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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더둘로의 송사(사도행전 24:1-9)

우리는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내고 나서 바울을 대적하고자 나타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바울을 기소할 일이 있으면 가이사랴로 갈 것과 거기서 바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요 재판도 행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아마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구태여 가이사랴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증오감을 사그러뜨릴 그 어떤 방도도 없었던 것이다.

Ⅰ. 바울에 대한 고소의 진행 경위. 재판은 활기를 띄고 진행되었다.

1. 재판은 얼마 안 있어서 개최되었다. 왜냐하면 고소인들은 "5일 만에" 재판에 필요한 준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을 박해하기 위해 모든 다른 일은 제쳐 놓았다.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는 일에 이토록 열심인 것이다. 어떤 이는 바울이 처음 잡히고 난 후 "5일만에" 본문의 재판이 열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대단한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다"고 말했고(11절) 또한 바울은 성전에서 결례하는 데 칠 일을 소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닷새는 열 이틀에서 칠 일을 뺀 나머지 날짜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의 재판자 노릇을 하였던 자들이 본문에는 그의 기소자로서 나타난다. 즉 그를 재판하기 위하여 높은 자리에 앉았던 대제사장 아나니아 자신이 서서 바울을 기소하였다.

(1) 아나니아가 그처럼 자신을 욕되게 하고 자신의 지위에 대한 존엄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대제사장이 기소자가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자기의 임무를 버려 두고 헤롯궁의 법정에서 고소인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들 스스로 이같이 자신들을 비하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말 2:9).

(2) 이같이 아나니아가 직접 나서서 바울을 대적하였다는 것 역시 기이한 일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누구에 대하여 악의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은 될 수 있는 한 뒤로 숨어서 하며 정책적으로 다른 사람을 하수인으로 기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송사를 하는 사람은 욕먹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자신이 바울에 대한 서원한 적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장로들이 그를 수행하였다. 그들이 그와 함께 가이사랴에 온 것은 그들이 아나니아를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기소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르이 이같이 직접 나선 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격렬하게 공소를 행해 줄 변호사나 대리인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을 고안해 내는 일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을 비하시키며 지칠 줄 모르고 날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냉담, 사양, 무관심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수치가 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Ⅱ. 바울에 대한 송사의 내용. 기소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온 더둘로라는 어떤 변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로마인으로 로마법과 로마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총독 앞에서 송사하는 데에 적격이었고 승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예리한 어투로 조리있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자문 노릇을 하는 풍자를 유명한 더둘러를 고용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더둘러에게 많은 삯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삯은 그들이 관리하는 성전의 비용에서 빼낸 것일 게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건은 교회가 관련된 것임으로 돈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핑계를 대었으리라. 바울은 법정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 앉았다. 그는 소환되어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2절). 더둘로의 임무는 기소자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송사하는 것이었다. 더둘로는 돈만 받으면 무슨 일이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의 혀를 샀다. 자기 입장을 변호해 줄 변론인을 고용한다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많은 변사들이 정의감은 내동댕이 치고 부당한 입장까지도 의식적으로 수호한다는 데 문제는 있는 것이다. 더둘로도 바로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변론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아마도 본문의 내용은 그의 변론을 요약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툴리(Tully)의 연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로마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경우에 장광설을 늘어 놓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의 변론은 아부와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말은 악을 선으로 선을 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1. 세상에서 가장 악한 인간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가장 훌륭한 위인인 것처럼 칭송되고 있다. 이러한 칭송이 주어진 것은 그가 재판관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벨릭스는 유대인인 요세푸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벨릭스와 같은 로마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매우 악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의 그의 특권을 이용하여 온갖 악을 저질렀고 암살을 장려하고 암살자를 후원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압제자로 묘사된다(Joseph. Antiq. XY. Cap 6). 그가 이런 자인데도 불구하고 더둘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이름으로 또한 아마도 그들의 특별한 지시에 의하여 벨릭스를 찬양하고 마치 그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훌륭한 통치자라는 듯이 하늘까지 추켜 세웠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러한 찬사를 교사했으리라는 것은 벨릭스가 최근 유대인들의 신앙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적의를 무마하려고 그들이 그를 추켜 세웠으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의 최근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대제사장 요나단 또는 벨릭스의 폭정을 마구 비난하여 벨릭스를 격노케 하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이들 암살자들은 그 후에도 고용될 때는 언제나 사람을 암살하는 일을 하였다.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어지고 있다. Cujus facinonir quia nemo ultor exitit invitait ha licentia sicarii multos confodiebant alios propter privatas inimicitias, alios conducti pecunia, etiam in ipso templo - 즉 아무도 감히 끔찍한 악을 자행하는 암살자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처벌되지 않는 것을 기회로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원한으로 또 때로는 돈을 받고 고용되어 사람을 찔러 죽였다. 또한 그들은 심지어 성전에서도 사람을 찔러 죽였다. 이들을 동원하여 벨릭스가 자기들의 동료를 살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벨릭스를 이용하여 바울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을 충족시키고 또 그르이 그의 행위를 눈감아 준 친절을 보인 대신 그도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뜻으로 그들을 벨릭스를 역대 총독들 중 가장 뛰어난 그들 교회와 만족을 위한 공헌자라고 아첨하였다.

(1) 벨릭스에 대한 찬사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에게 시킨 것이었다(2절).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립니다. 또 우리는 당신을 우리의 수호자요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즉 당신의 지혜와 가호와 지키심에 의해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감사무지하옵나이다"라고 말한다. 총독이 앞서 천부장이 말한 애굽인의 폭동을 진압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에게 공헌한 것이 있음도 사실이었다(21:38). 그러나 그가 그러한 공을 세웠다고 해서 그의 유대인들에 대한 모든 폭정과 압제가 다 눈감아 질 수는 결코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찾아 보도록 하자.

[1] 위대한 인간이 맛보게 되는 불행. 즉 그들의 치적이 과장되어 칭찬되고 그들의 결점이 솔직하게 그들 앞에서 지적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행이다.

[2] 악한 인간의 정치. 그들은 아첨하는 관리들에 의해서 점점 더 나쁜 정치를 하게 된다. 로마의 교황들도 각 나라의 폭군들과 또한 불법으로 왕이 된 자들에게 아첨하고 추켜 세워서 엄청난 교권을 공고히 하였고 또 그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들을 박해하도록 조종하였고 그들을 자기들의 악함의 도구로 삼았다. 마치 본문의 대제사장이 벨릭스를 추켜 세워 그를 통해 자기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였듯이 말이다.

