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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도로 임명 받음(로마서 1:1-7)

이 항목에는 다음 네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Ⅰ.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다. 그는 유대 율법 교사 곧 "랍비"로서가 아니라 가정에서 시중을 드는 몸종으로서의 칭호를 영광으로 알고 즐거워하고 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여기서 그는 "부름 받은 자, 수소문 받은 자" 하는 뜻이 담겨진 자기 본명 사울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삼으려고 찾으셨기 때문이다(행 9:15). 그는 자기의 권위를 이 소명에 두고 있다. 곧 거짓 사도들처럼 보냄을 받지도 않았는데 돌아 다니는 그가 아니었다. klhto.j apo,stoloj - 즉 "한 사도로 부름을 받다." 물론 자신은 이렇게 불러줄 만한 자격이 없다고 겸손해 했지만 그는 이게 바로 자기 이름인 것처럼 즐겨 사용하고 있다(고전 15:9).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리새인들의 이름에는 구별된다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법 연구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즉 율법을 위해 구별된 자들(avfwrismevnoi eivj to.n no,mon)이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바울도 전에는 이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갈 1:15),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 성령의 직접 지시로 안수를 받고(행 13:2, 3) 자신을 이 일에 몰두함으로써 연구제목이 바뀌어 복음을 위해 구별된 자(avfwrismne,oj e,ij to. Euvaggevlion) 곧 복음 바리새인이 되었다. 그는 철두철미 하나님의 복음에 몰두한 사람이었으며 이 복음은 하나님을 그 저자로 사고 있으므로 그 기원과 내력은 신성하고 신의 인도로 된 것이다.

Ⅱ. 하나님의 복음을 언급해 높고 이에 대한 찬사를 덧붙이고 있다.

1. 복음의 역사성. 이것은 "미리 약속되어져 " 있던 것(2절)이다.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기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구약의 여러 약속과 예언에 담겨져 있던 것이요 이 구약으로 말하자면 한 가지로 입을 모아 의의 태양을 맞아들이는 아침 햇살이 되는 복음을 두고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그저 구전으로서가 아니라 문헌으로 남아 내려 오고 있다.

2. 복음의 주제. 물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3절, 4절). 선지자들과 사도들 모두가 그분을 두고 증거하고 있으니 그분이야말로 성경이라는 밭에 숨겨진 귀한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게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는 식으로 온 명칭과 칭호를 다 동원하는 점이다. 얼마나 좋아서 부르는 이름인가! 그리고 그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에 맞는 사랑과 존귀를 그 이름에 빼놓지 않고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한 인격에 두 가지 구별된 성품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인성.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3절) 곧 요셉과 마찬가지로(눅 2:4) 다윗의 집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말이다(눅 1:27). 여기에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는 메시야, 그 중에도 특별히 그의 왕의 직분을 두고 그에게 미리 약속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삼하 7:12; 시 132:11; 눅 1:32, 33).

(2)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4절) 곧 그는 영원 전부터, 아니 여기서 말하는 대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육신으로는," 곧 인성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나 "성결의 영으로는," 곧 신성은("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으리"하는 말대로, 벧전 3:18; 고후 13:4 와 비교해 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는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에 있으니 이거야말로 결정적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들어 설명한 것은 최종적인 확신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마 12:39, 40) 이것도 못 믿는 사람은 천하없어도 아무 것도 못 믿을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있는 두 성품을 얘기하고 있다.

3. 복음의 열매(5절). "그로 말미암아" 곧 복음을 통해 들어나게 되고 알려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우리가(바울과 나머지 사역자들)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다시 말해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는 얘기다(엡 3:8). 사도들로 말하면 이들은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어 천신만고의 위태로운 생활을 하던 곧 "종일 죽임을 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 사도직을 은혜로 돌리며 반가워하고 잇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과 위험이 수반되더라도 거기에 쓰여지는 걸 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이 사도직이 주어진 것은 "믿어 순종케" 하려는 데 있었다. 곧 사람들을 순종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들이 받은 것은 주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11:13) "모든 이방인" 가운데 이 순종을 낳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여기 나타난 "믿어 순종"이라는 기독교 신앙 고백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어설픈 지식이나 제멋대로의 동의 또는 맹랑한 탁상공론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 순종에 달려 있다. 이 "믿어 순종"이야말로 "믿음의 법"(3:27)에 대한 해답이다. 이 믿음의 행위는 곧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지의 순종으로 나타난다. 율법의 행위와 무관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왈가왈부를 예상한 나머지 그는 기독교 정신을 이 순종이라는 한 마디로 못밖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멍에를 메고 계신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6절), 여러분 로마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여러분보다 못한 명성과 재물을 가진 다른 이방인과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곧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복음의 구원은 만민 구원이다(유 3).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겉 모양이 따로 없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곧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그리고 오직 이 사람들만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Ⅲ. 이 편지의 수신인(7절)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이다. 곧 로마에 있는 유대계 신자건 이방인 신자건, 높은 자건 낮은 자건, 매인 자건 자유로운 자건, 배운 자건 못 배운 자건 신앙을 고백하는 모두에게 띄워 보내는 편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다 하나로 만나기 마련이다. 여기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1. 그리스도인의 특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의 한 지체요 기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할 때 그의 풍성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얘기하는데 온 인류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과 참 신자에 대한 특별한 사랑으로 나눠 얘기할 수도 있다. 지상에 보이는 신자들의 모든 교회에 대한 사랑은 이 중간에 온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그리스도인의 의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성화를 통한 구원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얘기다. klhtoi/j a`gi,oij - 즉 "성자로 부름심을 입었다. 곧 글자 그대로 성자여야 한다. 성자로 부름 받은 모든 자들이 고스란히 성자 그대로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모름지기 이 이름대로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존귀와 특권이라고는 해도 마지막 큰 날에 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Ⅳ. 사도의 축복(7절).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그의 서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용어로서 여기에는 본인의 너그러운 마음과 축복에 대한 권위가 담겨 있다. 율법 시대의 제사장들이 백성을 축복하기로 되어 있듯이 복음의 사역자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마찬가지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몇 가지를 간추려 생각해보자.

