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대한 관찰(로마서 7:1-6)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나 성결에 이르게 하도록 하는 데 있어 앞장에 사용된 이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14절)는 것이었다. 이 이론이 이제 여기서도 더욱 강조되며 설명되고 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어떻게 됐으며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1.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능력에서 벗어났다. 우리에게 불리한 율법의 사형 선고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모든 신자에게는 무효화되고 번복되었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율법은 말하지만 우리는 이 율법에서 벗어났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은"것이다(갈 3:13).2.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건드리며 삿대질하는 율법의 능력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타락하고 썩어져 가는 인간에게 명령만 하고 금하기만 하며 위협하기만 하고, 치료하고 힘을 주는 은혜는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은 더욱 더 타락만을 불러 일으키고 조장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똥무더기에 비치는 햇살이 더러운 김만 올라 오게 할 뿐인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타락하여 불구가 되자 들어서서 우리를 지도한다는 게 율법인데 이 율법이 우리의 불구를 치료하고 도와주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더 비틀거리며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 율법을 하나의 규범이 아니라 행위 언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거룩해야 한다고 벼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론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격려가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그것이 명하는 바를 행하도록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또 실패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위 언약의 아닌 은혜 언약 아래 있다는 얘기다. 곧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 있는 것이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그는 앞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비유로 얘기했는데 여기서는 새로운 남편에게 결혼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Ⅰ. 우리의 첫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이었다. 이 결혼은 결혼법에 따라 율법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지속되는 것이다. 결혼법은 쌍방의 한 쪽이, 그게 어느 쪽이든, 죽을 때까지만 구속력이 있다. 그 이상은 효력이 없는 것이다. 둘 가운데 하나의 죽음은 서로를 풀어 놓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그들을 율법을 아는 자들로 취급한다.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1절). 이미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얘기를 나눈다는 건 큰 유익이다. 그런 자들일수록 의도하는 진리를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 있는 신자들 중에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며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율법이 바로 알고 잇는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별히 결혼법을 두고 하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모든 율법은 다 그런 식으로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법이 그러하고 사회법이 그러하고 가족법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1. 법률의 의무는 여기서 끝이다. 살아 있을 때는 주인의 멍에 아래 잇던 종도 죽으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욥 3:19).2. 율법의 저주도 여기서 끝이다. 죽음은 율법의 끝마무리다. Actio moirtur cum persond - 즉, 한 행동은 한 인물과 더불어 만료된다. 제 아무리 가혹한 법이라도 육체를 죽이는 데서 끝나니 그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처럼 우리가 율법을 상대로 살아 있었을 때는 그 율법의 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복음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게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기 전에는 곧 구약 시대에는 그러했다는 얘기다. 바로 결혼법이 이러했다(2절).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그에게 매이는 것이다. 철두철미 매어 있기에 남하고 결혼하면 음부취급을 받는 것이다(3절). 이 경우에 그녀가 음부가 되는 건 딴 남자에게 더럽혀질 뿐 아니라 그에게 결혼하는 때문이다. 그것이 불의를 비호하는 수단으로 오용되어 하나님의 법도를 모독하는 처사이기에 더욱 더 악독한 것이다. 우리의 율법과의 결혼이 이러했다(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곧 우리가 육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죄와 타락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육신이 우리의 요소였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였다." 우리가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을 때 불완전한 둑인 율법은 물살을 바로 잡지 못하고 더욱 광포하게 만들 뿐이었다는 얘기다. 아내의 마음이 그 남편에게 향하듯 우리의 마음은 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곧 죄가 우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는 그걸 얼싸안고 좋아라며 모든 걸 거기에 바쳤으니 날마다 그걸 밥먹듯 하며 그걸 기쁘게 해 주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였다. 마치 아내가 결혼법에 매이듯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었으며 이 결혼의 소산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뿐이었다. 곧 원죄에 의해서 죽음에 해당하는 실죄(實罪)가 소산으로 생긴 것이다. 율법에 의해 잉태된 욕정은(율법 이야말로 죄의 힘이다, 고전 15:56)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것이 죄와 율법에 결혼해서 생기는 후손이다. 이것은 우리 지체 중에 활동하는 죄의 정욕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이 우리를 상대로 살아있고 우리가 율법을 상대로 살아 있는 한 계속된다.
