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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아브라함의 경우(1)(로마서 4:1-8)

여기서 사도는 아브라함에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모든 인류 중에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과 자기들이 행위에 의해서 의의 몫을 차지하겠다고 그렇게도 떠들어대는 민족는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호소하는 가운데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인 자신도 여기에 연관을 시키고 있다.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 육신으로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못지 않게 위대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온 세상이 찾아 헤메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헛된 것을 찾아 스스로 지쳐 있는 만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자가 아니고서는 참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아브라함은 영리한 상인처럼 양질의 진주를 찾는 가운데 더 없이 귀중하고 값진 이 진주를 발견한 것이다. "육신으로"(kata. sa,rka) 곧 할례와 기타 외적인 특권과 실천에 있어서 그가 얻은 게 뭣인가?(빌 3:3) 정말 얻은 게 뭔가? 그가 이걸로 의롭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영접을 사게 한 것이 바로 이 행위의 공적이었던가? 어림없는 얘기다. 따라서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가지 면에서 입증하고 있다.

Ⅰ. 만일 그가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건덕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2절) 그게 사실상 허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하고 유대인들은 대들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으며(창 12:2), 그런 만큼 자랑해도 무방하지 않는가?"라고.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다. 사람에게서는 칭찬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공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바울 자신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겸손이 뒤따르는 자랑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게 전무했다(고전 4:4; 빌 3:8, 9).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을 가지고도 자랑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정 사실로 들고 나오고 있다. 그처럼 위대하고 선한 아브라함조차도 그럴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논리를 빌려 얘기하고 있다. "여호와 외에 그 어느 것이든 그걸 잡고 자랑하기 위해 자랑하려드는 자"야말로 어리석지 않을 수 없다고.

Ⅱ. 아브라함의 신앙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93절) 우리 종교의 모든 문제 해결은 이 질문에 들어 있다.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이 사람 저 사람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가 문제다. 아벨에 가서 문제의 핵심을 얘기하고 문제를 끝내도록 하시라(삼하 20:18). "율법과 증거의 말씀"(사 8:20) 거기에만 최종적인 탄원이 있을 뿐이다. 이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창 15:6)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없게 되고 만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은혜에 따라 그렇게 전가된 것이지 그 자체에 형식적인 의의 성질이 내포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기꺼이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 것뿐이다. 이것은 약속된 후손을 두고 벌어진 위대한 역사적 신앙의 발로를 계기로 창세기에서 얘기되고 있다. 그게 더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것이 전에 가졌던 불신과의 대결 뒤에 이어지는 신앙이라는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그의 신앙은 전쟁터에서 새로이 살아 돌아온 승리의 신앙이다. 칭의에 필요한 것은 완전한 신앙은 아니다(불신앙의 소지가 남아 있어도 받아들일 만한 신앙이 가능할 수 있다).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이기는 신앙(prevailing faith) 곧 불신의 머리위에 앉아 있는 신앙이다.

Ⅲ. 그가 신앙으로 의롭게 되지 않았다면 그 보상은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논리다(4, 5절). 아브라함의 상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이라"(창 15:1)고 하신 말씀과 같다. 그러지 않고 만약 아브라함이 이것을 완전한 순종에 의해서 획득했더라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아브라함 역시 포도원에서 한두푼 번 것을 가지고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일군들처럼 자신있게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불가능한 얘기다. 인간, 특히 죄많은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감히 하나님을 빚쟁이로 몰 수가!(롬 11:35) 불가능한 얘기다. 모든 영광을 거두시는 데 있어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곧 은혜를 위한 은혜를 마구 베푸시는 것이다(요 1:16). 그러므로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 곧 그러한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의 행위에 그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 자, 그러한 보상을 설령 받을 만해도 그걸 거절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몸을 내어던지는 자, 바로 이런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사죄받아 구원받는 모든 자들의 자격을 갖춘 자들인 것이다. 이 모두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곧 이전의 불신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의 하시는 일이다. 그의 이전 불경건이 그가 믿는 순간 획득하는 칭의에 방해거리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한 자(to.n avsebh/)다. 곧 아브라함도 회개 이전에는 갈대아 우상 숭배라는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다니던 사람이다(수 24:2). 그러므로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록 하나님은 거역하는 죄는 깨끗이 없이해 주시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다.