1. 은총의 기원. 구약에서는 보통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하는 식이었으나 이제 여기에는 은혜가 선행하고 있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은총 곧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로서 양자가 모두 참된 평화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이다. 모든 복음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이 두 마디에 담겨 있다. "평화" 곧 하나님과 평화, 우리 마음에 평화,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웃과 평화, 이보다 더한 게 따로 있겠는가.

2. 이 은총의 근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모든 선한 것은

(1) 아버지로의 하나님에게서 온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소원과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입장에 서고 있는데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얻고저 할 경우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고 있다. 또한 모든 선한 것은

(2) 중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곧 이 모든 축복의 전달자요 관리인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충만한 가운데서 얻고 있으니 곧 그의 공로의 충만 가운데서 평화를, 그의 영의 충만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1:2 없음.

 

1:3 없음.

 

1:4 없음.

 

1:5 없음.

 

1:6 없음.

 

1:7 없음.

 

1:8

로마 교우들에 대한 바울의 열정(로마서 1:8-15)

Ⅰ. 그들에 대한 감사(8절). "첫째는 내가……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모든 일의 시작을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곧 모든 노래의 "알파와 오메가"를 하나님 찬양으로 삼아 만사에 감사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 "나의 하나님," 그는 기쁨과 승리에 젖어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감사에 있어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그분은 계약상 나의 것"이요 하고 말할 수 있으며 그의 자비 또한 우리의 것으로 만끽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임무와 행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 대한 우정을 표시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 친구들에게서 얻는 모든 위로를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이 우리와 갖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들 로마 교우들 대다수는 바울과 직접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들의 덕행을 두고 이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서너 명의 로마 교우들이 자기를 마중 나왔을 때(행 28:15)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의 넓은 사랑이 그 나래를 펴 "모든 사람을 인하여" 감사드리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일을 도와 준 사람들이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16:3, 6)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위한 감사이다- "너희 믿음이……전파됨이라." 바울은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어디를 가든 로마 교우들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여기서 그들을 칭찬하는 것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남들이 그들에게 갖는 일반적인 성격과 기대어 맞도록 살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사람은 신앙이 좋다는 평판을 들을수록 더더욱 그걸 보존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챦은 바보짓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 쓰러지"기 때문이다(전 10:1). - "온 세상에," 곧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클로디우스의 칙령에 따라 사방에 흩어졌다가 이제 로마로 돌아온 그들이 온 로마 제국에 평판이 자자했다는 얘기다. 어디를 가든 좋은 얘깃거리를 뒤에 남겨두고 다니는 그들의 소문이 온 교회에 퍼졌던 것같다. 이것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좋은 결과로서 그들이 박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유명해질 리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일에 대한 아주 좋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옛 신앙의 선배들처럼 이들 로마 교우들도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은" 셈이다(히 11:2). 믿음 때문에 유명해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로마 교우들의 신앙이 이렇게 얘기되어지는 이유는 그 자체가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 주위 환경에 비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언덕 위의 도시로서 거기서 이뤄지는 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있는 사람은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의 행동은,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남의 입에 오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로마 교회는 왕성한 교회였으나 그 이후로 얼마나 그 황금이 빛을 잃어 퇴색하고 말았는가! 지금의 로마는 과거의 로마가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순결한 처녀"요 이를 데 없이 아름답던 로마 교회가 이제는 "제멋대로 행하며 타락한 나머지 이방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그 결과("경건의 실제"라는 귀한 책에도 자그마치 26회나 지적되듯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로마 사람들에게 "불리한" 편지로 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의 로마 교회는 과거의 공적을 추켜 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

Ⅱ. 그들을 위한 기도(9절). 로마 교회가 당시 유명하고 왕성한 교회였지만 그러나 아직도 남들의 기도가 필요했다. 그들이 "이미 얻었다" 하는 지경에 이른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애정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친절 가운데 하나는, 아니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은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로 그들을 칭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바울의 모범은 다음 두 가지다.

