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 열매(2)(로마서 5:1-5)
칭의의 귀한 혜택과 특권은 우리 모두가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것으로 하여 우리로 의롭게 되고 거기서 오는 위로를 우리 것으로 하며 거기서 오는 의무 또한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생명나무의 열매는 더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
Ⅰ.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있다"(1절).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싸움을 부채질하는 가운데 소외감뿐 아니라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죄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계속 죄책아래 머무는 한 그와 평화로울 수 없다. 여기에 칭의가 죄책을 없애주고 평화의 길을 터 놓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이 어찌나 크던지 이 장애물이 제거되는 순간 거기에는 평화가 성립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팔과 힘을 붙잡는 셈이요 따라서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사 27:4, 5). 이 평화 속에는 적대감의 단순한 정지 상태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거기에는 우정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철저한 원수이든가 절친한 친구이든가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 "하나님의 벗"(약 2:23)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친구"라 부르셨던 것이다(요 15:13-15).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친구로 삼는 일보다 더 우선으로 할 일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위대한 중보자요 화해자요 양자 모두에게 손을 쓰는 위대한 축복의 날의 사람인 그분을 통해서 말이다. 아담은 순수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과 직접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죄많은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기 때문이다(엡 2:14). 평화를 가져오는 자일 뿐 아니라 이 평화의 본질이자 보유자이신 것이다(골 1:20).
Ⅱ.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2절). 이것은 더더욱 귀한 특권이다. 곧 화평뿐 아니라 은혜까지 받는 것이다.
1. 성도들의 행복한 상태. 이것은 은혜의 상태이니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미치고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는 그러한 상태다.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을 가진 자는 은혜의 상태에 머무는 사람이다. 이제 이 은혜에 우리가 접근(prosagwgh.n - "안내")하게 되었으니 이 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에게 원수"라는 말처럼 우리가 이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리 이 상태로 인도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리 자력으로는 여기에 이를 수 없었으며 이 길에 놓인 장애물도 제거할 수 없었으나 손의 이끌림을 받은 것이다. 마치 눈먼 사람, 지체불구, 허약한 사람이 이끌리듯이, 또는 이방인이 특별히 제가를 얻어 임금을 알현하도록 안내되듯이 말이다. "우리가……들어감을 얻었으며"(prosagwgh.n evsch,kamen) 여기서 그는 이미 자연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이끌려내진 자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바울도 회개하므로 이미 이 안내를 받아 가깝게 된 터였다.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으며(행 9:27)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었다"(8절). 그러나 이 은혜에로 손을 끌고 안내해 간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였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원 저자요, 원 동인이고, 믿음은 이 접근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어떠한 공로를 감안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우리가 믿고 의자하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얻는 것이다.2. 성도들이 이 상태에 행복하게 계속 서 있음. "서 있는" 우리가 거지 있을 뿐 아니라 서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죄책을 벗어버린 상태("우리가 심판 중에 서 있다, 시 1:5)를 의미한다. 처벌받은 사형수처럼 허리를 구부리거나 땅에 엎드릴 필요가 없이 우리의 권위와 명예가 확보된 이상, 당당하게 서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또 우리의 전진을 의미한다.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획득한 것처럼 들어누워서는 안되며 그리스도를 수종드는 종처럼 서서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 말은 또 우리의 인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확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는 우리는 마치 원수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끈기를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속에 있다는 걸 암시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확고부동하게 서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늘의 법정은 높은 자리일수록 미끄러운 지상의 법정과 달라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이루실 줄"(빌 1:6)을 확신하는 가운데 겸손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현재의 행복 이외에도 소망 중에 기다려지는 행복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성도들에게 옷 입혀 줄 영광이요 하나님을 뵈옵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일관되는 영광이다.