Ⅳ. 그는 다윗이 죄의 면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편을 인용해서 말을 계속하고 있다. 칭의의 대종을 이루는 죄의 면제야말로 인간의 행복과 축복의 기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은 전혀 죄가 없는 인간이나 또는 죽을 만한 건덕지가 전혀 없는 그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그렇다면 인간은 그처럼 죄악투성이요, 하나님은 그처럼 의로우신데 복되다 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저는 "무죄입니다"하고 말할 수는 없어도 사면 신청을 내서 그의 탄원이 허락된 그런 사람은 복되다는 말이다. 이것은 시편 32편 1,2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1. 용서의 특색. 이것은 채무나 범죄의 면제다. 곧 그것은 죄를 오물이나 영혼의 발가벗은 수취로 보고 덮어 준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시고 얼굴을 가리우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의 복됨의 바탕은 우리의 결백이나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제 아무리 가려 있어도 오물은 오물로 남는것이요 칭의란 전에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치거나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게 아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몫으로 쳐주지 않으시는 데 있다. 곧 "죄로 인정치 아니하시는 것"이다(8절). 이것이야 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마땅히 엄정한 공의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 것이요 심판석에까지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며 죄를 꼬집어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의 행위요 하나님 편에서 진 채무로서의 용납과 보상으로 봐서는 안된다. 따라서 바울은 6절에서 이걸 가리켜 행위와 무관한 의의 전가라고 말하고 있다.

2. 용서의 복됨. "……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행위가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할 때의 "복이 있다"는 말은 복된 자들의 특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요 "그 불법(죄악)의 사하심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할 때의 "복이 있다"는 말은 축복의 본질과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걸 명확히 해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에게 이런 저런 일을 베푸는 것은 내가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다(히 8:12)

 

4:2 없음.

 

4:3 없음.

 

4:4 없음.

 

4:5 없음.

 

4:6 없음.

 

4:7 없음.

 

4:8 없음.

 

4:9

아브라함의 경우(2)(로마서 4:9-17)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처럼 의롭게 된 시기와 이유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특별히 이 점에 대해 덧붙일게 많기 때문이다. 그가 의롭게 된 것은 그가 할례받기 이전이요 율법을 받기 이전이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Ⅰ. 할례 이전에 의롭게 되었다(10절). 아직 그가 무할례 상태에 있을 때 그의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의로 여겨졌다. 그렇게 전가된 것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이고 17장 이전에는 할례받은 일이 없는 걸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14년 전" 도 어떤 사람들 얘기대로 "25년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바로 이점을 바울은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뇨?"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용서받고 용납 되었다는 사실은 무할례 이방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도 있으며 동시에 마치 모든 행복을 독점한 것처럼 할례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교만과 기만을 꺾을 수도 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할례시에 이신칭의 받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할례를 "믿음의 의에 대한 날인"으로(11절) 삼으려는 뜻에서다. 계약의 취지가 다 해결되기 전에는 도장을 찍을 수 없는 것이다. 봉인이란 이전에 이미 선약이 있었음을 전제로 하며 그 선약에 대한 의식적인 확정과 비준을 뜻한다. 아브라함의 이신칭의를 수 년 동안 서약에 의한 양도로만 남겨 두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은 이걸 받아들였다. 물론 그게 피를 동반하는 절차였지만 그래도 그는 거기에 순응했으며 그걸 특별한 은총으로 여겼으니 곧 "할례의 표"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자.

(1) 의식 일반의 특성. 의식은 예표이자 인이다. 곧 대표하고 가르치는 예표요 비준하고 확증하는 인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은혜와 은총의 표이자 조건적인 약속에 대한 날인이다. 아니 이것은 이중적인 날인인지도 모른다. 곧 하나님은 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걸 날인하시며 우리는 여기서 그분에게 당신의 백성이 되겠다는 것을 날인하는 것이다.

(2) 특별히 할례의 특성. 이것은 구약에 있어서 처음 시작되는 의식이다.

[1] 이것은 "예표"다. 우리 모두가 타고난 본래적 타락의 표시이자 영적 할례를 받아 그게 끊겼다는 표시이니 곧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의 표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표요, 가견적 교회에 입회한다는 표요, 세례를 예시하는 표다. 후에 복음 이후로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피의 의식이 철폐되었을 때 할례 대신 들어선 게 세례다. 이 표는 "거기에 담겨진 내면적이요 영적인 은혜에 때한 외적이요 이해가능한 표시"였다.

