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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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바울의 로마 여행(1)(사도행전 27:1-11)

바울이 아그립바와 만난 후 얼마나 오랜 후에 그의 황제에 대한 상소를 실행시키기 위하여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는지는 본서에서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가능한 한 최초로 편리한 때를 선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동안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지냈다. 그들은 바울을 위로하여 주고 바울은 그들을 축복하여 주었다.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전하여 준다.

Ⅰ. 바울이 아달리야로 행선하게 된 경위. 그가 로마로 가는 데는 오랜 항해를 통한 방법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가이사에게 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우리의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었다"고 전해 준다. 그들은 로마로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아마 육지로 갔다면 그것은 무척 머나먼 길이었을 것이다. 그 까닭에 로마 사람들이 유대 나라를 정복하리라는 예언이 말씀될 때(민 24:24),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깃딤은 이달리야이다) 에벨(즉 히브리)을 괴롭게 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제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베스도의 뜻에 의해 작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을 시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의 호송 책임자. 바울은 "율리오라는 친위대의 한 백부장에게 넘겨졌다"(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다)(10:1). 율리오는 자기 밑에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바울에 대한 경비병을 세워 그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고 동시에 그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즉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2. 바울이 승선하였던 선박. 그들은 아프리카의 항구인 아드라뭇데노에서 출항한 배에 승선하였다(2절). 아드라뭇데노에서 이 배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상품을 싣고 시리아로 행선하였다. 시리아는 이 상품들의 좋은 소비시장이었다.

3. 행선 중에 그와 함께 탔던 무리. 몇 사람의 죄수들도 백부장 율리오에게 위탁되었다. 그들도 역시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로 로마로 호송된 것 같다. 즉 거기서 재판을 받거나 또는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의 죄를 입증할 증인으로 심문을 닫기 위해 로마로 호송된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바라바와 같은 악명 높은 범죄자들인지도 몰랐다. 그러기에 황제가 친히 자기 앞에 끌어오라고 지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도적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듯이 바울도 도적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행선하며 운명을 같이 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본장에서(42절) 우리는 바울이 그들 때문에 처형될 뻔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살게 되었다. 죄없는 사람이 이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계수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몇 사람의 바울의 동료들도 그와 함께 있었다. 특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끼여 있었다. 그가 함께 여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본문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달리야로 여행하였다 했고 "우리가" 배에 올랐다고 말하였던 것이다(2절).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그의 동행으로서 특별히 본문에 언급되고 있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에베소인 드라비오도 바울과 함께 떠났으며 바울은 그가 병이 들었으므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딤후 4:20)고 한다. 또한 바울은 본문에서 언급된 아시아 해변의 여러 항구를 경유하다가 디모데도 그 어느 한 곳에 남겨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지루한 항해에 몇 명의 동료들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바울의 주변에는 거친 불신의 무리들도 있었지만 또한 친구들도 있어서 그들과 자유로이 대화할 수가 있었다. 오랫 동안 배로 여행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게 된다"(역주:이 말은 시 125 있는 말씀으로 본서에서는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배로 여행하는 자들:5에은 어쩔 수 없이 악한 자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악한 동행들을 개화시키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에 의해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한 지혜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Ⅱ. 그들이 항해한 항로와 기항했던 항구. 이 사실들을 수록한 것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것이 진실된 역사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기록된 것이다. 또한 그들로 그가 어느 곳을 경유하였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1. 그들은 배가 출범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돈에 기항하였다. 바로 이튿날에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에게 매우 친절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는 바울의 소송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이 자기를 변명하는 변론을 듣고 그가 결백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에게 주어진 처사는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성 중의 높은 사람들 중의" 그리하여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25:23). 그러므로 바울이 죄수로서 그에게 위탁되었지만 율리오는 바울을 친구로서 학자로서 신사로서 또한 하늘 나라에 유업을 지닌 사람으로서 대우하였다. 또한 배가 짐을 풀고 싣기 위해 시돈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율리오는 바울이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을 것을 허락하였다." 그 호의로 바울은 훌륭한 기분전환의 기회를 가졌으리라. 율리오는 여기서 권력을 쥔 자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존경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고 자기의 권력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요셉이 그러하였듯이 바울은 평범한 죄수로 취급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이같이 하여 그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를 신뢰할 것을 격려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전혀 기대도 않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그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그들로 그의 백성을 동정하게 하고 존경하게 하며 귀히 대우를 받게 하신다(시 106:46). 또한 백부장이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을 바울의 신실함의 단면을 보여 준다. 바울은 결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손쉽게 도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겠다고 서약은 하지 않았으나 성실하게 자기의 감옥으로 돌아왔다. 백부장이 바울을 신뢰하였다면 바울은 또한 바르고 정직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2. 2. 그다음 그들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였다"(4절). 반약 바람이 순조로왔다면 곧바로 행선하여 더욱 많이 항해했을 것이고 구브로 섬 오른쪽으로 항로를 잡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으므로 측면 바람에 의지하여 사선(斜線)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섬을 돌아야 하는 먼 항로인 구브로 섬 왼쪽으로 항로를 잡았던 것이다. 선원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배울 움직일 수 없을 때는 최선의 방책을 취한 다음 바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한 것이든지 간에 그 바람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통과할 때도 우리는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대양을 건너야만 한다. 바람이 거슬러 오더라도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다 이용하여 전진을 해야만 한다.

3. 무라라고 하는 항구에서 그들은 배를 갈아 탔다. 아마도 그들이 탔던 배는 끝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올랐다(5, 6절). 알렉산드리아는 현재 이집트의 중요한 도시이다. 전에는 이달리야와 이 성 사이에 무역이 성하였다.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옥수수를 수입하여 로마로 들여 왔으며 또한 홍해에서 수입한 동안도 상품과 페르시아의 상품들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지중해의 여러 곳 특히 이달리야로 재수출하였다. 그들이 이달리야 항구에 들어 올 때 다른 배들처럼 급히 돛을 내리지 아아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은 알렉산드리아 배들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호의였던 것이다.