(2) 그들은 그의 은덕을 언제나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3절). 그들은 더둘로를 통해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즉 어느 때나 어느 소에서나 언제나 당신의 은덕을 기억할 것입니다. 고귀하신 벨릭스 각하여, 우리는 당신의 은덕을 온갖 감사의 말로 찬양하나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당신은 현명하고 좋은 총독으로 우리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셨다는 것을 당신을 위해 증언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가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총독이었다면 그의 선정을 그들이 감사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임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정부 당국을 통하여 받는 유익함 특별히 현명하고 선량한 통치자들의 다스림에 의하여 얻는 유익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우리가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통치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영예는 백성들이 그의 보호 아래 태평을 누리고 그의 선정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음을 인정하고 치하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문의 벨릭스는 그런 인물이 못되었던 것이다.

(3) 그들은 이러한 찬사를 그에게 보내므로 이 일에 대한 벨릭스의 호의를 기대하였다(4절). 그들은 벨릭스의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오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인내를 베풀어 준다면 잠간 말하겠다는 뜻으로 그들은 더둘로를 통해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 원하옵나이다"라고 덧붙여 말한다. 그들이 이 모든 말은 captandam benevo lentiam - 즉 그가 자기들의 송사를 지지해 주도록 유도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들은 사실이 공정하게 재판되면 아무 소득도 없을 것으로 여겨 바울을 하게 다스리게 만들려고 그에게 아첨을 한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로마 정부를 증오하였고 로마 정부의 멍에를 지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러기에 그들이 벨릭스를 미워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없애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온갖 아첨을 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마치 그들이 우리 주님을 박해할 때 빌라도와 가이사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통치자들은 군중의 입에 발린 아첨에 의해 그들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충성과 아첨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2. 가장 선한 사람이 여기서는 가장 악한으로 비난되고 있다. 단지 그가 체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그를 죄있다고 비난한다. 더둘로는 미사려구로 아첨을 한 후(그의 말은 진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용건을 말한다. 그는 법정에 선 죄수에 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먼저번의 분에 넘치는 아첨이 혐오감을 우리에게 주었듯이 지금의 도에 넘치는 욕지기 역시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필자는 더둘로를 동정한다. 또한 필자는 그가 바울에게 악의도 없었으며 또 그가 바울을 힐난하듯 바울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가 벨릭스를 필요에 의해 과찬하였듯이 다만 돈 때문에 바울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같이 기지가 넘치는 사람이 고작 말을 팔아 먹고 살려고 한 사실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또한 그로 하여금 이러한 말을 하게 한 잔인한 마음을 지닌 더러운 인간들인 대제사장의 무리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이제 더둘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이름으로 벨릭스에게 두 가지 점을 고소하였다.

(1) 바울에 의하여 그 나라의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나쁜 사름으로 몰지 않고서는 그들을 괴롭힐 수가 없었다. 또한 처음부터 제자들을 가장 사악한 무리로 모함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제자들에게 지독한 고난을 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그들의 얘기는 전혀 거짓된 것이었고 그러한 조그만 근거도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순수함이라든가 뛰어남 또는 유익함을 지녔다고 해서 비난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통치자들이나 대중들이란 곧잘 비난의 말에 현혹되어 미쳐 날뛰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불의한 사실이라도 정색을 하고 엄숙하게 확신있게 정당한 것처럼 주장하면 그것이 본문에서처럼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패역한 성이라고 정죄하고 왕과 방백들을 비난한다는 것이었다(스 4:15, 19). 또한 우리 주 예수에 대해서 그들은 그가 나라를 소요케 하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고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본문에 보면 바울에게도 똑같은 비난이 주어진다. 그들은 바울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것을(이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지만) 모든 상상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바울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혐의를 두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기정 사실인 것처럼 "우리는 그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부터 그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치도 그가 반역자이며 이미 그의 반역이 유죄로 입증된 것처럼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언에는 한 마디의 진실도 없었다. 바울의 실생활이 조사된다면 그가 그 증언과는 반대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1] 바울은 그의 나라에 대단히 복된 사람이며 유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예의범절을 지닌 전형적인 선한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누구도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염병"이라고 불리웠다(5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 loimo.n - 즉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이 말은 그가 시끄러운 인물이며 잔악하고 성품이 나쁜 자요,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는 뜻의 말이다.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세대에게 전염병 보다도 더 해로움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의 독소는 퍼져서 남까지 감염시키는 것이요 마들도 자기처럼 악하게 만드는 그러한 독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역병이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고 모든 것을 폐허가 되게 하듯이 바로 바울이 치명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를 염병처럼 두려워하고 경계할 인물로 여겼다. 그가 전한 많은 훌륭한 설교와 선한 사업 때문에 그는 염병과 같은 자라고 칭해졌던 것이다.

[2] 바울은 화평케 하는 자였다. 바울은 모든 적들을 없애는 힘을 지닌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으며 진실하고 영원한 평화를 심는 자였다. 바울은 자신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았으며 타인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권면하였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그는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고 포함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완고한 고집쟁이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벨릭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지켜 보았다. 이제 그들은 벨릭스로 하여금 바울이 그들을 소요케 선동하는 자라고 믿도록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 자신이 백성들 가운데 반역과 소요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이 사실을 내심으로 수긍하였다. 사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가 전한 신앙을 미워한 것도 그가 그들이 로마인과 싸우는 지도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바울에 대적하였고 그에게 반대하도록 군중을 선동하여 소요케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모든 장소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들은 이제 그 모든 책임을 부당하게도 마치 그가 소요를 일으키는 선동자인 것처럼 바울에게 씌우려고 하였다. 그후 오래지 않아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불을 질렀다고 핑계대었던 것이다.

[3] 바울은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기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종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그는 본문에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소되었다. 즉 그 말이 지닌 의미대로 이 이단의 표본되는 주동자라고 하였다. 한 구브로인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에 대한 선고문에는 auctor inqui nominis et signifer - 즉 악한 일을 꾀하는 파의 주동자요 d고수라는 말이 삽입되었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하는 주동적 인물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첫째, 그가 전한 종교가 하나의 이단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인 거짓이었다. 바울은 군중들로 당을 꾸미게 하거나 은밀한 말로 그들을 이간하지도 않았다. 또는 그가 그의 생각을 그들이 법처럼 여기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진실한 기독교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관심이 되는 사실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며 세상과 화해하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종파의 유래가 그러했듯이 기독교를 편견과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진실한 기독교은 인간을 하나로 연합하게 하며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이도록 불러 모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독교가 인간의 마음에 올바른 능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한다면 인간들을 온유케 하고 정숙케 하고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게 하며 모든 문제를 용이하게 처리하게 하며 서로 용납하며 서로에게 유익을 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무질서의 씨를 심고 분열로 이끌어 주는 당파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세상적인 이익이나 권리를 목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혀 당파로 불리울 수는 없는 것이다. 당파로 세우는 사람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을 따라 그 당파를 운영하며 그들은 부귀와 영화를 목적 삼는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들에게 귀중했던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또 없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둘째, 그는 부당하게 기독교를 나사렛이라고 불렀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나사렛 출신으로 표현한다. 즉 그는 선한 것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예언된 베들레헴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자신이 나사렛 예수라고 칭해지는 것을 좋아하셨다(22:8). 성경은 그 이름에 영예를 부여하였다(마 2:23). 그러므로 이 칭호가 본래는 모욕을 주려는 의도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주인이신 주님이 기꺼이 받아들이신 이 칭호를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바울을 이단의 괴수요 주동자라고 부른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4] 바울은 성전을 경외한다. 그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장소로써 존경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최근에도 성전에서 경건하게 봉헌을 드리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을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고소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고의로 율법을 어기고 성전을 멸시하려고 하였다(6절)고 고소하였다. 기들의 이에 대한 논증은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한 것은 사실 전적으로 거짓말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21:29).

