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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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바울의 에베소 작별(사도행전 20:1-6)

바울의 이러한 여행에 대하여서는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만일 그 여행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즉 금박 활자로 써서 기념할 만한 가치가있는 것들을 다 기록하려고 하였다면 그 기록된 책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만 사건의 윤곽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보다 귀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Ⅰ. 바울의 에베소 작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임명된 이래 그가 어느 딴 곳에서 체류하였던 것보다 더 오랫 동안 에베소에 체제하였다. 그러기에 이제는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도시에서도 역시 그가 복음을 전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이후, 성서에 기록된 그의 생애의 여정의 마지막까지(성서야 말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전부의 자료이다) 우리는 바울이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 사실이라든가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롬 15:20). 왜냐하면 다음 21장 끝 장면에서 우리는 바울이 죄수가 된 사실을 알게 되며, 그는 본서가 끝날 때까지 죄수로 계속 남아 있었다.

1. 바울은 반란이 진정된 후 곧 에베소를 떠났다. 바울은 그곳에서 당한 방해 소동을 그로 하여금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는 섭리의 지시로써 간주하였다(1절). 바울의 퇴각은 그의 적들의 분노를 어느 정도 진정시켰고 또한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Currenti cede furofc - 즉 폭풍우 속에서는 누워있는 것이 좋다는 말과 같다.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첫 편지를 썼고 그렇기에 고린도 전서에 그가 언급하고 있는 그의 에베소에서의 "사나운 맹수와의 싸움은" 이 폭동의 비유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맹수와 싸웠다"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 바울은 놀라움에 가득 차서 갑작스럽게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진지하게 작별하였다. 바울은 그곳 교회 회중의 지도자급인"그의 제자들을 그에게로 불러" 초대 교회의 관습 대로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으로 그들과 작별하였다"("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으로 작별하였다"는 것은 시리아 사본이 전해 주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은 그들이 헤어질 때까지는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헤어질 때서야 그들이 서로의 심정 속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던가 하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Ⅱ. 그의 헬라 교회들의 방문. 이 교회들은 그가 심고 한 번 이상 물을 준 교회들로 그의 심정에 늘 떠나지 않고 가까이 있었던 교회들이었다.

1. 바울은 먼저 "마게도냐로" 갔다(1절). 그것은 그 폭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가 가고 자 계획했던 곳이었다(19:21). 그곳에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들을 방문하였으며 "그들에게 많은 격려를 하였다"(2절). 바울의 그의 친구들에 대한 방문은 전도 방문이었다. 그의 설교는 광범하고도 풍부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시간에 인색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에게 많은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이 행할 많은 의무들을 권하였다. 그리고(어떤 이가 원문을 그렇게 해석하듯) "여러 이유를 들어" 그들을 권면하였다. 바울은 그의 권유를 여러 가지 다양한 동기와 근거를 들어 강조하였다.

2. 바울은 "헬라에 석 달을 머물러 있었다"(2, 3절). 어떤 사람은 바울이 그리스 중에서도 특히 "아가야"에 주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가야도 역시 바울이 가고자 했던 것이며, 그는 그곳의 고린도와 그 주변 지방을 돌아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21). 바울은 그곳에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많은 권고를 하였으며함께 그들을 지시하고 확신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굳게 의지하도록 종용하였음에 틀림 없었으리라.

Ⅲ. 바울의 여정 변경. 우리는 언제나 우리들의 목적을 그대로 관철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예기치 못했던 돌발 사건이 우리로 계획을 변경케 하고 따라서 우리의 목적하는 것은 늘 변경의 여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1. "바울은 배를 타고 수리아로 들어가서 안디옥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을 봉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곳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여행 중에는 그곳을 경유할 수 있도록 여행 과정을 들릴 수 있게끔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계획을 바꾸어 그가 왔던 길인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2. 그 이유는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가 언제나 다니던 경로대로 여행을 할 줄 알고 길목에서 지키다가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에 반대하도록 폭도들이나 행정관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그 일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끔 바울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자주 세웠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돈을 강탈하기 위하여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얼마나 지독하게 악의를 품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그들이 바울의 돈이 아니라 바울의 피에 주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Ⅳ. 바울이 아시아로 갔을 때 그의 여행에 동행한 동료들. 그들의 이름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4절). 그들 아직 몇 사람은 사역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사역자들이었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는 로마서 16장 2절에 언급된 사람인 "소시바더"와 같은 사람인 것 같다. 그들 가운데는 "디모데"도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비록 에베소를 떠나면서(1절)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었고 그 후에 바울은 그곳에 있는 그에게 그의 맨 처음 편지를 써보냈지만 그는 곧 바울을 따라 와서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과 함께 바울을 수행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에게 복음 전도자로서 그곳에 있는 교회를 어떻게 정착시키며 또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지시했다(딤전 1:3; 3:14, 15 참조). 그 편지는 디모데에게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가 지금 머물러 있는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에베소에 머물게 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유하게 되며 또는 전도자로서 그가 파송되기도 할 여러 곳에 가서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는 편지였다(그리고 디모데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바울에 속해 있으면서 마찬가지 방법으로 수고하는 모든 다른 복음 전도자들에게도 주는 지시였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값있게 쓰일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바울을 수행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있는 곳보다 그가 없는 곳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였다.

1. 그들은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각성되고 새로워진 사람들을 그가 가르치는 일에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가는 어느 곳에서나 실로암 연못의 물결은 요동을 하였고 따라서 온갖 불구자들을 치유의 물에 집어 넣을 많은 조력자가 요구되었던 것이다(역주:바울의 치유의 능력을 상징화한 것임). 쇠는 뜨겁게 달구어져 있을 때 두둘겨야 하는 것이다.

2. 그들이 그에 의해 훈련되어져 미래의 섬김에 적합하게 되고 그들로 "그의 교훈과 행실을 완전히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딤후 3:10). 당시 바울은 허약했고 피곤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수행하며 그를 도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을 외모에 의해 판단해 버리기 쉬운 외인들에게 바울에게는 외모로 보아서는 쉽게 발견도지 않는 참된 가치있는 것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리고 또 바울의 능력을 그들이 선포할 필요도 있었다.

Ⅴ. 바울은 드로아에 왔다. 드로아는 바울이 그의 친구들과 합류하기로 정한 곳이었다.

1. 그들은 드로아에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렸다(5절). 그것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였다. 드로비모는 특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사모하였다(21:19). 우리들은 좋은 동료와 여행하기 위하여 잠시 지체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바울은 그곳으로 서둘러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누가가 이제는 바울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본서의 저자가 "우리는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라"고 말하므로 자기까지 포함시켜 우리라고 말하였기 때문이고(6절) 그리고 누가가 처음으로 바울을 사귀게 된 곳도 바로 드로아였다는 사실 때문이다(16:11). 본문에 "무교절"이 언급된 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유월절을 준수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가 무교절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당시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그의 첫 번째 편지를 기록하였으며, 거기서 고린도 교회에게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유월절이시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우리들의 무교절이라는 것과(고전 5:7, 8) 또 본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은 배를 타고 "닷세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곳에 와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들은 복음을 전도하는 일을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하느라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시간은 그냥 낭비된 시간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드로아로 가는데 "닷새"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서둘렀지만 그는 드로아에 오직 이레 동안만 마물러 있으며 휴식을 취했다. 바울은 여행하는 시간을 절약하여 그 시간을 유익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또한 그러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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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없음.

 

20:7

드로아에서의 바울의 전도와 유두고의 소생(사도행전 20:7-12)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러 있던 칠일 가운데 마지막날 그곳에서 발생하였던 일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Ⅰ. 그곳에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하고 신앙적인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은 그들이 변치않는 관례였고 또한 모든 교회들의 관례였다.

1.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7절). 비록 그들은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통하여 그들의 교통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일치하여 하나님께 예배했으며, 또한 상호간의 유대와 도움에 의해서 서로의 친교를 유지했고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과의 영적인 친교를 그들이 나누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모여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한 장소에 모두 모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도록 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이 "주의 날이라고 불렀던"(계 1:10) "안식 후 첫날 함께 모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정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모두 일주일의 첫날에 일어났고 이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이 날(안식후 첫날)이 되자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이 이 날 모이는 관습이 모든 교회들에게 선례가 되었다. 한 주일의 첫날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 의해서 신앙으로 지켜져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이 날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의 계약의 징표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날을 지킴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엄숙한 집회를 가짐으로 지켜졌다. 이 집회는 그의 사역자들과 그의 궁전의 청지기들에 의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또한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준수되었다. 그리스도로부터 위임을 받고 그리스도 아래로 불리움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날을 지키고 섬길 의무가 있으며 이 날에 그들은 주의 궁정의 하인으로 섬길 의무가 있는 것이다. 주일의 첫날은 하나님의 날로 정해진 날이었다.

