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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바울의 동족에 대한 슬픔(로마서 9:1-5)

여기에 유대민족에 대한 바울의 엄숙한 고백이 있으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원수요 구원의 길밖에 서 있다는 점을 못내 가슴 아파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큰 근심이 있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이러한 고백은 그가 그들의 배척을 이론적으로 내세우는 데서 얻을 수도 있는 비난을 씻기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다. 너무 거칠어 보이고 불쾌하게 들리는 진리는 완화해서 얘기하는 게 현명하다. 못을 박을 때는 기름을 바르면 더 잘 들어 가는 법이다.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어느 사도보다도 바울에 대해서 악감정이 컸다. 따라서 이들이 바울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온정어린 투로 얘기를 꺼내고 있다. 배척받은 유대인들을 두고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재앙을 두고 기뻐하지도 않는 그다. 에레미야도 당시 유대인에게 닥쳐오는 재앙을 두고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렘 17:16).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이걸 바라지 않았기에 극구 부정하고 있다. 이게 자신의 모습으로 오해되어 저들의 우스개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Ⅰ. 그는 이것을 엄숙하게 항의하고 있다(1절).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나는 이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거짓말하지 않는 자녀로서, 엄살부릴 줄 모르는 자로서 말한다"는 식이다. 아니면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마음을 살피시는 그리스도에게 호소하노라" 하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또 수천의 증인 대신에 자신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려는 것은 큼직하고 묵직한 것이었지만(하찮은 걸 두고 그렇게 항의할 필요가 뭔가) 그러나 그것은 비밀과 같은 것이니 하나님과 자기 양심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낌새도 챌 수 없는 마음 속의 슬픔이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2절). 무엇에 대한 근심인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유대인의 배척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Ⅱ. 그는 이 고백을 동족 유대민족에 대한 애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저주로 뒷받침하고 있다. "원하는 바로다." 그는 "나는 바란다"(I do wish)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고 "나는……했기를 바란다"(I could wish)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건 여기서 그렇게 말할 개제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내 자신이 내 형제를 위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동족에 대한 더 없이 큰 열정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어떠한 비참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다. 사랑은 이처럼 모험적이요 용감하며 자기부정적이기 쉽다. 많은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은 한 사람의 복지와 행복보다 많은 쪽에 우선해야 하므로 바울은 그게 가능하다면, 그들의 행복을 사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서 있는 것이다.

1. 그는 산 자의 땅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끊어져도 만족하겠다는 투다. 그들은 그의 피를 목말라했으며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흉칙한 사람으로 당 세대의 저주와 역병처럼 박해했었다(고전 4:13; 행 22:22). "자," 하고 바울은 말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 너희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 이상이라도 좋다. 날 실컷 악용해 보라, 원하는 대로 욕하고 후들겨 보라, 너희들의 불신앙과 배척이야 말로 내가 이 몸에 당하는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내 마음에 안겨 주고 있으니 차라리 너희들이 배척받는 것보다는 이걸 참겠으며 더 바라겠노라."

2. 그는 신자들의 사회에서 파문되어도, 교회에서 쫓겨나고 성도들과의 교제가 끊겨 이방인이나 세리취급을 받아도 그게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만족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성도들 가운데서 기억되지 않고, 그의 이름이 교회기록에서 삭제되었으면 좋았겠다는 투다. 교회의 위대한 번식자요 수 천 수 만의 영적 아버지인 그가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교회의 저버림을 받아 더 이상 교제를 하지 않아도 자기로서는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혹시 유대인들 가운데 바울 때문에 기독교에 편견을 가진 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 대한 앙심이 어찌나 컸던지 이들은 그가 속해 있는 종교마저도 싫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이게 너희들에게 거리낀다면 나로서는 내가 쫓겨나서 그리스도인 취급을 안 받아도 너희들만 들어 온다면 한이 없겠다"고. 모세도 마찬가지였다(출 32:32).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소서."

3. 아니, 더 나아가 그는 그게 그들의 구원의 방편이 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행복의 몫에서 인연이 끊겨도 만족하겠다는 식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흔히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보다 더 높고 귀하고 후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Ⅲ. 이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 이유.

1. 친척 관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저들은 그에게 몹쓰게 굴며 기회 닿는 대로 더할 수 없이 야박한 횡포를 퍼부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을 이렇게 존중하는 투로 말하고 있다. 이 용서하는 영의 인간이라는 증거다.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다"(행 28:19). "내 친척"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 우리도 우리 친척, 형제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과 우리는 보다 특별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에게 유익한 일을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지며, 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쓰임새가 있어야겠다.

2.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4, 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곧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그의 선택받은 자 야곱의 후손이며 특별한 언약 관계에 들어 있으며 가견적 교회의 여러 특권으로 위엄과 탁월성이 과시된 이들이다. 이들의 특권을 살펴 보자.

(1) "입양." 이 경우의 입양은 구원에 이르고 영생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이요 모형적인 것으로 가나안 복지에의 자격을 주는 입양이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출 4:22).