Ⅱ. 우리의 둘째 결혼은 그리스도에게다. 이것은 어떻게 이뤄지며 그 이유는 뭣인가?
1. 아내가 그 남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듯 우리는 죽음에 의해서 언약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었다(3절). 양자 사이의 유사성은 별로 밀접한 것이 못된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너희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4절). 그는(어떤 사람들 생각처럼 율법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릴까 봐서)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두고 "너희가 율법에 대해 죽어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우리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나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요 동시적인 사건이듯이 율법이 죽고 또 우리가 거기에 대해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구원을 받았다, 흠정역)"(6절). "우리가"(kathrgh.qhen) 율법에 대해 "무효하게 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폐기되고 쓸모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율법이 우리에게 속박의 율법인 면에서 사문화된 걸로 얘기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 그 자체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의무와 죄에 대한 도발이 모두 사문화되었다는 얘기다. 그것이 사문화되고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은"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몸이 율법을 폐기하고 그 요구 사항을 이미 해결하였으며 우리의 율법 파괴를 만족시켜 주고 은혜의 언약을 확보해 놓았으니 이 은혜의 계약 속에 율법으로는 불가능한 의와 힘이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과의 연합으로 율법에 대해 죽은다. 우리의 세례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합하고 강력하고 효과적인 믿음에 힘입어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는다. 곧 죽은 종이 그 주인과 결별하여 무관하듯이, 그의 멍에와 무관하듯이 우리도 그 율법과 별 볼일 없게 된다.2. 우리도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다. 우리가 믿는 날은 우리 주 예수님과의 혼인 날이다. 그분과 종속 관계 의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결혼해서, 흠정역)"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완곡한 표현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것은 죄와 율법에 대한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 곧 그의 몸의 십자가에 못박힘과 일치하듯이 새 생명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우리의 헌신이 그리스도의 율법과 일치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부활하셔서 존귀케 된 예수님과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니 이야말로 매우 영광된 결혼이 아닐 수 없다(고후 11:2; 엡 5:29 참조).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이처럼 결혼하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4절). 결혼의 한 목적은 다산(fruitfulness)이다. 하나님은 "경건한 후손"(말 2:15)을 얻기 위해 이 제도를 정해 놓으셨다. 아내는 가끔 열매 많은 포도덩굴로, 자녀는 그 태의 소산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제 그리스도와의 결혼의 위대한 목적은 사랑, 은혜 및 모든 선한 일에 있어서의 풍성한 수확(fruitfulness)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맺어 드리는 열매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그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요 그의 영광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 죄와의 결혼이 사망을 수확하였듯이 우리의 두 번째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하나님에게 의의 열매를 맺어 드리는 것이다. 선행은 새로운 본성의 자녀 곧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의 소산이다. 마치 열매많은 포도 덩굴은 그 포도나무가 뿌리와 잘 연합한 결과이듯이 말이다. 우리의 주장과 핑계가 그 무엇이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결혼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에게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선행을 낳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하다(엡 2:10). 좋은 열매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열매일 뿐이다. 여기에 위선자와 독선가들의 선행과 신자들의 선행의 차이가 있으니 곧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곧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맺어진 열매다(골 3:17). 이것은 물론 경건의 위대한 신비 중에 하나다.
(2)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새로운 남편에게 결혼했으면 우리의 행동을 바꿔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섬기는 일은 마찬가지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의 종살이가 철저한 고행이었듯이 이것은 철저한 자유의 섬김이다. 이제 우리는 새 영으로, 새로운 정신적 규범에 의해서 새로운 정신적 원칙으로 곧 영과 진리로(요 4:24)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뤄진 우리의 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우리가 그를 섬기는 방향으로 말이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곧 법조문에의 집착만을 자랑으로 여겼지 영적인 예배의 면에는 생각이 없던 육적인 유대인들처럼 그저 외적인 섬김에만 그쳐서는 안 되겠다. 법조문은 우리를 죽여 속박과 공포의 상태로 집어 넣지만 우리가 이 멍에에서 벗어난 이유는 두려움이 없이, 성결과 의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뜻에서다(눅 1:74, 75). 이제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이어야 하고 영으로 섬겨야 마땅하다(고후 3:3 이하 참조). 이제는 더 이상 바깥 뜰에서가 아니라 장막 속에서 예배하는 게 마땅하다.