3. "그들은 윗 다락에 함께 모였다"(8절). 그들은 함께 만날 수 있는 성전도 회당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위용을 갖춘 교회당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 집의 다락방에서 모였다. 사실 그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곳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커다란 집회 장소를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비천하고 불편한 장소일 망정 함께 모였다. 우리들의 집회 장소가 우리가 바라던 것만큼 화려하고 널찍한 장소가 아니라고 하여 우리 자신이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그들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다. 왜냐하면 떡을 떼는 상징적 의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하였다. 떡을 떼므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다는 뜻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들 영혼의 약식이 되고 기쁨이 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서는 매 주일마다 성만찬을 나누는 것이 많은 교회의 관례였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경건한 집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만찬을 행하므로 그들이 같은 신앙과 예배 속에 함께 결합하고 있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Ⅱ. 이 집회 때 바울은 그들에게 설교하였다. 그것은 긴 설교였고 또한 고별 설교였다(7절).

1. 바울은 그들에게 설교했다. 그러므로 본문이 "바울이 그들에게 강론했다"고 하였다. 비록 그들은 이미 제자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지식과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성찬식에는 복음의 전파가 동반되야 한다는 사실을 주의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들에게 낭독하여 들리고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렸고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7, 8)고 하였다.

2. 그것은 고별 설교였다. 그는 "이튿날 떠나고자 하고 있었다." 바울이 그곳을 떠난다 해도 그들은 같은 복음을 전하여 듣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설교한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수 있을 동안 바울의 설교를 할 수 있는 한 들으려 했다. 고별 설교는 언제나 그 특별한 의미 때문에 설교자와 청중들을 같이 감동하게 한다.

3. 그것은 매우 긴 설교였다. 그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해야 할 말이 많았고 또한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그가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주의 만찬을 받은 후에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성만찬을 받으므로 행해야 하는 의무와 또한 이로써 그들이 받게 될 위로를 전해 주었다. 그는 이 사실들을 광범위하고 완전하게 상세히 전하였다. 사역자들은 "때를 얻어서" 설교할 때도 있겠으나 "때를 못 얻은 경우라도" 설교할 경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장황한 설교를 통하여 그의 청중들을 지치게 한 바울을 비난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듣기를 원했었다. 바울은 그렇게 갈망하고 있는 그들을 보았기에 그의 말을 계속한 것이었다. 바울은 "밤중까지 그 설교를 계속하였다." 아마 그들은 초저녁에 은밀히 모였을 것이다. 혹은 그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주일) 저녁에 함께 모였던 제자들의 모범에 따라서 초저녁에 모였을 것이다. 아마 바울이 오전에도 그들에게 설교하였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저녁 설교를 밤중까지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 장시간의 설교의 요절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요점이 그의 서신들과 같은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회합이 밤중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등이 준비되고 많은 불을 켰다(8절). 이렇게 많은 불을 켠 것은 청중들이 바울이 인용하는 성서를 찾아 "그러한 말들이 진정 그러한가"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불을 킨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적들이 그를 보고 밤에 모여서 "어둠의 일"(좋지 않은 행위)을 한다는 비난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Ⅲ. 이 회중 가운데 설교 중에 졸던 "한 청년이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되었다." 그의 이름은 "유두고"로 been fortunateg - 즉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과연 그는 그의 이름에 일치하는 사건을 경험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가 지닌 결점. 그가 소년이었지만 부모들이 그를 집회에 데리고 온 것같이 여겨진다. 그의 부모들은 바울과 같은 설교자에 의해 아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배우게 되기를 바랐기에 그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곧 그들을 데려다 설교를 듣게 해야한다(느 8:2). 그러므로 "유아들"일지라도 데리고 와야 한다(신 29:11)고 했다. 그런데 이제 이 청년은 다음과 같응 이유들로 해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1) 그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즉 그가 건방지게도 "창에 걸터 앉았다는" 점이다. 아마 그가 걸터 앉은 곳은 유리도 끼우지 않은 창이었으므로 그의 몸이 바깥으로 노출되었던 것 같다. 만일 그가 마루에 앉는 것에 만족할수 있었다면 그는 안전하였을 것이다.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위대하게 하고 그의 부모들에게 슬픔을 주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역시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2) 그가 비난을 받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졸았다는 점이다. 그는 졸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설교를 하고 있는 동안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러한 사실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그가 바울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유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졸음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때가 저녁 식사 후였고 또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사마들은 어느 누구도 졸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 청년은 곧 곯아 떨어졌다(본문 대로 하면). 그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 사실은 그가 졸음과 싸웠으나 그것에 압도되어 버렸고 결국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2. 이로써 그가 당하게 된 재난. "그는 삼층 누에서 떨어졌고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허락에 의해 사탄이 그 사건 속에서 역사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사탄은 의 회합을 방해하고 바울과 그 사건에 대하여 비난하고자 이러한 짓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였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우리는 이 사실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졸음을 악한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업신여긴다는 나쁜 징조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들이 얻을 이익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졸음을 두려워해야 하며 졸음을 극복하기 위해 또한 잠에 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잠이 감히 접근할 수 없도록 심취하여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 "깨어 기도함으로 우리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졸음은 더 큰 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유두고가 당한 징계를 우리들은 경고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배하는 일을 얼마나 중시하시는지를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속이지 말지니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하찮은 일 같고 또 어리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나 엄격하게 부정 행위를 벌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주의하자. 그러므로 "어느 누가 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리요?"라고 말씀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의 이야기는 예레미야의 비탄과 부합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렘 9:20, 21).

3. 기적적인 자비가 그 청년에게 일어나 그는 "다시 살아났다"(10절). 그의 죽음은 즉시 회중들에게 혼란을 주었으며 바울의 설교를 중단시키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바울의 설교가 더욱 확신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또한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더욱 바울의 설교를 효과적이게 하는 기회가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1) "바울은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다." 그럼으로써 이 청년에 대한 깊은 연민과 그를 위한 사랑이 넘치는 관심을 표현했다. 바울은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전혀 유념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일을 당한 것은 당연하였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바울과 같은 부드러운 심정의 소유자는 이러한 사고를 애석하게 여기며 이러한 사고를 당한 자들을 판단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하셨다(눅 13:4).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을 애석하게 여긴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엘리야나(왕상 17:21) 엘리사(왕상 4:34)가 하였듯이 그에게 엎드리어 그를 안았다. 이것은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 죽은 시체에 어떠한 능력을 기여하는 방법으로써 한 것이 아니라 죽은 시체 위에 생명을 소생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상징으로써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속으로 간절히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2)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 결과가 당장 일어란 것이라고 확언했다. 우리들은 이 불의의 사고가 회중들 사이에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일으키게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모든 생각을 종식시키었다. "떠들지 말라. 이 일 때문에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고 서두르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다. 그를 침대에 잠시 눕혀 놓으면 곧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을 때도 그는 "아버지, 나의 간구를 아버지께서 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3) 바울은 곧 다시 설교를 계속했다(11절). 그는 모임에 "다시 올라가서" 애찬의 떡을 나누었다. 제자들은 서로 간의 친교와 우의에 대한 확인으로써 이 성만찬을 늘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오랫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였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강론을 하지 않고 동료들과 선한 일과 교화하는 방법에 대하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의는 거룩함과 위안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증진하는 뛰어난 방법의 하나이다. 그들은 언제 다시 바울을 만나게 될 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회가 있는 동안 바울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서는 하룻밤의 잠을 잃어버리는 것쯤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4)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그 회중 속으로 "사람들이 살아 난 아이를 데리고 에 대하여 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다시 살아 난 것을 축하하였고, 그들은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다"(12절). 그것은 그들 가운데 큰 기쁨이 되었다. 그 청년의 연고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그것은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에게 비난을 던졌을 사람들의 비난을 막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복음을 믿게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기 때문이었다.

 

20:8 없음.

 

20:9 없음.

 

20:10 없음.

 

20:11 없음.

 

20:12 없음.

