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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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바울의 다섯 번째의 자기 변명(1)(사도행전 26:1-11)

이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아그립바가 가장 존귀한 인물이었다. 오직 그에게만이 왕의 칭호가 주어져 있었다. 비록 그는 황제의 밑에 속해 있으면서 다른 총독들과 대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권력은 아니었으나 베스도에 비하여서는 상위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재판을 열었으나 아그립바가 그 회의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자로서 바울에게 변하도록 허락을 내렸던 것이다(1절). 바울은 자기에게 말할 기회가 허락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언할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들 또는 가장 훌륭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서둘러서 말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베푼 친절은 유대인들은 좀처럼 베풀려 하지 않았던 친절이었다. 또 바울이 허락을 얻어 얘기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방해를 놓아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자유롭게 바울에게 기회를 허용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입장이 떳떳했으므로 자기가 변론하는 기회가 허용되는 것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더둘로가 유대인을 위해 변호했듯이) 말해 줄 변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본문에 바울의 자세가 언급되고 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는 사람처럼 또한 자유로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처럼 "손을 앞으로 뻗쳤다." 그가 손을 뻗은 것은 또한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자 한다는 것과 그가 말하는 동안 조용히 청종해 달라는 뜻을 지닌 것이었다.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하였다는 구실로 입을 열지 않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그는 "나는 황제 앞에 설 때까지 모든 재판을 거부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꺼이 그가 고난받고 있는 원인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소망에 대하여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벧전 3:15). 이제 바울이 그의 변론의 전반부에서 말한 내용을 살펴 보자.

Ⅰ.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매우 특별한 존경을 표하였다(2, 3절).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증언할 때는 "벨릭스가 여러 해 동안 유대인의 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었다(24:10). 그러나 바울의 아그립바에 대한 태도는 이것보다 더 진지한 것이었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유대인의 비난을 받아 온갖 추악한 누명을 쓰게 된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뻐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이기 때문에 당국의 재판을 면제받아야 한다고 결코 생각지 않았다.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요, 우리는 또한 그 혜택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 권력에 순복해야 되는 것이다.

2.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변명하도록 강요를 받았지만 그래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아그립바는 유대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으므로 다른 로마 총독들 보다는 종교적인 문제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로 보아서 아그립바는 학자 출신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특히 유대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유대 종교의 관습에 대하여 전문가였으며 유대의 관습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그립바는 또한 유대인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야기된 문제도 척척 해결하였다. 아그립바는 구약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가 메시야라는 문제에 관한 바울과 유대인의 싸움을 잘 판결할 수 있었다. 전도자에게 있어서 총명하고 사물의 차이를 식별 할 수 있는 청중들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너희가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한 대상은 "지혜있는 자들에" 제한되어 있었다(고전 10:15).

3.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ma|kroqumwj - 즉 너그러이 들어 주기를 다른 말로 "참고 들어 주기를" 간청한다. 바울은 장시간 변론할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에게 그가 끝까지 짜증내지 않고 들어 줄 것을 간청한 것이다. 또한 그는 솔직히 자신의 의견을 토로할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왕에게 화를 내지 말고 너그러이 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유대 관습에 정통하여 바울의 사건을 정확히 판결할 수 있는 한편 그가 유대인의 누룩에 깊이 젖어 있어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속단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왕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내 말을 너그러이 들어 주시기 바라옵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최소한 필요한 조건은 상대편이 끝까지 너그러이 들어 주는 것이다.

Ⅱ. 바울은 자기가 미움을 받고 사도라는 낙인이 찍혀 있지만 그는 이제까지 교육을 받고 생활하여 온 것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을 행하면서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바울의 종교는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하신 약속" 위에 언제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이 약속 위에 서 있었다.

1. 바울이 젊은 날에 신앙한 내용. 바울의 젊은 때의 태도와 생활은 잘 알려져 있었다(4, 5절). 바울은 비록 유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그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비록 그가 최근에는 이방인들과 사귀어 오고 있지만(이것이 유대인들을 가장 격분케 한 조건이었다) 그가 사회에 첫발을 디딜 때는 유대 민족에 정통하였고 또 유대 민족의 유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받은 교육은 외국의 것도 아니고 또 모호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이 융성하였던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민족 가운데서 교육받았다. 오래 전 일을 기억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바울은 자신을 과시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며 그가 유대교인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관습까지 철저히 지키는 자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이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파에 속하여 있었으며" 자기가 속하여 있는 파의 제도를 가장 정확하고 훌륭히 지키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바리새인의 규례를 전하는 일에 가장 철저하고 열성적이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불리웠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으로서 살았다.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 바리새인들도 바울이 스스로 정하고 실천하였던 규칙을 그만큼 정확히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바리새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힐렐 학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힐렐 학파는 사마이 학파보다 종교적으로 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바리새인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특성도 가지고 있었다.

(1) 바울은 학자였으며 박식한 사람으로 무지하거나 문맹이 아니었고 맹목적으로 종교의 규정을 따르는 자도 아니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알고 있었고 또한 율법을 잘 해석하였으며 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학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부로 자랐다는 것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이것을 흠으로 책하였었다(4:13). 그러나 가장 저명한 박사의 문하생 가운데서 사도가 일어났으므로 안 믿는 유대인들은 그것으로 이제 기독교를 책할 수 없게 되었다.

(2) 바울은 도덕주의자였으며 덕망있는 사람이었고 난봉군이거나 나태하고 방탕한 젊은이는 아니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철저히 살았으므로 그는 결코 주정뱅이나 방탕자가 될 수 없었다. 또는 그는 젊은 바리새인이었기에 아직 그때까지 돈밖에 모르는 착취자이지도 않았고 간교하고 탐욕적인 늙은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교묘히 빼앗는 재간도 아직 습득하지 않았었다. 오직 그는 "율법 안에서 의를 행하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때 바울은 공개적인 악행을 저질렀다거나 율법을 모독했다고 하여 기소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 종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버렸다고 할 수 없듯이(왜냐하면 그는 박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유대교를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유대교의 의무를 좋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덕망있는 인물로 부도덕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3) 또한 바울은 정통 주의자였고 건전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 또는 불신자가 될 소지가 있는 타락한 생활 원리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두개인에게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은 사두개인들이 거부하는 구약의 책들까지 다 받아들이고 있었고 영혼의 세계를 믿었으며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과 다가올 나라에서의 상벌을 믿었다. 이 모든 것을 사두개인들은 부정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신앙이 확고하지 않아서 유대교를 떠났다거나 그가 신의 계시를 존경할 줄을 몰라서 유대교를 떠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바울는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통적인 약속"을 믿었으며 그의 희망을 거기에 두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것이 자기를 의롭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악감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아그립바로 하여금 자신이 유대인들이 얘기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리기 위하여 이러 한말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은 배설물로 간주하였지만 이 모든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기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그의 행위가 하나님의 법의 영적 특성과 그리고 내면적인 종교에 대해 낯선 사람이었을 때의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이 정도의 의로써는 그가 결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기가 회심 이전에도 무신론자이거나 신 모독자이거나 악덕인이 아니었고 자신이 알고 있었던 빛을 따라 살고자 하였으며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따라 살고자 하였다"는 사실로써 기쁨으로 이 모든 사실을 회고하였던 것이다.

