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요한복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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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요한복음 21:1-14)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볼 수 있다. 이제,

1. "전에 일어났던" 일들과 이 현현을 비교해 보자. 그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때는, 아마 그의 나타나심을 기대하고 그들 모두 함께 있었으며 주님의 날로서 엄숙한 모임(경건한 예배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자기를 나타내신 때는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고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으며, 평일로써, 그들 중 몇 명에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보통 의식 속에서 나타나시지만, 때때로 그들이 일상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 그의 영으로 그들을 방문하시는데, 이것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눅 2:8)에게 그리하신 것과 같으며 여기에서도 역시 그러하다(창 16:13).

2.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만나도록 명하셨던 갈릴리에 있는 그 산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교해 보자(마 28:16). 거기에서는 그들은 무교절이 끝나자마자 행동하여서 이 알현 또는 총 회합으로 정한시간까지,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신하였다. 이제 이 현현은 그들이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기다림에 지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자기 말씀보다 더 신실하시나 결코 더 불실히지 않으시며, 종종 자기 사람들의 믿는 기대를 앞서고 능가하기는 해도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본문의 세세한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나타내 주신 사람들(2절). 열둘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 일곱에게만이었다. 나다나엘이 그들 중 하나로 언급되는데, 우리는 그를 1장 이후로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가 열 둥 중의 하나인 바돌로매와 동일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두 사람은 벳새다 사람 빌립과 가버나움의 안드레로 추측된다. 다음을 유의하여 보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엄숙한 종교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사교와 일상 일에 있어서도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수단에 의하여 자기들의 열정을 증거하는 동시에 증진시키고, 서로 기뻐하며, 대화와 동시에 간증으로 서로를 계발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자기를 나타내기로 택하신 것은 그리스도인 사회를 장려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실의 공동 증인이 되며 또한 그렇게 서로의 증거를 확실케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이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곱 사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로마의 법은 한 유언에 대하여 증언 일곱이 필요했다는 것을 주시한다.

3. 도마가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베드로 다음으로 기명되어 있는데 이로써 그는 그전보다 이제 사도들의 모임에 더 가까워져 있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생긴 손실로 인하여 차후에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주의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Ⅱ. 그들이 종사(從事)했던 과정(3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고기잡이 가는 데 대한 그들의 동의,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그러자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함께 있어야 하니까 하고 그들이 말한다. 통속적으로 같은 장사끼리는 화합이 될 수 없지만 그들은 가능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떠났던 그들의 배와 그물로 돌아온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때 그곳으로 방문하심으로 그들을 장려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행난 것은,

(1) 시간을 벌고, 나태하지 않으려 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부을 전파하도록 명령받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작성되어 있었으나 완전하지 않았다. 행동개시의 시각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기의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한 다음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게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부활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 같다. 이제 그 동안 그들은 아무 것도 않기 보다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오락으로써가 아니라 사업으로써였다. 그것은 그들의 겸손의 한 실례다. 비록 그들이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보냄 받기로 선발되었지만, 아직 그들에게 형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떠낸 반석"을 기억했다. 그것은 그들이 근면하다는 한 본보기와 같으며, 또한 그들이 그 당시의 훌륭한 처세가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동안 태만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들의 생애를 즐겁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공백들을 메우려고, 그 생애의 단편들을 수집하기에 고심해야만 한다.

(2) 그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여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러했다. 그들의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을 동안에는, 그를 섬기던 자들이 그들에게 친절했었다.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겼으니," 그들은 그 무렵에 금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기 "자신들의 손으로 그들의 쓸 것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며, 바로 이 까닭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이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우리에게 "일하여 얻은 자기 자신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2. 물고기 잡는 데 있어서 그들의 실망. 그들은 누가복음 5장 5절에서처럼,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 세상에 헛됨을 보라. 부지런한 자들의 손도 종종 빈 손으로 돌아온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정직한 사업에서 바라던 성공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아침에 기적적인 어획고를 올림으로 더욱 경탄하고 또 더욱 만족스럽도록,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우리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그런 실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대단히 은혜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바다의 고기를 다스리게"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항상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이 "바다의 길을" 아시고 또 가운데로 지나는 것을 명하신다.

Ⅲ.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방법. "그는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1절). 주님의 몸은, 물론 참된 실재의 몸이지만, 우리의 몸이 그렇게 될 것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자신이 친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때에만 보이는 것이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너무 빨리 왔고 또 사라졌기에 순식간에, 한순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 또는 저기에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에서 다음 네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 주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4절). 보람없는 한 밤의 수고 후,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실 때는 그들이 가장 난처할 때이다. 그들이 자기들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바다 위로 걸어서가" 아니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까닭에 그는 이전의 그로서 그들과 함께 있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바닷가에 서신"것은, 그때 그들이 그를 향하여 나가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역사를 마치고, 폭풍의 바다와 피의 바다를 지나서 그가 승리 가운데서, 안전하고 고요한 바닷가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앞에 일거리를 둔 채 수고와 위험 속에서 아직 바다에 있었다. 우리의 뱃길이 거칠고 폭풍이 몰아칠 때, 우리의 주께서 바닷가에 계시고, 우리가 그에게로 재촉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2. 그는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제자들은 그와 가깝게 지난 사이였지만 단번에 "예수인 줄 알지 못했다." 그가 거기에 계실 줄 거의 예상하지 못했고, 또 눈여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물고기를 사기 위하여 자기들의 배가 도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평민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가 생각하기 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그후 깨닫고 나서 우리의 위로를 얻을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3. 그는 긍휼의 한 본보기로써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5절). "애들아, paidi,a - 즉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너희는 고기를 좀 잡았느냐?" 여기에서 보면,

(1) 호칭이 대단히 친밀하다. 그는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을 보살피고 다정하게 대하며 말하듯이 "얘들아"라고 그들에게 말하신다. 비록 그는 그때 높은 자리에 들어 갔지만, 여전히 예전과 같은 친절과 애정으로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연령으로 아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의 아이들이었다.

(2) 물음이 대단히 친근하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적합한 것이 준비되었는지, 또는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공급을 보살펴 주려고 하는 어떤 상냥한 아버지처럼 물으신다. 요약하면,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알고 계셔서, 그들이 은혜에 충족할 뿐 아니라 식물에도 넉넉하도록 약속하셨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 37:3).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오두막집을 들여다 보시면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사정을 그에게 털어놓도록 권유하신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로 저희 구할 것을" 그에게 아뢴 다음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또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형제들을 향한 자비심 많은 관심의 한 본보기를 보여 주신다. 노동에 무능하고 좌절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어버린 가장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향하여 부자들은 이와 같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극빈자들은 극히 부르짖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제자들은 짤막하게 대답했는데, 이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만과 불평어린 태도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말했을 뿐이고,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과 같은 그러한 친근하고 공손한 호칭도 그에게 사용하지 않았다. 최선의 것들이 그렇게 짤막하게 주 예수를 향한 그들의 사랑의 보답으로 나타나다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 질문을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의 궁핍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로부터" 그것들을 알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부터 공급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공허하고 궁핍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는 자기 능력의 한 실례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며, 이것이 그 발견을 성취시켰다(6절). 그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던졌었던 반대편이었다. 그리고 그때 빈손으로 집으로 가려던 그들은 엄청난 어획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명령. 그리고 그 명령에 첨부된 약속. 그러한 곳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에게는 아무 것도 숨겨지지 않고, 참으로 "큰 물 밑의 수족"(욥 26:5)조차 그러한, 주님께서는 배 어느 편에 물고기 떼가 있는지 잘 알고 계셨으며, 그들에게 그쪽으로 지시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미세하고 불확정적인 일들에까지 확장되므로,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거기서부터 암시를 받아 깨닫는 법을 알고, 또 모든 점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것이다.

(2)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순종, 그리고 그것의 좋은 성과. 아직까지는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러나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서라도 기꺼이 충고받고자 했으며, 이 나그네라고 생각된 사람에게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 말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나그네의 말을 준행함으로 그들은 부지중에 그들의 주께 순종하게 되었다. 그것은 훌륭하게 잘 진척되었고 이제 그들은 그들의 모든 수고에 보상이 되는 어획고를 올렸다. 요약하면 겸손하고, 근면하며, 또 인내성이 있는 사람들(비록 그들의 노고가 어긋날지라도)은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때때로 그들은 많은 몸부림과 결실없는 시도 후에 그들의 일이 행복한 때를 얻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킴으로 잃어 버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의 법칙과 성령의 인도, 그리고 섭리의 통지를 따라는 사람들은 순조롭게 잘 되어 간다. 이것이 "곧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는 것"이다. 이제 물고기의 포획은 다음과 같이 간주될 수 있다.

