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사도행전 17:1-9)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 편의 편지는 그가 영감에 의해 쓴 최초의 편지들인데, 그 편지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을 잘 밝혀 준다. 또한 우리는 역사서인 본서에서 그곳 교회의 최초의 설립 과정에 대한 설명에 대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Ⅰ. 바울의 데살로니가 도착. 이 성은 마게도냐 지역의 수도로써 지금은 터키의 영토로 "살로니카"(Salondch)라고 불리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바울은 그가 빌립보에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단념하지도 않았으며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였다. 즉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살전 2:2)고 그도 말하였다. 그가 당했던 반대와 박해가 오히려 그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었다. 만약 높은 곳으로부터의 능력에 의해 활력을 얻지 못했었다면 그가 이룬 것만큼 그의 활동을 계속하고 또 그만한 고난을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2. 사도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단지 지나치기만 하였다." 암비볼리는 빌립보에 가까운 도시였고 아볼로니아는 데살로니가에 가까운 도시였다. 바울은 의심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지시 아래 행동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어느 장소는 지나쳐야 하고 어느 장소는 머물러 전도해야 한다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성령은 바람과 같이 그의 뜻하는 대로 행하신다). 아볼로니아는 일리루곤(Illyricum)에 속한 성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은 바울의 여행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즉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부터 두로 행하여 일리루곤까지"(롬 15:19) 복음을 설교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바로 바울이 거하였던 아볼로니아는 일리루곤으 경계선이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통과했다고만 나와 있지만 우리는 바울 자신이 거기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가 후에 보내게 될 다른 사역자들이 그곳에 올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Ⅱ.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설교한다. 바울은 그 곳에서 유대 회당을 발견했다(1절). 이 사실은 바울이 앞서 언급된 다른 도시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려야 했던 한 가지 이유를 알려 준다. 왜냐하면 그 다른 도시들에 유대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회당이 발견되었으므로 바울은 그곳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1.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고 그들이 그것을 거절한 후에야 이방인들을 향하는 것이 바울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고 유대인들이 소요를 부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고, 만약 그들이 거절한다면 그들은 사도들이 그 복음을 반갑게 받아들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지고 가도 그들이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시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었다.2. 바울은 유대인들을 안식일에 그들의 회당에서 만났다. 즉 그는 바로 그들의 장소에서 또 그들의 집회 시간에 그들을 찾아 감으로써 그는 그 장소와 시간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려 했다. 안식일, 그리고 그 엄숙한 집회는 그리스도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언제나 중요하다(시 84:10). 주의 날에 주의 집에 거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였고 바울도 그렇게 하였으며 다른 모든 성도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계속 지켜온 전통적인 미덕이었다.
3. 바울은 "성령을 가지고 강론하였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바울과 일치하였다. 거기까지는 그들과 바울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받아들이기에 그리스도를 배척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반면 바울은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만한 커다란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강론을 해야 하며 또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자신의 성경으로부터의 추론이 옳고 유대인들이 추론한 것이 그르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복음적 설교는 반드시 성서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바울의 설교가 그러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성서를 근거하여 강론을 전개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들의 신앙의 기초로 신앙의 시금석으로 생활에 대한 계시로 택해야 한다. 즉 성경에 근거하여 생활하고, 성경에 근거해 우리의 논리를 전개해야 그리하여 다. 또한 유대인들과 같이 성경에 열중하는 척하지만 잘못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에 빠져 들어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으로 상대해야 한다. 이성이 성경과 양립할 수는 없다. 이성은 성경을 응용하고 설명하는 수단이 되어야만 한다.
4. 바울의 말씀. 강론을 "세 안식일에 걸쳐" 계속해서 했다. 비록 첫 번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확신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안식일에라도 그들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지식에 지식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할 것을 기다리신다. 그의 사역자들도 또한 그래야만 한다. 모든 노동자들이 첫 시간에 다 포도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첫 번째 부름에 응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간수처럼 갑자기 모두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다.
5. 바울의 설교와 논증의 취지.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의 시종일관된 내용이었다(3절). 그는 먼저 그의 주제를 설명하고 뜻을 풀고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지키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알리도록 부탁받은 것이었다. 바울의 논쟁 방법은 정말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설교할 때 자기가 설교하려는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바울이 그것의 진실성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처럼 서두를 꺼낼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그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1) 메시야가 "해를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그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보여 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예수의 불명예스러운 죽음과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생각해 온 메시야 사상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메시야가 죽고 부활하셔야 그리하여 다는 사실을 말하고 부정의 여지가 없이 규명하였다. 즉 비록 그가 고통을 받으셨지만 메시야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고난을 받지 않으시고서는 온전케 되실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가 죽지 않았었더라면 결코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는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하셨고 그러고 다시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26)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도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임을 보여 주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당신들을 믿게 하려고 하는 이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구세주이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오실 이(재림하실)이시다. 그러기에 너희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행하심으로(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의 자녀들에게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성경과 기적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메시야임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를 설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사역자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들을 예수와 만나게 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설교해야 할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의해 구원을 받고 그에 의해 통치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Ⅲ. 그 곳에서의 바울의 설교의 성공(4절).
1. 몇몇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그의 말씀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리하여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그 유대인들은 바울이나 실라를 단순히 친구나 동요로서만 사귄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들의 지시에 맡김으로 자기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들을 따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른 주인의 소유물로써 그들에게 자신을 맡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희가 먼저 주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는 말씀의 뜻이다(고후 8:5). 그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달라붙어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동행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충실한 사역자들과 같이 사귐을 가지고 그들과 연합해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2. 경건한 그리스인들과 귀부인 중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곧 성문의 개종자들이었다(유대인들이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비록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생활을 거부하고 참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oi sebo,muoi Ellhnej - 즉 경건한 헬라인들이었다. 이것은 마치 미국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한 인디안들을 "경건한 인디안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 교회당의 예배에 유대인들과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이들 개종자들 가운데 제의법에 젖어 있는 철저한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도시의 귀부인들 중 적지 않는 사람들도 믿게 되었는데 그들은 열심과 신앙에 대한 이해심을 지닌 자들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귀부인들이 믿게 또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숙녀들과 귀부인들에게 본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경건의 행사에 자신을 드리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앙의 절대적 능력에 복종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회심은 자신의 영혼에 이익이 되는 이외에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그리스도에게는 큰 영광이 되는 일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이방인 우상 숭배자들에게 설교하였다는 사실에 관하여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그것들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했으리라는 것을 틀림 없는 사실이다. 본문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 곳에 교회를 구성하였던 인원이 대부분 이방인 개종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곳의 교인들에게 "우상에게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살전 1:9).
Ⅳ.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가 받은 고통.
어느 곳에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든지 그들은 박해를 받을 것을 각오하였다. 속박과 해함이 그들이 가는 성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 그들을 박해한 장본인들. 그들은 "사도들을 질시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었다(5절). 유대인들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질적인 적이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 대하여서는 변절자로서 특별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분열되게 하셨는가 살펴 보기로 하자. 유대인들 중 얼마는 복음을 믿고 또 믿지 않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한편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믿는 유대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바울은 이곳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에서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의와 분노를 말하면서 이로써 저희에게 "노하심이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하였다(살전 2:15, 16).2. 박해의 도구로 쓰여진 자들. 유대인들은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고용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뽑아 규합하여 사도들을 박해하도록 성을 선동하는 일을 맡겼다. 성내의 현명하고 착실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존경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악습을 감염시키는 도시의 쓰레기들이며, 사악한 인간들의 무리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자들과 기독교의 적수 노릇을 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나쁜 부류의 인간들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Tales semper nobis insecutores, injusti, impii, turpes, quos, et ipsi damnar consues tis - 즉 우리를 박해하는 박해자들은 거의 다 당신 자신이 이제껏 정죄 해온 자들이기도 한 불의한 자, 불경건한 자, 악명 높은 자들이다(Apologia, cap. 5). 기독교을 증오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저자의 괴악한 사람들"로서 덕과 정의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신앙의 명예를 높여 주는 사실이다.
3. 사도들을 박해하는데 사용한 수단.