1. 현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는 자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이후에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중에 기다릴 수 있다. 은혜에 바탕을 둔 영광이 아니고서는 좋은 소망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은혜는 영광의 시작이요 영광의 담보이자 보증이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리라"(시 84:11)2. 이후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야말로 현재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늘을 소망하는 자들이 그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건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Ⅳ.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우리의 환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걸 막을 수 없다) 우리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는 환난이 영광의 도를 더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고후 4:17). 이 얼마나 엄청난 성도들의 행복인가. "다만 이뿐 아니라" 혹자는 그러한 평화, 그러한 은혜, 그러한 영광, 그리고 그러한 소망 중의 기쁨은 우리같이 모자란 사람들이 자기 것이라 주장하기엔 너무 큰 것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즐거워할 때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도다." 특별히 성도들의 행복에 정반대가 된다고도 보는 의를 위한 환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행복은 이 환난과 함께 일치할 뿐 아니라 이 환난에서 일어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행 5:41). 문제가 이쯤 되자 사도는 그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우리가 환난을 자랑으로 여기는가? 왜 그런가? 환난은 여러 가지 연쇄반응을 일으킨 다음에 소망을 낳게 하는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1.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곧 환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환난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지체와 재질이 단련을 통해 발전되듯이 환난은 끝내 인내를 들어내고 개선시키고 만다. 마치 강철이 불로 더 단단해지듯이 환난 그 자체가 유효원인은 아니지만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식가의 입에서 고기를, 강자의 입에서 당분을 어떻게 덜어내시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내를 이루는 그것은 기쁨 그 자체다. 왜냐하면 인내는 환난이 끼치는 해보다는 더 많은 유익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환난 그 자체는 안달을 가져 오지만 그러나 일단 그것이 성도들에게서 성화의 옷을 덧입을 때 그것은 인내를 않는 법이다.2. "인내는 연단을(체험을, 흠정역)"(4절) 인내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며 밤중에 주시는 노래를 체험하게 한다. 참고 견디는 자들이야말로 아픔이 증대함에 따라서 더불어 증대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더없이 크게 체험하게 된다. 곧 우리들 자신을 체험하게 하는 계기를 준다. 우리가 자신의 성실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은 환난을 통해서일 뿐이다. 따라서 환난을 가리켜 시험이라고도 부른다. 인내는 시인(dokirh.n, approbation)을 낳는다. 마치 시험을 통과한 자가 인정을 받듯이 말이다. 이처럼 욥의 경우에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그가 아직도 "순전하고 정직하다"(욥 2:3)는 인정을 낳은 것이다.
3. "연단은 소망을" 이처럼 연단을 받아 황금같이 된 자들은 소망할 수 있게 격려를 받는다. 이 시험 또는 시인은 우리 소망의 기초라기 보다는 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우리 소망의 지주다. 우리 자신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우리 성실성을 증거하듯이 말이다.
4. 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곧 이 소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망보다 더한 아픔이 또 있을 수 없다. 약한 자들의 기대가 사라지면서 그들에게는 영원한 수치와 혼란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러나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게 될 것이다"(잠 10:28; 시 22:5; 71:1 참조). 다시 말해 소망이 우리의 받든 고통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고 거리에 내버려진 진흙처럼 밟힘을 받아도" 그러나 영광의 소망이 있기에 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대의명분 곧 선하신 주님을 위한 것이요 좋은 소망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소를 받고 있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우릴 실망시키지 않을 것은 그것이 사랑의 영이신 성령으로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펼쳐 붓는 일은 복되신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곧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의식하는 것이요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을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걸 의식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위대한 효과를 살펴 보자.
(1) 특별 은혜와 이에 대한 즐거운 향유다. 이 사랑은 마치 향기로운 기름처럼 영혼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요 단비로 영혼이 해갈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성결 그리고 양자에 있어서의 인내의 근원은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 펼쳐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를 묶어 매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고후 5:14). 이처럼 우리는 사랑의 결속으로 이끌려 내어 거기에 붙잡혀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그에 대한 소망이나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로마서 5:6-21)
사도는 여기서 주 예수의 죽음에 깔려 있는 칭의의 기초와 원천을 얘기하고 있다. 그 강물의 줄기를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죽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것은 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물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모두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확대하여 얘기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1. 그가 위해 죽은 사람들(6-8절).2. 그의 죽음의 귀한 열매(9-11절).