(2) 바울에 대한 정당한 재판 진행을 천부장이 방해하였다고 고소하였다(역주:한글 개역에는 이 내용이 없음. 그러나 K. J. V와 공동 번역에는 수록됨).

[1] 그들은 자기들이 "바울을 데려다가 그들의 율법대로 재판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율법대로 바울을 재판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율법과 정의에 반하여 바울에게 자기 변명의 기회를 주지도 않고 그를 때려 죽이거나 밟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자기들의 법정에서 심판하겠다는 구실로 끌고 가다가 폭도들의 손에 넘겨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율법에 의한 재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들이란 자기가 저지른 것은 숨기고 그들이 전혀 하지도 않은 일을 행한 것처럼 곧잘 조작하는 존재이다.

[2] 그들은 천부장이 그들의 손에서 바울을 구하여 냄으로써 자기들의 권한을 침해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부장은 바울의 문제를 공정하게 다루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범하고자 한 죄를 저지하므로 그들에게도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7절)라고 하였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의 실패에 대해 대단히 분개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이 실패된 데 대해서 그들은 감사를 드렸어야 했던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격정으로 인하여 마의 피를 흘릴 계획을 세웠을 때 아비가일이 그를 저지시켰음을 감사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그에게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하였다. 곧 다윗은 잘못을 깨닫고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냉혹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정당화하였고 자기들의 손으로 피를 흘리려는 계획에서 그들을 구하여 준 천부장을 적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3] 그들은 그 문제를 벨릭스에게 고하고 그의 재판을 청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한 책임을 천부장에게 씌워 그가 자기들로 벨릭스에게 고소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고 했다(8절). 그들은 "당신이 친히 심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천부장입니다. 또 우리에게 이 수고를 하게 한 것도 천부장입니다"라고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천부장이 그를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끼리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당신께 번거러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 "천부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심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당신으로 하여금 진실을 토로하도록 심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천부장에게 물어보시면 우리가 당신에게 고소한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Ⅲ. 더둘러가 제시한 고소에 대한 유대인들의 승인(9절). 본문에 의하면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였다."

1. 어떤 이들은 그들이 사악한 증인을 세워 그들의 고소를 증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더둘로의 고소가 한 마디도 틀림 없다고 사람을 시켜 증거케 하였다고 본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변사를 돈으로 고용하였다면 그들이 돈을 주고 서원할 증인을 세웠으리라는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2.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러가 말한 사실을 동조하는 말로써 보는 거시 옳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벨릭스가 그들에게 "더둘로의 말한 것이 너희들의 견해와 같은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렇다"고 답하였으리라. 이로써 그들은 더둘러의 연설 가운데서 거짓된 것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던 것이다. 말주변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신앙을 말로써 공박하지 못하는 자들은 재변가들의 말을 수긍하므로 다른 사람의 행악의 책임을 자신이 떠맡는다. 그들은 남이 말한 것을 반복해서 그 말이 진실이라고 수긍하므로 "주의 옳은 법도를 뒤엎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바알을 변호할 만큼 학식이 없더라도 바알을 위해 표를 던짐으로 악을 행한다.

 

24:2 없음.

 

24:3 없음.

 

24:4 없음.

 

24:5 없음.

 

24:6 없음.

 

24:7 없음.

 

24:8 없음.

 

24:9 없음.

 

24:10

바울의 세 번째 자기 변명(사도행전 24:10-21)

우리는 본문에서 더둘러의 소송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말에는 지혜와 거룩함이 넘쳐 흐름을 보게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사실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왕과 방백들 앞에 설 때 "그들이 말할 바를 알려 주겠노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둘로는 바울을 격노시키는 많은 말을 했으나 바울은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또한 법정의 규정에 따라 그가 말을 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즉 법은 피고는 원고가 그의 고소를 마치기 전에는 말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말을 들었을 때도 즉시 격렬하게 그 시대와 사람들의 불법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는 O tempora! O mores! - 즉 오 타락한 세대여라고 외치지 않았다. 다만 재판장이 자기가 말할 것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였다"(10절). 이제 그는 총독의 보호 아래서 증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는 그에게 지금까지 허용되었던 이상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바울은 말할 때 더둘로가 말한 것을 하나하나 들어 공박하지 않았다. 그는 더둘로가 돈을 받고 말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둘로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고용한 사람들에 대한 변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바울은 총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공정하게 재판해 줄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바울의 증언에는 더둘로처럼 총독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첨의 말이 없었다. 그러나 꾸밈없는 바울의 말이 더 상대방을 존경하는 말인 것이다. 바울은 "그 앞에서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총독을 그의 친구에게 대하듯 한 것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대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므로 총독이 공정히 재판하고 또 자기를 그렇게 다루어 줄 것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다. 바울은 자신의 결백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는 또한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벌벌 떨면서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편파적이 아닌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재판관에게 재판받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재판관을 알았을 때 "기꺼이 변명하였다." 왜 그러하였을까? 바울은 "나는 당신이 공정하고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뇌물을 싫어하시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 재판을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말이 총독에게 호감을 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매우 진실하며 타당한 것이었다.

1. 그는 총독 자신이 이전에 바울에 대한 기소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자신을 변명한다. 그들은 전에도 소란을 일으켰으나 그것은 다른 범죄자들을 기소한 것이었고 바울에 대한 기소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오랫 동안 재판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전에 그 앞에 자신이 기소당한 일이 없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가 고소된 것처럼 위험한 죄인은 아니라고 한다.

2. 총독은 유대 나라와 유대 민족의 기질과 정신을 잘 알고 있었다. 총독은 그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주장에 대해서 완고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을 배격하는 광적인 열심 당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불평분자들이요 부정론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에 대한 그들의 기소를 듣기는 하였으나 그는 그들이 다분히 편파심에 의한 악의로 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바울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를 기소하는 자들은 알았고 이 사실을 근거로 바울이 어떤 인물일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Ⅱ. 바울은 자기에 대한 고소 내용에 관하여 부인한다. 바울에 대해 고소된 내용은 그가 "소요를 선동하고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죄목은 로마 총독이 심문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총독이 다시 그 사건을 자기들에게 넘겨 주기를 원하였다. 바로 이것을 그들은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총독이 사건의 전말을 심문하지는 않더라도 총독이 알 듯이 심술궂고 기소된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제 바울은 총독에게 다음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한다(바울은 누구든지 요구한다면 증인을 대서 규명할 수 있는 떳떳한 진실을 말하였다).