[1] 그 자체가 기적임.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한 것으로" 심으셨으나 강한 것으로 다기 사셨다는 사실과, 또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게 되며 바다의 고기"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행하심으로 자기를 드러내 보이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기치 못했던 것이다."

[2] 그들을 향한 자비심. 그들의 필요에 대한 시기적절하고 풍성한 공급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창의성과 노력으로 실패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맞추어 나타나셨으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 어떤 좋은 것에도 부족하지 않도록 보살피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가 가장 곤경에 처했을 때에, 여호와이레인 것이다.

[3] 이전에 베푸신 자비의 기념일. 그 자비로써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베드로에게 그의 배를 빌리신 것에 대하여 보상하셨던 것이다(눅 5:4 등등). 이 기적은 그 기적과 아주 흡사해서 베드로가 그것을 회상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전자와 후자 이 둘이 그 자신의 영역 즉 그 자신의 생업 속에서 그에게 마주쳤기에 상당한 영향을 그에게 미치었던 것이다. 나중 은혜는 이전 은혜를 회상하도록 계획되며, 그렇게 먹은 떡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4] 신비임.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제 확대된 임무로써 그들을 파송하시려는 매우 중대한 바로 그 사업임. 선지자들은 영혼들을 낚아왔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거나 거의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사도들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많다"(갈 4:27).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소임에 따라서 첫 번째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을 당시에, 그들이 지금 마땅히 거두어야 할 성과와 비교하여 아주 적은 것을 거두었었다. 그러나 이 일 직후 삼천 명이 하루에 회개했는데, 이는 "그물이 배 오른편에 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의 임무를 계속 근면하게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겨우 단 한 번의 복된 포획이 복음의 그물을 던지기에 수고한 여러 해 동안의 노고를 보상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Ⅳ.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신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7,8절). 거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요한은 가장 총명하고 눈치 빠른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는 "주시라"하고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특별한 모양으로 자기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며, 그의 비밀은 그가 총애하는 자들에게 있다. 요한은 자기의 고통 중에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이 자기의 주님께 매달렸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굳센 지조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밝은 눈과 통찰력있는 판단을 소지한 것이다. 요한은 주님이신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에 자기의 아는 바를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 전했다. 이렇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누어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 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할 만큼 풍족하므로 우리는 그를 독점하지 않아도 된다. 요한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는 자기의 소견을 말했는데, 이는 그가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주님을 뵙고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베드로는 자기의 주님을 부인했었지만 이제 참회했으며 다시금 제자들의 교제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들은 이전과 같이 그와 더불어 활발하고 친밀했다.

2. 베드로는 가장 열심있고 온정 있는 제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주시라는 말(요한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을 듣자마자 배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배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으며, 단지 즉시 바다로 뛰어내려 그리스도께로 제일 먼저 도달하려고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1) 그는 "겉옷을 두름"으로 그리스도께 자기의 존경을 표했는데, 이는 자기가 지닌 가장 좋은 옷차림으로 주님 전에 나타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가 중사하고 있던 그 일은 몹시 고된 것이고 또 그는 그 안에서 수고하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끼와 잠방이 차림으로 벗은 채였으므로, 주님의 존전에 무례히 불쑥 나타나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그 겉옷은 가죽이나 유포(油布)로 만들어져서 물에 젖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고기잡이에 골몰할 때에는 그물을 올린 후 종종 그러한 것처럼 물 속을 통과하여 그리스도께로 급히 가기 위하여 그것을 둘렀을지 모른다.

(2) 그는 바다에 뛰어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께로 향한 그의 애정의 강도와 열렬한 소망이 자기에게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바닷가까지 물 속을 걷거나 헤엄쳤다. 그가 물 위로 걸어서 그리스도께로 갔을 때(마 14:28, 29)에는, "그가 신중하게 배에서 내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가 황급하게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라고 말한다. 가라앉든지 헤엄치든지 간에, 그는 자기의 호의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자기의 의향을 보여 주고자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가 물에 빠져 죽도록 방임해 주셔서 주님께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일 뿐이다"고 그는 생각한다. 베드로는 크게 용서받았으며,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기꺼이 모험을 치르고 또 고난을 겪음으로 또한 크게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온 사람들은 그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폭풍의 바다, 피의 바다 속으로 기꺼이 헤엄쳐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사이에서 누가 먼저 주님께 이를까 경쟁하는 것은 찬양할 만한 경주이다.

3. 나머지 제자들은 주의 깊고 정직한 마음을 지녔다. 비록 그들은 베드로와 같이 바다로 뛰어 내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열광적인 열성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배 안에서 바닷가로 서둘러 황급히 갔다(8절). "다른 제자들" (그리스도이신줄 처음 발견한 요한이 이들과 함께 있었다)은 늦게 도달하였지만, 그들도 그리스도께 도달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을 유의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극히 다양하게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어떤 이들은 탁월하여 은사와 은혜에 있어서 심히 뛰어났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형제들과 구별된다. 다른 이들은 단지 평범한 제자들로 자기들의 본분을 지키고 주님께 신실하나, 주목할 만한 아무 일도 행치 않았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탁월한 자들과 미미한 자들 둘 다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탁월한 자들 중에서 요한과 같이 어떤 이들이 뛰어나게 명상적이며, 큰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로써 교회를 섬긴다. 반면 다른 어떤 이들은 베드로와 같이 뛰어나게 활동적이며 담대하고, 또 강하며 큰 공을 세워 그렇게 가지들의 세대에 크게 쓰인다. 어떤 이는 교회의 눈과 같이 유용하고, 다른 어떤 이는 교회의 손과 같으며, 모든 이는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2)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길에 있어서 어떤 훌륭한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심히 많은 상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둘 다 모두 "그를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헌신의 행위와 종교적 열심의 비범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더 많이 섬기는데, 그들은 훌륭히 행하는 것이며, "그들이 그것을 행함은 주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린 것에 대해 비난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의 열심과 애정의 강도에 대하여 칭찬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마리아와 같이 "그의 발 곁에 앉기 위"하여 세상을 떠난 자들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는 보다 더 세상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섬긴다. 그들은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처럼 세상이란 배에 계속 있으면서 그물을 끌고, 또 고기를 바닷가로 운반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도 세속적이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들도 자기들의 위치에서 가난한 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제자들이 다 베드로와 같이 행하였다면, 고기와 그물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나 만일 베드로가 그들처럼 행했더라면, 우리는 이 거룩한 열심의 실례를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양자 다 기뻐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나서 바닷가에 계신 주님께 이르는 데에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히 바다로 뛰어 내린 순교자들처럼 급격한 죽음으로 주님께로 인도된다. 다른 어떤 이는 그물을 끌면서 보다 덜 두려운 자연사에 의해서 주님께로 인도된다. 그러나 양자가 다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하고 고요한 바닷가에서 만나는 것이다.

Ⅴ. 그들이 육지에 올라오자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환대의 내용.

1.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셨다. 그들이 물에 젖어 춥고,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육지에 올라보니, 그들을 따뜻하게 하고 몸을 말려 줄 훌륭한 불과 또 훌륭한 식사를 위한 충분한 준비로 생선과 떡이 있었다.

(1) 우리들은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가져다 준 음식의 출처와 마찬가지로 이 불과 생선과 떡의 출처를 캐 묻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리떡과 물고기를 증가시키신 그 분은 원하신다면, 새 것을 만드시거나 또는 돌을 떡으로 바꾸시거나, 혹은 그가 아시는 대로 그것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천사들을 보내어 그것을 가져 오게 하실 수 있었다. 이 준비가 옥외에서 마련되었는지 혹은 어떤 어부의 집이나 바닷가에 있는 오두막에서 그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웅장하거나 섬세한 점은 전혀 없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만족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을 보살피시는 이 실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 무엇을 지니고 계시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신다." 주님께서는 그 어부들이 일에 지쳐 돌아왔을 때에, 친절하게 그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셨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먹이실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을 고용하여 자기들을 위해 예비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용기를 잃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기"에 이른다 할지라도, 여기에서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들 자신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좋은 것들을 예비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나라에 있어 그의 상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아시게"될 것이다(눅 22:30). 얼마 전에 "제자들이 구운 생선"으로 그리스도를 대접하였었는데(눅 24:42), 이제 주님께서는 친구로서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여 같은 것으로 대접하셨다. 아니, 어획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백배 이상으로 갚아 주셨다.

