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로마서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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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성화(로마서 6:1-2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는 말로서 사도는 자신의 현 강론이 이전의 강론과 서로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귀하고 든든한 교의를 두고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의 비방처럼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할 것인가?(3:8) "은혜를 더하게 하려 고 죄에 거하겠느뇨?" 우리가 죄를 많이 저지르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돋보이게 들어난다고 해서 그만큼 더욱 더 담대하게 죄를 범하겠는가? 이게 정당한 용법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용이다. 따라서 사도는 이 따위 생각에 경악을 금치 못한 나머지 "그럴 수 없느니라," 턱 없는 소릴! 하고 소리쳐 외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악마의 최대 시험을 받을 때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하시며 제기하신 바로 그 반론을 여기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꼴을 갖추었거나 실제 부도덕에로의 문을 여는 의인은 그것이 제 아무리 특이해 보이고 그럴싸하고 거저 주시는 은혜를 돋보이게 할지라도 재빨리 정색을 하고 이를 거절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딛 1:1) 진리이기 때문이다. 본장에서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논조는 강력하다. 이걸 다음 두 단원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첫째는 성화를 권고하면서 그 특성을 들어 얘기하고 둘째는 이 권고를 뒷받침하는 동기 곧 이론을 제시하면서 그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Ⅰ. 먼저 성화의 특성, 그 정의 및 그 구성요소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죽이는 일과 사는 일이다. 곧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일이다. 이 말이 성경 다른데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옷입는다느니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걸 배운다느니 하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1. 죽는 일 곧 예 사람을 벗는 일. 이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1) "우리가 어찌 그(죄) 가운데 더 살리요?"(2절) 우리는 과거의 사람 과거의 행실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벧전 4:3). 물론 죄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죄 가운데 살지 않는 사람들, 죄의 한 요소가 되어 그 속에서 뒹굴지 않는 사람들, 그것을 본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성화 받는 것이다.

(2) "죄의 몸은 멸하여져야" 마땅하다(6절). 우리 속에 거하는 타락은 곧 마치 신체처럼 많은 지체와 요원을 가진 죄의 몸이다. 도끼를 갖다 대야할 곳은 바로 이 뿌리다. 우리는 죄의 행동을 중단할 뿐 아니라(이것은 외적인 자제나 기타 방법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악한 습관과 성향을 약화시켜 깡그리 퇴화시켜 버려야 한다. 우상을 성전에서 내어 던질 뿐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죄악의 우상을 내쫓아야 하는 것이다. 곧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얘기다 실제적인 범죄는 분명히 본래적인 타락을 처형하고 죽이는 가운데 상당히 예방될 수 있다. 죄의 몸을 파괴해 보라. 그러면 비록 그 땅에 가나안 백성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의 종살이는 않을 것이다. 홀(笏)을 잡아 흔들며 철몽둥이를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의 몸이다. 이것을 파괴해 버리라. 그러면 멍에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압제자 에글론의 파괴는 곧 피압제자 이스라엘의 모압 족속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3) "우리는 정말 죄에 대하여는 죽어야 한다"(11절). 압제자의 죽음이 해방을 의미하듯이 압제 받는 자의 죽음은 더욱 더 그러하다(욥 3:7, 8). 곤비한 자에게 한가닥의 쉼을 가져 오는게 죽음이다. 이처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곧 죽은 자가 그의 "골치 아픈 주인"(quondam)에게 그러하듯이 우리는 죄를 순종할 필요도, 그걸 지킬 필요도, 그것을 존대할 필요도 그리고 그 뜻을 성취할 필요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이전의 수작을 포기하듯이 죄의 쾌락과 기쁨에 무관심할 필요가 있다. 죽은 사람은 이전의 동료, 이전의 대화, 이전의 사업, 이전의 쾌락, 그리고 이전의 행동과 구별되고 말며 그는 과거의 사람, 과거의 행동, 과거의 소유와는 거리가 멀게 되고 만다. 이러한 큰 변화를 가져 오는 것은 죽음이다. 우리 영혼에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 오는 것은 바로 성화요 이것만이 죄와의 모든 연관을 제거하고 만다.

