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부활의 증거(사도행전 1:1-5)
Ⅰ. 우리가 이 책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데오빌로를 마음에 상기하고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보며 그리고 누가복음을 연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그의 말씀이 끊겨진 곳에서 계속될 뿐 아니라 사도들의 활동이 그들의 스승의 활동 즉 그리스도의 활동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게 해 준다.
1. 데오빌로, 데오빌로는 그의 은인으로서 그를 위해 이 책은 쓰여진 것이다(나는 오히려 데오빌로가 누가의 제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 책이야말로 그에게 증정하기 위해 또한 그를 교훈하고 지시하기 위해 계획되었고 그의 지시나 보호를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절). 그의 복음서 앞의 증정하는 글에서 저자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자는 "데오빌로여!"라고 호칭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그가 존엄성을 잃었다거나 지위가 낮아져 명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직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칭호가 주어진 위치를 물러났거나 그의 덕이 높아져서 그에게 주어진 이름 외의 존칭을 경멸했거나 누가가 그와 더욱 친숙해져 그들보다 자유롭게 불렀든지 이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인이거나 비기독교 저술가이거나 고대인들은 그들의 작품을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증정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서 중의 한 권을 특별히 우리의 이름을 부름으로 지적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성서를 받아들여야 함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앞서 기록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2. 그의 복음. 이곳서 그는 그의 복음을 그가 "먼저 기록한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먼저 쓴 글"(to.n prw/ton lo,gon)을 계속하고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 복음서가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내용과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기록하지 않고 전하여진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록된 말씀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앞의 글을 썼고 영감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학자들은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히 6:1). 그들의 안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야만" 한다(전 12:9). 그리고 먼저의 노력의 결과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더 노력하지 말아야 할 변명이 되지 않는다. 저자 누가가 전의 작품에서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사도행전을 세웠던 것처럼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생기를 얻고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설교, 새로운 작품 때문에 옛 것을 잊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마음에 두고 그것들을 보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3. 그의 복음의 내용. 그의 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심부터 모든 것으로"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의 주제도 이와 같은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는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말씀은 그가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 기적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임을 증명해 주었다"(요 3:2). 그가 가르치신 우리의 행할 바 의무는 그가 행하셨던 거룩하고 자비한 행위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가 우리에게 "한 모범이 되셨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오신 스승"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행하고 가르치는 자 즉 그의 삶이 곧 연속적인 설교인자야말로 제일 훌륭한 목사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행하시고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는 그가 가르치셨고 행하셨던 모든 것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다. 그의 사도들은 그가 시작하신 것을 계속하여 수행하였고 오늘날도 같은 것을 행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시키시고 계속하게 하도록 하시며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이 행하고 가르치도록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이 시작하셨던 복음 사업을 전력껏 수행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신다. "이 큰 구원은 주님에 의해 말씀됨으로 시작되었다"(히 2:3).
(3)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 중 특히 누가는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었다." 물론 작은 일까지 모두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이 다양한 말씀들 중 사표가 되는 주제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도 판단할 수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의 말씀이 선포되고(마 4:17) 그의 기적이 처음 행하여지셨는지(요 2:2) 알고 있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비록 모두 기록하지 않았지만 대강의 전반적인 모습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4. 복음서 기록의 시대 범위는 "그가 승천하신 날까지"로 한정되고 있다(2절). 그가 세상을 떠나신 후 그가 몸으로 나타나신 일은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마가복음은 "주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막 16:19) 누가복음도 마찬가지다(눅 24:51). 그리스도는 그가 "승천하시어" 숨어서 하실 다른 사업을 시작하실 때까지 끝까지 계속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Ⅱ.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이 3절에서 입증되고 옹호되고 있다. 누가 복음에서 기록된 부분이 너무 구체적이므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가 부활하신 가장 큰 증거는 "그가 사도들에게 살아서 자신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살으셔서 자신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그를 보았다."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증언을 믿어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믿도록 강요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결코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1. 증거가 절대 확실했기 때문이다. tekmh,ria - 즉 그가 살으셨다는 것과(그들과 같이 거니시고 말씀을 나누었으며 먹고 마시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분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되풀이하여 그들에게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있는 상흔"을 보이셨고 그 사실은 의문시되던 사실에 가장 확실한 증거이었다.2. 그의 보이심은 자주 있었고 또 계속 반복되었다. 그가 그들과 항상 같이 계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자주 나타나시며 그들의 의문과 의심을 점차로 만족하게 해소시켜 주시며 "40일 동안이나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했던 모든 슬픔은 다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지상에 오래 계셔서 제자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듯이 그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신 사실은 우리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연약하심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시고 있다"는 것을 겸손과 연민의 정을 가지고 확신하게 해 주는 것이다.
Ⅲ.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은 이제 그가 그들을 떠나시나 그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시므로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시어" 그의 교훈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으리란 말씀이 지시되고 있다.
1. 그는 그들이 행해야할 사업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리스도가 선택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임무도 따른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가 "사도로 택한 사람들에게 계명이 주어지듯" 특권도 주어졌다. "가령 그가 집을 떠나 여행할 때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길 때"(막 13:34) 그 권한과 함께 "성령을 통하여 계명도 그들에게 주시었다." 그는 대속자로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였고 그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셨다. 그들에게 성령을 주심은 곧 계명을 주심을 뜻하였다. 위로자로서의 성령은 명령자이기도 하시며 그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여 준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그들에게 의무도 부과하신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그들로 하여금 사명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의 성령을 받으라 한다(요 20:22). 그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고 그의 사업을 이루신 후에야 승천하시었다.2. 그는 그들이 가르칠 말씀에 대해 교훈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 그는 그 나라가 어떤 곳이며 앞으로 예정한 사기에 그 나라가 세상에 세워지리라 가르치신다(막 13: 비유). 그는 특히 본서에서 그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은총의 나라로써 저 세상에서는 영광의 나라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자세히 말씀하셨고 그것대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법이 될 계약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위해서였다.