4. 많은 노고 끝에 그들은 "좋은 항구"라고 하는 그레데 섬의 항구에 도달하였다(7. 8절). 그들은 바람이 잠잠하였거나 아니면 역풍이 불어서 "더디 행선하였다."그들이 갈리아 항구인 니도에 이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다음 그들은 전에 구브르 해안을 의지하여 행선하였듯이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여 행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또한 그레데 섬의 동쪽 해변에 돌출해 있는 살모네를 지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까지의 행선에는 심한 폭풍은 없었으나 매우 지루한 것이었다. 이같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괴로운 운명 앞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고 서서히 항해를 한다. 그렇다고 행운의 섭리가 주어진다고 그들이 빨리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영혼에 관하여 이런 불평을 한다. 즉 하늘 나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세상을 무시할 수 없으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 세상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불평한다. 그들은 하늘 나라로 가는 데 많은 장애물을 만난다. 또한 바람에 묶여 장시간 체류하게도 된다. 그들이 이른 곳은 "좋은 항구"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여행가들에게 그곳은 지금까지도 꼭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그 이름은 그곳에 경치나 주변의 환경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1) 그럼에도 이 항구가 그들이 목적하던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항구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거할 항구는 아니었다. 우리가 세상의 어떠한 훌륭한 환경에 처해진다고 하여도 그곳이 결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님을 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어나서 떠나야 한다. 그곳이 비록 좋은 항구일지라도 소망하는 항구는 아니기 때문이다(시 107:30).

(2) 12절에 언급된 대로 그곳은 "겨울을 날 만한 항구"는 못되었다(12절). 그곳의 경관은 좋았으나 기후가 변덕이 심하였다. "좋은 항구"라고 하여서 안전한 항구는 될 수 없음을 유의하자. 가장 유쾌한 장소가 가장 위험한 곳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Ⅲ.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들 앞에 놓인 여행에 대하여 충고하였다. 즉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있는 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좋은 계절이 올 때까지 출항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 그때는 행선하기에 나쁜 계절이었다. 그들은 역풍과 싸우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로 인해 "단식일로 정해진 추분도 이미 지났기 때문에" 행선은 위험하였다. 단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명한 연례적인 절기였다. 또한 이날은 속죄의 날로써 금식을 통하여 "영혼이 회개하는 날"이었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7월 10일에 지켜졌다. 오늘날의 우리가 사용하는 월력으로 한다면 약 9월 20일경이 된다. 이 연례적인 절기는 매우 경건하게 지켰다. 그러나(이상하게도) 성경 전체에서 이 절기를 지켰다는 사례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본문에서만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도 오직 그 해의 계절을 구분하기 위하여 쓰여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영국 선원들은 미가엘 제일(祭日)[역주 : 9월 20일로 영국의 사계(四季)지불 일 중의 하나임]을 한 해 에 그 어느 때보다 행선하기에 나쁜 날로 간주된다. 그들은 미가엘제 폭풍을 두려워한다. 바로 본문의 궁지에 빠진 항해자들에게 닥친 시기가 이때였다. "수확하는 절기가 지나고 여름철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시간 뿐만 아니라 기회까지 상실하였던 것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위험을 통고한다(10절). "내가 보니"(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또는 사나운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추진하려는 그들의 외고집적인 주장을 보니) "이번 행선에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배에 화물을 가지고 있는 너희들은 그것을 잃기 쉽고 만약 우리가 생명만이라도 건진다면 그것은 은혜의 기적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배에는 몇 사람의 선한 인간의 있었으나 악인들이 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이 같은 정황에 처하여 있어서 의로운 사람에게나 사악한 자들에게나 동일한 운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양자가 다 같은 배에 탔다면 위험 또한 같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11절). 그들은 항해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 그가 이런 일에 간섭하려 드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승객이었지만 권력있는 자였기에 그 일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은 바울의 충고를 듣고 그것을 묵살하여 버렸다. 백부장은 바울보다 더 많이 바다에서 항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그 근처의 바다에 대하여 바울만치 익숙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레데에 복음을 전하러 왔었고(딛 1:5) 또 그 섬의 여러 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래 그가 하는 전문 직업에 의하여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고 하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바울 같은 사람은 어떤 유명한 선원들보다 항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권위가 있으리라고 인정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생각에 의해 더 지배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들고 있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백부장은 바울에게 매우 친절하였으나(3절)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역자들에게 경의는 표하면서 그들의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겔 33:31).

 

27:2 없음.

 

27:3 없음.

 

27:4 없음.

 

27:5 없음.

 

27:6 없음.

 

27:7 없음.

 

27:8 없음.

 

27:9 없음.

 

27:10 없음.

 

27:11 없음.

 

27:12

바울의 로마 여행(2)(사도행전 27:12-20)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Ⅰ. 그 배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 처음에는 순풍을 따라 항진할 수 있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그들로 하여금 좋은 항구를 떠나도록 한 유인(誘認). 그 이유는 그들이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다고 "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곳은 여름에는 아주 유쾌한 곳이었으나 겨울에는 황량한 곳이었다. 아마도 또 다른 불편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한 예로 그곳은 식량이 부족하고 귀했던 것 같다. 우리도 가끔 그렇게 하이 그들도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재앙을 불러들였다. 선원 중의 몇 사람들이나 그 일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몇 사람들은 날씨가 불순한 관계로 행선을 감행하기 보다는 그곳에 머물러 있자고 하였을 것이다. 광폭한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보다는 비록 불편한 항구라도 거기서 안전하게 있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그 문제가 협의에 붙여졌을 때는 떠나자는 편의 표가 많았고 그것도 대다수가 떠나는 데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먼 곳으로 가기를 목적한 것은 아니고 이 섬의 다른 항구로 가자고 하였다. 그곳은 베니게라는 곳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이 이같이 불리워진 이유를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인 페니시야(블레셋) 사람들이 그곳에 자주 들른다고 해서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은 이 항구의 위치에 대해서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항구는 두 개의 갑 사이에 위치해 있거나 육지가 바다로 튀어나온 돌출부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것 같다. 그 돌출부의 한편은 동북을 향하고 다른 돌출부는 동남을 향하고 있어서 이것들이 동풍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이같이 창조주께서는 지혜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큰 물 가운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안전과 보호를 위한 대비처를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천연의 항구를 마련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주신 항해할 바다도 인간에게 아무럴 소용이 되지 못할 것이다.