(4) "죄가 우리 죽을 몸의 왕노릇을 해서는 안 되며 몸의 사욕을 순종해서도 안 된다"(12절). 죄가 계속 무뢰한으로 남고, 압제자로서 압박을 가한다 해도 왕의 자리를 그것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죄가 입법부 행정부 그리고 군대를 장악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그것이 영혼의 최고권을 장악해서 우리가 그걸 순종해서는 안된다. 때로 우리가 거기에 압도당하고 뒤지는 수가 있다해도 거기서부터 오는 정욕 속에서 그것에 순종하지는 말자. 죄악스런 정욕이 당신에게 있어서 당신이 기꺼운 순종을 독차지하는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사욕"이라 할 때 이 사욕은 죄가 아니라 몸의 사욕이다(evn tai/j evpoqumi,aij auvttou/). 죄는 육체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 주는데 더욱 더 매력이 있는 법이다. "너희 죽을 몸"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어차피 죽어가는 몸, 흙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몸이니만큼 죄가 그 가운데 왕노릇하지 않도록 하자는 얘기다. 우리 몸으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게 한 장본인은 죄였다. 따라서 그러한 대원수에게 순종을 바쳐서야 되겠는가.

(5)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바쳐서는 안되겠다"(13절). 몸의 지체가 타락한 본성에 의해 도구로 악용되며 여기에 따라 육신의 소원이 성취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악용 그 자체에 동의할 수는 없다. 몸의 지체는 무섭고도 놀랍게 만들어져 있다. 이 지체가 악마의 "불의"의 도구 곧 죄악스런 성향에 따라 죄악스런 행동의 도구가 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건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의의 종점은 죽음이다. 죄악스런 행동은 죄악스런 습관을 확인하고 보강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한 가지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기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저수지 수문을 열고 물을 흘려 보내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거기에 휘말려 들기 전에 그걸 포기하는 게 좋다. 몸의 지체들은 설혹 팽배하는 시험에 끌려 억지로 죄의 도구노릇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지체들을 정말 그러한 도구로 내어 주지는 말라. 거기에 동의하지는 말라. 이것이 곧 성화의 일면 곧 죄를 죽이는 일이다.

2. 살리는 일, 곧 의에 대해서 사는 것. 이게 무엇인가?

(1) 그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4절). 새 생명이란 새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생의 모든 문제가 생겨나고 이 근원을 말게 하기전에는 거기서 나오는 물이 단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는 것"의 직역은 "새 생명 가운데서 걷기"(walking)인데 이 walking은 성경에서 행동의 방향과 진로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요 이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얘기다. 새로운 규칙을 가지고 새로운 목적을 향해 새로운 원리에 입각해서 걸어 보라.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잡으라. 새 길을 찾아 걸으며, 새 지도자를 찾아 따르며, 새 동무를 찾아 함께 걸으라. 옛 것은 사라지고 모든 게 새롭게 되고 말 것이다. 과거의 인물, 과거의 행위와 거리가 먼 인물이 들어 설 것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11절). 하나님으로 더불어 행하는 것, 그에게 마음을 두는 것, 그에게서 기쁨을 찾는 것, 그의 입장을 염두에 두는 것, 그리고 그 영혼이 항상 기꺼운 마음으로 그에게 집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Anima est ubi amat, non ubi animat - 즉 영혼은 그것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하는 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애정과 바램이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또는 우리의 육신을 입은 생명이 "하나님을 상대로" 그의 말씀과 뜻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 "살아 가는 것," 곧 우리의 만가지 행동에 있어서 그를 인정하고 우리의 두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상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요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게 사는 삶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마음 놓고 편히 뭘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마땅히 모실 수도 없다 주 예수의 중재가 아니고선 죄투성이의 영혼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교통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첫째도 이 생명의 주인이요 경영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요, 둘째도 그에게서 우리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받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요, 셋째도 우리의 영양과 섭생을 빨아 올리는 뿌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어야 하겠다. 하나님을 상대로 사는 데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전부다.

