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로마서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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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의 공정한 통치(로마서 2:1-16)

앞장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이 보는대로 이방 세계가 암담하고 죄악투성이라는 것을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본장에서는 유대인 세계 역시 암담하고 죄악뿐이요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더 악화되어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동일한 조건에 두고 공의를 행사하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편을 더 추켜 주는 편협한 처사를 하지 않으신다.

Ⅰ. 그는 유대인들의 자가당착을 꼬집고 있다(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훈계는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에게 적용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이 일반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21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들은 불쌍한 이방인들을 아주 멸시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는 자기 가축 중에 개보다도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그들도 부도덕하고 사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우상 숭배자들은 아니었다 해도 신성 모독죄를 범하기는 다를 바 없었다(22절). "그러므로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다." 자연의 빛밖에 없던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다면(1:20 절) 하물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은 유대인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Ⅱ.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의 공의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있다(2, 3절).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이요 그의 처사가 얼마나 공정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도바울의 필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어떤 주제가 있으면 그걸 두고 여러 가지 부대설명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두고 말하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2절).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로 된다"는 사실 곧 영원한 공의와 평형의 원칙대로,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삼상 16:7),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처리된다는 건 우리 모두 익히 확신하고 있는 교리이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 가 없다. 그러나 자기들도 똑같이 죄가 있는 일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자들 곧 그런 죄를 밥먹듯이 하는 자들이 죄악에 대한 기치를 들고 죄짓는 자들에게 큰 소리 뻥뻥 지르기만 하면 그걸로 속죄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가라앉힐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것이 천 번 만 번 당연한 일이다. 죄인의 양심을 파고드는 그의 솜씨를 보시라. 그는 묻고 있다. "……사람아……네가……줄로 생각하느냐?"(3절)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 그 아래 복종하며 그분에게 책임을 다해야 할 피조물이요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이여! 하는 식이다. "이런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 하챦은 핑계가 통하겠으며 만유의 의로운 심판장께서 쉽사리 속아 넘어가 떨어지겠느냐?" 사람들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신임을 받아 사면을 받을 수 있는, 제 아무리 그럴싸한 정치범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는 없는 법이니 곧 심판과 정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얘기다.

Ⅲ. 그는 두 가지면에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4, 5절).

1. 그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 "인자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데 있다(4절). 이것은 신의 특유한 은총을 받은 유대인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이다. 그 은총을 주신 수단은 바로 자비요 우리가 빛에 대해 죄를 범하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 더욱 더 사랑에 대해 죄를 범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죄악 밑바닥에는 신의 선하심에 대한 얕고 천박한 생각이 깔려 있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분의 중심에 대한 모멸이니 이들은 이것을 기회로 더욱 더 죄악에 대해 담대하게 되고 만다(전 8:11).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곧 그 의도하는 바가 "회개케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을 취하고 잇는가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람을 짐승처럼 모는게 아니라 이들을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인도하고 달래고 있으니(호 2:14) 곧 사랑의 줄로서 인도하고 있다(호 11:4; 렘 31:3 비교). 하나님의 선하심(그의 섭리, 인내, 그리고 모든 은사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회개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머무는 이유는 이들이 이점을 알지 못하며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 둘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데 있다(5절). 이 진노를 사는 이유는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때문이요, 죄인들이 파멸에 이르는 이유는 이러한 마음에 이끌려 따라가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마음의 행로대로 행한다는 것인데 그 마음이 고집불통이요 회개를 모르는 마음일 때 그 행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죄악의 길로 치닫는 자는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는"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쌓는다는 말에는 풍성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죄악의 보물은 영원토록 사용해도 다함이 없을 것인데도 죄인들은 여기에 또 죄악을 보물처럼 쌓아 놓는 것이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은 수십가지 새끼를 치기 마련이요 청산할 날을 재촉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는 말을 "그들의 진노에 가지를" 치다는 식으로 번역한 그대로다(겔 8:17). 보물을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진노의 보고, 아니 진노의 탄약고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은 비밀 장소에 봉인된 보물과 마찬가지로 깊숙히 보관되어 있다(신 32:34; 욥 14:17). 그러나 여기에는 탄약고의 실탄이 전쟁에 대비해서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장기적인 목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욥 38:22, 23). 이 보물들은 마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짐" 같이 활짝 열어 제쳐질 것이다(창 7:11). 도매금으로 몽땅 처분되고 말 "진노의 날"에 대비해서 보물처럼 쌓여질 뿐이다. 지금은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와 용납의 날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진노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실 죄인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진노의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매일 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7:11). 그러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아직 남아있다(계 6:17). 그리고 이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격정과 같은 분냄이 아니니 그분에게는 노함이 없기 때문이다(사 27:4). 그것은 의로운 심판이니 곧 그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려는 의지이다. 이 의로운 심판은 죄인들의 번영과 성공 속에 겹겹이 감취어 있지만 오래쟎아 만천하에 곧 들어날 것이요 피상적인 무질서는 자리를 물러나고 하늘은 그의 의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시 1:6).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Ⅳ. 그는 하나님의 심판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5절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언급하고 여기서는 그 심판의 의로움을 풀어 설명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게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척도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 하는 걸 보여 주고 있다. 이 분배적인 공의의 형평성은 인간 외모가 아니라 그 공과에 따라 찬, 반이 주어진다는 데 있으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다.