1. 한결같은 기도. "항상 쉬지 않고" 남에게 시킬 뿐 아니라 몸소 그대로 실천하는 그였다(엡 6:18; 살전 5:17). 이 말은 바울이 하는 일 없이 밥만 먹고 기도만 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 귀한 임무를 꼭꼭 실천에 옮겼다는 얘기다.

2. 사랑의 기도. "……내 기도에 너희를 말하며," 그들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었지만 그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것도 성도를 전체를 두고 마구잡이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명확히 이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특정한 교회나 지명을 두고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께 알려 드린다는 것보다도 우리 자신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데 있어서 여간 유익하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는 가장 관심을 가지고 위해 기도하는 친구들에게서 가장 큰 위로를 얻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 대해서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을 두고 엄숙한 맹세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요 하나님과 자기 마음만이 아닌 것이기에 이런 얘기를 하게 된다.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하나님을 두고 우리의 성실과 지조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기도와 기도의 주제,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에 대한 증인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라 하지 않는가(마 6:6).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겸손한 확신 가운데 그분에게 호소할 수 있지만 몸의 단련으로만 만족하는 위선자들은 이게 불가능하다. 이 때 그의 특별한 기도는 그들을 한 번 찾아 볼 기회를 얻고저하는 것이었다(10절). "어떠하든지……구하노라." 무슨 일이건 우리는 일단 그걸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필요가 있다. "우리의 때가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의 모든 처사가 그의 처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떠하든지"라는 표현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실망해 오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도 그는 그걸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있으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 얻기를"(하나님의 뜻으로 순조로운 여행을) 하는 표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과 희망에 "주님의 뜻이면"(약 4:15) 하는 단서를 잊지 말고 붙여야 한다. 우리의 여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조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의 원하시는 대로 편안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Ⅲ. 그들을 만나고 싶은 욕망과 그 이유(11-15절). 너무도 많이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그였기에 그는 그들과 좀 더 잘 사귀어 보기를 원하고 있다. 맹랑한 교인들이 참된 목자들에게 슬픔이 되나 알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가 "내가 여러 번……가고자(하였으나)……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하는 것은 마땅한 얘기다. 만사의 계획은 인간에게 달렸지만 그 일 처리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다른 일로 방해를 받고 있었는데 그건 로마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의 일로서 그 일이 그에게는 더 급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에게 가장 즐거운 일을 우선으로 삼은 게 아니라(그랬더라면 당장 로마로 갔을 것이다) 가장 절실한 문제를 먼저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욕심보다는 양무리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아닐 수 없다.

1. 그들을 굳게 서게 하려고(11절) "너희에게 나눠 주어," 그가 받은 것은 남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젖먹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고 서두는 젖가슴인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파 하는, 곧 말씀을 전하고저하는 바울의 생각과 마음에 비길 수 있겠는가. 훌륭한 설교는 훌륭한 선물로서 그것이 영적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그들이 잘한다고 칭찬해 놓고도 그들이 견고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위로 가지가 무성할 뿐 아니라 아래로 뿌리가 깊이 박히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제아무리 독실한 성도라도 요새같이 뒤흔들리는 세상에서는 더욱더 견고하게 서 있을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견고케 서는 데는 영적 은혜가 큰 효험이 있다.

2. 자신이 위로를 받으려고(12절). 그들이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만 해도 기쁜데 직접 만나 본다는 건 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다른 사역자들의 수고의 열매를 두고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곧 우리 상호의 믿음과 진실에서 위로를 얻을 줄 아는 그였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진실한 목회자로 믿고 목회자는 교인들을 진실한 교인으로 믿는 가운데 서로 통하는 교회는 위로가 넘치기 마련이다. 또한 믿음의 상호 작용은 사랑으로 - 이들은 서로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는 가운데서 곧 자신들의 믿음을 서로 교환하는 가운데서 위로를 얻었다. 우리들의 영적 상태의 이모저모를 서로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이다.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13절), 그들이 굳게 서는 것이 곧 자신의 유익이었으니 그게 곧 그에게는 풍성한 수확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바울의 사역에 임하는 자세는 좋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 대가는 그만큼 더 풍성하게 된다는 식이었다.

3.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임무를 다 하려고(14절). "내가 빚진 자라."

(1) 자신이 받아 누리는 그것으로 해서 이미 그는 빚진 자였다. 그에게 자질을 주신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게 하려는 뜻에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큰 것을 사모할 때 명심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리가 받아 누리는 온갖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빚진 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님의 상품을 맡아 지키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2) 자신의 직분이 그를 빚진 자로 만들었다. 그는 사도일 뿐 아니라 채무자였다. 곧 이 일로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그로서 이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바울로 말하면 그는 자신의 자질을 십분 활용하여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충실히 자기 일을 감당하였지만 이 모든 걸 회고하면서 자신을 빚진 자로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무익한 종"에 진지 않기 때문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곧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였다. 헬라인들은 자기들만이 지혜를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나머지 세상 사람들은 야만인으로 취급했는데 어떻게 보면 자기들처럼 학문과 기술에 뛰어나지 못한 그들이라서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이 양자에게 모두 빚진 자로 곧 이쪽 저쪽 모두에게 능력껏 봉사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그의 설교나 서신을 통해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그들이 알아 듣는 말을 해가며 모두에게 다 유익을 끼치는 가운데 자신의 빚을 거뜬히 갚고 있다. 루스드라에서 평범한 루가오니아인들에게 전한 그의 설교와(행 14:15 이하) 아덴에서 고상한 철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행 17:22 이하)를 비교해 보면 이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양자에게 다 빚진 자로서 각자의 몫을 다 채워 준 셈이다. 평범한 설교자이지만 지혜있는 자에게 빚진 자의 위치에서는 이들은 철두철미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하는 사람이다(고전 2:6).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로마에……복음 전하기를 원"했다(15절). 기독교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위태로운 곳이지만 그는 로마에서의 위험을 무릅 쓸 "각오가 서 있었다"(pro,qumon) 이 단어는 단단한 마음의 준비 자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가 이 일을 내다 보며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이있다. 그의 하는 일은 더러운 이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일이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서성대는 마음씨야말로 고결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1:9 없음.