(1) 그들이 성령을 보았다는 받도록 준비시키시고 그 성령의 인도대로 그들이 가도록 예정된 그 길을 따르게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은밀하게 그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며 성령이 오시면 이 진리의 성령이 그들이 말해야할 것을 자세히 알게 해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증하는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가 다시 사셔서 자신을 보여 주신," 제자들은 그가 그들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말씀하셨다는 사실로 그가 그리스도인 줄 알았다. 그 외에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 그렇게 명쾌하고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들을 보시고 정치나 모든 세상 나라, 철학이나 자연계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순전히 신적인 내용과 은총의 나라에 대해서 또한 그들 자신에 관한 일들과 그들이 보냄을 받을 사랑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Ⅳ. 그들이 곧 성령을 받으리라는 특별한 보장과 그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4,5절). "그가 사도와 같이 모이사"라고 했는데 그가 죽으시기 전 지정한 곳인 갈릴리 산에서의 면담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승천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이었다"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6절). 예수께서 지금은 그들에게 갈릴리로 지정하셨지만 거기서 계속 머물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고 거기를 떠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에게 기다릴 것을 명하신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보다 큰 것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어떤 것보다 위대한 것을 그들의 높임 받으신 구세주에게서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1) 그들은 약속된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 그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약속된 긍휼이 임할 것을 믿음으로 바라는 사람들은 "지정된 때"가 이르러 그 긍휼이 나타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 그 때처럼 "때가 가까이 이르를 때"는 우리도 다니엘처럼 간절히 그 날을 바라야만 한다(단 9:3).
(2) 그들은 지정된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거기서 처음으로 성령이 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거룩한 산 시온의 왕이기 때문이요,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사방으로 퍼지겠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세상의 모교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거기서 치욕을 당하셨고 그러기에 거기서 또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그가 사랑하심은 우리에게 우리도 우리의 원수와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라는 가르치심으로 받아야 한다. 사도들은 갈릴리에 있었을 때보다 예루살렘에서 더욱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편안히 기쁨으로 하나님을 믿고 꾸준히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제 사도들은 공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러므로 공회에서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예루살렘은 많은 등불이 세워져야할 제일 적절한 등경이었다.
2. 그는 그들이 헛되이 기다리지 않을 것을 보증하신다.
(1) 그들에게 예정된 축복이 임할 것이며 그 축복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될 것이다"라고 말씀되고 있다. 즉 다음 같은 뜻이다.
[1] "너희에게 성령이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부어질 것이다"라고 한다. 그들에게 이미 성령은 부어졌고(요 20:22) 그 유익함 또한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욱 측량할 수 없는 은사와 은총과 위로를 받을 것이고 이 온갖 선물로 세례받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던 구약의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요엘 2:28; 사 44:3; 37:15).
[2] 제사장들이 성직을 맡게 될 때 세례를 받고 물로 씻어야 했듯이 "너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라 한다." "제사장들이 성별의 징표를 지니었듯이 너희도 같은 의미의 징표를 지닐 것이다. 성령께서 너희를 진리 안으로 더욱 이끌어 주심으로 너희는 진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양심은 성령의 증거하심으로 정하게 되겠고 너희는 사도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3] "그렇게 되면 전에 너희가 주님을 섬겼던 때보다 더 잘 섬기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인도되어 구름바다 가운데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며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견고히 연결되므로 전에 하였던 것처럼 고통이 두려워 그를 다시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2) 이제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씀한다.
[1] 그들은 주님에게서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이며 그들은 성령을 의지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첫째, 성령은 약속에 따라 오시는데 이 약속은 전에 메시야를 보내시므로 영원한 생명이 이제 임하게 되리라는 약속처럼 위대한 것이라 한다(눅 1:72; 요 1, 2:25). 일시적인 행운이 섭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과 영적인 축복은 약속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갈 3:18).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영이 자연과정을 거쳐 우리 안에 주어지고 또 형성되는 것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슥 12: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① 이 선물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의 약속을 교회에 유산으로 물려 주리라 생각하셨다.
② 이 선물이 더욱 확실해지기 위하여서는 이 약속의 유업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으로 믿어야 되리라고 한다.
③ 이 선물이 진정한 은사가 되려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약속을 굳게 잡고 그 약속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도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여진다.
둘째,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① 그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중재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보았고 그의 예정만을 따르시고 그의 뜻만을 간직하셨다.
② 또한 성령은 우리들의 아버지의 약속이다. 그가 우리를 "양자로 택하셨다면" 또한 "양자의 성령"을 주실 것이다(갈 4:5, 6). 그는 "빛의 아버지로서, 모든 영의 아버지로서 자비하신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이다."
셋째, 그들은 아버지의 이 약속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여러 번 들었다. 특히 운명하시기 직전 고별 설교에서 "보혜사"가 오실 것을 되풀이하여 확증해 주셨다. 보혜사는 아버지의 약속의 확인으로 우리로 그 약속에 의지하도록 격려하신다. 이 약속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들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와 아멘이다." "너희는 내게서 그것을 들었고 나는 그것을 이루겠노라" 말씀하신다.
[2]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 예언을 상기시키신다(5절). "너희는 내게서 뿐만 아니라 요한으로부터 그 약속에 대하여 들었도다." 요한이 말하기를(마 3:11)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요한의 말을 인용하고 성령의 은사를 그의 예언의 성취로 보심으로 요한에게 명예를 안겨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그의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한다"는 말씀을 이루셨다(사 44:26).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그의 사자들보다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 그들이 은총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음은 그들의 명예이다. 그러나 "은총의 성령"을 주신 것은 그의 절대적 "권한인" 것이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요" 성령으로 가르칠 것이며 성령으로 중재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을 통한 역사는 가장 뛰어난 사자의 역사보다 더 귀한 것이다.