2. 그들이 처음 출항할 때 그들에게 용기가 되었던 요인. 그들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13절). "남풍이 순하게 불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였다. 그리고 암초나 스르디스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람이 너무도 부드럽게 불었기 때문이었다. 순풍이 돛을 달았다고 하여도 언제 폭풍을 만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해서는 안 되고 쉽게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언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그들의 목적을 방해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Ⅱ. 그 배는 곧 폭풍을 만났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폭풍이었다. 그들은 폭풍을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들은 순조로운 징조들을 보고 그것에 의해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남풍이 부드럽게 불고 있으니 언제나 그러리라고 상상하였다. 그들은 바람이 순하다는 사실만을 믿고 행선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미풍을 더 믿은 거시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폭풍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경고받았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다.

1. 그들이 당면한 위험과 곤란.

(1) "광풍에 대작하게 되었다." 그 광풍은 그들의 정면으로 불어왔으므로 전진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폭풍은 요나를 추격하던 폭풍과 같이 격렬한 바람을 수반하고 있어서 심한 파도가 일게 되었다. 비록 바울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자기의무를 수행하고자 하였으며 요나처럼 하나님과 자기의 의무를 떠나 도당하지고 않았지만 함께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그 바람은 선원들이 유라굴로라고 부르는 광풍으로 북동풍으로 불고있었다. 이 폭풍은 이 쪽의 바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회오리 바람의 일종이었다. 이 사실은 배다 그 바람에 휘말려 들었다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15절). 이 바람을 일으키게 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 바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바울을 통해 그들이 이 폭풍을 벗어나게 하므로 바울에게 명예를 갖다 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광풍은 "하나님의 창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시 135:7)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것이다"(시 148:8).

(2) 그 배는 "심히 요동하였다"(18절). 즉 그것은 축구공처럼 파도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곤 하였다. 승객들은(시 107:26, 27 에 우아한 필치로 묘사되었듯이)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였다." 그 배는 바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또한 바람을 거스려서 항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돛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런 광풍 속에서는 돛이 도움을 주기 보다는 위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는 대로 물결에 배를 맡겨 두었다." Non quo boluit sed quo rapit impetus undae - 즉 배가 목적지를 잃고 맹열한 파도에 밀리어 갔노라(Ovid. Trist)는 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광풍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베니게 항구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곧 조용한 항구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과동하리라는 생각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어쩐 일인가! 그들은 갑자기 이러한 역경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우리가 하늘에 오를 때까지 완전한 안전이나 영원한 평안을 결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들은 여러 날 동안 태양도 별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온통 암흑 가운데 던져졌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두렵게 하였다. 당시는 선원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의사용법도 그때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따라서 그들이 해나 달을 볼 수 없으므로 그들을 안내해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 사태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영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끔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들은 아무 빛도 없이 어둠 속을 항해하였다." 해나 달도 보이지 않았다. 위안을 주는 것이나 용기를 주는 아무 것도 없었다.

(4) 그들은 혹심한 겨울의 기후를 맞고 있었다. ceimwn ouk oligoj - 즉 결코 적지 않은 폭풍. 차가운 비, 눈, 등 그 계절의 모든 매서운 추위가 그들을 엄습하였다. 그들은 이제 추위로 죽을 지경에 있었다. 이런 정황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바다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인생살이는 통하여 당하는 위험에도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선원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해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을 있게 하신다. 그 이유는 나라들 사이에 특히 이방의 섬들에까지 교역이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갈은 그의 장막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게 하시고 스블론은 나가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항해하는 자들(어부) 가운데서 사역자를 택하신 것은 그들이 역경을 이기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2. 그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들이 시도했던 방법.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선원들이 취하는 모든 빈약한 방법들을 다 시도해 보았다.

(1) 바람을 뚫고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배가 떠내려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는 열심히 노를 젓거나 돛을 달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싸워바야 아무 소득이 없을 바에는 굴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들은 도중에 가우다라는 작은 섬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가까워졌을 때 계속 행선을 할 수는 없었지만 배가 난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태를 정리(수습)하여 섬에 부딪치지 않고 섬 아래로 간신히 지나가게 되었다(16절).

(3) 배가 난파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은 거룻배를 떠내려 가지 못하게 잡아 두었다. 그들은 많은 수고 끝에 거룻배를 배 위에 끌어 올렸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는 그들이 "간신히 거루를 잡았다"(16절)고 했고 마침내 "그것을 끌어 올렸다"(17절)고 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긴급한 상황에 이 배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을 위해서 거룻배를 수고를 하면서 배 위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4) 그들은 가능한 적절한 조치를 다 취하였다. 그 당시에 꼭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때는 항해술이 오늘날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미숙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가 부서지지 않게 선체를 밧줄로 동여맸다"(17절). 그들은 가장 심한 파도에도 배가 부셔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한 줄로 선체를 묶은 것이다.

(5) 또한 "모래 바닥에 걸릴까 염려하여 돛을 내렸다." 그런 다음 배 가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폭풍우를 만날 때 배는 온통 물에 휩싸인다. 그러면서도 배가 잘 견뎌 나가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리고 선원들은 배를 상륙시킬 수 없을 때는 그 배를 될 수 있는 한 육지와 먼 간격을 유지하는 법이다.

(6) 이튿날 그들은 바다에 짐을 풀어버리고 싣고 있던 상품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다(요나가 탄 배의 수부들이 그랬듯이. 욘 1:5). 그 이유는 짐들과 같이 죽기 보다는 차라리 그서 없이 가난하게 지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되었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욥 2:4)고 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의 재산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것이 모든 행복을 결정하는 양 사모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짐스러운 때가 오는 법이다. 즉 그것이 너무 무서워 안전하게 운반할 수 없든지 아니면 너무 무거워 그것을 지닌 자를 익사시키는 것이다. 고로 "소유주가 그 패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하였다(전 5:13).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서는 자기의 재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자의 부활에" 그들이 천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긍휼과 자비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경건이 일과 구제 사업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일에는 얼마나 재물에 인색한 지 모르는 것이다. 신앙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들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기에 그들의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다"(히 10:34). 누구나 사람이라면 생명을 잃기 보다는 차라리 그의 재산을 내놓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보다는 "믿음과 좋은 양심을" 손쉽게 버리려고 한다.