율법의 우월성(로마서 7:7-14)
전항에서 얘기한 것에 대해 사도는 스스로 반론을 제기하며 이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내리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바울이 죄의 지배를 말하면서 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지배에 끼친 영향을 너무도 몹시 강조했기에 흔히들 이걸 율법에 대한 비난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그는 이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기 체험에 비추어 언약이 아니라 안내자로서의 율법의 우월성과 효용성을 입증해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죄가 어떻게 계명을 등에 업고 날뛰는가를 더 자세히 얘기해 주고 있다. 상세히 살펴 보자.
Ⅰ. 율법 자체의 우월성. 바울이 율법을 비난한다는 건 거리가 먼 얘기다. 그는 오히려 그걸 적극 칭찬하고 있다.
1. 이것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12절). 율법이 일반적으로 그럴 뿐 아니라 세부적인 계명에 있어서도 그렇다. 법률은 그 입법자를 들어낸다. 위대한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시기 때문에 그의 율법 도한 그렇다는 건 필연적이다. 그 본질이 거룩하며 그게 명하고 격려하는 것 모두가 거룩이다. 그것이 거룩함은 거룩의 장본인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게 의로운 것은 형평의 원칙과 올바른 이성에 합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도는 올바르다. 그 목적에 있어서도 그건 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익 곧 이 세상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걸 준수하는 자들을 또한 선하게 만든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인류의 개선과 복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은혜가 있는 곳에는 율법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데 대한 동의가 따르기 마련이다.2. "율법은 신령하다"(14절). 그것은 우리를 신령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그 효과가 신령할 뿐 아니라 그 범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우리 영혼에까지 미친다는 의미에서다. 그것은 속 사람의 동기를 억제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속 사람의 동기를 억제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음의 생각과 뜻의 감찰자"이기 때문이다(히 4:12). 그것은 영적 악행, 마음의 살인, 그리고 마음의 간음을 금한다. 그것은 영적 예배를 명하고 마음을 통채로 요구하며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게 강요한다. 그것이 영적인 증거는 많다. 그것은 스스로 영이시오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요, 그것은 그 주요 부분이 영적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 영으로 말하면 인간의 최고 부분이다. 따라서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율법이 영혼에게 주어졌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이점에 있어서 곧 하나님의 법이 영적이라는 면에서 그것은 다른 모든 법을 넘어선다. 다른 법은 "헤아림과 상상" 곧 마음의 배도를 어찌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속 에 있는 죄악을 포착해 내고 만다.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렘 4:14). "우리는 이것을 알도다." 진정한 은혜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영적인 성격을 체험으로 알게 마련이다.
Ⅱ. 그가 율법에 의해서 발견한 위대한 혜택.