 

20:13

바울의 항해(사도행전 20:13-16)

바울은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wvj eu paro,dw - 즉 육로를 택하였다. 바울은 드로아에 들려 그곳에서 선한 일을 하였다. 이제 바울은 해안을 따라 배로 여행하면서 가까운 항구마다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상인들은 이곳 저곳을 가며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무역 항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그곳을 복음을 변모시키고자 시도하였다. 모든 선한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Ⅰ. 바울은 그의 동료들을 배로 앗소로 보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도보로 가고자 하였다"(13절). 바울은 아무리 급하더라도 무언가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작정하였다. 그는 배로 여행함으로 주어지는 편안함이나 또는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점을 마다하고 도보로 앗소까지 가려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바울이 택한 육로가 지름길이라 할지라도 사실 그러한 율로는 거칠고 사나운 길임을 고대인들은 언급하였다(호머의 일리아드 6권에 또한 고대 교부인 에우스타터우스가 바울에 대한언급한 말 가운데 Lorin in Locum - 즉 도보로 앗소로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길을 택한 것이다. 바울은 왜 그러한 길을 택한 것일까?

1. 바울은 도중에 그의 친구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고자 하여 육로를 택했다. 즉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성도들의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통하여 그의 위대한 주님을 섬기고 그의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 혹은, 혼자있게 됨으로써 그의 고독 가운데서 보다 자유롭게 하나님과 또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기 위해서 그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러한 욕망에 자신이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과 혼자서도 즐거워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다.

3. 아니면 바울은 안일에 탐닉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가끔 자원하여 고행과 자기 부정에 "자신의 몸을 복종시켰고 몸을 그러한 역경으로 끌어 넣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고난에로 부름을 받게 되었을 때 좀더 쉽게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딤후 2:3).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Ⅱ. 앗소에서 바울은 배를 타서 그의 친구들과 합류하였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그를 "베에 올렸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때까지의 도보 여행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자신이 다른 방법으로 여행을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바울은 더 이상 육로로 갈 수 없었고 해로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고 나서는 곧 자신도 그들의 뒤를 따랐으며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자 제자들은 곧 그를 배에 올렸다(마 14:22-33).

Ⅲ. 바울은 서둘러서 예루살렘을 향해 갔다. 그의 배는 기오를 통과했고(15절) 사모에 들렀다(이러한 소들은 헬라의 시인들이나 역사가들 같은 저술가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그들은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드로길리움(Trogylium)에 잠시 체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밀레도에 도착했다." 그 항구는 에베소 곁에 있는 항구였다(16절). 바울은 에베소에 가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그곳에 가면 그곳의 동료들이 강제로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이요 또한 그들과 얼마 동안 같이 있자는 그들의 주장을 그가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그가 그곳에 체류하지 않으려고 작정했다가 막상 그곳에 가서 있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양 4, 5년 전이었다(18:21, 22). 그러기에 이제 그곳에 가서 다시 그곳 교회에 대한 그의 일관된 존경을 표시하고자 했으며 이로써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 전도하는 그의 사명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평을 듣지 않고자 하였다. 바울은 오순절 축제에는 예루살렘에 있고자 하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바울이 모든 곳으로부터 절기에 참여하기 위하여 몰려 올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 가운에 복음을 전파할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오순절은 성령이 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기억할 만한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바울의 태도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사업가들은 사업가다운 생활을 위해 훈련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사업을 원할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섭리에 순응하여) 때를 정하고 사업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우리들이 가장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일을 제일 먼저 착수하고 그것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감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일은 못하더라도 친구와 지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친구 때문에 우리들의 임무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아시아에 많은 친절한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루이는 하늘 나라에 가서야 그렇게 되리라고 소망한다.

 

20:14 없음.

 

20:15 없음.

 

20:16 없음.

 

20:17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연설(사도행전 20:17-35)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탄 배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참석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배였던 것같이 보인다. 그러기에 바울의 의사에 따라서 머물러 있거나 항해하거나 하였던 것 같다.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하자 하선하여 그곳에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의 장로들을 그에게로 오게 하였다. 만약 그가 에베소로 직접 갔었더라면 바울은 그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로들은 바울의 안수에 의하여 성령을 받은 열두 사람이라고 생각한다(19:6). 그러나 이 열두 사람 이외에도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와 그 주변 지역의 교회들을 봉사하기 위하여 임명한 장로들도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부르러 보낸 것은 그들이 시작한 그들의 일을 계속하게끔 그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준 교훈을 자기들이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이곳 밀레도에서 장로들에게 전날 고별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고 또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 훌륭한 사람의 뛰어난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다.

Ⅰ.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에베소에 또 그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안의 그의 생활과 가르침을 상기시킨다(18절). "내가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과 또 사도의 직분을 어떻게 행하였는가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말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언급은 자신이 받은 사명과 그가 그들 가운데 전도했던 가르침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모두 바울이 열성적이며, 은혜롭고, 거룩한 정신의 소유자며, 유혹하는 자들과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계획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아니고서는 그의 섬김과 고난의 인내를 한결같이 지속할 수 없었다. 그의 성품, 그의 설교와 생활은 진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정신 이상의 영에 의하여 고무되고 생기를 받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바울은 또한 그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본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들의 손에 이제 그 일들이 맡겨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의 실례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알고 있다. 내 자신이 한 사람의 사역자로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안다. 내가 떠난 후에 너희가 나와 같이 너희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대하며 가르치도록 하라(빌 4:9). 너희는 내게 본 바를 행하라"고 그는 말한다.

1. 그의 정신과 생활은 뛰어난 것이었고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알았으며, 바울이 그들을 향해서 얼마나 순수하고 경건하고 진실함으로 행하였는가 하는 것과(고후 1:12) 얼마나 거룩하게,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비난을 받지 않게 바울은 스스로 행동하였으며 그가 그들에게 얼마나 신사적으로 행동하였던 것인가(살전 2:7, 10)를 알았다.

(1) 바울은 한결같이 모범적으로 행동하였다. 즉 "그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그의 행동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들 가운데서의 그의 생활 태도는 어느 누구도 흠 잡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가 나타난 첫날부터 그들은 그가 어느 곳에 가든지 선하게 생활할 뿐 아니라 또한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함을 목표로 삼는 사람임을 알았다. 바울은 모든 행동에서 겉과 속이 다른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를 어느 곳에 데려다 논다고 하여도 바울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바람부는 데 따라서 또는 기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물건을 찍어내는 틀처럼 일정하였다.

(2) 바울은 주를 섬기고 하나님의 명예와 그리스도의 이익을 증진시키며 그들 가운데 세워진 그의 왕국을 증진시키는 일을 자기 전업으로 여겼다. 그는 결코 자신을 섬기지 않았으며, 인간들의 종이나 또는 그들의 육욕과 변덕의 종으로 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며, 기회주의자 노릇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바울은 주를 섬기는 일을 그의 전업으로 여겼다. 그의 사역과 전 생활 속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입증하였다(롬 1:1).

(3) 바울은 그의 일을 meta pashj tapeinofrsh,nhj - 즉 모든 겸손으로 행하였다. 즉 겸양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행하였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 풍성한 영예를 부여한 사람이었고 그것에 의하여 많은 유익한 일을 행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코 우쭐해 하거나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았으며 가장 천한 사람들과도 자유롭고 친밀하게 대화하였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그들과 같이 천한 자리에 섬으로써 그들에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섬김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었으며 그들이 원하는 데 따라서 자신이나 자신의 수고를 낮게 조절하였다. 주님을 섬기는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섬김이 주님에게 용납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거이 되기 위하여서는 온갖 겸손함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마 20:26, 27)

(4)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언제나 온유했고 사랑이 많았고 동정심이 많았다. 그는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그의 주님과 비슷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또한 그는 "눈물로 탄원했다."(호 12:5). 바울이 전에 그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설교하면서도 그는 눈물로 그리하였다(빌 3:18). 비록 바울이 그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지만 그들은 너무도 그의 마음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우는 사람과 같이 눈물을 흘렸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로 호소하였다.

(5)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많은 난관들과 투쟁했다. 그는 많은 반대와 맞서서 또한 "많은 유혹"과 그의 인내와 용기를 시험하려는 시험과 맞서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낙심이 때로는 심하여 그는 예레미야가 이러한 경우에 직면하여 말하였듯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렘 20:8, 9)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간계에 의해서" 이러한 모든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적대하여 어떤 계략이나 음모를 꾸몄다. 고난과 위험의 한가운데서도 계속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인하여 적수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신실한 주의 종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를 통해서만이 그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자신들을 증명할 수 있으며 주님을 그의 친구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눈물은 그가 받은 시험 때문에 연유된 것이다. 그의 당한 고난은 그에게 선한 열심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2. 그는 마땅히 있어져야 할 것만 전하였다(20, 21절). 바울은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에베소에 왔고 또한 그는 그들과 그리고 자기에게 이 일을 맡기신 분에게 충실하였다.

