 지혜라는 상품은 서로 주고 받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7)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랑(18절). 지위나 직업의 거리 때문에 친밀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서로 해를 끼치지 말고 불쾌감을 주지 말며 다툼거리를 주거나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그게 깨지면 꿰매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롭다. 이 권고가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보라.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네 힘 닿는데 까지)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네 힘 닿는데까지 "화평을 쫓으라"(히 12:14). "힘써 지키라"(엡 4:3). "할 수 있거든" 평화롭게 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하라. "할 수 있거든." 우리가 하나님과 양심을 거스리지 않고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는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Id possumus quod jure possumus 즉 비난을 사지 않고 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롭다(약 3:17). 순결이 없는 평화는 악마의 궁정의 평화다. "너희로서는"(네 힘이 닿는 데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입장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처럼 불가피하게 "다툼의 사람"(렘 15:10)으로 휘말려 들어 욕먹는 건 할 수 없다. 우리로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우리편에 결점만 없도록 하면 그만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2. 우리 원수들에 대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었으므로 이들은 이제 서로 원수가 되기 쉽다. 사랑의 중심부가 일단 탈취되고 나면 그에 따른 전선(戰線)은 좌충우돌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도 신앙인들은 그 웃음이 결코 그리스도의 미소와 일치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많은 원수를 만나게 마련이다. 이제 이 마당에서 기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원수에 대한 행동 강령은 승리와 지배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준칙과 방법과는 시종일관 그 양상을 달리 하는 것으로 오직 내면적인 평화와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못되길 빌고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며대는 우리의 원수가 누구이든 우리의 준칙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유익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다.
(1) 그들을 해롭히지 말 것(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이것은 야만적인 보복으로 위로부터의 일이나 자기 앞서 벌어진 일을 의식하지 못하는 짐승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혹자의 생각대로, 악한 상태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보복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그분은 그의 원수들을 위해 모든 걸 아끼지 않으신 분이요(마 5:45) 더욱이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그분은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모든 걸 아끼지 않으셨으며(5:8, 10 절).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를 증오하는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신 분이다. "아무에게도, 곧 유대인에게나 헬라인 어느 누구에게도," 그대 친구였던 자에게 그러지 말 것은 악으로 갚으므로 분명히 그를 잃고 말기 때문이요, 그대 원수였던 자에게 그러지 말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므로 혹시 그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의미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19절)는 말이 뒤따르고 있다. 왜 본장의 다른 권고와는 달리 이 대목에 와서는 누그러진 태도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나오는가? 그것은 분명히 화가 나는 것을 분개한 나머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심정을 진정시키려는 뜻에서다. 그들을 누그러뜨리려는 생각에서다. 그 어느 것이든 사랑이 풍기는 것은 붉은 피를 맑게 하며 폭풍을 가라 앉히며 난폭한 열기를 식히고 만다. 마음 상한 형제와 화해하려는 생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여, 하고 시작하시라. 이러한 온화한 말씨가 분노를 돌이키는데 주효할 수도 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라." 누가 네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그에게 똑같은 해나 불편을 돌려 주려고 생각도 말고 힘쓰지 말라. 권세자가 범법자를 처벌하므로 그 범법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나 범법자에게 올바르고 정당한 법을 적용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분노나 악의에서 나오는 이 개별적 복수는 금지되어 있다. 그것이 또 마땅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정당방위를 하다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권세자가 공공의 질서와 평화 유지라는 관심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이나 분노로 일처리를 한다면 이러한 처사도, 그게 제아무리 정당해 보일 망정, 이러한 금지된 개인적 보복이라는 죄목에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법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라(마 5:38-40). 우리 스스로 보복하는 걸 금할 뿐 아니라 법률이 허용하는 것이라도 보복적인 색채가 있는 판단은 바라지도 말고 목마르게 기다리지도 말도록 못박고 있다. 그야말로 타락한 성품으로서는 힘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다음 몇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1] 이것에 대한 치유책.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것은 우리의 분노에 맡기라는 뜻이 아니라 악마에게 맡기라는 뜻이다(엡 4:26, 27).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을 저지하고 죽이며 숨통을 틀어 막고 억눌러야 한다.