(2) "영광." 속죄소가 함께 있는 법궤로서 그 위에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거느리고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삼상 4:21). 신의 임재와 인도에 대한 많은 상징과 표, 구름과 세키나(엄위) 그밖에 특유한 은총, 이 모든 것이 이들에게 영광이었다.

(3) "언약들."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어지고 그의 후손과 여러 기회에 갱신된 언약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이요(출 24), 모압 평야에서의 언약이요(신 29), 세겜에서의 언약이요(수 24), 그 후로도 여러 번 맺어진 언약이니 이 모든 게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이었다. 이것은 특수 언약이었으니 모형상으로는 은혜 언약이라고도 볼 수 있다.

(4) "율법을 세우신 것." 의식적인 율법과 사법적인 율법 및 도덕적 율법이 기록상으로 모두 그들에게 속해 있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상으로 모두 그들에게 속해 있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건 크나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시 147:19, 20). 이것은 이스라엘의 위용이었다(신 4:7, 8).

(5) "예배."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규례가 있었으니 성전, 제단, 제사장, 제물, 절기 및 이에 관계된 기구 등이다. 다른 민족들은 바위나 돌 악마, 알지도 못하는 자신들의 고안물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당신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대로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크게 영광을 받고 있다.

(6) "약속들." 일반 언약에 덧붙여 메시야와 복음에 관한 약속들이 이들에게 주어졌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약속에는 율법을 세우심과 하나님 예배가 따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의 의도는 이 율법에의 순종과 그 예배에의 의존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7)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5절). 하나님에게 크게 애호받던 저 유명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이들의 자손이요 또 그런 만큼 이들은 이걸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다." 이들이 언약에 들어서게 된 것은 조상 덕분이다(11:28).

(8)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이다(히 2:16). 그의 신성으로 말하면 그는 하늘에서 오신 여호와요 인성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이 점 곧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친척이라는 점이 유대인들에게는 위대한 특권이었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그는 아주 위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곧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하는 말이다. 그가 자기들 친척이라 해서 유대인들이 그를 천하게 여기지 말라는 뜻에서 그는 이처럼 존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아주 충분한 증거이니 그는 중보자로서 만물 위에 계실 뿐 아니라 만세에 걸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저버린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큰 아픔을 당해야 마땅하겠는가! 만세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는데 그것도 유대인이 되셨다는 점은 유대인의 위대한 영광이 아닐 수 없으며 바울이 이들에게 친절을 보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그러나 당시 그 백성의 태도와 성격을 생각하면 그가 그처럼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9:2 없음.

 

9:3 없음.

 

9:4 없음.

 

9:5 없음.

 

9:6

신의 주권(1)(로마서 9:6-13)

사도는 자기 동족에 대한 배척을 두고 말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이들의 특권을 얘기하고 나서 복음 시대의 확정으로 인해 야기된 유대인 배척이 그 조상들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결코 무효화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이 대목 이하에서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절). 유대인의 현 상태를 두고 생각하는 바울에게 "큰 관심과 고통"(2절)을 안겨 준 걸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건 그 무용론을 주장해선 안된다. 그가 일단 말씀하신 것은 그 어느 것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사 55:10, 11). 약속과 위협은 각각 그대로 성취될 것이요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는 율법을 높이시며 그것을 존귀케 하실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서 이 점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 약속은 흔들리는 신앙으로 볼 때는 의심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용하게 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에 가서는 진실을 말하게 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들어날 것이다. 이제 남은 난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 말씀으로 말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것을 그는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이 약속의 참 의미와 의도에 대한 설명(6-13절).

2. 인간을 상대로 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입증(14-24절).

3. 구약에 예언된 유대인 배척과 이방인 영접(25-29절).

4. 유대인 배척의 진정한 이유(30-33절).

이 항목에서는 약속의 참 의미와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말씀을 잘못 보고 그 약속을 오해한다면 그 성취 여부를 놓고 하나님과 다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의미를 우선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면 무조건 필연적으로 따르는 식으로 육신의 모든 후손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제한된 몇몇을 두고 말씀하신 점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은 이사가에게는 통용이 되었지만 이스마엘에게는 달랐으며 야곱에게는 통용이 되었지만 에서에게도 달랐다. 그러나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하게 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동일한 약속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는 유대인에게는 통용되고 있으니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은 그 수가 얼마이건 내팽개치고 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약속이 패하고 폐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이나 에서의 모형적인 배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다.

Ⅰ. 그는 이 전제 조건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6절)……(7절). 아브라함과 야곱의 허리에서 태어난 자들, 이스라엘의 이름을 본따 이름 지워진 자들의 숫자가 많았지만 그러나 참으로 이스라엘인이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으니 이 새 언약의 구원 혜택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이름과 주장만으로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일 수는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꼭 하나님의 자녀라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건만 이들은 그 따위 환상에 젖어 있었으니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그렇게도 뽐내고 거기에 모래집을 건축했던 것이다(마 3:9; 요 8:38, 39). 어림없는 얘기다. 은혜는 피에 섞여 흐르는게 아니요 구원의 혜택은 외면적인 교회의 특권에 불가분의 혈연관계를 지닌 게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놓고 확대해석하는 것이요 헛된 망상에 들뜬 나머지 소란을 피우는 것뿐이다.

