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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유대에서 갈릴리로 (요한복음 4:1-3)

이제 예수는 추수 때가 되기 넉 달 전에 유대를 떠나셨다(35절).

Ⅰ.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말 뿐이다. 즉 그는 "제자들을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많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자를 삼는 것," 즉 사람들을 자기의 뜻에 맞게끔 적응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권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 태어날 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Ⅱ. 그는 "제자를 삼으시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그러나 사실은 제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었다(2절). 예수는 자기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모두 친히 세례를 주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제자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사실은 장래의 일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의 종들이 행하는 일은 모두가 자기가 직접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이신 것이다.

Ⅲ. 예수는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또 세례를 주었다." 그는 당시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더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일생 한 것보다 더 많이 했다. 그리스도의 대화는 요한의 대화보다 더 신임을 받았다. 그의 표적들은 확신을 주고, 그의 치유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Ⅳ. 바리새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 즉 그들은 예수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첫 공적인 활동에서부터 시기의 눈으로 보아와서, 그에 관한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요한을 제거했다고 여기고(이 때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스스로들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큰 고민거리인 예수가 나타났다. 또 다시 증인이 일어날 것이다.

2. 그들에게 염려가 되는 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많이 얻었다(삼았다)는 것이다. 복음의 성공이란 그 적들에게는 분격을 일으키는 일이다. 어둠의 세력이 복음의 성공에 대하여 격분케 될 때는 하나의 좋은 징조로써 그 징조는 점점 커지게 된다.

Ⅴ. 우리 주 예수는 자기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러한 소식이 들어갔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식자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감추려는 자들로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누구도 "여호와께서 모를 만큼 깊이 자기들의 뜻을 숨길"(사 29:15) 수는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여기서 바로 "주님"(영문은 "여호와"와 같은 단어임-역주)이라 호칭되고 있다. 그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들은 말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것은 거짓이었다. 예수가 당시에 벌써 "요한보다 많은 세례"를 주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예수가 요한보다 더 골치거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Ⅵ. 우리 주 예수는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1. 예수는 굉장히 핍박을 받을 것 같기 때문에 "유대를 떠났다." 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핍박으로 나타났으며, 그의 활동 초기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망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사악한 술책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음모를 피하려고 그리스도는 유대를 떠나서,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갈릴리로 갔다. 이 지방에서는 그들의 시기의 눈초리를 피할 것 같았다. 그 이유로써

(1) 하나님의 뜻이며,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시킬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7:30). 그는 아직도 증거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위험 속에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2) 그가 유대에서 모았던 제자들이 어려움을 견딜 수 없으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으리라.

(3) 여기에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한 규칙을 제시했다. "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는 다른 장소로 피하라." 죄짓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때에도 고난을 당하라고 우리를 부르진 않으셨다. 그러므로 자기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의 거처를 피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표적을 행사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구한 것은, 자기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격려를 주기 위해서이다.

2. 예수가 갈릴리로 가심은, 그 곳에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 반면 적들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갈릴리로 가신 것은,

(1) 거기에서 요한의 전도가 그를 예비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즉 헤롯의 관할 하에 있는 갈릴리는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최후의 장소이었기 때문이었다.

(2)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지금 그 장소는 예수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예수가 지금은 등불을 등경 아래 감추어 사람들의 생각이 요한과 자기 자신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선한 일군들의 자유와 구속이 모두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빌 1:12). 안전을 찾기 위하여 그가 갈릴리로 간 것은 어떤 목적 하에서인가? 요한을 핍박한 헤롯은 결코 예수의 저항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켐니티어스(Chemnitius)는, "경건한 자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지만, 그들 자신은 피해 갈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는 피난처를 줄 자가 그리스도뿐이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주석했다.

 

4:2 없음.

 

4:3 없음.

 

4:4

사마리아의 우물(요한복음 4:4-26)

그리스도가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에 이르러, 선한 일을 행하신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혈통"과 "종교"에 있어서 "혼혈 유대인"으로 앗수르 왕이 열 지파를 포로로 한 후 그 곳에 이주시킨 식민들의 후손들이며, 이 후손들이 불모의 땅인 박토에 남았던 유대인과 이후에 돌아온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 혼합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경쟁하려고 그리심산에 사원을 세우고, 오직 이스라엘 하나님에게만 예배했다. 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큰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눅 9:53),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큰 욕이라 생각했다. 유대인들이 번창하였을 때, 사마리안들은 그들과 같은 혈족임을 주장했으나(에 4:2), 그들이 쇠퇴되었을 때에는, 자기들이 메데와 파사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조세푸스의 고대사 lib 11:8; 12:7참조).

