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혜택과 반론 반박(로마서 3:1-18)
Ⅰ. 여기서 사도는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 어떠한 진리도 이처럼 명확하고 단순할 수 없지만 사악한 재치와 타락한 육의 마음은 언제고 이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신의 진리가 이런 저런 트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제 1 반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동일한 입장에 있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그 얼마나 유일무이한 민족(신 33:29)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특유한 보배며 자기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강조하셨던가. 그가 할례를 저들의 교회 회원된 뱃지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인(印)으로 제정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평탄작업에 급급한 교의가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 모든 특권을 부정하고 할례제정에 먹칠을 하며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해답. 유대인들은 어쨌든 위대한 특권과 존귀를 누려 받은 백성으로 위대한 수단과 방편을 소유한 자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절대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2절) 그것이 주는 유익은 "범사에 많다." 문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다 열려 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교회의 여러 가지 특권으로 해서 이 문에 이르는 데 보다 더 올바른 길이 주어져 있었다. 이 교회의 여러 특권이라는 것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개선 발전해 나가지 않을 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로마서 9장 4,5절에서는 유대인의 특권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 한 가지[사실은 이것도 전체와 맞먹는(instar ominum) 것이지만]를 들고 있다.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 할 때의 구약 성경, 그 중에도 "산 말씀"(행 7:38)이라 불려지는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련되는 모든 모형과 약속, 예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계시된 말씀으로 신탁으로서의 영원한 가치와 무오한 진리성을 가진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우림과 둠밈을 가리켜 [로기아](lo,gia) 곧 "신탁의 말씀"(oracles)이라 부르고 있다. 성경은 성경이라는 갑옷의 가슴받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신탁의 유무를 가리는 데 있어 율법과 신구약의 증언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복음도 신탁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히 5:12; 벧전 4:11). 이제 이 신탁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위임된 것이니 구약은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모세와 선지자들도 자기 동족으로 자기들과 같이 살았으며 우선적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상대로 그리고 그들을 위해 전파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뒤에 오는 세대와 교회를 대신해서 이들이 수탁자 구실을 한 것이다. 구약은 이들의 손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후대에 전달되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도서관원으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소용과 유익을 위해 그리고는 온 세상을 위해 이 성스러운 보화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이 문서를 보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일점일획이라도 상실하지 않고 충실하게 보관하였으니 이점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감사치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구원의 독점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첫째로"(prw/ton me.n ga.r)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의 최고 특권이요 본질적인 특권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향유야말로 한 민족의 첫째가는 행복이 아닐 수 없는데 맨 먼저(imprimis) 그들이 이 혜택을 입었던 것이다(신 4:8; 33:3; 시 142:20).
제 2 반론. 유대인들이 "산 말씀"에서 누린 혜택에 비춰볼 때 그들중 대다수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신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방인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복음의 원수로 남아 있는데, 무슨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에게 맡겨졌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3절).