(7) 사흘째 되는 날에 그들은 "배의 기구를" 내어 버렸다(어떤 이들은 이를 부장한 배로 취급하여). 그들이 지금 버린 것은 병기라고 본다. 우리도 흔히 극심한 폭풍을 만나면 병기들을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 그러나 과연 당시의 그들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버릴 만큼 많은 병기를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여하간 나는 그들이 폭풍우 속에서도 매우 유용하며 무게도 많이 나가지 않는 연장들까지 바다에 버릴 만큼 그들이 무지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3. 마침내 그들은 절망에 빠졌다(20절). 본문은 이를 표현하여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폭풍우는 계속되었고 중지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때로 아주 사나운 날씨가 몇 주일이고 계속되는 경험을 한다.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포자기하였다. 그들 앞에 놓인 절망적인 상황에 그들은 당황하여 먹거나 마시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배에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38절). 그러나 그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압감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또한 그의 이름으로 폭풍우를 진정시키지 않았는가? 왜 그는 우리의 주께서 하신 대로 바람과 파도에게 "평온하고 잠잠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사도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7:13 없음.

 

27:14 없음.

 

27:15 없음.

 

27:16 없음.

 

27:17 없음.

 

27:18 없음.

 

27:19 없음.

 

27:20 없음.

 

27:21

바울의 로마 여행(3)(사도행전 27:21-44)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료 여행가들의 역경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것도 오로지 바울의 덕택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37절)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수효가 몇이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은 선원, 상인, 군인, 죄수 기타 승객들로서 모두 이백 칠십 육인이었다. 그들의 수효가 기록된 것은 우리가 그 얘기를 읽을 때 이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었다. 즉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가장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는 것과 나머지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바울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앞의 단원에서 그들이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사실까지 고찰하였었다. 요나의 수부들이 그랬듯이 그들이 각각 가들의 신을 불렀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폭풍 속에서의 이러한 훌륭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것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어쨌든 바울은 요나와 같이 폭풍의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폭풍 가운데 위안자 역할을 하였고 요나가 선지자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과는 반대로 그는 사도의 믿음의 표상이 되었다.

Ⅰ. 바울이 그들에게 한 위로. 인간이 볼 때에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때일지라도 그들의 생명이 모두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확신시켜 줌으로써 바울은 먼저 그들을 절망 상태에서 끌어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절망 때문에 죽거나 또는 절망으로 먹지 않아서 굶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먹고 정신을 차릴 다음에야 곤경을 벗어나는 바른 방법도 강구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오래 먹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마치 그들은 생사가 결판 날 때까지 먹지 않을 작정을 한 듯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곤경 가운데서 바울은 나타나지 않고 그들과 한 데 섞이어 선원처럼 행동하였고 저희가 "연장을 내버리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19절).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나타내어 비록 죄수이긴 했지만 그들의 상담자와 위안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 바울은 그들이 자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책망한다. 즉 그의 충고는 전에 그들이 있었던 "좋은 항구"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었다. 그는 말한다. "여러분들은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거기서 우리는 겨울을 잘 지낸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우리는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을 것이다. 즉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라면 세상에서의 타격과 손상도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손실이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약화시키고 우리를 일깨워 장래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면 진실로 우리는 타격과 손상에 의해 소득을 거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했을 때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유의하라. 그럼에도 만약 그들이 지금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만 한다면 바울은 위험 속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비록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고집에 의하여 곤궁에 빠졌으며 또한 경고를 무시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곤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이제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 그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죄를 책망하므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그들의 타격과 손해를 당할 것을 예기했을 때 그들이 여행을 계속하면 시간이 절약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유익하노라고 확신있게 얘기한 사실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길 "그러나 당신들은 타격과 손상 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제도 할 말이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제 그들이 책망받는 것은 안전했던 그레데를 떠났던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시작하는 것이 좋은 줄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 불편을 자초한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보다 나은 충고를 반대하므로 타격과 손실만을 당한다.

2. 그들이 배를 잃을지라도 그들이 생명에는 손상이 없겠노라고 바울은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그렇다고 그는 "나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어리석음을 이제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응분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너희 모두가 생명을 잃는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움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럼에도 이제 선민에게는 소망이 있다. 너희의 처지가 비참하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하였다. 이같이 우리들도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확신하고 그들의 과실을 알고 슬퍼하기 시작하는 죄인들에게 "여러분이 우리의 말을 듣고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으리라. 그러나 지금도 우리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우리가 감히 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우리의 충고를 너희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제 절망하지 말라는 우리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주장을 포기하고 더 이상 아무런 방법을 취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울은 만약 너희가 원기를 되찾으면 너희의 생명은 구하리라고 말해 줌으로써 그들의 기운을 돋우어 그들로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분발하게 하였다. 그는 그들이 최고도의 고통에 직면해 있을 때 그들에게 이런 확신을 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다 죽음을 당하리라고 단정했을 때 하나의 생명도 죽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소식을 들려 줌으로 그들에게는 갑절의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의 것을 말하였다.

(1) 그들은 배의 손상을 각오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배와 짐에 관심있었던 자들이 대부분 바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무릅쓰고 행선을 추진하자는 데 찬성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경솔함에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들의 배는 난파될 것이었다. 많은 위엄있고 튼튼하고 화려하고 당당한 배들도 순식간에 거대한 물결에 의해 파선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다"고 하였다. 이 말은 죽음이 두려워 거의 죽게 된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죄된 양심이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매우 무섭게 보이게 했으리라.

3. 바울은 자신이 무슨 근거로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가를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즉 그것은 그들을 웃기려고 한 말이나 즐겁게 해 주려는 말이나 또는 가정에서 나온 말이 아니요 이 일에 대해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는 만큼 이 계시는 신빙할 수 있음을 말하였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실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을 인하여 그들이 다 보호받을 것을 말씀했다(23-25절). 이 사실은 그들의 안전이 이중적으로 보장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 뿐 아니라 바울에게 특별히 주신 약속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고백. 그는 이 자비로운 사실을 알려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경건하게 말하였다. 그는 그러므로 본문을 통하여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1]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논의의 여지가 없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지니고 계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의 속한 바 하나님"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이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며 주의 것인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것이다. 또한 그가 우리를 보존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것이다. 또한 그가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것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끌어 올리셨기 때문이다.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주의 것이다.