 

1:10 없음.

 

1:11 없음.

 

1:12 없음.

 

1:13 없음.

 

1:14 없음.

 

1:15 없음.

 

1:16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로마서 1:16-18)

바울은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의 주제인 칭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며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방 세계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고 잇다. 그의 수사적 변화는 아주 적절한 것으로 마치 웅변가의 그것과 같다. 로마로 말하면 스스로 지혜있다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을 받고 있는 곳인데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에 그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바울같은 사람 정도면 복음을 부끄러워할 만도 하다. 특별히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자의 복음이요, 그 내용으로 말하면 너무 평범한 것이라서 학자들 간에 거들떠 볼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그 복음을 고백한다는 자들이 모두 천박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요 가는 곳곳마다 반대를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바울이야말로 복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은 신자일 뿐 아니라 복음에 수치스러운 존재가 아닌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복음의 우월성과 본질을 간파한 담대한 신앙 고백의 이유가 본 주제의 서론을 장식하고 있다.

Ⅰ. 주제(16, 17절). 복음의 우월성은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해 준 다는 점에 있다.

1. 복음의 목적은 믿는 자의 구원.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이 육의 눈에는 제 아무리 천박해 보이고 추태롭게 보여도 바울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길"(행 16:17)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며 구원이 우리에게 양도되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위대한 승낙이다. 그러나

(1)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능력이 없이는 복음은 한갖 사문(死文)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데 있어 말씀에 능력이 동반되었듯이 복음의 계시는 곧 "여호와의 팔"(사 53:1)의 계시이다.

(2)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복음의 구원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요 그밖에 사람들에게는 감취어진 것이다. 아무리 잘 처방된 약이다로 환자가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맨 먼저 대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나 사도들의 경우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너희에게 먼저"(행 3:26)였으나 그들의 거절로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 만다(행 13:46).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한 입장에 서 있으니 곧 양자가 동일하게 구원자 없이 비참한 상태인가 하면, 양자 모두가 동일하게 구언자에게 언제고 환영받는 존재이다(골 3:11). 이러한 이론은 지금까지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이방 세계를 멸시해 오던 유대인에게서는 뜻밖의 얘기였다. 그러나 대망의 메시야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2. 그 방법으로 계시된 신자의 칭의(17절). "복음에는" 곧 바울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 우리의 비참과 멸망은 우리 죄악의 소득이요 결과인 만큼 우리가 구원의 길을 모색하려면 칭의의 길을 먼저 알아야하는데 복음이 바로 이 일을 해 주고 있다. 복음이 의의 길을 터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요 우리는 죄많은 죄인인 만큼 그분 앞에 나서려면 우리가 걸치고 나타날 수 있는 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이 의가 왕되신 메시야게서 드러나고(단 9:24), "복음에 나타나"있다. 곧 이 "의"는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화해와 영접의 은혜로운 방편이다. 이 복음의 의를 가리켜

(1)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다.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서 연유하는 온갖 의에 대한 구실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대속에서 오는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의, 바로 그것일 뿐이다.

(2) 그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곧 계시하는 하나님의 성실(faithfulness)로부터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타락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과 교통으로부터 중보자에게 의지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하나님과의 교통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는 우리가 의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첫 번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바로 세례문답 강령에도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또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믿음으로부터 우리의 원둥치가 되는 그에게서 우리의 공로를 취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의미가 다음에 나타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말에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요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에는 우리를 지탱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부다. 또 반대로 "믿음에서 행위로"하는 식일 수도 없다. 마치 믿음으로 의로운 상태에 놓이고 행위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철두철미하게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듯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고후 3:18). 그것은 증대하는 믿음이요, 계속 나아가는 믿음이요, 인내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가운데 불신앙의 뿌리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믿음이다. 이것이 새롭고 신기한 이론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신약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구약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합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입은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은혜와 영광의 생활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때 하박국 선지자는 조망대 위에 올라가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1절) 이 계시는 외관상 지연되는 것 같지만 때가 차면 약속된 메시야가 틀림 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 었다. 이것이 거기서는 "묵시"(환상)로 불리지만, 다른 데서는 "약속"으로 불리운다.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장래에도 "의인은 믿음에 의해서 살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복음의 의가 바로 이것이니 곧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믿음으로부터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믿음에 이르는 의다.