(3) 이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같이 약속되었고 예언되었고 기다려졌던 성령의 은사를 사도들이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그 약속은 완전히 성취된다. 이분이 바로 "오시리라던 분"이요, 그러기에 "다른 사람은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성령은 "며칠 안 되어" 주어지리라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매일 성령을 받기에 합당한 마음을 보존하도록 며칠이 걸린다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다른 성경 말씀을 보면 이 성령의 선물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리라 한다. 이 말씀은 특별한 권능에 대해 말해 주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첫 번 전도자들과 교회 설립자들에게 주어졌고 그러므로 그 능력에 의해, 떨지 않고 그 시대에게 말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와 그 가르침의 증거를 후손들에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에 의해, 또 약속을 수행함으로, 우리는 신약을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부탁(사도행전 1:6-11)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천사들을 통하여 그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거기서는 다시 몇 날 후 예루셀렘에서 그들을 만나시리라 약속하신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제자들의 복종을 시험하셨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승천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그가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함께 모였다." 이 사실에 대해 본문은 설명해 준다.
Ⅰ. 그들이 예수를 만나서 한 질문. 그들은 사전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처럼 그에게 nemine contradicente - 즉 함께 와서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들은 떼를 짓고 들어와 한 가족과 같은 기분으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한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1. "그래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당신을 죽으시게 한 현재의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또한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긴 로마 황제에게 순순히 넘기시고 이스라엘을 그의 속국으로 삼으시려 하나이까? 도대체 주님과 우리를 증오하고 박해한 자들에게 권력을 맡기시다니 이는 불가하나이다." 그렇지 앍으면 이러한 뜻도 될 수 있다.2. "그래 주님은 유대 나라를 그 민족에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의 왕으로 당신은 섬김을 받으실 것입니까?"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잘못된 질문이었다.
(1) 그 나라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리라"고 생각하였다. 즉 그가 유대 민족을 "다윗왕이나 솔로몬왕 때처럼 아사왕이나 여호사밧왕 때의 국가처럼" 세계에서 위대하고 뛰어난 국가로 일으켜 줄 것을 바랬다. 그는 실로(shilo)가 되시어 "유대이게 왕홀을 회복해 주시고 율법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신 것은 사실이나 "이스라엘에게 회복시켜 주실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 나라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선한 사람들까지도 교회의 부흥을 외적인 허영과 권력에서 찾으려하기 얼마나 쉬운가. 이스라엘 나라가 그들에게 회복되지 않는 한 영광은 없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세력이 주어지지 않는 한 불만스러워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 까닭에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은 십자가뿐이요, 그 나라는 저 세상에서 기다리라고 말씀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교육의 편견을 극복하기도 몹시 어려운 것이다. 어릴 때부터 메시야는 이 세상의 한 왕과 같다는 개념에 젖어 있었던 제자들은 그의 나라를 영적인 것으로 믿기에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3] 우리가 자기 민족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시켜" 주시지 않는 한 세상에서 그의 나라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며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흥하든 망하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4]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상징적으로 말씀한 것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자신의 생각 정도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성서에 의해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위로부터 임할 때" 사도들이 곧 잘못이 교정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잘못도 교정될 것이다.
(2) 그 나라의 때에 관한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주여 이 일을 이루심이 이 때니이까? 이 목적을 위해 당신은 우리를 함께 부르셨고 그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시키시기 위한 적절한 계획도 세워진 것인지요? 확실히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지요"라 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망각하였다.
[1] 실상 그들은 주님이 질문하도록 명하거나 권유하지도 않은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2]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 나라에서 큰 몫이 약속되었다고 믿은 바로 그 나라가 세워지기를 조급하게 기다렸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이 "왕좌에 앉을 것"을 말씀하셨으므로(눅 22:30) 이제 곧 왕위를 차지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조급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때가 제일 적절한 때라는 사실로 만족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물음을 막으심. 전에 베드로가 요한에 관하여 "그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답변하시던 것처럼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질문을 막으셨다(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회복될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반박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의 실수는 곧 수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들은 더 이상 현실적인 나라를 바라지 않았다. 또 하나 반박하지 않으신 이유는 세상에 복음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란 점에서 그들의 기대는 참된 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약속에 대한 착각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시간에 대한 그들의 질문을 제지하신다.
1. 때와 기한에 대해서는 그들이 알도록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즉 "너희의 알바 아니므로" 너희가 물을 일도 아니라 한다.(1)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을 떠나시며 사랑을 베푸신다. 반면에 그는 그들을 경고도 하신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그의 교회에게 주시는 주의로써 우리 신앙의 조상들에게는 생명적이었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서 교회가 분열하지 않도록 또한 금지된 지식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하나님이 나타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침범하지 말라고 주의하신다. 기록된 말씀을 분수에 넘게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Nescire velle quoe magiste maximus docere non vult, eruditu inscitia eat).
(2)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주셨으며("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알리어졌나니")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그들이 계시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본문에서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이해시키신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지내는가를 돌이켜 봄으로 우리의 지식에 대해 교만할 수 없음을 배워야 할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운명하시기 전에는 전에대로 부활 후는 또한 그대로 필요한 것을 주신다. 그들이 이 지식으로 만족하기를 그는 바라셨다.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충분한 것이었다. 그에게 헛된 호기심은 타락한 기질로써 극복되어야 하며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이 그 나라에 관하여 "장차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 16:13). 마찬가지로 그는 "때의 징조"를 그들에게 나타내셨는데 이 시대의 징조를 관찰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요, 무관심한 것은 죄이다(마 24:33; 16:3). 그러나 그들은 미래의 사건을 자세히 알려고 하거나 정확한 시기를 알려고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가 모르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미래의 사건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Dr. Hammond가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시대와 마찬가지로 전 시간의 흐름과 마지막 때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Prudens futuvi temporis exitum.