(3)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13절). 성결의 진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 곧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리는 데 있다(고후 8:5). "여러분 자신을 그분에게 드리되 피정복자가 어쩔 수 없어서 정복자에게 하는 식이어서는 안 되겠고 마치 아내가 온 마음을 다 쏟아 남편을 받들 듯이, 생도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듯이 견습생이 그 우두 머리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듯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분에게 여러분의 부동산을 드릴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곧 통째로 온 몸을 드리라는 말이다.""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에게 맞도록 맞추시라"(parasth`sate evautou/j, accomodate vos ipsos Deo)(Syriac의 Tremellius에서). "그분에게 복종할 뿐 아니라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분에게 단번에 자신을 드릴 뿐 아니라 언제고 그를 섬길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마치 밀랍이 도장의 어떠한 모양이든 받아들이듯이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인물이 되고 기뻐하시는 것을 소유하고, 그 기뻐하시는 것을 실천하도록 하라." 바울은 "주여, 뉘시오니까"(제가 어떻게 할까요? 흠정역) 하고 말하고서 곧이어 하나님에게 엎드렸다(행 9:6).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죽은 시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그를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모독하는 처사다. 여러분 자신을 살아있는 자로서, 좀 쓸모가 있는 자로 곧 "산 제물"(12:1)로 바치도록 하라.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남게 된 자들(율법 가운데 죽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의롭게 되어 죽음에서 구원 받은 자들,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을 이처럼 구속해 주신 그분에게 통채로 내어 바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그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지체가 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후퇴하였다 해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릴 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강한 자의 무장이 풀려지면 권리를 가진 자가 그 약탈물을 분배하는 게 당연하다. 영혼의 능력과 기능은 성결과 의의 직접 주체이지만 몸의 지체는 그 도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섬기는 데 있어 몸은 언제나 영혼을 받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19절)는 말씀이 따른다. 곧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통제와 명령에 따라, 곧 성화자로서의 성령이 영혼 속에 심어 주었기에 내재하는 의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의에서 거룩으로"라는 말은 기초가 잡혀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얘기다. 죄악스런 행동 하나 하나는 죄악스런 습관을 더욱 굳어지게 하며 본성이 더욱 더 죄에 기울어지게 하듯이(그래서 타고난 인간의 지체는 "불법에 바쳐 불법에 이르는" 종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한 가지 죄는 또 다른 죄로 마음을 기울게 한다) 은혜로운 행동 하나 하나는 은혜로운 습관을 굳어지게 하는 것이다. 의를 섬기는 일을 성결에로 이어진다. 한 가지 의무를 다하면 또다른 의무에로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이요 갈수록 하나님을 위한 일을 그만큼 더 해내기 마련이다. 아니면 의를 섬기는 것은 "성화의 한 증거의 구실"(evij a`giasmo.n)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Ⅱ. 성화의 필연성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동기 내지는 이론. 우리의 마음이 선천적으로 성결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그 도가 너무 짙은 거라서 이 마음을 성결에로 이끄는 일은 여간해서 쉬운게 아니다. 따라서 이런 저런 동기로 영혼을 파고 들어 설득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1. 그는 의식을 통한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내세우고 있다. 우리의 세례에는, 그 자체가 이 일체감을 의도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죄로부터 우릴 지켜 주는 자제의 고삐와 본분을 다하도록 일깨우는 강요의 자극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에 대한 변론을 들어 보자.

