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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바울의 첫 번째 자기 변명(1)(사도행전 22:1, 2)

2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폭도들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조용케 하였다. 이제 그후 그가 어떻게 하였는가를 본문에서 살펴 보자.

Ⅰ. 바울이 설교할 때에 지닌 경탄할 만한 침착성과 마음의 평온. 이 가련한 분은 군중들의 소요에 자극을 받아 더 요란스러운 태도를 취하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그가 말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볼 수 있다.

1. 그의 말에는 어떤 공포심도 없었다. 그의 태도는 진지하고 침착하였다. 그는 "그 무엇도 나를 요동케 할 수 없다"는 자세로 말하였다. 또한 그는 다윗이(시 3:6)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였듯이 그러한 태도로 말하였다.

2. 그의 말에는 분노의 기미가 없었다. 그에 대한 고소는 모두 무근거하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하여 경의를 표명하고자 한 자기를 붙잡아다가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고통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잠잠하였다."

Ⅱ.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칭한 존경어린 칭호. 또한 그의 말을 들어달라는 그의 겸손한 간청.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1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말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결코 예의에 벗어나게 말하지 않으니라. 그러니 너희 연만한 제사장들과 나와 같은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한다. 그는 그들을 이같이 칭함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도 그들 중의 그리하여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유대 나라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저희에게 알리었다. 비록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아첨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경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누구에게나 선을 행하고 상대방을 격노케 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바울은 그들의 손에서 놓여나 천부장의 보호함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는 그들에게 "이 반역자들아 내 말 좀 들으라"는 식으로 폭언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존경하는 자세로 "부형들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군중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가 너희들의 태도에 대하여 할 말이 있으니 들으라"고 하지 않고 "내가 자신에 대하여 변명하려는데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내 말을 들으라"(1절)고 하였다. 그의 요구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요구였다. 왜냐하면 고소된 모든 사람은 송사에 대하여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의 변명을 상대방이 인내심을 가지고 공정하게 듣지 않는다면 재판을 그에게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그가 사용한 말. 그의 말은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히브리어로 말하였다." 즉 유대인들의 통속어로 말하였다. 그 당시의 히브리어는 순수한 구약 시대의 히브리어가 아니고 히브리어의 파생어인 시리아어였다. 또는 그것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태리어처럼 순수성을 상실한 것이었다. 여하간 그가 히브리어로 말한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이 사실은 그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계속하여 존경함을 보여 주었다. 비록 그는 이방인들과 오랫 동안 사귀어 에 대하여 지만 아직도 바울은 유대인의 언어를 잊지 않고 쉽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가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그를 유대인임을 명백히 밝혀 주었다. 왜냐하면 "언어는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2. 바울이 말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언어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히브리어로 이야기한 것이 무리들의 마음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히브리어를 사용함으로써 군중들이 관심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2절)고 하였다. 군중들이 알지 못하는 말로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을 듣고 놀랐다(21:37). 한편 유대인들은 바울이 히브리어를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여하튼 그의 언어 때문에 양자가 다 바울을 좀더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여러 가지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그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얼마나 많은 현명하고 선한 인물들이 사람들이 그들을 몰이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소홀히 취급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22:2 없음.

 

22:3

바울의 첫 번째 자기 변명(2)(사도행전 22:3-21)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에 대해 변명한다. 그의 변명은 천부장으로 하여금 자기를 이집트인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안도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자기 유대 교회와 나라에 대한 반역자가 아니며 유대의 성전과 율법에 대한 적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명하여 그들을 안도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설교하였으며 특히 이방인에게 한다는 것 때문에 그를 유대인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의 소명에 의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Ⅰ. 그의 혈통과 교육.

1. 그는 자기가 그들과 같은 민족에 속한 자로서 "이스라엘에 속하여 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출신이 불분명하거나 다른 민족의 출신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a.nh.r Goudai/oj - 즉 나는 참으로 유대인이다. 진짜 유대인이다. 뿐만 아니라 나도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금수처럼 취급하지 말아라. 또한 나는 유대인이요, 야만인이 아니다. 나도 너희와 같이 조국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나도 이 민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너희 성전과 율법의 영광을 부당하게 훼손하였다면 내 스스로 내 손으로 나의 둥지를 헐어버리는 짓과 같은 것이다."

2. 바울은 자기가, 잘 알려진 곳인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났음과 또한 그 도시의 자유민으로 태어났음을 말한다. 바울은 일부 흩어진 유대인들이 겪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점잖은 가문의 출신이었다. 또한 바울은 자기가 오래되고 명예로운 도시의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를 오만한 자세로 유린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마치 그 사람들은 바울을 천치의 자식인 것처럼, 노예의 자식인 것처럼, 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욥 30:8).