1. 바울은 평화와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왔음을 말한다. 그는 무리를 선동한다거나 성전을 모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 사귀려 그 곳에 간 것이지 그들을 모욕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자는 열 이틀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 중 6일을 그는 죄수로 있었다. 또한 그는 혼자 있었다. 그러므로 이같이 짧은 기간에 그들이 그를 고소한 그러한 잘못을 그가 행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바울이 다른 지방에서 하였던 일에 대하여는 그들은 불확실한 사실밖에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그것에 의하여 그를 소송한다는 것은대단히 불공정한 일이었다.

3.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행동하였으며 어떤 선동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음을 말한다. (그들이 말한 대로) 그가 "유대인 가운데서 소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파당을 조직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있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이 낭독되고 강연되는 회당에 있었다. 바울은 성내의 자기의 친지들과 친구들을 만났고 집회소에서 자유로이 그들과 이야기하였다. 바울은 순수하고 활동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들은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거나 또 유대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증거를 들어 바울을 고소할 수 없었다.

(1) 바울은 반란의 주동자들이 지닌 투쟁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논쟁이나 반박을 즐겨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가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학자를 억지 비난으로 하고 흠을 잡거나 약한 자나 단순한 사람을 간교한 말로 현혹하지 않았다. 바울은 누가 요구한다 해도 자기의 희망의 근거를 말할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종교에 대하여 누구와 논쟁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신앙을 논쟁이나 토론이나 괴퍅한 논리 전개의 제목으로 심지 않았다. 그는 신앙의 문제는 항상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겸손과 경의를 지니고 다투었다.

(2) 바울은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는 내가 유대의 교회와 나라의 지도자들을 힐난하거나 또는 공적 사건을 들먹여 저희에게 겁을 주거나 분개하게 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는 내가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여 그들 가운데 불화를 일으킨 것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요 전도자답게 사랑과 정숙함을 지니고 생활했고 로마 당국에 복종하였다. 바울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였고 또 그는 육적인 것을 복음을 전하고 복음 전도자들을 수호하는 데 무기로 삼고자 생각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한 일도 없었다. 그는 그의 적대자들처럼 백성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당파를 형성할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결코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4. 또한 그들이 기소한 다른 내용 즉 바울이 다른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기소에 대해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무죄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기소의 증거를 대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3절)라고 하였다.

(1) 바울은 계속하여 자기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가 그들이 기소 사실을 증명할 수 없노라고 말한 것은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바울은 결코 공공의 평화의 적이 아니었다. 그는 공안을 해치는 일은 행하지 않았고 공안에 기여하는 많은 일을 하였다. 또한 유대 민족을 위하여 기꺼이 더욱 봉사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자기 민족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도 거리가 먼 이야기로써 그는 그들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행복을 가장 강하게 소망하고 있었다(롬 9:1-3).

(2) 바울은 자기의 처한 입장을 개탄한다. 즉 바울은 자기에 대하여 증거도 댈 수 없는 일들로 누명을 썼음을 개탄해 한다. 이와 같이 선한 사람들이 이 같은 해를 당하는 일은 너무나도 종종 있는 일이다. 또한 그들이 전혀 행한 일도 없고 또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일로 누명을 쓰고 기소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당한 재난을 개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무고한 일로 누명쓰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3) 바울은 자기의 박해자들의 불법성을 제시한다. 즉 그들이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한 그들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또한 그들의 허위 기소는 바울 지신의 영예와 자유와 생명을 훼손하였고 또한 재판관에게 부당하게 강요하고 재판을 그르칠 짓을 행하므로 재판관을 또한 모욕한 것이라고 하였다.

(4) 바울은 총독의 재판의 공정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는 총독의 주의를 환기시켜 기소자들의 폭언에 의해 자신이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였다. 재판은 반드시 Secundum allegata et probata - 즉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증거에 의하여 선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소된 사실이 진실이고 또 확실한지를 탐구하고 또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신 13:14). 그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올바른 재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Ⅲ.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의 설명은 그의 죄로부터의 결백함을 명백히 밝혀 주는 것이었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폭력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것이었다.

1.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자임을 인정한다. 또한 그것이 그들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천부장이 그랬듯이 총독은 바울의 기소자들이 충분한 증거도 없이 그에 대하여 기이할 정도로 격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소동을 보고 무언가 바울에게 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의 기소 이유를 해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고소되었다고 한다. 그 분쟁은 신앙이 원인이었고 또 그런 논쟁은 대부분 격렬하고 폭력적인 것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길이 이단이라고 불리운 사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또한 최고의 하나님의 종들이 누명을 쓰고 파당을 만드는 자로 몰리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자. 종교 개혁 이후의 교회가 개혁을 미워하고 또 그들 자신이 이단인 자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명을 쓴다고 해서 옳은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순수한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불리워진다고 해서 결코 악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나쁘게 생각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부른다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2.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들은 바울을 이단이라고 불렀으나 바울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1) 바울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의 대상은 옳은 것이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리라고 예언되었듯이(신 13:2) "지 이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찾아서 그들을 섬기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이 만약 그렇게 하였다면 그들이 그의 길을 이단이요 그들을 곁길 곧 위험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라고 부른다 해도 옳은 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다. 또한 그는 그들이 예배드리는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들과 계약을 맺으사 그들로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하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바울은 그 언약을 고수하였으며 그것에 반대되는 다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바울은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이 후손들에게 이루어졌음"을 전하였다. 그는 자신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다. 바울은 그의 경건한 조상들의 실천을 따라 자신이 행하였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다. 바울의 신앙은 비난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의 오랜 전통을 찬양하였고 그 신앙의 고백자들이 중단없이 계속되는데 대하여 긍지를 느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그를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위안이 되는 사실임을 명심하자(역주:영국인에 대한 필자의 고백임). 우리 조상들은 그를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요 그들의 자손의 하나님으로 그들과 약속하시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라"(출 15:2)는 구약의 말씀을 특히 강조하였다.