Caliginosa nocte primit Dius -
그러나 지혜로운 만큼 선하기도 한 요브는(Jove=Jupiter)
두터운 밤의 장막 속에 숨어 있네
앞날에 일어날 모든 일은
인간의 시야 밖에 있구나 - HOR.
우리는 한 해의 계절과 시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여름과 겨울이 교차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특별히 어느 날이 많고 흐린지 알 수 없다. 인생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름철과 같은 생의 번영을 누린다고 그것이 계속 보장되리란 법은 없다. 겨울과 같은 고통이 닥쳐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의 겨울에도 우리가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생의 여름철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닥쳐올 운명의 날이" 이 날일지 저 날이 될 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날에 대비하여 최선을 다 할 뿐인 것이다.
2. 그날은 하나님의 특권에 속한 것으로 그만이 아신다. 그날이야말로 "아버지께서 자신의 능력 안에 두신 날"인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과 함께 감추어져 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닥쳐올 때와 시기에 대해 알 사람은 없다. "하나님에 대해 알려 주시는 것"은 그의 "일이지" 우리의 소관은 아닌 것이다(15:18). "종말을 처음부터 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능력 안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이것으로 그는 자신이 하나됨을 나타내신다(사 46:10). "비록 그가 때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게 하시기도 하셨지만(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400년 간 종노릇할 것과 바벨론에서 70년 포로로 있을 것) 그가 때와 시기를 너희에게 알리는 것을 합당히 여기시지는 않으신 것이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까지 얼마나 결릴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너희로 하여금 지금 확신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알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 그는 그의 종 요한에게 말씀하기를 "그가 합당히 여기시는 대로 그 일을 행하시든 안하시든 그것을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나니"라 하셨고 신약에서 발견되는 때와 시기에 관한 예언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움으로 그 때를 알아보려고 이 예언을 적용해보려 할 때는 때와 시기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관심을 갖고 기억해야 한다. Buxtorf는 메시야 내림에 관한 랍비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Rumpatur Spiritus eorum qui supptant tempora - 즉 시간을 헤아리는 사람은 멸하리라는 뜻이다.Ⅲ.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할 일을 지시하시고 또한 권위있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성취를 약속하셨다.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바 아니다 = 이런 일은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없는 것으로 오직 이것을 알지니(8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심으로 너희가 성령의 능력을 받을 것이요, 또한 헛되이 받지 않으리니 이는 너희가 나와 나의 영광에 증인이 되어야하겠기 때문이라. 또한 너희의 증언도 헛되지 않으리니 그 증언이 이곳 예루살렘에서 받아들여질 것이요, 인근 지방과 나아가 전 세계에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8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쓸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이 증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장차 올 때와 시기에 관해 스스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자.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다음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1. 그들이 하는 일이 명예롭고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저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다.(1) 그들은 그를 왕으로 선포한 것이며 이 진리를 세상에 알림으로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또한 그가 다스리게 된다. 그들은 만민에게 엄숙히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2)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할 것이며 이 증언을 확고히 할 것인데 세상의 증인들처럼 맹세하는 것아 아니라 기적과 초자연적 은사란 신의 특권을 갖고자 할 것이자. "너희는 나를 위해 순교자가 되리라." 또 어떤 사본에는 "나의 순교자"가 되리라 하신다. 그들은 때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당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입증했던 것이다.
2. 그들의 능력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도 남으리라 하신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혜와 용기가 충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본래 "세상에서 약하고 어리석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재판받으실 때 담대히 증인으로 나타나지 못했고 아직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에게 임할 성령의 능력을 받으리니"(아마 말씀이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 영혼보다 능력있는 영에 의해 생기와 힘을 얻으리니 너희가 권능으로 복음을 전할 것이며 구약 성서를 통해 그것을 입증하리라"(이 말대로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였을 때 그들은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18:8). "그리고 복음을 기적과 수난으로 확고히 세우리라."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가 그들을 부르심에 응할 때 일할 능력을 받으며 그의 사업에 채용한 일군들에게 자격을 주시고 그들이 감당하도록 도와 주심을 기억하자.
3. 그들의 영향력은 크고 광범위하였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위해 증인이 될 것이며 그를 위해 끌려다닐 것이다."
(1) "예루살렘으로 끌려갈 것이다. 거기서 너희는 시작해야만 하며 많은 사람들이 너희의 증언을 받으리라. 듣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2) "너희의 빛이 전에는 헛수고하였던 유다 전역에 비치게 될 것이다."
(3) "그 다음 너희는 첫 전도 여행 때는 너희가 어떤 사마리아인의 성에서도 전파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이제 사마리아로 가게 될 것이다."
(4) "너희 행적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며 너희는 전세계에 축복이 될 것이다."
Ⅳ. 그들에게 이 교훈을 남기신 후 그는 그들을 떠나신다(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즉 하신 말씀을 모두 다하신 후 "그는 그들을 축복하셨다"(눅 24:50). "그들은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즉 축복을 받은 후 열심히 그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올라가시어" 드디어는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기사를 보게 된다. 엘리야처럼 "불병과 불말"로 이끌리어 가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실 때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이와 같이 성도들의 몸도 영체로써 권능 속에서 부활하여 썩지 않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는 "제자들이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셨다. 그들은 그가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야 그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흡족케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보았다. 너무나도 주의깊고 정성껏 보았기 때문에 결코 착각일 수는 없었다. 그는 번개처럼 재빨리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서서히 위로 올라가신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욱 만족할 수 있었다.2. 그는 "그들의 앞에서 구름에 가리워 사라지셨다." 아주 두터운 구름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두터운 구름 속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찬란한 구름이었다. 이는 그의 영광을 입으신 몸의 광채를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가 변형되셨을 때 그를 덮은 것이 밝은 구름이었고 이 구름도 바로 그 구름이었다(마 17:5). 그가 지상에서 차츰 올라가 일반적으로 구름이 덮인 곳까지 가셨을 때 이 "구름이 그를 영접"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구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구름이 아니라 특별히 그를 영접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이제 그는 구름으로 그의 병거를 삼으신다(시 104:3). 흔히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강림하셨는데 이제 그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본문에서 그를 영접한 구름이 그를 영접한 천사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흔히 천사들의 모습은 구름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5장 22절과 레위기 16장 2절을 비교해 보라. 구름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 세계 사이의 일종의 통신 수단으로 여겨진 것 같다. 구름을 매개로 수증기가 땅에서 올라가고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러므로 이와 꼭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고 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하며 우리의 기도는 그에게 상달된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수 많은 증인들의 눈이 구름 속으로 사라진 그를 지켜 보았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를 다음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단 7:13).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가니" 그들이 구름 속에서 "그를 영접하더라."