1. 그것은 노출시키는 일을 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7절) 곧은 자가 있어야 구부러진 걸 발견하고, 거울이 있어야 우리 얼굴의 흉터와 허물을 알 수 있듯이 회개에 꼭 필요하고 화목과 사죄에 필요한 죄에 대한 지식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저 율법에 비춰 비교해 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특별히 그는 제 10계명의 율법에 의해서 비로소 탐심이 죄라는 걸 알게 되었다. 탐심이라는 말은 그에게 있어서 우리 속에 내주하는 죄, 그 동기와 작용 곧 타락한 원리를 뜻한다. 이것을 그는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할 때야 알게 되었다. 율법이 직접 말하는 바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그렇다고 말하는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곧 율법의 영적인 의미와 가치에서 얘기를 한다는 말이다. 이 영적인 의미에 의해서 그는 탐심이 죄라는 걸, 그것도 아주 지독한 죄라는 걸 행동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음의 동기와 바램이 죄 쪽에 기울어 있으면 무서운 죄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바울로 말하면 통찰력이 예리하고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었는데도 성령께서 율법을 가지고 그에게 알려 주기 전에는 내주하는 죄를 바로 알지 못했다. 타고난 인간에게 있어서 원죄에 대한 지식보다 더 어두운 면이 있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경께서 율법으로 알려 주기 전에는 전혀 백지상태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이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서 상처를 찾아 싸맬 준비를 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계명에 의해서만 죄로 들어난다(13절). 제 모습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들어내는 것이다. 계명에 의해서 "심히 죄되게"(극히 죄악스러운, 흠정역) 모습을 들어낸다는 말은 이런 뜻에서다. 우리가 죄를 율법, 그것도 율법의 영적인 성격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죄속에 들어 있는 무시무시한 독과 악의를 끝내 지나치고 말 것이다. 이대서야 우리는 그게 바로 악이요 쓰디쓴 장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2. 그것은 겸손하게 하는 작용을 했다(9절). "내가 살았더니." 그는 자신을 높이 평가했었다. 자기 생각에는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였고 자기의 상태는 선으로 가득찬 것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전에"(po,te) 바리새인이었을 적에 바로 그는 이러했다.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다들 기만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한때 그는 그들과 똑같았으며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율법을 깨닫지 못했기"(율법밖에 있었기에 흠정역) 때문이다. 비록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자란 율법 박사요, 그걸 철저하게 준수하는 실천가였지만 그래도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법조문은 외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법조문은 외우고 있었지만 율법의 영적 의미는 터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맹이 없는 껍질뿐이었다. 손과 머리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에는 없었다. 모양만 가졌을 뿐 그 능력은 없었다. 영적으로는 죄 가운데 죽어 있으면서, 자신들 생각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부지기수다. 이 모든 과오의 원인은 그들의 율법에 대한 무지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눈에 뿐 아니라 마음에 보이게) 그 능력과 함께 계명이 등장하자, 햇살이 어두운 방에 비취면 먼지가 들어나 보이듯이 "죄가 살아났다." 바울은 전에 보지 못했던 걸 이제 죄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죄의 원인, 악독한 뿌리, 타락한 경향, 뒷걸음질치려는 속셈, 그 색채, 그 추함, 더러움, 의로운 율법의 파괴, 무서운 절대자에 대한 반항, 주권적인 왕관을 땅에 내던지는 모독, 그 결과, 죄의 발 밑에 도사리고 있는 사망, 그리고 거기에 깔려 있는 저주, 이 모든 것을 그는 죄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죄만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스스로 좋게만 생각하던 나 자신을 이제 달리 보게 되었도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곧 성령께서 계명을 들어 내가 죄에 머물러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걸 확신시켜 주셨도다." 여기에 율법의 탁월한 효용성이 있다. 그것은 등불과 빛으로서 영혼을 개종시키고 눈을 뜨게 하며 바위를 가르고 산을 고르며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에게 마음을 돌리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 준다.
Ⅲ. 본성의 율법 악용.
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8절). 개종하기 전에 그렇게도 뛰어났던 그에게도 각종 탐심이 있었다. 율법의 의에 대해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탐심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낳은 장본인은 죄, 내주하는 죄, 곧 타락한 본성(죄를 저지르는 죄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이요 이것이 계명을 핑계로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마치 몸의 병적인 냄새 같은 것이 그걸 처치하는 치료가 강력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부풀고 악취를 내듯이 타락한 본성도 율법의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억제가 아니었던들 그처럼 비대하게 되고 횡포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락한 본성이 "금지된 것을 향해 기우러지는 건"(in vetitum niti) 어렵지 않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로 우리 모두는 통행금지된 길만을 넘나들고 있다. 상처를 주는 것, 금지된 것만 보면 병적인 식욕이 당기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마치 동면하는 뱀처럼 "죄는 죽은 것임이라." 율법의 햇살이 와 닿아야만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것이다.2. 그것이 "나를 속였다". 죄는 죄인을 속이는 데 그 속임수는 아주 치명적이다(11절). "그것으로"(계명으로), "나를 죽였도다." 율법 그 자체에는 죄악스런 욕심에 대한 뚜렷한 위협이 없으므로 죄가 곧 그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여기에 힘을 얻어 죄가 안된다는 식으로 거짓 꾸며, 뱀이 우리 조상에게 하듯이, "네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죄는 그를 속이고 죽였다.