2. 바울의 현재의 신앙. 현재 바울은 자기의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형식적인 율법에 열심을 두지는 않았다. 바울은 제의법이 정해 놓은 희생과 제사는 이 희생과 제사의 원형인 그리스도의 대 희생 제사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그는 제의법이 규정하는 제의상의 부정함과 순결을 중요하지 않게 여겼으며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안으로 삼켜진 바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교의 다른 신앙의 근본 원리들에 대해서 바울은 전처럼 열심이었고 어느 면에서는 한층 더 열성적이었다. 그는 이 신앙의 원리들을 따라 살다가 죽기로 결심하였다.

(1) 바울의 믿음은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위에 기초된 것이다. 신앙은 신의 계시에 바탕을 두었으며 바울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였고 자기의 영혼을 그것에 위해 바쳤다. 그의 신앙은 신의 은혜에 근거를 두었으며 그 은혜는 약속에 의해 나타나고 또 전래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바울의 믿음의 바탕이 되었으며 안내자가 되었다. "조상들에게 주신 이 약속은" 제의법보다 더 오래 전에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갈 3:17)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는 복음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이다. 즉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으며 이 영원한 "생명은 곧 독생자 예수 안에 있음"을 말해 준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었다. 이 복음의 약속의 유형은 여인의 후손에 관하여 조상 아담에게 하신 약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초기의 족장들도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으며 또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의 유형은 주로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에서 이르기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하셨는데 이 약속은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이 그와 그를 좇아 난 그이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하셨는데 이 약속은 하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마련해 놓으시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히 11:16).

(2) 바울의 믿음은 이러한 약속에 대한 희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는 것과 육신의 법을 지키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하나님은 자주 그 자신이 이러한 제의(먹고 마시는 것과 육신의 법)을 중시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과 또 약속에 그의 소망을 두었다. 이 약속은 그것에 의하여 교회가 처음으로 구체화된 대헌장이었던 것이다.

[1] 바울은 약속된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받을 것을 소망하였고 이로써 진실로 복된 삶을 살기를 소망하였다.

[2] 바울은 하늘 나라를 소망하였다. 이 소망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는다"(24:15)는 그의 고백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바울은 육신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좋은 것들을 바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저 세상의 더 위대한 것들을 소망하였다. 그는 저 세상에 그의 목적을 두었다.

(3)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모든 경건한 유대인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그의 믿음은 성서에 따른 것일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의 증언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 유대 교회의 증언은 성서의 증언을 보충해 주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이 오직 바울을 공격 목표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약속은 곧 이 아름다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 곧 모든 유대교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열두 지파"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이 처음에는 열두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록 열 지파가 자기의 나라로 돌아왔다는 성서의 기록은 볼 수 없지만 그들이 개별적으로 자기의 나라로 돌아 왔으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가 있다. 아마도 점차 사로잡혀 간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다로 이주하여 왔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도 "열두 지파"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마 19:28). 안나는 아슈르 지파 출신이다(눅 2:36). 또 야고보는 "여러 곳에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보내노라고 하였다(약 1:1). 바울은 말한다. "우리 나라를 구성하는 열두 지파에 나와 다른 사람들도 속해 있다. 이제 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 관한 약속을 믿고 있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 의해 얻을 유익을 소망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소망하고 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오신 메시야를 소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다 같이 같은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삶을 희망하는데 이것은 나도 소망하는 바인 것이다. 내가 이 기본적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일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를 위험하고 이단적인 교리를 전하는 자로 보며 또는 유대 교회의 예배와 신앙을 떠난 변절자로 나를 간주하려는가? 나는 그들이 희망하고 있는 꼭 같은 하늘나라가 마침내 임할 것을 소망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끝날에 즐거이 만날 것을 소망한다면 왜 도중에서 그렇게 서로 분쟁하여야 하는가?"라고 한다. 유대 교회는 이 약속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 희망 가운데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겼다." 성전에서의 섬김은 일련의 연속적인 종교적인 의무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전에서의 섬김은 일련의 연속적인 종교적인 의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예배는 아침과 저녁, 낮과 밤, 한해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이행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의 섬김은 열두 지파를 대표하여 성전에서 대속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곧 정해진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섬김은 영생에 대한 약속을 믿는다는 고백과 영생을 소망하는 가운데서 계속 되어 온 것이다. 이제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통하여 "밤낮으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열두 지파는 그들의 대리자들(제사장과 레위인)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에 의해 하나님을 받들어 섬겼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들은 꼭 같은 약속에 대한 소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그들은 내가 그들이 믿는 바와 꼭 같은 약속을 믿고 있는 한 나를 그들의 교회의 배신자로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다면 비록 예배의 형태와 의식은 차이가 있지만 같은 예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끼리는(각 교파간의 관계를 말함) 상대방이 잘 되기를 소망하고 거룩한 사랑 가운데 함께 거해야 하는 것이다. 또는 본문의 "열두 지파"는 그 지파에 속한 특정인들로서 안나와 같이 하나님을 열심을 다하여 전심으로 섬기는 것을 통하여 유대 교회의 규례를 계속 지키고 유대 교회의 섬김에 열심인 몇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밤낮으로 기도와 금식을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런 방법 가운데서 그들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였다면 나는 그들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고 중단이 없는 자들만이 영생을 옳게 소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뿐만 아니라 그 영생에 대한 전망은 우리로 모든 신앙적인 일들에 부지런하고 중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목적을 두고 우리의 역사를 계속해야 한다. 또한 "밤낮으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섬기는" 사람들은 비록 우리와 견해가 같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관대히 대해야 할 것이다.

(4) 이제 바울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바로 위로 같은 신앙 때문이었다. 즉 만일 그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들도 신인할 수밖에 없는 그 교리를 전파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소망하므로 송사를 받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제의법에 반하여 약속에 집착하였다. 반면에 그의 기소자들은 언약에 반하여 제의법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즉 이 약속을 소망한다면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여기에 내가 행하는 그것에 의해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종교의 형식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신앙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미워하고 박해하게 되는 것이 상정인 것이다. 바울의 소망은 그들 또한 소망하는 것이었다(24:15).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이 그 희망에 따라 살려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고난받는 것이므로 그 고난은 바로 그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28:20).