(1) 그들은 "성을 소동케 하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 모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달려 나오게 하였다. 그들이 폭동을 선동하자 곧 폭도들은 들고 일어났다. 여기서 과연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적들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또한 악마가 그의 계획을 수행하는 방법은 온 도시를 들끓게 하고 마치 물을 휘저어 고기들을 괴롭히듯이 사람들을 소요 속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2) 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는데" 그곳은 바울 일행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바울 일행을 끌어내어 군중들 앞에 세우려는 계획에서였다. 그렇게 하여 군중들로 사도들에게 분을 품게 하고 그들 일행에게 폭행을 가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군중들에 의하여 사도들이 매맞아 죽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모든 진행 방법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만일 야손의 집을 수색하려 한다면 영장을 소지한 특정한 관리들에 의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법률은 "사람의 집은 그들의 성이다"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또 그를 끌어내어 그의 가족을 공포에 떨게 그리하여 폭동적인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오직 박해하려는데 집착하여 광분하는 무리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만약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그 죄과를 조사하고 또 그것을 심판하도롤 검사가 임명되는 법이다. 그러나9이들 유대인들이 하고자 시도한 것처럼) 부량배들로 재판을 하고 형을 집행하게 하려고 한 것은 진리를 땅에 팽개쳐 버리는 짓이요, 노예를 말에 태우고 왕자를 조처럼 걷게 하는 짓이었다. 즉 공정은 몰아내고 광분을 재판석에 앉히는 것이었다.
(3) 그들이 바울 일행을 붙잡지 못하자(원래 그들은 바울 일행을 체포하여 부랑자처럼 처벌하려고 했고 또 바울 일행을 나라를 정탐하러 온 첩자라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이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바울 일행을 집에 데려다가 대접한 야손이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게 덮쳐 들었다. 그리고 그의 교우 중 몇 사람과 함께 성의 치리자 앞으로 끌고 갔다. 사실 사도들은 피신하라는 충고를 받고 피해 있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더 미움을 받아 왔었기 때문이었다. currenti cede furor - 즉 급류 앞에서는 돌아가라는 충고를 사도들은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의 친구들인 야손 일행은 이 박해의 폭풍을 사도들보다 감당하기가 용이하였으므로 기꺼이 폭도들에게 자신들을 맡겼다. 이들과 같이 "선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대신 죽음을 당하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4) 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치리자에게 고소했다. 그리고 그들을 관대하게 처벌해서는 안 되는 매우 위험한 인물들로 모함하였다. 그들이 야손에게 씌운 죄목은 그가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맞이하여 숨겨 주고 그들을 지지하여 그들의 사업을 도와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들이 무는 죄를 지었다고 보았기에 그들을 숨겨준 것이 반역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가 된다는 말인가! 그들은 두 가지의 음흉한 죄목을 사도들에게 씌웠는데 만일 사도들이 그러한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군중들이 사도 일행을 미워하고 또 치안관들이 사도들을 불쾌하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1] 우선 첫째는 사도들은 공안(公安)을 해치는 적으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다"고 고소하였다. 사실 어떤 점에서는 옳다고 볼 수 있다. 즉 복음이 힘을 발휘하는 어느 곳, 어느 영혼에서든지 복음은 거기에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은 본래의 생활을 뒤바꾸어 놓고 물의 흐름을 역류시키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이르는 장소나 영혼은 세상이 떠들썩할 만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뿌리 뽑히고 세상적 생활 방법이 속에서 거부되어짐으로 그것이 이르는 곳에 세상이 소란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통하여 뜻하고자 한 것은 이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거짓된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도자들을 그들이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로 인식되게 하려고 하였다. 즉 복음 전도자들은 친밀한 사이를 이간시키고 이웃들을 분리시켜 남의 말을 하게 하고 모든 질서와 법률을 뒤집어 엎으려 하는 자들로 인식시키려 하였다. 사실 복음 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덕으로, 우상 숭배에서 진실한 사신 하나님에게로, 악의와 질투로부터 사랑과 평화로 전향시키려고 했는데 그들은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라는 고소를 당한 것이다. 사실 그들이 소란케 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악마의 왕국일 뿐이었다. 원래 "성을 소란케 한 자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사도의 적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죄를 사도들에게 씌우려 한 것이었다. 마치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러 놓고 그 죄를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돌렸듯이 말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 지방 안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로 왜곡되어 불리워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을 구태여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박해를 받은 바울이나 실라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소자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에까지 그 악을 오염시키려고 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분발하여 그들을 막아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2] 복음 전도자들이 당국의 적들이며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로 또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과 그에 따르는 행동은 국가에 대해서 파괴적이고 그 법률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 모함하였다(7절).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라고 그들은 증언한다. 그 당시에는 아직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어떤 법 조항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도들이 가이사의 권력을 대적하였다고 막연하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복음 전도자들이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우리 구세주가 빌라도 앞에서 고소당하셨듯이? 그는 유대인들만의 왕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행한 첫 설교에서 예수를 "만유의 주"라고 불렀다(10:36). 로마 정부는 공화국이었을 때나 후에 가이사에 의한 왕권 국가였을 때가 그들의 지배 아래 있는 어느 지방 총독이 왕이라는 칭호를 자칭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금지하는 특별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는 왕이기는 하지만 지상의 왕이나 가이사의 경쟁자로서의 왕아 아니고 또한 그의 계율은 가이사의 법령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의 나라의 법을 정하신 예수 자신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통치자를 몰아내려 하거나 혹은 그들로부터 어떤 특권을 빼앗으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그런 죄들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것은 그들 양심을 속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이사와 그의 정권을 상당히 위하는 것처럼 가장하였으나 사실은 가이사와 그의 정부를 미워하고 그와 그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현세의 왕으로서의 구세주가 오셔서 세상 나라들의 보좌를 뒤엎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러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 예수를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가이사의 적대자로서 또한 총독들과 그들의 관할 영토에 해로운 자로 모함하는 가장 악의에 찬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Imperium in imperio - 즉 왕국 안에 왕국을 세우려 했는데 그 세력은 가이사의 나라와 비견할 정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나라를 능가하는 로마 교황의 나라와 같은 나라를 이루려고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4.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성내에 조성된 불안(8절). 그러므로 본문에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기록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이나 혹은 그들이 가르침에 대해 별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 그들이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인식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기꺼이 묵인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소자들에 의해 가이사의 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으므로 백성들과 읍장들은 로마 당국이 두려워서 그들의 기소를 인정하고 사도들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크라디우스(claudius) 황제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요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고 극도로 소심한 인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 밑에 있는 관리들이 조금 위험스러운 것 같거나 의심의 여지가 있는 일들은 사사건건 그래서 경을 세우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선한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진압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이 되었다.
5. 이 소란했던 사건의 종결.
그곳 지방 장관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기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사도들을 구금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도망하여 아미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손과 그의 친구들을 보증을 받고 놓은 주는 수밖에 없었다(9절). 이곳의 관리들은 빌립보의 관리들처럼 그렇게 쉽게 사도들에 대하여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훨씬 더 신중했고 더 나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손과 그의 일행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손과 그의 일행으로 선한 행동을 하도록 지원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울과 실라에 대해서도 보장 해 주겠다고 하였다. 사도들이 나타날 경우에 그들에게 불리한 일이 발생하면 자기들을 부르라고 말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사람들 중에는 짐승처럼 날뛰며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듯 분별 있고 관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온건은 곧 덕인 것이다.
고귀한 베뢰아 사람들(사도행전 17:10-15)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였다(10절). 그들은 멀리 데살로니가까지 나아가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그들이 시작한 일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들 새로 세워진 전도자들에 대하여 통치자와 백성들은 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품었던 것과 같은 엄청난 편견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므로 바울과 실라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현재로는 그들이 그곳을 떠나라는 지시로 알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도시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도시로 피하라"고 명하신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다른 도시로 건너가 그 곳에 숨으라") 명령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그들의 일을 계속 수행하라고("다른 곳으로 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라") 명령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는 것 때문이었다. 이같이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악마는 자기가 쏜 화살에 얻어 맞는 것이다(역주: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말. 삼손의 수수께끼를 인용한 것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려는 계획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악마는 박해를 함으로 사도들이 그 이상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박해를 한 결과는 오히려 더욱 더 넓은 지역까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 되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바울과 실라에 대해서 교우들이 취한 배려. 교우들은 사도들에 대한 음모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아무도 모르게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이러한 사건은 젊은 개종자들에게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미리 그러한 박해에 대하여 경고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즉 우리가 너희에게 처음 갔을 때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였다(살전 3:4). 만약 형제들이 사도들을 그대로 체류하라고 하였다면 사도들은 기꺼이 그곳에 머무르며 거센 폭동에 대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은 사도들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사도들의 도움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도움이 자기들 못지 않게 다른 곳에 있는 자기들의 친구들에게도 더 절실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 바울과 실라를 보냈다." 그들은 마치 악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은밀한 가운데 그 일을 했다.2. 바울과 실라의 계속적 전도 활동. 비록 그들은 데살로니가로부터 도피하여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금이라고 그리스도를 위한 섬김에서 도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뢰아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비록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악의에 가득 찬 그들의 적이었고 또 베뢰아의 유대인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짐작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그들의 경의를 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피해를 복수하려는 생각을 갖지도 않았고 그러한 일을 또 당할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Ⅱ. 베뢰아의 유대인들의 좋은 성품(11절). 본문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었다"(11절)고 기록되어 있다. 베뢰아의 유대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들보다는 더 열심히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 완고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심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까다롭게 굴거나 나쁜 감정을 갖지도 않았다. 그들은 훨씬 더 eu,genesteroi - 즉 고상하였고 교양이 있었다.