[2]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지배자이며 주인으로 여긴다. 그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또한 그를 다스리실 권한이 있으시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 하였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므로 그분을 섬겨야 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몸을 바치고 그분의 일에 종사해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뵈었던 분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이며 천사들도 그의 것이며 그분의 심부름을 위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가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사도로서 그를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속한 바 곧 우리의 섬기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했던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신들과 같이 내가 세속적인 일로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늘 섬기는 분을 위하여 로마로 가노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으로 서기 위하여 로마로 가노라"고 하였다. 이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속해 있고 또 그가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오는 것을 보았으나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예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꼭 같은 이유로 요나가 선원들에게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요 1:9).

(2)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한 바울의 설명.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섰다"고 말한다. 이 신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바울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곤 하던 사자였다. 그는 "바울 곁에 섰다." 즉 바울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났다. 아마 그때 바울은 잠을 깨어 일어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바울이 "먼 바다에 있으며"(시 65:5), "바다 저편 끝에 가 있더라도"(시 139:9),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그가 교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런 환경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방문하시는 유익함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거기서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그곳까지 그의 사자를 보내실 수 있으시다. 바울이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사자는 어디서 그를 찾아 낼지를 아신다. 배는 바람과 파도로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또한 폭풍우는 맹렬함 가운데서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배로 폭풍을 뚫고 나가게 하셨다. 어떠한 폭풍이나 광풍도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교통하심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비록 "바다가 으르렁거리며 요동할지라도" (시 46:1, 3) 즉시 도움을 주시며 가까이 계시어 도우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죄수였으므로 백부장이 거하는 일등 객실은 고사하고 배 안에 어떤 객실도 자기의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선창에 있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어둡고 더러운 곳에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게 되었어도 그것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k자는 거기서 그의 옆에 서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초라하고 빈곤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우리를 멀리 하시지 않는다. 야곱은 돌베게를 베고 있었고 하늘을 지붕삼아 누워 있었지만 그럼에도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 바울은 그 환상을 "지난 밤"에 보았다.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본 환상을 통하여 자기가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있었다(23:11). 그 때의 환상을 통해 그는 자신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와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전까지 그에게 확신시켜 주는 새로운 환상을 보았던 서이다.

(3) 환상을 통해 바울에게 주어진 격려(14절).

[1]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며 절망에 빠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아 두려워 말라.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는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라"(사 8:12)고 하였다. "시온의 죄인들은 두려워하나" 성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록 폭풍우가 몰아 치는 바다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사 33:14-16).

[2]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이 로마에 안전하게 도착하리라는 것을 바울에게 확신시킨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으므로"라고 했다. 가장 강한 적의 분노도 가장 폭풍우가 심한 바다의 노도도 하나님의 증인들이 그들의 증언을 끝낼 때까지는 그들을 다치지 못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섬김을 위해 이런 위험에서도 보호되었다. 이 사실은 역경과 고난에 처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게는 위로가 된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을 하시는 한 그들의 생명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그로 인하여 그와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도 폭풍우 가운데서 죽음을 면하게 된다고 하시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였다. 바울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명을 받은 주의 사자는 난파된 배 가운데서 바울만 또는 그와 그의 동료들만을 골라서 안전히 육지에 닿게 하고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만을 구원하심으로 선한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신 것이 아니라 바울을 인하여 모든 사람을 구하므로 선한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본문은 "하나님은 너와 함께 행선하는 사람들을 네게 주셨다"고 하였다. 이 말은 너 때문에 또는 네 기도에 응답하여 그들을 살리셨다는 말씀이다. 때때로 선한 사람들도 "자기들의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는 경우도 있다"(겔 14:18).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이 배에 탄 거의 삼백명 가까이 되는 모든 승객을 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인하여 악인도 흔히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롯 때문에 소알을 멸망에서 제외하셨고 소돔도 그 안에 열 명의공의로운 사람들이 있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들이 마치 그들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미움을 받고 학대를 받는다. 그러나 실은 이 선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무모하게도 나쁜 무리 가운데 휩쓸려 버렸다면 그는 악인들과 함께 멸절되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불렀으므로 나머지 사람들도 바울과 함께 보호를 받는 것이다. 바울을 인하여 그들이 구원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에 대한 커다란 은총의 표시였다. 바울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그에 대한 은총의 표시인 줄 알았다.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이 대중에게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거보다 더 큰 만족은 없을 것이다.

4. 바울은 자기가 받았던 것과 꼭 같은 위안의 말로 무리들을 위로 하였다(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이 좋게 끝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말씀 즉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그것을 믿으며 그 믿음을 인하여 그의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엄숙하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가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리라"고 그는 믿었다. 바울은 의심하지도 않았고 의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렇게 믿은 다음 그는 안심하고 용기를 가졌다. 하나님은 항상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므로 그분의 언약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항상 안심시켜 주신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과 행하심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믿음과 기쁨을 서로 다를 수 없는 것이다.

5. 바울은 그들에게 장차 되어질 일을 말해 주었다. 즉 바울은 그들에게 이 광폭한 행선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를 특별히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26절).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이로 인하여 배는 파산될 것이나 승객들은 구원받으리라. 그리하여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현재 항해사는 더 이상 운전을 포기하였고 그리하여 배는 무작정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위도에 와 있는지 몰랐으며 어떻게 그들의 항로를 배를 저어 갈지 더욱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에게 피난처가 될 섬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배와 같이 "폭풍우에 시달리고 평안하지 못할 때" 그리고 "모든 하나님 교회의 자녀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를 인도할 사람이 없을 때"라도 하나님은 안전하게 그 교회를 육지에 데려다 주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Ⅱ.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육지에 정박한다(27-29절).

1. 그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꼬박 이 주일을 폭풍 속에 있었다.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즉 그들이 어떤 육지에 이르기 전까지 그들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그곳은 베니스가 있는 아드리아만이 아리나 지중해의 일부로써 시실리아해와 이오니아해를 포함하여 아프리카 연안까지 뻗어 있는 아드리아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바다에서 그들은 쫓겨 다녔고 또 그들은 그들이 어디쯤 있는지도 몰랐다.

2. "밤중쯤 되어 사공들은 배가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한 섬에 걸리리라는 바울의 말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육지에 확실히 닿았는지 시험하기 위해 수심을 알아 보려고 물을 재어보았다. 그 이유는 육지에 가까워 짐에 따라 물을 점점 얕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재어 보니 "이십 길이 되고 두 번째는 열 다섯 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느 해안에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원들에게 이 같은 지혜를 주시어 어둠 속에서라도 그들이 주의를 하도록 배려하신 것을 볼 수 있다.