Ⅱ. 이 주제의 증명.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아 할 것없이 하나님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느 쪽도 떳떳이 내세울 자신들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이 아니면 행위를 통해서라야 하는데 바울은 그것이 행위로는 불가능한 이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행위를 들어가며 설명한 뒤에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20, 28). 사도는 유능한 외과의사가 상처를 싸매기 전에 환부를 샅샅이 뒤지듯이 먼저 죄와 진노 문제를 확신시켜 놓은 다음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복음은 더욱 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어야 의롭게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다는 걸 알게 된다. 전반적으로(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를 들어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1. 인간의 죄악성 묘사. 그는 이것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큼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으니 곧 첫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둘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의다.

2. 이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도 있었다. 곧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악행을 저질렀다는 얘기다. 이들은 진리를 포로나 죄수마냥 감금하여 이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다. 그렇게 안하면 도리어 진리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겠기 때문이다. 불의하고 사악한 마음은 좋은 진리가 묻혀 있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다.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일이야말로 모든 신앙의 뿌리요(딤후 1:13) 그것을 불의로 막는 일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3.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하나님의 진노가……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기록된 말씀에나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죄인들에 대한 심판이 행사되고 있으니 이 심판은 난 데 없이 땅에서 솟아난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무슨 제2의 원인 때문도 아니요, 하늘에서부터 계시되어진 것이다. 또는 "하늘로부터의 분노가 계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분노"인 만큼 더더욱 참혹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1:17 없음.

 

1:18 없음.

 

1:19

복음의 우월성(로마서 1:19-32)

본장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는 특별히 이방 세계들 두고 본 바를 적용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방법. 그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처럼 그의 율법을(시 147:20)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 중에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행 14:17).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19, 20절)

1. 그들이 명백히 알고 있던 것.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evn auvtoi/j, 그들 중에) 보임이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곧 절대자 누멘(Numen,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피타고라스나 플라톤,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는 이미 하나님 지식이 익혀 알려져 있다. "알 만한 것"이라는 말에는 알려질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이해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우리가 찾아 나선다고 해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욥 11:7-9).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존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우리의 위대한 목적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로서 넘나들어 볼 수 없지만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이다(신 29:29).

2. 그들이 이것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자연적인 일반 지식은 "빛들의 아버지"요 자연의 하나님이신 그분 자신에 의해서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신(神)의식과 신에 대한 태도는 인간 본성에 타고난 것이기에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이성보다 이 신 의식과 태도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잇다.

3.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신지식과 생각이 확증되었는가. 다름 아닌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이다(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1)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물론 하나님이 감각의 대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만물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만물에는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은밀하게 일하시지만(욥 23:8, 9; 시 139:15; 전 11:5) 그가 만드신 바는 나타내 보여 주시며 우리는 거기서 그의 능력과 신성 그리고 그밖에 자연의 빛으로 알 수 있는 기타 속성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 자연의 빛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알 수는 없지만(어떤 이들은 플라톤의 글에서 이걸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우상 숭배와 신성을 구별할 정도의 신성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진리를 그들이 불의로 가로막았다.

(2) 그들이 알 수 있던 방법. "그 만드신 만물에," 곧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우연히 그렇게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따라서 꼭 제일 원인이나 이성적 동인(動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만물을 통해서이다. 이때 제일 원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능력의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시 19:1; 사 40:26; 행 17:24). 원래 명장(明匠)은 그 일 솜씨를 보아 알 수 있는 법이다. 만물의 다양성, 무수함, 질서, 아름다움, 조화, 특성, 기능, 그리고 합목적성, 이 모든 것은 창조주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해서 어두움에 빛이 비치게 되었다. 그것도 "창세로부터," 이 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그 하나는 이 능력과 신성이 거기로부터 추출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주체로 볼 수 있다.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는 온 세상의 피조물(kti,sij kovjmou)을 다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피조물은 인간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가장 뛰어난 피조물(kti,sij katV evxoch.n)이 마가복음 16장 15절에는 그저[크티시스]로만 표현되어 있다. 인간 신체의 형태와 구조, 특별히 인간 영혼의 우월한 능력과 기능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이 창조주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또는 이것을 알게 된 연대로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창조와 그 연대를 같이 한다. 이런 의미로 성경에서는 창세기로부터(avpo. kti,sews ko,smou)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잇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여러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 온 오래된 진리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길이야말로 태초 이후로 있어 온 탄탄대로이다. 진리는 이미 오류의 기선을 지른지 오래다.

Ⅱ.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범하는 터무니 없는 우상 숭배((21-23, 25절). 성서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 마저도 얼마나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던가 하는 걸 생각한다면 이방인들의 경우에 있어서 자연적인 신인식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상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육감의 구렁텅이에 빠져 든 타락한 인간상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1. 그들의 우상 숭배의 내적 원인(21, 22절).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또 알고 있었으면 그분을, 오직 그분만을 섬겨야 마땅하다는 게 분명한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아무런 핑계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 비해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핑계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매일반이다. 그들의 잘못은 이것이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그분에 대한 열정과 경외가 자신들의 신(新) 지식과 어깨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은 천상천하에 무한자가 그분뿐이므로 그분만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영광돌리지 않고 잡다한 신전을 세웠다. 그분에게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영적인 예배로 그분을 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여러 모양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영광돌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분을 피조물로 경배하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처사이다.