Ⅴ.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제자들은 계속해서 "물끄럼히 하늘을 바라보았다"(10절). 더 이상 쳐다볼 필요가 없는데도 왜 그들은 쳐다보았을까?
1.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그들에게 즉시 오시어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돌려 주시고 그들도 그와 함께 모든 좋은 지위를 나누어 갖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가 그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이 그들을 위하여 유익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그의 육체적인" 출연을 아직도 갈망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들은 "엘리야의 생도"들이 엘리야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가 올라가시다 떨어지지나 않을까? 의심하면서 쳐다보았던 것 같다(왕하 2:16). 그렇다면 그들은 그를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2.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셨으므로 하늘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사 24:23)란 말씀을 기억, 그의 후광의 빛으로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이 어떤 기쁨과 승리의 표시를 보기 원했든지 또는 칠층천이 열리어 그를 영접함으로 칠층천의 영광을 볼 수 있으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던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 이후에 그들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그들이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요 1:51).
Ⅵ. 두 천사들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시기적절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하였다. 천사들의 세계가 있어서 구세주의 영접을 준비하였고 이제 그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입성하셨다. 그가 입성할 때 이 두 천사는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지상의 그의 교회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그는 그럴 영접하러 나온 천사들 중 두 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셨고 그들은 밝고 빛나는 "새마포를 입은 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따라서 지상의 그리스도의 종들을 다스림으로써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천사들이 그들에게 전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1. 그들의 호기심을 제지하셨다. "갈릴리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그는 "그들이 버리고 흩어진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들을 갈릴리 사람이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그의 특권 대사로 삼으심으로 대단히 명예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낙담하여 쳐다보기만 하는 질그릇에 불과한 무식한 갈릴리 사람이란 것을 기억해야만 했다. 이제 천사들은 말한다. "왜 너희들은 거칠고 교양없는 갈릴리 사람들처럼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가? 너희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부른 모든 것을 보았오. 무엇을 쳐다보며 서 있는거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땅히 가야할 곳과 그 위에 건축할 반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끄럼이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었다.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도 가끔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천사들이 보냄을 받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즉 너희가 다시 보기를 원하여 그렇게 보고 있는 그분은 영원히 가신 것이 아니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약속한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 그러므로 정하신 날이 이를 때까지 그를 기다리지 말라" 하신다.
(1) "바로 이 예수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시던 모습대로 다시 오실 것이요, 바로 이 예수는 자신을 속죄물로 드리사 죄를 도맡으셨으며 재림 때에 죄없이 나타나실 것이다(히 9:26, 28). 전에는 오시어서 치욕을 받으사 심판을 받으셨으나 앞으로는 영광 중에 다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너희에게 사명을 부여하신 이 예수는 다시 너희를 불러 맡기어진 것을 얼마나 잘 행하였는지 물으실 것이며 다른 사람 아닌 그가 오시리라"고 한다(욥 19:27).
(2) 그는 똑 같은 방법으로 오실 것이다. "그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고 "천사들이 그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보라, 이제 또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요, 수 없는 천사의 무리들이 그와 함께 오리라." 그는 "고함소리와 나팔소리 가운데 올라가셨고"(시 47:5) 이제는 하나님의 호령과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것이다"(살전 4:16). 너희가 이제는 공중에서 구름으로 가리우신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리고 그가 가시는 곳을 "너희는 따라갈 수는 없으나 그때에는 너희가 구름을 타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서서 한가로이 지켜보고 있으나 번개처럼 주의 재림이 임하여 우리를 깨울 것이며 지금은 우리가 서서 떨며 보고 있으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다.
예루살렘에 다시 모인 사도들(사도행전 1:12-14)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장소 - "올리브산(감람산)"이었다. 그 곁에 베들레헴 읍이 위치하고 있다(눅 24:50). 그의 고통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눅 22:39). 그러므로 거기서 영광스럽게 승천하시므로 그들로 인한 수치를 벗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난과 승천이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는 예루살렘이 보이는 데서 그의 나라로 들어가셨고 그 곳의 무책임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그의 백성들은 이제 그의 다스림을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대하여 예언되기를(슥 14:4)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감람산에 마지막으로 서실 것인데 이 감람산은 둘로 갈라질 것이다. 이 감람산에서 참 감람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것이요, 거기서 우리는 "기름부음을"받게 된다(슥 4:12; 롬 9:24). 이 산은 예루살렘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안식일에 허왕된 하루 여행길" 정도다. 즉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거리는 열심있는 신자들이 공중 예배가 끝난 후 명상을 하기 위해 안식일 저녁에 걸어갈 만한 정도에 불과했다. 어떤 이는 일천보의 거리라 주장하고 다른 이는 이천 규빗 또는 1500m라고도 하며 1 마일이라고도 주정한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 마일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예루살렘에 접해있고 감람산의 일부인 베다니는 약 1 마일 정도밖에 안 되었다. 갈대아판(版) 룻기 일장 평해서는 다음같이 말해 준다. "안식일과 거룩한 날을 지키어 이천 규빗 이상 걷지 말지니라." 이 말씀의 유래는 여호수아 3잘 4절을 근거한 것으로 행군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 백성과 법궤 사이의 간격이 "이천 규빗"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이런 제한을 규정하시지는 않았으나 그들 스스로 이러한 규칙을 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 규정 이상 여행하지 말라는 법칙은 우리와 관계가 먼 것이다. 우리에게 여행은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즐겨도 되는 것이다(왕하 4:23).