3.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에 만들었다"(13절). 탐심을 이루는 것은 죽음을 가져 오게 마련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사특하고 타락한 본성이 율법을 곡해하고 죄지을 기회를 타지, 선한 것이 그럴 리는 만무하다. 향기로운 꽃에서 독을 빨아내는 것은 죄뿐이다. 이제 여기에 죄가 등장한다. 죄가 저지르는 극악한 일은 물론 그게 죄 그 자체에 더 없이 어울리는 일이긴 하지만, 율법을 곡해하는 것이요 거기에서 기회를 타 더욱 더 악독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생명을 얻도록 제정된 계명이-곧 행복과 안식의 길잡이의 역할을 하게끔 된 그것이-본성의 타락으로 죽음을 가져 오게 되고 말았다(10절). 저 구원의 바위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영혼이 그 얼마이던가. 동일한 말인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구실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구실을 하고 마는 것이다. 똑같은 태양이라도 꽃밭에 비치면 향기를 더 하지만 그것이 똥더미 위에 내리면 악취만 도 할뿐이다. 똑 같은 열이지만 밀랍을 녹이기도 하며 흙을 굳게 하기도 한다. 똑같은 어린애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넘어지게 했는가 하면 또 많은 사람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에 우리 영혼이 머리를 숙이는 길이 있을 뿐이다. 거슬러 올라 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거기에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
은혜와 타락의 갈등(로마서 7:15-25)
여기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은혜와 타락, 하나님의 율법과 죄의 율법 사이의 투쟁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두가지 면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일부 사람들이 바울이 이들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대로, 마음에 확신은 하지만 아직 중생하지 않은 영혼 속에 잇는 갈등이요 다른 하나는 중생하여 성화되었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영혼 속에 있는 갈등이다. 이 양자 가운데 사도는 그 어느 쪽을 두고 얘기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가 죄 아래 팔려 죄만 행하지, 선한 것을 행하지 않는 영혼을 두고 말할 때는 그 악의 지배가 너무도 광범위해서 이걸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는 중생한 영혼에게 적용하기는 아주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인정하며 그걸 즐거워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는 면에 있어서는 그 선의 지배가 너무도 광범위하기에 이걸 죄로 죽어있는 중생하지 않은 영혼에게 적용하기는 참 난처하다.
Ⅰ. 먼저 이것을 확신은 하고 있으나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이 느끼는 갈등으로 보자. 곧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걸 행하지 않는 영혼이요 보다 더 탁월한 것이 뭔 줄 인정하며 그것의 교훈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그걸 어기며 사는 영혼이다(2:17-23). 그가 범하는 죄에 대해 그러지 말도록 증거하는 것이 자신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양심이 그 죄를 경고하며 찌르는데도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은 아직 이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욕정의 지배에 짓눌려 사는 노예로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하지 않은 인간이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율법에 의해서 확신은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은 그런 자들만이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6:14)고 말한 바 있으며 이 증거로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고 또 그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를 발견하고 확신시킬 수는 있으나 그걸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는 없다. 율법을 그렇게도 확신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압도 아래 있는가를 보면 이해가 가는 얘기다. 더러움을 지적은 하면서도 씻어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만들며(마 11:28) 죄의 짐은 무겁게 하지만 그 짐을 털어 버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절규하게 하면서도 그를 건져 내기엔 너무도 무력하기에(8:3) 쇠고랑을 찬 노예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 두며 속박의 영을 주어 두려워하게만 할 뿐이다(8:15). 이제 율법의 의해서 이러한 단계까지 오른 영혼은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의 길목에서 멀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주저앉아 버리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벨릭스 총독도 두려워 떨기만 했지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진 않았다. 뜬 눈으로(민 24:3, 4) 지옥에 간다는 말도 가능하다. 