(2) 그들은 "감사치도 아니하고," 전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은총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몰지각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져 가는 죄악이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기꺼이 계시해 주신 타고난 신지식에 대해서 감사치 않았다. 신지식과 은혜의 수단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는 것도 이것들을 달가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게 마땅하다.

(3)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있어서 그들의 사유에 있어서"(evn toi/j dialogijmoi/j), 곧 실체 추론에 있어서 "허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반 지식은 풍부했지만(19절) 이것을 개별적인 상황에 응용하는 지혜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개념, 세계 창조, 인류의 기원, 그리고 최고선 등이 모든 것에 있어서 평범한 진리를 저버리고 천태만상의 공상을 가지고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이상의 모든 것에 대한 여러 학파의 수다한 의견과 가설은 거의가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 일단 진리가 내팽겨 쳐지면 수다한 잘못이 "무한정하게"(in infinitum) 증대하기 마련이다.

(4) 그리고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우매와 사악은 이지적 능력과 기능을 흐리고 어둡게 한다. 의지와 마음의 타락과 부패만큼 이해력을 멍들게 하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

(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22절). 이 얘기는 철인들이나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들릴 것이다. 가장 왕성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자기들의 틀에 하나님 개념을 짜 맞추려다 더 없이 터무니없고 엉뚱한 기만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거야말로 자신들의 교만과 기만의 당연한 벌이 아닐 수 없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진짜 바보들은 가장 뛰어난 지식을 자랑하는 가장 세련된 민족들이었다. 야만인들은 해와 달을 경배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우상 숭배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양을 갖추었다는 에집트인들은 황소와 양파를, 지혜에 뛰어난 희랍인들은 질병과 인간의 병마를, 가장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인들은 원귀(寃鬼)를 경배하였다. 오늘날도 미개한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천둥을 경배하고 영리한 중국인들은 귀신을 섬기고 있다. 이처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고전 1:21) 지혜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더욱 우매를 악화하듯이 지혜있다고 거만하게 굴며 속이는 것은 더 없는 우매를 조장할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로 개종한 철인들이 없으며 바울의 전도가 유식한 아테네 사람들에게서처럼 비방과 조롱을 산 일도 없다(행 17:18-32) - 스스로 지혜있다는 "속이"(fa,rkonetj ei/nai)지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평범한 진지로는 만족을 못하고 자기들은 그 위에서 논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2. 그들의 우상 숭배의 외면적 행동(23-25절).

(1) 하나님 모양을 새긴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고 있으니(23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바꾸어"놓고 말았다(시 106:20; 렘 2:11 비교). 그들은 가장 추악한 짐승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므로 인간에게 최대의 영광을 베풀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양으로 만들어 하나님에게 최대의 치욕을 돌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엄히 경계하시던 본 뜻이요(신 4:15 이하), 이것이 바로 사도가 아덴 사람들의 우매를 지적해서 말한 그것이다(행 17:29). (사 40:18; 44:10 이하 비교)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처사이다(25절).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치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의 존재를 제대로 들어내지도 못했다. 우상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신데 하나님에게 육체가 있는 것으로 거짓 꾸며대기 때문이다(렘 13:14; 호 7:1). 이 우상은 "거짓 스승"이다(합 2:18).

(2) 피조물에게 신의 영광을 돌리고 있으니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조물주를 제쳐 놓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para, to.n ki,santa)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초월자 신(Numen)이 있었으나 피조물을 경배하므로 결국에 가서는 그를 욕되게 한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조물주 "이상으로" 별, 영웅, 귀신을 더 섬겼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없다거나 감히 예배할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결국 피조물을 섬겼다는 데 죄가 있지만 그 죄가 더 중요한 것은 조물주 이상으로 피조물을 섬겼다는데 있다. 이것이 이방 세계 전반의 죄악상이요 이것이 그들의 법률과 국가체제에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따라서 그들 중에 신지식을 가지고 있던 지혜자들마저도 어리석게 다신론과 우상 숭배에 빠져 들고 말았으니 그들의 나머지 이웃 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네카는 지금은 없어지고만 그의 '미신론'이라는 저서에서(어거스틴의 [신국]6권 10장에 있는대로) 이방 종교의 엄청난 부도덕과 불신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여러 가지 예를 드는 가운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지혜자는 당연히 법으로 제정된 걸로 알고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고대 종교가 이렇게 집대성한 많은 무리의 신들을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보다는 이들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런 핀잔을 주고 있다. "그는 자기가 부당하다고 비난한 것을 경배하였으며 그는 자기가 부당하다고 증명한 것을 실행하였으며 오류 투성이라고 욕한 것을 경배하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사도의 말을 이보다 더 잘 말해 주는게 없겠기 때문이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 행한 모독을 지적하는 가운데 사도는 스스로 하나님을 칭송하고 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하실 이로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려지는 걸 듣거나 볼 때는 그때마다 하나님을 칭송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는 기회를 삼도록 하는게 마땅하다. "영원히 찬송하실 이로다." 그의 이름에 어떠한 욕이 들려지건 말건,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분은 지금도 영광을 받고 계시며 영원히 영광 받으실 것이다.