2. 주님께서 그들이 잡았던 것 중 약간을 요구하셨으며 그들이 그것을 내놓았다(10,11절).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육지로 그들의 고기 잡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명령. "지금 잡은 생선을 이리 좀 가져와서, 그것들을 좀 먹자"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셨거나 그것없이는 그들을 위해 조반을 마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도록 원하셨다(시 128:2).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우리의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게"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산업과 정당한 수고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독특한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사냥한 것도 굽지 아니하나니" 한 것은 게으른 자에 대한 말인데,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수고하여 잡은 것을 요리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잠 12:2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가진 바를 사용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2]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초자연적인 은사의 풍성함을 맛보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능력과 그의 인자하심, 양면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는 매몰하거나 은닉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활용하고 널리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3]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자기가 지니신 영적 향연의 한 본을 제시하고자 하셨는데, 그것은, 이 점에서, 가장 자유롭고 친밀한 것으로, "곧 그는 그들과 더불어 먹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먹는"것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의 위로는 그들을 기쁘게 하며, 그는 그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신 그것을 그들로부터 받으시는 것이다.

[4] 사람을 낚는 어부인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잡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주께로 가져 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그들의 성과는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2)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순종(11절). "고기가 많아 그물을 육지로 들 수 없더라"고 기록되었다(6절). 즉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이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서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육지로 가져 오라고 명하신 주님께서 그것을 쉽게 하셨다.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들은, 복음의 그물 속으로 영혼들을 둘러쌌을 때라도, 하나님 은혜의 계속적인 작용 없이는 육지로 그들을 끌고 올 수 없으며 착수해 놓은 선한 사업을 수행하여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잡지 못할 뻔 했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잡도록 도우신 주님께서 "그들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저희를 건축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들을 지켜 육지로 끌어 올리는 것을 도와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마침내 그들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고전 3:7).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고기를 육지로 끌어 올리는 데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인물은 베드로였다. 앞 장(7절)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그의 주님의 모습에 열렬한 애정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는 그의 주의 명령에 더욱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믿는 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2] 잡힌 물고기의 수. 그들은 그것들을 세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으나, 어쩌면 그것은 분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일뱁 쉰 세 마리"였으며 모두 큰 고기였다. 이것들은 그들의 당시의 보급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팔았을지 모르며, 그 돈을 그들이 얼마 안 있어 돌아가고자 한 예루살렘에 가는 비용을 지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3] 그리스도께서 기적과 자비, 이 둘을 확대하여 그들을 돌보신 잇달은 실례. "더우기 큰 고기가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고기 중 단 한 마리도 잃지 않았으며, 그물도 손상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5장 9절에는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그물을 버린 지 오래 되었으므로, 아마 이것은 빌린 그물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빌린 것을 마치 우리 자신들의 것인 양, 우리가 소중히 다루도록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 이전에 그들이 그물을 깁던 그런 한가로움이 이제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그럴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한 것은 잘된 일이다. 복음의 그물이 하루에 삼천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에워싸지만, 찢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에 강하다.

3. 그는 그들을 조반에 초대했다. 그들이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구나 "그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을 주시하셨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고 매우 친밀하게 부르신 것이다.

(1)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자유스럽게 대하셨느나를 보라. 그는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셨다. 그는 "와서 섬겨라." "와서 시중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종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는 것처럼 "가서 너희끼리 조반을 먹으라"가 아니라, "와서 나와 함께 조반을 먹으라"인 것이다. 이 친절한 초대는 다음을 시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여기에 있는 은혜 안에서 자기와 함께 하는 교제 속으로 부르시는 초청.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리스도께서 잔치이신 것이다. 와서 그를 조반으로 먹으라.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이다. 그리스도께서 친구이신 것이다. 와서 그를 더불어 먹으라. 그가 너를 환영하시리라(아 5:1).

[2] 그가 장차 영광 중에 있을 자기의 성취 속으로 그들을 부르시는 초청.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으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먹일 자력(資力)을 지니고 계시며, 그들 모두를 위해 충분한 자리와 양식이 있는 것이다.

(2) 제자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공손한가를 보라.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초대한 자유를 구사(驅使)하기에 다소 수줍어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식사에 초빙하므로써, 그들은 모름지기 망설이며 서 있었던 것 같다. "한 다스리는 자, 곧 그러한 다스리는 자와 함께 먹을 것이므로, 그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을 자세히 살펴 보느라 당신이 누구냐? 하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다음 둘 중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1] 그들은 그를 대하여 그토록 뻔뻔스럽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가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던"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대로 이 때에도 처음에는 다소 변모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그이시며 다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다고 생각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 그들은 저희 자신의 우매를 무심코 그렇게 많이 드러내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능력과 인자하심의 이 본보기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을 때에, 만일 그들이 그이신가 아닌가를 물었었다면 그들은 정말 멍청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몸을 보살피신 뚜렷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자신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영혼에 호의를 베푸시며 또 선한 역사를 이루신 명백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때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불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질문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감히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근거없는 의심은 억압되어야 하며, 발동되어서는 안 된다.

4. 그는 잔치의 주인으로서 그들을 위해 떼어 주셨다(13절). 그들이 여전히 수줍어하며 소심한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 가셔서 친히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그들 각자에게 얼마큼씩,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그가 축사하시고 감사를 드렸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눅 24:30 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이미 잘 알려진 변함없는 습관이었으므로 기술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 이곳에서의 연회는 그저 평범했으니, 곧 단지 생선 조반뿐인데다가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며, 호화로운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데다가 호기심을 끌 만한 것도 없었으며, 진실로 풍부하기는 했지만 그저 수수하고 검소했을 뿐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높이 올리운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잔치에 참석하심으로 왕되신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잡수심으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 양념과 포도주가 없는 한, 떡과 생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은, 여기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과 더불어 조반을 먹을 마음이 거의 내키지 않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친히 개시하셨다. 그는 영광된 몸을 지니셨으므로 어쩌면 잡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지만, 능히 잡수실 수 있는 참된 몸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사도들은 이것을 부활의 한 증거로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행 10:41).

(3) 그는 자기의 모든 초대객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셨다. 그는 그들을 위해 그것을 예비하고, 그들을 초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친히 그들 중에서 그것을 나누셔서 그들의 손에 얹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의 덕택으로 구속의 은혜를 획득할 뿐 아니라, 적용도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먹을 능력을 주신다.

본 복음서 저자는 그들을 조반에 머물러 두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14절). "이것은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혹은 그들의 대부분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은, 혹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세번째 날이다." 그가 부활하신 그 날에, 그는 다섯 번 나타나셨으며, 둘째 날은 일주일 후의 그날이었고, 이것은 세 번째이었다. 혹은 이것은 제자들의 상당수가 함께 있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그의 세 번째 나타나심이었다. 비록 그가 마리아에게와 여인들에게와 두 제자에게, 그리고 또 게바에게 나타나셨었지만, 그는 그들 일행이 한 자리에 함께 있을 때에는, 이것 전에는 단지 두 번만 그들에게 나타나셨었다. 이것으로 다음을 주목하게 된다.



[1] 그의 부활의 사실을 확고하게 하기 위함임. 그 움직이면은 이중적이며 삼중적으로 되었는데, 이는 그 사실이 확실한 때문이었다. 첫 번째 표적을 삼지 않는 자들도 나중 표적들의 표명을 믿기에 이를 것이다.

[2]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계속된 친절의 한 실례로써, 그는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 세 번째 그들을 찾아오셨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방문을 중히 여기는 것이 좋으니, 이는 그가 그것들을 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무가치하게 처신한다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두 번 나타나셨던 사실을 회상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그에게 불리하게 기억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상기될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이다." 우리는 "맞추었다는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하여 마땅히 향상되었는가? 고린도 후서 2장 14절을 참조하라. "이것은 세 번째이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21:2 없음.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2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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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 없음.

 

21:13 없음.

 

21:14 없음.