Ⅱ. 그는 이것을 예를 들어가며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선택받은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는 점뿐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뜻에 따라 일하고 계신다는 점이 분명히 들어나 있다. 이 선택은 현재 멀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서먹서먹하게 결합되어 있는 율법의 계명과는 무관한 것이다.

1. 그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양자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이삭만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 이스마엘은 배척을 받아 쫓겨 났다. 이것을 위해 그는 창세기 22장 12절의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왜 아브라함이 여자 노예와 그 자식을 내 쫓아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곧 그 언약이 이삭을 상대로 맺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17: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땅에 떨어진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큰 약속에 담겨진 축복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하신 것이요 누구의 머리에 그게 떨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요 그게 이삭에게는 들어맞고 이스마엘은 내쫓김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저 하는 바를 보여 주는 것이다.

(1) 육신으로 아브라함과 관계가 있다 해서 그 육신의 자녀가 꼭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스마엘도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불신 유대인들에게 따끔하게 들릴 수밖에 없으니 이들은 육신으로 자기들이 가진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뽐내며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육적인 방도, 곧 육신적인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육신을 믿고 있었다(빌 3:3). 이스마엘로 말하면 육신의 자식, 곧 하갈의 자식이었으니 하갈은 젊고 싱싱해서 얼마든지 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스마엘의 잉태, 거기엔 이삭의 경우처럼 뭐 특별하거나 초월적인 게 하나도 없었으니 그는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요(갈 4:29), 자신의 힘과 의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겠다는 모든 자들의 대표자다.

(2)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점. 후손 취급을 받는 자들은 자기들의 공로나 행적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된 은총을 주시기로 기꺼이 베푸신 약속 때문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이었으니 그는 이 점을 9절에서 창세기 18장 10절을 인용하여 입증하고 있다. 그는 약속된 자녀요(많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의 잉태와 탄생이 모두 이 약속 때문이니 지금 후손으로 취급받는 자들, 곧 육신의 뜻이나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태어난 참신자들, 곧 새로운 마음의 약속에 따르고 약속의 말씀에 따르는 섞어지지 아니할 후손을 잘 예시하는 모형이다(갈 4:28). 이삭이 잉태된 것은 믿음을 통해서였다(히 11:11). 구약시대에는 구원의 신비가 모두 이런 식으로 가르쳐져 왔으니 곧 그때는 명확한 표현이 아니라 상징적인 모형을 통해 교육되었다. 물론 이것들이 그들에게 장막이 걷혀지고 모형이 원형에 의해 가르쳐지는 오늘날 만큼 명백할 리는 없었다.

2. 야곱과 에서의 경우(10-13절). 이 두 경우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은 이 약속에 관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그렇게 정해 놓은 자들만이 여기에 관계가 있다는 점을 더욱 강력하게 보여 준다. 이스마엘이 쫓겨나기 전에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는 이미 차이가 있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스마엘은 여자 노예의 자식이었으며 성격이 난폭하고 이삭을 모욕하고 박해했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켜 그를 쫓아 내실 때 이 모든 점을 감안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둘 중에 어느 하나도 다르지 않고 둘 다 다르지도 않았으니 이 둘은 한 어머니에 의해서 태어난 이삭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한 번의 임신으로"(e`x e.no.j koi,tou) 태어난 자들이다. 그 차이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들이 선악을 행하기 전에 신의 경륜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이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실 때 둘이는 어머니의 태에서 똑같이 버둥거리고 있었으니 이것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서게 하려"는 뜻에서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어떤 자는 택하기도 하시고 어떤 자는 버리기도 하시며 절대적이요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은총을 베풀기도 하시고 이것을 보류하기도 하신다는 위대한 진리가 확립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이 야곱과 에서의 차이점을 그는 말라기 1장 2,3절을 인용해 가며 더 설명해 가고 있는데 거기에는 개인 야곱과 개인 에서를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을 두고 말하고 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특유한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 가나안의 땅이 주어졌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보급해 주며 구원해 주시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자주 상징적으로 들어내 보이셨는가 하면 에돔 족속은 배척을 받았으니 그들에게는 성전도, 제단도, 제사장도, 예언자도 없었다. 특별한 친절과 보호가 이들에게는 없었다. 맨 처음 두 민족의 우두머리로서의 야곱과 에서에게 차이가 있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허리에서 태어난 두 족속들에게 이러한 차이를 두셨다. 그 결과 이 선택과 배척은 모두 모형적인 것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선택과 배척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1) 어떤 이들은 이것을 조건, 또는 특성의 선택과 배척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야곱은 선택하시고 이스마엘과 에서는 배척하셨듯이 그는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시고 율법의 행위는 배척하셨다는 것이다. 아미니우스도 마찬가지로 이해한다. De rejects etassumptis talbbus certa qualitate notatis - 즉 배척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는 특성에 따라 구별지어진다. 존 굿윗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억지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첫째 시종일관 사람을 두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비를 베풀려는 자(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또한 14, 19절의 반론은 이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둘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두고 말한 대답은 그것이 구원의 조건을 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원전부터의 특별한 개인에 대한 선택과 배척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야곱과 에서를 말할 때 그 개인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조상으로서 말한 것이니 민족으로서의 야곱, 민족으로서의 에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공로를 생각지 않고 그저 그가 저주하고 싶어서 이들을 저주하거나 저주하기로 정하신 것도 아니다.