첫째, 우리 원수의 진노에 맡기는 걸로 보자. "원수의 진노에 자리를 물려 주라. 곧 굴복하는 정신을 기르라. 분노를 분노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으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전 10:4). 공격과 상처를 마치 양털 뭉치가 돌팔매 맞듯이 받거라. 돌이 날아오면 물러 서되 되받아 튕기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않는 양털처럼." 우리 구주의 처방을 들어 보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한 번 당한 걸 어떻게 갚을 길이 없나하고 속썩이지 말고 또 한 번 당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얘기다. 일단 어떤 사람의 감정이 치솟아 있고 그 물결이 세차면 그걸 잘못 건드려 더 광포하고 부풀게 하느니 보다는 그냥 화풀이를 다 하게 내버려 두라. 남들이 화를 내면 잠잠히 있는 것이 복수 않는 길이요 올바른 처사다.
둘째,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이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그에게 심판의 보좌에 앉아 네 원수를 상대하시게 하거라."
[2] 이에 대한 이유.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신 32:35). 하나님은 주권적 왕이시오 올바른 심판이시니 공의 문제는 그분에게 달린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 앞에서 모든 행동이 정확한 저울 눈금에 의해서 측정되며 무한한 순결의 하나님이 시기에 그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악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에 일부 권력을 그는 인간 권세자들에게 맡기셨다(창 9:6; 롬 13:4).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하므로 그를 예배하고 따라서 그들의 법적인 처벌은 하나님의 처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보복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첫째, 우리는 그 일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의 일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어 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의 일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어 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 일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분에게 맡겨 두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앙갚음을 해 오실 것이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은 당신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시 38:14, 15).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는 데 우리가 들을 필요가 뭔가?
(2)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해쳐서도 안 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게 우리의 신앙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기독교 특유의 계명이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것이다. 이제 이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1] 말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하나님의 백성은 권력과 독설의 박해를 늘상 받아 왔다. 그러나 그렇게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라는 것이다. 그들을 "축복하라." 첫째, "그들을 칭찬하라. 그들에게 칭찬할 만한 점이나 장점이 있으면 그걸 들춰 얘기해 주라." 둘째, "그들의 위치에 따라 존경의 말씨를 사용할 것이지 욕설을 욕설로 독설을 독설로 대꾸하지 말라." 셋째, 우리는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은 아예 말고 복을 빌어 줘야 한다. 그리고 넷째, 우리는 이 복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 손으로 뭘 해 줄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선의를 증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걸 우리에게 준칙으로 주셨을 뿐 아니라 이걸 뒷받침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말은 모든 면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선의를 보이라는 말이다. 곧 "기도할 때는 그들을 축복하고 다른 때는 저주하라"는 게 아니라 "항상 그들을 축복하고 언제고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축복을 받는 게 행복인 자들의 입에 저주란 어울리지 않는다.
[2] 행동으로(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능력과 기회가 닿는 대로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풀며 그의 유익을 가져 오도록 모든 사랑의 봉사를 아끼지 말라. 네 원수였다 해서 그만큼 소극적일 게 아니라 더욱 더 분발하라. 그래야 그걸로 네가 그를 정말 용서해줬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크랜머(Cranmer) 대주교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가 되려면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이것은 잠언 25장 21,2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걸 보면 구약도 이러한 진리에 있어서 동떨어지게 생소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우리는 원수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가 배고파하거든, 그를 모욕하는 나머지, 이 제사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 주시고 그에게 앙갚음을 해 주시는구나, 하고 좋아하지 말라. 그의 궁핍을 두고 이런 식으로 뻐기지 말라. 대신 먹이라. 그가 네 도움을 필요로 하고 넌 그를 굶겨 죽이고 짓밟을 수 있을 그런 때 그를 먹이라(yw,mize au,to,n) - 그를 실컷 먹이라. 아니 조심스레 실컷 먹이라. 잘게 쪼개서 먹이라(trustulatimpasce). 우리가 마치 정성을 다해 환자나 어린 아이를 멋이듯 먹이라. 네 사랑을 표현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화해와 우정의 표시로서 마시우라(po,tize au,go,n). 그렇게 해서 그에 대한 너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라." "다음으로" 왜 우리는 이걸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본다. "네 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곧 너는 다음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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