3. 첫째 아담의 죄와 죽음, 그리고 둘째 아담의 의와 생명사이의 병행성(12-21절)
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돌아가실 때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곧 우리는 슬픈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여기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었다.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요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대로 이러한 때에 "기약대로" 우리의 구원이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구원하는 시기는 구원 받을 자들이 힘이 빠져 있을 때이니 그래야 당신의 능력과 은혜가 더욱 더 들어나 보이기 때문이다(신 32:36). 하나님의 조력의 방법은 마지막 관에 들어난다.2.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곧 속수무책인 피조물이요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 천박하고 무용할 뿐 아니라 악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귀한 은총을 받기에는 더더구나 무가치한 자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경건치 않은 만큼 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죽어 줄 사람이, 죄를 대속하고 의를 끌어들여 줄 사람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것을 그는 전무후무한 사랑의 예라고 설명하고 있다(7, 8절). 여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길과는 다르다는 점이 들어난다(요 15:13, 14 절 참조). "이에서 더 큰 사랑 없나니."
(1)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고" 곧 무고한 자, 부당하게 처벌 받는 자를 위해 죽어 주려는 자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을 보고 다들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겠지만 그러나 목숨을 걸고 위험을 안으려는 자는 없다.
(2) 설혹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있을 수 있다. 곧 단지 의로운 사람보다 나은 유용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스스로 선하다는 자들이 남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일도 없지만 쓸모가 있는 자들은 대개 사랑을 받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려 드는"자들이 곧 이들의 보석이 되어 몸을 몸으로 때우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보면 꽤 선한 사람 곧 유용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에게도 자기 목숨을 위해 목을 내 놓은 자들까지 있었던 것이다(16:4). 그러나 이렇게 하려는 자도 쉽진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모험에 불과할 것이라는 얘기다.
(3)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8절).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 아니라 죄투성이요 험상 굳기 짝이 없는가 하면 없어져 봤자 아까울 것 없는 인물들이요 마땅히 죽어야 할 사형범들이기에 오히려 죽는 게 하나님의 공의를 풍성하게 드러낼 그러한 인물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서 통상 유대인들의 "의인,""자비한 자" 그리고 "악인"(사 57:1)하는 식의 구분법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본다. 이제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자기 사랑을 입증하고 증거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그의 사랑을 크게 들어 내고 증대시켰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게 할 뿐 아니라 경탄과 칭송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제 내 피조물들은 내가 저들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될 터이니 전례 없는 사랑의 예를 보여 주겠노라" 하는 식이다.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추천하다, 흠정역). 마치 상인들이 자기들의 상품을 전시할 때 그걸 추천하듯이 말이다. 당신의 사랑을 이처럼 추천하신 이유는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골고루 펼쳐 부으시려는 뜻에서이다. 그는 더없이 열렬하고 호감이 가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하는 말은 우리가 언제까지고 죄인으로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얘기다. 어디에선가 변화가 일어나야 마땅했다. 그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우리 죄 가운데서가 아니라 우리 죄로부터 구원하려는 뜻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위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다.
(4) 아니 "우리는 원수였다"(10절). 범법자일 뿐 아니라 반역자요 배신자로서 정부에 무장 도발을 단행한 자들이었다. 더없이 극악하고 추악한 범법자가 아닐 수 없다.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원수일 뿐 아니라 적개심 그 자체다(8:7; 골 1:21). 이 적개심은 상호적인 것으로 하나님 편에서는 죄인을 증오하고 죄인 편에서는 하나님을 증오하는 식이다(슥 11:8). 그런데도 이런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가 아닐 수 없으며 역리가 아닐 수 없다. 전에 없는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사랑을 흠모해하고 칭송하는 일을 우리는 영원까지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확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당신의 천국 법률조항에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는 항목을 넣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 수 없다.
Ⅱ. 그의 죽음의 귀한 열매.