곧 일반적인 환신으로 머리가 깨어 있으면서도 자책하는 양심을 가지고 악마를 섬기는 것이다. "율법의 선한 것을"(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흠정역) "시인"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법도 알기를 즐거워하기도 하고(사 58:2 에 있는 그들처럼) 마음 속에 죄를 반대하고 성결의 편을 드는 게 있으면서도 죄에 대한 지배적인 애착에 이 모든 것이 압도되고 마는 것이다. 술주정뱅이나 기타 속된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죄를 따나고 싶은 가느다란 바램은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자신들의 확신은 그처럼 무력하고 무용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걸 이해하고 찬동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사도의 의도가 이거라면 왜 일인칭을 썼으며 그것도 현재 시재를 썼는지 비록 이해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자신의 정죄받은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과거 일로 광범위하게 다룬 바 있다(7절 이하). "나는 죽었도다.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만약에 그가 바로 이 상태를 자신의 현재 상태로 곧 그가 현재 처해 있는 상태로 얘기하는 거라면 그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Ⅱ. 그것은 성화된 영혼 속에 일어나는 은혜와 타락의 끈질긴 투정으로 보는 게 낫겠다. 은혜의 원리가 살아있는 곳에도 내주하는 타락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건 뻔한 얘기다. 이 타락이 날마다 약해서 저지르는 죄의 형태로 들어나 보여지고 있다(이건 은혜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점도 더 더욱 뻔한 얘기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셈이 된다(요일 1:8, 10). 참된 은혜는 이러한 죄와 타락을 상대로 투쟁하지, 그것을 허용치 않으며 그걸 증오하며 슬퍼하고 짐같이 여기며 끙끙대고 잇다는 사실 또한 확실한 얘기다(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것이 여기서 강론하는 사도의 얘기에 포함된 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의도는 성화의 특성을 더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는 셈이다. 곧 성화를 해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없이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남아 있는 타락과의 투쟁을 계속하도록 하는 것이 성화의 목적이다. 우리가 진심을 다해 투쟁한 것은 우리의 죄몫으로 쳐지지 않을 것이요 그 승리는 은혜를 통해 마침내 우리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의 투쟁은 뱃 속에서의 야곱과 에서의 투쟁이요 가난 복지에서의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간의 투쟁이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ㅡ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위대한 것이, 마침내 승리하고 말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면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1. 그가 불평하는 것, 내주하는 타락의 잔재. 이것을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은 중생한 사람이라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걸, 제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법대로 따진다면 자신 속에 자기를 정죄할 소지가 충분히 있으며 이것은 율법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의 잘못 때문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다. 여기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한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 그가 쓰고 잇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통감하고 있으며 그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1)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그는 고린도 교우들을 상대로 얘기할 때도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말을 사용한다(고전 3:1). 영적 생명이 있는 곳에도 육적인 애정의 잔재는 남아 잇는 법이요 그런 만큼 인간은 "죄 아래 팔려" 있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의 사람은 아합처럼 자신을 악행에 파는 것이 아니라(왕상 21:25)
아담이 죄를 범해 넘어졌을 때 그에 의해 팔렸다. 불쌍한 노예가 팔려서 자기 의사에 반대되는 주인의 뜻을 행하듯이 죄 가운데 잉태되고 죄 가운데 태어났기에 죄 아래 팔려 있는 것이다.
(2)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또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19, 21절) 하는 것도 같은 얘기다. 타락의 위력이 그 정도이기에 그는 그렇게도 바라고 열망하는 성화 속에서의 완전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지만 거기에 이미 도달한 것도 아니요 완전해진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빌 3:12). 모든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뜻을 완전하게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것이 그의 확고한 판단이었다)은 꿀맛 같았지만 그의 타락한 본성은 그를 곁길로 잡아 그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하늘 높이 치솟고 싶은데 끌어 당기는 쇠고랑과 같은 것이요 똑바로 던졌지만 빗나가게 하는 둥근 공에 붙은 혹과 같은 것이다.