(5) 그의 말을 듣기는 하나 실제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바울이 설득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신앙에 대한 것이었다(8절). 그러므로 그는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말하였다. 8절의 말씀은 앞의 내용과 연관이 없이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이 말씀하였을 것이다. 그는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부활과 영생에 대한 약속이 됨을 설명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조상들이 소망한 그 부활의 예표요 전조이신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그의 희망이 올바른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생략되고 곧바로 8절이 말씀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열망하였고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하여 자신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 11절을 참조하라. 현재 자리하고 있는 바울의 청중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베스도가 그러하였다. 그들이 대부분 이방인이었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한 열두 지파가 바라는 죽음에서의 부활을 말하였을 때 그들은 아덴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의 말을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이고 바울이 이까짓 문제로 유대인들과 쟁론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서로 수근거렸을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시나이까"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이르기를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6)고 하셨던 것이다. 즉 그것이 자연적인 능력 위에 있는 것이기에 그들은 기이하게 여길지 모르나 그것은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이할 것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거시 전혀 믿지 못할 일로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것 즉 모순투성이인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 속에는 또한 특별히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에는 우리로 믿을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무한하신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진흙에서 우리의 몸을 빚으시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진흙으로부터 그들을 빚으신 그 능력을 가진 분이신 그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겠는가? 우리는 봄이 돌아올 적마다 자연 가운데서 부활의 일례를 찾아 볼 수 있지 않는가? 태양이 죽은 식물을 소생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래 하나님께서 죽은 육체를 일으키시는 것은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인가?

Ⅲ.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는 동안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극심한 적이였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시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계속 기독교를 박해하였으리라고 고백한다. 그가 이 사실을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가 그리스도인과 전도자가 된 것은 그가 이전부터 그 도에 대하여 알았고 또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인한 것이었거나 또는 그가 점차 기독교의 교훈을 좋게 생각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의 쟁론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정도의 박해에서 돌연히 기독교에 대한 지고한 확신에 이른 것이었다. 이 사실을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인이요 또 전도자가 된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여졌다. 바울이 그렇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회심을 한 것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기독교 진리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2. 바울은 아마도 이 사실을 말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소자들을 용서하신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고소하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는 저희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할 때 그가 마땅히 랄 바를 행한다고 생각하였었다. 이제 바울은 그들이 같은 오류를 범하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기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바울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느냐는 것이다(9절). 그는 본문에서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또한 그의 교훈과 그의 영예와 이익을 대적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을 스스로 생각하였노라"고 말하였다. 그 이름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가 자기가 지녔던 메시야 왕국에 대한 개념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대적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좋은 섬김이라고 생각하였다. 명백히 잘못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는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고의로 가장 큰 죄를 고집하여 행하면서도 그것이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자기의 형제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내어쫓는 자들이 "여호와께서 영광 받으실지어다"(사 66:5)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을 위한다는 명목과 구실 아래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악행이 정당화될 뿐 아니라 성화되고 찬미받을 수 있는 것이다(요 16:2).

(2) 바울이 박해할 때 그가 얼마나 광포하게 굴었는가를 살펴 보자(10, 11절). 독선적인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상에는 없다. 바울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을 때 그는 그 일을 위하여 어떤 수고나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일을 했는가를 설명하고 그것을 참으로 통회하는 사람답게 자기의 행위가 잘못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하나님에 대한 훼방자요 핍박자였다"(딤전 1:13)고 말하였다.

[1] 그는 감옥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채워 넣었다. 그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악질적인 범죄인들인 것처럼 취급했다. 그는 그들을 옥에 가둠으로 그들에게 겁을 주려 했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나쁜 자들로 보게 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 중의 일부를 감옥에 잡아 넣는 악마였다"(계 2:10). 그는 그들을 기소하기 위하여 그들을 감옥에 잡아 넣었다. 그는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되"(26:10)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리하였다(8:3).

[2] 바울은 대제사장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바울은 하급 관리처럼 그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율법을 집행하였고 또 자기가 이럴 일를 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3] 바울은 자진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가표 투표를 하였고 특히 스데반의 처형 때는 그의 죽음을 동의하였다(8:1). 그렇게 하므로 그는 자신을 Particeps criminis - 즉 범죄의 동참자로 만들었다. 아마도 바울은 젊었으나 대단한 열심히 인하여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것 같고 거기서 기독교도를 죽이는 판결에 투표하였던 것 같다. 아니면 8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한 후에 되어진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 일을 장려하였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이같이 그는 자기가 마치 재판관이나 배심원이나 되는 것처럼 ex post facto - 즉 저질러진 행위 곧 살인의 책임을 스스로 졌던 것이다.

[4]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회당에 "끌어다가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회당의 규례를 어긴 자로서 처형을 당하였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형벌을 주었다. 또 그가 본문에서 "여러 번 형벌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후에 다섯 번씩이나 매를 맞았던 것처럼 그가 같은 사람을 여러 기회에 매질하였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고후 11:24).

[5] 바울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종교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형벌을 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양심까지 억누를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을 고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종교를 모독하는 말을 강제로 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그들로 하여금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도록 하고 그리스도를 현혹자며, 자기들은 그에게 속았노라"고 말하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그들로 그들의 주님을 배반하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박해자들은 폭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변절케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양심까지 변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6] 바울의 분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를 단숨에 휩쓸어 버렸고 그후 그는 예루살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한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떳떳이 자기들의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고 미칠 듯이 분노하였다. 또한 박해할수록 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더욱 격분하였다. "그는 심히 격분하였다." 그의 분노는 하도 거세어서 그 어느 것도 그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에 대하여 노했던 것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노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 대한 격노를 누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박해자들은 분노로 광분한 자들이다. 그들 중의 얼마는 미칠 듯이 날뛰며 기독교를 박해한다. 바울은 다른 도시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을 핍박하는 데 열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관할도 아닌 곳에 가서 낯선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박해하였다. 증오(특히 증오가 결백한 것으로 착각되어질 때)처럼 무모한 폭군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젊은 시절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바울의 성격이요 생활 양식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교육이나 관습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요 또는 출세의 희망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외적 상황은 그가 그리스도인 되는 것과는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26:2 없음.

 

26:3 없음.

 

26:4 없음.

 

26:5 없음.

 

26:6 없음.

 

26:7 없음.

 

26:8 없음.

 

26:9 없음.

 

26:10 없음.

 

26:11 없음.

 

26:12

바울의 다섯 번째의 자기 변명(2)(사도행전 26:12-23)

하나님을 믿고 그의 절대적 통치를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의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저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가 경험한 일을 생생하고도 성실하게 이 엄숙한 모임에서 설명하였다. 즉 그는 자기가 하늘로부터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한 그것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바울에게 화를 내게 한 것임도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다음의 것을 보여 준다.

Ⅰ. 기독교에 대한 바울의 모든 편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그는 말하였다. 바울은 갑자기 하늘의 섭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강요했듯이 그가 외적 압력에 의해 강제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그는 신적이고도 영적인 힘에 의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세력이 그에게 임하여 와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때도 바울은 죄가 가득한 상태에서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위해 가던 중이었다. 그는 그때도 처음 박해를 시작하던 때처럼 열심이었다. 그의 광적인 박해는 조금도 소진되거나 시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친구들의 개종을 보고박해를 포기할까 하는 유혹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이때도 젖처럼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들로부터 권세와 위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권능에 의하여 그는 박해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다른 위임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오게 한 두 가지 매체는 하늘로부터의 환상과 음성이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울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는 두 가지 감관 즉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의해 그에게 전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 바울은 하늘로부터의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당시의 정황을 비추어 볼 때 decepto visus - 즉 환상이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확실한 신의 나타나심이었던 것이다.