1. 그들은 보다 자유롭게 생각했고 또 신앙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조리있는 말을 듣기를 좋아했고 설득력 있는 말은 수용하였다. 또 그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이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생각에 어긋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훨씬 더 고상했다. 그들은 좋은 성품을 가졌다.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싫어하거나 까다롭게 굴거나 악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의 힘에 의해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고 이런 점에서도 그들은 훨씬 고상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처럼 모든 사건의 원인에 대해 편견을 갖거나 그것을 다룰 때 질투심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았고 그들은 항상 모든 일을 관대히 처리했고 공정하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였다. 그들은 조금도 감정에 이끌리거나 편파적으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의 고상함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기꺼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들어있는 뜻을 곧 이해했다. 그들은 결코 밝은 빛을 피하려고 눈을 감아버리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루디아가 그랬던 것처럼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을 경청하였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를 매우 즐거워했다. 그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려 하지 않았고 오류를 찾고자 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에게서 어떤 약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모든 말씀을 잘 받아들였고 또 그것에 대한 공정한 해석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그들은 데살로니가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방인 개종자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보조를 같이 하였다. 이들 데살로니가의 이방인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성령의 기쁨과 함께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섰다"(살전 1:6-9)고 기록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고상함이라고 하겠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수없이 자랑했고 그들 자신이 출신이 좋고 더 이상 좋은 가문에서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문에서 참으로 고상하고 교양있게 자라난 사람이란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려 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되고 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대단히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말씀되고 있다. 그런 사람이 가장 고귀한 사람, 내가 말한다면 신사다운 사람인 것이다. Nobilitas sola est atque unica virtur - 즉 덕과 경건이야말로 참된 고귀한 것이요, 참된 영예이다. 이것들 없이 stem mata quid prosunt? - 즉 족보나 화려한 직함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2)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이나 진리로 받아들이고 또 그런 것을 맹신한다는 뜻에서의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이 성경에 근거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자기가 이야기한 것의 증거를 구약에서 찾아 증명하였기 때문에 그들도 그들의 성경에 의뢰하여 그가 언급한 부분을 찾아 보고 본문을 읽어 보고 그 요점과 대의를 생각해 보고 또 그것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고 그 부분에 관한 바울의 설명이 진실한가, 꾸밈없이 자연적인가, 그 성서에 근거한 그의 논증이 납득할 만한 것인가를 시험해 보고 그에 따라서 결정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떤 면밀한 조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진리를 주장하는 우리들은 사람들이 먼저 아무런 편견이나 편파심 없이 그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검사하려고만 한다면 그들이 그 후에 "이러한 것은 옳치 못하다"고 말할까 보아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신약은 구약에 의해 그 진실성이 시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인 그들이 공정한 입장에서 신약을 본다면 신약을 받아들여야 하는 충분한 근거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이 신약 속에서 완전하고 정확하게 성취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요 5:39). 그리고 그들은 성경 속에 있는 진리를 찾아 내기 위해 그 의미를 잘못 깨달아 과오에 빠지고 또는 그 과오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 성경을 정성을 들여 상고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 성경 안에 내포된 모든 진리를 발견해 내고 성경의 겉면만 보고 피상적인 지식만 알아 거기 안주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까이 알기 위하여 성서를 상고해야 한다.
[4] 성경을 읽는 일은 우리의 매일의 과제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안식일에 유대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안식일에 말씀을 듣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 않고 그 주간의 매일 성경을 읽고 또 연구해서 이전의 안식일에 그들이 들었던 말씀을 더욱 확실히 자기 것으로 삼고 또 다가올 안식일에 들을 말씀에 대해 준비를 하였다.
[5] 성경에서 그들의 삶을 예견하며 그것을 그들이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그것을 늘 참고하는 사람은 정말 고결한 사람이며 더욱 고결해질 수 있는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며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고상한 생각으로 채워지게 되며 그들은 고결한 생활 원리를 정하고 고상한 목적과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다"고 본문에 말씀된 것이다.
Ⅲ. 베뢰아에서 행한 복음의 전파가 가져 온 훌륭한 성과.
그것은 대성공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성과가 손쉽게 이루어졌다(12절).
1. 그곳 유대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불과 몇 사람만이 믿었다(4절). 그러나 유대인들이 편파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말씀을 들은 베뢰아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은혜의 길을 처음부터 열심히 모색하려 하는 사람들 특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자.2. 더욱이 희랍인들 즉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헬라의 귀부인들과" "적지 않은 수효의 남자들"이었다. 이들 남자들도 귀부인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부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런 후에 그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느냐?"(고전 7:16)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Ⅳ. 베뢰아에서 일어난 바울과 실라에 대한 박해. 이박해로 인해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났다.
1.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도 또 사건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베뢰아에서도 전파되는 줄을 눈치챘다."(왜냐하면 질투와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눈치도 빠른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자기들처럼 기독교에 대해 결사적으로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눈치챘다. 그래서 그들이 베뢰아에 온 것이다. 즉 거기서도 세상을 뒤집어 엎고,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그곳 사람들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대항케 하려고 온 것이다. 마치 그들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이곳 저곳으로 다니라는 위탁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듯이 흑암의 왕자로부터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복음을 대적하라는 위임을 받은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예로써 우리는 이전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로 와서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들에게 대항하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14:19). 이 사람이 앞잡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주의 사업에 대항하려고 얼마나 날뛰었는가 보라! 이것은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뱀의 자식들이 품은 적의의 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해자들이 자기들 고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들의 박해의 손길을 타지방까지 뻗친 사실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2. 이 소동으로 바울은 아덴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스도가 이미 켜놓은 성스러운 불은 끄려는 자들의 손길에 의해 그들은 더 넓게 더 빨리 그 불을 파급시키게 되었다. 바울은 베뢰아에 오래 머물렀고 또 복음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그곳에 교인들이 존재하고 또한 지각있는 활동적인 인물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들이 바울을 보살핀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한다. 그들은 데살로니가로부터 사도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와 있다는 것과 또 사람들로 바울을 대적하게 하기 위하여 분주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염려하여 지체치 않고 "곧 바울을 내보냈다." 바울은 먼저 보낸 것은 그들이 가장 못마땅히 여기고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정도로 사태가 무마되어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게 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미 두꺼운 얼음은 깨뜨려 놓았으므로 바울을 내세우지 않아도 실라와 디모데만으로 일을 수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w,j epi th,n qa,lassan - 즉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였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길을 통하여 베뢰아를 떠났다. 이는 만약 유대인들이 바울을 추적하려고 묻는다고 해도 그가 바다 쪽으로 갔으므로 아주 멀리 갔을 것이라고 생각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실제로는 육로로 아덴까지 갔다. 그러나 그것이 떳떳지 못한 위장 전술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바울은 이 지방에 낯선 나그네요 또한 수많은 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키고 인도하는 자로서 그들이 나선 것이다)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렀다"(17:15)고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이 바울의 영혼을 감화시켜 그에게 그 유명한 도시로 가도록 지시하셨다. 예전에 아덴이 스파르타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을 때는 힘과 지배력으로 그곳은 유명했고 나중에는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다. 그곳은 학자들의 회합 장소였다.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왜냐하면 많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자기 지식을 과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모든 곳으로부터의 학문이 집결된 대학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좀더 낫게 복음의 빛을 밝히게 하기 위해 바울은 이곳으로 보냄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요 이들 희랍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줄 알았지만 그는 아덴의 철학자들과 맞대면하여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3.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에게 자기를 따라 아덴으로 오라고 명령했다"(15절). 그것은 바울이 그곳 아덴에서 무엇인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전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또는 그가 아덴에는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고독하고 울적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서둘러서 오라고 한 것을 보면 디모데를 명하여 데살로니가에 가서 그곳 교회의 소식을 알아 오에 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디모데를 보낸 것은 너희를 굳게 하기 위하여서이라"(살전 3:1, 2)는 말씀에 근거하여서이다.