해답. 아직도 유대인들 중에 더러는, 아니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사도는 이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 하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고집이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의 말씀에 담겨진 메시야 예언을 무효화하거나 번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더라도"(흠정역, 사 49:5) 그리스도는 존귀한 분이다. 한 세대가 있어 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거짓말장이라 떠들며 나팔불어 봤자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이요 그의 목적은 끝을 보며 모든 결말이 날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발설하신 말씀을 지켜주시며 당신의 신탁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아니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을 명백히 해 두도록 하자.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심하고 팽개치는 게 낳을 것이다. 다윗이 인간 모두는 거짓말쟁이라고 한 말을(시 116:11) 여기서 바울은 일부러 사용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버릇은 저 옛 인간의 앞잡이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의복이다. 모든 인간은 정처가 없이 변화무쌍하며 "헛된 것과 거짓말"에 치우쳐 있으니(시 62:9) "한가지로 헛된 것"(시 39:5)뿐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비교하라면 인간은 모두 거짓말쟁이 라는 걸 들 수 있다. 사람 사람마다 거짓말쟁이 라는 걸(인간 불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알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할 때"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하다는 걸" 생각하면 적잖은 위로가 된다(시 12:2, 6). 이것을 좀더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시편 51편 4절의 "주께서 의롭다 함을 얻으시려고" 하는 말씀을 (시 51:4)인용하고 있다. 그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는 인간들의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존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2. 둘째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으면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공의, 진리, 선하심 등을 어떠한 모양으로든 주장하고 보전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롭게 하며 그에게서 불의를 찾지 않겠다는 걸 자기 짐으로 여기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에 대한 평판은 접어 두고 보자. 그게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헤엄쳐 달아나 버리거나 중요한 게 못된다. 따라서 제 아무리 그 전체가 삐뚤어져 보여도 이것만은 곧"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하는 결론을 분명히 하도록 하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실 때(사 51:4), 아니 여기 표현대로 빌리면 그가 "판단받으실 때" 당신의 말씀에 있어 의롭다함을 얻으시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처사를 두고 싸우려 든다면 필경 그 심판은 하나님 편에 유리하기 마련이다.
제 3 반론. 여기서 인간의 못된 마음은 스스로 죄를 두둔하고자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과 타락상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의를 들어내게 하였다는 점을 얘기한 바 있다. 이제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든 죄악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영광을 넘어Em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돋보이게 들어낼 뿐이요, 어쨌든 그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어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손해 보는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와 불신앙을 그렇게도 가혹하게 벌하신다는 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유대인의 불의가 이방인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들어냈다면 유대인들이 이처럼 지탄받을 이유는 뭔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5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뭔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 질문이 반론 형식을 취하려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게 아니냐?(mh. adikoj o` qeo.j) 불신앙의 마음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공평한 처사를 두고 트집잡고 지극히 의로우신 그분을 정죄하려 들기 마련이다(욥 34:17).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곧 나는 이걸 못된 육의 마음에서 나온 말씨로 보고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런 제안은 어쩌면 헛되고 어리석으며 오만불손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답.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너무도 턱없는 생각이라는 얘기다. 하나님 편에 그리고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불명예를 돌리는 그따위 제안은 협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악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감히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는 아브라함의 논리와 흡사한 얘기다. 틀림 없이 그는 공의를 행하실 것이다. 만일 그가 무한히 공의롭고 의롭지 않다면 그는 만민의 심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공의를 미워하시는 자면 어찌 처리하시겠느냐?"(욥 34:7) 18,19절도 비교 검토해 보시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그걸로 영광을 거두신다 해서 인간의 죄악이 그만큼 덜 추악하고 비열해지는 게 아니다.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쩌다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저 죄인에게 감사할 일도 못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공의와 공평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영원히 묵살하기에 충분하다. 절대적인 주권자의 처사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의 하는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상소할 데 없는 대법원의 판결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 4 반론. 앞의 반론이 반복되고 있는데(7, 8절) 교만한 마음이 거하는 거짓의 피난처는 좀처럼 부숴지지 않으면서 끝까지 속임수를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반론을 더 이상 절묘할 수 없게 그들의 말대로 표현한 바울의 수법에는 이미 그 해답이 담겨져 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궤변가들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는 식이다. "만약 내 거짓말이, 곧 나의 죄악이(모든 죄악에는 특별히 가르치는 자의 죄악에는 거짓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성을 영화롭게 들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 정죄받을 이유가 뭔가?"아니 오히려 여기에 힘을 입어 은혜가 더 풍성해지도록 계속해서 죄를 짓는게 좋지 않겠는가?" 얼핏 보아도 너무나 뻔뻔스런 논리요 소름을 끼치게 하는 얘기다. 강포한 죄인이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끈질기게 계속되기" 때문이다(시 52:1).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는 얘기는 죄인들의 입보다 마음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얘기로 스스로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 악한 생각을 들춰 얘기하면서 그는 괄호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울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의 발상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과 종들이 그처럼 터무니없는 내용을 유포하는 것으로 욕먹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알세불과 한짝이라는 욕을 먹지 않으셨던가? 자신들이 주장에 반대되는 것을 유포하는 것으로 욕먹는 사람들은 허다하다.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이처럼 먹칠하는 것은 사람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중상을 두껍게 발라 두라. 그러면 거기에 묻혀들 자도 더러 있으니까(Fortiter calumniari, aliquid adhaerebit)" 하는 식이다. 제 아무리 선한 인간도 제 아무리 튼튼한 진리도 중상의 피해는 입기 마련이다. "비방하여"(Blasfhmo,umeqa)라는 말을 쌘더슨 감독은 이렇게 풀어 얘기하고 있다. 통상 성경에서 말하는 비방(모독)은 최고급의 중상으로 곧 하나님을 두고 악평하는 것이다. 주의 종과 그의 교의를 중상하는 것은 보통 중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으로 일종의 신성 모독이다. 왜냐하면 이건 그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소명과 일 전부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살전 5:13).