(3)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민족의 선택과 배척이 복합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의 의도는 이방인을 교회로 불러 들여 자신과 언약을 맺고 유대인들은 고집을 부려 계속 불신앙 가운데 머물어 비(非)교회화 하는 가운데 그들의 평화에 관한 것을 그들의 눈에서 숨기심으로 하나님과 그의 자비 및 진리를 정당화하려는 데 있다. 사도의 설명의 추론과 그 입증은 특별한 개인데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명확히 하는 데 적합할 뿐 아니라 사실상 그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다. 구원케 하는 혜택의 전달은 교회 특권의 전달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동생 야곱을 택하여 형에서보다 더 우대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타고난 후손이요 교회의 맏형이긴 하지만 이들은 제쳐 놓고 동생격인 이방인들이 대신 그 자리에 들어 서서 장자권과 축복을 누려야 하는 게 마땅하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유대 민족은 한 정치기구로서 의식 율법, 한 성전, 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가운데 수 세기 동안 하늘의 총아요 제사장의 왕국, 거룩한 민족이었으며 하나님의 기적적인 임재로 위엄과 위용을 갖춘 탁월한 민족이었다. 이제 복음이 전파되고 기독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이 민족적 기구는 제쳐지고 그들의 교회 기구도 폐쇄되었으며 기독 교회가(기독화한 민족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신의 은총과 이 은총의 결과인 특권과 보호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위대한 복음의 세대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공의를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의 사도의 의도다.

 

9:7 없음.

 

9:8 없음.

 

9:9 없음.

 

9:10 없음.

 

9:11 없음.

 

9:12 없음.

 

9:13 없음.

 

9:14

신의 주권(2)(로마서 9:14-24)

사도는 지금까지 약속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두고 그들에게 행사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창하고 입증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을 당신의 계시된 율법이나 언약대로 상주시고 벌하시는 감독자나 통치자로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영원하고 은밀한 뜻과 경륜에 따라 베푸시는 은혜와 은총의 소유주이자 시혜자로서 생각할 것이다. 가견적 교회의 회원자격과 특권의 은총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거절되었는가 하면 유효적인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거절되고 있다. 이 항목의 강론은 두 반론에 대한 대답이다.

Ⅰ.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는 반론이 우선 있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똑같은 인간을 두고 다루시면서 독단적으로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사람은 배척한다면 그에게 불의가 있다고도 의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하고 소스라치며 놀라는 게 사도의 대답이다. 턱 없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온 지상의 심판관께서 의롭게 하시지 않을 리가 있는가?(창 18:25; 3:5, 6) 그는 이 입장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입증하고 있다.

1. 그가 자비를 베푸는 자들의 경우(15, 16절). "나는 은혜를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출 33:19) 하는 말씀을 인용하므로 그는 그의 은총을 행사하시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이유는 모든 하나님 자신의 문제다. 모든 인간이 하나같이 죄악의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똑같이 죄책과 진노 아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행사하시는 방향에서 어떤 자들을 이 타락하고 배덕한 상태에서 건져내어 은혜와 영광의 그릇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은총을 주시고 그에 대한 이유는 제시하시지 않는다. 당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어떤 이들은 택하여 자비와 은혜, 예방적인 은혜와 유효적인 은혜의 기념비적인 존재로 삼으시고 또 어떤 이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표현이 아주 강경하며 반복이 또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의지의 완전 절대성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할 뿐이요 설명이 필요치 않으며 설명을 하는 것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출 3:14) 하는 위대한 말씀이 당신의 존재의 절대 독자성을 표현하듯이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하는 말씀은 당신의 의지의 절대적인 대권과 주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자비를 베풀고 싶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들어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기 위해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과 자유를 시사하는 가운데 친히 말씀하신 거기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혼자만으로도 유능한 심판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결심하신 바는 그 무엇이나 공의로운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나는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겠다"('VEleh,sw o[n a[n e`lew/). 시작하면 끝장을 낸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거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요, 그의 은총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하는 말씀이 따른다(16절).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선이 인간에게 오든 그것에 대한 영광은 인간의 최고 바램이나 최고 근면한 노력에 돌릴 게 아니라 오로지 그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자유 은혜와 자비에 돌려야 마땅하다.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 할텐데 하는 리브가의 간절한 소망이나 뜻에 따른 것도 그 축복을 받으려고 성급하게 달려간 야곱의 달음박질에(그는 그것을 받으러 달려 갈 수밖에 없었다) 따른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따른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성결하고 행복한 백성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들을 다르게 하는 장본인이 하나님과 그 은혜라는 점이다. 바울이 이 일반적인 법칙을 자기 앞에 문제로 등장한 특별한 경우, 곧 어떻게 무자격하고 무가치한 이방인들은 부름을 받아 교회에 접붙임을 받고 유대인들 대부분은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게 내버려 두셨는가 하는 그 이유에 적용하는 것은 저 이방인들이 어디가 잘 났거나 그런 은총을 특별히 더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이 차이점을 두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때문이다. 이방인들로 말하면 그걸 바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걸 바랄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그걸 보고 달려가는 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마 4:16)이었다. 흑암 가운데 있는 만큼 그들은 자기들이 아직도 못하는 것을 바랄 수도 없었다. 흑암 중에 "앉아 있다"는 얘기는 현 상태에 만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요, 그걸 향해 달려 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모두 이런 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찾지도 않는 자에게서 발견되어지며(사 55:1) 이경우의 예방적이요, 유효적이며 구분하는 은혜에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은혜를 공급하는 시혜자로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선하시다 해서 우리의 눈은 씰룩해질 것이 아니요 우리나 다른 사람이 누리는 모든 은혜에 있어서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115:1).