3. 그는 자신이 배운 사람이며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음을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명문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자였다. 바울은 유대의 학문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가말리엘은 그들 모두가 잘 아는 저명한 유대의 율법 학자였다. 또한 바울 자신이 율법 교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무지하지도 않았고 또 그가 율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의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교육을 하였다. 그것은 그를 바리새인으로 만들 계획에서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양육을 받았다는 본문의 말을 그가 가말리엘 생도라는 뜻 뿐 아니라 그가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열심과 끈기로 그의 강의를 듣고 그를 배웠고 그에게 순종하였다는 말로 이해를 한다. 즉 그들은 바울이 마치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앉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듯이" 가말리엘이 한 말을 남김없이 이해하려고 한 모범생이라고 본다.

4.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는 유대교에 대해 열성적이고 뛰어난 선봉자였다고 말한다. 그가 공부한 것과 배운 바 모든 것이 바울을 그럴 길로 인도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유대인의 종교적 규례에 대하여 불만을 품기는 커녕 당시에 젊은이들 가운데 그처럼 율법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스스로 엄격히 그것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가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데 열심인 젊은이는 없었다.

(1) 바울은 명석한 유대교 신봉자였으며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말리엘에게 배우는 일에 전념하였고 거기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바울이 율법에서 이탈하게 된 것은 율법을 오해하였거나 그것에 대해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kata. akri,beian - 즉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에 따라서 배워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방임주의 교육 방침에 따라 교육받은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에게 사두개인과 같은 점도 없었다. 오로지 바울은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것을 가장 열심히 지키려 하며 규정한 것 이상으로 그것을 지키고자 하여 율법에다 그들에게 전해져 왔고 또 그들의 후손들에 전해 줄 장로들의 유전과 조상들의 유훈까지 지키는 파에 속해 있었다. 바울은 옛 것과 전통과 교회의 권위와 그 밖의 전해 내려온 것들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바울만큼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고 또 그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2) 바울은 그들 종교에 대해 활동적인 선봉자였고 또 그 종교를 사랑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말한다. 신앙의 이론적인 면에 밝은 사람은 대부분 실행이 없고 실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법이다. 그러나 바울은 랍비였을 뿐만 아니라 열심 당원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율법이 금지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고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일을 행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이 열심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는 그의 청중들을 찬양하여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오늘 너희 모두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었듯이 나도 그러하였노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그들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너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고 하였다. 군중들은 전에 그를 미워하여 없이 하고자 "여호와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라"(사 66:5)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의 분노가 정당화될 수는 결코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희가 하는 일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이 오늘날 열심인 것처럼" 그렇게 그가 전에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께 열심이었음을 고백한 것은 그들이 지금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열심이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을 나타낸 것이었다.

Ⅱ. 무섭도록 열심스러운 박해자였던 바울. 그는 초창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대단한 박해자였다(4, 5절). 그가 이 사실을 말한 것은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가 얼마나 놀랍고 명백한 것이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였었다. 왜냐하면 전에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이거나 긍정적 생각을 전혀 지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갑작스런 변화가 있기 전까지 바울은 기독교에 대하여 가장 지독한 혐오감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적대적인 분노에 가득 차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아마 바울이 이 사실을 설명한 것은 자기의 그런 박해자였으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늘날과 같은 시련을 주심은 당연한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박해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박해하도록 놓아두신다. 그리고 때가 되시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응징하시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이 말을 한 의도는 이들 무리들로 회개하게 하고 또 회개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신성 모독자요 박해자였으나 그럼에도 자비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박해자였을 때의 자신을 묘사한 말을 그려보자.

1. 바울은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를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이 도(道)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4절). 즉 그는 "내가 이 도(道)를 따르는 자들을 할 수 있는 한 죽이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9:1)라고 하였다. 또 "많은 성도를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다"고 하였다(26:10). 그는 이 도(道)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였을 뿐 아니라 그 도(道) 자체를 핍박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낙인 찍었다. 바울은 그 종교를 박해하여 없애버릴 것을 목적하였다. 어떤 이는 본문을 "그가 이 도(道)를 죽기 살기로 박해하였다"고 해석하여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죽는 일이 있어도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라도 기독교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2. 바울은 기독교도들에게 공포를 주어 그들을 기독교에서 몰아 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 그는 감옥을 그리스도인으로 꽉 채웠다. 그러나 이제 바울 자신이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는 죄를 범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을 규탄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가 남자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배려와 따뜻함으로 대우하여 주어야 할 연약한 여지들까지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것을 특별히 후회스러운 태도로 말한다.