아덴에서의 바울(1)(사도행전 17:16-21)
고대인들의 지식을 많이 알고 그것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만일 그가 여러 부류의 철학자들이 운집한 아덴에 바울이 있었듯이 거기 그가 있어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많은 의문나는 점을 물을 수 있다면 매우 행복하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의 그리하여 문에 대하여 아직 알 수 없는 의문나는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자신이 학자였고 박식한 활동적인 인물이었지만 이런 학문적인 탐구를 아덴에서 그가 해야 할 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가 마음먹고 있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그가 목적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철학에 의해서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러한 학문을 헛된 것이라고 불렀고 또 그러한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또 그 일에(골 2:8)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그들의 어지러운 신앙을 바로잡고, 우상 숭배와 그들 안에 깃든 사탄에 대한 숭배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숭배하게끔 하는 일이었다."
Ⅰ. 아덴 사람들의 지독한 무지와 미신에 대하여 바울의 영혼이 받은 인상(16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본문에 나타난 그 도시의 모습. 이 곳은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 작가들의 아덴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그들은 아덴에 그리스의 다른 모든 지방의 우상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우상이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축제를 열었음을 전해 준다. 무엇이든지 신기한 신이 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은 호감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신을 위해 사원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다. 그래서 facilius possis deum quam homiuem - 즉 그들은 거의 그들의 사람 수효 만큼의 많은 신을 숭배했다.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인의 된 후에도 이 도시는 오랜 동안 치유될 수가 없을 정도로 우상에 빠져 있었고 기독교릴 신앙하는 황제들의 경건한 칙령으로도 그 우상을 섬기는 일을 뿌리 뽑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고트족의 침략이 있을 까지 계속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 침략으로 이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이제는 그런 우상의 잔존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이 되었다. 인간의 지식이 번창하는 곳에 우상 역시 풍성하였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사도는 이 우상 숭배가 불합리하고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그들을 가리켜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롬 1:22). 또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1). 그들은 다신교와 우상 숭배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 만한 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인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이 우상에 대하여 가장 큰 노예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종교만으로는 안 되고 거기에 신의 계시가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2. 이러한 광경이 바울을 노하게 함.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적으로 타나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씀이 두 세 사람의 증인의 말을 통하여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에 그의 속에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영광이 우상에게 돌리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이 사탄에게 예속되어 그의 뜻대로 좌우되는 것을 연민의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들 범죄자들을 볼 때 마음이 슬펐다. 공포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사람들을 끝없는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끌고 있는 이방 성직자들과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알면서도 이 우상에 반대하는 말 한 마디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흐름 속에 휩싸여 들어가 버리는 철학자들을 보자 거룩한 분노가 치밀었다.
Ⅱ. 바울이 그들의 우상에 대앙한 증언과 그들을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하려는 그의 노력. 바울은 휫시우스(Witsius)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지나쳐서 그들의 사원에 뛰어들어가 우상들을 단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제단을 파괴하고 혹은 그들 성직자들에게 정면으로 대들지는 않았다. 또 바울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당신들은 모두 악마의 노예요'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비록 그들이 악마의 노예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는 예의를 벗어남이 없이 자기의 한계를 떠나지 않는 범위에서 신중한 사람답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1.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교에는 적이었으나 우상 숭배와는 거리가 멀었었고 또 그들 가운데는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m들은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변론할 기회를 주었다(17절). 그는 유대인들과 같이 토론하며 사리가 분명하게 논리를 추구하였고 또한 그들이 메시야를 기대하면서도 어째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가에 대해 그들에게 질문하였다. 거기서 바울은 우상은 저버리고 유대인의 회당에 참석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만났다. 바울은 그들과 이야기하여 단지 교회의 현관에 불과한 유대인의 회당에서 기독교 교회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였다.2. 바울은 신앙 문제에 대하여 자기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하였다. en tha,goa/r - 즉 시장에서 거리에서, 또는 상가에서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매일매일 변론하였다. 또는 그는 이방이나 결코 유대인의 회당을 출입하지 않는 자들과 사귀었다. 열성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의 상대방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일 주일에 한 번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맘씀을 전해야 한다.
Ⅲ.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몇몇 철학자들이 던진 질문.
1. 바울이 만나서 이야기하였으나 그를 반대한 사람들. "그는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다"(17절).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고 무시하였으며 그가 하는 말에도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나눌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는 몇몇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전혀 반대되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1)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쾌락주의자들(Epicureans)이 있었다. 이들은 "신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신을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게으르고 비활동적인 존재로 생각했고 선과 악 사이에도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고 또 통치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행하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두려워할 벌도 기대랄 만한 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가 대항하여 없애려고 하는 무신론적인 개념들을 다 허용하고 있었다. 쾌락주의자들은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신은 부인하라고 가르치신 그 자신 안에서 쾌락을 추구하였다.
(2)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한 것이 곧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쾌락주의자들의 육체와 안목이 정욕에 탐닉하였듯이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자만심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덕성있는 사람을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지도 않다고 생각하였고 오히려 신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세네카(seneca)의 말처럼 Esse aliquid quo Sapiens antecedat deum - 즉 현명한 사람은 신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기독교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을 부정하라고 가르치며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만이 최상이라고 가르친다.
2.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받은 인상.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모욕을 바울도 받았다(18절).
(1)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말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울을 미치광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의도도 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말하였다. 희랍어 사본의 o, spermolo,goj outoj - 즉 말을 떠벌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아무런 뜻과 목적도 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서 한 마디 하고 저기 가서 한 마디 하는 자라는 뜻이다. 또는 아 밀은 "씨앗을 줍는 자"라는 뜻이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 용어가 고기로도 사용할 수 없고 그렇다고 새장에 넣어 두러 볼 가치도 없는 작은 종류의 새에게 사용된 말이라고 한다. 이 새들은 "밭이나 또는 길가에 흙에 덮이지 않고 드러난 채 있는 씨앗을 쪼아 먹으며, 이것을 쪼아 먹으러 여기 저기로 깡충거리며 돌아다닌다"고 전해준다. 그들은 바울을 그러한 가엽고 경멸할 만한 동물로 간주했거나 또는 새가 여기저기서 곡식을 줍 듯이 여기 저기서 한두 푼씩 돈을 벌기 위하여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지식을 팔아먹는 자라 생각했다. 그들은 바울을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간주했으며 오늘날의 어릿광대 정도로 여겼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울을 그 신에 의하여 어떻게 자신이 유명해지려는 의도로 말하고 다니는 자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만일 그가 이방신을 전하려고 했다면 그에게 아덴보다 더 좋은 시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였듯이 새로운 이방신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예수와 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처음 왔을 때부터 때때로 예수와 몸의 부활이라는 두 줄만으로 하아프를 연주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훈들이다. 즉 그리스도와 내세는 우리의 믿음의 본질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갈 길이고 하늘나라는 우리의 목적지인 것이다. 비록 바울이 이 두 가지사실을 신격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와 부활을 신격화한다고 생각하였다. 희랍어 사본에 "ton ihsoun kai, thn a,na,stasin"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이 두 가지를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하여 예수는 새로운 남성신이고 부활은 그것을 여성 명사로 받아들여 "아나스타시스"라는 여신으로 받아들였다. 이같이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교적인 덧입힘으로 그 가르침의 유익을 상실하고 또한 예수를 딛고 부활을 바라는 것 같지만 새로운 귀신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있었다.
3. 그들의 제안. 그들은 바울로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말하게 하여 공개적으로 경청하고 판단을 내리자고 제안하였다(19,20절).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부분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관해 좀 더 완전한 지식을 갖기를 원했다.
(1) 그들은 그 교리를 이상하고 놀라운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덴에서 오랫 동안 가르쳐지고 고백된 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의 요점과 의도를 이해랄 수 없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들은 적이 없으며 이제 너희들의 전하는 의도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사실에 의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저명한 책 가운데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이 없었거나 또는 전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전혀 새롭고 생소한 것으로 들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성령의 영감에 의한 책은 단 한 권밖에 없는데 바로 이 책이 그들에게 생소한 유일한 책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 책에 대하여 당연히 있어야 할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 첫 페이지를 얼어봄으로 우주 기원에 관한 그들간의 대단한 논쟁은 종결되고 말았을 것이다.