Ⅲ. 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것은 현세적인 심판이 아니라(우상 숭배에 젖은 나라가 세계 정복한 예는 많다) 영적인 심판으로 이들을 더없이 무분별하고 부자연스러운 쾌락에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다. 곧 그가 그들을 "내어 버려 두셨다"(pare,swken auvtouvj)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24, 26, 28절). 모든 심판 가운데서 영적인 심판만큼 더없이 쓰라리고 두려운 것도 없다.

1. 누가 그들을 내어 버렸는가.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당연한 벌로써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을 베푸시는 가운데 이들을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제멋대로 놀게 내팽개쳐 두신 것이다. 은혜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인간에게 빚진 게 없는 그로서는 자기 원하는 대로 은혜를 줄 수도 거둘 수도 있다. 이렇게 내어 버려 두는 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냐 소극적인 행동이냐 하는 문제는 학자들이 따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자신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강력하게 그들을 기만하며 그들 앞에 사탄을 풀어 놓으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거침돌을 놓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악의 장본인일 수 없고 오직 이 일에 있어서 무한히 의롭고 거룩하심은, 물론 이 포기에 따라 더 극악한 죄악이 따르지만 포기하도록 한 잘못은 사특한 인간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환자가 고집불통이어서 처방대로 따르지 않고 장본인에게 해로운 걸 고의적으로 먹고 행한다면 이 때 의사가 그 환자를 절망적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둔다해서 욕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 오는 모든 증세도 의사 책임이 아니요, 병 그 자체와 환자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그 책임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2. 버림 받은 곳.

(1)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24, 26, 27절).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 보여 주는 자연적인 빛이 주는 보다 정교하고 순수한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은 인간성을 보여 주는 더 조잡하고 빤히 들여다 보이는 감정도 상실하기 마련이다. 존귀한 인간이지만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멸망하는 짐승"보다 더 악독한 것이다(시 49:20).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모독하도록 내버려지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욕의 노예로 전락된 노예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자들은 마치 애굽인들처럼 포악한 군주의 손에 붙여지고 만다(사 19:4). 그들의 더러움과 사악한 욕심의 특별한 예는 자연의 빛에 비춰 봐도 더 없이 명백한 부자연스런 정욕으로 솔론이나 제노같이 현인으로 통하는 자들도 저지르고 만 죄다. 하나님께서 지옥불을 하늘에서 퍼붓게끔 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처절한 죄악이 이방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실천되었을 뿐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잇는 실정이었다. 아마 사도는 우상을 경배하는 가운데 행해지던 추악한 짓들을 두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더러운 신들에 대한 더러운 예배가 아닐 수 없다. 불결한 영은 그러한 봉사를 즐거워하기 마련이다. 이방 우상이 부활되어 귀신들 대신에 성자들을 채워 넣고 있는 로마 교회에도 이처럼 동일한 가증한 일들이 자행되고 교황의 재가를 받고 몇몇 추기경들은 이런 짓을 정당화하고 그대로 따르자고 한다는 얘길 듣고 있다. 동일한 영적 죄에 대한 동일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죄악이 얼마만인가를 보시라.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악한 인간인가! 주여, 인간이 무엇입니까? 하는 다윗의 말마따나 제 스스로 내버려졌을 때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가! 인간성의 존귀와 품위를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약의 은사를 우리가 맛본 게 그 얼마이던가! 이게 아니었더라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받은 인간은 악마보다 조금 못한 자리로 진즉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이다. 온 지구상의 심판관은 언제고 공정하며 죄악과 그 처벌이 고르게 일처리를 하신다.

(2) "상실한 마음"