(1) 바울은 평이하게 설교하는 전도자였으며 그는 그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실은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었고 가르쳐 주었다는 두 마디 말 속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그럴듯한 말장난으로 그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으며 고고한 개념이나 말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의 명백한 진리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또한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어린이들을 가르치듯이 가르쳤다. 나는 너희들에게 진정한 행복의 올바른 길을 보여 주었고 너희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걷도록 가르쳐 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2) 바울은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행한 그의 "증언" 가운데서 암시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설교하는 진리에 대하여 충분히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를 열망하였으며, 그것에 의해 그들이 영향을 받고 통치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념에 변함이 없이 전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도했다. 그것을 그는 행상들이 거리에서 물건을 선전하듯이 한 것이 아니라(행상들에게는 물건이 진짜냐 가짜냐는 문제가 안 된다) 법정에 선 사람이 증언함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증언해야 하듯이 그렇게 진지하고 관심 있는 태도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언으로써 전파하였다. 만일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증언이 될 것이요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들에게 저주가 되는 증언이 될 것이다.

(3) 바울은 유익한 설교자였다. 바울이 전도함에 있어서 목적한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것은 그들을 현명하고 선하게 하며 또 그것을 더욱 증진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받을 심판을 알려 주고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모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바울은 "ta sumfe onta" 즉 그들의 영혼에 성령의 빛과 열기와 능력을 공급할 "그러한 것들을" 설교했다.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설교하려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은 다만 오류를 범하게 하고 죄 속에서 더욱 강퍅해지도록 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유익한 것을 설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은 듣기에 즐거운 것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유익이 될 것만을 전하였고 또 유익이 될 때에만 우스운 소리도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가르치는 분이라고 하였다(사 48:17).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4) 바울은 근면한 전도자였다. 그는 그의 일에 있어서 매우 성실하고 끈기가 있었다.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전도의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피하여 일부러 골방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만 있는 곳을 찾아다니느라고 개별적인 교훈의 기회를 등한히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공중 앞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의 노고를 과분하게 소모하게 된 것을 아까와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풀밭에 모인 군중들에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또한 허약하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가가호호를 찾아 다녔다. 바울은 한 임무를 행할 때 그것 때문에 다른 임무가 등한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역자들은 사적인 방문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들이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들에 대하여 토론하고 그것들을 되풀이하여 차근차근 깨우치고 그리고 필요할 때는 "이러한 모든 것을 이해하겠는가?"하고 물어 보아서 그들에게 설명해 줄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사역자는 회중들로 그 진리를 자기 자신들과 그들의 경우에 적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5) 바울은 신실한 전도자였다. 그는 유익이 되는 것을 전도하였을 뿐 아니라, 유익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전했다. 비록 이러한 전도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고통을 치르게 하며 또는 어떤 사람들을 격분시키거나 그 자신을 그들의 악의에 노출시키는 입장에 몰아 넣더라도 그는 아무 것도 감추어 두지 않았다. 바울은 그가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시대에 뒤지거나 어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무엇이나 설교하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바울은 책망할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이 상대방에게 유익이 될 때에는 책망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상대방의 비위를 건드리까 보아 두려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십자가 의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보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교의 선교사들이 최근에 중국에서 선교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러한 점에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6) 바울은 포괄적인 설교자였다.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증거하였다." 비록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그 나라를 사랑하였고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 속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한정시키고 이방인들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기꺼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였다. 반대로 그는 비록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고 그 점에서 유대인들이 그에게 뼈속 깊은 적의를 품고 있었고 그에게 많은 악행을 차례로 가하였으며 에베소에서는 계속적으로 그를 해할 음모를 꾸몄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로 간주하여 저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위하여 계속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었다. 사역자들은 공평하게 복음을 전도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이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es)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이다.

(7) 바울은 진정한 기독교 복음주의적 전도자였다. 바울은 철학적인 제개념이나 애매 모호한 논쟁점들을 전하지 않았고 정치에 대하여 논한다거나 혹은 국가나 시행정에 관한 것들을 간섭하지 않았다. 오직 그는 두 가지 커다란 복음의 은혜인 믿음과 회개를 설교하였다. 그리고 이 믿음과 회개의 특성과 그 필요성을 전하였다. 바울은 언제든지 이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

[1]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전하였다.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고 또한 더욱 끊임없는 단절로 치닫는 사람들은 참된 회개에 의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향하여 돌아서며, 그를 향하여 움직이고, 그에게로 재촉하여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은 회개를 우리가 복종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명령으로써(17:30) 전했다(26:20 에서 그가 이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회개를 "죄를 사하여"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선물이라고 전파하였다(5:31).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지시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회개에 의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지향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 삼아야 한다. 죄는 회개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포기되고 또 용서된다. 그 다음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음을 통해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회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주요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써 우리들의 구세주요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된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의로우심이 없이 회개한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이러한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같은 일들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들도 그와 같은 정신으로 안에서 그와 같이 보조를 맞추어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Ⅱ. 바울은 그의 앞에 놓인 예루살렘 여행에서 그가 고난을 당하고 고생을 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고 선언한다(22-24절). 그는 아시아에서의 박해가 두려워 그곳에서의 전도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결코 위험에 이르게 되면 겁쟁이처럼 도망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용사와 같이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으로 서둘러서 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두 가지 뜻 중에 한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이 그의 앞에 호일 어려움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다. 비록 그가 육신은 매여있지 않았으나 그는 심령의 매임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고난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는 매일 그 고난을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가난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그 자신들을 적응시키려고 노력함으로 심령이 가난한 생활을 하였듯이 바울도 심령에 매임을 받고 있었다.

둘째, 아니면 이 말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이 여행을 계속하라는 강한 충격을 그의 영이 받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간다. 즉 이 일은 내가 결행하기로 확고히 결정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지시와 영향에 의해서이다. 나는 성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이며 그가 나를 인도하는 대로 어느 곳이나 그를 따르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건이 그에게 떨어지게 될지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언제 그 고난이 일어날지 어떠한 이유에서 고난이 야기될 것인지 어떤 환경에서 그 고난은 일어나며 그 고난의 정도는 어떤 것인지를 하나님은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이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외 여행을 하게 될 때 우리들은 우리에게서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어느 낮 혹은 밤에 어느 시각에 무슨 일이 야기될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가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해 주시기를 바라자. 그리고 우리는 다만 그의 온전하신 뜻 안에 어떻게 하면 온전히 거랄 수 있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2. 그럼에도 바울은 그의 앞에 폭풍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통과해 지나가는 매 도시에서마다 예언자들이 성령에 힘입어 굴레와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고난을 예견하고 준비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경고 이외에도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고난 보다도 더 심하고 또 장기간이 될 특별한 고난이 그 앞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특별한 암시를 받고 있었다.

3. 바울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을 계속하고자 하는 용감하고 영웅적인 결단을 확고히 결행한다. 모든 도시에서마다 그의 귀에 울려오는 소리는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는" 불길한 예고였다(23절). 가련한 같은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 수고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에 대하여 그토록 나쁜 대우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감당하였다. 이제 바울이 어떻게 그것을 견디어내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는 것이 값있는 일일 것이다. 바울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이었다. 비록 그러하였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는 그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하면서 그가 부딪히는 모든 어려움들과 낙심을 관대하고 자비한 심정으로 무시해버렸다. 이 일에 대하여 그는 직접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24절) 바울은 어느 곳에서나 고집과 허세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거룩하고 겸손한 결의를 가지고 말한다. "그 어떤 고난도 나를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나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 일이 잘 끝날 때까지 계속하며 또 인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1) 우리가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부딪히게 될 어려움들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용기와 결단으로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그의 앞에 있음을 보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것들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고난도 나를 동요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oudenoo. lo,goh poioumai - 즉 나는 그러한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그의 마음 속에 품어 놓고 있지 않았다. 오직 그는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 대한생각만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러한 어느 것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었다.