Ⅱ. 제자들이 돌아온 곳. 주님께서 지정한 데로 그들은 비록 적들의 소굴이긴 했으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 그들은 요시찰 인물이었고 또한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지만" 그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사실이 알려진 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도 몰랐으며 더 이상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적의 소굴 가운데서도 은신처를 마련해 주신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결코 찾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다락방으로 가서 거기 머물렀다." 그들이 한 방에서 함께 먹고 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그들은 매일 모였다. 그리고 함께 성령의 강림을 고대하며 신앙 생활에 열중하였다. 성서 연구자들은 이 다락방에 관해 여러 추측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다락방이 성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방들을 관리하고 있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성전의 다락방에 거하도록 허용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저자 누가는 "제자들이 계속 성전에서 있었다"고 전해 준다(눅 24:53). 그러나 그곳도 "성전 뜰 안에 있는 기도하는 집"을 뜻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예배하는 데 방해받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다락방은 개인집의 다락방이었던 것 같다. 옥스퍼드 대학의 그레고리씨도(Mr. Gregory)이 견해를 따르면 그는 이 장소에 대해서 시리아의 주석 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주석 학자는 이 "다락방이 그들이 유월절 만찬을 들었던 같은 곳이었다"한다. 그때는 avnw/geon이라 칭해졌지만 이곳의 u,perfo/n도 다 같은 의미를 지녔다. "그곳이 유오디우스가 전해 주듯이 복음서 기록자인 요한의 집에 있었는지 또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처럼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3잘을 참조하라.
Ⅲ. 모인 제자들. 11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주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도 나오는데 신약 성서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여기서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있다(13, 14절). "혈연적인 주님의 형제들"도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모두 12명이 되는데(15절) 대부분의 "70명의 제자들"도 사도들과 함께 복음 전파자로 채택되었던 것 같다.
Ⅳ. 그들이 모여서 한 일. "그들은 모두 마음을 합하여 기도와 간구에 힘썼다."
1. "그들은 기도하였고 간절히 간구하였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며, 또한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고통과 위험의 시기였다. 그들은 마치 이리 틈에 양과 같은 처지였다. "괴로운 일이 있는가? 기도하라." 이것이야말로 모든 염려와 불안을 물리치는 비결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위대한 사업에 직면하여 그 일을 착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냄을 받기 전 그들은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바치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기를 기다렸으며, 그러므로 기도에 인색하지 않았다. 주님도 기도하실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다(눅 3:21). 영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곧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긍휼을 베풀기 위해 먼저 요구하시며, 그러므로 약속 실현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2. "그들은 계속하여 기도했고" 기도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규칙적인 정도, 자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기도한 것이다. 그들은 한 시간이라도 더욱 기도하려고 애썼다.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는 약속에 따라 성령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 머물기로 그들은 굳게 결심하였다. 그들이 "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눅 24:53). 지금 그들은 "기도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약속에 대하여 찬양하는 태도는 그 실현을 바라는 예의바른 간구 방법이며 이전의 긍휼을 찬송하므로 더 큰 긍휼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할 때는 그 자비를 찬양하고 우리가 그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3.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들은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고 말다툼이나 불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화로운 가운데 성령의 일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성령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된다. 즉 합심하여 간구하는 태도가 가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한다 해도 그들은 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였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며" 여럿이 합심하여 간구할 때 더욱 이루어 주신다.
유다의 죽음, 맛디아가 사도로 선택됨(사도행전 1:15-26)
유다의 범죄는 그의 수치와 파멸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사도직의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들은 12조상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본따" 12명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교회의 면류관을 결정할 12별이었다(계 12:1). 또한 그들에게는 "12보좌"가 마련되었다(마 19:28). 주님께 배울 때는 12명이었으나 이제 선생이 되어야하는 이 때 11명밖에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다시 12명 그대로 보존하려는 욕망을 일으켰고 다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기 전 빈 자리를 채우고자 연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은 그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주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시던 가운데 이 일에 대하여 이미 지시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찰하여 보자.
Ⅰ. 이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1. 약 "120 명"이 한 집에 모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모인 수가 남녀 합하여 120이라 생각하는가 하면 또 여자는 제외하고 남자만 120이라는 사람도 있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이 "120을 11명의 사도와 70명의 제자"와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친척, 같은 마을 사람 등으로 39명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또한 이 모임을 일종의 회의의 성격을 띈 것으로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한 감독의 관할 지역을 뜻한다고 보았다(4:23). "그 외의 사람들로 믿는 자가 있었으나 감히 참석하지 못한 것이라"한다(5:13). 그들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한 박해 때까지 계속 함께 있었고 그후 사도 이외에는 모두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한다(8:1). 그러나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예루살렘에 몇 천 명은 안 되는 수백 명의 믿는 사람들이 이때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를 믿었으나 감히 이를 고백하는 사람은 없었더라는 말씀을 많이 본다. 그러나 나는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처럼 모인 사람들이 설교와 예배를 위해 선택된 대표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령을 받기까지 그들은 이 일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회심은 다음 장에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 교회가 시작된다. 120문도는 나무로 성장하게 될 계자씨들이었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할 누룩이었다.2.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베드로였다. 그의 열심과 나와서 말할 수 있는 위치로 보아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잃었든 그의 위치가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만 알려졌을 때 그는 유대인의 사도로 여겨졌으나 그 후 이방인에게도 설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바울의 활동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Ⅱ.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 선택 계획. 그는 "제자들 가운에서 섰다"(15절). 그는 재판관이나 또는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인양 앉아서 말하지 않고 그의 형제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뜻에서 일어섰고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의 연설을 생각해 보자.