(1) 바울은 "밝은 빛을 보았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비친 빛이었다." 그것은 인공적으로 조작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며 "정오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그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는 집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방이 티인 길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빛은 해보다도 더 밝은 빛이었다. 그 빛은 햇빛을 능가하는 것으로 햇빛을 무색케 하였다(사 24:23). 이 빛은 바울의 환상의 소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빛은 그와 함께 여행하는 동행들에게까지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주위에 빛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태양 빛은 그 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빛은 능력과 힘이 있어서 당장 그 효과를 나타냈다. 즉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모두 땅 위에 엎드려졌다. 그 빛은 그들을 대단히 당황하게 하였다. 그 빛은 번개불과 같은 위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번개불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고 계속하여 그들 주의에 비추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보통 깜깜한 어두움 가운데서 나타나셨고 어두움을 그의 장막으로 삼으셨었다(대하 6:1). 또한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창 15:21). 그러나 이제는 복음에 의하여 생명과 영생이 밝히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밝은 빛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이다. 세상을 창조할 때와 마찬가지로 은혜가 창조될 때도(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함) 처음 창조된 것은 빛이었다(고후 4:6).

(2)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나타나셨다(16절). 그리스도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나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바울의 동행자들은 빛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단지 그 빛만을 보았으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 계시었다. 아무 지식이나 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데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만이 그런 힘을 지닌다.

2. 바울은 하늘로부터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 본문에 보면 그것은 "히브리 방언으로"(히브리 방언으로 들렸다는 사실을 그는 앞의 증거에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들려왔다고 하였다. 그 음성이 그의 모국어요 그가 믿는 구약 종교의 언어로 들려진 것은 바울에게 그가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고 또한 조국을 아주 등짐으로 히브리어가 낯설게 생각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주께서 그를 이름으로 부르셨고 또 그의 이름을 되풀이 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사울아, 사울아) 그 부름은 바울을 놀라게 하고 멈칫하게 하였다. 더욱이 그곳은 바울이 아는 사람이 없는 전혀 낯선 곳이었으므로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2) 주님은 그에게 그가 현재 범하고 있는 큰 죄를 깨닫게 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즉 주님은 그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죄를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박해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셨다.

(3) 주께서 바울이 그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14절) 하셨고 그리스도는 또 다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절)고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 짐이 되고 또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여 마구 박해한 것이 곧 하늘 나라의 지극한 영광이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못하였다.

(4) 주께서는 확고한 신앙인들에 대한 바울의 간교한 박해를 저지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그에게 수양처럼 또는 멍에에 익숙치 않은 숫송아지처럼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셨다.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바울에게 그가 처음에는 분발하여 박해를 할 것이나, 그것이 그에게 고생이 될 것이요, 그때야 그가 굴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또는 본문은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즉 "믿는 자들을 박해하지 말라. 그들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자들이 아니고 너를 사랑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겠다.

(5) 바울의 물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셨다는 사실이다. 바울은(15절) "주여 뉘시니이까, 하늘로부터 내게 말씀하시는 이가 누구신지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그분에게 대답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나는 예수라. 바로 네가 미워하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자라. 나는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바로 그 이름의 소유자이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네가 죄인으로 취급하는 데 바로 내가 그이라"고 답하셨다. 바울은 예수께서 땅에 묻히신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지만 다른 어떤 곳에 묻혔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늘로부터 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가 가능한 모든 치욕을 준 그분이 이 모든 영광에 둘러싸여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일은 바울로 하여금 예수의 교훈이 신적인 것이요 하늘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기에 대항하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충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예수는 메시야이시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바울로 하여금 하늘로서 나타난 주께서 반대하신 박해자들의 집단을 떠나 즉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주께서 위하여 하늘로써 나타나신 박해받는 자들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하였다.

Ⅱ. 바울은 자신이 신적인 권위에 의하여 사역자가 된 것을 보여주었다. 즉 "영광의 빛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같은 주 예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고는 이방으로 달려가지 않았고 또 자신과 같은 인간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분의 명령을 받고 간 것이었다(20:21). 본문에서는 바울이 사도가 된 사실이 회심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9장 15절이나 22장 15, 17절을 보면 그의 사도됨은 그 후에 그에게 말씀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가 본문에서 회심과 동시에 사도가 된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간결을 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즉 "일어나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을 첫 번째 말씀하신 것으로 본문은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빛에 의하여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 자들은 주께서 그들을 영적인 은혜와 능력과 위로 가운데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히셨다면 그것은 그가 치료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가 누구를 실족케 하셨다면 그것은 그가 다시 일으키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라"(사 52:2)고 하셨던 것이다. 또한 "너는 스스로 도우라,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고 하였다. 바울은 일어나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요 또한 그가 바울에게 큰 사명을 주어 보내고자 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증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역자들을 택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자격과 위임을 받는 다뿐 바울은 자기에게 이 사역을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린다(딤전 1:12).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사역자로 만들기 위하여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전도자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 주시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바울에게 임명된 사명. 그는 그리스도를 수종하고 증인으로서 그를 위해 활동할 사역자로 피택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고 그의 가르침의 진리를 입증하는 사역자로 피택된 것이다. 바울의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거하여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주를 증거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 앞에 서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2. 바울이 증언할 내용. 그가 세상에 증언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가 "본 것에 관하여"서이다. 그는 지금부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길 가운데서 작에게 나타나신 것과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해야 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이 보여진 것은 그로 본 것들을 선포하게 하가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와 같이 전에도(22장)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기가 본 것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장차 그에게 나타낼 일들에 대하여"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바울과 사귐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사귐을 후에도 계속 지속시키실 목적으로 시작하셨고 또한 그에게 그가 장차 그리스도로부터 더 들어야 할 것을 전해 주기 위해서 시작하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좀 더 충분한 가르침을 주시기까지는 바울은 처음에는 복음의 개념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갈 1:12).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점차적으로 받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때는 이런 교훈을 또 다른 때는 다른 교훈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아마도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자주 나타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계속 "바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도록" 자기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3. 바울이 받았던 영적인 보호.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고용된 이래 이 보호하심을 닫았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증언을 바칠 때까지 어떤 어두움의 세력들도 그를 꺾을 수는 없었다(17절). 그러기에 본문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주의 특별한 돌보심 가운데 있음을 명심하라. 비록 그들이 적의 수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주께서는 그들을 보살피사 적의 손에서 구하시며 또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아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9:16) 알려 주셨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를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수많은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약속과 조화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나님이 박해자들의 손에 자기 백성을 맡기시는 것은 자기의 종들을 박해자들로부터 구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서인 것이다.