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이다(6절). 이것이 성경에 종종 언급되는 이유는 만유의 심판장께서 올바르게 행사하신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뜻에서이다.

(1) 은혜를 베푸시는 면을 보면 7, 10절에 두 번 언급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즐거이 베푸시기 때문이다.

[1] 은총의 대상. "참고……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의 은총에 대한 관심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그걸 획득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갚아 주실 자들은

첫째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 곧 스스로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는 자들이다. 바꿔 말하면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존귀와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니, 즉 현재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다. 모든 실제적인 종교에는 거룩한 야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마련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을 우리의 하늘같이 높은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 것이요 그보다 못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구한다는 말에는 잃어 버렸다는 뜻, 그걸 되찾겠다는 욕망, 이 욕망에 비등하는 추구와 노력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였으면 올바른 방법을 택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자들이다. "참고 선을 행하며" ① 선행이 있어야 한다(10절). 많이 알고 말 잘하고 약속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 그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② 지속적인 선행이어야 한다. 기분내키는 대로의 용두사미가 아니라 끝까지 믿고 나가는 선행이어야 한다.

참을성 있는 선행이어야 한다. 이 인내라는 말에는 선행의 장기적인 면과 이것을 행하는 데 있어 따라오는 여러 가지 난관이 내포되어 있다.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려는 사람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2] 이 은총의 결과. 그는 이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천국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요 그것은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자들이 받는 보상이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절)이다. 영광과 존귀를 자기 것으로 추구하는 자들이 이것을 차지한다는 말이다(7절). 이 세상의 헛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은 대개 이걸 찾지 못하고 실망하지만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주어질 것이니 그 "영광과 존귀"뿐 아니라 거기에 "평강"도 따를 것이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는 보통 어려움이 따르지만 하늘의 영광과 존귀는 결코 성가심이 없는 영원한 평화가 다르고 있다.

(2) 다음으로 화를 주시는 면을 보자(8, 9절).

[1] 화의 대상. 일반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모든 고의적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툼"이요(사 45:9) 더없이 절망적인 분쟁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인들과 더불어 싸우며(창 6:3)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은 이 영과 싸우며 빛을 거역하는 자들로서(욥 24:13) 속임꾼이요 성령께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죄가 좋다고 그걸 가까이하려고 고전분투하는 자들이다. 곧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않는 자들"이다. 종교의 진리는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단계로 옮겨져야 하는 것으로 우리를 지도하고 다스리며 명령하는 것이다. "곧 실제와 연관된 진리"라는 말이다. "불의를 쫓는 자들" 곧 불의의 손가락질에 놀아나는 자들이다. 진리의 종괴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불의의 종으로 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없다.