1. 그는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사도직의 공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특이한 방법으로 그 일이 성경 말씀의 성취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1) 유다가 가졌던 직무(17절).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세상에서는 성도들과 함께 하였던 많은 무리들이 보석을 구별해내는 그날에 성도들 가운데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다만 수만 채운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도 불법의 아들"의 운명에 처해질 자가 있듯이 유다는 이 직무에 참여하였어도 오히려 자신의 죄와 파멸을 조장하였을 뿐이었다.
(2) 유다의 죄. 그는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에게 어디서 그를 찾을 수 있는지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유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의 체포는 용이하였을 터인데도) 그는 뻔뻔스럽게 그를 잡으려는 무리 앞에서 공공연히 나타나 "예수 잡으려는 자들을 안내하였다." 그는 그 장소까지 그들을 데리고 가서 아주 자랑스러운 일을 행하듯이 "이 자가 바로 그 자니 꼭 붙드시요"라는 묵계된 암호를 보냈던 것이다. 죄의 주모자는 제일 큰 죄인이다. 특히 그들의 직분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인데 그리스도를 적에게 인도하는 자는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3) 죄로 인한 유다의 파멸. 대제사장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그들에게 밀고함으로 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물론 그들 밑에서 벼슬도 얻고 그러므로 이번 거사로 얻은 대가는 계약금 정도에 불과하는 큰 결과를 기대하였다.
[1] 그는 부끄러운 꼴을 당하고 돈도 잃어버렸다(18절). 그는 그의 불의의 대가인 "은 30개로 밭을 샀다." 그가 밭을 산 것이 아니라 불의의 삯이 밭을 산 것이었다. 이 이익으로 부자가 되려는 것이 그의 졸렬한 계획이었다. 그는 게하시가 거짓말로 나아만에게서 재물을 취하였듯이(왕하 5:26) 자기를 위하여 밭을 사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구입한 밭은 나그네들이 묻히는 밭이 되었고 이 일로 자신에게나 그의 가족에게 유익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불의한 맘몬(황금의 신)이었고 그를 현혹하였으며 그의 불의의 보수는 "그의 불의로 인한 멸망이었다."
[2] 그는 치욕적인 모습으로 죽었다. 마태복음 27장 5절에서는 그가 낙심하여 "나가서" 목매달아 죽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거기서는 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마태의 기록에 더 부연하여 이르기를 그가 목 졸라 또는 슬픔과 고통으로 질식하여 "곤두박질하여 얼굴"을 처박고 죽었다고 전해 준다(하몬드 Hamamond 박사에 의하면). 넘어지면서 숨이 차고 또 심히 곤두박질한 연유로 "배가 터지고 창자가 터져나왔던 것이다." 귀신이 어린이에게서 나갈 때 그를 "괴롭히고 쓸어뜨리고 경련을 일으켜" 거의 죽게 하였음을 우리는 안다(막 9:26; 눅 9:42). 귀신이 유다를 사로잡았을 때 머리를 처박고 배가 터지게 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마태가 전해 준대로 목을 매달자 숨이 막혀 베드로가 말하는대로 배가 터지게까지 된 것이다. 그의 배는 인근에서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터졌고(애드와드 박사 Dr. Edward에 의하면) "그의 창자가 흩러나온 것은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19절). 누가는 의사답게 복부의 내장을 잘 알고서 쓰고 있다. 배가 터져 죽는 것은 반역자에 대한 처형법이었다. 주 예수를 반역하였으므로 배속의 창자가 흘러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악한 종에 대해 말씀하기를 "엄히 때리고"(마 24:51)라고 하셨는데 이미 이때 그리스도는 유다의 운명을 아셨던 것 같다.
(4) 모든 사람에게 유다의 저주받음이 알려짐. "이 일을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마치 신문에나 실린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배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얘기하였다(19절). 제자들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그 사실의 진리를 논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사건은 명백한 사실로 "알려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모하였던 첫 사람이 죽었으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죽게 한 자들이 회개하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그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말씀과 역사하시는 성령만으로 회개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여기 유다의 돈으로 구입된 밭이 Aceldama - 즉 피밭이라 불리워진, 물건에 악명이 붙은 실례를 보게 된다. 그것이 피값으로 사진 것임으로 그 이름이 붙게 되었고 흠없는 귀한 피를 판 사람뿐 아니라 그 피를 산 사람에게로 영원한 치욕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 피에 대하여 물으실 때 그들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5) 이 일은 성서의 말씀의 성취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성서는 명백히 말해 주고 있고 그러므로 "이 일이 성취된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16절). 12 중의 한 사람의 제거되었다는 것으로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윗은 그의 죄를 이미 예고하였고(시 44:9)에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말씀은 요 13 : 18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알고 계셨다.) 더 나아가 다음 사실을 예고하였다.
[1] 그가 받을 형벌(시 69:25). "저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이 시편은 메시야에 대하여 말해 준다. 바로 몇 절 전에 그에게 담즙과 초(醋)를 주었다는 내용이 언급된 것을 미루어 보아 다음에 뒤따르는 다윗의 적들에 대한 파멸 예언은 그리스도의 적에게 특히 유다에게 적용되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예언은 욥의 친구 빌닷이 적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은 의미를 지난다.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욥 18:14, 15).