(1) 일반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있다. 곧 본분과 의무가 달라졌다는 얘기다. 우리의 세례는 죄악의 왕국으로부터 우리를 단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곧 우리는 죄를 죽이는 능력과 덕을 우리의 것으로 하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또한 그에 대한 관심으로 해서 죄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다면 이 모두가 허사가 되고 만다. 이것은 우리의 주장을 뒤엎는 처사요, 우리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요, 돌아온 귀신들처럼 우리가 죽어 있었던 그것에로 도로 귀화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어리석고 이보다 더 허무맹랑한 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는"것이 아닌가?(7절) 노예가 죽은 주인에게서 벗어나 자유롭듯이(욥 3:19)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죽으면 그것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우리가 벗어난 저 노예살이에로 되돌아갈 바보가 우리 중에 또 있는가? 애굽에서 구원 받아 놓고 그리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어댈 것인가?

(2) 세부적으로 파고 들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3절). 우리는 "그리스도에게"(eivj crsto.n) 세례를 받았다. 마치 "모세에게 속하여"(ei,j Mwsh/n)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고전 10:2).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동여맨다. 마치 제자로서의 우리를 스승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동여매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주권이신 그리스도에게 향한 우리의 충성이다. 세례는 externa ansa Christ -즉 "그리스도의 보이는 운전대"로 이것을 잡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붙잡으며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바친다. 특별히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의 죽음심과 합하게 된다. 이 말은 그의 죽음이 마련한 특권에 동참하게 되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는 목적을 지닌 그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 것으로 하며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그의 죽음의 패턴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세례의 전부요 약속이었다. 따라서 이 본분을 다 하지 못하고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잘하는 짓이 아니다.

[1]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일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죽도록 강요한다. 이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의 고난에 대한 참여"(빌 3:10)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그의 죽음의 유사성에 따라 함께 심어졌다. 흠정역)(5절)라는 말이 있다. 유사성(tw/| o`moiw,mati), 그렇다. 우리는 마치 접붙인 가지와 둥치가 하나가 되어 그 성질을 닮아가듯이 그의 죽으심과 일치할 뿐 아니라 그걸 본받아야 한다. 무엇을 심는 것은 그걸 살려 열매를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포도원에 심겨진 나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도 있다는 것을 성결로써 증거해 보여 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도 많지만 여기서 우리의 입장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 죽으시고 장사되셨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면 하나 하나에 있어서 우리가 일치하는게 세례의 의식적인 의의다.

첫째, "우리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절). 십자가상의 죽음은 느렸다. 십자가에 못박혀진 몸은 여러 고통과 투쟁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죽음은 확실했다. 숨을 거두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숨을 거두셨다. 우리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죄를 죽이는 일도 마땅히 이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다(갈 3:13). 죄는 파괴만 일삼는 범인으로서 죽게 된다. 따라서 저주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것이 느린 죽음이라 해도 여기서 못박혀진 상대는 정력의 절정기가 아니라 쇠퇴기에 있는 옛 사람(old man)이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sunestaurw/qh)는 문제는 시간에만 관계되는 게 아니라 그 원인 결과의 상호 작용면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데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8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순종이었다. 따라서 그가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모범과 그 의도에 일치하는 한 가지 행동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우리의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임을 상징하는 것이자 날인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4절). 이제 우리의 연합은 완전하다. 우리는 죄와의 모든 거래 및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이다. 마치 장사되어 땅에 묻힌 자들이 온 세상과 두절되어 더 이상 산 자들에게 속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과 전혀 무관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죄와 죄인들을 두고 두절되었듯이 우리도 그래야 마땅하다. 우리는 형식에서 뿐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장사되어 있다. 우리의 주장이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도 그래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세례받으면서 우리가 맺은 언약이요 계약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날인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죄와 두절되는 것이다. 세례받음으로 장사된다는 말이 왜 그처럼 물 속에 들어가 젖는 데만 집착되고 세례의 십자가와 죽음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지, 나로선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다고 하는 말은 예표가 아니라 상징이 들어내는 실제 그 자체다. 장사라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의 장사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었던 것은 새롭고 보다 천상적인 생명에로 다시 부활하려는 의미에서였듯이 우리가 세례에서 장사되는 것은, 곧 죄의 생활에서 두절되는 것은 새로운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다.