2. 멸망하는 자들의 경우(17절). 죄인의 멸망에 있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의 예가 바로에게서 나타나고 있다(출 9:16 인용).

(1) 하나님께서 바로를 상대로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그를 키우시고 출세케 하셨으며 유명하게 하셔서 왕권을 맡기셨다. 곧 산마루의 봉화로 그의 모든 재앙의 표적으로 삼으신 것이다(출 9:14). 그러나 그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겠노라"(출 4:21)고 하신 그대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니 누그러지게 하는 은혜를 보류하시고 혼자 내버려 두는 가운데 사탄을 그에게 풀어 놓아 강퍅케 하는 섭리만이 그의 두를 좇게 한 것이다. 아니면 그를 키우셨다는 말은 재앙의 휴지 곧 그 동안에는 바로가 쉼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다. 히브리서에 보면 "내가 너로 서게 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산 자의 땅에 계속 머물러 있게 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길러서 악의 날에 제물이 되게 하시는 것이니(잠 16:4) 자비를 주시면서 외적인 번영과 외적인 특권 가운데 키우시는 것이었다(마 11:23).

(2)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도.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상대로 삿대질을 하며 대들던 자요 의롭고 거룩한 것은 모조리 짓밟아 뭉개던 저 용감하고 위대한 독재자의 교만과 오만을 꺾으므로 당신의 능력을 들어 내 보이시고 당신의 이름을 존귀케 하셨다. 만일 바로가 그처럼 높아지지 않고 위력이 당당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오만불손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멸망시켜 봤자 그의 능력이 그렇게 실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행패를 부리며 모든 것을 다 앗아간 위대한 왕이기에 그 보좌의 탈취는 그만큼 하나님을 그 거룩에 있어서 영광스럽게 하고, 그 찬양에 있어서 위엄이 있으며 기사를 베푸시는 게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출 15:11). 이것이 바로요 그의 수많은 무리들의 꼬락서니다.

(3) 이 두 가지에 대한 결론(18절). "그런 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니라." 이 사람들과 저 사람들을 차별하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처사는 그의 절대주권이라는 면에서만 해명이 가능하다. 그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으며 그의 은혜는 자기 것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그걸 줄 수도 보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아니 우리는 마땅하다는 듯이 그것에 대해 수 천 배의 방어진만 쳤던 자들이다. 바로 여기의 우리 구원의 역사가 아주 질서정연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고 멸망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에게만 그 탓을 돌려야하는 것이다(호 13:9).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어 놓으셨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언약과 약속과 계시된 의지에 따라 기꺼이 스스로를 얽매는 경우도 어느 누구의 억지에 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계시된 뜻이란 그리스도에게 오는 자들은 내쫓지 않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이요 이렇게 오도록 영혼을 이끄시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기꺼이 주시는 예방적이요 구별케 하는 은총이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는가? 그것이 본인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신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강퍅케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누그러뜨리는 은혜를 거절하시고 그들이 선택한 고질적인 불신앙에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 성경 말씀이야 말로 바로 우리의 문제를 아주 잘 설명하는 것이니(눅 10:21) 곧 은혜의 수단과 이 수단에 미치는 유효적 축복을 주시거나 보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잘 증명한다.