1. 칭의와 화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첫 열매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고(9절)…… 그 아들의 죽음심으로 말미암아……화목하게 되었다(10절)." 죄가 면제되고 죄인이 의인으로 받아들여지며 분쟁은 끝나고 적개심도 말살되었으며 죄악도 도말되고 이제 남은 것은 영원한 의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취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모든 걸 성취하셨기에 우리는 믿는 순간 실제로 칭의와 화목의 상태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기인한다는 이유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피는 생명이다." 따라서 속죄에는 피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속죄 제물에 있어서 피뿌리는 일이야말로 그 제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레 17:11).2. 따라서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따른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젊),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생명으로, 흠정역)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것이 제거됨에 따라서 이 구원이 따르는 건 필연이다. 아니, 우리가 원수였을 적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화목케 하셨다면 우리가 의롭게 되고 화목케 된 지금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건 "더욱 더" 확실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원수를 친구로 삼는 더 큰 일을 해 내신 분께서 보다 더 작은 일 곧 친구된 우리를 친구로서 대하시고 친절하게 대하는 건 더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는 10절에서도 다시 한 번 "더욱 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기초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까지 깊숙히 판 그분은 분명히 이 기초 위에 건물을 짓고 마실 것이다. "우리가 진노하심에서" 곧 지옥과 저주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옥불이란 바로 하나님이 진노요 "다가 올 진노"(살전 1:10)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 큰 날에 신자들의 최종적인 칭의와 사면은 여기서 말하는 진노에서의 구원이니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역사의 완성이다-"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되었으며,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신에 있을 때의 생명이 아니라 죽으신 후에 다시 얻은 부활 생명 곧 하늘의 생명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14:9 참조). "그가 전에는 죽어 있었으나 이제는 살아 계시도다"(계 1:18). 우리의 화목은 낮추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은 높혀진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뤄졌다. 죽어 가신 예수께서 죄를 만족시키고 적개심을 없애며 우리를 구원 가능케 함으로써 그 기초를 놓으셨으니 이렇게 해서 경계의 벽이 무너지고 속량이 성취되며 권리 박탈이 거꾸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완성한 것은 살아계신 예수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심이라"(히 7:25).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마침내 우리를 유효하게 부르시며 변화시키고 하나님에게 화목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 성취하여 존귀케 된 상태에서의 그리스도다(4:25; 8:34 참조). 죽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유산을 남겨 주신 유언자요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이것을 지불하는 유언집행자이시다. 이제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을 사시려고 자기 전부를 내 주신 분이 그것을 적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실 리가 없다.
3. 이 모든 것은 또 다른 특권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넣는다(11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재앙의 날에 즐거움과 소망이다"(렘 17:17). "우리는 화목케 되어 진노에서 구원 받은 자들이다." "죄악이 우리의 파멸일 수 없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거기에는 계속적인 은총의 물결이 있다. 우리가 그저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그것도 승승장구하게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그저 항구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모든 돛을 다 올리고 당당하게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소망의 머릿돌이자 대들보요, 알파와 오메가며, 우리의 "구원일 뿐 아니라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노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고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달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속량의 덕분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그로 말미암아 복음 시대에 곧 이 세상에서 "화목을 얻게"(속량, 흠정역) 되었기 ?문이다. 이 속량은 율법 시대에 여러 가지 모양의 제사로 상징되어 오던 바요 하늘 나라에서 가질 행복의 담보물이기도 하다. 참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을 받는다. 이 속량을 얻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만족에 입각해서 칭의 가운데 하나님에게 실제로 화목케 되는 것이다. "속량을 얻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뜻이 있다.
(1) 이것은 이 속량을 달갑게 여기고 영원한 지혜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보혈을 통해 죄많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데 사용한 그 방법을 찬성하며 동의하는 것이요 또 복음의 방법에 의해 복음적인 면에서 기꺼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2)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쁨의 근원과 기초인 이 속량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라서 이렇게 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요. 이 "속량을 받아들이는"것이 된다.