(2) 그들은 그 가르침이 다만 새롭고 이상했기에 그것에 관해서 좀 더 알기를 원했다. "우리가 너의 말하는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복은 그것이(신들의 비밀같이) 심오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게 되기를 바라며 또 우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이러한 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우리에게 말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공정한 제안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은 적합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같이 공정했기에 그것에 관한 근거를 파악하기까지에는 그 가르침을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3) 바울로 그의 교리를 공정으로 선포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그를 데리고 간 장소. 그것은 아레오바로로써 그 말의 뜻은 "군신(軍神)의 언덕"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그들 도시의 의사당이었다. 여기서 행정 장관들이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모였고 재판이 열리곤 하였다. 그리고 그곳은 또한 대학이나 학교의 강당 같은 곳으로써 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학설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개최되는 재판은 그 공정성 때문에 유명하였으며 그러기에 여러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 와 고소를 제기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신을 부정했다면 그는 그 재판정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디아고라스(Diagoras)는 신들을 부정하는 자라고 하여 그들에 의해 사형 당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신도 공인될 수 없었다. 그들은 바울을 시험하기 위해 그를 바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후보자들로서였다.
4. 그 도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격(21절). "모든 아덴 사람들" 즉 그곳의 원주민이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 그곳에 여행온 나그네들은 "가장 새로된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왜 바울의 교리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였는가 하는 이유이다. 즉 그 가르침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하여 본문에 묘사된 것은 썩 좋게 묘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짧은 이 말에서 많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들은 모두 대화를 좋아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에게 읽는 것과 명상하는 일에 착염하라"고 권면한다(딤전 4:13, 15).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얻는 것을 멸시하고 이야기하고 듣기를 더 좋아했다. 좋은 교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며 학문의 기초를 닦는 사람을 세련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만 대화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지식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매우 추상적이다.
(2) 그들은 고상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가장 새로운 것에 대하여 듣고 말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철학의 새로운 도식과 개념을 알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으며, 정치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통치 계획, 그리고 종교에서는 새롭게 발흥하는(신 32:17) 새로운 신들과 새로운 악마, 그리고 새로운 양식의 우상과 제단(왕하 16:10)을 알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변화하는 것에 민감하였다. 그들과 같은 아덴 사람으로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enes)는 오래 전에 그들의 이러한 생활을 책하였다. 즉 그는 그의 연설 중에서(philippic; 데모스테네스가 마게도니야의 왕 필립을 공격한 12연설 중 하나) 그들이 저자에서 혹은 그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evi, ti, le etai newteron - 즉 무슨 새로운 소식은 없는가라고 묻는 공통적인 질문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간섭했으며 그것에 집요한 관심을 가졌고 자기들의 일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수다장이는 언제나 "일을 만든다"(딤전 5:13).
(4) "그들은 그것에만 그들이 시간을 소비했다." 시간은 귀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간을 선용하기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도 시간에 의존하며 시간은 영원에로 흡수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이익도 없는 잡담에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기 나라나 다른 나라에서 혹은 우리 이웃이나 친구에게서 일어난 새로운 사건들을 듣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유익하다. 그러나 수다쟁이들이나 신나게 만들고 우리의 시간을 무익하게 낭비하는 것은 조그만 것을 얻기 위해 매우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아덴에서의 바울(2)(사도행전 17:22-31)
우리는 여기서 아덴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를 듣는다. 우리는 사도들의 여러 가지 설교를 지니고 있다.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나, 혹은 구약을 잘 알고 그것을 존경하여 진실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향해 설교한 설교가 있었다. 사도들이 이들에게 한 모든 설교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는 사실이 주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이방인들 즉 거짓신들을 예배하고 참된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자들에 대한 설교를 대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사도들의 설교는 전자의 설교와는 전혀 달랐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예언과 기적에 의해 구속자를 알게 하고 그를 믿게끔 인도하는 것이 사도들의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섭리의 일반적인 역사(役事)를 설명함으로 그들을 창조자에 대한 지식으로 이끌고 그를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사도를 신격화시키려는 루스드라의 미개한 우상 숭배자들에게 행한 설교가 본문과 같은 성격의 설교였다(14:15). 한 가지 차이점은 본문의 말씀은 루스드라에서의 말씀보다는 그 대상이 아덴의 좀더 정중하고 세련된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점이리라. 이 설교는 대단히 유창한 것으로 청중들에게 알맞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는 이 설교를 그 청중을 감안하여서 행하였다.
Ⅰ. 바울의 설교의 주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단 한 분 살아 계시는 참 하나님을 그들로 알게 하여" 그들의 예배의 유일하고 적절한 대상으로 삼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바울은 모든 종교의 제일 원리인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그분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림으로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이루려고 하였다. 바울이 그들이 숭배하고있는 신들을 반대하여 전도한 것은 그들을 무신론자들로 이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방적인 우상 숭배를 폭로한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법정에서 고발되고 처벌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그 도시가 존경하고 있던 신들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신(邪神)을 소개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난이 바울에게도 주어졌다. 이제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그가 그곳의 신들을 무시한다는 고소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새로운 신들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옛부터 계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전하려 한 것뿐이라고 선언함으로 후자의 고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변호한다.
1.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에 관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만든 거짓 신들을 예배하느라고 그들을 창조한 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Deos qui rogat ille facit - 즉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그들을 만든 하나님을 소개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7절)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그들을 고발한 죄는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 보내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악마와 영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귀신들과 영혼들이 그들이 예배하는 우상 속에 깃들어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 이웃들보다 뛰어나게 많은 신들을 섬기고 너희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우상에게 경배한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때가 왔도다. deisi daimones teroi - 즉 너희가 범사에 정하는도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교를 더욱 부패시키는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그 종교를 개혁할 수 있는 요소를 보여 주리라." 그들의 이웃 국가들은 그들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들의 이 종교성을 칭찬했다. 그럼에도 그가 부드럽게 책망하였고 그들의 종교심을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그들을 격분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울은 그들이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뜻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들은 모든 면에서 특출하게 종교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22절을 "너희들은 너희 신앙에 매우 헌신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또는 이 본문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너희들은 말하자면 (w,j) 필요 이상으로 미신적이다"라는 뜻을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는 그가 인지한 사실만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qewrw, - 즉 내가 보건데 또는 "내가 주의해 보니"라고 서두를 붙인다. 그들은 바울이 새로운 신을 소개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아니, 너희들은 이미 충분한 잡신들을 소지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그러한 신들을 더 보태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2. 바울은 그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세움으로 이 한 분 참된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선포하였음을 그들에게 증거한다. 즉 이러한 단을 그들이 세운 것은 그들이 아직도 알지 못하는 신인 하나님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혜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덴에 참 하나님은 모르는 하나님이요 또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이제 너희들이 나를 환영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분이 바로 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음을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을 내가 알게 하려 왔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 자리에 복음을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1)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봉헌된 단"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가지 학설.
[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의 의미가 "그의 영광이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즉 희랍인들이 이것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말하기에는 너무 황홀하고 그의 본질을 알아 낼 수 없는 바로 유대인의 하나님을 뜻하고자 했다고 본다. 아덴 사람들은 아마 유대인들로부터, 혹은 구약 성서의 기록에서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나 그러면서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사 45:15)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Deus incertus, incertum Mosis Numen - 즉 불확실한 하나님, 모세의 불확실한 신 또는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 하나님 즉 탐구에 의해서 완전히 알 수 없는 이 하나님을 이제 너희들에게 선포한다"고 말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의 의미를 "그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불행인 하나님에게"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를 아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말이라고 본다. 혹자는 아덴에 역병(疫病)이 창궐할 때에 그들은 역병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모든 신들에게 차례차례 희생제를 드렸는데 그때 그들은 양 몇 마리를 풀어 놓아 그들이 가는 대로 놔두고 있다가 그 양들이 눕는 곳에 tw/ prosh,konti - 즉 참 하나님에게 다른 말로 "역병을 종식시킬 수 있으신 하나님에게"드리는 단을 세우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 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비문을 새려 넣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아덴의 가장 유명한 역사가들 중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아덴 사람들이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의 신들에게, 즉 우기가 모르는 신들에게"라는 말을 새긴 많은 단들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 준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어떤 사람들은 "아덴에 있는 알지 못하는 신"에 의해 맹세하곤 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루시안(Lucian)도 이 같은 주장을 한다.