[2] 이 화의 결과 내지는 그 사례 "노와 분, 환난과 곤고" 이것이 죄의 삯이다. "노와 분"이 "환난과 곤고"를 유발하는 것은 필연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도 "영혼"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영혼이 진노의 그릇이요 환난과 곤고의 주체인 것이다. 영혼이 이 진노를 받는 것은 죄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노와 분'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곤고의 영향을 유일하게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지옥이란 노와 분의 결과인 영원한 환난과 곤고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데서, 곧 타오르는 불섶에 가시덤불을 내던지는 데서 오는 결과다(사 27:4). 그분의 황금 홀에 엎드리지 않는 자는 그분의 쇠창살에 맞아 부서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 품행에 따라 처분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절). 영적인 상태를 두고는 사람 차별이 잇지만 겉모양을 두고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있다. 이것이 바로 유대와 이방의 벽을 처음으로 무너뜨리며 외치던 베드로의 말이다(행 10:34). 곧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겉모양이 없다는 얘기다. 곧 이어 다음 절에 이 말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지니는 외적인 특권이나 진리에 대한 알맹이 없는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참된 상태와 성향에 따라 인간을 구원하신다. 은총과 화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첫째가" 더 없는 특권을 가지고 더없이 뽑내며 자랑하던 "유대인"에게라면, "또한" 이 특권이 없다 해서 악행에 대한 처벌을 면제받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선행을 보상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이방인에게도 마찬가지다(골 3:11). 만민의 심판장께서 의롭게 처리하지 않겠는가?

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들을 심판하시게 될 때 그의 처사가 공평하다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12-16절). 그것은 인간의 순종의 법칙이 하나님의 심판의 법칙이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빛이 인간에게 들어나 보여지고 있다.

1. 자연의 빛. 이방인들에게는 이 빛이 있었으며 그들은 여기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타고난 양심 외에 별다른 지침이 없던 이방인들 곧 일반 은총 외에 다른 동기가 없던 그들, 모세의 율법이나 어떤 초월적 계시도 없던 이들은 그들에게 있지도 않던 율법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유대인들처럼 기록된 율법을 거역했다고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은 오직 그들이 거역했던 자연의 빛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니 이 빛은 타락하고 이그러져 불의에 감금된 마음에 있는 빛이 아니라 타락치 않고 본래부터 주어진 마음밭의 빛이다. 그는 이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괄호안에서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자연의 빛이 이방인에게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14, 15절). 12절에서 이들이 "율법없이 범죄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건 자가당착같아 보이기도 한다. 곧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이들에게는 기록된 율법(시 147:20)은 없더라도, 의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에 대등한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이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이 명하는 일이 아니라 율법이 행하는 일을 의미한다. 율법의 일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방향 제시해 주고 우리의 행한 일을 검토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1) 이들에게는 율법의 빛에 비춰 뭘 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켜 보여 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생각과 성향에 비춰 선악에 대한 명확하고 방대한 차잇점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들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 자들"이다. 이들도 공의와 공평, 존귀와 순결, 사랑과 애정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곧 자연의 빛에 따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불쌍한 자를 측은히 여기며 사회 질서와 평화를 보존하며 살인, 도둑질, 거짓말, 위증 등을 금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었다.

(2)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행위에 비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있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 속에 이미 잘한 일은 칭찬해주고 못한 일은 벌해 주는 기준이 들어서 있었다는 얘기다. 양심이 곧 그 증거다. 일시적으로는 매수되고 두들겨 맞는 수가 있어도 시종일관 증거하는 것은 바로 이 양심이다. 그것은 가장 은밀한 것을 증거해 보여 주는 것이니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는 가운데 양심의 증거에 따라 율법을 사실에 적용하여 심판을 내린다. 양심은 이방 세계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촛불이다. 이방인들의 양심에 대한 증거를 들어 보자.