3. 그들은 육지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고 해안에 있는 암초가 두려워 "닻을 내라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즉 그들은 암초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피신처를 버려두고 다시 바다로 나가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진심으로 아침을 고대했다. 그들이 볼 수 있었을 때에는 보이는 섬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그들 가까이에 섬이 있었으나 그것을 볼 빛이 없었다. 이제 그들이 날이 새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빛이 없이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에도 "주께서 우리를 저버리셨다"라든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사공들이 취한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즉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결국 날이 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완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가게 해 준다"(히 6:19). 이 소망을 꼭 붙잡고 다시 바다로 나감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곁에 거하며 날이 밝아 어둠이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Ⅲ. 사공들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좌절됨. 이제 그들의 역경 속에 새로운 위험이 더하여졌다. 이 위험을 그들은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사공들이 배신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따나려는 계획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생각을 한다고 잘못될 것이야 없지만 배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그들이 이런 계획을 품었다는 것은 가장 비열한 행위였다(30절). 본문에 보면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라고 했다. 즉 그들은 배가 파도에 밀려 육지에 부딪치면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도망을 계획한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거룻배를 띄워서 자기들만 그 배에 타므로 위험을 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게 내버려 두자는 것이었다. 이런 비열한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그들은 "이물(뱃버리)에서 닻을 내리는 체 하였다." 사실 그들의 속셈은 그들이 배에 끌어 올렸던(16, 17절) 거룻배를(바다에) 내려서 그것을 타려는 데 있었다. 이 음모는 그들이 배를 육지에 부딪치지 않도록 배를 보살필 때 서로 의논하여 의견의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배신한 사공들은 위험이 닥쳐 와 그의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 달아나는 거짓 목자와 같은 것이다(요한 10:12). 그러므로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나 위골된 발과 같으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씀은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자.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하리라고 확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들의 거짓말을 피난처로 신뢰하려 했다.

2. 바울이 그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계획을 저지케 함(31절). 승객들은 모두 사공들이 거루에 타려는 것을 보았으나 사공들이 꾸민 위장에 의해 속았다. 단지 바울만이 그것을 꿰뚫어 보고 백부장과 그의 군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또한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공들의 솜씨는 폭풍우 속에서 그리고 배가 위기에 처할 때 요구되는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사공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제 모든 고난 중 가장 커다란 고난이 그들 앞에 당면해 있었다. 그러므로 사공들도 전보로도 더욱 필요하였다. 사공들의 기술에 의해 승객들이 육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이것은 그들의 기술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육지에 가까이 왔으니 사공들이 배룰 육지에 닿게 하도록 기술을 발휘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 말이 그들이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그가 확언한 것을 결코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결과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방법 즉 사공들의 도움으로 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도 정하시었다. 하지만 만약 사공들이 도망갔다 해도 틀림 없이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다른 좋은 방법을 통해 이루셨을 것이다. 바울이 이 사람들은 너희의 구원에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는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분별있는 사람으로써 말한다. 의무는 우리의 일이며 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우리를 맡기자"하고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대책들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3. 군사들이 그 계획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32절). 사공들과 그 사건을 놓고 논쟁할 때가 아니었으므로 군인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렸다." 이 배가 그들의 지금 당면한 고난 가운데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사공들이 이 거룻배를 이용하여 도망함으로 이 거룻배가 그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게 되자 그들은 이 거룻배를 포기하여 떠내려 보냈다. 이제 사공들은 그들이 좋건 싫건 배에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또한 배의 안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힘껏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Ⅳ. 바울은 무리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즉 그들로 음식을 먹도록 권하고 또한 그들이 목숨을 건지게 되리라는 것을 거듭 확언하므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복이었다. 그는 하늘 나라와 교통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쇠를 예리하게 만들어 주모든 것처럼 자기 동료들의 정신을 날카롭게 일깨워 주었다." 밖으로는 전쟁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곤경의 시기에 있어서의 이러한 친구란 참된 친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금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고 하였다. 재난을 당하는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바울이 준 권고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날이 새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을 잠시 기다리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고대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날이 밝는 것이 그들의 용기를 다소 회복시켰고 그 때 바울은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1. 바울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소홀히 하여 돌보지 않았음을 꾸짖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서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자가 오늘까지 열 나흘째다"(33절)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이 말은 그들이 모두 또는 그들 중의 몇몇이 열나흘이나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 말은 그들이 전에 하던 것처럼 규칙적인 정규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먹었고 또 때를 걸르는 때도 있었다. 본문은 또한 다음의 뜻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계속 굶주려 왔다. 즉 너희는 식욕을 잃고 지내왔다. 너희는 두려움과 절망과 싸워 이기느라 음식에 대한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맛도 못느끼고 먹었다"는 말을 볼 수도 있다. 성서는 심히 서글픈 상태를(시 102: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다"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육체에 필요한 영향을 공급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이다. 실로 "자신의 육체를 경멸하여 몸에 충분한 식사도 들지 않으며 몸을 아까지도 않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충분하게 지녔으면서도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도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약한 병인 것이다(전 6:2). 만약 이런 것을 사용할 힘을 잃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슬픔과 과도한 두려움이나 고통으로부터 생긴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죄이며 불복이며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이며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 죽는 것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그러나 이와 같이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낳는 반면"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은 가장 커다란 곤난과 위험 가운데서조차 생명이고 평화인 것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권한다(34절). 이제 내가 권하노니 "음식을 먹으라. 우리 앞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육지에 닿도록 해야 한다. 굶주림으로 우리의 육신이 약해지면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천사가 엘리아에게 "일어나 식사를 하라"고 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행이 그에게 너무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왕상 19:7).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식사하도록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파도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본문에 parklw - 즉 내가 너희에게 원하노니라 하였다. 즉 그 뜻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나의 지시를 따르려 한다면 음식을 먹으라. 식욕이 없다 할지라도 또 먹을 기력이 없다 하더라도 음식을 들어야 한다. 이는 너희의 건강을 위해서이며 너희 생명의 보전과 안전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구원을 위함이다. 너희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자기 생명을 구할 힘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하려는 자는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영적인 상태에 대해 의혹과 두려움에 굴복한 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만찬을 금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면서 자기들의 영적인 일과 안녕을 지속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음식을 먹고 즐겼다면 힘이 세어졌을 것이고 또한 이로써 자기 영혼의 건강과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었으리라.