4.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하신 특별한 명령 또한 그를 그들에게 보내시면서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내용. 바울은 회심 후 몇 년이 지난 다음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다. 또는 몇 년 후에야 그는 자기가 그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것을 알았다(22:21 을 참조하라). 마침내 그는 이방에게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 것이다.

(1)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큰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만 하였다. 두 가지 역사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처한 정황이 요청하는 시급한 일이었다.

[1] 어둠에 있는 세상을 밝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영원한 평화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전달받아야만 했다. 하나님을 그들의 삵의 목적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길이 되심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우침을 받아야만 했다. 바울은 "저희의 눈을 때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그의 선포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것들을 알릴 뿐만 아니라 신의 은혜와 능력의 매체가 되어야 했다. 그가 전해 주는 이 능력과 은혜에 의하여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들이 이 선포의 내용이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전에는 빛에 대하여 닫혀 있었던 그들의 눈을 뜨게 했다. 또한 그들로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처한 경우와 자기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마음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눈을 가린 채로 사람을 인도하시지 아니하시며 자기들의 길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다. 바울은 그들의 눈을 당장에만 뜨게 하기 위하여 보매 받은 것이 아니라, 뜬 상태로 계속 있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다. 즉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아주 돌아 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말로 그들로 거짓되고 눈이 먼 안내자를 따르는 데 서 돌아서게 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신의 계시와 진리를 따르게 하기 위해 그는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승에 의하여 저희의 신탁과 점술과 미신적인 관습을 좇았었고 그들의 신들에 대하여 옳지 못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데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바울은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의 돌아섬은 실로 어둠에서 빛에로의 돌아섬이요 어둠의 길에서 광명한 길로의 돌아섬이었던 것이다. 복음의 위대한 목적은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잘못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교정하여 참 빛 가운데서 그들로 진실을 밝히 보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2] 사악함으로 덮혀 있고 또 사악한 자들로 가득 찬 세상을 개조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롭게 된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이 권능 아래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는 앞에 변화가 있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어둠의 권세를 통해 다스리며 하나님은 빛에 대한 확신어린 증거를 통하여 다스리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 또한 우상 숭배자들은 한층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들의 충성을 악마에게 바친다. 모든 죄인들은 악마의 유혹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그들은 그에게 굴복하여 그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그의 먹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케 하는 은혜는 그들을 사탄의 지배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며 그의 말씀의 율례를 따르게 하며 그 성령의 지시와 명령에 순응하며 "어둠의 권세에서 그들을 빼내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은혜의 역사가 심령 가운데서 강력하게 작용할 때(마치 추하고 죄된 역사가 이전에 강력하였듯) 영혼은 사탄의 권세에서 놓여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2) 이 일을 함으로써 이방인에게 크나큰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그들로 "죄사함과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들을 죄의 어두움에서 거룩한 빛으로 돌이키시고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돌이키시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인하여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게 하고자 하셔서였다.

[1] 그들로 다시 그의 은총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죄에 의하여 이 은총을 박탈당하고 쫓겨내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로 "죄사함"을 받게 하고자 하신다. 그들을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은 그들을 죄의 보상으로 그들이 치루어야 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이 채무자이거나 또는 보상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기에 용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거져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들은 선물로써 그 구원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장을 풀고 신하로써 다시 충성토록 하신 것은 그들로 죄사면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요 그들에게 주어질 심판을 모면케 하시기 위해서였다.

[2] 그들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따먹으므로 복음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자기의 조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하늘 나라는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속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그들로 kli/ron을 얻게 하리라" 하였다. 이 klhron은 가나안의 기업을 나눌 때 사용한 "제비"를 뜻하는 말이다. 가나안의 기업은 제비에 의해 분배되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분배가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비는 하나님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본문을 "그들로 제비권(제비 뽑을 권리)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번역한다. 즉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온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기업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상실된 권리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특권을 받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이 유산 상속에러의 길을 열어 준다. 즉 유업에 장애가 되는 죄가 제거됨으로 축복을 받는 것이다.

셋째, 이제 거룩하여짐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늘 나라의 기업을 받을 사람들은 거룩한 길을 감으로 그것을 얻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얻도록 준비하고 또 얻어야만 할 것이다. 거룩하게 되지 않고는 아무도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땅에서 성도가 되지 않은 자는 결코 하늘나라의 성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넷째, 거룩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기업을 얻으며 그들의 분깃을 받는 이상의 복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사는 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복은 선택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들은 거룩하여짐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 성화된 사람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가운데로 우리의 생을 투자하자. 성도들의 교제에 동참하여 그들과 기꺼이 운명을 함께 하자. 또한 그들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자.(그것이 아무리 괴로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거기 참여하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기업을 얻을 때는 우리의 보상이 풍부하게 주어질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화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본문을 믿음으로는 거룩함만이 주어진다는 말씀으로 본다. 왜냐하면 믿음은 마음을 순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영혼으로 귀중한 약속들을 지니게 하며 또 영혼을 은혜의 영향력 아래 복종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신의 본성에 참여한다. 또 어떤 이는 믿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와 기업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말로 본문을 해석한다(역주:전자의 뜻으로 한글 개역을 번역하였고, 후자의 뜻으로 공동 번역 성경을 번역하였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다. 또한 믿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옳다함을 받고 거룩히 되며 영광을 받기 때문이다. 본문의 "믿어"라는 말의 희랍어는 "th eij eme"로써 그 정확한 뜻은 나를 믿는 그 믿음으로라는 뜻이다(역주:K. J. V는 by faith라고만 했음. 그러나 한글 개역은 "나를 믿어"로 되어 있음). 희랍어 본문에는 "나를"이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즉 그 뜻은 일반적인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믿음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중제에만 의존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이신 주님"으로 의지하게 되며 우리의 통치자이신 주님에게 우리를 맡기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로 "죄사함과 성령의 은사와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것이다.

Ⅲ.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와 사호아래 그의 사역을 수행하였고 또 그에게 주어진 위엄에 충성하였음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은 그로 사도의 일을 감당하도록 그를 주관하셨고 또 그 사역을 번영과 성공으로 이끌어가도록 그를 도우셨다.

1.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마음을 바울에게 주셨다(19절). 그러므로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이같이 사람이란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하여야만 할 것이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지상의 모든 생각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우리가 그것에 불순종한다면 우리는 위험을 겪을 것이다. 만약 바울이 혈육과 의논하고 세속적인 욕심에 의하여 우왕좌왕하였다면 그는 요나처럼 하였을 것이다. 즉 그가 보내심을 받응 것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귀를 여셨으므로 그는 거스리지 않았다." 바울은 위임을 받아들였고 그 위임과 함께 주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그 교훈에 따라 행하였다.

2.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대단히 많은 일을 하도록 하셨다. 비록 그는 그 많은 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20절) 바울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1) 바울은 그가 회심한 속인 다메섹에서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9:20).

(2) 그는 자기가 교육을 받은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거기서도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거기서 그는 극심한 도전에 직면하였다(9:29).