해답. 그는 이제 더 이상 반박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저들의 저주는 공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중상 모략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당신의 진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저주해 주신다는 얘기다.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명목으로 용감하게 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죄에서 선이 나올 것이라는 구실로 고의적으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 구실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서 저들의 저주가 정당화되며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추측과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죄 가운데 머물고자하는 속셈과 뜻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곧 고의적으로 죄를 선택하려는 악한 뜻과 죄에서 선이 발생한다는 구실로 그 죄를 얼버무려 버리려는 속셈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저주는 정당하며 어떠한 종류의 핑계를 가지고 저들이 놀아나든 그 어느 누구도 그 큰 날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모든 육체가, 곧 지금도 그분에게 반항하여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는 저 교만한 육체도 그분 앞에서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들이 불신가운데 고집과 독선으로 재촉한 유대인들의 교외와 유대 민족의 다가올 멸망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Ⅱ. 바울은 이제 이상의 반론을 물리치고 나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없이 인류 전반에 걸쳐 전반적인 죄악과 타락에 대한 주장을 다시 펴고 있다(9-18절).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받은 우리는 아느뇨?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아니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믿지 않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가? 무슨 말씀을!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요, 거저 주신 은혜가 있기 전의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한 가지로 타락해 있었다." "다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모두들 죄책 아래 있다는 얘기다. 곧 형 집행 하에, 영원한 멸망과 저주라는 속박의 굴레를 차고 있다는 얘기다. 지옥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짐(시 38:4)과 같은 죄에 눌려 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고 있다(19절). 다시 말해서 죄의 통치와 지배아래, 마치 잔인한 독재자와 주인 아래 있듯이 거기에 매여 있어서 곧 악행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질질 끄는 멍에를 메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prohtiasa,meqa). 이것은 법적 용어로서 우리가 이 사실의 형편없는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죄를 확정판결하였다는 얘기다. 이 선언과 판결에 대해서 그는 은혜로 억제하거나 은혜로 변화하지 않는 한 타락한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하는 구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우리의 타고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본 10, 11, 12절은 시편 14편 1-3절에서 인용한 것이요 이것은 시편 53편 1-3절에서도 반복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 이하의 말씀이 70인 역의 시편 14편에도 들어 있는데 어떤이들은 사도가 바로 이걸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후기 70인역에 바울의 강론이 종합되어 있다고 보고 싶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유대인이나(사 59:7, 8) 도엑(시 149:3) 같은 특별한 경우의 인물의 타락상을 인용하면서 한 사람이 지은 그 동일한 죄는 인간 모두의 본성에 일치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다윗이나 이사야의 시대로 말하면 좀 나은 시대였지만 바울은 이걸 예로 들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4편에서 얘기된 것은 분명히 "인생" 전부를 두고한 말이요 그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관찰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5절에서처럼 세상을 "굽어 살펴 보신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진리에 일치하는 것이다.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솜씨를 각각 보살피셨을 때 모두가 아름답구나 하고 기뻐하시던 그분께서 이제 인간이 모든 걸 망친 이후에 다시 굽어 보시니 모두가 더럽구나 하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습관적인 면의 두 모습(1) 선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1] "의인은 없나니" 곧 올바른 도덕관을 가지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을 때 차려 입었던 바로 그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이 말은 곧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는 얘기다. 온 인류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눈 길은 한 사람 의로운 노아에게 멈췄던 일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얘기다. 은혜 받아 의화되고 성화된 자들 마저도 본성상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 인간 중에 의를 타고난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간도 필경 죄 가운데 잉태되지 않을 수 없었다.