(2) 바울이 이 사실에 관해 얼마나 조심성있게 언급하고 있는가를 주의해 보자. 그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신비로운 지식에 대하여 낯선 인간으로 무리하게 끼어들고 있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일별하였다." 즉 "그들의 예배와 신성시하는 것들을 일별하여 보았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은 공개적인 것이였으므로 그는 제제를 받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이같이 보고 말하는 것이므로 그곳 종교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타당성을 지닌 것이었다. 사릴 바울이 아주 조심성있고 재치있게 이 모든 것을 살펴 보고 그 본 것을 참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연설에 이용하였다.
[1]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숭배하고 있었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새롭거나 낯선 신을 그들에게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너희들은 그를 의지하고 또한 그도 일종의 존경을 너희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2] 그는 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예배하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지식으로 유명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수치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이제 너희에게서 그 수치를 제거하여 주고 너희들이 모르고 예배했던 그를 이제는 이해하면서 예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 이로써 이제 너희들의 맹목적인 헌신은 합리성을 띤 예배로 변모될 것이며 너희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예배하게 되지 않게 될 것이다."
Ⅱ.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들어 살아계시며 참된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증거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선포하였고 또 그분에 대한 예배로 너희를 초대한 바로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그것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나타난 증거에 의하여 너희가 불가시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믿게 되어야 하며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깨달아야 하리라. 보편적으로 이방인들은 그리고 특별히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신을 섬김에 있어서 철학자들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말을 따라 행동하였다. 실상 많은 철학자들는 무한히 완전하시고 우주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최상의 유일한 누멘(Numen)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뛰어나게 묘사하였었다(플라톤의 저술과 훨씬 후대의 시세로의 저술들에서 이러한 특징을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들은 쓸모없는 허구만 늘어 놓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방 신학에서 또는 신학이라기 보다 귀신학(귀神學)에서 성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플라톤의 작품들이 아니라 호머의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무기력하게 이러한 추세에 굴종하며 그들의 명상의 세계 속에서 자기들만이 안주하였으며 자신들의 세계에서만 철학적인 문제로 논쟁하고 또 생도들에게 그러한 문제들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철학으로 우상 숭배를 배격해야 마땅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들 철학에 관하여 확신이 별로 없었고 그러한 철학적 사변들이 자기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조국의 미신에로 스스로 빠져 들었고 또 그들이 그렇게 지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Eamus ad communen errorem - 즉 누구나 다 범하는 잘못인데 우리라고 버틸 것이 있는가! 그렇게 사는거지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의 철학을 개조하기 위한 헌신적 노력을 기울인다(즉 그들의 철학의 오류를 시정해 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 한 분이고 살아 계시며 참된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로 자기들의 종교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게 하고 그들의 다신론과 우상 숭배에서 그들이 벗어 나오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바울이 여기서 그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려는 하나님을 얼마나 영광된 존재로 묘사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1. "그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다. 전지전능한 아버지이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이 사실은 많은 철학자들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철학자들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다. "세상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현재 있는 것은 과거의 것에서 변함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피규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환상에 젖어 있었다. "세상 물질은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에 의해 생성되었다. 그 원자들은 영구 운동을 하고 있던 것으로 우연하게 돌발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형성시킨 것이다." 이러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바울은 우주와 그 안의 만유가 생성된 태초에 무한한 지혜의 섭리를 따라 무한한 힘의 작용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의 기원이 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영원한 물질이 있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 그는 그러므로 "천지의 주재이시다." 즉 그는 모든 존재, 능력, 천지의 풍요한 물질적, 비물질적 또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합법적인 소유자이시며 경영주이고 소유주이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천지창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그가 만물을 지배하실 권리가 있으신 것이다. 또한 그가 존재하게 한 것에 그가 법칙을 부여하실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는 것이다.
3.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에 의해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26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하였다. 그가 첫 인간을 만드셨으므로 그는 모든 인간을 만드신 것이 되며 또한 모든 인간의 육신의 조성자이시며 모든 인간 영혼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국가를 만드셨다. 즉 그는 한 나라의 백성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는 모든 국가도 만드셨다. 그는 국가의 창시자이며 그들 상호간의 보존과 이익을 도모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는 그들의 성정을 같도록 지으셨다"고 하였다. 같은 한 조상의 후예이므로 아담 안에서 그들은 모두 같은 혈족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그들은 또한 노아의 혈족들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같은 피조물과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라고 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온 땅의 지면에 거하게 하셨사오니" 그는 다함이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인간의 자손들에게 땅의 모든 결실의 충만한 것을 주셨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들을 한 장소에서만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퍼져서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가 모든 다른 나라들을 경멸하는 식으로 같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땅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한 혈통이기 때문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하고 그곳 토착민으로서 혈통면에서 그 어느 민족도 자기들에게 비견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도는 그들의 그러한 거짓된 자만심을 이곳에서 꺾어버린다.
4. 하나님은 모든 창조에 커다란 은혜를 베푸는 자이시다(25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만 "첫 사람(아담)에게만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정신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안에 영혼을 형성시키셨다. 그는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하실 때만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섭리는 계속적인 창조이다. 그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호흡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은혜로 다음 순간의 호흡을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호흡하는 것은 그의 숨결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호흡은 그의 주장 아래 있는 것이다"(단 5:23). "그는 모든 인간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생명와 호흡을 주신다." 가장 천한 인간이라도 그에 의해서 살며 그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또한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철학자들이나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라 할지라도 그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주신다. 인간의 자손들만이 아니라 좀더 낮은 피조물인 동물 및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모든 것들에게" 생명을 주신다(창 6:17).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호흡을 받는다. 또한 자신이 생명과 호흡을 주는 자들에게 그는 또한 모든 것들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신다. 그러므로 "땅은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 차 있다"(시 104:24, 27)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다.
5. 하나님은 그의 뜻의 섭리에 따라 모든 인류의 사건들을 처리하는 절대적 통치자이시다(26절). 그는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자.
(1) 하나님의 우리를 다스리시는 절대적 통치권. 그는 모든 사건을 ori,saj - 즉 결정하신다. 또한 만물은 그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은 항거할 수 없으며 변경될 수 없다.
(2) 그의 다스림의 지혜. 하나님은 이미 정하신 뜻을 따라 결정하신다. 영원한 마음(Eternal Mind)이신 그의 결정은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고 영원한 계획의 결과이며 신의 계율의 사본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내게 작정하신 것을 또한 이루실 것이라"(욥 23:14)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3) 그의 섭리에 의하여 정해진 것들. 그러한 것들은 시간과 공간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존의 기간과 장소는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에 이해서 결정되고 예정된 것이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기간"(연대)을 정하셨다. 시간은 우리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확정시켰다. "우리들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있다." 그것은 길게 하거나. 짧게 하거나, 또는 고달프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야 할 때와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를 정하시고 또 이루신다. 그가 우리의 출생의 시기와 죽음의 때를 결정하신다(전 3:1, 2). 그리고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일어나는 모든 작은 일들을 정하시며 우리가 관여된 모든 때를 그가 결정하신다. 그러한 시간들이 번영의 시간이었든 불행한 시간이었든 그것들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의 경계를 정하시고 또한 이루신다." 이 세상을 인간의 자손들의 주거지로 정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거주 지역이 경계를 설정하셨다. 우리의 삶이 정해진 특정한 거주지 우리의 조국, 정착지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또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주지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하며 최선의 것으로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6.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한다"(27절).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그는 "우리의 오른편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생의 고삐를 잡고 계시며" 항상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러한 형상에 의해 하나님을 그들과 함께 하시게 하려고 하였다. 사도는 본문에서 그러한 시도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한 영(Spirit)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서도 멀리 계시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우리가 함께 하는 것처럼 가정한다고 하여도 결코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우리를 더욱 멀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 비록 우리가 있는 곳이 성전이나 제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바치는 존경을 받으며 우리가 그에게 요청하는 자비를 베풀어 준다. 주님은 모든 전 존재의 주님이시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모는 자들에게 "부유하시며"(롬 10:12) 또한 "가까이 계신다"(신 4:7). 그는 우리들이 "어떠한 곳에서도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며 그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신다. 어느 지방, 어느 국가든지 혹은 우리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세상에서 우리의 지위가 혹은 우리의 정황이 어떻든지 우리가 궁궐에 살든지, 오두막 집에서 살든지, 군중들 속에 있든지 혼자 구석에 있든지, 도시나 사막이나, 바다 위 높은 것이나 깊은 바다 속에 있든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틀림 없는 사실이다.