(2) 바울은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었다"(14절). 그러므로 그의 섬기는 방법은 옳았던 것이다. 바울의 신앙은 거룩한 성경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그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성경은 바울의 신탁이며 이정표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였다. 바울은 성경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거기 씌여져 있는 모든 것을 믿었다. 바울은 성경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성서 안에 있는 사실 이외의 것을 전하지 않았다(26:22). 바울은 다른 어떤 믿음의 도나 실행에 기초를 두지 않고 오로지 성경에 의존하였다. 그는 전통이나 교회의 권위나 또는 지상에 사는 어떤 사람이나 또는 무리의 무오성이나 인간의 안에 있는 빛이나 인간의 이성에 그의 믿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성경에 쓰여져 있는 신의 계시에 믿음의 근거를 두었고 그 말씀에 따라 살다가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3) 바울은 그의 목적을 미래의 세계에 두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미래를 소망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의 목적 또한 옳은 것이었다. 이단으로 빠진 자들은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며 세속적인 이익을 목적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 나라를 그의 신앙의 목표로 삼았고 거기에서 더 이상 치우침이 없었다(15절).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다. 나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나의 모든 소원은 하나님에게 있다. 또한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한다. 나의 모든 희망은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며 이 세상에 향한 것이 아니다. 나의 희망은 저 세상에 대한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권능에 의지하며 이 세상 끝날에 의인과 악인이 부활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나의 종교에서 목적하고 있던 가장 커다란 것은 기쁨과 행복이 부활을 받으며 옳은 자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사람들의 죽은 몸이 부활할 것이다. 영혼이 몸과 함께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육신이 또 다시 살게 됨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생명이 끝나는 날 또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명을 향유할 것이다. 이 다른 세상은 이 세상에 끝날 때 시작될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이 출생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듯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저 세상으로 즉시 가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될 것이다. 거룩한 자나 거룩하지 못한 자가 다같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저주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요 5:29). 다니엘 12장 2절을 참조하라. 이 말씀은 최종 심판 때에 부활이 있을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이 심판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자손들은 그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또 그들이 준비 과정에서 무엇을 행하였느냐에 따라서 보상이 판결되는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의 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불의한 자는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진노 아래 부활하게 될 것이다.

[3] 죽은 자의 부활은 오로지 하나님의 힘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소망을 가졌다" 하였고 또 하나님 안에서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대로 실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들어내는 것이다(마 22:29).

[4] 죽은 자의 부활은 그것이 유대 교회의 기본적인 신조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 고백의 기본적인 조항이기도 하다. 부활은 그들 또한 받아들이는 바인 것이다. 그것은 고대 족장들의 소망이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욥이 그의 신앙 고백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더욱 명확히 계시되었으며 완전히 확증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가 복음의 전도자들의 부활에 대한 해설과 증거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5]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곳에서의 보상을 바라야 할 것이다.

(4) 바울의 생활 자체가 그의 예배였다(16절). 그는 본문에서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말했다. 선지자나 그들의 교훈은 그들이 열매 맺는 바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손상되지 않은 훌륭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의 믿음 또한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믿음의 신비는 믿음의 순수한 양심 안에서 최고도로 유지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바울의 이러한 항의는 이전에 그가 대제사장 앞에서 행하였던 항의와 꼭 같은 취지의 말씀이었다(23:1). 그는 그때에도 "나는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말했었다. 또한 거짓이 없는 양심은 그의 자랑이기도 하였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바울의 목적과 소망. 그것은 "꺼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이었다.

첫째, 그의 말은 범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 싶다는 말로 볼 수 있겠다. 즉 이런 뜻의 말씀이다. "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 즉 내게 악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내게 아첨하지도 않으며 나를 기만하지도 않으며 무슨 일에든지 나를 오도하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자 애써 왔다"는 뜻이다.

둘째, 더럽혀지지 않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써 왔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바울의 본문에서의 고백은 "내 마음이 나를 꾸짖지 아니 할 것이라"는 욥의 고백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내가 양심을 꾸짖을 일을 결코 아니하고자 힘쓸 것이다. 결백한 양심을 지니는 것, 또한 내 영혼의 선함을 더럽히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행동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거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나는 내 양심이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늘 사귀는 친구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속해 있고 의존하고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다. 왜냐하면 양심은 나의 영혼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인 까닭이다"라는 뜻이다.



[2]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바울의 세심한 노력. 그는 본문에서 avskw/ - 즉 나는 힘쓰노라고 하였다. 즉 "나는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을 내 평생의 과제로 삼을 것이며 이 취지에 따라 내 생을 다스릴 것이다. 나는 자신을 훈련시켜 법도대로 살겠다는 뜻이다[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고행자(ascetics)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문의 avskw/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또한 본문의 뜻은 "내 성향이 나를 유혹하는 많은 요소들에 대해 내가 자제할 것이요 가장 영적인 신앙의 실행에 전념하여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이다.

[3] 그의 힘씀의 정도.

첫째, 그는 "항상" 힘썼다. 그러므로 본문에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려고 힘썼고 또 큰 죄를 없이 하려고 힘썼다."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아직 완전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그가 전에 행하였던 잘못을 지금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는 죄는 짓지 않는 생을 살았다." 연약에서 오는 죄는 양심에 근심이 된다. 그러나 연약에서 비롯된 죄는 의도적인 죄가 그러하듯이 양심에 상처를 내거나 양심을 오염시키는 것은 아니다. 조가 양심을 침범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죄가 양심에 상주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해야 한다. 믿음과 회개의 새롭게 하는 행위로 양심은 재빨리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작업을 늘 힘써야 한다.

둘째, 그는 그가 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리낌이 없고자 힘썼다. 즉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자 힘써 왔다. 그는 자기의 의무 전반을 이행함에 있어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웃에 대해 사랑의 법을 이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양심은 경찰관과 같이 custos utrius que tabuiae - 즉 각 사람의 감시자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때나 말할 때나 행동할 때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대단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고후 8:21).



[4] 그의 이러한 힘씀의 동기. 그 동기를 도입하는 말로 그는 본문에서 evn to,utw - 즉 이것을 인하여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있을 세계에서의 생명을 믿는 까닭으로 나는 이와 같이 애쓰는 것이다." 미래의 삶에 대한 염려는 현재에서의 우리의 삶을 양심적이게 하는 큰 요인이 된다.

Ⅳ. 바울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후 그는 자기의 처지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자신에 대한 잘못된 행위를 솔직하고 성실히 설명했다. 바울은 두 번이나 천부장에 의하여 박해자들의 손에서 놓여졌다. 그때 그들은 그를 죽여 없애고자 하였었다. 또한 바울은 그때마다 그들에게 자신이 죄가 있음을 증명하라고 도전하였던 것이다.

1. 그들은 한 번은 성전에서 그를 없이 하고자 하였다. 성전에서 그들은 바울이 그들의 나라와 성전에 대한 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21:28). 그런 소송을 할 만한 어떤 이유라도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기소를 반증할 수 있는 증거는 용이하게 찾을 수 있었다.

(1) 바울을 "그들의 민족의 젖으로 "기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랜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다가 "그의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었던 것이다. 즉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가 그의 동료들 가운데서 모금한 돈(바울 자신도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던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하여 어떤 악의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비로운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할 수 있으면 선을 행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대적자들을 오히려 사랑하였던 것이다(시 109:4).