[1] 닥쳐 올 고난들이 바울로 하여금 그의 일을 못하게 막지 못했다. 바울은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갈팡질팡하지 안하고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를 서인가를 아는 장소에서도 단호하게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2] 이 고난들이 바울의 위로를 침해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바울로 하여금 마지 못해서 그의 일에 임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는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그 고난을 유념하지 않은 사람과 같았다. 그는 인내 속에서 그의 영혼을 지켰고 슬플 때도 그는 언제나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정복자답게 행하였다. 하늘 나라에서 생활을 하게 될 사람들은 이 땅 위의 일반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지옥의 비참과 공포로 가득 찬 위협과 악의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어떠한 것들도 그들을 해칠 수 없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답게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요동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 본문은 우리에게 생활하면서 거룩한 것을 위하여 세상적인 것을 경시할 것과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며 또 거기서 위로를 얻을 것의 본을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은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말한다. 생명은 달콤한 것이며 본능적으로 우리들에게는 귀중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의 생명은 위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잃는다든가 영생을 얻는 데 장애를 받기 보다는 인간을 그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인간의 유업을 잘하시는 분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그리하여 다. 바울은 이러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즉 비록 자연인의 눈으로 볼 때 생명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 생명이란 영생과 비교 할 때 경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쓰여지지 않는 한 그렇게 귀한 것은 아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은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거기에 보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욥이나 예레미야같이 성급한 열정에 의하여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거룩한 복종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며 또한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보다는 그를 위하여 죽겠다는 결단을 지니라는 뜻에서인 것이다.

(3) 본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제일 관심을 둘 것은 거룩한 사업임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준다. 우리는 외적인 삶의 위로라든가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거룩한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축복을 받은 바울은 이 거룩한 일에 비하여 그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권능만을 의지하였다. 그는 non propter vitam vivend perdere causas - 즉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그의 생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바울은 기꺼이 그의 생명을 일하는 데 사용하였고 생명을 걸고 위험스러운 섬김의 일을 감당하였고 지나친 수고로 생명을 소진시켰다. 뿐만 아니라 순교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그의 출생과 세례의 취지 또한 그를 사도직에 서임한 취지에 일치하는 삶만을 오직 추구하였다. 이 위대한 유익한 사람이 걱정한 것은 오직 두 가지 문제였다. 만약 그가 그것들을 얻게 된다면 그는 그의 생명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았다.

[1] 그가 그에게 겨진 모든 일에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위하여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보다는 그가 위하여 보냄을 받은 교회를 위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하였다. 또한 그는 그의 사는 세대를 위한 섬김을 완수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그의 사역을 온전히 이룰 수 있으며 또 그 일을 철저히 수행할 수 있으며 계획대로 다른 사람으로 그의 사역으로 인한 득을 거두게 할 수 있는가를 염려했다. 또한 그는 두 증인들에 대하여 언급된 대로 그가 그의 증언을 완결할 것인가(계 11:7), 아니면 그의 일을 중도에서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염려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첫째, 사도직은 그리스도와 인간의 영혼이 둘을 함께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라는 점이다. 이 사도직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은 사도직의 위엄이나 지배권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도직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면 목사들이나 교사들은 더욱 그렇게 하고자 해야 할 것이며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사역은 "주 예수로부터 위임받은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들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은 그들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를 위하여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그의 이름과 권능 안에서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의 모든 이권을 양보해야 한다. 그들을 전도의 사역속에 밀어 넣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딤전 1:12). 그들로 전도 사업을 계속해서 수행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들은 그로부터 그의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받으며 사명 수행에서 부딪히는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받는 것이다.

셋째, 그들의 전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그 복음을 세상에 공포하고, 그것을 증거하고 권고하는 일이었다. 사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그것 자체 안에 이미 세상에 자신을 추천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복음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의 증거이며, 우리 속에서 하시는 그의 선한 역사의 방법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은혜로우신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정하고 그러기에 이 복음의 지식과 유익함과 능력을 펼치기 위한 도구로써 매일의 삶을 살기를 원하였다.



[2] 그가 관심했던 것의 또 하나는 그가 그 일을 잘 끝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의 생명이 언제 끝날 것인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곧 닥치든 또는 불시에 오든 외적으로 볼 때 슬픈 것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다만 그의 "여정을 기쁨으로 마감할 수 있게 될 것인가"만을 염려하였다.

첫째, 바울은 본문의 말씀 그대로 그의 삶을 "하나의 달려갈 길로 간주하였다." 우리들의 삶은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이다"(히 12:1). 이 말은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지정된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건들거리며 살라고 보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삶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라고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과하도록 아니 이 세상을 달음질하되 순간에 달음질을 마치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덧붙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심한 공격을 받으며" 통과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의 여정의 종말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고 가까운 것임을 말한다. 그는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했다. 죽음은 우리가 하는 경주의 끝이다. 우리가 그것을 마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마감하거나 부끄러움으로 마감하거나 할 것이다.

셋째, 바울은 그의 경주를 어떻게 하면 잘 마칠 수 있는가에 온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관심은 "얻고자 하는" 거룩한 바람이요,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갈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 원도 없으리라"고 그는 말한다.

넷째, 그는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싫증을 내거나 너무 힘들다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는 기쁨으로 잘 마칠 수 있느냐만을 생각한다. 우리들은 평안한 죽음을 위해 준비하는 일을 우리의 필생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우리들은 안전하게 죽을 뿐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기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

Ⅲ. 그들이 그를 볼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성실한 생활을 본받으라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증언해 줄 것을 요청한다.

1.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지금 그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25절).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그러나 이제는 너희들이 나의 편지는 받아 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한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우리들의 친구와 헤어질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며 또 그렇게 말해야 한다. 즉 "우리들이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구나. 우리들의 친구들이 먼저 죽을는지 혹 우리 자신들이 먼저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예언의 성령에 의하여 확신을 가지고 에베소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자기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22절) 자신없게 말한 그가 본문에서는 확실할 수도 없는 것을 이 같이 확신으로 말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별히 바울은 성령으로부터 그가 그들을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받아서 그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다(내가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다시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는 만일 자기가 그들을 못 보게 될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다면 "자 보라,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아직도 그의 앞에는 많은 시간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그는 다른 곳에서 그의 사명이 예비되리라는 것과 아시아와 그리스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견한 것이다. 바울은 오랫 동안 아시아와 그리스를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파했었다. 그는 말씀을 전함으로써 죄와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렸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를 고양시켰다. 그리고 그는 영광의 나라를 우리의 목적으로, 은혜의 나라(이 세상에서의 은혜의 생활을 말함)를 그곳으로 가는 여정으로 전하였다. 오랜 동안 그들은 강단에 선 바울의 얼굴을 보는 즐거움을 누렸었다. 그들은 바울의 얼굴을 "천사의 얼굴처럼" 바라보았다. 이 평화의 사역자들의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조차 아름다웠다면 그들의 얼굴의 아름다움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나 그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예언자들이라도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그들의 빛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잠시 동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빛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안 선용하여 자신을 개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들이 지상에서 그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때에는 우리는 마지막 심판날에 기쁨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을 바라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 가운데서 그가 자신의 사역을 맡아 신실하게 행하였음을 호소한다(26절). 그는 말한다. "너희에 대한 나의 사역이 끝나는 지금 그 발자취를 돌아보고 회고해 본다는 것은 나나 너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1) 바울은 자신이 성실하지 않은 점이 있었으면 자기에게 말하라고 그들에게 제의한다. 또는 그의 말이나 행위가 어느 한 사람의 고귀한 영혼이라고 파멸케 하는 데 보조역할을 하였는지 말해 보라고 제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말한다. 즉 모든 영혼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분명히 에스겔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여진다(겔 33:6). 거기 보면 파수군이 경고치 아니하므로 적군의 칼에 쓰러진 자의 피는 경고치 아니한 불신실한 파수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되어 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너희들은 내가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피에 대해서도 내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자신의 신실함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이것을 기뻐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그가 깨끗함을" 기뻐해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러한 증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므로 바울은 멸망할 자들의 피를 그들 자신의 머리로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에게서 많은 경고를 들었으나 그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이 전도자들에게 그가 행하였던 것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도 그와 같이 수고할 것을 명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나는 모는 사람들의 피로부터 깨끗하다. 너희들도 그와 같이 너희를 지키도록 주의하라"고 한다. en th shme ou hmera - 즉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로 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내가 이 날을 너희에게 증거한 날로 기억해 두겠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이 때때로 우리의 호소의 대상이 되듯이 본문에서는 오늘, 곧 작별의 날이 증인이 되고 있다.