Ⅱ.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고(19절) 반문할 수도 있다. 만일 사도가 구원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정하시고 명하시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만 가지고 지금까지 얘기했더라면 이러한 반대는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단 제시된 구원의 조건에 응하지 않을 때 그 때 가서 잘잘못을 가린다면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이 그만큼 위대한 것이기에 그 조건도 그만큼 어렵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다 인정하고 들 것이다. 그러나 구별케 하고 예방적인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보류하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두고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이 반론은 곧 이어 은혜의 구별에 그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는 유효적 은혜를 주시고 또 어떤 자들에게는 거절한다면 그걸 거절하는 자들에게 잘못을 물을 까닭이 뭔가? 그가 유대인들을 배척하시고 그들의 눈에서 평화에 관한 일을 감추셨다면 왜 그들의 눈멈이 그들의 잘못이라 는 건가? 이들을 백성 아닌 자로, 자비를 얻기에 부적한 자로 내팽개치셨다면 그들 스스로 곤두박질하는 건 그의 뜻을 거역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 반론에 대한 대답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

1. 반대자를 꾸중하므로(20절). "아 이 사람아,"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인간이 하나님에게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는 투다. 이 진리는 바로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니 그 이하로 낮추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유의 주의 주권의 자리에 높여 받드는 것이다. 인간이 그의 조물주 하나님을 상대로 다투려 할 때 그의 경멸적인 표현을 잘 들어 보자 : "네가 뉘기에, 그렇게도 신의 경륜을 볼 줄 모르는 무자격 심판이여, 네가 감히 그렇게 깊은 데를 헤아릴 수 있으며 그렇게 심오한 것을 가지고 논란 할 수 있으며 바다에 있는 그 길과 깊은 물에 잠긴 그의 길을 추적할 수 있겠는가?"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하나님에게 반항을 하지 말고 복종하는 것이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그가 어리석다고 비난하지 않고 그의 손 아래 엎드리는 것이 우리의 현명한 처사다. "힐문하는"의 원 뜻은 "말 대꾸하는"('VO avntapakrino,menoj)이다. 하나님은 우리의주 인이요 우리는 그의 종들이다. 종들이 말대꾸질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딛 2:9).

2. 모든 것을 신의 주권으로 해명하므로. 우리는 만들어지는 물건이요 그는 만드는 주체다. 따라서 우리를 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만들었느냐고 도전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아무런 형태도 갖추기 이전의 물질은 이런 저런 모양에 권리가 없으며 그걸 만드는 자의 뜻대로 모양이 갖춰질 뿐이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주권이 토기장이가 흙을 주무르는 힘에 비교되고 있다(렘 18:6). 거기에 보면 마찬가지로 그가 느브갓네살을 시켜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므로 그의 공의를 들어내시면서 유대 민족에 대한 당신의 통치를 주장하고 있다.

(1) 비교(21절). 토기장이는 동일한 흙덩어리에서 아름답고 귀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천하고 볼품없는 그릇을 만들기도 한다. 그가 그 흙에서 그릇을 만들 수도, 파낸 그곳에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독자적이다.

(2) 비교의 적용(22-24절). 타락한 인유라는 큰 흙덩어리에서 하나님은 두 종류의 그릇을 만드신다.

[1] "진노의 그릇." 이것은 진노로 가득 채워진 그릇이니 포도주 병이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경우나 마찬가지다. "여호와의 분노가 가득하였도다"(사 51:20). 여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곧 그의 처벌하는 공의와 죄에 대한 그의 적개심을 기꺼이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온 세상에 들어나 보여져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신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들어내 보여 주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능력(to. du,naton avutou/)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힘과 정력의 능력이요 괴롬을 주는 능력이니 멸망하는 자들의 파괴를 이루고 끝내주는 능력이다. 그것은 "그의 힘의 영광"(살후 1:9)으로부터 나오는 파괴다. 죄인들의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의 능력을 풍성하게 들어내 보여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곧 그는 그 형벌을 들어 즉각 행동에 옮기시기 때문이다. 그의 진노가 그들의 양심을 찌르며 괴롭히고 그의 펴진 팔은 곧 이들의 안녕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와 동시에 는 놀랍게도 피조물은 잘 보존해 주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것이니 곧 그들이 죄의 잔을 가득히 채워 그들의 멸망이 무르익고 "멸망하기에 적합하도록"(멸하기로 준비된, 개역) 곧 그들 자신의 죄와 강퍅으로 그렇게 적합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영혼을 다스리는 타락과 악행은 지옥행으로 치닫는 준비이자 완성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연소가능하도록, 지옥 불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도록(35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32절)고 말씀하실 때도 사실은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고집과 자발성에 의해서 이들이 스스로 멸망 받기에 적합하도록 오래 참으신 것이다.