[2] "깨닫는 자도 없고"(11절) 문제는 이해력의 타락에 있다. 곧 눈이 멀게 되고 타락하여 삐뚤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인간들에게 미미한 지각이라도 들어 있다면 종교와 의가 주장하기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이 없는 데서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죄인들은 바보들이다.
[3]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곧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들, 이들에게 지각이 없는 걸로 간주하는 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른다. 육적인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데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분 과 원수다.
[4]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이 지구상의 무용지물, 곧 귀찮은 짐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죄의 상태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은 해 아래서 가장 쓸모 없는 피조물이다.
[5]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지구상에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가 눈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전 7:23). 죄인들이 선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행하는 그 행위에도 본질적인 잘못은 들어 잇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전무하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온갖 결함은 악의 근원이다"(Malum oriturex quolibet defectu).
(2) 악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다 치우쳐"(모두 탈선하고 말았다), 인생의 최고 목표인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길을,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으셨지만 인간은 그걸 제발로 팽개치고 말았다. 인류의 타락이야말로 배도가 아닐 수 없다.
2. 실제적인 면. 이처럼 타락한 인류에게서 뭘 바랄게 있겠는가
(1) 그들의 말 (13, 14절).
[1] 잔인성.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곧 가난하고 순진한 자를 삼키려 들며 할 수만 있으면 해를 끼칠 틈만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옛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바로 이 자의 이름이 아바돈이요 아볼루온이니 곧 파괴자이다. 설혹 이들이 공개적으로 이 잔인성을 내보이지 않는 경우라도 은밀하게 해악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곧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담겨 있는 것이다(약 3:8). 곧 자기 이웃의 명성을 질책으로 나팔불며 그들의 생명을 거짓 증거로 앗아가는 불치의 독이다. 이 구절은 시편 5편 9절에서와 140편 3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2] 속임수.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여기에 그들이 악마의 자손이라는 증거가 들어난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말쟁이 요 모든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게 이들의 부단한 과제인 것이다.
[3] 저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거룩한 이름에 모독을 돌리려 하며 형제들에게 악심을 품은 나머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혀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약 3:9). 그러나 저주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이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시 109:17-19).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이러한 죄를 범하는 가운데 스스로 아직도 죄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다는 걸 곧 태어날 때 그 상태에 아직 그대로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자들이 그 얼마인가!