[2] "믿음의 의해 대한 날인" 일반적으로 말해 이것은 은혜, 특별히 이신칭의의 은혜에 대한 계약이니 한 마디로 은혜의 계약이요 이것이 10장 6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구약의 약속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신 31:12). 어린이들도 은혜의 계약에 대한 날인을 받을 수 있었다면(이것은 이들이 그 계약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제 와서 그들이 계약을 저버리고 이 날인을 받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얼마만한 형벌을 받았으면 이렇게 배척을 받고 무능력하게 되었겠는가. 이들은 믿는 자의 후손이 받는 세례를 배척할 뿐 아니라 그걸 무효화하고 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 그가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하려는 뜻에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그것이 맨 먼저 발견된다는 얘기다. 역사상 그 어느 인물보다도 아브라함을 선두로 보다 명백하고 충만한 은혜의 계약제도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그를 가리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야발이 목축업자들의 조상이요 유발이 음악가들의 조상인처럼 그가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요 탁월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창 4:20, 21).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듯이 살아있는 믿음의 귀감"이라는 뜻이요 조상의 자유, 특권, 존귀, 그리고 대지가 그 자녀들에게 상속되듯이 그는 이신칭의의 살아 있는 선례라는 얘기다. 아브라함이 믿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던 것은 특별히 그에게서부터 [마그나 카르타]가 갱신되었기 때문이다.

(1) 그는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이다. "비록 저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흠정역)"(무할례자로서:개역) 말이다. 이것은 세리 삭개오가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로 쳐지는 이치와 같다(눅 19:9).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을 때 할례를 받지 않았었으니 무할례가 결코 장애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이방인들의 의심과 두려움을 미리 예견하여 얘기한 만큼 그들에게도 이 의가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은 명약관야하다(골 3:11; 갈 5:6).

(2) 그는 믿는 유대인들의 조상이다. 이들은 단지 할례를 받은 것만이 아니라 곧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믿는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할례 받을 자"요(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흠정역) 그 "믿음의 자취를 쫓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예표 뿐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본질도 가진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아브라함의 계보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귀감을 따라가는 자들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누가 교회의 조상들의 알찬 자녀들이요 합법적인 후계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명함만 내미는 자들이 아니라 그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니 그 중단 상태가 얼마동안이건 이 자취를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상속의 선에 들어선 자들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자녀로서의 영광과 특권에 하등 관련이 없는 자들이 더없이 소릴 지르며 뻔뻔스레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이라고 불러대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가장 떳떳하게 그리스도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은 겉모양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함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이다.

Ⅱ. 이 이신칭의는 율법 이전에 주어졌다(13-16절). 앞에서 얘기한 것은 칭의를 할례에 국한시키는 자들을 상대로 한 얘기고 여기서는 칭의를 율법으로 받들겠다고 떠드는 자들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이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실시되었다(갈 3:17, 18 비교). 이제 몇 가지를 살표보자.

1. 그 약속의 본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선택된 지역인 가나안 땅의 상속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에게서 태어나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 현재의 삶의 위로의 상속이니 되는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것이요 세상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땅 한 구석을 갖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모든 땅의 상속이었던 것이다. 아니 이 약속은 여기서 말하는 후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갈라디아 3장 16절에 있는대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따라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후사요 세상 끝이 그의 소유며 아브라함이 그렇게 후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일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하신 약속을 한 말이다(창 12:3).

2. 약속이 주어진 방법.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약속은 당시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니요" 믿음을 보고 주어진 것이니 이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본토를 떠난 데 있다(히 11:8). 이제 이것이 믿음에 의한 것인 만큼 율법에 의한 것일 수는 없다. 바울은 이 양자의 모순성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14,15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곧 율법의 혜택을 받는 자들, 그들뿐이라면(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만이 이 세상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떠들어댔으며 아직도 그러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만다는 것이다. 전체 율법을 완전히 실천해야만 한다는 게 약속에 필수 조건으로 들어 있다면 그 약속은 절대로 성취될 수 없으며 또 우리가 거기에 매달릴 아무런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율법에의 완전 순종으로 생명에 이른 길과 무흠하고 죄없는 결백이란 전반적으로 배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율법 그 자체가 다른 길을 열어 제시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는 15절에서 입증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곧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우리들 속의 분노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막으면 물이 넘치듯이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는 육적인 마음을 충동질하고 부채질한다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를 상대로 하는 진노가 하나님 속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이 이루는 것은 이것뿐이다. 곧 진노를 발견할 뿐이다 아니 우리의 율법 불이행이 이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진노를 이루는 율법에 의해서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율법이 어떻게 진노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그는 다음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물론 누구나 다 익히 아는 말씀으로 율법이 있어야 그걸 깨뜨리는 범죄도 있고 이 범죄는 도발적인 성격을 지닌 만큼 율법은 진노를 이루 따름이다.