선한 양심의 위로에 대해서 :

그대 양심의 순결을 지키는 일,

이걸 그대의 철통같은 방어의 보루로 삼으시라-Hom

악한 양심의 겁내는 면에 대해서:

아무런 채찍소리 들리지 않건만,

스스로 가한 아픔에 시달리는

그대 죄악한 마음이여-Juv. Sat. 13

그들의 "생각들이"(metaxu. a,llh,lwn,그들 사이에) "서로" 그들 속에서 죄에 대해 불리하게 증거했거나 남들에게 있어서 불리하게 증거했던 동일한 자연의 빛이 상호간에 변호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비시심"(vicissim) 곧 어떤 이들이 번역하는 대로[교대로]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곧 그들이 이 타고난 율법과 명령에 순종했거나 거스렸거나에 따라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저주하기도 사면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도 율법 대신에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그 무엇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걸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 주고 있다. 따라서 죄악한 이방인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저주하시는 것은 정당하다. 몰랐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이 무지 이외의 다른 것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 한 멸망할 수밖에 없다.

2. 율법의 빛.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이요 이것에 따라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2절).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들은 율법을 가진채 범죄할 뿐 아니라 "율법 안에서"(evn no,mw) 곧 그렇게 수다한 율법 속에서 그렇게 명확하고 순수한 율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침이 그렇게도 자세하고 충분한데도, 그 경계하는 바가 그렇게 함축적이고 강력한데도 죄를 범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의 처벌은, 그들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소유했던 만큼 더욱 더 막중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9절). 두로와 시돈에게는 그 심판이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고발(요 5:45)을 받아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로서 더 많은 매를 맞게 된다(눅 12:47).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가지고 자랑했지만 사도의 말을 빌리면 이들의 율법 소유와 율법에 대한 지식이 이들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해야 할 뿐이다. 유대 율법학자들은 유대인은 누구고간에, 그들이 제 아무리 타락한 상태에 처해 있어도, 오는 세상에서 설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유대인들을 추켜 올렸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반대를 사는 점이다. 율법을 소유했다는 거기에 위대한 특권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그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이 구원의 특권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입고 설 또 다른 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에 적용하고저 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게 아니라 실천이다(요 13:17; 약 1:22).

3. 복음의 빛. 복음의 혜택을 누리고 산 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6절).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이 말은 어떤 궤변가들 얘기처럼 바울이 쓴 또 하나의 제 5복음서라는 뜻도 바울의 필기자인 "누가"의 복음서란 뜻도(Eused. Hist. lib iii cap. 8) 아니요 복음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 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울이 그 복음의 전파자였기 때문이다. 이 복음 세대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 이 복음 세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어떤이들은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이 그가 말한 심판의 날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날에 대해 계시된 바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1) 최후 심판의 날은 정해졌다. 이 큰 날은 장차 다가 올 것이다(시 37:13).

(2) 이 날의 심판은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다(행 17:31). 이것이 그의 비하의 보상에 대한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장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만큼 죄인을 떨게 하고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도 없다.

(3) 인간들의 비밀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숨은 봉사가 그때가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숨은 죄악이 처벌을 받으며 숨겨진 일들이 들어나게 될 것이다. 그 날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의 날이 될 것이니 지금은 한쪽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그때 가서는 온 천하에 밝히 방송되고 말 것이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없음.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유대인들의 자부심과 타락(로마서 2:17-29)

본장의 뒷 부분에서 사도는 보다 더 면밀하게 유대인에 대해 강론하는 가운데 그들의 주장과 허세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먼저(13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실천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얘기를 했는 데 그는 이 위대한 진리를 여기서 유대인에게 적용하고 있다.

Ⅰ. 그는 일단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17-20절) 다음에 그들의 구체적인 자부심과 허세부리는 특권을 들어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들의 주장을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는 뜻에서이다. 그보다 더 정통한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1. 그들에게는 성문 율법과 하나님의 임재라는 특권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다른 민족과 구별된 특수한 민족이었다.