(2) 그들의 행동(15-17절).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르다." 곧 그들은 악한 일을 꾀하는 데는 약삭빠르며 그러한 기회를 포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곳에는 "파멸과 고생"이 따르고 있으니 이것이 저들의 동무다. 곧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들이 사는 사회와 이웃, 그리고 그들의 조국과 민족 마침내는 본인들 스스로에게 파멸과 비참이 따르고 만다. 그들의 종착역에 기다리고 있는 파멸과 비참(죽음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끝장이지만) 이외에도 그들의 죄가 바로 자신들의 처벌이다 자신의 죄에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인간에게 또 있을 수 있겠는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곧 그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과 평화롭게 사는 건지 또 스스로를 위해서는 어떻게 평화를 획득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이 평화를 떠벌일 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 따위 평화는 악마의 궁전에나 있는 것이요 진정한 평화에 대해서는 이들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평화에 관한 일은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잠언 1장 16절 이사야 59장 7,8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3) 이 모든 결과의 원인.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하나님 경외가 여기서는 실제 종교의 전부로 묘사되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무서워 할 줄 알고 신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우리의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악한 자들의 눈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는다. 곧 이들은 이러한 인생의 노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다른 목표를 향해 다른 규범을 따른다는 얘기다. 이것은 시편 36편 1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곳에 선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 경외야말로 우리의 영혼에 재갈을 물리며 제길을 달리게 하는 것이다(느 5:15). 반면 일단 이 경외가 사라지고 기도가 뜸해지는 날이면(욥 15:4) 만사는 잽싸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류의 전반적인 부패상과 타락상을 짧막하게나마 살펴 본 셈이며 결론은 오, 아담이요! 그대는 뭘 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이처럼 인간은 가지 가지 못된 일을 꾸며내고 만 것이다.
이신칭의(로마서 3:19-31)
율법의 행위에서 칭의를 구하는 것은 허사요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 받을 수 있다는 게 바울의 결론이다. 이것이 17절에서부터 계속 입증하려는 요점이요 28절에 가서 그의 강론의 요약을 들어내 보여주고 있으니 "명백히 들어날 수밖에 없는 것"(quod erat demonstrandum)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회개의 여지가 없던 순전한 양심의 첫째 율법의 행위도, 제 아무리 고도로 개선된 자연율법 행위도, 의식율법의 행위도(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이해 주는게 아니다), 죄를 가르쳐 주고 또 자긍하게 하는 도덕율법의 행위도, 그 어느것도 칭의를 가능케 할 수 없다는 얘기다. 타락한 상태 곧 그 바닥의 힘에 짖눌려 있는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행위로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고 그걸 값없이 주시는 은사로 알고 받아들이는 참된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아낌없는 은혜로서만이 해결될 문제다. 우리가 죄지은 일이 없었다면 율법에의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나 일단 죄를 짓고 또 타락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로는 이전의 죄책을 속량할 수 없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도덕율법에의 순종이 칭의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눅 18:11).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들고 나온다. 그 하나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말하는 인간의 죄책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Ⅰ. 그는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책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곧 우리가 일단 이겨서 깨뜨려 버린 율법으로는 칭의도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형이 확정되어 버린 역적은 "에드워드 3세"의 25조항을 들고 사면을 청원해 봤자 풀려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일단 율법이 그의 죄악을 발견하고 그를 정죄한 뒤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구제받을 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 법을 어겼다는 게 이미 기정 사실로 된 이후에는 제아무리 뉘우치는 자세로 사면 조항을 들추면서 사면을 요구해도 풀려날 길이 없다. 이제 인간의 죄책상을 살펴 보자.
1. 그는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율법을 자랑하며 그걸로 칭의받을 수 있다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 유죄판결은 유대인에게나 그외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는 것이니 그 이유는 그들의 율법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 아래 잇다고 자랑하며 그것에 대한 배짱이 대단했지만 그러나 "율법은 너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지 않느냐"고 바울은 얘기한다. 그 이유는 "모든 입을 막으려는"뜻에서이다. 의롭게 하고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택하시는 방법을 주의깊게 살펴 보라. 그는 온갖 입을 다 틀어막고 만다. 의롭게 되었다는 자들은 간단히 유죄판결을 받아(유15) 아무 소리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스스로 자기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다(마 22:12). "모든 악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시 107:42).2. 그는 일반적인 인간의 죄책상을 온 세상에 적용하고 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흠정역). 이 세상이 죄악 속에 뒹군다면(요일 5:19) 그건 틀림 없이 "죄책이"있는 것이다. 곧 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마땅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니 본질상 모두가 "진노의 자녀들"이다(엡 2:3). 모두가 죄책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들의 칭의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은 모조리 내어던져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다는 얘기는 무서운 말이다. 곧 만사를 통찰하시는 하나님, 그의 심판에 있어서 속지도 않거니와 속을 수도 없는 그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죄책을 면해 주지 않을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관 앞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죄책 아래 있다. 따라서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입고 나설 의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23절) 곧 본질상 뿐 아니라 실제로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최고 목표인 바로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 이 말은 사격수가 그 표적에 못미치는 것이나. 다리기 선수가 상을 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상을 타지 못하는 우승자가 아닐 뿐 아니라 철저한 패배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부족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1:21)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 곧 하등동물들이 오직 객관적으로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위대하신 창조주를 적극적으로 영화롭게 할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서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으니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그분을 욕되게 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미친 사람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다.