3. 이 약속이 믿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이유. 세 가지 이유에서다(16절).

(1)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다. 곧 이 약속의 존귀가 은혜에 돌아가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곧 "율법이 아니라 은혜요, 빚이나 공로가 아닌 은혜"인 것이다. 건축물의 온갖 돌맹이에게 특별히 그것도 맨 꼭대기 돌에게 하나도 "은혜"요, 둘도 "은혜"라는 걸 들려 주기 위해서다. 믿음은 특별히 주시는 은혜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은혜에 의해서"라는 말과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엡 2:8). 하나님께서는 모든 왕관이 저 은혜, 거저 주신 은혜의 발 아래 내 던져지고 하늘 가락에 맞춰 "오 주여, 우리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에 찬송을 들립니다"하는 노래가 불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이는 그 약속을……굳게 하려 함이라." 첫째 언약은 그것이 행위의 언약인 만큼 확실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실패로 말미암아 거기에 담겨진 축복마저 끊기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새로운 언약을 보다 더 확고부동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새로운 길이 제시된 것이다. 물론 이 길은 "행위에 의한"것이 아니라(만일 그랬더라면 그 약속이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육신은 언제고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끊임없이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구원의 위탁자로 모시는 "신앙에 의한"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어야만 모든게 안전하다. 따라서 이 언약은 모든 사리에 합당하게 제정되었으므로 확실하다(삼하 23:5).

(3) "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다." 그게 만일 "율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고 말았을 것이다. 곧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9:4)이 잇는 유대인들에게만. 그러므로 그 약속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곧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후손뿐 아니라 영적인 후손도 거기에 연관이 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에 의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이 포괄적이게끔 곧 모든 참된 신자들을 다 포함하도록, 할례나 무할례가 서로 맞부딪히지 않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17절에서 창세기 17장 5절을 인용하고 있다. "큰 아비"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열방의 큰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곧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후의 모든 신자들이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아 그를 "아비"라 부르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을 가리켜 유대 종교에 귀의한 모든 개종자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보라, 그는 온 세상의 아버지요 온 세상은 신의 주권의 날개 아래 둥지를 치도다"(Maimonides).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없음.

 

4:14 없음.

 

4:15 없음.

 

4:16 없음.

 

4:17 없음.

 

4:18

아브라함의 경우(3)(로마서 4:18-22)

언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살핀 후에 여기서 사도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묘사하며 그걸 우리도 본받도록 추천하고 있다.

Ⅰ. 그가 믿은 대상.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믿음이 붙잡고 늘어진 대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 하나님에게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포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것들에 대한 믿음을 100프로 확신시켜 줄 바로 그것이었다.

1.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아브라함 부부가 죽은거나 다름없는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열방의 아비"로 삼겠다는 약속이 이뤄졌는데도 그는 하나님을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본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아브라함이 다 늙었을 때 아기를 낳게 한 것도, "허망과 죄로 죽었던" 이방인들을 신령한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도, "허망과 죄로 죽었던" 이방인들을 신령한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도 다 하나님의 일이다(엡 2:1; 1:19, 20 참조).

2.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 곧 태초에 그러했듯이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다(창 1:3; 고후 4:6). 죄인의 칭의와 구원, 그리고 자기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의 영접은 없던 일을 있는 것처럼 은혜롭게 불러 주심이요 없던 것을 낳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그의 절대권능, 그리고 지배를 말해 주는 것이니 다른 지주가 모두 흔들리고 뒤틀려도 끝까지 견디는 신앙의 막강한 지주인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잡고 늘어지며 그 해답을 얻는 게 신앙의 지혜요 현명한 처사다. 하나님의 전 충족성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기에 바로 그 전 충족성에 의지하고 버티는 것이 신앙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바 그분 앞에서 열망의 아비"가 되었다. 곧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다. 또 그는 "그가 믿은 바 그분과 같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 곧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꼭 아브라함이 이런 경우였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그에게 일치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다.

Ⅱ. 어떻게 믿었는가. 여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함이 여러 가지로 확대 묘사되어 있다.