3. 바울은 산헤드린 회의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하여 이 새로운 종교를 핍박하는 그들의 대리권자로 임명을 받았었다. 바울은 전에도 그가 기독교에 대적하여 열심이었다는 증거를 하였다(5절). 바울이 기독교를 제지하는 일은 무엇이고 하려 하였다는 것은 대체사장이 증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다메섹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혹독하게 다스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때 그들은 바울만큼 이 일에 적격이고 또 전념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가는 공문을 주어 파송하였다. 여기서 다메섹의 유대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은 모두 한 핏줄이었고 또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로 그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는 일에 바울을 협조케 하기 위해서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들 변절자들을 이스라엘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배를 버린 자로서 처벌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잡아 오려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기독교를 버리게 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사울은 "교회의 파괴자"이었으며 그가 좀 더 기독교를 박해했다면 기독교는 파멸되고 근절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도 지금 너희들과 같이 처음에는 그러하였다. 나는 박해자들의 심령을 안다. 그러므로 너희들을 동정하고 너희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하셨듯이 회개한 자의 심령을 알게 되도록 간구한다. 도대체 나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한 자가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

Ⅲ. 그가 회심하여 오늘날의 바울이 된 경위. 그것은 어떤 자연적이거나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색다른 거에 마음이 끌려 종교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옛 것을 사랑하고 귀하여 여겼다. 또한 그가 자신의 출세가 생각보다 더디었기 때문에 불만을 품고 바꾼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바울은 어느 때보다도 더 유대교에서 출세할 기회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바꾸어 보려는 희망이나 야심이나 욕심이 있어서 종교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 그는 온갖 치욕과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울이 회심 전에 사도들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사도들의 간계와 궤변에 빠져 그가 넘어간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되어진 상황은 그의 변화를 충분히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변화된 것을 정죄하는 것은 바로 그가 지금 그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신의 능력을 비웃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전에 대한 것과 같은(9장) 자기의 회심의 사실을 매우 상세하게 술회한다. 그리고 그가 얘기한 것은 그의 회심이 오로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1.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로잡으시기 바로 직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는 여행을 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다"(6절). 그리고 그는 그에게 부과된 잔혹한 임무를 집행하는데 대한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가련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조그마한 연민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들은 다만 이단의 무리들이요, 교회 분열론자요, 유대 교회와 국가에 대한 위험스러운 적들일 뿐이었다.

2. 처음으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하늘로부터 비춘 빛"이었다. 그 빛은 대단히 밝은 빛으로써 "갑자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또 천사들은 빛의 천사들이고 대낮에 태양 광선을 능가할 만치 밝게 빛나는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쳐 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만일 그 빛이 골방에서 그에게 비추었다면 그에게 빛이 비추었다는 말은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대로(大路) 상에서 정오에 그에게 비쳤고 그 빛이 너무도 강열하여서 "그는 땅에 엎드려졌고(7절) 또한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도"땅에 엎드려졌다(26:14). 주님께서 빛 가운데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그들 중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3.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처음으로 두려운 생각을 품게 한 것은 "하늘로부터의 음성"이었다. 이전에 바울은 이 예수에 대하여 혐오하였고 악의에 찬 생각만을 품고 있었고 그 외에는 어떤 생각도 갖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그 음성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음성은 함께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그에게 들려진 것이었다. 그 음성은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어 왔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주여 뉘시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하여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답변이 주어졌다(8절). 이 답변을 통하여 나타난 것은 그들이 또한 지금 박해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하늘에서 말씀하신 그분이며 그러한 분에게 그들이 저항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히 12:25).

4. 하늘에서 주어진 빛과 음성이 바울에게는 이 같은 변화를 일으켰으나 왜 그와 함께 여행한 자들에게는 역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된다(하지만 아마도 놀라운 경험이 그들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을 보았고" 또 그들이 하늘로부터 내려 온 불에 의하여 타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아마도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이 아님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을 전주하러 갈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섬광이 번쩍거리는 칼을 든 천사를 만나게 되리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그들을 두렵게도 하였지만 그들은 바울에게 주어진 음성은 듣지 못하였다. 즉 그들은 그 말을 분명히 분별하여 듣지 못하였다. 이제 이 사실을 통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와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직접 주어지는 그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는 즉석에서의 변화가 있었으나 오직 빛만 보는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변화가 후에 그들에게도 역시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겠다.

5.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이같이 놀라고 난 후 자신이 온전히 신의 인도에 자기를 맡겼음을 그들에게 확증한다. 그는 그 일이 있은 직 후 곧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지 않았다. 다만 그는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하늘에서의 당신의 음성이 나로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셨사오니 이제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해 주소서(10절). 주여 내가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하소서. 내가 그렇게 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즉시 다메섹으로 가면 거기서 그에게 말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의 말을 듣도록 하라니 지시를 받았다. 하늘에서의 음성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더 이상 하늘로부터의 말을 들으려 하지 말라. 다메섹에 가면 너와 같은 성정을 지닌 한 사람이 지금 너에게 말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일러 주리라"고 하였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환상이나 또는 천사의 현현을 통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신의 계시는 성서의 말씀이나 목회자의 지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도록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또 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계시는 신앙이 확립 되어지고 나면 대체로 사라지는 것이 통례였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해 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청하여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였듯이 바울에게 들려진 음성도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에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면 거기서 그에게 말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주시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명(失明)은 불신의 유대인들의 경우와 같이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과 같이 구원받을 죄인들은 흑암에 의하여 실명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하여 실명한다. 그들은 빛을 본 당장에는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장님의 눈에 흙을 개어 바른 것이 장님의 눈의 치료를 위한 방법이었듯이 그들의 일시적인 어두움은 그들의 영원한 "눈뜸"을 위해서이다.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바울의 경우와는 달리 그 빛의 직사광선을 얼굴에 받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과 같이 눈이 멀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에 일어난 결과를 생각할 때 바울의 처지가 그들의 처지 보다 훨씬 복된 것이었다. 이제 저희는 볼 수가 있었으므로 "바울을 인도하여 성으로 데려 갔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그의 영적 개안(開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이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롬 2:19)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바울은 육체의 눈이 멀게 되자 자신의 영적인 설명 상태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 관하여 그가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는 "깨달음이 없이 살아 왔음을" 알았다(롬 7:9).