(2)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없다. 모르고 그랬다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우리의 처지, 가진 것, 행위 등 그 어느 것을 가지고 떠들어 봤자 그건 오히려 영원히 우리에게 불리한 금반어(禁反語, estoppel)가 되고 말 것이다. 곧 우리 모두는 죄를 범했다는 꼬리표 구실을 할것이요, 그걸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는 있다. 곧 근시안적이요 마음 속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인간들, 똑같이 타락해 있으며 기꺼이 죄악에 뒤범벅이 되는 인간들 앞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악을 대해서는 오래 참으실 수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3)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일에 부족하다. 영광의 시작인 칭의, 곧 하나님의 인정에 이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덧입혀 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고저 하는 온갖 바램과 소망을 내 던져 버린 것이다. 순수한 정직을 가지고 하늘에 이르기는 다 틀렸다. 그리로 가는 통로는 이미 다 막혔다. 생명의 나무에로 통하는 그 길에는 천사가 번뜩이는 칼날을 들고 지켜 서 있는 것이다.
3. 율법에 의한 칭의 기대를 철저히 배제하는 의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율법으로 확신시키고 있다(20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우리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는 이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 할 리 만무하다. 이 율법은 "옳고 그른 것"(index sui eto bliqui)을 재 보여 주는 곧은자(rectum)와 같은 것이다. 율법의 바른 용법과 의도는 상처를 들춰내는데 있는 것인 만큼 치료제가 될 수 없다. 파고드는게 어찌 치료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죄가 뭔지 알려면 율법의 엄격성, 그 범위, 그리고 그 상징적인 면을 면밀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이 자를 놓고 재보면 어디서부터 우리가 빗나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해서 말하고 있다(7:9).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1)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다." 그렇다 타락한 인간 그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도 또한 육체이기 ?문이라"(창 6:3)는 말씀처럼 모두가 죄악투성이요 타락했기 때문에 곧 우리 모두가 육체이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우리 본성에 남아 있는 타락은 우리 자력에 의한 칭의, 곧 육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관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은 앞으로, 영원히 배제하고 말 것이다(욥 14:4).
(2) 그의 앞에, 곧 하나님 보시기에서 칭의가 불가능하나 교회가 보는 관점에서의 율법에 의한 행위의 칭의를 여기서 그는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교회부지 안에 살고 있었으며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양심에 비춰볼 때 곧 "그의 앞에서"는 율법의 행위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사도는 시편 148편 2절을 언급하고 있다.
Ⅱ. 칭의가 기필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기대한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율법의 행위로는 칭의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책을 입은 인간은 영원히 진노 아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절망뿐이란 말인가? 죄악 때문에 입은 상처는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21,22절).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열려져 있으니 곧 복음 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곧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 예정하시고 공급하시면 영접해 주시는 그분의 의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인의 갑옷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0)라고 하듯이 말이다.
1. 이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1) 이 의가 들어났다는 점부터 보자. 복음이 제시하는 칭의의 가도는 고속도로다. 탁 트여 있다. 누구든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구리뱀은 이미 높은 장대에 달려 있다. 어둠속을 헤매도록 내버려 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들여나 보여지고 있다는 얘기다.