(3)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유대 연안을 따라 가며 그곳의 마을과 도시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바대로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고집스럽게 배척할 때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4) 그럴 후에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힘썼다. 그는 다른 어는 사도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아마도 그가 다른 모든 사도들이 이루어 놓은 이상의 일을 했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3. 바울의 설교는 모두 실제적인 것에 관한 내용이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머리 속을 덧없게 말로 채우려고 애쓰지 않았고 번지르한 공론으로 그들을 즐겁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불분명한 논쟁꺼리로 사람들로 하여금 분쟁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 다만 바울은 다음의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선포하고 증거하였다.

(1)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했다. 즉 그들에게 죄를 뉘우치며 자기 죄를 고백하고 또한 죄와 상반되는 계약의 삶을 살라고 하였다. 그들은 metanoei,n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자기들의 길을 바로 잡고 지금까지 행한 잘못된 행동을 행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2)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죄를 혐오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악한 것에서 돌아서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에로 돌아서야 난다. 그들은 사랑과 자비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와 의무를 행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세속과 육신에 속한 것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류 전체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epij refeiu epiton qeo-n -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지고의 선이 되시며 최고의 목적이 되시는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통치자시며 분깃이신 분에게 눈을 돌리고 우리의 마음을 돌리고 그의 증언들에게로 우리의 발을 향해야 한다.

(3)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하였다. 이것은 첫 번째 복음 전도자였던 세례 요한이 전파한 내용이었다(마 3:8). 회개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회개를 행위로 실천해야 하며 회개의 생을 살아야 하고 모든 일을 회개인답게 행해야만 한다. 말로만 회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말에 합당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회개도 실행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설교는 어떤 잘못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와 같은 이러한 설교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과 세상의 불평을 제거하고 본연의 신앙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4. 유대인들이 바울과 쟁론하려 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즉 그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므로 그들로 하나님에게 이르게 한다는 것과 사람들에게 신앙을 지키라고 설득한다는 것밖에는 이유가 없었다(21절).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외에는 없노라고 말하였다. 사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죽임을 당하거나 사형받을 만한 죄가 된다고 판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비방을 당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했다. 유대인들이 사냥하려고 한 것은 바로 그의 귀중한 생명이었다. 또한 그의 생명이 가치있는 생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미워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울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치 좋은 장소이기에 좋은 일을 한다는 듯이 그를 해하려 하였다.

5.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 이외에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지하시고 계속 진행시켜 주시어서 바울은 자기의 위대한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22절).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xihka - 즉 서서 증거하였노라. 즉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지되었고 또 나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노라. 즉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지되었고 또 나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노라. 이 도우심 때문에 나는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고 또 패배하지 않았노라. 나는 내가 말한 것 위에 서서 내가 한 말을 고수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노라"고 하였다. 이제 바울이 회개한 지가 20년이 지났다. 그 동안 바울은 줄 곳 위험 가운데서도 분주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지금까지 바울을 지지하여 준 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의 결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까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업이 그렇게 막중하고 또한 수 없는 반대를 받았으면서도 그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는 그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고용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위하여 필요한 도우심을 베푸시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가 그의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틀림 없이 쓰러졌을 것이며 주께서 우리를 버팅겨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낙심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시인하고 주께 대해 감사로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을 받았다는 증거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말하였다. 복음 전도자들은 만약 그들이 하늘로부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증거로 말하였다. 복음 전도자들은 만약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도우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들이 해 온 것처럼 그 사업을 수행할 수도 없었으며 그 어려움을 견디지도 못하였고 결코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들의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또한 그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6. 바울은 구약과 일치하는 것 이외의 어떤 가르침도 선포하지 않았다. 그는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 자아 없는 자, 유명한 자나 무명한 자나 복음을 받아야 될 모든 사람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복음이 미천한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그 지식이 전하여진 사실은 복음이 겸손한 은혜임을 나타내 준다. 또한 바울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복음이 확실한 진리이며 권능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내용 이상의 것을 전하였다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전한 것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설교하였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 외에 그가 더 첨가한 것이 있다면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교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25잦 19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의 트집거리가 되었다. 즉 그가 "예수께서 사셨음을 확언한 것"이 그들의 시비의 발단이었다. 이제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말한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고 지금도 또한 말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을 말한 것밖에 없다. 이제 내가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져 정해진 때에 그것도 그들이 예고한 때에 그들이 오리라고 한 그가 오셨음을 나타낸 것은 선지자들에게 큰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또한 바울이 설교한 세 가지 일치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메시야는 paqhtoj - 즉 고난자라는 것이었다. 또한 메시야는 인간으로서 고난을 받으실 분일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도 그분은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치욕스러운 죽음은 그분의 사명과 부합되는 것이며 또 그 사명이 철저히 수행된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바울이 그것을 전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노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된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설교에 관하여 화낼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승인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2)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먼저라 함은 시간적으로 먼저가 아니라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부활로써의 처음 부활이라는 뜻이다. 즉 그들이 예언했고 바울이 전한 것은 prw/toj exa,nasta,sewj - 즉 그가 부활한 자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계 1:5)는 말씀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라는 말씀이나 다 같은 의미를 지닌 말씀들이다. 그는 여자의 첫 번 소생이 자궁을 열고 태어나듯이 죽음의 문(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말씀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추수된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더 이상 죽지 않는 처음 분이 되셨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주의 권능을 힘입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부활하셨을 때 "많은 성도들의 몸이 깨어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마 27:52, 53).

(3) "그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유대인들에게 빛을 전하신 것은 즉 먼저 선택받은 자신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광이 되시기 때문이었다. 주께서는 몸소 이스라엘에게 빛을 전하셨다. 그 다음 그의 사도들의 사역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셨다. 그 까닭은 그는 "어둠 가운데 앉은 자들을 일깨울 빛이시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의 소명 즉(18절) "어둠에서 빛으로 이방인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말한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하여 또한 그의 교훈이 진리라는 확고한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그 빛을 더욱 강력한 힘으로 비추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 사실은 또한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것이었다. 즉 그들도 "이방에 거하는 자들이 메시야를 인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예고하였던 것이다. 그의 전한 내용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면 유대인들이 불쾌히 여길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26:13 없음.

 

26:14 없음.

 

26:15 없음.

 

26:16 없음.

 

26:17 없음.

 

26:18 없음.

 

26:19 없음.

 

26:20 없음.

 

26:21 없음.

 

26:22 없음.

 

26:23 없음.