Ⅳ. 바울이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그가 해야 할 것에 대한 지시. 이 모든 것은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에 의해 그에게 깨우쳐진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본문에 제시된 아나니아의 특징. 그는 유대 민족이나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나쁜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유대인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전에 유대교로 개종한 자였을 것이고 그러므로 경건한 자라고 칭함을 받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나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바르게 생활하였으므로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바울이 진심으로 사귀게 된 첫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렇다고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그들이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기듯이 율법과 성전을 멸시하라고 선동한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2. 아나니아는 바울의 눈을 즉시 고쳐 주었다. 그 기적은 바울에게 아나이아에 대한 신뢰를 굳게 해 주었다. 이로써 바울은 아나니아가 그에게 말한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와서(13절) 자기가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그에게 왔음을 말하였다(그를 상하게 하신 분이 또한 그를 치료하시고, 때리신 분이 그 상처를 싸매 주시며, 그를 실명케 하신 분이 그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되 전보다 더욱 그를 복되게 하시었다). 아나니아는 "그의 곁에 서서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고 말하였다. 이 말과 함께 능력이 그에게서 나와 그 시각에 즉시 바울은 시력을 회복하고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에게서 주어지는 지시를 받았다.

3.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주 예수께서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특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1) 이 사실은 바울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사실에서 분명하여진다(14절). 그러므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였다"고 하였다. 그에게 들려진 능력있는 부름은 그에 대한 특별한 선택의 결과였다. 본문에서 그가 하나님을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아 아나니아 자신이 본래 유대인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그는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고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또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것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바라셔서였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신 것은 너를 통하여 그가 이루기를 바라시는 그의 뜻 또한 너에게 아루시려고 하시는 그의 섭리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택하사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뜻을 네게 알리셨다. 즉 인간을 통해서거나 인간의 지식을 통해 알리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직접 알리시었다(갈 1:1, 22)"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사람들이 그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를 바래서 그들을 선택하신다.

[2] 바울이 "저 의인을 보고 또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기를" 바라서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직접 그에게서 바울이 듣기를 바라서였다. 이것이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특별한 방법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바울에게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지상에서 뵈옵게 하신 것은 특별하신 은총이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바울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신 것을 보았다.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명예를 입은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전 15:8)고 술회하였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저 의인"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의로우신 그리스도이시나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택하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 곧 선하신 그의 뜻을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이 사실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신 사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난다(15절).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그의 증인이 될 것이다. 너 자신이 불 기둥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는 viva voce - 즉 입으로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너는 그의 복음을 선포할 것이다. 또한 네가 경험한 그 능력과 너를 변화시키신 그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즉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다. 바울이 본문과 또 26장에서 자신에 대하여 변명하면서 그의 회심의 경위를 이토록 상세하게 술회한 것을 보아 그가 다른 사람의 회개를 위하여 복음을 전할 때 그의 회심한 같은 내용을 자주 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였고 또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무엇인가 행하시리라는 소망을 그들에게 불어 넣어 주었다.

4.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줌으로 그가 주 예수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또 격려한다(19절). 그러므로 그는 바울에게 "일어나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다. 바울은 할례를 받으므로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세례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 따라 기독교 신앙과 또 그로 인한 특권들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이 세례는 그의 회심 후 즉시 행하여졌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할례를 받은 외에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믿음의 자손들에게는 할례 대신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가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자손에게 믿음을 통해 얻은 의의 인침이 되었듯이 세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의롭다함의 봉인"이 되기 때문이다.

(1)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증되는 위대한 복음의 특권은 죄의 사유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한 것이다. 즉 그 뜻은 이러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주어지는 죄의 용서의 위로를 받으라. 또 죄의 용서를 위해 그의 의를 붙잡으라. 그리고 너의 타락을 막기 위해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을 받으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씻김을 받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의롭게 되고 성화된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6:11).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 행위(sign)에만 의지하지 말고 세례가 의도하는 바를 깨달아 더러운 죄를 벗어 버리자.