(2) 그것은 "율법을 떠나서"다. 그는 여기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방법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곧 이들은 기필코 그리스도와 모세를 하나로 묶어 율법을 견지하며 그 의식을 지키자는 가운데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걸 강요하려 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칭의는 "율법을 떠나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의야말로 완전한 의인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구약 성경에 이미 이것을 가리켜 보여 준 모형과 예언과 약속이 들어 있었다는 얘기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제 길을 가리켜 보여 주고 있으니 곧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의라고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행 10:43). 율법과 선지자를 그렇게도 들먹이기 좋아하는 유대인에게 이건 하나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
(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한 복판에 "기름부음 받은 구주"로 모시는 그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칭의를 가져오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그의 3직 곧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이모든 면에서 그를 구주로 섬기는 것이니 그를 의지하고 그를 영접하여 그에게 매달리는 면에 있어서 모두 그러해야만 한다. 이러한 신앙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이 의와 관련을 맺게 된다.
(5)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그는 지금까지 주창해 오던 것을 다시 밝히고 있다.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기만 하면 똑같이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하나님앞에 환영이라는 얘기다. 곧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 칭의는 "모두에게"(eivj pavntaj), 곧 전체 일반에게 제공되어 있다. 스스로 제외하고 빠지지 않는 자들을 복음은 결코 제외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칭의는 "믿는 모두에게"(evpi. pa,ntaj tou.j pisteu,ontaj)제공되어 있다. 이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왕관으로서, 예복으로서 입혀진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것과 관계가 지어지며 여기에 따르는 모든 혜택과 특권에 대한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는 얘긴가?
(1) 이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dwrea.n tev auvtou/ cavriti). 이것은 오로지 이 "은혜로" 된 것이다. 곧 칭의와 성화를 부정하는 천주교에서 얘기하듯이 우리 안에 이뤄진 은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보이지 않는데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이걸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도 값없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은혜를 아주 순순한 면에서 정당하게 이해하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창 39:4)는 얘기가 나오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곧 그 주인은 요셉이 하는 일이 성공하는 것을 본 것이다. 요셉을 잘봐 줘서 은혜를 베풀 만한 뭐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진짜 거저 주어진 것이요 우리 속에 그걸 받을 만한 뭐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한 것이다 그것이 거저 온다는 말은 맞지만 그러나 그건 그리스도께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이기에 아직도 값없는 은혜의 영광은 불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이 대속적인 만족을 제공하고 받아들인 것이 바로 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영광을 위해서다(25, 26절). "이에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삼으셨으니……"
[1]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시대에도 "속죄소"(i.lasth.rion)라는 모형으로 나타났듯이 위대한 속죄 제물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가 이뤄지고 우리의 행위와 우리 인격이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요일 2:2). 그는 우리 화해의 처음과 끝이시다. 화해자일 뿐 아니라 화해의 본질이니 우리의 제사장, 우리의 속죄물, 우리의 제단, 이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속죄소 안에 계셔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이……세우셨으니" 하나님, 피해자 측에서 먼저 손을 써서 화해하기 위해 중재인을 세우셨으니 곧 이 일에 그를 "예정하셔서"(proe.qto) 영원 전부터 그의 사랑의 조정자를 정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며 마침내 자격을 부여하셔서 이 죄악 세상이 속죄 제물로 들어내 보이셨다(마 3:17; 17:5 참조).
[3]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그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흠정역) 우리가 이 속죄 제물과 관련이 맺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이다. 곧 상처를 낫게 하는 붕대가 주어진 셈이다. 신앙은 이 붕대를 상처난 영혼에 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 문제에 있어서 이 신앙은 속죄를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피"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피가 없이는 속죄가 불가능하며 그것도 자신의 피가 아니면 어느 것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신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 시대의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 이유다(출 24:8). 신앙은 우슬초 다발이요 그리스도의 보형을 흩어 뿌리는 피다.