그 속량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kaucw,menoi)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 속량을 받아들이셨다(마 3:17; 17:5; 28:2). 문제는 우리만 받아들이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Ⅲ. 첫째 아담에 의한 죄와 죽음이 둘째 아담에 의한 의와 생명으로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여기서 사도가 펴고 있는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유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천거하고 참된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더욱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 대조에서 우리는 우리의 타락과 회복에 들어있는 연관성 곧 유사성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첫째 아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의 힘보다 둘째 아담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때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1. 그의 강론의 기초로 깔려 있는 일반적인 진리 -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14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란 말을 쓰고 있다(고전 15:45, 22 절 참조). 아담은 이런 점에서 곧 그가 하나님과 본인 사이의 언약이라는 계약에 있어서와 이 계약의 최종 단계까지 대표자이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상대로 일처리를 하셨으며 아담은 공공의 아버지로서 곧 모든 자기 후손의 원인, 근원 및 대표로서 행동하였다. 따라서 그가 그 상태에서 곧 우리를 위한 대리인으로서 행한 것은 우리는 그와 함께 행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오는 영향은 그와 함께 우리에게도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대표자로서 곧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머리로서 행하셨으며 하나님을 상대로 이들을 위해 곧 그들의 아버지, 원인, 근원 및 대표로서 일처리를 하신 것이다. 곧 죽으시고 살으시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신 모든 일이 이들을 대표로 하신 일이다. 아담이 실패하였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실패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을 때 그는 우리를 위해 대표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tu,poj tou/ mevlcontoj) 곧 아담의 약속 불이행을 보수하러 오시는 자의 표상인 것이다.2. 이 대조의 상세한 면
(1) 어떻게 대표자로서의 아담이 자기 모든 후손에게 죄와 죽음을 전달하게 되었는가(12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왔다."온 세상이 지금 죄와 죽음의 홍수에 밀려 다니며 각종 죄악과 재앙 천지다. 이 근원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면 본성의 타락이라는 걸 알 수 있고 그게 어느 사이에 들어왔는가를 살펴보면 아담의 첫째 죄악 때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가 다름 아닌 우리의 뿌리와 근원으로서의 최초 인간이었다(설령 그 이전에 인간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무죄하였을 것이다).
[1] 그에 의해서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아름답구나 하고 선언하신 그 때(창 1:31) 세상에는 죄가 없었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그때부터 비로소 죄가 등장한다. 전에는 많은 천사들이 그들의 충성을 내팽개치고 그들의 최초 영역을 떠났을 때 이 천사들의 세계에 죄가 들어갔었지만 이 인간 세상에는 아담이 죄 짓기 전까지만 해도 죄의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 죽이고 파괴하는 원수와 훔치고 약탈해 가는 도둑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정말 끔찍한 입장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었으며 전반적으로 본성이 타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때문에"(VEfV y~)가 아니라 "그 안에서"(in whom)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읽는게 좋다. 죄가 아담에 의해서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그와 함께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 1:22)라는 말이 있듯이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온 세상 법률 어디를 보나 대표자의 행위는 곧 그들이 대표하는 집단에게 돌아가는 것이요 한 집단이 하는 행위는 그 구성원 각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담은 대표자로서 행동하였다. 곧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섭리 그리고 그것도 자연적인 필연성에 입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기타 피조물이 자신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자연 법칙을 세우셨기 ?문이다. 따라서 공동 저수지처럼 아담 안에 모든 인간 본성이 저장되어 있었으며 그에게서부터 모든 물이 물길을 따라 그의 후손에게 전달되게 되어 오고 있다. 왜냐하면 온 인류는 "한 혈통"(행 17:26)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서고 넘어짐에 따라 이 본성이 들어나 보여지기 마련인데 그가 죄를 지어 넘어지는 순간 이 본성은 죄악스럽고 타락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2]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죄가 일단 끝나는 곳에는 죽음이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죄가 들어올 때는 죽음도 함께 들어왔다. 죽음이 여기에 제시된 이유는 죄가 수반하는 모든 불행을 대표하는 의미에서다. 곧 현세적이거나 영원한 죽음이 다 그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가 있었다(창 2:17).
[3]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마치 형사범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듯이 모든 인간에게 "내려졌다"(dih/lqen, passed through). 이것은 마치 전염병이 온 시가지를 휩쓸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보편적인 운명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내려지기 마련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재앙의 예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14절). 사도 바울은 여기서 사망을 막강한 군주로서 묘사하고 있으니 그의 왕권은 그지없이 절대적이요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것이다. 그 홀에서 벗어나는 자 그 누구인가. 그것은 이 지상의 그 어느 권력, 권위, 지배보다도 더 오래 오래 살아 남을 왕권이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던 벨리알이 자손들도 이것만은 피할 길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죄와 죽음을 가져다 준 아담의 덕이다. 그 사람 좋은 분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보면서 우리는 "오 아담이여! 그대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고 물어볼 만도 하다.