 

21:15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요한복음 21:15-19)

우리는 여기에서 조반 후에 베드로와 나누신 그리스도의 대화를 볼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그 자신에 관한 것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는 자기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해 보시며, 그에게 자기의 양떼에 관한 책임을 부여하신다(15-17절).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함께 대화를 시작하신 시기. 그것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였다. 그들은 모두 먹어서 배불렀으며, 우리 주 예수께서 식사 중의 좌담으로 종종하셨던 것과 같은 그런 교훈적인 대화로 흥겨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베드로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이 그에게 상당한 불안을 줄 것이라고 미리 아셨으므로 조반을 다 먹을 때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그가 그의 조반을 망치지 않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의 노여움을 샀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기의 배신과 배은망덕으로 인하여 책망받는 것 외에는 달리 기대할 수 없었다. "이것이 친구에 대한 너의 친절이었는가? 너는 얼마나 비겁한 자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는 당연히 제자들의 명부에서 제명되고 신성한 단체에서 추방되는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세 번이 아니면 두 번, 그는 부활 후 주를 만났었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에 관하여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서 있는가에 대하여 의혹이 가득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었기 때문에 때때로 최선을 기대하였지만, 그러나 최후에는 모든 것을 보응하는 책망이 오지 않을까 하여 상당히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주님께서 그를 고통으로부터 옮겨 놓으시며,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말씀하셨고, 그를 사도로서의 자기 지위에 굳게 서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그 허물에 대하여 조급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당한 시간 동안 지연시키셨는데, 이는 조반 중의 모두를 소란케 함으로 때 맞지 않게 그것을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저희가 함께 조반 먹은 후에, 죄인과 함께 한 것같이 아니하고 오히려 친구에게 한 것같이 화해의 표로써 그것에 관해 그와 함께 대화하고자 하신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 책망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대하여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그에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으셨고, 오직 무언의 암시로써 알리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성실에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죄는 용서되었을 뿐 아니라, 잊혀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에게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그가 알도록 하신 것이다. 이 속에서 그는 우리에게 회개한 사람을 향하신 그의 자비심의 한 격려가 되는 실례를 보여 주셨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온유의 영으로써 쓰러진 자들을 회복시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2. 대화 자체의 내용. 여기에 세 번 물어진 똑같은 질문과 세 번 답변된 똑같은 대답과 세 번 주어진 똑같은 응답이 거의 변화없이 있었지만. 결코 공연한 반복은 아니었다. 그것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 구주에 의하여 같은 것이 반복될수록 베드로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그만큼 더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을 기록함에 있어서 본 복음서 저자에 의하여 그것이 반복됨에 따라 우리와 그것을 읽는 모든 자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세 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않는지를 물으셨다. 첫 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다. 다음을 유의하여 보자.

[1] 그가 그를 부르신 방법. "요한의 아들 시몬." 그는 그에게 이름으로 말씀하심으로 그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누가 복음 22장 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하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그를 그가 주셨던 이름인 게바 또는 베드로(그가 그 이름이 뜻하는 능력과 불변성의 신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라고 부르시지 않고, 다만 그의 본 이름인 시몬을 부르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비록 그에겐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엄한 말을 하시지 않으시며, 그의 이름을 빼고 그를 부르시지 않고, 도리어 그가 그에게 축복을 선언하셨을 때에,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이 하신다(마 16:17). 주님께서 그를 "요나의 아들"(오한 혹은 요하난)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태생이 미천하며 그가 향하고 있던 그 영광을 누리기에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그에게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2] 주님께서 그에게 문답식으로 가르치신 경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첫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알아 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가? 하는 이것이 질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것을 베드로에게 적용하신 데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a. 그의 실패가 그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베드로야, 내가 너의 사랑을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나를 사랑했었다면, 네가 고난 중에 있는 나를 시인하기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마음이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서,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요약하면, 우리 자신이 미심쩍게 하는 일을 행하였을 때에는, 우리는 우리의 성실이 의심받는 것을 모욕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소름끼치는 실패 후에 그릇된 토대 위에 안주하지 않도록, 우리는 너무 속히 안주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질문은 충격적이다. 그는 "네가 나를 두려워하느냐? 네가 나를 존경하느냐? 네가 나를 찬미하느냐?"하고 묻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증거만 보여라. 그리하면 모욕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더 이상 그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고해자이며, 자기의 눈물과 또한 제자들의 모임으로 복귀함의 증인임을 고백했었다. 그는 이제 한 고해자로서 시련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시몬아, 네가 얼마나 많이 울었느냐? 네가 얼마나 자주 금식하며, 네 영혼을 괴롭혔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인 것이다. 회개의 다른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고해자들 속에서 눈여겨 보시는 중대한 점은, 그들이 자기들의 회개 가운데서 그를 보는 눈이다. "그녀의 많은 것이 사하여진 것은, 그녀가 많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b. 그의 직분은 그의 사랑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들을 그의 책임에 맡기시기 전에, 그는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양떼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지니신 나머지 그것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시고, 다만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맡기실 것이므로, 그들은 그를 위하여 그의 것인 모두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진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며, 혹은 그들의 형편을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연스럽게 보살피지 못할 것이요, 혹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역자는 자기의 일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사역자들을 그들의 임무 가운데서 마주치는 곤경과 낙망을 즐거이 뚫고 나가도록 강권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후 5:13, 14). 그러나 이 사랑이 그들의 일을 쉽게 만들며, 그들을 그 가운데서 참으로 진지하게 만들 것이다.

둘째, pleion tou,ntw - 즉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 네가 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너는 네 친밀한 친구들인 야고보와 요한, 혹은 너의 형제이자 동료인 안드레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상에 있는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보교와 경쟁(역주:세상의 친한 친구냐 그리스도냐 하는) 속에 설 때마다 그것을 명백히 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네가 이들, 즉 이 배들과 그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 어떤 이들이 오락으로 삼는 고기잡이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 혹자들이 천직으로 삼는 고기잡이에서 오는 이득보다 더." 온갖 관능의 쾌락과 이 세상의 온갖 이익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자들만이 참으로 그를 사랑한다. "네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이 직업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을 버리고, 나의 양떼를 먹이는 데에 전적으로 종사하라." 휫트비(Whitby) 박사도 그렇게 보았다.

b.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나머지 다른 제자들 중 어느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고 또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그의 자만심 강한 자랑에 대하여 그를 책망하는 것을 뜻한다. "네가 여전히 똑같은 마음이냐?" 혹은, 그에게 그가 이제 그들 중 어느 누가 가진 것보다 더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버린 그들의 죄보다도 그를 부인한 그의 죄가 더 컸던 만큼, 그들 중 누구에게 보다도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사하여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 누가 그를 가장 사랑하겠느냐?"(눅 7:42)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향한 우리의 사랑에 있어서 월등하게 뛰어나기를 모두 배워야만 한다. 누가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가를 경쟁하는 것은 치안 방해가 아니며, 또한 이 사랑에서 남보다 앞서는 것이 훌륭한 예의의 침범도 아닌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두 번째와 세 번째.

a. 그가 "이 사람들보다 더"란 비교를 생략한 것은, 베드로가 자기의 대답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자기를 훨씬 적게 드러내며 자기 형제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겸손하게 그것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우리가, 우리는 참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받아들여질 것이다.

b. 그는 마지막에서 원문에 있는 대로 용어를 바꾸셨다. 처음 두 질문에서 원어는, Agapa/j me -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대한 대답으로 베드로가 사용한 다른 용어는 더 강조된 말로써, Fivlw/ se`` - 즉 나는 당신을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용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신다. 네가 참으로 극진히 나를 사랑하느냐?



(2) 세 번 베드로는 똑같은 대답으로 대암과 같이 그리스도께 응수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베드로는 나머지 다른 제자들이 사랑한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체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저기의 그 성급한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그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비록 우리가 남보다 더 낫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형제 중 어느 누구에게 행한 것보다, 우리 자신이 더 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그는 여전히 자기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재삼 고백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확실히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만일 내가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살 가치가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는 그에 대하여 높은 존경과 가치를 그리고 그의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명성과 관심사에 온전히 몰두했다. 마치 그것 없이는 그가 영락(零落)한 것과도 같이 그의 소망은 그를 향하였으며, 또한 마치 그가 그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되어야만 하는 것과도 같이 그의 주 안에서의 즐거움도 그를 향해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죄에 대한 회개의 고백과 같은데,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를 욕보인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금후로는 그를 굳게 신봉하겠다는 다음과 같은 약속과 같은 것이다.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결단코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눅 2:32). 그리고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도 그러하였으니, 믿음은 사랑에 의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관한 자기의 자격을 상실당했었다. 그는 이제 그의 회개에 따라서 다시 용인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으로 그의 시험을 내 놓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토론에 참가한다.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요약하면, 은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자들은, 그들이 매일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안에 있는 자기들의 권익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그 위에 더 강조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한다. 그는 동료 제자들을 자기를 위해 증언해 주도록 보증으로 세우지 않는다. - 그들은 그를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며, 혹은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그의 말은 이미 신용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증언해 주도록 부르짖는 것이다.

첫째,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아시며, 특히 마음을 아시고, 또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자이심을 확신했다(16:30).

둘째, 베드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진실을 알고 계시며, 그를 위하여 그것을 기꺼이 증명해 주시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 위선자에게는 무서운 일인데, 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호소할 데가 있는 것이 큰 위인 것이다.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직을 모를지라도, 그는 그것을 아시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였다(17절)."