(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하는 말은 족보상으로 보다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것은 아주 존경받는 칭호였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으니 오죽이나 자랑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정작 유대인이라 불리는 그 자들이야말로 인간 중에 가장 못된 놈들이었다. 지독한 부정이 최선의 가면 속에 비호를 받고, 많은 사탄의 회당이 스스로 유대인이라 자처하며(계 2:9) 독사의 자식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우리 조상"(마 3:7-9)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2) "율법을 의지하며," 곧 율법을 책으로 가지고 있으며 회당에서 낭독하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들은 너무도 이 특권을 으시대는 나머지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 특권만으로 천국에 가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푹 놓고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 그 자체로서는 좋다. 그러나 거기에 교만, 태만 육적인 안도감이 따를 때 이거야 말로 영혼의 파괴가 아닐 수 없다. "여호와의 전"(렘 7:4), "벧엘을 의뢰하므로"(렘 48:13), "성산에서 교만하지 않게"(습 3:11), 외적인 특권을 보다 더 발전시켜 나가지 않고 거기에 안주해 버리는 일은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3) "하나님을 자랑하며," 여기서 우리는 최선의 것이 얼마나 곡해되고 오용될 수 있는가 하는 걸 볼 수 있다. 믿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감사하며 하나님을 자랑으로 여기는 태도야말로 모든 신앙의 뿌리요 요약이다(시 34:2; 사 45:25; 고전 1:31). 반대로 허황되게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의 이름은 형식적으로 들먹이는 일이야 말로 모든 위선의 뿌리와 요약이 아닐 수 없다. 영적인 교만은 모든 교만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2. 그들은 유식한 민족이었다(18절). "하나님의 뜻,"(to. qe,lhma) 곧 "그 뜻"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주권적이요 절대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뜻이다. 하나님의 뜻만이 유일무이한 뜻으로 남고 다른 모든 뜻이 거기에 녹아 합쳐질 때, 오직 그 때 가서야 온 세상은 바르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천사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다. 위선자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는 건 가능한 일이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dokima,zeij ta. diafe,ronta)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이 이러한 지경에 다달을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빌 1:10).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알게 되고"(새번역)(,VEij to dokima,zein u`ma/j ta. diafe,ronta), 이걸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1)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일"에 대한 풍부한 이해다. 이렇게 보면 "그대는 서로 다른 점들을 분별한다"는 뜻이 되어 선악을 구별하고, 귀한 것과 추한 것을 구별하며(렘 15:19), 불결한 것과 청결한 것을 분간할 줄 알게 되었다는(레 11:47) 식이 된다. 어떤 때는 선과 악이 너무 밀착되어 있어 분간하기 어려운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모퉁이 돌을 손에 들고 있는 만큼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머리카락도 쪼개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는 것으로들 생각했다. 인간은 훌륭한 궤변가이면서 동시에 불량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곧 사변에는 정확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허술하고 제멋대로라는 말이다. 또는 ta, diafe,ronta)를 "논쟁"으로 볼 수도 있다(De Dieu). 인간은 종교 문제의 논쟁에 있어서는 실력자이면서 동시에 신의 능력에는 이방인일 수가 있다.

(2) 다음으로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풍부한 애착심이다. 종교에 뛰어난 점이 있다는 건 위선자들도 다 인정하고 든다. "율법을 보고 그것이 선하다"고 실제 동의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 동의는 육신과 지성의 정욕에 압도된 동의다 :

더 나은 걸 보면서

더 악한 걸 따라가노라

(Video meliora probque Deteriora sequor)

그리고 죄인들이 이렇게 인정하고 드는 걸 핑계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거야말로 죄악의 처참한 악화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이미 "율법의 교훈을 받아"(kathcou,menoj) 곧 "문답식으로 교육을 받아" 선한 것에 대한 지식과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는 유년시절의 교육을 의미한다. 일찍이 훌륭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자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이 힘써서 자녀들이 어릴 적에 교육하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었으며 모든 내용은 "율법에서" 내온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서" 소재를 얻어 자녀를 가르치는 데 열심히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다음 절을 보자. "율법에 있는 지시과 진리의 규모(모양)," 곧 겉모양만의 지식이요 진리라는 뜻이다. 헛된 변론에 의지하는 풍부한 지식이 있지만 자기 마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구성이나 색칠에 있어 뛰어나지만 생명이 없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겉치레 지식에 머물고 만다. 겉치레 지식은 겉치레 경건을 낳을 뿐이다(딤후 3:5). 겉치레 지식은 인간을 속일 수는 있어도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그럴수 없다. 겉모양이 능력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걸 잡고 늘어지는 자는 마치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다.