3. 바울은 구원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그것은 완전한 보장을 표시하기 위하여 격언을 인용하여 말씀한 내용이다. 그것은 열왕기 상 1장 52절과 누가복음 21장 18절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죽음이 두려워 먹을 수 없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분명히 살아날 것이다. 음식을 먹으라. 너희는 온몸이 젖게 되어 추위로 떨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나 생명과 수족은 온전하리라. 너의 머리털은 젖더라도 그러나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4. 바울은 손수 승객들을 위해 식탁을 마련하였다. 그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혼이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떡을 가져 왔다." 즉 떡을 배의 창고에서 가져 왔다. 그들 모두가 식욕을 잃고 있었기에 이 음식 창고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기후의 곤란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오랫 동안 바다에 떠 있을 때 선원들이 가끔 겪듯이 그들의 경우도 음식을 제한해야 할 상태에는 이르러 있지 않았다. 음식은 풍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식욕을 잃었으므로 그 많은 음식이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 주어졌다는 것과 음식을 먹기 위한 식욕도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병이 들었거나 슬픔을 당할 때는 우리는 진미를 가져다 주어도 그것이 싫은 법이다(욥 33:20).

5. 바울은 그 배 안에서 목사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교역자들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였다." 바울은 자주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했을 것이요 또한 그들이 매일 함께 기도했으리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배 안의 모든 무리와 함께 그가 기도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제 바울은 "그들 모두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즉 그들이 살아있고 지금까지 보호되었고 앞에 놓여 있는 절박한 위험 속에서도 그들의 생명이 구원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감사드렸다.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에 대해 감사하고 그 음식 위에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음식을 받을 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그 음식은 우리를 위해 성별되고 또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므로 음식으로부터 재앙은 떨어져 나가고 우리는 음식에 대한 약속된 권한과 약속된 축복을 얻게 된다(딤전 4:3-5).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때는 언제나 식기도를 해야만 한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스러운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권하여 그의 주인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그들 모두 앞에서 감사드렸다." 우리가 우리의 음식에 대해 축복을 간청하고 옳은 방법으로 그것을 위해 감사드린다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과 위로에 넘치는 사귐을 유지시켜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을 공고히 해 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게 해 주는 것이 된다.

6. 바울은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먼저 그 떡을(이 떡은 바닷물에 절은 것이었다) 떼어 먹기를 시작했다." 그들이 먹으려 하든 안하든 구애됨이 없이 그는 그렇게 하였다. 만약 그들이 기분이 좋지 않고 또 골이 나고 고집센 어린애들같이 모든 것이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음식을 거절했을지라도 바울은 자기의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려 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르이 가르치는 대로 그들 자신이 행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그의 솔선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36절). 이로 인해 "저희도 아 안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위험에 처해 있는 바울 자신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 주신 메시지를 믿는 것을 명백히 깨닫고 나서 자기들도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믿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누구나 같은 위험에 처해 있으며 역시 죄인들인 사람들을 통하여 멸망해 가는 인간 세상에 좋은 소식을 보내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보내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전도자들은 공동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복음에로 초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본을 보여 남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의탁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바울이 본을 보여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에서 우리가 전에 말했던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수효가 제시되고 있다. 그 수효는 모두 "이백 칠십 육인이었다." 한 사람의 흘륭한 본보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는가를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먹었다. 그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38절). 사람들은 음식에 만족했거나 그것으로 충족되었으며 배부르게 먹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전에 그들이 열 나흘간 먹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즉 그 말은 그들이 그동안 쭉 먹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계속해서 그들이 지금처럼 배부르게 먹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하겠다.

8. 그들은 다시 한 번 배를 가볍게 했다. 그것은 배가 암초에 부딪힐 때 있을 충격을 줄임으로 좀 더 안전히 배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짐과 기구를 배 밖으로 던졌었다." 지금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식량인 밀을 버렸다. 식량이 그들을 가라앉히는 것보다 그들이 식량을 가라앉히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우리의 육신의 음식을 썩어질 양식으로 부르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내버려야 할 경우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배는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을 태웠던 것같이 보인다(왜냐하면 배에 탄 사람들을 언급한 후 식량을 버리는 기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자주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지도 모른다.

Ⅴ. 그들의 해안 상륙과 파선. 그들이 식사를 한 것은 날이 샐 쯤이었고 날이 완전히 새자 그들은 주변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을 몰랐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 도착한 곳이 어떤 나라인지, 또 그곳이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항해한 아드리아해는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연안에 다 같이 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선원들은 가끔 이 길을 항해했었을 것이고 그러기에 그들은 어느 곳이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곳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지혜를 뽐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전문에 속한 일일지라도 이와 같이 알지 못하여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2.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자 그들은 배가 거기에 들여다 대고자하였다"(39절). 그곳에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고 주민들이 동료인지 적인지 또 문명인인지 야만인인자도 몰랐으나 그들은 모든 것을 그곳 사람들의 처우에 맡기기로 했다. 그곳은 뭍이었다. 그러므로 그토록 바다에서 오랫 동안 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곳은 매우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육지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즉 그 해안을 잘 알고 있던 수로 안내인이 있어서 그들의 배를 안내하거나 또는 배에 있는 사람들을 몇 명씩 운반할 수 있는 착륙선이 없었다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해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조하므로 귀중한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가끔 만나게 된다.