3. 바울은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27절)는 말로 그 자신의 충성을 증거한다.

(1)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언제고 그 자신의 생각을 거기에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전한 것은 순수한 복음으로 다른 어떠한 거이 아니라 너희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훌륭하게 계획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변경할 수 없도록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은혜로 우리들의 영광을 위하여 친절하게 계획된 것이다(고전 2:7). 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된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임무이다. 그는 다른 것을 전해서도 또 계시된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임무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했고 또한 복음 전체를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다. 그는 방법론적으로 차례 차례 처음부터 끝까지의 복음의 진리를 그들에게 제시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진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고자 했다. 또한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의 상호 연관성과 의존성을 보여 줌으로 진리를 더 잘 이해하게 하고자 하였다.

(3) 바울은 그 일을 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멋대로 혹은 고의로 하나님의 뜻의 일부를 선포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노고를 아끼기 위하여 복음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을 전하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판을 얻기 위하여 복음에 있어서 가장 분명하고 쉬운 부분에 대하여는 설교하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경계를 품고 있는 적들을 격분시킬까 보아 그가 알고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피하거나 또는 복음에 대하여 신앙이 얕은 자들을 불쾌하게 할까보아 그가 알고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듣거나 멀리하려고 하거나 간에 그의 앞에 놓인 그의 일을 충실하게 하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피로부터 자신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Ⅳ.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의 일을 근면하고 신실하게 하는 사역자들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다.

1. 바울은 에베소 교회 즉 그 성도들과 그 에베소 주변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돌볼 것을 그들에게 위임한다(엡 1:1). 그들은 이제는 그 수효가 너무 않아서 한 곳에서 집회를 가질 수 없었고 몇몇 사역자들의 지휘 아래에서 나누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었지만 본문에서는 그들 성도들을 한 "양떼"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러하였듯이, 한 신앙 안에서 일치하여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서로를 도우며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들 장로들에게 이것이 그들과의 마지막 작별임을 알고서 이 교회의 처리를 위임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 episkopouj - 즉 성령이 그들을 감독자, 양떼의 감독자로 삼았음을 말한다. "여러분 장로들은 이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감독하기 위하여 성령이 삼은 감독자들이다"(벧전 5:1, 2; 딛 1:5, 7).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던 동안에는 바울 자신이 교회의 모든 일을 주재하였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이제 바울과 헤어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독수리는 "그 둥지를 떨어내어 그의 어린 것들을 세상으로 내어 몰았다." 이제 그들은 깃털이 나기 시작하였기에 그들은 그들 스스로 나는 것을 배워야 했으며, 바울의 도움없이 행할 수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을 감독자로 삼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영예를 그들 스스로 취하지 아니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떤 왕자나 군주에 의해서 이 영예가 그들에게 수여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이 그들에게 이러한 자격을 부여했으며, 그들을 능력있게 하셨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므로"(19:6) 이 위대한 임무를 그들이 부여받은 것이다. 성령이 선택되고 불리움을 받고 안수를 받은 그들에게 이 일을 하도록 지시하셨다.

2.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위하여 부활받은 사명을 기억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은 의무에 충성하기를 요구하신다. 만일 성령이 그들을 "양떼의 감독," 즉 목자로 삼았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것에 진실해야 한다.

(1)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영혼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경계해야 하며 그리고 그들의 모든 언어와 행실에 주의해야 하고 주의깊게 행해야 하며 하나님의 집 안에서 얼마나 그들 스스로 바르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을 주시하는 많은 눈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여러분의 행실을 본받으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여러분과 싸울 계기를 만들려고 하여 주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너 자신을 삼가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포도원을 관리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포도원을 기술적으로 신실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2) "온 양떼를 위해 삼가라. 여러분이 부름받음에 따라서 또한 주어진 기회에 따라서 어떤 이는 이쪽 양떼를 돌보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양떼를 돌보라. 여러분가운데서 어떤 양떼도 소홀히 됨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그들의 양떼들을 감시하듯이 그들이 맡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계속해서 돌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그들 중에 어느 것도 스스로 우리로부터 떠나 방황하거나 혹은 맹수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너의 태만에 의하여 그들 아직 어느 누구도 실종되거나 잘못 다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한다.

(3)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양육해야만 한다. 또한 목자로서의 소임의 모든 부분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하며, 그들 앞에 먹이를 놓아 주어야 하며, 병이 난 것들이나 식욕을 잃은 것들을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만 한다. 부드러운 복음주의적인 훈련과 함께 기독교의 가르침을 골고루 먹여 그들을 양육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존재로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이 결핍되지는 않았는지 보아야 한다. 목자는 밖에 있는 무리들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교회로 모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

(4) 그들은 목자들이 밤에도 그들의 양떼를 자지 않고 돌보듯이(31절) 깨어서 양떼를 지켜야 하며 영적인 게으름이나 졸음에 빠져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분발하며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행해야 한다. "모든 일에 근신하며"(딤후 4:5) 양떼에게 해가 될 만한 모든 것을 경계하고 이익이 될 만한 모든 것은 찾아내야 한다. 또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쁨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의 전도의 임무를 명심해야만 하는가 하는 몇 가지 유익한 근거를 그들에게 제시한다.

(1) 그들로 그들의 하나님의 이익을 도모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떼를 돌보는 일을 맡기셨다(28절). 즉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1] "교회는 그의 소유이다. 너희들은 그를 위하여 그 교회를 돌보는 그의 종들일 뿐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고용되었다는 사실이 곧 너희들의 명예이다. 그는 너희가 그를 섬길 때 너희를 인정하실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가 너희의 일을 게을리하여 부주의하고 배신한다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곧 하나님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하나님을 향해 거짓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너희는 신임을 받았고, 그러기에 너희는 그에게 너희 자신을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주의하라.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일진데 그는 너희가 그의 양과 어린 양을 먹임으로써 그에 대한 너희의 사랑을 너희가 표현할 것을 바라신다.

[2] 그가 교회를 산 것이다. 세계는 그의 창조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구원하심에 이해서 그의 소유가 된다. 그것이 그에게 귀중한 것이므로 우리들에게도 귀한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위해 그가 비싼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양과 어린 양을 먹임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3] 이 하나님의 교회는 그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것이다. 그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위하여 사라들을 희생시키시고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백성들을 치신 것처럼" 하신 것이 아니라(사 43:3, 4) "자신의 피로써" 그들을 사셨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써 교회를 사셨다고 말씀되고 있다. 그 피는 인간으로서의 그 자신의 피였다. 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그렇게 완벽하였으므로 인간으로서의 그의 피가 여기서는 하나님의 피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인 그의 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에다 자신의 위엄과 그가 지니신 가치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그 피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상하는 가치있는 보상 요건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모든 좋은 것을 제공할 만한 가치있는 대가가 되는 것이며 우리를 사서 그리스도의 선민이 되게 할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르기를 "그들은 다 당신의 것이었으나 당신이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양육해야 한다."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 것은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그것이 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 교회를 사시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놓으시었다. 그러기에 그의 사역자들은 그것을 양육하기 위하여 수고와 노력을 바치는 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교회의 참된 이익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 교회를 사시고자 지불된 그의 피를 경멸하는 것이 된다.

(2) 그들을 인하여 양떼가 대적자들의 먹이가 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29, 30절). "만일 양떼가 하나님과의 연관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에 의한 그것의 구속 때문에 그렇게 귀중한 것이라면 너희는 너희 자신과 그 양떼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할두 가지 근거가 있다.

[1] "양떼를 보살펴야 하는 것은"(역주:공동 번역 인용) 이리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29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떠난 후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오리라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리가 박해자들이라고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당국에 무고(誣告)하여 당국자들에게 아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해치고자 하며 양떼에게 애정이 없는 박해자들로 본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는 유대인들의 모든 분노가 바울에게로 집중되었으나 이제 바울이 그 도시를 떠나고 나자 박해자들이 잠잠해졌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박해가 그친 것이 아니다. 내가 떠난 후에도 박해하는 자들이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떼들을 돌보며 양떼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라. 그리하여 양떼들로 고난이 두려워 그리스도를 떠나거나 고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평화와 위로를 잃지 않게 하도록 하라"고 말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사역자들은 박해의 시기에는 양떼를 보통 때보다 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본문의 "이리는 유혹자나 거짓 교사들로 이해하는 편이 더 옳다고 여겨진다. 아마 바울은 제의법을 전하는 할례주의자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양의 가죽을 쓰고 왔지만 아니 그보다 목자들의 옷을 입고 왔으나 그들은 기독교 신도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며, 교인들 가운에 불화를 뿌리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끌어내고 그리고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해치고 비방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 거짓 교사들은 양떼 중에 가장 고귀한 구성원들까지 아끼지 않으며 양떼들을 뜯어 먹도록 자기들이 선동할 수 있는 사람을 선동하기 때문이었다(갈 5:15).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들은 이리라고 불렀듯이 빌립보서에서는 그들을 개들이라고 칭하였다(빌 3:2).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는 바울을 피하였다. 그것은 도저히 바울과 맞서 싸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가고 나자 이들은 에베소 교인들 가운데 들어와서 바울이 좋은 씨앗을 뿌렸던 곳에 그들의 가라지를 뿌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 것이다. "양떼를 지키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진리 안에 굳게 서게 하라. 그리고 거짓 교사들의 교묘한 가르침을 막아 낼 수 있도록 양떼를 무장시키라"고 한다.