(3)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18절) 여기서 그는 타락한 본성을 설명하는데 이걸 그는 육이라 부르고 있다. 이 타락한 본성이 있는 한 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바닷가 바위나 모래 위에서 옥수수를 기대할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본성은 어떻게 해서든 죄를 범하지 않지만(요일 3:9)육은, 곧 옛 본성은 어떻게 하든 선을 행할 수 없다. 도대체 뭣 때문인가? 그건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며(25절) 그 법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이요 그것이 이 상태에 머물러 잇는 한 어떠한 형태의 선이든 기대하기는 어렵다. 타락한 본성을 다른 곳에 서는 육이라 부르고 있으니(창 6:3; 요 3:6) 이 육을 가진 자들에게 선한 것이 거할 수는 있겠지만 이 육이 있는 한 선은 없다. 육은 어떠한 선이든 감당할 능력이 있는 주체가 아니다.
(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잇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 타락하고 죄 많은 성향이 여기에는 율법에 비교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선한 동기를 누르고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지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보좌를 펴고 계시니 죄의 도구가 되는 것은 몸의 반역적인 지체들뿐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는 이것을 성욕뿐 아니라 보다 정교한 욕정의 자리인 타락한 본성을 두고 일반적으로 얘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음의 법, 새로운 본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곧 정반대의 길로 이끌며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일만 골라 가며 하는 것이니 타락한 성향이야말로 포악한 포로 상태 이상으로 영혼에게 크나큰 부담과 비애를 안겨 주는 것이다. 그것이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포로로, 흠정역)"가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는 말도 똑같은 얘기다. 곧 타락한 본성, 중생하지 않는 부분이 계속해서 죄를 향해 작용한다는 얘기다.
(5) 그의 일반적인 불평(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가 불평하는 것은 사망의 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죽어가기 마련인 육신의몸(우리가 이 몸에 있는 동안은 우리는 타락으로 괴로워하게 될 것이요 우리가 죽게 되면 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그 이전에는 불가능하다)을 두고 하는 말이 든지 죽음에로 곧 영혼의 파멸로 치닫는 죄의 몸, 옛 사람의 몸, 타락한 본성의 몸을 두고 하는 말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의식 율법에 있어서 죽은 몸을 만지는 것이 불결한 것이듯이 실죄가 죽은 일이라면(히 3:14) 원죄는 죽은 몸인 것이다 이것이 마치 바울에게 있어서 죽은 몸이 달라 붙어 있어 어디를 가든 질질 끌고 가야 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고 절규하기에 이른다.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나 자족할 줄 아는 그가 그의 이 타락한 본성은 이처럼 불평하는 것이다. 나더러 바울을 두고 그의 사람됨을 얘기하라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인간이여! 그대는 그리스도의 대사요, 하늘의 총아요, 수천의 영적 아버지로다!"하고.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보았을 때는 타락한 본성이 따라다니기에, 곧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선을 기꺼이 행하지 못했기에, 획득하지도 못하고 완전해지지 못했기에 자기는 비참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비참한 절규가 따른다. 그것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으니 그걸 없앨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투요 그래서 자기에게서 그의 타락한 본성을 떼어 놓을 친구가 없는가 하고 살피는 눈치다. 내주하는 죄의 잔재야말로 은혜로운 영혼의 고통스런 짐이 아닐 수 없다.
2. 그가 위로로 삼는 것. 그가 처한 상황은 슬펐지만 몇 가지 위로가 있었으니 세 가지 위로다.