(2)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이 부여하는 큰 의무는 "주의 이름 곧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요 또한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 살며 그를 영예롭게 하고 우리의 간구를 그에게 아뢰는 것이다.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로 부르짖었듯이)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고전 1:2).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또한 그와 그의 의를 의지함으로 우리 죄의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즉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3)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죄를 씻는 일을 서둘러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왜 주저하느뇨?"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일은 꼭 있어져야 할 일이요, 지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필요성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기에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계약을 맺는 일은 급박한 것이기에 지연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젠가 이루어져야 할 일은 즉시 실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Ⅴ.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그에게 사명이 위임된 경위.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사실이 그들이 그에게 화를 내는 큰 이유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이 사명을 특별한 방법으로 전수받았고 이로써 신의 보증이 주어졌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은 회심 후 즉시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방인 사도의 사명을 받은 것은 "예루살렘에서"였고 그는 삼 년 또는 그 이상이 지나기까지(갈 1:18) 그곳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본문에서 전해지고 있는 환상을 본 것인지 또는 그 후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여하간 바울은 가능한 한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된 사실을 수긍시키기 위하여 다음의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1. 그는 이 사명을 그가 기도할 때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일을 알려 주시고 그가 나가야 할 길을 보여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었다 (그가 기도한 때의 정황은 지금 그가 향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문제삼고 있는 좀전의 바울의 성전에서의 기도와 비슷한 정황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도 "그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라고 명시하여 놓고 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성전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해야 하는 곳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곳이다. 이제 바울의 성전에서의 기도는 그들이 악의에 의해 암시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뜻에서의 기도였음이 명백하여졌다. 그는 저들이 하는 것처럼 성전을 우상처럼 받들지는 않았으나 성전을 존경하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그에게 이 사명을 주신 것은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는 것이 결코 성전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다만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에 의하여 그의 사명을 성전을 모독하는 것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이방인에 대한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생각은 바울이 후에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2. 그는 환상 가운데서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의 그의 외적인 감각은 모두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삼층천에 들리워 올리웠을 때"처럼 황홀경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이 비몽사몽 가운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다. 그것은 그의 회심할 때처럼 육신의 눈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의 눈을 통해 뵈온 것이었다(18절).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규례를 전하여 받을 때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뵈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으로 가라는 사명을 주시기 전에 바울에게 그의 예루살렘에서 선을 이루려는 생각은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방인에게로 보내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의 사역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해 주는 도구가 되기 위하여 희망에 가득 차서 예루살렘에 왔다. 그리고 아마도 당시 그가 위하여 기도한 제목은 바로 그가 교육을 받고 또 잘 아는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그리스도에로 이끄는 일이 주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저들을 위하여 특별히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의도를 거부하셨다. 그리고 그는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너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유리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너에 대하여 적대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누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냐를 미리 아시는 동시에 또한 그것을 거부할 자들이 누구인지도 아신다.

4.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를 예루살렘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그들이 회심 전의 자기가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를 알겠기에 그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변화를 그들이 보면 전능하신 은총의 능력을 찬양할 것이요 따라서 자기의 증언을 그들에 크게 존경할 것이라고 주님께 말씀했다. 이 같이 그는 자신의 생각이 자기에게나 주님을 위해서나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19, 2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그들은 내가 전에 그들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주를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 누구보다도 지독한 대적자였음을 아나이다. 그들은 내가 믿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경찰력을 동원하였고, 믿는 자들을 가두고 또 믿는 자들에 대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박해하고 회당에서 그들을 때린 것을 아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당신의 은총에 호감을 갖고 있음을 전한다고 해서 나의 전함을(다른 사역자들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그들이 그리하였듯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에 특별히 스데반의 경우를 통하여 이전의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더 내가 전하는 복음을 존경할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돌을 맞을 때 내가 그의 곁에 서서 그들의 행위를 돕고 그들을 선동하고 그를 죽일 것을 승낙한 것과 그 표시로 내가 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의 뜻을 맡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스데반이 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그 가르침을 전한다면 틀림 없이 그들은 나의 증언을 받아들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니다, 그들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규례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여겨 박해가 덜하겠지만 네 경우에는 배신자라고 하여 더욱 분개할 것이다"고 하신다.

5.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간구는 무시되고 즉시 그에게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지시가 주어졌다(21절).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그들이 간구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더라도 보다 좋은 것으로 주시므로 은혜로이 응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거하리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삭으로 응답해 주셨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바울로 하나님께서 Nimiun Sensibile la dit sensum - 즉 그 광채가 그를 눈부시게 하였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소돔에 애굽의 사람들이 흑암의 세력에 의하여 앞을 볼 수 없었듯이 앞을 못보게 된다.