3. 그들은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아니 그렇게들 자처하고 있었다(19,20절).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스스로 믿으니."

(1) 유대인 전체에겐 우선 이걸 적용해 보자. 유대 민족들은 스스로 흑암에 있는 불쌍하고 눈먼 이방인들의 길잡이로 자처하고 이걸 자랑으로 여기는 가운데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자기들에게 오라는 식이었다. 그밖에 다른 모든 민족은 선한 것,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배우려면 직접 신탁을 받은 이들에게 와서 배워야만 했다.

(2) 그들의 랍비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지도층에 있는 자들에게 이걸 적용해 보자. 이들이야말로 특별히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었다(1절). 이 자들은 수위 모세의 자리에 앉아 무식한 백성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존경을 독차지하는 자들이었다. 사도는 이들의 기만과 멸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자들이 "소경의 인도자,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어리석은 자의 훈도,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핀잔을 놓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고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다 좋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러한 교육이 성공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 어리석음 그리고 무능력을 생각하면 거기엔 하나도 자랑할 게 없다.

Ⅱ. 그는 두 가지 면에서 그들을 자극하고 있다(21-24절).

1.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주장에 어긋나게 죄를 지었으니 곧 남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그 짓을 자행하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사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서 그쳐서도 안되는 일이다.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3) 오히려 자기들의 가르침으로 쌓아 올린 것을 목숨을 걸고 무너뜨리는 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이다. 누가 자기도 믿지 않는 확신없는 자들을 믿겠는가? 규칙보다 모범의 지배력이 더 우세하다. 말씀의 진로를 가장 방해하는 자들은 실생활도 자신들의 교의를 번복하는 자들이다. 설교단에서는 설교를 그렇게도 잘 하는 사람이 강대상에서 나와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것도 딱하지만 이런 사람이 다시 강대상에 올라가는 걸 보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그는 여기서 유대인들 사회에서 범람하는 세 가지 죄목을 특별히 들춰내고 있다.

(1) 도둑질. 이것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는 자들에게 이미 시편에서 내려진 죄목이기도 하다(시 50:16, 18). "네가 도적을 본즉 연합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집을 삼켰다는 얘기도 있는데(마 23:14) 이것이야말로 도둑질 중에 가장 악독한 도둑질이 아닐 수 없다.

(2) 간음(22절). 이것 역시 똑같은 죄인을 두고 저주하는 대목에 나온다. "네가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시 50:18), 특별히 율법학자들 중에 이러한 죄로 유명한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교회 도둑질. 곧 특별한 법규에 따라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우상을 멀리한다는 자들이 저지른 죄다. 바벨론 포로 이후로는 풀무불에 완전히 녹아 우상 숭배의 찌꺼기가 전혀 없이 훌륭하게 해 내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 또 반역적인 처사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구약 교회 말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하여(말 3:8, 9) 착복하고 자기들 정욕에 따라 멋대로 사용한 일이 있다. 이 교회 도둑질이 우상을 멀리하라는 위장에 가리워져 있지만 이것은 우상 숭배와 맞먹는다. 남들은 정죄하면서 그와 똑같은 나쁜, 아니 더 악독한 일을 범하는 자들은 후일에 혹독한 결산을 받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하나님께 욕을 돌렸다(23, 24절). 하나님과 그의 율법이 그들이게는 그렇게도 자랑하고 뽐내는 영광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에 불명예로운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정당화시켜 주는 노릇밖에 하는 일이 없다. 남들에게 그런 일을 해도 되는구나 하는 추론을 내리도록 하는 것은 바로 저희들의 죄악이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삼하 12:14)는 저주가 바로 그것이다. 똑같은 죄목을 사도는 저들의 조상들에게 돌리고 있다. "기록된 바," 여기서 그는 분명한 장절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확신시키는 데 있어서는 성경을 알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는 게 유익하다). 그러나 사도행전 52장 5절 에스겔 36장 22, 23절 그리고 사무엘하 12장 14절 아닌가 한다. "하나님께 이름과 칭송의 대상이어야 할 저들이 오히려 그에게 수치와 욕이 된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르치는 자들의 가장 큰 죄는 그들의 교직에 의해서 하나님과 그 신앙에 돌려지는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 "너희로 인하여……훼방을 받는도다." 곧 너희의 잘못과 무절제가 화근이라는 얘기다. 너희 자신에게 오는 욕은 하나님에게 이어지며 너희가 받드는 신앙이 손상을 입는다는 얘기다. 가르치는 자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딤전 6:1).