[2] "그들 자신을 돌보아야 할 것"은 몇몇 목자들이 변절할 것이기 때문이다(30절).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즉 교우들 중에서 아니면 바로 너희 교회의 사역자들 가운데서 곧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들 가운데서까지(그렇게까지는 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고 있지만)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곧 복음의 바른 법도에 상반되는 것들을 말하고, 그 복음의 위대한 의도를 깨뜨리려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 그들은 복음의 몇몇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며 그 말씀을 그들의 잘못을 옹호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벧후 3:16). 심지어 너희 가운데 바른 생각을 지니고 또 너희가 신뢰할 만한 자들까지도 점점 자만하게 되고, 독단적이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려 할 것이다. 또한 교묘하고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너희를 고차적인 형태의 신앙에로 이끌어들이는 것처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들을 끌어 자기들을 좇게 하려는 것이 제자들로 그들 자신의 도당을 만들려는 것이요, 제자들로 자기들을 존경하고 자기들에 의해 지도를 받으며, 제자들이 자기를 이끄는 대로 신앙을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이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라는 구절을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끌어내어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 한다는 말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돌보라. 너희가 너희 중 몇몇이 복음을 배신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는 지금 조차도 너희는 각자가 그 사람이 나는 아닐까? 라고 물어 보아야 하며 너희 자신을 잘 살펴 보아야 한다. 바울의 우려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그들은 바울과 그가 전한 가르침을 떠났다(딤후 1:15). 또한 후매네오와 빌레도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되었고 또한 몇몇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딤후 2:18). 이러한 예는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사실들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비록 에베소 교회에 그와 같은 유혹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이 서신에서 우리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책망과 염려를 찾아 볼 수는 없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가 그러하였던 것과 같이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그렇게 심하게 영향을 받은 것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이 적어도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교훈에 의해 감염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곳 교회의 평화와 순수성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 이 장로들의 노고와 경계에 의해 보존되었다. 바울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과 같이 이단들과 분열 책동자들이 일어날 것을 실제적으로 예견하고 또 생각하였기에 이들 장로들에게 이 교회의 처리를 위임했던 것이다.

(3) 그들로 하여금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세우면서 당한 큰 수고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31절).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삼 년이나(사실 바울은 그렇게 오랜 동안 에베소와 그를 인정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절). 그리고 내가 그토록 애를 써서 놓은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한다.

[1] 바울은 신실한 파숫군 같이, 그들을 경고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계속 유대교에 남아 있거나 또는 우상 숭배를 수행할 때 그들에게 있을 위험을 경고하므로 이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2]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바울은 공중 전도에서 공중 앞에서 경고했을 뿐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그들의 경우를 보아 특별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각 사람에게 경고하였다.

[3] 바울은 계속해서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밤낮 쉬지 않고 훈계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일과는 일로써 꽉 채워져 있었다. 휴식을 취해야만 할 밤에도 낮에 그들의 영혼에 관하여 말해 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만났다.

[4] 바울은 이 일을 함에 있어서 피곤을 몰랐다. "그는 훈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그의 훈계에 대하여 그렇게 완고하였지만 그들도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굴복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울은 훈계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이 비록 그의 훈계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이제 그가 그 일을 그만 두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들의 의로움으로부터 떠나지 말도록 훈계했다. 이것은 그가 그들이 죄악 속에 있었던 때 그들에게 그들의 악함으로부터 떠나기를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였다(겔 3:18-21).

[5] 바울은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눈물로써 그들을 훈계하였다." 바울은 "눈물로써" 주님을 섬겼듯이 또한 "눈물로써" 그들을 섬겼다(19절)뿐 그는 연민의 눈물로써 그들을 훈계하였으며, 또한 죄에 빠져 있으면서 죄의 길을 걷는 그들의 위험과 비참에 대하여 그가 얼마만한 염려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 줌으로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이같이 바울이 그의 노고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며 에베소에서 유익한 일을 시작하였다면 그들이 그가 시작한 일을 계속 수행하는 데 노고를 아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Ⅴ. 바울은 그들의 하나님의 인도와 권세에 맡긴다(32절). "형제들아, 나는 경고와 부탁을 엄숙히 전한 뒤 이제 너희를 하나님에 맡긴다. 이제 내가 할 말은 주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는 말 뿐이다. 나는 너희를 떠나야만 하나 그러나 나는 권능의 손에 너희들을 의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또는 어떻게 그들의 사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들과 그들의 가족의 생계 문제는 어찌될 것인가를 염려하였다. 이러한 모든 복잡한 염려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랄 것과 하나님에게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보살펴 주십사 간구하라고 지시한다.

1. 본문에서 바울이 그들을 누구에게 위탁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나 사역자들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예전에 했던 것과 같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도록 격려한다. 사실 그들과 바울은 주 안에서 한 형제였던 것이다.

(1)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에게 위탁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고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을 간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봐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맡기라고 격려한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에게로 가라. 너희의 눈을 언제나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고 여러 궁핍과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라. 너희가 의지할 하나님이 있고 모든 것에 넉넉하신 하나님이 있으시다는 것을 너희의 위로로 삼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너희를 하나님에게 맡긴다"고 한다. 즉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돌보심에 위탁한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벧전 4:19).

(2) 바울은 "그의 은혜의 말씀에" 그들을 맡긴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말씀"을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그는 "말씀이시다"(요 1:1).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생명이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안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일 1:1). 본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맡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하고 돌볼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만 위탁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위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제자들을 떠날 때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역사 나를 믿으라"라고 부탁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해해도 결과는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원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은 곧 말씀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씀이 곧 영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너희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망함으로 많은 위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너희는 더 많은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임무를 주어 보내면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굳게 믿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유익함과 위안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 이상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리라"고 하시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위탁한다. 그들의 희망의 근거와 기쁨의 원천으로써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의 규율로써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다 그들을 위탁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게 너희를 맡긴다. 그는 너희가 섬겨야 할 주인이시다. 나는 그가 좋은 주인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은혜의 말씀에다 너희를 위탁한다. 그 말씀은 너희로 너희와의 여전의 일에서 손을 떼게 할 것이고, 또 그 말씀에 의하여 너희 자신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리라.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지키고 그리고 그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여 살라."

2. 바울이 무엇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위탁했는가를 살펴 보자. 그는 그들을 그들의 적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든가 또는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해 달라고 위탁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또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영적인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위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께 위탁하였다.

(1) 그들의 덕성의 함양을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말겼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그 말씀이(은혜의 성령은 말씀에 의하여 또한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리라. 그리고 너희가 말씀에 밀접해 있는 동안 그 말씀을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부터 매일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너희가 이미 좋은 은사들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말씀만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말씀 안에는 너희들이 더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감화를 받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은혜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덕성의 함양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덕성의 함양을 목표로 삼아야 그리하여 다는 것을 기억하자. 가장 진보된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이 세상 안에 있는 동안에는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그들이 성장하는 데 더욱 많은 공헌을 할 만큼 은혜의 말씀에는 많은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말씀은 계속 그들을 능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말씀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기업을 주신다. 말씀은 우리에게 자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생명과 영생은 복음에 이하여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약속을 제공해 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과 "예요 아멘이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말씀은 성령이 임하는 통로이다. 이 말씀에 의하여 은혜의 성령은 주어진다. 이 성령은 약속의 인증이 되고, 약속된 영생의 보증이 된다. 이같이 우리에게 이업을 주는 것은 하나님 은총의 말씀인 서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늘 나라는 기업(基業)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상속자들은 이 기업에 대하여 파기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받은 것과 같은 기업으로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자손들에게 보증된 약속인 것이다."