6. 바울은 그를 사로잡은 빛의 위력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 빛으로 그의 시력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11절).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빛은 즉시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영혼을 회개케 하는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다, 너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해야 하리라. 또는 결혼한 여인의 자녀보다 버림받은 자녀들을 위해 일해야 하리라"고 하신다.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사역할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비록 그의 뜻이 그들의 의도와 상치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역자들은 그가 정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 온당한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바랐다. 그는 거기서 전도자가 되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셨다. 그는 (다른 사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요 4:38)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곳으로 보냄을 받지 않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그리스도가 불리워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롬 15:20). 이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자주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계획된 것 보다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을 유업을 택하실 것이다." 바울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는 사명을 받지 않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자.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내시면 그의 성령께서 바울과 동행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그를 인도하시며 그를 지지하시고 그에게 그의 수고의 결심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더 멀리 보냄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야 할 길은 전혀 다른 길이었고 그가 할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바울이 유대와 인접한 곳에 이방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완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은 유대 인접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불쾌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보건데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그들이 그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 그들이 그의 행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로운 행위가 된다고 혐의를 둘 이유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절대적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2:4 없음.

 

22:5 없음.

 

22:6 없음.

 

22:7 없음.

 

22:8 없음.

 

22:9 없음.

 

22:10 없음.

 

22:11 없음.

 

22:12 없음.

 

22:13 없음.

 

22:14 없음.

 

22:15 없음.

 

22:16 없음.

 

22:17 없음.

 

22:18 없음.

 

22:19 없음.

 

22:20 없음.

 

22:21 없음.

 

22:22

바울의 첫 번째 자기 변명(3)(사도행전 22:22-30)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계속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것이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마 이제 바울은 이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자 계획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즉 그가 어떻게 해서 안디옥에서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아 그의 임무를 떠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그가 유대인들에 대하여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존경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과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고 하였는가를 말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를 들어서 쓰셨느냐는 것과 또 그의 한 일이 유대 교회의 진정한 유익을 조금도 손상시킴이 없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있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보탬이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개의치 않고 더 이상 그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말하는 것까지는 들었으나" 그 다음은 난동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또 간혹 주의하여 그의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이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을 말하였을 때(사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한 말씀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를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이라는 칭호도 듣기 싫다는 듯이 또는 그들에게 원심과 질투가 대단한 것을 보이려는 듯이 바울의 이 말에 들고 일어났다. 이방인에 대하여 그가 보냄을 받은 것이 언급되자 그들은 자제력을 잃었다. 그리고 모든 예의 범절을 잊어 버렸다. 이같이 그들은 "백성 아닌 자들에 대해 시기를 일으켰던 것이다"(롬 10:19). 이제 우리는 바울에 대한 무리들의 분노와 광란이 어떠했는가를 전해 듣게 된다. 즉 그들은 이방인들도 신의 은총의 나태 안에 인도되었을 것과 그가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그들은 열화같이 일어났다.

Ⅰ. 그들은 바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여 소리지름으로 바울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의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였다. 성이 난 사람은 조금만 발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어도 걷어 차버린다. 이성에 의하여 자신을 규제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기들의 이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라 하더라도 듣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사역자들을 잠잠케 하고 입을 다물게 하므로 듣기 싫은 것을 표시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하였듯이 말이다. 바로 그들의 조상이 훌륭한 선지자들을 향해 "선견하지 말라"고 하였었다(사 30:10). 또한 그들의 조상들은 가장 훌륭한 선지자에게 "말을 그치라 네가 매를 맞으려고 그러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그들이 그들의 조상을 닮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것이다.

Ⅱ. 그들은 바울을 살려둘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소동을 부렸다. 그들은 바울의 자신에 대한 항변을 무시해 버리고 또 그가 아무런 답변도 그들에게 못하도록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제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척 하다니 이 놈은 살려 둘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그들의 세대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의 짐스러운 인물이요 그들의 시대에 염병인 것으로 무리들에게 대접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최대로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생명이 무가치한 생명으로 간주되는 것을 보게 된다. 좋은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유의하자.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선한 사람들은 다같이 이 세상을 그들이 오래 살아야 할 곳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8)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옮겨지는 것이며 세상은 그들을 잃어버리므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본문에서 불경건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세상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서 옮겨질 것이다. 이로써 세상은 땅에 있는 자들이 두 선지자들에 대하여 그런 것처럼(계 2:10) 짐이 가볍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다.