(2) 바울이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와 자신이 성전에서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였다(21:24). 또한 그는 율법을 따라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였다"(18절). 또한 그는 결례를 행할 때 "군중을 선동하거나 소동을 피움도 없이" 정중한 태도를 행하였다. 그는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욕심이나 군중을 모으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능한 한 in cognito - 즉 아무도 모르게 성전에 가려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시아에서 온 그의 적들인 몇몇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에 대적하여 바울이 군중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켰다고 꾸밀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지를 위해 대중을 선동하지도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벨릭스에게 그가 율법을 어기고 희랍인을 성전에 끌어들였다고 고소했으리라는 것을 바울은 알았다. 또한 총독은 그 고소를 수락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자기들에게 굴복하는 민족들에게는 그들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법으로 규정하여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기소한 내용의 증거를 대라고 도전한다(19절). 그러므로 그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여기 당신 앞에 있으니 그르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다면 그들이 맹세코 끌까지 나의 유죄를 주장할 수 있는지 심문해 보라"고 말한다. 그가 이같이 말난 것은 주저없이 거짓말을 하는 자들도 그 거짓에 대해 맹세하라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주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2. 그들은 법정에서 바울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내가 성전을 더럽혔다고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제 여기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지 내가 무슨 부당한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게 하소서. 그들 역시 나를 당시에 죽이고자 하였습니다(20절). 내가 공회에 섰을 때 그들은 내가 말한 것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찾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21절). 이 말에 대해서 사두개인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나를 허물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라는 부활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이단이라고 자칭하는 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유대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나도 따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24:11 없음.

 

24:12 없음.

 

24:13 없음.

 

24:14 없음.

 

24:15 없음.

 

24:16 없음.

 

24:17 없음.

 

24:18 없음.

 

24:19 없음.

 

24:20 없음.

 

24:21 없음.

 

24:22

바울과 벨릭스의 대화(사도행전 24:22-27)

우리는 이 구절에서 벨릭스 앞에서 바울이 심문받은 결과와 그 재판의 영향에 대하여 알 수가 있다.

Ⅰ. 벨릭스는 이 소송을 연기하였다. 그리고는 거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였다(22절). 벨릭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총독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그는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도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벨릭스는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가이사랴에 사는 고로 여기 사는 로마군의 백부장이었던 기독교도 고넬료로부터 또한 기타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에 관해서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설명한 것만큼 나쁜 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벨릭스 자신이 그 도를 따르는 몇 명을 알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직하고 선하며 매우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벨릭스는 기소자들의 기소를 다음과 같은 이유를 빙자하여 연기하였다.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또한 그를 통하여 이 바울이 소동을 일으킨 자인지 아닌지에 관하여 그 진실을 알아 보아야 하겠노라. 너희들은 편파적이나 천부장은 이 문제에 이해 관계가 없으므로 공평히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바울이 소란을 일으킨데 대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너희가 소란을 일으키고 바울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인지 그의 말을 들어 보고 너희 사이를 판단하리라"고 하였다.

1. 바울이 처벌되지도 않고 또 자기들에게 이양되지도 않은 사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넘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적대자들의 분노를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전혀 낯선 사람인 대리자를 통하여 억제하신다. 비록 이 대리인들이 전혀 낯선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 도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여 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 바울을 석방시키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권리 침해였다. 벨릭스는 바울을 위하여 그의 적대자들에게 당연히 복수를 하였어야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소에는 악의(惡意) 이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재판관의 의무에 따라 바울을 악한 자들의 손에서 구하여 냈어야 하는 것이었다(시 82:4). 그러나 벨릭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며 인간을 경외할 줄도 모르는 재판관이었다. 그러니 그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의를 거스리는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을 연기하는 것도 죄이다.

Ⅱ. 벨릭스는 죄수를 구류하고 보석으로 석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곳 가이사랴에는 기꺼이 보석금을 치루고 바울을 자유케 할 많은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벨릭스는 바울과 같이 활동적인 사람은 적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울을 즉시 석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울을 지지한다는 그의 태도를 보여 주기 위하여 바울이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협조를 청할 수 있는 기회는 허용하였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조처하였다.

1.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그를 죄수로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다(23절).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을 일반 감옥에 집어 넣지 않고 군인인 천부장에게 이송되었으므로 그를 특수 죄인으로 다루었다.

2. 그럼에도 벨릭스는 바울에게 관용을 베풀어 그에게 영내에서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을 지키는 자는 그를 자유로이 놓아 두며 묶어두거나 한 방에 가두어 두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바울이 쉽게 구류 생활을 하도록 편의를 베풀어야 했다. 바울에게는 영내에서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말은 바울이 허가를 받아 영내에서 바람을 쏘이거나 산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정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돌아 온다는 말을 신용하였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으나 벨릭스는 일종의 제한된 자유를 바울에게 허락하였다. 왜냐하면 벨릭스는 그들처럼 바울이나 바울이 섬기는 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벨릭스는 또한 바울의 친구들 중 아무나 바울의 곁에 와서 도와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백부장은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에게서 설교를 듣는 것을 금지할 수 없었다. 만약 감옥에서도 친구들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다면 감옥도 집과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Ⅲ. 벨릭스는 공개 재판 후 오래지 않아서부터 바울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번은 특별히 바울과 대화를 나누었다(24 .25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낸 목적. 벨릭스는 바울과 더불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하여 즉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의향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관하여 얼마간의 아는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기독교의 전도자로서 바울로부터 그것에 관하여 듣고자 원하였다. 어떤 것에 관하여 자기의 지식을 더 넓히고자 하는 사람은 그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또한 어떤 일에 대하여 익숙해지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일에 관한 지식이 뛰어난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벨릭스는 그가 공개 법정에서 바울과 대화했던 것보다 더 자유롭게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그는 바울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에 관하여 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또는 유대인이었던 아내 드루실라의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 여인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 아그립바의 딸이었다. 그녀는 유대 종교 안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그녀는 유대교의 완성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에 관하여 더욱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그에 대한 강론을 듣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어떤 종교를 지니든 그녀에게 별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무슨 종교를 가지든지 그녀는 그 종교에 저촉되고 합당치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대 여인이면서 음녀였다. 벨릭스는 남의 아내인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그 여자는 밸릭스와 음탕한 삶을 누렸고 사람들에게 몰염치한 여자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하여 듣고자"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나 학설을 좋아한다. 그리고 즐겨서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이며 또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의 권능과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고 자기들이 심판받을 것에 대해 듣기는 즐겨하나 그들의 삶을 개혁시키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2. 바울이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벨릭스에게 전해 준 내용. 그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환상적인 신학 문제를 논하므로 희열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전하여 듣고 그는 신의 실제적인 모습을 대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경험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강론을 요청받고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조리있게 강론하였다(바울은 언제나 합리적인 설교가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특수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하고 그가 "하나님과 인가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말하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서둘러서 복음의 교리를 듣는 사람들의 양심에 직접 적용시키었다.