[1]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했다." 그들의 몰이해는 자신들의 고의적인 마음과 의지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향락에 무관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알려들지도 행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게 바로 육적인 마음의 기질이다. 곧 자신들의 향락만이 최고 목적인 것이다. 화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냥 신지식이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도 우리들의 지식창고에 하나님칸은 빼버리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전능자여, 우리를 떠나소서"하는 자들이다(욥 21:14). 신지식이란 자신들의 욕정과 정반대 되는 것이기에 그걸 마음에 두길 꺼려하고 잇는 것이다. 그들의 지식 가운데("저희 마음에" 해당하는 항목)(evn evpignw,sei)에 있어서 (gnw,sij)와 (evpignwsij)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저 "지식"(앎)이란 뜻이요 후자는 "승인"이란 뜻을 갖는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를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2] 진리를 부정하는 그들의 고의적인 마음에 해당하는 벌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더없이 처참한 죄악 속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상실한 마음"(eivj avso,kimon nou/n)이다.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리판단력에 제거된 상태이니 도덕적으로 오른손과 왼손도 구별할 수 없게 된 지경이다. 죄악의 진로의 종착역이 어디며 마침내 죄인이 빠지는 구렁텅이가 어디인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육신을 불태우는 욕정의 직행 코스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음심이 가득한 눈은 범죄를 그칠 물 모른다"(벧후 2:14). 이 상실한 마음이 바로 커어튼 쳐진 양심이요 감각 없는 양심이다(엡 4:19). 우리의 판단이 일단 죄악과 일치해 버리면 이때 우리는 지옥의 문제에 가가 서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지만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 이처럼 고의적인 곧은 마음은 마땅히 천벌로써의 굳은 마음이 심판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곧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끔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사소한 죄목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극악한 죄를 두고 말하고 있다. 이 죄들은 인간 성정에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자연의 빛과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여기에 이방인들이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진 상태에서 저지르는 이상야릇한 죄목들을 들춰 내고 있다. 그처럼 가증할 수가 없고 자연의 도리와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상실한 마음만은 이 죄악과 어깨를 같이 하고 있다. 당시 도덕의식이 더없이 타락했던 로마 역사를 보면 여기 지목된 죄목들이 당시 시대를 휩쓸고 있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스물 세 종류의 죄목과 군상들이 여기 언급되고 있다(29-31절). 바로 이곳이 악마의 자리이니 그의 이름은 군대요 이는 그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해야 할 때는 온 세상이 개혁을 필요로 하는 바로 이때였다. 맨 먼저 첫 번째 돌에 새겨진 계명에 대한 죄악을 들 수 있으니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바로 여기에 악마의 제 모습이 들어나 있으니 죄는 죄의 모양을 그대로 갖추는 것이다. 이성적인 피조물이 최고선을 싫어하며 의존하는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멀리 하다니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노릇인가? 그렇지만 그게 실정이다. 어떠한 죄든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도사려 있다. 오직 그 정도에 따라서 남달리 더 공공연하게 하나님께 원수 노릇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로써 그들은 하나님 자신과 겨루는 나머지 마땅히 그의 보좌 앞에 바쳐야 할 면류관을 스스로 자기 머리에 쓰는 자들이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돌에 새겨진 계명에 대한 죄를 보자. 이것이 특별히 언급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이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불의에 대한 항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것이 맨 먼저 언급되는 이유는 모든 되는 그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곧 마땅한 일을 하지 않고 보류하며 올바를 일을 곡해하는 일이다. 다섯째 계명에 대한 죄를 보자. 이들은 "부모를 거역하는 자"일 뿐 아니라 "무정한 자"(avstorgouj) 곧 자기 자녀들에게도 매정하고 잔인했다는 얘기다. 한쪽일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 때 다른 쪽 일에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는 마땅히 무정한 부모를 두기 마련이요 그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여섯째 계명에 대한 것은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능욕, 무자비"로 이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 대한 증오 곧 마음의 살인에 대한 표현이다. 일곱째 계명에 대한 것은 "추악"(간음)으로 앞서 불의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있다. 여덟째 계명에 대한 것으로는 "불의"와 "탐욕"이요 아홉째 계명에 대한 것은 "사기, 수근수근하는 자, 비방하는 자, 배약하는 자"이니 중상 모략이다. 여기에 "악을 도모하는 자"와 "우매한 자"라는 일반 원칙이 들어 있다. 곧 악한 일에는 재주꾼이지만 선한 일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을 꾸며대는 데 있어 신중하고 약은 죄인일수록 그 죄는 그만큼 더 크기 마련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는 데는 그처럼 빠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선 우매하다니 정말로 철천지 바보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원죄를 생각할 때 바로 여기에 우리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구의 마음에건 본래부터 이러한 모든 죄의 씨와 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으로 그는 이 모든 죄가 악화된 결말을 보여 주고 있다(32절).

1.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심판)을 알고 있었다."

(1) 곧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게 아니라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그의 공의가 뭘 요구하며 어느 것이 옳다고 인정하시는가 하는 문제다.

(2) 그들은 그 처벌도 알고 있었다. 곧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걸 "알고 있던 자들이다. 다름 아닌 영원한 죽음이 여기에 따른다는 걸 그들의 양심은 똑바로 지적해 주건만 그들은 이 외골길로 거침없이 치닫고 말았다. 알면서 지은 죄,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약 4:17) 지은 죄의 결과는 무섭다. 칼날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만용이다.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으며 죄구렁텅이에 발이 고정되어 있다는 얘기다.

2. 이들은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는 자들이다. 본인이 당하는 시험에 못이겨 더러운 식욕을 한껏 채우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남들의 죄를 보고 기뻐하는 짓은 죄악 그 자체를 위한 죄악의 사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건 바로 악마의 왕국과 그 이익을 위해 연합전선을 펴는 처사다(Suneudokou/si). 곧 자신들이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걸 변호하고 정당화하며 남들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북돋아 주는 것이다. 타인의 죄와 동조하고 그걸 흐뭇해 하는 가운데 우리의 죄악의 짐은 더더욱 무거워 가기 마련이다.

이제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그처럼 죄로 타락해 있던 이방 세계가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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