Ⅲ. 군중들은 바울에 대하여 또한 그들의 요구에 따라 그를 즉시 죽이지도 않고 또 그들이 없애도록 그들에게 던져 주지도 않은 천부장에 대하여 미친 듯이 광분하여 날뛰었다(23절). 그들은 흥분으로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자들과 같았다. 또한 그들은 포효하는 사자처럼 또는 성난 곰처럼 부르짖었고 석양에 울어대는 이리떼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오기만 한다면 그렇게 찢어 죽이겠다는 듯이 그들의 옷을 벗어 난폭하게 찢어 버렸다. 또는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던짐으로 스데반을 돌로 친 자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 던졌듯이 바울을 돌로 칠 태세가 되어 있음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20절). 또는 그들은 마치 그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들의 옷을 찢고" 또 그의 말에 대한 증오의 표시로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다." 또는 저들의 이러한 짓거리는 천부장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그를 돌로 칠 만반의 태세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자신이 그들의 분노를 터뜨린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은데 구태여 그런 이유를 찾아 내고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그들의 저의는 천부장에게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부장에게 자신들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를 없애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Ⅳ. 천부장은 그를 성으로 데려 가라고 명령하여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였다(24절). 감옥은 때때로 분노한 군중에게서 선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피난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울의 수한이 끝날 때는 아직 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증언을 다 마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친구 중 아무도 그를 위하여 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있을 때 그를 보호할 사람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사악한 자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마소서"라고 한 신앙인은 고백하였다.

Ⅴ. 천부장은 바울에게 태형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것은 무리들로 이토록 격심하게 그를 향해 격분하게 한 바울의 극심한 죄가 무엇인지를 그에게 자백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여 신문하라 하였다"고 전해 주고 있다(24절). 천부장이 일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정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는 야단법썩을 떨고 있는 불평 분자를 몇 명을 끄집어내어 공안을 해친 자로서 영문에 잡아다가 그들을 심문하고 또 채찍을 때려서 이토록 자신의 정당함을 명백히 밝히고 있고 또 죽이거나 구속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그들이 해를 가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문초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가 그들에게 묻지 않고 바울에게 "무슨 일로 그를 향하여 떠드는가를 알려 한 것은" 전혀 부당한 처사였다. 천부장은 그들에게 바울이 처벌할 만한 아무 잘못도 그들에게 한 것이 없노라고 말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원인은 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이 죄가 있다고 해도 그를 고문하여 그에게 죄를 자백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본인이 무죄한대도 그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부장은 유대인의 기질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그토록 소란을 떠는 것을 보니 바울에게 어떤 죄가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없는 주 예수에 대하여서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렇게 외치기는 하였으나 재판관이 "너희가 어찌하여 이리하는가? 그가 무슨 악을 행하였는가?"라는 질문에는 한 마디도 답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을 향하여 난폭하게 광분해서 날뛸 뿐 무슨 이유로 그들이 그를 향하여 그렇게 하는지 설명하지도 못하는 자들은 놔두고 바울에게는 채찍을 때려 자백하라고 강요하였으니 이것은 결코 정당한 재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Ⅵ. 바울은 로마 시인으로서의 그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 호소에 의해 바울은 그에 대한 모든 심문과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흉악범을 자백시키기 위하여 유치장으로 데려다 그들을 다루듯이 채찍을 하기 위해 죄인을 매다는 기둥에다 가죽끈으로 그를 묶었었다. 그러나 바울은 무고한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한다고 항의하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게 로마의 시민인 그를 죄도 밝히지 않고 벌하는 것을 불법적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켰다. 이러한 태도는 바울이 이전에 빌립보에서 채찍질을 당한 후 취한 것과 같은 태도였다(16:37). 그러나 빌립보에서는 채찍을 잠은 후 그리하였지만 본문에서 그는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 이 말을 하였다. 바울은 곁에 섰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법을 아는가? 그래 로마 사람인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우리는 그의 말하는 태도에서 이 훌륭한 인물이 거룩한 안도와 마음의 평온을 누리고 있었고 그에게 행해지는 모든 불의의 한가운데서 또 그가 처한 위험 속에서도 마음의 동요를 받아 분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엿보게 된다. 로마인들은(lex semprona라고 칭하는) 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어느 재판관이든지 indicta causa - 즉 죄인 자신의 자신에 대한 증언을 들어 보지 않거나 사건의 전말을 완전히 파악함이 없이 로마의 자유인을 때리거나 죄 줄 수 없다는 법이었다. 만약 그가 그랬을 경우에는 그 재판관은 그들의 자유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민중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누구든지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사람에게는 있다. 영국인도 대헌장에 의하여 열두 명의 배심원이 정죄하지 않는 한 그의 생명이나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Ⅶ. 천부장은 이 말을 듣고 놀랐으며 두려워하였다. 그는 바울이 반동적인 애굽인인 줄 알았고 그러기에 그가 헬라말을 하였을 때 기이하게 생각하였었다(21:37). 그러나 바울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로마의 신사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 그는 더욱 더 놀랐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멸을 받는지 또 만물 가운데 더러운 찌꺼기처럼 취급당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취급한 사람들이 만약 저들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저들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천부장은 자기를 수종하는 하급장교인 백부장을 거느리고 있었다(21:32). 이들 백부장들 중의 하나가 이 사실을 천부장에게 보고하였다(26절).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우리가 그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로마 시민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로마인들은 모두 로마 시민의 긍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제 본문의 천부장의 일행은 로마 시민들이 이 특권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를 알고 있었다. 툴리(Tully)라는 사람은 베레스(Verres)를 논박하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찬양한다. O homen dulce libert atis ojus eximum nos tro civit atis! O lex porcia oleges semproniae fiacinus est vincere Romanum civem scelus verberare - 즉 오 자유여! 나는 너의 매력적인 이름을 사랑하노라. 또한 우리 표시아와 셈프로니아의 법은 얼마나 훌륭한가? 로마 시민을 묶는 짓은 죄악이며 더구나 로마 시민을 때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이러한 뜻으로 백부장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좀 진정하고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십시오. 만일 이 사람이 로마인인데 우리가 그에게 모욕적인 일을 행했다면 최소한도 우리의 직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요."