 

26:24

바울의 다섯 번째의 자기 변명(3)(사도행전 26:24-32)

우리는 바울이 자기가 전한 복음을 변호하고 또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고귀한 사람들로 복음에 대하여 좋은 견해를 갖게 하기 위하여 더욱 할 말이 많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다가 중단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까지 말을 하고 강론을 그쳤다. 위의 사실은 긴장이 완화되었고 경직되었던 입도 부드럽게 되었으며 그의 마음도 담대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 말하려 하는 것을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그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그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의 동참은 그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다함이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의 얘기가 중단된 것은 천만 번 애석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라는 허락을 받았으나(1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하라는 허락은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괴로운 일이었고 그의 글을 기쁨으로 읽어 온 우리에게는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재판정은 이제 그에 대하여 판결을 내려야 할 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Ⅰ. 로마의 총독 베스도는 그 불쌍한 사람이 미쳤으며 베들램(역주:런던의 St. Mary of Bethlehem 정신 병원)이 바울에게는 가장 알맞는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베스도는 바울이 벌을 받을 만한 죄인도 아니며 나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울을 동정을 받아야 할 정신병자 또는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그는 바울이 알아 듣지 못할 것이기에 그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이로써 자기가 바울을 죄수로 정죄하거나 그를 전도자로 믿거나 하는 부담을 면할 방편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만약 바울이 composmetis - 즉 제 정신이 아니라면 바울에게 죄를 선고하거나 또는 결백을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베스도가 그에게 말한 내용(24절).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기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베스도는 자기가 각별히 그의 판결을 존중하여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이 법정을 연 아그립바에게 의논해 보지도 않고서) "큰 소리로" 자기가 바울의 말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청중들도 더 이상 그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너는 미친 사람처럼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하는구나"라고 말하였다. 베스도는 사실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바울의 조리있는 말을 감당할 수 없어서 소리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또한 바울이 받은 고난과 그를 대적하려는 그의 적들의 분노가 자기의 양심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도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가 착각을 하고 내린 결론이 가장 지당한 말이나 되는 것처럼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 너무 많은 연구로 네 머리가 이상해졌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 말을 화를 내며 말한 것이 아니라 경멸과 모욕적인 뜻으로 말하였다. 베스도는 바울의 증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바울의 말은 베스도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내용이었다. 그에게는 그 모든 내용이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돌아버린 머리에서 나온 공상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Si non vis intelligi, debes negligi - 즉 만약 네가 이해할 수 없다면 무시하여도 좋다는 속담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1) 베스도는 바울이 학자이며 학식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까닭은 바울이 자신에게는 전혀 생소한 모세와 선지자들이 쓴 책들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베스도는 바울이 성서를 잘 안다는 것까지도 바울을 비난할 도구로 전용하였다. 어부들이었던 사도들은 학식이 없었기 때문에 멸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바리새인으로 양육을 받은 바울은 그가 필요 이상의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멸시를 당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적대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다.

(2) 베스도는 바울을 미쳤다고 비난한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누명을 쓰고 대중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방백들이 선지자에 대하여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왕하 9:11; 호 9:7)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는 미친 사람 또는 귀신들린 사람으로 간주되었었다. 아마도 바울은 처음 증언을 시작할 때보다 끝날 때쯤에는 더욱 실감있게 열심히 말하였을 것이고 실감과 열심히 지나쳐서 더욱 많은 몸짓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 불공평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사람도 바울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믿는 사마들을 누가 미쳤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 큰 흉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이 부당한 누명을 벗기 위해 바울이 취한 방법. 전에도 바울이 이런 누명을 쓴 일이 있는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라고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이 말은 거짓 선지자들이 바울에게 했던 말인 것처럼 여겨진다(고후 5:13). 아마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우리더러 미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미친 것이라"는 뜻으로 그들에게 답변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로마 총독 앞에서 이런 말로 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말에 관하여 무엇인가 변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1) 바울은 총독에게 정중한 태도로 그러나 떳떳하게 그의 말을 부인한다. 그는 그에게 자기가 그렇게 불리워질 근거나 구실이 없다고 항의하였다(25절). 그는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런 징후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혜로 일생 동안 계속하여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두서없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베스도는 신사답지 않게 또한 더군다나 재판관답지 않게 바울에게 속되고 모욕적인 말을 하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결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그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베스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존경을 표하였고 "베스도 각하"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그를 높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욕을 욕으로 갚지 말며 억울한 말을 들었다고 또 그럴 말로 응대하지 말고 우리를 멸시해서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정중히 말할 것을 가르쳐 준다. 어떤 경우에나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하겠다. 그런 마음은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비난을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2)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자기가 말한 것에 관하여 변명해 줄 것을 호소한다(26절). 그는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즉 그리스 죽음과 아시기로 즉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부활과 구약의 예언들이 그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시기로 내가 말한다"고 본문에서 말한다. 또한 바울은 왕이 알고 있기 때문에 즉 이 일들이 공상에 불과한 거이 아니라 사실인 것을 알고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알기를 원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그 앞에서 담대히 말하노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아그립바에게 "왕께서도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나이다"라고 하였다. 즉 왕은 바울이 자신이 회심과 복음을 전하라는 위탁을 받은 사실을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줄 안도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유대인들과 오랫 동안 사귀어 왔기 때문에 이 일들에 관하여 이미 들었을 것이 틀림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유대 전역에 이 소식은 알리어졌으므로 이 재판에 참석한 유대인들 중의 어느 사람도 그들이 바울의 말을 전에도 여러 번 들어왔음을 바울을 위해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이 모든 말을 했다고 해서 정신나간 사람으로 책망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사실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한다 하여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처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고넬료와 그 친지들에게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너희도 알고 있다"(행 10:37)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그립바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으며 베스도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Ⅱ. 아그립바는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자기는 이같이 강력한 힘이 있는 논리적인 말과 목적 의식이 분명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1. 바울은 아그립바의 양심에 호소하였다. 어떤 이는 바울이 아그립바만을 바라보며 그를 주대상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베스도가 불쾌하여 바울의 말을 중단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24절). 그러나 간혹 그의 태도가 베스도에게 거스리는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바울이 어떤 일개인에게만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자 하였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 말을 이해할 아그립바에게 자기 말을 입증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27절). 당신은 구약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장차 일어날 좋은 일들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인정합니까?"라고 하였다. 이렇게 물은 바울은 아그립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아그립바를 격려하는 뜻에서 그가 그렇게 믿으리라는 것을 자기가 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아그립바의 조상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아그립바도 유대인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는 선지자의 글들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말씀들을 믿고 있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성서를 알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이미 가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2. 아그립바는 바울의 증언에 상당한 근거가 있음을 인정하였다(28절). 그러므로 그는 "네가 나를 권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역주:한글 개역과 차이 있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비꼬는 말이라고 해석하여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구절을 그런 내용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바울이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썩 잘 말하였다는 것은 입증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아그립바는 바울의 말한 내용에 감동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본문을 "바울아 네가 너무도 경솔하구나. 네가 나를 갑자기 개종시킬 수는 없으리라"는 말로 해석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아그립바의 이 말을 진심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한다. 즉 아그립바의 말을 그가 어떤 의미로는(또는 비록 적은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였음을 확신한다는 고백으로 본다. 그 까닭은 그가 구약의 예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음 속으로 여러 번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가 깊이 생각하던 내용을 바울을 통하여 정중하게 독촉을 받고서 거의 믿고자 하는 대로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즉 그가 복음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 벨릭스가 두려워하였던 순간에 자기 죄를 버리기 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었던 것처럼 아그립바도 거의 그리스도를 믿기 직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라는 증거 도한 강력한 것임을 그는 인정하였다. 또한 자기가 이러한 증거에 반론을 제가할 수 없음도 그는 알았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문은 유익한 것이며 감히 그런 말을 주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제의법에 대한 그의 의무와 자기조상들과 국가의 종교에 대한 그의 존경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세속적인 욕심 등의 문제만 가로 놓이지 않았다면 아그립바는 즉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믿으라는 말에 완전히 설득되지는 않아도 거의 설득되는 사람들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와 하나님의 법도의 탁월성을 강하게 확신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의적인 유인(誘因)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자기들의 확신 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계속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는 경건한 소망의 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염원을 기도의 말로 끝맺는다. 즉 그는 euvxa,imhn a'n tw/| qew.| - 즉 나는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노라(29절)는 기도로 그의 변론을 끝맺었다(역주: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바울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그들을 위하는 것으로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롬 10:1)(그는 지금도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이렇게 그리고 결박당한 것 이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니이다"라고 하였다. 이 바울의 말에서 다음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바울은 이로써 그가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결의를 고백한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족하고 있고 또 이를 위하여 살고 죽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고백한다. 저희가 모두 그와 알기를 바라는 기원을 통하여 그는 사실상 그르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개의치 않고 예전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설혹 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그에게는 세속적인 이를 안겨 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교훈 즉 "그들은 네게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렘 15:19)라는 말씀을 끝까지 고수한다.