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18절). 바랄 수 없는 중에라는 말에 있어서의 바램은 자연적인 소망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모든 감각, 이성 및 체험은 소망을 부정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제 2원인도 가능한 것 같지 않고 그의 소망을 달래 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었다. 곧 "소망 중에 믿었다." 이 때 이소망은 그의 신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 충족성을 생각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곧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고저하는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전능한 은혜에 의해 이처럼 그를 바랄 수 없는 중에 믿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만대에 걸쳐 위대하고 강력한 신앙의 귀감이 되게 하신 것이다. 믿음의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으로서 일상적 신앙보다 더 뛰어난 뭘 그 믿음에 소유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는 곧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 최고의 수준에 까지 오르고 따라오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의 노력이 그리고 향해 치켜올려지고 북돋아지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아니면 이것은 그가 믿은바 약속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곧 창세기 15장 5절에 있는 대로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늘의 별과 같이 헤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이 그가 믿은 바요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6절). 이 경우에 있어서 그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이뤄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불신앙이 삿대질하는 억측과 추측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불신앙이 삿대질하는 억측과 추측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믿음이다. 그는 방금 전에 자기는 자식이 없이 그대로 지날 것이며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라"는 결론(2, 3절)을 내렸으니 바로 이 불신앙이 그의 신앙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 노릇을 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가지게 된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 가운데 자기 몸을 고려치 않았다. 흠정역). 그의 육체는 이제 죽어 있었다. 곧 어린 아이를 낳기에는 절망적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력과 정력은 사라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두라에게서 계속 그의 자녀를 두었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특별한 축복 곧 약속의 자녀를 마련하시고저 할 때는 대개의 경우 그 축복 자체에 거의 사형선고를 내리시고 그리고 통하는 모든길을 차단하시고 만다. 요셉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에 노예가 되어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고려치 않았다(ouv kateno,hse - "그는 여기에 그의 생각을 집착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창 17:17)하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큰 만족을 바라는 의미에서의 경탄의 언어이지 의심과 불신의 언어가 아니다. 그의 믿음은 이러한 생각을 넘어 서 있었으며 그 약속의 신실성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치 않은 상태였다. 곧 이 생각에 도취되어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것이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 가운데 자기 몸을 고려치 않았다." 인간으로 하여금 곤경에서, 곧 그것도 약속의 길에 놓인 형식뿐인 곤경에서 엎드려지게 하는 것은 믿음의 약함뿐이다. 그게 육신의 현명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약속을 어렵게 만드는 모든 곤경의 심연만을 들여다 보는 것은 믿음의 약함 그것이다.

3.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불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비틀거리지 않았다(흠정역 20절). 곧 제 2원인들의 짜증과 실망을 고려치 않았기 때문에 비틀거리지 않았다(ouv diekri,qh-그는 논박치 않았다). 여기에 어떠한 형식의 자문자답도 하지 않았으며 머뭇거리지도 않고 오히려 의연한 자세로 이 약속에 모든 것을 걸었다. 논쟁이나 다툼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미 결정된 사항으로 보고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는 얘기다. "불신앙 가운데 비틀거리지 않은"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비틀거리는 저변에는 불신앙이 깔려 있을 뿐이다. 우리가 비틀거릴 때 손해 보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다.

4.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믿음이 단련을 통해 굳혀지게 된 것이다. 약한 믿음이라고 배척하지 않고, 상한 갈대라고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끄진 않지만 강력한 믿음은 더욱 칭찬을 받고 존귀케 되는 것이다. 그의 공포를 넘어선 승리 가운데 그의 신앙의 위대함이 들어났다. 그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불신앙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가운데 그를 모독하듯이(요일 5:10) 신앙은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걸 확증하므로 그를 영광되게 하기 때문이다(요 3:33).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에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 권능, 거룩, 선, 그리고 그의 신실성을 들어냄으로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도 "누가 남을 신뢰한다는 말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를 신용하고 존경한다는 뜻이다"는 얘기들을 하듯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우리 주님께서도 믿음처럼 위대한 것이 따로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마 8:10; 15:28). 믿음, 그것도 위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그만큼 영광스럽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 곧 위대한 믿음을 영화롭게 해 주신다.