첫째,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그리스도를 세 번 거듭 부인했던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분명히 그렇게 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생각하고 울었더라." 과거의 죄 - 용서받은 죄까지도 - 에 대한 일체의 기억은 진정한 회개의 비애를 새롭게 한다.

둘째, 그가 그것으로 인하여 근심하게 된 것은, 주께서 그를 향한 자기의 사랑의 고백에 대하여 큰 모순이 될 이전과 같은 자기의 어떤 더 큰 실패를 미리 알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렇다. 만일 주님께서 그것에 대한 어떤 원인을 보시지 않았다면 나를 이처럼 고문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내가 다시 시험받아야 된다면 나는 어찌될 것인가?"하고 베드로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함과 두려움을 이룬다(고후 7:11).



(3) 세 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자기의 양떼를 돌보도록 위탁하심.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낸 양을 먹이라."

[1]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보호 아래 맡긴 자들은 그의 어린 양과 그의 양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양떼이며, 그것을 그가 자기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이요(행 20:28). 그는 그것의 목자장이시다. 이 양떼 중에 혹자는 어린 양으로서 어리며 미숙하며 연약하고, 혹자는 양으로서 장성하여 상당한 능력이 있으며 성숙하다. 이점에서 목자는 둘 다 돌보되, 첫째는 어린 양이니, 이는 주님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었다"(사 40:11).

[2] 주님께서 그들에 관하여 그에게 주신 책임은 그들을 먹이는 것이다. 15절과 17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bovske - 즉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16절에서 보다 넓은 의미로써 사용된 단어인 poi,maine - 즉 그들에게 목자의 모든 임무를 다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에게 알맞은 것으로써 어린 양을 먹이라. 그리고 적절한 식물로 양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그들을 먹이라. 그리고 이 우리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양에게도 그리하라." 요약하면 그의 어린 양과 양을 먹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들을 먹이라," 즉 그들을 가르치라. 왜냐하면 복음의 도는 신령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먹이라," 즉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그들의 종교적인 집회를 주재하고, 그들에게 모든 의식(儀式)을 베풀어라. 그들 각자의 형편과 경우에 따른 개별적인 처방에 의해서 그들을 먹이되, 그들 앞에 먹을 것을 차려 놓지만 말고, 완고하여 먹지 않으려는 자들이나 혹은 연약하여 스스로 먹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것을 먹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높이 올리우시면서 목자들을 주셔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양떼를 맡기시고 자기를 위하여 그들을 보살피고자 하셨던 것이다.

[3] 그러나 그는 왜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 책임을 부여하였는가? 교황 지상권 옹호자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으로 인하여 전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절대적 통치와 지도적 권위를 베드로에게, 따라서 그의 계승자들에게, 그리고 로마의 사교들에게 부여하고자 예정하셨다. 이는 마치 양을 섬길 책임이 목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낳은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 자신이 그러한 권력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도들이 그에게서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 책임은 교묘한 술책에 의하여 양들을 먹이기 보다는 그들의 털을 깎아서 그들을 먹고 사는 그의 거짓 계승자들의 찬탈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베드로에게 특별히 적용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에서였다.

첫째, 그에게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가 자기의 사도직 포기를 참회하였으므로 그 자신과 그의 형제들의 만족을 위하여 그의 임무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어떤 죄의 범죄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국 용서에 이르게 하는 데 있으며, 베드로에게 부여된 이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만족하셨다는 증거였으며, 그외에는 그가 결코 그의 안에 있는 그러한 확신을 둘 수 없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를 배반한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들을 용서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하시자마자, 자기가 이 땅에서 지니신 가장 귀중한 보물을 그에게 맡기신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근면하게 이행하도록 그를 자극하기 위하여 예정된 것이다. 베드로는 담대하고 열성적인 기질의 사람이었으며 항상 말과 행동에 앞섰다. 그래서 그가 목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떠맡으려는 유혹을 일으키지 않게, 그는 그 자신이 모든 감독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위탁한 대로, 양을 먹이도록 위탁받은 것이지 " 하나님의 택한 자들 위에 군림"하도록 된 것이 아니다(벧전 5:2, 3). 만일 그가 행하려 한다면 그로 하여금 바로 이것을 행하게 하고, 감히 그 이상 더 어떤 것을 꾀하게 말라.

셋째,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가 죄인들을 귀의케 함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비록 그것이 베드로에게 말씀된 것이지만, 눅 5:10)가 되도록 위탁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교화함으로 양떼를 기르는 자가 되도록 위탁하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할 일을 이와 같이 명하신 다음, 그의 고난받을 일을 그에게 명하신다. 그에게 사도의 영광을 확신시키신 후 그는 이제 그에게 예정된 그 이상의 특혜 - 순교자의 영광에 관하여 그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의 순교가 예언되는 경위(18절). "네 팔을 벌리리니." 강제로 남이 네게 띠 띠우고"(붙들어 메인 죄수처럼),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 그는 베드로에게 고난에 대해 알리시기 전에 먼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하는 엄중한 단언을 내리신다. 그것은 아마 일어날지도 모를 있음직한 일처럼 말씀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네게 이르노니, 하는 확실한 일처럼 말씀되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네가 내게 말했던 것과 같이 네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미리 아셨던 것과 같이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고난을 미리 아셨으며, 비록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일일이 하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반적으로 그들에게 예언하셨다. 그의 양을 먹이도록 그에게 위탁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그가 그 일에 있어서 안일과 영광을 바라지 말고, 오히려 고통과 핍박을 기대하며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를 명하시는 것이다.

(2) 주님께서 특별히 그가 사형 집행인의 손에 의해서 비명에 죽을 것을 예언하신다. 어떤 이는 그가 팔을 벌리는 것은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대의 전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이것을 신뢰할 수 있다면, 베드로는 A. D 68년 혹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79년에 네로 치하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혹자는 그것은 사형 선고로 차꼬에 채워진 속박과 감옥에 갇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형의 웅대하고 장엄한 의식은 죽음의 공포를 훨씬 더하게 하며, 감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갑절로 가공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형상으로써의 죽음은 종종 그리스도를 성실히 믿는 자들의 운명이 되어 왔으나,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서 그것을 이겨"내었다. 이 예언은 주로 그의 죽음을 가리키지만 그 이전의 고난에서 성취를 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멀지 않아 그가 옥에 갇히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행 4:3; 5:18; 12:4). 여기에서 그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는 것에서는, 그가 급격한 죽음을 당할 것 이상을 암시하지는 않으며, 그러한 죽음은 죄 없는 자조차도 두려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얼마큼 싫어하지 않고는 가까이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 인간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 쓴 잔을 받지 않으려고 기도하셨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선천적인 염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스러운 복종으로 더불어 잘 양립될 수 있다. 성 바울은 짐을 벗기를 사모하였지만 자기는 "벗고자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후 5:4).



(3)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이전 자유와 비교하신다. "이러한 고난을 조금도 몰랐을 때에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고통이 올 경우에 우리는 그렇지 않으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악화시키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와 건강과 풍요의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에 속박과 질병과 빈궁의 고통에 더욱 괴로워하기 쉬운 것이다(욥 29:2; 시 42:4).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방향을 달리하여 우라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논할 수도 있다. "내가 당연히 받을만 하며 향상될 정도 이상의 번영을 내가 얼마나 많이 여러 해 동안 누려 왔었는가? 그리고 내가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또한 받지 아니하겠는가?" 여기서 다음을 유의하자.

[1] 얼마나 큰 변화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에 따라 우리에게 이루어지는가! " 힘과 명예를 스스로 띠를 띠며" 최대의 자유, 어쩌면 방종에 빠진 자들이 이 모든 것과 대치되는 그러한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삼상 2:5 참조).

[2] 얼마나 큰 변화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즉시 이루어지는가!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띠를 띨 필요가 없으니 그가 반드시 그들을 띠 띠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다닐 필요가 없고 다만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다니면 되는 것이다.

[3] 만일 우리가 늙도록 살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우리에게 확실히 이루어질 것인가! 젊었을 때엔 육체의 기력과 정신력을 지니고 사업이나 곤경을 쉽게 뚫고 나갈 수 있었으며, 그 하고 싶은 낙을 즐길 수 있었던 자들도 늙게 되면, 그 머리털이 짤려서 "다른 때와 같이 몸을 떨칠 수 없게 되었던" 삼손처럼 자신들의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 만년에 이와 같이 그가 고난받게 될 것을 알려 주신다.

[1] 그는 이미 늙어서 자연의 추세대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적들은 그가 세상을 고요히 하직하려고 할 때에 그를 몰아 세워서 급격하게 세상을 떠나도록 하고자 했으며, 그리고 또 거의 촛대까지 타 내려 간 그 촛불을 꺼버리고자 했던 것이다(대하 36:17 참조).