(1) 바울은 명백하고도 온화한 태도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본문에서 그는 다음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인간들에게 의와 절제의 법을 지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근심함과 의로움으로 살도록 가르치신다"(딛 2:12)고 하였다. 의와 절제는 이 교도 도덕가들이 특히 강조하는 덕목이었다. 만약 바울이 전한 가르침이 벨릭스가 기독교는 자유를 선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듯이 그를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그것을 기꺼이 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니요 기독교는 우리를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한 규례를 더 강조하는 것이요,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모든 일을 정직하게 하며 그의 임무를 다하라는 지고한 책임을 지워 주는 것이요 기독교는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며 복종케 하는 종교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세상과 육신을 부인한다. 모든 우리의 세상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우리의 욕구는 신앙의 법도 아래 예속된다. 바울이 "의와 절제"를 강조한 이유는 벨릭스에게 그의 불의와 무절제를 인식시키려 함이었다. 벨릭스는 특히 불의와 방종으로 유명한 죄인이었다. 벨릭스는 자기의 죄의 추악함과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을 진노를 깨닫고(엡 5:6)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 문의했어야 옳은 것이었다.

[2]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여 우리에게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그는 보여 주었다. 이 심판에 의하여 인간들의 영원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변개할 수 없이 결정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는 제 세상인 듯 큰 소리를 치고 산다. 벨릭스도 지금은 큰 소리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이 임할 것이다. "그날 모든 인간은 인류의 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에 대하여 변명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조리있게 이 사실을 논하였다. 즉 그는 어째서 우리가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또 이 때문에 우리가 신앙적인 생을 살아야 함을 보여 주었다.

(2) 우리는 바울의 설교의 대지에 대한 해설로부터 다음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바울은 설교할 때 듣는 사람이 누구이냐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염두에 두었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하였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로마 총독에게도 믿음을 요구하고 있었다.

[2] 바울은 설교를 할 때 인간의 양심을 공격 목표로 하였다. 바울은 청중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환상을 즐기게 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보게 하고 그들의 의무와 관심해야 할 바를 깨우치고자 하였다.

[3] 바울은 자기 자신의 안전에 우선하여 여러 영혼들의 구제와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세웠다. 그는(빌라도가 예수에게 말했듯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고"(또는 이것은 더 나쁜 경우이지만 벨릭스는 그를 유대인에게 넘겨 줄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석방할 수도 있는" 벨릭스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는 신세였다. 이제 바울이 듣기 좋은 말로 그의 비위를 맞춘다면 그에게 호감을 사서 놓여 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었다. 또한 총독으로 자신을 기소하는 자들에게 노하게 충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거슬리는 말을 하여 그의 기분을 잡치게 하면 이로 인하여 자신이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유념치 아니하였다. 세상 생명이 끝나기까지는 선을 행하고자 하였다.

[4] 바울은 자기 사명을 수행하다가 직면하는 고난과 역경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바늘 구멍 만한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구제불능의 죄인들이었으므로 이같이 낮은 신분에 처해있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파수군은 그들이 지키는 영혼들을 구해내지 못할지라도 마땅히 경고를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영혼만이라도 건짐을 받을 것이다.

3. 바울의 증언이 이 위대하나 악한 사람에게 미친 영향. "벨릭스는 두려워하였다. e[mfobx geno,menoj - 즉 깜짝 놀랐다. 그는 바스홀과 같이 a magor missabib - 즉 전율하였다(렘 20:3, 4).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벨릭스는 바울 앞에서 두려워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문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장차 올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불의한 자와 무절제한 자가 장차 올 심판에서 저주를 받게 된다면 내가 새로운 삶이 길을 하지 않는 한 파멸이구나"라고 하였다. 드루실라도 함께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본문에 없다. 그 여자도 똑 같은 죄인이었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제의법을 충실히 지켰을 것이요 또한 이로써 그녀는 자신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벨릭스는 현 상태에서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킬 아무 조건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살펴 보자.

(1) 말씀이 전파될 때 지니는 하나님 말씀의 권능.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구석구석 들추어 내며 두려움을 주고 가장 오만하고 대담한 도인의 심령까지 "그의 앞에 그의 죄를 차례로 제시하고" 그에게 "주님의 두려우심"을 보여 줌으로 공포에 떨게 한다.

(2) 자연 상태의 양심의 작용. 양심이 자극을 받아 각성될 때 그 양심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 추함과 위험함을 인식케 하여 영혼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 세상에서 권능자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이같이 스스로 공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기대만 해도 가장 용감한 마음가운데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그것이 임하는 날에는 "용사와 고관들이" 헛되이 이르기를 "

바위와 산들아 우리를 가려다오"라고 할 것이다.

4. 바울에게서 들은 얘기를 깨끗이 잊고 그의 확신에 찬 말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벨릭스의 노력. 그는 바울의 기소자들에게 바울의 재판을 연기하였듯이 바울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만류하였다(25절). 그는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하였다.

(1) 그는 두려워하였을 뿐 그것으로 끝났다. 바울의 두려움(9:6)과 간수의 두려움(16:27)은 회개의 열매를 맺었으나 벨릭스의 두려움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죄와 더불어 짝하여 죄를 사랑하는 생활을 지속한다.

(2) 벨릭스는 바울의 확신어린 말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그는 말씀에 대해 또는 그 말씀의 전도자에게 정면으로 싸워 바울이 그의 양심을 괴롭힌 데 대해 보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샤가 선지자에게 "잠잠하라. 네가 얻어 맞으려고 하느냐?"라고 말하였듯이 바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을 엄히 가두겠다거나(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하였던 것처럼) 자기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고 해서 그를 죽이겠노라고 위협하지 않았다.

(3) 그러나 벨릭스는 말씀의 경고를 다른 때로 연기함으로써 고의적으로 바울의 확신아린 전도를 기피하였다. 그는 바울이 말한 바에 대하여 발대할 것이 없었다. 그의 말은 무게있는 말이었고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빛을 못갚은 빛장이처럼 다른 날로 미루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바울도 말을 하느라 지쳤고 또 그의 말은 총독과 그의 아내를 피곤케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시방은 가라. 지금은 용무가 급하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그러나 내가 틈이 있으면 즉 할 일이 없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리고 그 때 너의 말을 좀 더 듣겠다"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많은 사람들은 시기적절한 때를 놓침으로써 자기의 죄를 회개함으로 얻을 모든 유익을 잃고 만다는 사실이다. 만약 벨릭스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바울과 간수가 두려움을 느꼈을 때 물었던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리이까"하고 물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며 벨릭스는 영복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바울의 권면을 떨쳐 버리므로 그는 믿을 기회를 영원히 놓쳤고 그와 함께 자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연기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자기의 회개를 자꾸자꾸 미루는 일보다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지금 믿지는 않으면서 언제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러이러한 일이 끝나면 또는 이번 사건이 해결되면 좀더 나이가 먹으면 하는 말로 자꾸 연기한다. 그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될 때 믿겠다고 연기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서 믿으려는 마음은 식어지고 점점 줄어든다. 좋은 뜻에서 세운 의도가 후에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은 좀 더 악에 깊이 빠지게 된다. 벨릭스는 이 문제를 좀 더 적당한 때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그때보다 더 좋은 기회는 결코 없었으리라. 사탄은 주어진 현재에 우리를 속이므로 결국은 항상 우리를 속인다. 지금이 시간이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적절한 때이다. 그러므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보라, 오늘은 그의 음성을 들을 때로다"고 말씀되었던 것이다.