(1)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은 자기 속에 선한 원칙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혼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한 길로만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선한 원칙의 지배란 하나님의 율법으로 여기에 대해 세 가지 점이 지목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성화된 모든 사람에게만 잇는 것이지 그밖에 다른 사람에게 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절). 여기서 (su,mfhmi)는 "내가" 그 율법에 "표를 던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판단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율법의 가혹성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율법의 훌륭함에 대한 동의도 있기 마련이다. "그 자체로서 좋을 뿐 아니라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이 마음에 쓰여 있다는 것을 곧 영혼이 그 형태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성화된 판단은 율법의 평형성뿐 아니라 그것의 우월성까지도 동조하는 것이니 율법에의 일치가 인간 본성의 최상의 완전이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존귀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절) 그의 양심은 율법에의 자족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율법의 약속뿐 아니라 그 말씀의 교훈과 금지사항 모든 면에 있어서 즐거워하였다. 여기의 (sunh,domai)는 점진적인 "즐거움"을 뜻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성도들과 일치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중생받고 거듭난 자들은 모두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아는데 대해 즐거워하며 그걸 행하는 걸 즐거워한다. 곧 그것의 권위에 즐거이 복종하고 이 복종 가운데 흐뭇한 만족을 맛보는 것이다. 마음과 생활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합치할 때 그처럼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속 사람으로는"의 "첫째" 의미는 육신의 육감적인 취향과 뜻에 반대되는 마음이나 이성적인 기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혼은 속 사람이다. 그리고 그곳이 은혜로운 즐거움의 자리다. 그러므로 이 즐거움이야말로 진지하고 은밀한 것이니 속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후 4:16). 그 "둘째" 의미는 새로운 성품이다. 새 사람을 가리켜들 "속 사람"(엡 3:16)이라,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이라 부르고 있다. 바울도 그가 성화받은 만큼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3]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25절). 율법에 동의하고 그걸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섬겨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통채로 그걸 순종하는 데 바쳐져야 한다는 얘기다. 바울의 마음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모든 성화된 새 마음이 그러했다. 이것이 일상적인 길이요 진로다. 그게 영혼의 흐름인 것이다. "내 자신이"(auvto.j evgw,)하는 말은 그가 제 1인칭으로 직접 말하고 있음을 명백히 해 주는 말이다.
(2) 잘못은 그의 본성의 타락에 있으며 이것을 그는 심히 아파하고 그것에 대해 분투하고 있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는 이것을 두 번이나(17,20절)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가 아니라(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면 악을 저지르는 죄가 우리 속에 거하고 있다는 정죄는 마땅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실망 가운데 전락하지 않고 자원하는 영혼을 받아들이고 육신의 약함을 사죄하는 은혜 언약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증거에 대한 구실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여기서 내주하는 죄가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반항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동의는 이미 표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죄의 율법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나선다. "그건 내가 아니다. 그 사실과 나는 무관하다. 그것의 진행은 나의 마음에 반대되는 처사다." 마치 의회에서 나쁜 다수당이 모든 일처리를 그릇되게 경정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회의 결정이지만 그러나 정직한 소수당은 이에 반대 투쟁을 벌이며 그 결정을 슬퍼하며 끝까지 반항하는 경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직한 소수당의 일이 아니다. "내 속에 거하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사는 가나안 족속들처럼 죄가 내 속에 거한다는 뜻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그 자리에 내주할 속셈이다.
(3) 그의 크나큰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이런 저런 불평을 하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찬양을 터뜨린다. 여러 가지 공포와 비탄에 대한 특별 처방은 찬양을 드리는 데 있다. 맥빠져 의기 소침해 가는 많은 영혼이 경험한 그대로다. 우리의 모든 찬양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것이 노래의 골격을 이뤄야 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그는 도움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 줄 모르는 나머지 당황하고 있는 투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전 충족적인 친구를 발견하였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죄와 타락의 잔재 능력 아래 있을때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그는 우리의 모든 기도의 중보자이자 우리의 모든 찬양의 주제이기도 하다)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충분히 볼 수 있어야겠다. 곧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죄로 인한 진노 사이에 서 계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던들 우리 속에 거하는 이 죄악은 필경 우리의 파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우리의 대변자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덮어 주시며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시지 않는 것이다. 때가 차매 우리를 위해 구원을 확보해 놓으신 분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를 통해 사망은 이 모든 불평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를 영원에로 거뜬히 바람곁에 데려다 주며 거기서 우리는 죄와 탄식을 모르고 지낼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승리, 흠정역)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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