[2] 이 기업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성별된 사람들에게만이 확실히 상속되고 보장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별되지 않은 자들은 거룩한 하나님 또는 천상의 거룩한 세계의 고객으로서 영접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 곧 다시 태어나고 또한 그들 위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된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는 기업이 된다. 전능하신 능력과 영원한 진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리켜 준다. 그러므로 그 기업의 자격을 성취한 사람들은 그들이 성화된 자들 가운데 속해 있는지, 그들과 결합하고 또 협력하고 있으며 그리고 같은 형상과 본질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거룩한 자들 가운데 있지 않는다고 하면 이 후에 영광을 입은 자들 가운데 우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Ⅵ.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과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의 본으로 그들에게 천거한다. 그것은 그들이 만일 바울 자신과 같은 정신과 같은 보조로 행한다면 그들이 이 세상을 쉽고 편안하게 통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영적인 축복을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최고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가족의 양식과 그리고 그들 자신의 알맞은 생존과 그들 자녀들을 위한 보호를 위하여 모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한다. "내가 하였던 것과 같이 행하도록 하라." 그러면 바울이 행한 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제 바울은 그들에게 이 사실에 대해 말해 준다.

1. 바울은 자기가 세속적인 부를 결코 목표로 삼지 않았다고 말한다(33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기에 너희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때는 너희도 편안할 것이다"라

 

20: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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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6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나눈 작별 인사(사도행전 20:36-38)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행한 감동적인 고별 설교 다음에 우리는 고별의 기도와 눈물어린 작별의 정경을 본문에서 대하게 된다. 이 모습은 더욱 감동적인 것이었다. 본문에는 그 자세한 정경이 설명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무감각한 감정으로 이 사실들을 고찰해 볼 수밖에 없다.

Ⅰ. 그들은 기도로 헤어졌다(36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라고 하였다. 사실 본문의 기도는 현재 당하고 있는 모든 비탄한 경우에도 적용되는 그러한 기도였다. 바울은 이 기도 가운데 하나님에게 그들을 맡겼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말고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다.

1. 그것은 합심한 기도였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했다." 그렇게 한 것은 저희들도 바울이 그들 모두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한 같은 간구를 그들 자신과 서로를 위하여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로 바울이 떠났을 때 그들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무엇을 간구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중 기도가 우리 자신의 개인 기도의 시간을 빼앗거나 또는 공중 기도를 한다고 개인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중 기도는 개인 기도를 일깨우며, 하도록 격려하며, 우리들을 개인 기도 가운데로 몰아 넣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는 우리들의 사역자들이 우리와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2. 그것은 겸손하고 경건한 기도였다. 이 사실은 그들이 취한 지세에서 나타난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것은 기도하는 가장 적당한 자세였다. 그것은 존경과 간청을 동시에 의미한다. 특별히 죄의 용서를 위한 간청을 의미한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자주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라고 기록되어 있다.

3. 그것은 설교가 끝난 후의 기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자신이 설교한 것에 대하여 기도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치리를 그들 장로들에게 위탁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과된 이 위대한 책임을 그들이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것에 요청되는 많은 지혜와 은총을 그들에게 줄 것을 간구한다. 바울은 양떼를 위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또한"양떼의 가장 큰 목자"이신 주님이 그들 모두를 돌보고, 탐욕적인 이리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했다. 이같이 함으로 바울은 이 사역자들이 그들이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쳤다.

4. 그것은 고별 기도였다. 그것은 고별 설교가 그랬듯이 영원히 지속될 인상을 그들 모두에게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친구들 간에 서로 작별할 때에도 기도로 작별하는 것이 좋다. 헤어지는 순간에 함께 기도하는 것이 그들이 작별하고 나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감동적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기도에 의해 성도들의 교제가 증진된다. 우리가 서로 작별할 때 주님께서 우리 사이를 지키시고 또한 우리 모두를 함께 지키실 것을 간구하는 것은 좋은 작별 기도이다(창 31:49). 또한 우리들의 다음의 만남이 하늘 나라와 보다 가까워진 상태에서이거나 혹은 하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좋은 작별 기도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헤어질 때, 제자들에게 설교한 후에 그들 모두와 함께 기도하셨던 것이다(요 17:1).

Ⅱ. 그들은 눈물로 작별했다. 즉 많은 눈물로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포옹으로 헤어졌다(37, 38절).

1. "그들은 모두 다 크게 울었다." 그 울음을 시작한 것은 바울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은 비록 떠나기로 결정하였고 또 다른 일을 위한 그에 대한 분명한 부름을 보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들을 떠나는 것을 매우 안타까와 했고 그러기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자주 눈물을 흘렸다.(5:19, 31). 의심할 것도 없이 고별하면서 더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눈물로 그들 가운데 뿌린 씨앗에 물을 주는 심정을 지녔으리라. 그러나 본문에는 그들이 울었다는 사실만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몹시 울었다" 그들 가운데 울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바울의 감동적인 기도가 그들 모두를 울렸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들의 눈물은 사랑과 상호간의 애착의 눈물이었다. 이 눈물은 마치 불가불 헤어져야만 하게 되었을 때 서로 붙들고(그들은 몸부림치며 울었다) 울 때 흘린 눈물과 같은 것이었다(삼상 20:41). 이 때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고 함과 같다.

2. "그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 모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모두 그를 잃어버리게 또한 것을 슬퍼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모두 한 마디씩 하였으리라. "내가 어떻게 이 귀중한 사람, 이 축복받은 바울과 헤어질 수 있겠는가." "그와 헤어지려니 죽을 듯이 괴롭구나." "잘 가시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게 된 데 대하여 그리고 나의 유익을 위해 당신이 베풀어 아직 노고에 대하여 그대에게 감사를 드리오. 그리고 하나님께는 더욱 감사를 드리는 바요." "그래 우리고 꼭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오." "그래 내가 나의 영적인 아버지요, 간호자요, 인도자를 잃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의지할 수도 없고 그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을 수도 없게 되었구나. 만일 주께서 나의 스승을 내게로부터 거두어 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요 마병이여!" 이같이 그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였다. 사랑을 많이 베푸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매우 사랑이 풍부했던 바울은 그러기에 그에게 많은 사랑을 쏟는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과 작별하면서 그들이 흘린 눈물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에 대한 뜨거운 보답이었다. "남을 위해 눈물을흘린 자는 자신의 타인들의 눈물어린 사랑을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3. 바울의 "다시 그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에 큰 충격이 되었고 그들이 함께한 자리를 "보김" 곧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삿 2:1-5). 만일 바울이 그를 늘 수행하는 동역자들에게 하였듯이. 그를 따르라고 그들에게 지시했다면, 혹은 그가 곧 다시 와서 그들을 방문하겠다는 암시를 하였다면 그들은 이 작별을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는 그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 이것이 그들이 주고 받는 마지막 작별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 사실은 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으로 인한 작별과 같을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렇게 격렬하게 울었던 것이다. 그들의 슬픔에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의 공적인 섬김의 모습을 다시는 대할 수 없다는 데서, 그리고 그들의 집회를 주재하는 바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 그리고 그의 따뜻한 충고와 위로를 이제는 결코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 기인된 슬픔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도 슬퍼했기를 바란다. 즉 그들이 바울과 함께 있는 동안 그의 노고에 의하여 보다 더 변화되지 못하였고 이 사실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여 바울로 그들을 떠나도록 명령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 때문에도 슬퍼하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슬프게 한 것은 "그들이 바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들의 친구가 죽어서 우리와 작별할 때, 우리들의 슬픔의 계기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 같이 죽음을 불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친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우리가 지금 그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그 죽은 자들은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요 또한 그의 영광을 대하게 될 것이며 그의 얼굴의 광채에 반사되어 그들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날 것이요 그리고 우리도 곧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친구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서 그들을 다시 볼 것과 거기서 주와 함께 영원히 그들과 거하게 될 것을 바라는 소망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Ⅲ. 그들은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였다." 이 사실은 한편 바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 주며(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데까지 바울을 전송하려 했을 것이다) 또 한편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와 대화하기를 원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기에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이 물가에까지 와서 바울이 배를 타려고 하였을 때, 그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는 작별을 나눌 때는 작별 인사가 반복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동행하실 것이요 또한 그들과도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은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에게 모두 위안이 되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20:37 없음.

 

20:3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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