[2] 하나님께서는 그가 늙기에 이르기까지 그 대적들의 노(怒)로부터 그를 보호하고자 하셨는데, 이는 그가 고난받기에 적합한 자가 되도록 하고 또한 교회가 좀더 오랫 동안 그의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본 예언에 대한 설명(19절).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심은 그가 그 일생을 마치면서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다음을 주목하라.

(1)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사이거나 변사(變死), 혹은 더디거나 급하든지 그리고 쉽거나 고통스러움 등, 어떠한 죽음을 당할 것인지도 각 사람에게 정해져 있다. 바울이 그렇게 "거대한 죽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그는 죽음의 등급이 있음을 암시하는데, 세상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한 길이 있으되 나가는 데에는 많은 길이 있으며,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만 하는 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2) 하느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어떠한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의 중대한 관심사이니 "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 이외에 우리의 주요한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참을성 있게 죽거나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기꺼이 죽으며 - 그리고 또 신앙의 진리와 덕에 대하여 증거하여 남을 격려함으로 유익하게 죽는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며," 바울에게서와 같이, "살든지 죽든지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빌 1:20).

(3) 순교자의 죽음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이 죽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견고해진다. 그들이 매우 굳센 지조로써 고난을 끝까지 버티도록 이끌어 준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존귀케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과 그의 약속과 그들의 위로의 샘 속에서 그들에게 충만했던 하나님의 위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과 기쁨으로 권고되어 온 것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와 수천(數千)의 전향과 창립의 씨가 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를 존중히 여기는데 따라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따라서 대개 그러한 희생으로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그도 존중히 여기실 것이다.

3. 여기서 있어 주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신 말씀. 아마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멍해진 것을 알아 채셨으므로, "이 말씀을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어쩌면 주님께서는 자기가 조반 때에 앉으셨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걸음을 조금 떼어 놓으신 후에, 베드로에게 자기를 수행하도록 명하셨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은,

(1) 주님의 은혜와 사도직에 대한 그의 회복을 더 굳게 확증한 것이다. "나를 따르라." 이는 최초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베드로에게 주시기 전까지는 그가 어쩌면 처음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설명한 것이다. "나를 따르라." 이는 "내가 받았던 대로 대우 받으며, 내가 네 앞에서 밟았던 것과 꼭같은 피투성이의 길을 밟으리라고 기대하라. 제자가 스승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것을 말한다.

(3) 그것은 그가 사도로서의 자기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하도록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으며, 그의 목전에서 양치는 자의 모범을 자기에게서 보게 하셨다. 즉, "내가 행한 대로 하라." 대리 목자들이 목자장을 닮도록 배우게 하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를 따랐었는데, 이제 그가 그들을 떠나시면서도 비록 다른 방향에서 이행될지라도, "나를 따르라"는 역시 똑같은 의무를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주신 계명과 그가 자기들에게 보이신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고와 고난 중에서, 이것보다 더 큰 격려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1]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그를 따랐으며, 그것은 그들의 당시의 영광이었으니, 누가 그러한 지도자를 따르기에 부끄러워 했겠는가?

[2] 이후도 그들은 그를 따랐으며, 그것은 그들의 장래 행복이었으니, 그런고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네가 후에는 나를 따라 오리라"는 약속의 반복인 것이다(13:36).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성실하게 따르는 자들은 확실히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21:16 없음.

 

21:17 없음.

 

21:18 없음.

 

21:19 없음.

 

21:20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복음 21:20-25)

본 귀절들에서 다음을 보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하시던 제자인 요한에 관하여 베드로와 함께 나누신 대화.

1. 베드로가 그를 바라보는 눈(20절).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랐으며, 주님께서 당시에 자기에게 베푸신 영광을 기뻐하면서,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도 같이 따르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다음을 유의하라.

(1) 요한이 기술(記述) 방법.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이 이러한 기록 속에 간직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그가 누구를 뜻하는가 하는 것을 충분할 정도로 묘사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가까이 따랐던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으니," 이는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귀중한 몇 분 동안,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 흐르는 말씀이 들리는 데서 가능한 한 많이 있고자 한 욕심에 대하여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언급은 요한이 베드로의 충동에 따라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그 배신자에 관하여 질문했던 것과 같이, 베드로가 이 전의 그 호의에 대해 요한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그에 관하여 그 다음에 계속되는 질문을 한 것을 들어 말하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요한이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슴에 의지하여 베드로의 소청을 들어 주기 위하여 기회를 타서 말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베드로가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그는 우리 모두가 장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요한도 그리할 것으로 보고, 그 소원을 들어 주려는 생각으로 그를 위해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세력이 닿아 있을 때에, 우리는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해야만 한다. 한 때 기도로써 우리를 도운 자들은 다른 때에 우리의 기도로써 우리에게 도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인 것이다."

(2) 요한의 행한 일. 그도 역시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사랑했는가를 보여 주며, 그가 계신 곳에 그의 종 요한도 있고자 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에,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어떤 비밀 이야기를 할 예정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주님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닌 나머지 그리스도의 어떤 이야기를 듣는 혜택을 잃기 보다는 차라리 무례한 듯 보이는 일이라도 행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그 말씀이 모든 제자들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소한도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귐이 있는 자들과 더불어 사귐을 가지며 또한 그리스도를 수행하던 자들과 동행하기를 원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되리라. 나를 "인도하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3) 베드로의 주목(注目). "베드로가 돌이켜 그를 보니," 이것은 다음 둘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

[1] 그의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부터의 무도(無道)한 전환(轉換)이다. 그는 그의 주님을 따르는 것에 마음을 온전히 향했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계속 말씀하실 것을 듣도록 기다렸어야 하고, 그런 후 누가 따르는지 돌아 보아야 했다. 요약하면, 최적임자(最適任者)라도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그들이 마땅히 그리해야 할 만큼 그 마음을 일심으로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불필요하며 시기(時期)에 부적절한 관심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 놓는다.

[2] 그의 동료 제자에 관한 칭찬할 만한 관심이다. 그는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 중에서 자기를 발탁(拔擢)하심으로 자기에게 주신 명예 때문에 그 뒤따르던 자에게 상냥한 눈길을 돌리지 않을 만큼 그렇게 의기양양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의 행위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베드로가 요한에 관해 행한 질문(21절).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당신께서 나에게 나의 일 - 양을 먹이는 것과, 또한 나의 운명 -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을 알려 주셨나이다. 그의 일과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나이까?" 이것은 다음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요한에 관한 관심과 그를 향한 호의(好意)를 말한다. "주여, 주께서 나에게 매우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이다. 여기 내가 그랬던 것과 달리 당신의 은혜를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는 당신의 사랑하시던 제자가 오나이다. 그는 환대받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것이 없나이까? 당신께서는 그가 어떻게 스임 받게 되며, 또한 어떻게 영광을 받게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 주시지 않겠나이까?"

(2)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불안을 말한다. "주여, 내가 홀로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져야만 하나이까? 나는 소멸(消滅)되도록 정하여져야만 하고, 이 사람은 십자가를 분담하지 않아도 되나이까?" 특별한 고난이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에 만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 그 자신에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관한 장래 일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어리석은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에 의하면, 그 질문 속에는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그러한 보배를 맡기시고, 또한 그러한 시련을 예고하셨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었더라면 그에게 좋게 되었을 것이다. "주여, 그러시면 이와 같은 위탁에 대하여, 또한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 내가 충성된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되겠나이까? 주여, 나의 믿음을 더하소서. 나의 살이 있을 동안 나의 힘이 있게 하소서."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1]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 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분주하기 쉬우나, 오히려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에는 태만하며 - 집 밖으로는 눈이 밝으나 집 안으로는 눈이 어둡고 - 우리는 겨우 "우리 자신의 일을 살피고, 또한 겨우 우리 자신의 길을 깨달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또한 그들이 행할 것을 예언한다.

[2] 그는 의무에 관해서 보다는 사건에 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젊었으므로, 자연의 추세대로 그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았다. 그는 "주여, 그는 어떤 때를 위하여 예비될 것이니이까?"하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우리가 끝까지 견뎌서 최후를 잘 마치고, 무사히 천국에 이르게 할 힘을 주신다면, "우리의 뒤를 따라올 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평강과 진리가 나의 생애에 있다면 그것으로 족(足)하지 않은가? 성경의 예언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양심의 길잡이로써 목도(目睹)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2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며, 네가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달리 그가 고난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네 자신의 임무, 즉 현재의 임무인 네가 나를 따르는 것에나 유의하라."