이점을 더욱 명백히 하기 위해서 그는 죄가 모세 율법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만이 유일한 인생의 규범은 아닌 셈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도 규범이 있었는데 이게 어겨졌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율법에 불순종한다 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듯이 거기에 순종한다 해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율법 이전에 이 세상에 죄가 있었다는 걸 증거하는 것으로는 가인의 살인, 옛 세상의 배도, 및 소돔의 죄악을 들 수 있겠다. 여기서 그의 의도하는 바는 곧 이전에도 율법이 있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원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일치요 실제적인 죄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이런 저런 율법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그는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왕노릇하였다"는(14절) 점을 얘기하고 있다. 죄가 사망의 보좌를 구축해 놓지 않았던들 사망이 그처럼 판칠 수 없었다는 건 확실한 얘기다. 이 말은 곧 율법 이전에도 죄가 있었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원죄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죄는 하나도 짓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 곧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처럼 살아보지도 못한 자들, 즉 실제적으로 죄도 지어 보지 못하고 죽어간 영아들에게도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기에 사망이 그들을 상대로 왕노릇하였다는 얘기다. 이 사망의 왕노릇이란 말은 어린 아이들까지 휩쓸어 앗아가 홍수나 소돔의 멸망같이 과격하고 엄청난 심판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적으로는 범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죄를 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위배되기 때문에 어린 것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참혹하게 병에 걸려 죽거나 재앙을 받아 죽거나 기타 이유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원죄의 위대한 증거다.
(2) 이것과 비슷하게 어떻게 대표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적 후손인 모든 참 신자들에게 의와 생명을 전달하게 되었는가. 이와 함께 사도는 여기에 들어 있는 유사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그리스께서 가져오는 은혜와 사랑은 아담이 가져온 죄와 진노를 "넘어서" "더욱 더 강력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1] 유사성. 이점은 18, 19절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첫째, "한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고 그 결가ㅗ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 정죄받게 되었다."
1. 아담의 죄는 불순종, 그것도 간단하고 분명한 명령에의 불순종이었다. 그것도 단련의 성격을 띈 명령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행한 일이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체로서는 작은 죄 같아 보이지만 이것이 다른 여러 죄악에로의 문을 열었다는 데 있다.2. 죄의 해독성은 너무도 강력하고 광범위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의 죄의 죄책이 지금까지 그렇게도 도도히 그리고 면면히 흘러왔을 리 없다.
3.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여기서 "많은"이란 범죄한 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쓰인 말이다. "죄인으로 만들어졌다"(kateta,qhsan)는 말은 우리가 사법적인 행위에 의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율법의 정론에 따라 우리가 죄인으로 제쳐지고 만 것이다.
4.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자들 모두를 정죄하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 죄의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정죄받는게 당연하다. 한 가정에 내려지는 권리박탈처럼 온 인류가 그러한 형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하늘 법정에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심판이 내려져 있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판정이 번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심판을 받아 몰락할 수밖에 없다.
둘째, "마찬가지로 '한 사람'(곧 이 한 사람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시다)의 의와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고" 그 결과 "값없이 주시는 은사가 모두에게 임하게 되었다." 이 진리가 얼마나 중요하던지 사도가 반복하고 또 반복해가면서 강조하는 것을 엿볼수 있어야겠다.
1. 그리스도의 의의 특성과 그 도입 경위. 그것은 그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가 멸망하게 하였듯이 둘? 아담의 순종은 우리를 구원한다. 곧 그분이 모든 의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우리의 죄에 대한 제물로 삼는 중보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이 율법에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한 의를 이루셨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가 그의 은총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2. 그 열매.
(1) "값없이 주시는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곧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제공되었다는 얘기다. 성취된 구원은 "일반 구원"이다. 초청은 전반적이요 그 제공도 거저다. 누구든 오는 사람은 이 생명의 물을 거져 마시는 것이다. 이 거저 주신 은사는 모든 신자에게 곧 그들이 믿는 순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칭의는 죽음을 면제케할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격을 구비케 한다.