[2]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됨.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란 말씀은 시편 109장 8절의 인용문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한 뒤 적절하게 다음의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악한 직분을 설정하여 그 직에 종사할 어떤 악한 자를 수치스럽게 처형하신다고 생각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목적이 좌절됨으로 고통받으시지도 않으시며 그가 맡긴 사명이 자리가 빈다고 해서 또는 그가 하실 일이 수행되지 않았다고 해서 고통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효력이 상실되지 않는다." 유다는 목매달아 죽었으나, 그의 사도직은 계승되었다. 그가 "살던 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되고 있고 그에게는 상속자도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도직이 끊어지겠다는 성서의 예언은 없다. 유다 자신은 사도직의 계승자가 생겨지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나무에 있어서도 "한 가지가 잘려져 나간다면" 다른 가지들이 "움트게 되듯이" 교회의 평신도나 직분 맡은 자가 떠난다해도 다른 사람에 의해 자리는 채워지게 마련인 것이다(롬 11:17). 증인이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베드로가 다른 사도 선택을 위해 취한 행위(21, 22절). 이곳에서 다음 서신을 배우도록 하자.
(1) 빈 자리를 채울 인물이 갖추어야 할 자격.
그는 "70명의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다니었으며 즉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계속 수행하였던 사람 중에 하나이어야 했다. 즉, 그는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장되고 "그가 우리로부터 승천하신 바로 그날까지" 3년 반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신 이적을 목격한 자라야 했다.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어진 임무에 끊임없이 근면 성실한 사람들이라야 높은 자리에도 합당한 것이다. 즉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만 더 큰 일도 맡기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복음의 전파자로 또한 그의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과 동행하였던 사람들 외에는 사도가 될 수 없었다. 이 말은 이따금 사도들을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계속 친숙하게 사귀었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2)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불리움을 받은 그의 임무. 그는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해야만 했다." 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11사도들과 함께 다른 제자들도 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제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그의 부활에 대하여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만족한 증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세계에 증거하였던 가장 위대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이 부활이야말로 예수의 메시야됨의 가장 명백한 증거였으며 예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도들이 세속적인 권위와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의 부활의 능력을 전파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준비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Ⅲ. 유다의 사도직을 계승할 사람의 추천.
1. 그리스도를 계속 따라다녔던 성실한 두 사람이 후보로 추천되었다(23절)."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즉 누가 추천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11사도가 아니라 "120문도"가 함께 참여하여 결정하였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11사도를 대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추천한 이들은 "요셉과 맛디아"였다. 만일 요셉이 "유스도라 하는 예수와"(골 4:11)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이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을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에 대해서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데 그는 "할례당"이며 유다 본토인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었고" 이들만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 사람이 요셉과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사도로 택함받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주의 일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낮은 지위에서도 많은 유익한 일을 행하였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다 "사도이며 예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요셉이야말로 "작은 야고보(막 15:40)의 형제인 요세(막 6:3)"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 요셉을 사도행전 4장 36절에 언급된 요셉으로 보기로 한다. 그러나 후자는 구브로 출신이요 전자는 갈릴리 출신이며 또한 전자의 다른 이름은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이란 뜻이요, 후자의 다른 이름은 "바사바"로서 "맹세의 아들"이란 뜻이다. 요셉과 맛디아 둘 다 귀한 인물로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누가 적격인지 결정할 수 없었고 다만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두 명이 자기를 내세우거나 이 직분을 위하여 다투지도 않았다. 오직 임명될 때까지 겸손히 앉아만 있었다.
2.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70명의 제자 중에 택해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중에 누구냐"하는 문제였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 중 아무도 이 둘과는 비교될 수 없음을 잘 알았다(24,25절).(1) 그들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게 간구하였다. "사람들이 자기를 아는 것보다 더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사도로 선택될 때는 그의 마음과 그의 기질과 성벽에 의해 택하여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하여 유다로 12중 하나가 되게 하셨었다. 우리가 교회와 교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그의 눈으로 바라보실 뿐 아니라 그의 장중에 두사 그가 뜻하시는 대로 그들을 지휘하시고 그들이 합당치 않을 때는 다른 영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그들을 목적에 합당하게 하여 쓰신다.
(2) 그들은 이 둘 중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셨는가를 알기 원하였다. "주여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족하다는 것이 그들의 심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군을 택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자신의 계획된 섭리로 또는 성령의 은사로써 누구를 택하시며 무엇을 택하셨는가를 보여 주실 때 우리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
(3) 그들은 맛디아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형제로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 있었다. 그들은 "봉사와 및 사도직에 참여하여" 동역자가 되며 영광의 동참자가 될 사람을 뽑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은 제거하고 자기가 바라는 사람을 고집함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유다는" 이 영광스러운 일에 "범죄함으로 참여치 못하게 되었고" 그의 주님을 배신하여 죽이므로 그에게는 합당치 않은 사도의 "자리에서" 쫓겨나 범죄자의 당연한 운명으로써 목매달아 죽어 그가 갈 곳인 지옥으로 가야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신한 사람들은 그와의 고귀한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온갖 비참을 겪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어떤 랍비는 발람이 "자기 갈 곳으로 갔다"는 말씀을 그가 "지옥으로 갔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휘트비 박사는 이그나시우스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모든 사람에게는 i;dioj topoj - 즉 그에게 합당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는데 이 장소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따라 정하신 곳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유다가 받을 운명에 대하여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불행을 생각할 때 그가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는 것이 좋았던 것이라는 의미다. 유다는 위선자였고 그가 가야할 곳은 지옥이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죄인도 그들의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마 24:51).
(4) 추첨에 의해 선출하였다(26절). 이 방법은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다른 방법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결정하는 데 유익한 해결책이었고 엄숙한 종교적인 규범 즉 믿음의 기도와 함께 행하여졌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성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장로가 추첨으로 결정될 때 그 추첨이 하나님의 행위로 간주되는 것처럼 맛디아도 인간의 수단에 의해 성직에 임명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세례받을 때 성령에 의해 세례받은 것처럼 머지않아 그들 모두가 받게 될 성령에 의해 성직에 임명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빈 사도직이 채워졌고 후에 12 중의 다른 하나인 야고보가 순교했을 때 바울이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