Ⅳ. 결국 벨릭스는 바울을 다시 가두었다. 그리고 이 년 후 자기가 총독이 소임을 다하고 떠날 때까지 바울을 구류하여 두었던 것이다(26, 27절). 벨릭스는 바울이 사형을 받거나 구류를 당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마음으로 확신하면서도 바울을 석방할 만큼의 용기는 지니지 못하였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의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만 자신의 부정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워하였을 뿐이었다. 이같이 벨릭스는 자기의 명백한 불의를 고집하였던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우리는 벨릭스가 무슨 목적으로 바울과 대화를 나누려 하였는가 하는 의도를 엿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벨릭스의 더 한층 악한 일면을 들어내 주는 것이었다.

1. 그는 바울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하였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려 하지 않은 것은 바울을 그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해서였다. 또한 그는 바울의 친구들이 돈을 지불하고 바울의 자유를 사가기를 바래서 바울을 억류하고 있었다. 그는 바울을 석방하되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심도 채우고 또한 바울을 놓아 주었다는 양심의 자부감도 맛보기를 원했다. 벨릭스는 재판으로 돈을 버는 일 이외에는 재판관으로서의 의무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바울에게서" 또는 그를 위하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였다." 그는 돈을 받은 후에 바울을 자유로이 석방할려는 속셈이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벨릭스는 바울을 죄수로 구류하여 두었다. 그리고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였다." 그가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이제 이미 벨릭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울 또한 이러한 주제를 되풀이 얘기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바울의 석방에 대해서 또는 그를 석방하는 대가로 필요한 보석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하였다. 벨릭스는 자기가 바울을 놓아 주는 대가로 자기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바울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의 의향을 떠보기 위하여 그에게 자주 가서 바울로 하여금 "내가 놓여나는데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를 묻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에 바울에게 약속하고 또 스스로도 다짐하기를 다른 적절한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좀더 듣기를 바라노라고 하였었다. 이제 이 문제를 상론할 수 있는 수많은 적절한 기회가 있는데도 그는 이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울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었고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함이 아니었다. 신앙을 대수롭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야 자기들이 원할 때 마음대로 받을 수 있노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나의 영이 더 이상 너희를 돌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목소리가 자기를 부르시고 있는 오늘에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마음이 죄의 궤홀에 의하여 더욱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바울은 한 가난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자유의 대가로 지불할 은이나 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의 안전을 바라는 사람 중에 그를 금전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 가난한 성도들을 석방한 대가로 많은 돈을 모았던 그였으므로 그가 돈 많은 성도가 바울의 석방의 대가로 돈을 내놓기를 기대하였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필자는 어째서 돈있는 성도들이 바울을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기이하게 생각한다. 바울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 벨릭스에게 돈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고 또 그를 위해 교회의 돈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될 수 있지만(바울의 위대하고 고귀한 영혼은 그 두 가지 일을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그를 석방하고자 돈을 쓰려 하지 않은 것이 이해될 수 없으며 또 합당한 처사인지는 수긍이 안 간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집요하게 바울을 해하려고 총독에게 간청하였듯이 그들을 마땅히 총독에게 바울을 위하여 그의 석방을 집요하게 요청하였어야 했다. (또한 솔로몬이 말했듯이) 만약 그들이 자유로이 관청을 출입하며 고위층에게 접근하기 위해 뇌물이 필요했다면 그들은 선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그렇게 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필자는 불의한 일에 대하여 사람을 매수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윗 사람이 의당해 주어야 할 공의로운 일인데도 돈을 받지 않고는 안해 주려고 한다면 내가 그에게 돈을 주어서 그 일을 이루려 한다고 해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마땅히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데도 안한다면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가이사랴의 유족한 성도들이 바울과 같이 유능하고 뛰어난 인물을 옥 속에 방치해 두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노를 느낀다.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그를 옥에서 내올 수 있고 그로 하여금 다시 그의 사명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이 지금 갇혀 있는 곳인 가이사랴의 교인들은 바울이 잡히러 가려고 갈 때 눈물로 만류하였었다(21:13). 그리고서도 그들은 바울의 석방을 위해 자기의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갇힌 바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계속 구류당하고 있어야만 하였으리라. 그러나 섭리가 그렇다고 해서 벨릭스의 행위가 정당시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석방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거나 받지 않고 결백한 사람을 석방시켜 주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뇌물을 받지 않고는 옳은 일을 행하지 않으려는 재판관은 의심할 여지없이 뇌물만 받으면 나쁜 일도 서슴치 않을 사람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2. 그는 인간을 기쁘게 하려고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다. 벨릭스는 이 일이 있은 지 이 년 후에 그의 임기가 끝났다. 그리고 보르기오 베스도가 그의 후임으로 왔다. 그는 자기 임기를 끝내면서 바울을 석방하므로 자기 재판 임무를 완결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을 구류하여 둔 채로 떠났다." 본문에서 제시된 그의 조처의 이유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였다." 비록 벨릭스는 유대인을 기쁘게 해 주려고 바울을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더 이상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그를 계속 가두어 놓았다. 벨릭스는 자기가 유대인들의 뜻을 거스려 행한 많은 잘못을 보상하려는 바람에서 바울을 계속 구류시켜 놓았다. 벨릭스는 바울이 모든 정당성이나 법 정신에 위배하여 자기를 그렇게 오랜 동안 감금하였다고 해서 법정에서 자기에 대하여 불평을 털어 놓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벨릭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두려워하였다. 그는 그들이 혹시나 자기가 그들에게 행한 불의에 대하여 황제에게 자기를 고소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을 계속 구류시킴으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번 비열한 짓을 행한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려고 더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벨릭스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았었다면 이러한 조치를 취하므로 그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바라는 바는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유대인들은 그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를 황제에게 고소하였고 어떤 역사가들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그는 베스도에 의하여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의 억류를 가벼이 여겼던 그의 판단이 자기의 사슬을 무겁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목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지만 악을 행하여 인간을 기쁘게 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자들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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