(2)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이란 한 사람에 대조되는 말로서 온 세상에 흩어져 있지만 한 데로 모으면 무지막지하게 많은 은혜에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이" 마치 특허증에 따른 것마냥 의롭다고 "여겨질 것이다"(katastaqh,sonai). 아담에 의한 우리의 멸망과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회복이라는 반명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2] 그리스도께서 가져 오는 은혜와 사랑이 아담이 가져 오는 죄와 진노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 이것을 그는 15-17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요함을 확대하여 보여주며 아담의 죄가 저지른 크나큰 상처를 보고서 엄청난 치유가 가능할까 하고 실망할지도 모를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의 표현은 좀 까다로워 보이지만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 만약 죄책과 진노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은혜와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전가된 죄책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전가된 의를 보고 구원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인 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넘쳤으리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모든 속성 가운데 특별히 그의 영광이요 그 근원(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해 가지는 그의 은총)은 바로 이 은혜다. 따라서 이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지상의 사람의 죄에 그만한 능력과 효과가 있어서 우리를 정죄할 정도라면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는 더욱 더 큰 능력과 효과를 발휘하는 가운데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고도 남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그 "한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 물론 아담이 뿌리는 독은 예수 그리스도가 뿌리는 해독제만큼 강력할 수 없으니 곧 후자가 더욱 더 강력할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정죄를 받게 된 것은 아담의 단 한 가지 범죄뿐이다. "심판은 한 사람(하나, 흠정역) 곧 한 범죄를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다"(evx e`go,j e,ij kata,krima)(16,17절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을"뿐이다. 은혜와 의의 물결은 죄책의 물결보다 더욱 더 깊고 넓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한 범죄의 죄책을 없앨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범죄 곧 모두의 죄책을 도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범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4.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이 사망의 왕노릇에 종지부가 찍혀질 뿐 아니라 신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혜택을 받는 것이다(17절).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서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면 특허장을 가질 뿐 아니라 존귀의 특허권을 가지며 우리의 쇠고랑으로부터 풀려날 뿐 아니라 요셉처럼 버금 수레에 올라타 하나님에게 왕과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곧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특혜를 받는 것이다(계 1:5, 6; 5:9, 10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것보다 더 풍성하고 위대한 특권에의 자격을 부여 받고 거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붕대가 상처보다 훨씬 넓으며 곪아 들어가는 상처보다 치유가 더욱 더 강력한 것이다.
Ⅳ. 마지막 두 절에서 그는 "그러면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반론(갈 3:19)을 예상한 듯하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다." 죄 그 자체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계명을 잡고 늘어질 소질이 다분하다. 그 죄의 넘치는 죄악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돋보기는 희미한 점들을 발견할 뿐이지 그것들이 원인이 될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마치 어두운 방에 더 밝은 빛이 들어오면 전에 보이지 않던 먼지와 찌꺼기가 밝히 들어나듯이 계명이 세상에 들어오자, 죄가 소생한 것이다. 마치 이 햇빛의 들어옴은 치료에 필요한 상처를 탐색하는 것과 같다. 이 "범죄," 아니 "그 범죄"(to. para,ptwra), 아담의 그 죄, 우리에게 미치는 그 영향의 확대, 우리 속에 있는 타락의 영향, 이 모든 것은 율법이 들어오자마자 이미 들어나 보이던 그 범죄를 더욱 더 풍성하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2. "은혜가 더욱 더 넘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곧 율법의 각종 공포로 말미암아 복음의 위로를 그만큼 더 감미롭게 하려는 뜻에서다. 죄악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풍성하게 판을 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개종한 자들에게는 은혜가 더욱 더 넘쳐 그 많은 죄를 면제하고 그 많은 타락의 고개를 숙이게 하지 않았던가? 원수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복자의 영광은 그만큼 더 위대한 것이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21절에서 그는 묘사하고 있다. 독재자와 압제자의 지배는 공정하고 후덕한 왕의 계승을 촉발하는 것에 불과하듯이 죄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를 가져올 뿐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죽음의 통치는 사망에 이르고, 흠정역) 이것은 정말 무자비한 피의 지배였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는" 생명 곧 "영생"에 이르며 이것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성화를 위해 심어진 "의로 말미암은"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와 성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당신의 교회의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험을 통해서 가능케 된 것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