그때 그들은 구조를 위해 기꺼이 또는 만전을 기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로 끌려가고 살육을 당하게 된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은" 큰 죄이며 하나님을 매우 노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이 죽음에 처한 위기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잠 24:11, 12). 필자는 우리 나라에조차도 해안에서 조난당하고 당황하고 있는 배를 본 경우 그들을 죽이고 그 배의 약탈품을 갖기 위해 불이나 다른 방법으로 고의적으로 길을 틀리게 인도하므로써 승객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감히 그와 같이 사악하고 잔인스럽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인종이 있을 것인가 의아심을 품게 된다. 또한 그들이 그와 같이 극심하여 악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된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되 자비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진리를 알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3. 바람과 조수를 타고 그들은 곧 바로 해안을 향했다(40절). "그들은 찾을 끊었다." 그 닻은 "고물에서 내리던 네 개의 닻이었다"(29절). 혹자는 그들이 찾을 육지에 착륙하여 다시 사용할 것을 바라서 애를 써서 그 닻들을 끌어 올렸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너무나 급하여서 닻줄을 자르므로 닻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희랍어 원문에 의하면 그 어느 쪽에 해석도 타당성을 지닌다. 그 다음 "그들은 바다에 자신들을 맡겼다." 바람은 그들을 항구로 인도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킷줄을 늦추었다." 그 킷줄은 폭풍우가 치는 동안 배를 좀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항구로 들어가고 있으며 또한 조타수가 좀더 자유스럽게 배를 몰게 하기 위해 킷줄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으로 향하여 들어갔다." 여기서 킷줄과 돛이라고 해석된 원어를 현대어로 해석하는데 성서 비판 학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해안을 보았을 때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리로 몰았고 아마도 정상 속도 보다는 더 빨리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세상에서 바람과 폭풍우와 오랫 동안 싸와온 불쌍한 영혼은 영원히 휴식하는 안전하고 조용한 항구에 들어가기를 더욱 갈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은 자기를 이 지상에 꼭 붙들어 두고 하늘로 향하려는 자기의 경건하고 성스러운 사랑의 출발을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하리라. 그리고 성령의 바람에다 믿음의 돛를 띠우고 가득찬 소망을 가지고 해안으로 가야 하리라.

4. 그들은 이럭저럭 모래 바닥으로 보여지는 곳에 또는 바다쪽으로 불룩 나온 물에 잠겨있는 육지에 배를 걸었다. 이곳은 바닷가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두 물살이 합치는 곳이라 하였다. "거기서 이 물이 부딪혔다." 이제 배는 돛을 내린 배와 같이 자유를 잃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고물은" 큰 물결에 곧 깨어질 형국에 처하게 되었다. 사공들이 자기들이 도망가려는 의도가 좌절된 데 화가 나서 자기 직분을 다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배를 좌초시켰는지 또는 그들이 그 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 데도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배는 손상되리라"(22절)고 한 바울의 말을 이루시기 위해 그 배를 파괴하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사 44:26).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대양에서는 이상에게도 폭풍우를 견뎌냈던 배가 이제 암초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자 깨져 버렸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애착에 붙들려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영혼도 깨지고 마는 것이다. 사단의 유혹이 마음을 치면 그 영혼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근심과 소요로 인하여 마음이 요동되더라도 거기에 소망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은 해안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구에서 난파당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디서도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Ⅵ. 선객들이 공동으로 당한 재난 외에 바울과 나머지 죄수들이 처한 특별한 재난 및 그 위험으로부터의 그들의 구원.

1. 이 위기의 순간에 모든 사람마다 죽지나 않을까 하여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군사들이 호송하고 있는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가므로" 자기들이 책임추궁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저희를 죽이자고 권고하였다"(42절). 사실 죄수들이 도망갈 정도의 큰 위험은 없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약하고 지쳐서 멀리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죄수들을 호송하고 있는 많은 군사들의 감시 하에서 죄수들이 도망가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해도 죄수들을 놓친 데 대한 법률의 추궁을 받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피치 못할 일이었음이 인정되어 그르이 사면 될 것은 틀림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야수적이고 야만적인 것을 저지르고자 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자비로운 기적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들도 생명을 잃어야 할 입장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은 더욱 가증한 일이었다.

2. 백부장은 바울을 인하여 곧 이럴 의견을 저지시켰다. 그의 죄수였던 바울은 옛날 요셉의 경비 대장의 눈에 들었듯이 백부장의 눈에 들었었다. 율리오는 처음에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였지만(11절) 후에 그는 그를 존경할 만한 많은 근거를 보았고 그러므로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런 무자비한 계획의 진행을 저지시켰다. in favorem vitae - 즉 그의 생을 중히 여겨 그는 군사들의 손에서 그들을 보호하였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확정된 죄인은 없었고, 다만 혐의를 받아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수들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 죄없는 한 사람이 죽음을 당하게 하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들을 도망시키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바울로 인하여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듯이 여기 백부장은 바울을 인하여 죄수 모두를 구원하였다. 이같이 한 사람의 선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유익이 돌아가는 것이다.

Ⅶ. 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생명을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탄 배가 깨어졌을 때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러나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이 중재하시므로 더 이상 사태는 진전되지 않았다.

1. 어떤 사람들은 헤엄쳐서 살아났다. 백부장은 우선 헤엄칠 줄 아는 그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들은 죄수들이 육지에 도착하는 대로 인수하여 그들이 도망 못하도록 막으라고 했다. 로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운동들 중에 특히 수영을 잘 하도록 젊은이들을 훈련시켰다. 그것은 가끔 전쟁 중에 특히 수영을 하도록 젊은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것은 가끔 전쟁 중에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쥴리어스 시저는 유명한 수영 선수였다.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에게 수영은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는 수영할 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한 경우보다 재미로 수영을 하다가 또는 수영을 배우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2. 나머지 사람들은 수고 끝에 해안으로 기어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배에 흩어져 있던 널조각에 의지해서 나가도 또는 다른 사람들은 "부서진 뱃조각"에 의지하여 나갔다. 누구나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친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취하였고 분주하게 서둘렀다. 그 이유는 이제 그들의 노력으로 살 수 있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상륙하고 나서 보니 하나님의 훌륭하신 섭리에 의해서 그들 중 아무도 도착 못하지 않았고 그들 중 아무도 사고로 표류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실례를 볼 수 있다. 특히 물에 의한 재난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섭리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물에 빠져 족을 지경에 있었으나 빠져 죽지 아니하였다. "깊음이 그들을 삼키고 파도가 그들을 덮었으나" 결국 폭풍은 잠잠해졌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그들을 건지셨다. 그들은 무서운 바다로부터 구원을 받아 소원하던 항구로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여호와를 찬송할지라"(시 107:30, 31)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특별한 말씀을 행하신 보기가 있다. 즉 이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인하여 구원받으리라는 말씀이 실행된 것이다. 약속한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커다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배가 깨진 것마저도 생명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같이 보였으나 모두가 안전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널조각이나 부서진 뱃조각이" 다 그들의 구제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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