(2) 바울은 이로써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만족함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주는 유익함에 자신이 만족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바울은 현재도 기독교에 대한 믿음 안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있었으며 그의 신앙은 자기의 영원한 행복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라도 본문에서처럼 그가 자기와 같이 충실하고 열성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욥은 "나의 대적은 악인이 되도록 하소서"(욥 27:7)라고 기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나의 친구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소서라고 말했다.

(3) 바울은 본문에서 아그립바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데 대한 자신의 관심과 아쉬움을 나타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전부가 기독교를 만들까 하는 생각을 지닐 뿐 아니라(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자기와 같이 성실하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던 때문이다.

(4) 바울은 본문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그의 관심사요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됨을 나타내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족한 은혜가 있다고 한다. 즉 그들의 수효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 그들의 갈망하는 바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이 그에게 있음을 말한다.

(5)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 모두를 위해 진심어린 선의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의 것을 소망하였다.

[1] 바울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원할 뿐 아니라 그들도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2]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형편에 그들이 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이렇게 결박된 것 이외에는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들이 모두 자기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로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처럼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즉 그는 그들이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하여 맛보았던 여러 가지 유익을 그들이 맛볼 수 있기는 바랐으나 자신이 진 십자가는 그들이 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바울이 감금된 사실을 가볍게 취급했었고 그리고는 그에게 어떤 배려도 베풀지 않았었다. 벨릭스는 유대인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바울을 결박하여 가두어 두었었다. 그랬으므로 갇혀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자 신에 대해 그들이 너무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했어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매인 바 되기를 바랐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금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바울의 이러한 말보다 더 상냥하고 은혜로운 말은 없으리라.

Ⅲ. 그들은 모두 바울이 죄가 없으며, 그에 대한 기소는 잘못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1. 법정은 서둘러서 산회되었다(30절). 바울이 정당한 사실을 말하자 그 말은 그들 모두를 감동시켰다. 왕은 자신이 바울에게 말을 계속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가 더 감동적인 말을 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은 그가 말을 계속한다면 그의 말이 청중의 상당수에게 감화를 주어 바울에게 그들이 호감을 가지게 되고 그러하여 사태가 복잡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또한 그의 말이 그들을 그리스도인 되게 할까하여 두려워했다. 왕은 이미 자신의 마음이 그의 말에 동요되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도 자신이 동요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벨릭스처럼 바울을 물러가게 했다. 그들이 죄수에게 그가 더 할 말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올바른 처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할 말을 충분히 다한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러므로 "아그립바와 벨릭스와 버니게와 동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이 사건에서 바울은 결백하며 또 이 정도 들었으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바울에게 더 말을 시켜 보았자 그의 입장이 정당성만 더 밝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모두 바울이 무죄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31절). 배심원들은 그 문제를 좀 더 논의하여 서로의 생각을 얻기 위해 퇴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람은 죽일 만한 행사가 없다." 즉 죽일 만한 범인은 아니라는 똑 같은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바울이 "감금될 만한 행사가 없다." 즉 그는 가두어 둘 만한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이 있은 후 네로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로마 사람들에게 이런 법은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범죄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판결 사례는 그후 오래지 않아 네로가 제정한 법의 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재판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성적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이 그의 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도 끼어 있지 않은 무리들에 의해서 옳다 인정을 받았고 또한 그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한 만한 행사"를 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도 자신의 떳떳함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로써 "바울을 살려 두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그를 죽이라"고 고함치던 유대인들의 소동은 재판관의 적절한 판결에 의해 무색해지고 말았다.

3. "아그립바는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또한(32절) 바울이 자기의 사건을 가이사에게 호소한 때문에 자승자박하게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가 상급 법원에 상소하면 하급 법원은 그에게 형을 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를 석방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 상소를 받아들일 때 법적 상소가 성립되는 것이 로마의 법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기소자들이 상소를 수락한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바울은 총독이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땅히 취하여야 할 배려를 하지 않았으므로 군중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그 일을 강력히 추진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은 아그립바와 베스도가 바울을 석방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인 줄 안면서도 그를 자유롭게 하여서 유대인들을 노하게 하고 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상소를 구실로 바울을 계속하여 감금하려고 그의 상소를 수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또한 권면을 받지 않았을 경우와 다를 바 없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1) 바울이 자기의 석방에 대한 유일한 장애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 자기의 행동을 경솔한 것으로 자책하고 후회하고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겠느냐는 점이다. 바울이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 경솔함과 성급함으로 일을 처리한 것을 자책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어느 정도 불신한 사실에 대해 자책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이 사실은 솔로몬의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전 6:12)라는 말씀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해 취한 행동이 가끔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멀리 내다볼 줄 모르는 피조물이고 생각없이 자신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존재인 것이다.

(2) 또는 바울이 위의 가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만족하고 그것을 생각해 보고 잘한 것으로 여겼으리라는 점이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은 합법적이고 로마 시민다운 행동이었고 그의 사건을 마구 처리하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정황에 의하여 볼 때 그가 취한 결단이 최선의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후에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고 그 일로 자책하여 자신을 괴롭힐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결단한 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기에 마침내는 선한 결과로 끝나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해야 한다"는 주의 말씀을 환상 가운데서 들었다(23:11). 그러므로 그가 로마에 가게만 된다면 그가 죄수로 그곳에 가든지 자유의 몸으로 그곳에 가든지 그것은 그에게 별 차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뜻은 영원히 설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였으리라.

 

26:25 없음.

 

26:26 없음.

 

26:2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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