5.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plhrofo rhqei.j - 더 없이 큰 확신에 휩쓸리다) 이말은 전 속력을 다해 돛을 높이 들고 항구로 진입해 들어오는 배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져 오랫동안 쪽을 못쓰고 마는, 그래서 순풍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유혹의 폭풍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항해사로, 그의 약속을 자기의 나침반과 해도로 삼은 아브라함은 위대한 모험가처럼 모든 돛을 높이 매달고 거센 바람과 구름을 마다 않은 채 항해사의 지혜와 힘을 믿고서 고난을 무릎쓰고 당당하게 항구에 들어서는 무쌍한 용사로 등장한다. "그가 능히 이루실 줄"을 믿는 믿음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기초한 그의 확신이 이 정도였다. 대개 우리의 방황은 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거기에 자신을 고정시키려면 그가 약속하신 바에 대해 그가 신실하실 뿐 아니라 능히 이루실 수 있는 걸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2절). 그러한 확신 가운데 그가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의 약속에 걸었기에 하나님은 은혜로이 그를 받아들이셨으며 그의 기대를 응답하실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축복을 베푸신 거이다 그의 약속만을 철저히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고 그의 영광에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기에 그는 은혜롭게 이것을 의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물론 그 자체에 받아들일 만한 공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우리는 왜 신앙이 우리 칭의의 제 1 조건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곧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은혜이기 때문이다.

 

4:19 없음.

 

4:20 없음.

 

4:21 없음.

 

4:22 없음.

 

4:23

칭의의 열매(1)(로마서 4:23-25)

본장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것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하고 있다. 곧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걸 충분히 증명하고 나서 그는 그의 칭의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요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목적을 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역사적 추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어떤 반세례파 사람들 말처럼 할례는 오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는 "믿음의 의의 날인"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만 특권으로 주어진 특유한 칭의의 방법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구약 성경 인물에 대한 설명은 단지 역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곧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며 관심을 사려는 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우리를 지도하고 우리의 모범(고전 10:11)이 되며, "우리의 교훈"(15:4)이 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특별히 아브라함에 관한 이 기사는 "우리도 위함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며 받아들이고저 하는 게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해 주려는 것이다. 곧 너무도 미천하고 악해서 그 특권과 실천에 있어 아브라함을 따르기에 심히 부족한 우리들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위함이니 아브라함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조상들뿐 아니라 말세에 처한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적용은 간략하다.

Ⅰ. 우리의 일반 특권.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것이다. 복음의 칭의 방법은 전가된 의로서 "그것이 전가될 것이다(me`llei logi,zesqai)"하는 식이다. 여기서 미래형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이 자비가 계속되리라는 걸 뜻한다. 곧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두시는 한, 그리고 칭의 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현재나 장래나 그것은 동일하다는 얘기다. 일단 무진장한 샘물은 열렸기 때문이다.

Ⅱ. 우리의 일반 의무이자 이 특권의 조건은 믿음이다. 이 믿음의 대상은 시의 계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계시의 내용은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있어서 계시의 내용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계시의 차이가 이 믿음이라는 걸 변경시키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은 태에서 이삭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으며 우리는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의 동일한 능력의 행사를 믿어야 하니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삭을 일으켜 세움은 상징적인 것이요(히 11:19),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이 그걸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능력을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담보로 일으켜 세워 주신 그의 은혜를 의지해야한다. 이에 따라서 사도는 25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이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구원이라는 문이 매달리는 두 돌저귀다.

1. "그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죄의 희생 제물로 내어 바치신 것이다. 사실이지 그는 죄 때문에 악인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 죄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백성의 죄다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 우리의 죄책을 결말 지으시려고, 신의 공의를 충족시키려고 돌아가셨다.

2. 그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칭의를 완전하게 성취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의 죽음의 공로로 그는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으며 그의 부활로 채무소멸을 가져오신 것이다. 그가 묻히셨을 때 그는 우리의 채무 때문에 붙잡힌 죄수가 된 셈이며 이것을 그는 자신을 담보로 지불하셨다. 제 3일에 천사가 내려와 그 돌을 굴려내고 거기 갇힌 죄수를 해방시켜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공의가 충족되었다는 지상 최대의 확증이 아닐 수 없다. 빚이 갚아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저 죄수를 풀어 놓아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강조하고 잇는 것이다. 죽으신 이도 그리스도요 "다시 살아나신 이"(8:34)도 그리스도시다. 따라서 이 모든 점에 비춰 볼 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의롭게 됨이 우리의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의지 때문이요 이걸 조건으로 우리의 무죄와 구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것을 모든 우리의 우로의 근원과 원천으로 앞장에서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4:24 없음.

 

4: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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