[2]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일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렇게도 알고자 하던 "그의 부활의 능력"(빌 3:10)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에게서"일으켜 세워졌다. 곧 아버지의 능력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영광이다. 곧 영광스런 능력인 것이다(골 1:11).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이 패턴에 일치할 수밖에 없다. 곧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고"(5절)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8절)(골 2:12 참조). 회개란 이 죄의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에로의 첫째 부활이요 이러한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도들의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따라서 함께 일어난 많은 성도들의 몸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마 27:52).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두 가지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치해야 한다.

첫째, 그는 부활하셔서 더 이상 죽지 않으셨다(9절). 우리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들지만 그들은 다 도로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문제가 다르다. 그러기에 나사로는 일어났을 때 걸쳤던 옷을 다시 입으려고 그대로 나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게 더 이상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버려 두셨다. 그리스도에게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죽으셨으나 사랑계시다. 앞으로 영원히 그는 살아 계실 것이다(계 1:18). 이처럼 우리는 죄의 무덤에서 일단 일어났으면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암흑의 땅을 떠났으면 어두움의 일과는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 부활하셨다(10절). 곧 하늘의 삶을 사시려고, 자기 앞에 놓여진 영광을 받으시려고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다 모든 면에서와 똑같이 이전의 생활 상태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부활하셔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요 13:1; 17:11) 그가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 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났으면 하나님께 대해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 생명"(4절)이다. 우리의 과거 원칙, 규범, 목적이 아닌 다른 원칙, 규범,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쳐진 생활은 새 생활이다. 전에는 자신이 우두머리요 최고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다. 정말 산다는 건 우리 모두의 눈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분을 우리 모든 행동의 중심으로 삼아 하나님께 살아 드리는 것이다.

2. 그는 새 언약의 귀한 약속과 특권을 내세우고 있다(14절). 우리는 죄를 정복할 수도 그걸 억누를 수도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죄는 너무도 가혹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네가 끝까지 버티며 손에 든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네가 씨름하고 있는 원수는 호되게 얻어 맞아 물러선다. 이미 기가 꺾여 비틀대는 상대가 아닌가. 널 도우려고 은혜의 언약 속에는 힘이 비축되어 있으니 넌 그걸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약속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약속과는 달리 죄를 죽이는 데 있어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죄가 신자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번민으로 북새통을 칠지라도 그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곧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왕, 새로운 법의 지배를 받아 작용하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벽돌은 요구하면서도 짚풀은 주지 않는 행위의 언약 아래에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곧 "이걸 행하면 살 것이요, 그걸 행하지 말라. 그러면 죽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더 없이 하찮은 실수만 봐도 저주해 대는 행위의 언약이 아니라 우리의 신실을 복음의 완전으로 받아들여주는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은혜의 언약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요구 사항이 없다. 이 점은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곧 언약에 있어서는 죄를 지어도 그때 그때마다 그것 때문에 그 언약에서 탈락하는 것이 아니요 이 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 수중에 내버려 두지 않고 중보자의 손에 보관하고 있다. 이 중보자야말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 주시는 분이요 친히 그걸 저주하고 파괴하신 분이니 우리는 승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요 그 결과는 승리하고도 남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황금홀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따라서 이 지배를 받고자 하는 신하들에게는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에게 큰 위로의 말이 아닐 수 없다. 율법 아래 그냥 있더라면 우리는 끝장 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잡고 저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법 아래 살고 있다. 곧 자원하는 마음을 기꺼이 받아 주시며, 뭘 잘못하는 것만 가지고 과히 꼬집지 않고 회개의 길을 열어 주며 회개에는 용서를 약속하는 은혜의 법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에, 죄에 무관한 것보다 더 강력한 동기가 따로 있겠는가? 그만한 사랑을 오용하며 그만한 선하심을 꼭 거역할 것인가? 이 아름다운 꽃에서 독을 뽑아 불순하게도 죄를 더 담대하게 범하는 자도 없쟎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사도의 의견을 들어 보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친구의 친절과 선의를 무시하고 대들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괘씸하겠는가? 그만한 우정, 그만한 사랑을 앞에 두고 침을 뱉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봐도 온 세상의 수치거리가 아닐 수 없다.