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또 존재하고 있다"(28절). 우리들은 냇물이 그 근원의 샘의 원천을 의지하듯 혹은 햇빛이 태양에서 발원되듯 하나님의 섭리를 필요로 하고 언제나 의지한다.
(1)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산다." 이 말은 우리 생명의 지속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고 그의 섭리의 계속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 목숨의 존재 시간을 좌우하는 분이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박탈할 수밖에 없던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힘입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과 선하심과 아버지다운 돌보심에 힘입어서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들의 덧없는 목숨이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의 분노에 찬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의 적극적 행동을 보류하시기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 죽어갈 것이다.
(2) "그 안에서 우리는 기동한다." 우리들의 몸이 움직이고 작동하는 것, 또한 수만 가지 일들을 우리가 이리저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 또한 우리에게 적절한 대상을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우리가 소유한 것 등이 그의 섭리와의 끊임없는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육체로 움직이게 한다. 그에 의하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의 손도 발도 그리고 혀도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움직임의 제일 원인인 동시에 첫 제동자이다.
(3) "그 안에서 또한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 인간 존재의 처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의 계속적인 돌봄과 선하심에 힘입어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해 우리가 비존재 속으로 침몰하지 않고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소유하여 과거나 지금이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생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또 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여 우리는 비천한 짐승의 상태로 전락하지도 않으며 비참한 악마의 상태로 전락되지도 않는다.
8. 그러한 모든 혜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입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낳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신 32:6, 18). 그리고 "그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양육했다"(사 1:2). 이러한 모든 경우에 대하여 대적자들은 argumentum ad hominem - 즉 인간의 말에 근거한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기에 사도는 여기서 바울과 같은 지방 사람으로 즉 길리기아 출신으로 희랍 시인 가운데 하나인 아라투스(Aratus)의 글을 인용한다. 아라투스는 그의 책 phenomena의 서두에서 이방의 신인 쥬피터(그는 절대 하나님을 시적으로 표현한 자인데)에 대하여 "touga,r kai genoj edmen - 즉 왜냐하면 우리는 또한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바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며 움직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다른 시를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spiritus intus alit, totam que infusa per artus Mens agitat molem - 즉 이 살아서 움직이는 마음이 온 우주에 충만해 있네. 그리고 그것이 거대한 물체와 결합하며 조화를 이루네(버질의 에네아드 4장). Ets Deus in nobis, agitante calescimus illo - 즉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다 (Ovid의 Fast 6장 중에서). Jupiter est quodeun que vides, Quocunque moveris - 즉 네가 바라보는 곳은 어느 곳이나, 네가 배회하는 곳 어느 곳이나 전 우주가 쥬피터로 충만하다(Lucan제 2 권).
그러나 바울은 짧은 글귀로 많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이 아라투스(Aratus)의 글을 선택한다. 이 사실에 의해 바울 자신이 학자임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인간의 지식이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서 특별히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확신시키는 데 있어서 바람직한 장식품은 동시에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 전도사로 그들의 무기로 그들을 무찌를 수 있게 해 주며 골리앗의 머리를 골리앗의 칼로 자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적들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진리의 대적들을 그들의 요새 밖으로 격리시킬 수 있겠는가? 또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과 관계를 잊고 그 관계와 반대되는 행위를 한다면 그리고 오히려 이방 시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그의 자손이고" 그에 의해서 지음받았으며 그를 위해서 지음받았고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돌봄을 받는 것 이상으로 그의 섭리에 의해 돌봄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제안에 복종해야 하고, "그에게 존귀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또한 그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만이 기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시 그를 목적삼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이 우리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 존재의 모든 도움과 위로를 받고 있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존재를 봉헌해야 하고, 그에게 의탁함으로 새로운 존재, 더 나은 존재,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존재로 변모되어야 한다.
Ⅲ.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에 근거하여 바울은 예언자들이 오래 전에 하였듯이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의 어리석음을 추론한다. 만일 그의 말대로 사실이 그러하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1. 하나님은 어떤 형상에 의해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육신을 지닌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우리 영혼의 (이 영혼은 우리를 구성하는 주요 부분으로 바로 이 영혼이 있으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소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그는 영(spirit)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존재를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29절).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과 같은 형태로 인간의 영혼을 만들므로 인간을 영예롭게 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맘일 그의 육신과 같은 형태로 하나님을 만든다면 하나님은 모독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됨은 영적이며 무한하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좋은 물질인 금이나 은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어떤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잘못되고 부적당한 생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아무리 기이한 형태로 조각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그의 용모나 자태 그리고 의상을 아무리 좋게 의미심장하게 새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 것의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2. 다음 "그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24절)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떠한 신전에 계시거나 또한 건물에 의해 행동의 제약을 당하시지 않는다. 성전이 결코 하나님을 우리와 가까운 곳으로 모셔올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도 없다. 성전은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편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시 쉬거나 머물러 있기 위한 어떠한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현현을 찬란하게 하게 하기 위해 건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만들어진" 경건하고 고결한 마음, "그 속에 하나님은 거하며 그리고 그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신다"(왕상 8:27; 사 66:1, 2 참조).
3. 또한 그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아니하며"(qerapeu,etai) 사람의 손에 의해 편의를 제공받거나 도움을 받으시지 아니한다는 사실이다(25절). 모든 것을 만들며 모든 것을 유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므로 그는 우리가 하는 어떤 봉사에 의해 이익을 얻으실 수도 없고 그러한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또 모든 것을 끌어낸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풍족히 갖추신 분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족하실 수밖에 없으며 독립적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시며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 하나님에게 우리들의 어떤 섬김이 필요할 것이며, 그러한 섬김에 의해서 그가 무슨 이익을 얻으시겠는가? 사실 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 또는 인간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 진리에 대하여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속한 이방인들은 신에게도 집과 음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성전을 세우고 그들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쳤다(욥 35:5-8; 시 50:4, 8 을 참조).
4. 이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27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려 하심이로다"고 하였다. 즉 이는 올바른 방법으로 그를 경외하고 예배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생명과 모든 생활의 위로를 얻는 데 계속 그를 의지하게끔 하며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그리고 그의 우리에 대한 섭리, 그의 우리를 향하신 관대함의 분명한 암시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암시를 주심은 우리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욥 35:10, 11)라고 그를 찾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우리로 그를 섬기며 그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게 하시며 또한 우리로 그의 가호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행복을 찾게 하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성품, 특별히 우리들의 영혼의 고상한 힘과 기능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고 숙고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의 의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암시는 성령의 계시에 의한 발견과 비교한다면 너무나 어두운 것이므로 우리가 그 암시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기에는 심히 서투름으로 이 계시를 받기 못한 사람들은 "우연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를 발견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1) 그들이 자연 계시에 의거한 탐구에 의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는 매우 불확실한 것이다. 혹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 그들이 설령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발견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에 대한 혼잡한 개념을 얻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둠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장님들처럼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그들의 노상에서 우연히 마주쳐 오는 것을 붙잡을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머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는 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매우 혼동된 개념에 불과하며 상식적인 깨달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의 철학자들도 그러한 말을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qei/on genoj erti rrotoioj - 즉 인간은 신의 성품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헤라클리토스는 "인간이란 무엇이냐"하는 질문을 받고 qeoi znhto,i - 즉 가시적인 신이다하고 대답하였으며, 그러면 "신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는 aqa,natoi anqrwpo - 즉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핀달(Pindar)은 En a,ndrw/n e[n zewn genoj - 즉 신과 인간은 가까운 친척이다고 말하였다. 우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막연한 지식이다. 그것은 더듬어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자연 계시에 이해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명료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을 알 수 있게 되었기에 감사히 여겨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를 더듬어 찾아서는 안 된다. 거울 앞에서 하듯 얼굴을 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Ⅳ. 바울은 나아가 그들에게 그들의 우상 숭배를 참회하고 그것들로부터 전향하도록 종용한다(30, 31절). 이것은 학문의 도시에서 행한 바울 설교의 실질적인 부분이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한 후(23절)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회개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참고 들으려고 하였다면 그는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른 신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 그들에게 더 이상 어리석은 방법으로 예배하지 말 것과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살아계시고 진실한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설득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전까지 이방 세계를 향하여 취하신 하나님의 행위. 이에 대하여 본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지 아니하셨다"(30절)고 전해 준다.(1) 그때는 엄청난 무지의 시대였다. 그리스도 시대 바로 이전까지 이방인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학문이 어느 때보다도 번창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들은 엄청난 무지 가운데 있었다. 이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도 몰랐고 또 그에게 예배를 드리되 모르고 경배하였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무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2) 이러한 무지의 시대를 하나님은 허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 준다.