[2] "긍휼의 그릇," 곧 자비로 가득 채워진 그릇이다. 구원받은 남은 자에게 부여된 행복은 자신들의 공로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다. 천상의 모든 기쁨과 영광의 원천은 영원히 이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다. 영광의 그릇은 스스로 자비의 그릇임을 영원토록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첫째 이 그릇을 통해 목적하시고 있는 것.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곧 그의 선하심을 널리 알리려는 뜻에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야 말로, 특별히 그것이 최고 주권과 관계지어질 때, 그의 최고 영광이기 때문이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하고 모세는 간청하고 있다(출 33:18).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선, 흠정역)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리라"(19절)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선을 베푸셨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과 선하심을 무진장 보관하고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에게 공급하고 계신다. 온 땅이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하고 온 해(年)가 그의 선하심으로 면류관을 삼고 있다. 그러나 당신께서 자신의 선하심의 부요, 측량할 수 없는 부요를 들어내 보이시려 할 때 그는 이것을 성도들의 구원이라는 큰 일을 통해 나타내시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영원토록 신의 은혜의 영광스런 기념비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이 그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는 그들이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다." 성화는 영혼의 영광을 위한 준비 단계이니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업에 참여하는 데 적합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신속할 수가 없지만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는 속수무책이다.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건 제격이지만 성도들이 하늘에 가게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후에 하늘로 데려가기로 의도하신 자들은 모두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생활에 어울리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고후 5:5). 그런데 그대는 누가 이 "자비의 그릇"인지 아는가? 그가 부르신 자들이다(24절). 유효적 소명으로 부르신 자들을 그는 예정하신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자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이미 장벽이 무너졌고 이 세상은 다 똑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그들이 나머지 세상 사람보다 더 그의 영접에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이방인들과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아브라함의 후손 운운이 아니요 이 곳이냐 저 곳이냐 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의 의도대로 부름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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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개종(로마서 9:25-29)

사도는 지금까지 약속과 신의 주권을 설명하고 이제 어떻게 유대인의 배척과 이방인의영접이 구약 성격에 예언되어 있으며, 따라서 구약시대의 조상들에게 맺은 약속을 성실히 지켜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성경이 그 약속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가 하는 진리를 분명히 해 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유대인들도 그 약속을 구약과 연관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불만족이지만 이것이 어떻게 구약에 미리 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Ⅰ. 호세아 선지의 예언. 그는 수 많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호 2:23; 호 1:10).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그의 소유가 아니었으니 이들 또한 그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고 그는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겠다. 곧 그들의 모든 무가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소유하겠다." 얼마나 복된 변화인가! 과거의 사악이 하나님의 현재의 은혜와 자비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얘기다 -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 부른 자들을 그는 사랑하는 자라 부르신다. 그는 자기에 속한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유대교에 개종하므로 간단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그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호 1:10)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한 몸이 될 필요도 예루살렘 꼭대기에 올라가 예배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든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다니 이 얼마나 큰 성도들의 위엄이요 영광인가. 그렇게 불러 주시는 건 그렇게 만드시는 거나 다름 없다. 이 얼마만한 사랑의 표현인가! 이 존귀를 모든 성도들은 안고 있는 것이다.

Ⅱ. 이사야 선지의 예언. 그는 많은 유대인의 배척을 두 곳에서 얘기하고 있다.

1. 그 하나는 남은자 구원을 말하는 이사야 10장 22, 23절이다. 이 남은 자란 얼핏 보면 산헤립과 그의 군대의 파괴와 황폐로부터 살아남은 자의 보호라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멸망케 내버려 두시면서도 아직 아브라함과의 약속의 말씀을 십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맺은 약속에 암시된 것이기도 하다(창 22:17). 그러나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남은 자 구원에 대한 선지자의 예기를 들어보자(28절).

(1) 하나님은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주께서……끝내시리라." 하나님께서 일단 시작하신 일은 심판 형식으로든 자비의 형식으로든 끝을 내시고 만다. 불신 유대인들의 배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로마인들을 시켜 철두철미 파괴하고 말았으니 로마인들은 이들의 나라와 민족을 통째로 삼키고 말았다. 기독교회를 당신의 은총에로 받아들이고 복음을 다른 민족에게 전파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성취하실 일이요 "여호와"라는 자기 이름으로 알려질 일이다. 주난(註)에 보면 "그는 셈을 마치실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인간의 모든 자녀들을 평가하시고 그들을 이러 이러한 상황에 처하고 이러 이러한 특권을 받도록 할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그들과의 관계는 이 경륜에 일치하게 추구되는 것이요 그는 이 평가를 마치실 것이요 신비스러운 몸을 완성하실 것이요 이 은혜의 선택에 속한 자들은 다 불러 모을 것이요 그리고 나서야 셈은 끝나는 것이다.

(2) 그는 이일을 단축시킬 것이다. 이 일을 마무리지을 뿐 아니라 속히 끝내고 말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지체하는 것 같고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교회의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는 수레바퀴가 서서히 굴러 왔으나 이제부터는 "지름길을 달려"갈 것이니 세상 일이 쉽게 끝날 것이다. 지금의 이방 개종자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지름길은 "의 가운데"갈라질 것이니 지혜와 공의에 따를 것이다. 인간들이 지름길을 택할 때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하나님께서 지름길을 택하시면 언제고 의로운 가운데 진행된다. 어떤이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도입하시고 확정하신 복음의 율법과 언약으로 본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 일을 성취하셨으니 구약의 모형과 의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다 이루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에 대한 메아리다. 그는 이처럼 지름길을 달리실 것이다. "그 일"(lo,goj -"말씀" 율법)이 구약 시대에는 매우 길었다. 길고 긴 기구, 의식, 조건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가난하게 되었다. 이제 복음시대의 우리의 임무는 율법시대보다 훨씬 간추려졌으니 언약이 축소된 것이다. 종교가보다 작은 나침반에 옮겨진 것이다. 그것도 모두 의로운 가운데 이뤄졌으니 우리를 위한 것이요 자신의 목적과 경륜에 공의를 가져오는 것이다. 간략하게 하는 것은 사물을 더욱 암담하게만 할 뿐이다.