3. 그는 이것이 우리의 상태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 그런 상태다(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거나 죄의 종이다. 이것이 두 계보다.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했는가를 알아보려면 이 두 주인 중에 어느 편에 순종을 바치고 있는가를 알아 보면 된다. 죄의 법에의 순종은 우리가 죽음의 진을 치고 있는 쪽에 속했다는 증거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법에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4. 그는 자신들의 이전 죄악 상태를 얘기해 주고 있다(17-21절).

(1) 그들의 이전 상태와 행위. 우리는 우리의 이전 상태를 기억시켜 주는 얘기를 자주 들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것을 본인에게 뿐 아니라 편지 쓰는 독자들에게도 자주 기억시켜 주고 있다.

[1]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곧 너희는 죄의 종이었다. 지금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일에 경성하고 활발하도록 하는 의미에서 과거 죄의 종살이 시절을 더듬어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일을 버리며 그 멍에를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내맡겼으며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거야 말로 죄를 섬기는 일에 대한 일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과거에 그러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곧 과거에는 그랬지만 이제 너희는 순종하고 있다. 너희가 과거에는 그러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걸 과거지사로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너희가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문제가 다르다. 아니, 어쩌면 과거에 그랬음이 행복한 변화를 가져오는 신의 자비와 은혜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죄악이 오늘의 성결을 돋보이게 하고 자극하는 이점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2]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다"(19절). 몸이 죄에게 악착같이 충성하게 되는 것, 이것보다 더 천박하고 어려운 종살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저 들판에 쫓겨나 돼지밥을 먹던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 "너희가 드렸다." 죄를 섬기는 죄인들은 자발적이다. 자기들이 거기에 엎드리지 않는데 악마가 억지로 강요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죄인 타도가 정당화 된다. 스스로 악행을 하겠다고 팔린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 행동 전부인 것이다. "불법(죄악)에 드려 불법(행위)에 이르다." 온갖 죄악스런 행위는 죄악스런 습관을 보강하고 굳게 한다. 행위로서의 죄악에서 삯으로서의 죄악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식으로 갈수록 악화되고 강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예대로 말하는 것"이니 곧 인간들에게 흔히 통용되는 비유다. 섬기는 일과 따르는 일이 뒤바뀌고 말았다.

[3] "너희가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절). 이 때의 자유는 누가 준 자유가 아니리 스스로 취한 자유이니 곧 방종이다. "너희가 과거에는 모조리 선한 것, 곧 선한 원리, 선한 동기 및 선한 성향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 전혀 순종치 않고 있었으며 그의 형상에 일치하는 걸 깡그리 잊고 있었는데 이걸 넌 그렇게도 좋아라면서 그게 자유니 홀가분하니 하고 떠들어댔도다. 그러나 의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야말로 최악의 종살이가 아니겠는가?"

(2) 복된 변화의 시작과 그 구성 요소.

[1] 너희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17절). 이것은 회개의 정의를 서술한 것이다. 회개란 곧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자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복음에의 순응과 일치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은 "건져냄을 받은 그"(ei,j o[n paredoqmte) 교훈이라는 듯이다.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교훈의 본"(tu,pon didach/j)인 은혜의 규정. 복음은 진리와 성결의 위대한 규정이다. 그것이 도장이라면 은혜는 이 도장의 날인(impression)이다. 곧 치유하는 말씀의 본이다(딤후 1:13).

둘째, 은혜의 특성과 그 규정에의 일치.