Ⅲ. 그는 이러한 죄목을 탈피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입장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이 말은 곧 순종하는 유대인들은 이 순종의 보상을 잃는게 아니라 이방인보다 더 명확한 순종의 준칙을 가지고 참다운 유대인 구실을 하는 가운데 이걸 얻게 된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의식이 폐기되기 전의 유대 국가에 해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할례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갈 5:2). 그러나 여기서 그는 유대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는데 만약에 그들이 유대주의 법률과 규칙대로 살기만 한다면 거기서 혜택을 받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다시 말해서 네 유대인으로서의 지위도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는 얘기다. 아니 너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보다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더 밝은 빛을 받고도 죄를 지은 까닭에 그만큼 더 가중한 벌을 받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무할례자를 가리켜 "부정한 자"(사 52:1)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엡 2:11, 12)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는데 악독한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처리되고 말 것이다(렘 9:25, 26 참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을 설명해 보자.

1.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이미 자기들에게 있는 빛대로 살기만 한다면 유대인과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된다는 걸 그는 보여 주고 있다. 곧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의, 흠정역)를 지키면(26절),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27절)" 하는 말이 바로 그들이 타고난 빛의 규법대로만 성실하게 살며 율법의 알맹이를 실천한다면 바로 유대인들과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어떤 이들은 이걸 율법에의 완전 순종이라고 보는 가운데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곧 "이방인들이 만약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그들도 유대인이나 마찬가지로 의롭게 될 것이다"고. 그러나 이 말은 이방인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이미 다달을 수 있었던 그러한 순종으로 보인다. 고넬료의 경우가 이 점을 명백히 해 준다. 그가 비록 이방인이요 무할례자였지만 그러나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행 10:2)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행 10:4). 물론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하는 대목에 이르러 그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1) 곧 할례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할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만 명령된 의무이지 다른 모든 세상에 있어서도 이것이 칭의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었다.

(2) 곧 그들의 순종이 율법의 법조문을 가진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판단치 않겠느냐." 곧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저주하는 데 합세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이다. 여기서 명심할 게 있다. 육적인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한갖 법조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기록으로 읽고 지나칠 뿐이요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법조문과 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한 게 아니라 그걸 등에 업고 더더욱 죄를 짓는 가운데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외적인 특권을 선용하지 못할 ? 그건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폐가 되고 만다. 오히려 그 혜택을 받으며 승승장구 으시대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저들을 저주하게 된다는 얘기다.

2. 그는 이어 진정한 할례를 묘사하고 있다(28, 29절).

(1)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식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것은 외적인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자체로서는 하나도 나쁠 게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이것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는 데 충분한 것으로 알고 그것만 붙잡고 늘어지며 의지하는, 그리고 그대로 산다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 생활은 동떨어진 삶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은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인정을 받지도 못하며 율법의 의도를 따른 것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요 8:39, 40).

(2)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은 마음이요, 우리가 그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다(신 30:6 참조). 이것이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이니(골 2:11, 12) 곧 "육적(죄의, 흠정역) 몸을 벗는 것"이다. 따라서 할례는 우리의 주체인 영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도 그 할례의 창시자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칭찬은 겉 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오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곧 하나님께서 손수 이 성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핑계와 수작이 인간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겉모양을 꿰뚫고 실상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며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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