간략하게 하려면 더욱 모호하게 되고 만다(Brevis esse lavoro, ovscurus fio).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제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명확하고 선명할 뿐이요 짧기 때문에 더욱 이해가 쉬워진다.

2. 다른 하나는 이사야 1장 9절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전반적인 재앙과 멸망의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후손을 보전하시는가 하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앞 얘기와 똑같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대다수를 멸망케 내버려 두시고 오직 조그만 남은 자를 자기에게 남겨 두는 것이 조금도 이상치 않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전에도 그러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날도 똑같은 일을 행하신다 해서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몇 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1) 하나님의 정체. 그는 "만군의 주"시다(약 5:4). 천상천하의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매도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씨를 확보해 두시는 것도 만군의 주로서의 행위다. 곧 전능한 능력과 무한한 주권의 행위다.

(2) 그의 백성의 정체. 이들은 "씨"로서 그것도 작은 숫자다. 다음해 모종으로 남겨 두는 씨는 먹어 없애는 것에 비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유용한 숫자이니 다음 세대의 씨앗, 곧 본질이다(사 6:13). 그렇게도 많은 숫자가 멸망하고 파멸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훼손을 끼치기는커녕 다 없어지지 않고 도대체 남은 자가 있다는 그 자체가 신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놀라운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씨앗으로 남겨 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대로 처리 하셨더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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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없음.

 

9:29 없음.

 

9:30

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1)(로마서 9:30-33)

사도는 마침내 이방인 영접과 유대인 배척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여기서 못박고 있다. 물론 이들이 차이가 지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지만 그들의 찾아가는 노력에 차이가 있었으며 따라서 그 성공에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 모든 논란의 결론은 무엇인가?

Ⅰ. 이방인데 관하여.

1. 그들이 어떻게 의에서 소외되었는가. 이들은 그걸 쫓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자신들의 죄와 비참상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치료책을 강구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들의 개종에서 선행적인 은총(preventing grace)이 돋보이게 들어난다. 하나님이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던 것이다(사 65:1). 이들 속에서 작용한 값없는 은혜가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이들에게 그런 은총을 받게 할 것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과 절대통치라는 방법을 통해 은혜 베푸시는 걸 즐겨하신다.

2.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들이 의를 획득하게 되었는가. "믿음에 의해서"다. 곧 유대교에 개정하여 의식율법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껴안고 그를 믿으며 복음에 복종함으로써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헛되이 변죽만 울리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라는 지름길을 통해서 이 의를 획득하였다.

Ⅱ. 유대인에 관하여.

1. 이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목표를 놓치고 말았는가. 그들은 "의의 법을 좇아 갔다." 이들은 칭의니 성결이니 하는 말을 많이 떠들어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늘의 총아라는 점을 아주 자랑으로 여겼지만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놓치고 말았다. 곧 대다수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들은 옛 유대 원칙과 의식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지키는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하고 그 실체가 이미 와 있는대도 그림자만을 껴안으려고 애썼으니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접에 못 미치고 말았다. 그의 백성으로 소유되지 못하고 의롭다 함을 받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 된 것이다.

2.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갈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었는가. 이것이 목표를 놓치게 된 주 원인이다(32,33절). 이들은 찾아 헤매기도 했으나 바른길을 따라 간 것이 아니다. 겸손한 길이 아니요 지정된 길을 달리지 않은 것이다. "믿음에 의하지"않았으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며 복음의 조건에 복종하는 것이 율법의 참 생명이요 목표인데도 이걸 지키지 않은 것이다. 대신 이들은 마치 모세의 교훈과 의식을 준수하면 의롭게 되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길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것을 단순히 지키고 순종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타락한 원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들을 여기에서 떼어 놓아 다른 공로와 만족을 통해 칭의받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화합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는 거침돌이다. 이것을 그는 이사야 8장 14절, 28장 16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이라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눅 2:34). 길르앗 유향에서 돌이 뽑아지고 머릿돌이 거침돌이 되며 구원의 반석이 실족케 하는 반석이 되는 수가 있는데 그는 대다수에게 있어서 이런 존재다. 그를 배척한 불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그가 의식법에 종지부를 찍었기에 바로 이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믿고 있는 남은 자가 있으니 이들은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곧 그분을 통해 기다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율법에 의해 그걸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실망으로 끝나지만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해서 불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배척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왈가왈부할 소지가 전혀 없게 되고 말았다. 이들에게 의, 생명 그리고 구원의 제시가 충분히 있었으며 복음의 조건도 제시되었지만 이들은 이게 싫어서 따르지 않았으니 그들이 망한다 해도 이것은 자업자득이요 그들의 피가 그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9:31 없음.

 

9:32 없음.

 

9:3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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