1.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은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교의다. 그것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야 한다. 이 말은 이 순종의 신실성과 알뜰함을 암시한다. 형식과 주장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곧 우리 내면의 지휘소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2. 그것은 "그것에로 전달되는 것"이다. 마치 무슨 틀에 있어서처럼 곧 밀랍이 도장의 선에 따라 부어지는 가운데 그 굴곡과 획의 모양을 그대로 들어 내보여 주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복음의 유사성과 동질성을 닮고 우리의 영혼이 거기에 일치하고 순응하는 것이다. 곧 이해, 의지, 사랑, 목적, 원리, 그리고 행위, 이 모두가 그 교훈의 본에 따르는 것이다.

[2]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18절), 곧 "하나님께 종"(22절)이 되었다. 회개란

첫째, 죄의 종살이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그 멍에를 털어 버리고 다시는 그걸 매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둘째, 회개란 하나님과 의의 종살이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곧 우리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과 우리의 행위로서의 의에게 몸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홀가분하게 된 것은 우리 멋대로 하라는 것이 곧 우리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왔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거룩한 산으로 인도되어 율법을 받고 언약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지배와 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 날 때까지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과 죄라는 너무도 상반되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집에 오려면 그전에 저 탕자처럼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힘드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3)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는 그들의 죄의 종살이가 어떠했는가를 여기서 설명한다(21절).

[1] 그것은 무익했다.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도대체 그걸로 얻은 게 뭔가" 앞으로 장차 손해볼 것도 크지만 현재의 수확도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무슨 열매를?" 그 어느것도 열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죄의 쾌락과 소득을 열매랄 수는 없지 않는가? 이것은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요 죄악의 밭을 갈아 허사를 씨뿌려 그걸 수확하는 거나 다름없다.

[2]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다. 수치는 죄와 함께 이 세상을 들어 왔으며 아직도 그 소산 노릇을 하고 있다. 곧 회개하면서 갖는 수치와 이에 따르지 않을 때 당하는 영원한 수치와 목욕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언젠가는 수치로 여길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5. 그는 이 모든 일의 종말을 얘기하고 있다. 앞을 내다 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ㅇ, 곧 앞을 내다 보며 장차 말세에 될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이성적인 피조물의 특권이다. 죄를 떠나 성결에 이르도록 우릴 설득하기 위해서 여기에 축복과 저주,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놓여 있다. 그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1) 죄의 종말은 사망이다(21절).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그 과정은 달콤해 보이고 구미를 당길지 모르지만 그 끝은 참혹하다. 마지막에 들어내는 건 할큄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23절). 일군이 일을 다 했을 때 그 삯을 주는 것이 마땅하듯이 죄인이 죄를 다 지었을 때 그 삯으로 사망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어떠한 죄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죄 그 자체는 아무리 작아도 죄가 아닌 것이 없다. 제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 삯은 사망이다. 여기서 죄는 삯을 받기 위한 행위나 그 몫을 지불하는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죄의 종살이를 하거나 그것을 하는 자들은 모두 그 결과가 이렇다는 걸 예상해야 한다.

(2) 그 열매가 성결 쪽이면 참되고, 증대하는 은혜의 적극적인 원칙이 거기 있다면 그 결국은 영원한 생명 곧 해피엔드가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길이 가파르고 비좁은 가시밭 길이요 헤매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을 다 가면 틀림 없이 영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영생이니라"(23절).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모습과 열매로 이뤄진 삶이다. 곧 병약함이 없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망은 놓임으로서 오는 죄의 삯이요 영생은 은혜로서 오는 선물이다. 죄인들은 지옥을 차지할 자격이 있지만 성도들은 하늘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있어서 차지하는 게 아니다. 하늘의 영광과 우리의 순종은 비교를 넘어선다. 우리가 하늘에 도착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게 마땅하다. 그리고 이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통한 것이다. 이 선물을 마련하시고 준비하신 분은, 그리고 그걸 보관하고 계신 분은 우리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요 전부이신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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