[4] 신앙에 의해서 속죄 제물과 관련을 맺은 자들은 모두 "전에 지은 죄의 간과"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이 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으니 곧 속죄다. 이걸 위해 그는 오래오래 참으시는 집행유예를 보여 주신 것이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에게 회개할 틈을 주셔서 하늘에 가게 하려는 신의 인내가 우릴 지옥에서 건져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에 지은 죄"를 구약 성도들의 죄로 보고 이 죄도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서 속죄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앞뒤를 다 내다 본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지나간"으로 보자. 우리가 죄악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 인내 덕분이다.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서"(e;n th,| avnoch| tou/ qeou/)라는 말을 26절에 집어 넣어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귀한 두 열매를 강조하는 희랍사본도 여럿 있다. 곧 "속죄를 위해서"(diav th.n pa,resin)라는 말에서의 속죄와 "하나님의 참으심"이라는 말에서의 집행유예가 바로 그것이다. 열매 못맺는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남겨진 이유는 그 주인의 인자함과 정원사의 조정 때문이다. 중개자와 속죄물이 없이는 용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시도 참으실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양자에 있어서 밝히 들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이쪽 편 세상 지옥에 항상 죄인이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5]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하는 식의 표현을 봐서도 그걸 알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속죄물 그 자체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 밝히 들어난 때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보다 못한 것이 죄를 속하려 들?는 어느때고 그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서 죄를, 물론 전가된 죄를 발견하시고 그는 그 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 아들,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따라서 비록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외아들이지만 그에게 우리 모두의 죄짐이 얹혀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는 기꺼이 그에게 매질을 아끼지 않으셨다(사 53:10). "다음으로" 그는 이 속죄물에 의한 사면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내 보여 주고 계신다. 곧 "자기도 외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라." 자비와 신뢰가 더없이 하나로 뭉쳐지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들의 공의를 위해 만들어 준 속죄, 이것을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해위일 뿐 아니라 의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담보물을 쾌히 받아들여 놓고 그에 대한 원금을 다시 받겠다고 나서는 건 하나님의 공의에 안맞는 일이다(요일 1:9 참조). 그는 의로우시다. 곧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얘기다.
(3)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이렇게 하므로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를 잃고 만다(27절). 어떠한 육체도 당신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창의와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 허풍을 배제하는 방향에서 이끌어 오셨다(고전 1:29-31). 만일에 칭의가 율법의 행위로 가능했더라면 이 자랑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면 우리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쓰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법" 곧 이신칭의의 길은 이 자랑을 영원히 배제하고 만다. 왜냐하면 신앙은 의존케 하며, 스스로를 비우게 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은혜요 저 보좌 앞에 갈 자의 왕관을 내어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의화되는 것만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 된다. "믿음의 법"이란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신자들이라고 법없이 내버려진 게 아니다. 신앙도 일종의 율법이다. 그것이 진리 안에서라면 어디서고 작용하는 은혜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자랑할 데가 없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그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28절).
Ⅲ.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는 이신칭의의 범위를 제시하며 그것이 유대인에게만 국한한 특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통용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 그는 22절에서 차별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1. 그의 주장과 입증을 들어보자(29, 30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그는 이런 가정은 얼토당토않다는 점에서부터 이론을 펴 나가고 있다.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저 사특한 소수의 유대인에게만 자신의 은총을 국한하시고 기타 모든 인류는 영원한 절망 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점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모두에게 한 가지 동일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이 제 아무리 차별을 두려 해도 그 차별이 있을 수 없다.2. 그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율법이 이 교의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31절).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헛되이 주어졌다거나 우리에게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러면서 그 지위와 기초를 확고하게 하느니라.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과거를 확신시켜 주고 미래를 향하게 하는 데 효용가치가 있다. 물론 그게 직접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중보자의 손에 들린 것으로 알고 그걸 소유하고 거기에 복종하며 은혜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이 율법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도덕률의 이행을 부정하는 자들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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