(1) 여기에서 요한에 관한 그리스도의 의도(意圖)가 다음 두 가지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1] 그는 베드로와는 달리 결코 비명(非命)에 죽지 않으나 자연사(自然死)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에게로 그를 데려 가시기 위해 오실 때까지 머물 것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고대 역사가들에 의하면, 요한은 열두 제자 전체 중에서 실제로 순교자로서 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위험과 속박, 그리고 추방에 처했으나, 마지막에는 매우 늙은 나이로 집안에서 죽었다. 요약하면,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기 위해 오시며, 그것은 우리가 그의 오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둘째, 비록 그리스도께서 제자 중 얼마를 불러내셔서 피흘리기까지 대항하게 하셨지만 모든 자에게 그리하신 것은 아니다. 비록 순교의 면류관이 빛나고 영광스러울지라도 그 사랑하시던 제자는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되기까지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한다. 다른 모든 사도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죽었으나, 요한은 그보다도 여러 해 더 오래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현명하시게도 사도들 중 한 사람을 그토록 오래 살도록 명하셔서, 신약의 정전(정전)을, 요한이 엄숙하게 행한 대로(계 22:18), 완결하게 하셨으며, 또한 그 종들이 잠들기 전인데도 가라지를 뿌린 원수의 모략(모략)을 미리 방지하게 하셨다. 요한은 살아서 에비온(Ebion)과 세린투스(Cerinthus), 그리고 또 다른 이단자들을 직면하였는데, 그들은 때마침 일어나서 "사악한 일들을 말하였다."

(2) 혹자는 그것은 단지 베드로의 호기심에 대한 책망일 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이라는 것은 불합리한 추측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네게 맞지 않고 은밀한 것을 캐묻느냐? 내가 요한이 결코 죽지 않도록 예정했더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요한이 언제, 혹은 어디에서, 혹은 어떻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네게 너로서는 어떻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알려 주었으니, 너는 나를 따르라는 그것을 아는 것으로 네게는 족(足)한 것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뜻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현재 임무를 마땅히 지키는데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한 장래 일에 대하여 캐어 묻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1]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 상관없는 많은 일에 대하여 염려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의 명성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관없는 것이다(롬 14:4). 그들이 어떠할지라도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일은 조금도 참견할 것이 아니며,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의 일이나 돌보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태에 관한 수많은 까다롭고, 기이한 질문들이 "서기관들과 이 세상 변론자들"(disputers)에 의하여 행하여지는데, 그에 관하여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해도 좋다. 당신은 무엇이 여사여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흔히 받을 것인데, 이는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상대편에 의해 쉽게 대답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은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이다.

[2]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분(本分)이지 사건이 아니다. 본분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요, 사건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며 - 우리 자신의 본분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니, 이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짐을 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 - 현재의 본분이지 장래의 본분이 아니니, 이는 한날의 지시(指示)는 그날로 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며(시 37:23),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인도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모든 본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한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는 그의 거동(擧動)을 따라야 하며, 거기에 순응하고, 그 주인의 종으로서 그에게 명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길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그가 계신 곳에 있으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일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본분에 열중한다면, 우리는 마음이나 시간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참견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부터 일어난 오해.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고," 오히려 언제까지나 교회와 함께 머물 것이라는 것,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발의(發意)를 억누름(23절). 여기서 다음을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그리고 또한 추측을 견해로 탈바꿈함으로 교회 안에서 오해가 쉽게 야기(惹起)됨. 요한은 순교자로 죽지 않는다니까, 그들을 그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 그들은 그것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Quod volumus facile credimus - 즉 우리는 우리가 참되기를 바라는 것을 쉽게 믿는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이 떠나간 후 살아서 머물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세상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교회에 대한 크나큰 축복이요, 또한 그것은 무든 세대에 신탁(神託)으로써 그를 의지하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체적 임재를 유실(遺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사랑하시던 제자에게서 그것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데, 이는 마치 보혜사 성령이 그것을 행하기로 된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말한 그것이 그 부족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다. 요약하면, 우리는 사람과 수단, 도구(道具)와 외면적 도움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쉬우며, 만일 우리가 항상 그것들을 우리 수중에 소유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일군들을 새로이 하실 것이며, 자기 일을 계속하시는 까닭에, "능력의 탁월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영원한 성령의 인도함 아래 있는 동안에는, 불멸의 사역자들이 교회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 아마 그들은 요한이 당시에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들의 기대를 확고히 했을 것이다. 그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언제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런데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다"(히 8:13).

[3]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빚어진 오해일지라도 그 후에 그것이 교회의 전해 내려오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다음을 알게 된다.

첫째, 인간적 전설의 불확실성, 그리고 그 위에 신앙을 쌓아 올리는 어리석음. 전설, 사도 시대의 전승(傳承), 즉 형제들 사이에 널리 처져 나간 말씀이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때 이르고, 일반적이며, 공공연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위였다. 그렇다면 트랜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가 "성경에 돌려야 할 것과 동등한 존경과 경건한 애착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포고한 저 비문서(非文書) 전승들이 신뢰될 만한 것이 얼마나 적은가. 전통적인 성서 해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조금도 새로운 것을 앞세우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말씀하신 것에 따라서 형제들에 의하여 행해진 해석일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었다. 성경은 대부분 그 자체의 증거가 있고, 또한 스스로 입증하는 대로, 그 자체가 해석자가 되며 스스로 설명하도록 놓아 두자. 왜냐하면, 성경은 빛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기 쉬운 인간의 경향(傾向). 가장 큰 오류는 논의할 여지 없는 진리의 그늘 아래로 오류 그 자체를 덮어 가리는 것이며, 또한 성경은 그 자체가 몽매(蒙昧)하고 변덕(變德) 많은 자들에 의하여 왜곡(歪曲)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잘못 해석되며, 적 그리스도의 오류나 뻔뻔스러운 화체설(化體設) - 이를테면,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그리스도의 축사를 감히 개조(改造)하려고 꾀하는 것을 비호(庇護)하기 위하여 인용되는 것을 들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고수(固守)하며, 또한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쉽게 교정(矯正)함. 이와 같이 본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바로 그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형제들 사이의 그 말을 정정(訂正)하며 단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지 말자.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스스로 변호하게 하며, 또한 순수하고 본래대로 인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거기에 덧붙이지 않게 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견이 일치되도록 하자. 요약하면, 인간의 논쟁 중에 최상의 목적은 성경에 명시된 말씀들을 굳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이다(사 8:20). 성경의 언어는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가장 안전하고 가장 적절한 매개물이니, 곧 "성령이 가르치신 말씀이다"(고전 2:13). 성경 그 자체는 충분히 유의하게 되며, 모든 위험한 오류들을 상(傷)하게 하는 최선의 무기(武器)인 것과 같이(그러므로 이신론자들:理神論者:deists, 소시니안들:socinians, 교황주의자들:papists, 그리고 열광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행하는 것이다), 성경 그 자체는 겸손하게 수락(受諾)하게 되며, 동일한 진리에 관한 상이한 표현 양식에 의하여 생긴 상처들을 치유하는 최선의 무기가 되는 교양(weaponsalve)인 것이다. 동일한 논리와 형이상학, 그리고 모호한 것에 관한 동일(同一)용어의 타당성, 또한 그것들의 적용 등에 찬동할 수 없는 자들이라도, 동일한 성경의 용어에는 일치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서로 사랑하기로 동의(同意)할 수도 있는 것이다.

Ⅱ. 여기에서 우리는 본 복음서의 결론, 그와 동시에 복음의 기사(記事)의 결론을 보게 된다(24,25절). 본 복음서 저자는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과 같이 그렇게 돌연히 끝 맺지 않고, 어느 정도 운율을 가지고 끝 맺는다.

1. 본 복음서 저자는 전에 일어난 일로 고아(高雅)하게 이행(移行)함에 의하여 일관된, 저자 혹은 필자의 기술(記述)로써 결론을 내린다(24절). 그 당세대(當世代)를 향해 "이 일을 증거한 제자가 이 사람이요," 후대(後代)의 유익을 위하여 이 일을 기록하고 그에 관하여 앞 절들에서 베드로와 주님께서 회담하셨던 바로 이 사람 - 사도 요한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리스도의 역사를 쓴 자들은 거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써 넣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 이름을 사실상 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의 토대였던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저자가 누구였는지를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오경(五經)인 사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필자가 누구였는지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과 사(生死)에 관한 기록은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라, 온전히 잘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는데, 그들은 맹세를 따라 그것을 증언하려고만 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그들의 피로써 그것을 보증"하려고 했었다.