[1] 그들을 허물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무지의 시대를 경멸하고 무시하셨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그들에게 그의 복음을 보내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영광이 다른 이방 신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그를 매우 격분케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대를 싫어하고 미워하였다. 어떤 이들은 본문을 그렇게 이해한다.
[2]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들을 허물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 시대를 허물치 아니하셨다. 그는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였듯이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러한 우상 숭배를 못하게 그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에게 하셨듯이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하여 벌을 내리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섭리의 은혜는 베풀었다(행 14:16, 17). 그러므로 이르기를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시 50:21) 라고 하였다. 그는 그가 지금 행하시듯이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회개의 계기를 마련해 주시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을 더 증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지한 상태에 있기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더 큰 빛을 보내지 않았다. 또는 그가 그들에게 사건마다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신 것은 그들이 그 일을 모르고 행하였기 때문이었다(딤전 1:13 참조).
2. 하나님이 복음에 의하여 이방인들에게 부여한 지시. 그는 이제야 그들 가운데도 복음을 주셨다. 그는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30절). 즉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길을 바꾸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좀더 분명하게 행동하며 우상 숭배를 제거하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전념하라고 명하셨다. 그보다 모든 죄로부터 오는 슬픔과 부끄러움에서 돌이켜 기쁨과 확고한 태도로 모든 의무를 다하라고 하신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만약 그가 우리들에게 아직 회개의 여지가 있으니 회개하면 용납하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커다란 은총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사랑을 베푼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권위를 발동시키시고 우리의 의무를 다함이 곧 우리의 특권이 되게 하셨다.
(2) 그의 명령은 "각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명령이다." 그는 그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또한 계시의 혜택에서 제외된 악마들에게가 아니라 사람에게 명하신다. 즉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인간은 회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회개에 초대받고 있으며 회개에 의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모든 곳에 복음을 전도하라는 위임을 받은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명령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이 보내졌다. 그러나 사도들은 "회개와 사유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다.
(3) 복음의 시대인 현재에는 하나님의 지시는 더욱 간절하게 명령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 시대에 행하였던 것보다 복음에 의해 그들을 더 격려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제 죄사함의 길이 전보다 더 넓어졌으며 약속은 더욱 확고하게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회개하라. 마침내 회개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무 오랫 동안 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회개해야 할 때이다. 잠시 후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이 명령이 강조되는 중대한 이유. 그것은 다가올 심판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명한다. 왜냐하면 "이는 천하를 공으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다"(31절). 그리고 지금 복음의 빛 아래서 어느 때보다 저 세상에서 받을 상벌이 더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또한 그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자녀들에게 존재할 수 있고 인간으로의 기능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가 주신 그 삶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설명할 것을 요청하시며 또한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그는 보상하신다. 즉 몸이 영혼과 일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가 또는 영혼이 몸에 예속되어 육체를 위한 삶에만 빠져 있는가에 따라 보상하신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고 하였다. 지금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다스림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친구들에게는 상으로 보답할 것이며 반역자들에게는 벌을 내릴 것이다.
(2)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들을 통괄적으로 검열하고 그들의 영원한 거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지정된 날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날은 정해져 있으며 변경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날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결정되는 날이며 보상의 날이며 이 세상의 모든 날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3) 세상은 공의로 심판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수만을 하는 의롭지 못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모든 인간들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 무오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내린 그의 판결은 절대 항변할 수 없으며 또한 이 판결을 무시한 어떤 예외적인 사례도 없을 것이다.
(4)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사람에 의해"(31절)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모든 심판이 그에게 위임된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여수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그에 의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고, 구원하고 통치하며 그에 의해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5)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심판관으로 임명되고 정해졌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영광을 입히셨다는 것은 또한 그에게 심판관의 영광을 주시겠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나님이 주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킨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받음의 완전한 성취일 것이다. 시작하신 이가 또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적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게 하여 그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자. 그리고 그의 모든 친구들로 하여금 이 사실들을 확신시키고 그의 안에서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하자.
(6) 장차 올 심판과 그리스도가 심판날에 하실 놀라운 일에 대한 생각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길만이 그 심판관을 우리의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날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이거나 간에 공포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아는고로 기쁨으로 그들의 머리를 들 것이다."
아덴에서는 바울(3)(사도행전 17:32-34)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의 결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우리는 본문에서 대하게 된다.
Ⅰ. 복음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게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복음은 다른 여느 곳에서처럼 매우 적은 성공을 아덴에서 이룩하였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교만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였듯이 이곳 아덴의 철학자들도 교만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하여 사도들에 대해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 몇몇 사람들은 바울과 그의 설교를 비웃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참을성 있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32절). 그러나 그 얘기를 듣고는 그들은 바울을 꾸짖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울을 "기롱했다." 바울이 앞서 이야기한 것들은 그들의 학교에서 가끔 들은 적이 있는 어떤 것과 유사하였고 또 장래에 있을 부활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죽은 자의 부활"(역사 속에 이미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이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철학의 원리와 상반되었으므로 더 이상 참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즉 바울의 말은 A privatione ad habitum non datur regressus - 즉 생명은 한 번 가며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철학적 원리와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영웅들이 죽으면 그 영웅들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고 그들은 반문했다.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된 이 위대한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부활의 사실이 그들에게 전해지자 곧 그들은 그것을 조롱했으며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거룩한 진리가 신성 모독자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2. 그러나 다른 몇몇 사람들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해 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32젖)고 말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사실들을 당장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즉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네 맘을 다시 듣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명백하여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무시하고 그의 가르침을 쟁론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자기들에게 적용할 수 없게 하거나 그 가르침을 수정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문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그들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을 논쟁거리고 삼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실질적 가르침에서 오는 이윤을 상실한다. 또는 기독교 가르침에 있는 난해한 몇 가지 요소를 반대하므로 기독교에서 오는 유익을 상실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만일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밝혀진 만큼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 먹고 또 결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인간에게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요 7:17). 지금 주어지고 있는 확신어린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펠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씀을 들을 또 다른 기회로 연기함으로써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다른 기회에 그 말씀에 관해 듣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가 될 것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같이 악마는 그들을 기만하여 그들에게 현재의 시간을 빼앗으므로 결국 그들의 모든 기회를 기만하는 방법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3. 그런 까닭에 바울은 그들을 그들의 복음에 대한 현재의 인식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에게 별로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바울은 저희 가운데서 떠난다"(33절). 그러나 아마 바울은 그의 말을 다시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좋아하는 때는 언제든지 그들과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Ⅱ. 그러나 그곳에서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34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나 믿음을 갖게 된 사람도 있었다.
1. 그를 따르며 믿게 된 몇 사람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려 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바울과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나 그들은 그를 따라 가려 하였고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굳게 따르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믿었다.2. 특별히 두 사람의 이름이 언급된다. 한 사람은 저명한 사람으로서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누시오였다. 그는 아레오바고(Areopapus) 또는 군신의 언덕(Mars Hill)이라는 그 곳에 위치한 대법정 또는 의회의 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의 판사나 원로 의원으로서 그 앞에 바울은 소환을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재판관이 이제 바울의 믿음의 아들(회개자)이 되었다. 이디오누시오에 관한 고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덴에서 양육을 받고 애굽에서 점성학을 공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우리 구주의 수난시에 있었던 기적적인 일식(어두워짐)을 관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아덴에 돌아와서 원로원이 되었으며 바울과 토론하였고 바울에 의하여 마침내 그의 잘못과 우상 숭배에서 회개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에 의해 교육을 받아 마침내 아덴에서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Eusebius, lib. V. Cap. 4, lib iv. cap. 22 참조). 본문의 "다마리라 이름하는 여자"는 디오누시오의 부인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기품이 있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쨌든 아덴에서는 다른 곳에서 거두웠던 것보다는 그렇게 큰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기록된 사람들이 몇 사람 되지 않는 적은 사람들이라고 하여 바울에 "헛수고를 하였다"고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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