1.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사람이냐는 것을 직접 본인에게서 듣기를 원한다(27절).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말하라, 네가 로마 사람이냐? 네가 로마 시민의 특권을 획득하였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그러하다"라고 답변한다. 그들은 마치 바울에게서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증명서라도 제시해야 믿지 그의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바울에게 엄히 말하였다.

2. 천부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게 자기와 바울의 경우를 비교하였다. 그 결과 바울이 지닌 시민권은 천부장이 지닌 것보다 두 가지 관점에서 더 영예로운 것임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을 돈을 주고 샀기 때문이다. "나도 로마 시민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돈을 주고 그것을 샀다. 나는 많은 돈을 지불하여 그것을 샀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가?"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나는 나면서부터로라"고 답변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다소 태생으로써 그 태어난 장소 덕분으로 그가 시민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즉 다소는 로마와 꼭 같은 특권이 황제에 의해 허락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시저와 안토니오의 사이에 있었던 전쟁이나 혹은 다른 로마의 내전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운데 대한 보상으로 시민권을 얻었고 그러므로 이 특권이 나면서부터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로마 시민권을 지닌 사실을 내세운다. 우리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 할 것이다.

3. 로마 시민권으로 바울은 즉시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그를 채찍질하여 죄가 있는가를 조사하려던 사람들은 그 장소를 떠났다. 그러므로 본문에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났다"(29절)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들도 로마 시민을 때린 책임을 질까 보아서였다. 천부장 본인까지도 천부장답지 않게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바울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사람을 때리려고 받아 묶었기 때문에 그의 나쁜 행동을 그치지는 않아도 사람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악행을 자제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법이나 재판관이 주는 유익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해 우리는 감사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 특별한 보호나 지시를 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사이에 문제를 공정히 취급한다는 원칙에 따라 법률과 그 치리자들은 악하고 몰지각한 불법자들의 날뜀을 저지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악한들은 겁없이 날뛰면서 세상을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당국자들에게 이같은 신세를 짐으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당연히 우리는 그들에게 이러한 보호를 기대할 권리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질서를 지키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치리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였다(딤전 2:1, 2, 4)

4. 천부장은 다음날 바울을 산헤드린 앞에 데라고 갔다(30절). 천부장은 "바울의 결박을 풀었다." 그렇게 한 것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바울에 대해 나쁜 선입관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자신이 로마 시민을 구속했다는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그는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회원들을 소집하여 바울의 사건을 심리하도록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천부장은 이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였음을 알았고 그러므로 그는 산헤드린 회의가 이 문제를 다룰 적임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갈리오 총독은 이러한 경우에 처했을 때 그것이 유대인 자신의 문제인 줄 알고 바울을 방면했었다. 그리고 그는 고소자들을 재판정에서 다 내어몰았었다(18:16).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전혀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로마인은 군인이었기에 폭도들로부터 빼앗아 보호하였다가 공회에 그의 문제를 넘겼다.

(1) 천부장이 바울을 안전하게 하려는 선의에서 이같이 하였다면 얼마나 다행이었겠는가! 즉 그가 만약 바울이 무죄이며 흠이 없다면 비록 대중들은 바울을 대적하여 소란을 피웠다 할지라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를 공정하게 다룰 것이고 그러면 그의 결백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그를 공회에 넘겼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이다. 즉 그가 산헤드린 회원들을 사려 깊은 사람들로서 또 그들의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으로써 능히 생각할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사실 선지자가 하류민들 가운데서 선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는 하류민들은 "주의 법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본문의 천부장이 그랬듯이 고관들에게 가서 호소를 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고관들에게 가서도 역시 실망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저희는 하류민이나 고관이나 다같이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자들이었던 것이다"(렘 5:5).

(2) 사실 천부장은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를 공회에 넘겼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그 실상을 알고자 하였다." 만약 천부장이 바울을 가지의 사무실로 데려가서 그와 자유롭게 이야기하였다면 그는 곧 바울에게서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이상의 사실을 배웠을 것이고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인이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는 위인들이란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줄 사람들을 멀리 하는 것이 통례이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화제거리를 얻는 것 이상은 알려 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22:23 없음.

 

22:24 없음.

 

22:25 없음.

 

22:26 없음.

 

22:27 없음.

 

22:28 없음.

 

22:29 없음.

 

22:3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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