(2)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자들은 소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격하고 경청한 증인의 그 견문(見聞)에 따라서 기록하였다. 본 기록의 필자는 한 제자였는데 그는 사랑하시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품에 의지했었던 자이며, 그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설교와 담화를 들었었으며 그의 기적과 부활의 증거를 보았던 자였다. 그가 분명히 확신한 것을 증거하고 있는 자가 이 사람이다.

(3)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자들은, 그들이 목격했었던 것을 증거했던 것과 같이, 그들이 처음에 증거했었던 것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기록으로 남겨지기 전에 최대의 확신을 가지고 구두어(口頭語)로써 널리 알려졌다. 그들은 강단과 법정에서 그것을 증거하였는데, 일행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여행가들의 여행담으로써가 아니고, 최대한의 신중함과 정확성가지고 판결에 도달하기까지, 선서에 따라 그들이 중대한 문제로써 잘 알고 있는 것을 진술하는 증인으로서, 엄숙하게 증언하고 또 확고부동하게 공언하였다. 그들은 그 거룩한 것을 그들이 굳게 지켜야 하는 선서 구신서(具申書)처럼 기록하였다. 그들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교훈인 진리의 세계에 대한 영구적인 증언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데 따라서 우리에게 유리하거나 혹은 불쾌한 증언이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생애가 기록되어진 것은 교회의 지지(支持)와 유익을 위하여 은혜롭게 정해진 것인데, 이는 그것이 보다 큰 풍부함과 확실성으로써 각처로 전파되고 또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본 복음서는 여기까지 진술되어 온 내용의 진실성을 증언함으로써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이것은 다음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1) 이 세상의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공통된 지각, 즉 흠 없는 명성을 지니고 엄숙하게 그 본 바를 증거하며 또 보다 큰 확실성을 위해 그것을 기록한 한 목격자의 증언은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아노라," 즉 이러한 증언은 확실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논박(論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신앙에 의하여 그것을 신뢰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 평결(評決)과 판결은 이러한 증언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진실성은 이 세상의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바라거나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의해서 확증되기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교훈을 전파하셨고,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으며 또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은, 다른 경우에 있어서 항상 인정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증거에 의하여, 따라서 공평무사한 모든 것에 만족하도록 모순없이 입증된다. 그런 연후에 교훈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천거하게 하며 기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하게 하라.

(2) 여기에 진술된 내용의 진실성에 관한 "그 당시" 교회들의 만족을 나타낸다. 혹자는 그것을 예베소 교회의 동의라고 간주하며, 혹자는 본 기사(記事)에 대한 아시아 교회들의 사자(使者) 혹은 사역자들의 동의라고 간주한다. 영감에 의한 기록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 신빙성에 어떤 것을 거기서부터 첨부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들은 그것을 영감에 의한 기록으로써, 교회의 인지(認知)에 천거하였으며, 그들이 그것에 의해서 받았던 만족을 선언했던 것이다.

(3)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안다(19:35)고" 한 것처럼 본 복음서 저자의 기록한 바의 진실성에 대한 자기 확신을 나타낸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하여 복수(複數)로 말하면서, "우리는 안다"라고 한 것은 요한 일서 1장 1절에서, "우리가 본 바요"라고 한 것과 베드로 후서 1장 16절에서처럼,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을 보이기 위함인 것이다. 요약하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했던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만족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자기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그들이 그것에다가 이 생명과 내세(來世)를 둘다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고 기록한 바의 신용에 따라서 이 생명을 버리고 다른 것을 의뢰했던 것이다.

3. 본 복음서는 "이 외의 많은 일에 관하여 등등"(管管)으로써 결론을 내리는데, 이는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하여 말씀되고 행하여진 크게 기억할 만한 것으로 당시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 알려진 것이었으나, 후대(後代)를 위하여 기록되기에는 합당치 않게 생각된 것이었다(25절). 주목할 만하고 개선(改善)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 만일 그 중의 여러 사정들이 상세히 기록된다면, 이 세상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서관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바울과 같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라고 하며 웅변가처럼 결론을 내린다. 만일, 왜 "복음서들이 규모가 더 크지 않으며, 왜 그들은 구약처럼 신약의 기사(記事)를 풍부하고 길게 작성하지 않았는가"라고 질문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답변될 수 있다.

(1) 그것은 그들이 화제에 고갈되었거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더 이상 기록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하신 일이 많았는데, 이들은 황금 글씨고 기록되어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왜냐하면,

[1]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알려질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활용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쓸 데 없는 말이나 보람없는 일을 행치 않으셨다. 아니, 그는 결코 대단치 않거나, 사소하거나 혹은 경박한 일은 조금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행하시지도 않으셨으니, 이는 가장 지혜로운 혹은 훌륭한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너무 많고 맑았으며, 그 종류도 맑았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에 동일한 일이 종종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참된 기적이 대게 하나님의 권한을 나타내기에 족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많은 사람들에 따라서, 현저히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 그리고 현저히 많은 증인들 앞에서 일어난 기적들의 되풀이는 그것들이 참 기적임을 입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새로운 기적은 그 전의 기사를 더 잘 믿게 해 주며, 그 기적들 중의 다수는 모든 기사를 논의할 여지가 없게 하여 주는 것이다.

[3] 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하여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몇 번이고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마 4:23, 24; 9:35; 11:1; 14:14, 36; 15:30; 19:2; 그리고 다른 많은 곳에서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풍부한 화제를 지니고 있다. "실제는 기록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절반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 중 한 마디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며(행 25:35), 또한 그외에도 많은 것이 있을 것을 의심할 바 없다. 그의 모든 말씀은 잠언(箴言)이었던 것이다.

(2) 그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것은 더 이상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점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 그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으나, 그것들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된 것이 그리스도 도(道)의 충분한 계시이며 또한 증거이고, 그 나머지는 동일한 취지를 향한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법으로써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비문서 전승(非文書傳承)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록된 말씀을 완전케 하는 체하는 그 전승들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만 한다뿐 우리는 그것에 모순되는 것이 거기에 있는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로 인하여 "경계를 받도록 하자.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도다"(전 12:12). 만일 우리가 기록된 것을 믿지도 또 활용하지도 않는다면, 더 많은 기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성령으로서는 모든 것을 짓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필자에게는 모든 것을 쓰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였다.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하리라." 세상이 방대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책들을 채울 것이라는 말은, 이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가리킬 수 없을 때에, 흔히 있음직하고 또 정당화될 수 있는 한 과장법이다. 그것은 전에 없었던 그러한 거대하고 비대한 기사(記事)가 되었을 것이며, 모든 다른 기록들을 밀어 젖히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위한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게 하는 그러한 것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쓸 데 없는 반복이 조금도 없이,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보아, 만일 우리가 그가 하신 그 모든 기도의 기록을 작성했었더라면, 그리스도의 기도로 채워질 책의 분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더욱이 만일 그의 모든 설교와 담화와 함께 그의 기적과 그의 병고치심과 그의 모든 수고,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이 낱낱이 기록된다면, 그것은 끝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3] 많이 기록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도, 양심 속에서,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쓰고 싶었던 것을 쓰지 않았었다. cwrh/sai - 즉 이 세상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요 8:37)에서 사용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 말씀들은 너무 많았었기 때문에 있을 곳을 찾지 못하였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읽는 데에 소비되었을 것이므로, 그로 인하여 다른 의무들은 밀려 났었을 것이다. 기록된 많은 부분은 간과되고, 많은 부분이 망각되며, 또한 많은 부분이 끝모를 논쟁 속에 버려지게 되는데, 만일 그 모든 기사가 팽창된 것과 같은 그러한 동일한 권위와 동일한 필요성의 산더미 같은 책들이 있었었더라면, 이것은 더욱 더 그런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기록된 내용이 묵상되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명하시게도 그것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시기를 합당하게 생각하였다. 어버이와 사역자들은 훈계를 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야곱처럼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기록된 책들에 대하여 감사하되, 그 평범함과 간결함 때문에 그것들을 보다 작게 평가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려고 계획하신 것을 부지런히 활용하면서, 또한 보다 높이 처하기를 사모하여, 거기에서 우리의 역량이 크게 향상 및 증대되어서 그것들의 과중한 짐이 되는 위험이 따르지 않도록 하자. 본 복음서 저자는, 아멘으로 끝을 맺으며, 이로써 자기의 인(印)을 치는데, 우리도 우리의 인을 치도록 하자. 이는 본 복음에 동의서명(同意署名)하면서, 그것이 참되고 또 그 모든 것이 참되다는 믿음의 아멘이요, 그리고 또한 기록된 내용에 대한 만족의 아멘으로써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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