Ⅰ. 사마리아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자.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다(마 10:5). 즉 거기서 복음을 전하거나 표적을 행하는 것을 금했다. 다시 말하면 그 곳에서 공적으로 전하지 말고, 어떠한 표적도 행하지 말라,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 곳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베풀었던 친절 행위는 "우연적"이었다. 그것은 단지 "주인의 상에서" 우연히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1. 유대에서 갈릴리까지의 길에는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다(4절). 즉 "예수는 사마리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요단강에 인접된 매우 험한 길 이외는 다른 길이 없다. 지금도 사악한 자와 불경건한자들이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섞이어 있으므로, 믿는 우리들이 세상으로 나가려면, 그러한 장소를 거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다.(고전 5:10). 그러므로 우리들은 양손에 의의 갑옷이 필요하게 되며, 그들에게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며, 그들과 접촉을 통하여 더럽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 받는 장소에 들어가서는 안 되지만, 필요한 때에는 들어가야 한다. 그 때 우리들은 그들과 거주해서는 안 되고 빨리 나와야 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가 그 곳에서 행할 선한 일 때문에 그가 사마리아를 거쳐갈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불쌍한 여자 한 사람을 개심시키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이 길을 가야만 했다." 사마리아로 그리스도가 "지나가게"되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로써 그리스도가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살라 하였느니라"(겔 16:6).

2. 그가 쉬던 곳이 우연히 "사마리아 동네"였다.

(1) 그 장소의 묘사를 보자. 그 장소는 수가라 불리워졌는데 아마 세겜과 같은 이름으로, 구약에서 여러 번 나타난 장소일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랜 기간을 통하여 지명은 흔히 퇴락하고 만다. 세겜이란 장소는 이스라엘 교회에서 첫 개종자를 낳았던 곳이며(창 34:24) 또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밖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첫 장소가 되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관찰에 의하면, "아골 골짜기"와 마찬가지로, 이 마을을 통하여 불행한 이방인들에게 "희망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호 2:15). 이곳은 아비멜렉이 왕이 된 곳이다. 또 그곳은 여로보암의 도읍지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 장소의 유구한 역사를 제시하려 했을 때, 그곳과 야곱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이 왕과의 관계보다 더 귀중했던 것이다.

[1] 야곱의 땅이 여기에 있는데,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이 땅의 일부에 그의 뼈가 묻혀 있었다(창 48:22; 수 24:32). 그리스도가 행로에 곤하여 이 곳에서 쉬고 있을 때 선조들이 신앙으로 획득한 좋은 평판을 야곱이 요셉에게 전해 준 것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제롬도 가나안 땅에서 살기로 정하였는데, 그것은 그 땅을 봄으로써 성서의 이야기를 깊이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2] 여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은 그가 팠거나 적어도 그 가족이 사용했던 것일 것이다. 구약 성서에서는 이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다.

(2) 이 장소에 우리 주 예수의 모습을 보자. 즉 "행로에 곤하여 예수는 우물곁에 않아 있었다." 여기서 주 예수를 살펴보자.

[1] 여행자들의 공통적인 피곤을 겪으셨다. 그는 행로에 곤하여 있었다. 아직도 제6시밖에 안 되었고, 그의 하루 여행의 절반밖에 못 마쳤는데 벌써 피곤하여졌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날의 제6시가 무더웠기 때문에 피곤하여졌는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첫째, 그는 "참 사람"으로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당하셨다. 수고는 죄와 함께 왔으므로(창 3:19),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는 육체의 노곤함을 겪으셨다.

둘째,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말이나 수레를 타고서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초라함과 고행의 실례로써,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셨다. 그리고 그는 도보로 내내 여행하셨다. "종들은 말을 타고"가는데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전 10:7).

세째, 그는 튼튼한 신체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제자들은 피곤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앉아서 한 발자욱도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도 어떤 어려움도 없이 그들은 동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2] 그는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취하는 휴식을 가졌다. 즉 "그는 곤하여 우물곁에 앉았다."

첫째, 그는 딱딱하고 찬 거친 장소인 우물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쉬려고 소파나 안락 의자를 가진 게 아니다.

둘째, 그는 이와 같이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즉 그는 개의치 않고 또는 여행으로 피곤해진 사람 그대로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Ⅱ. 제사장들과의 예수의 논쟁, 그리고 산 위에서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가 침묵 속에 묻혀버리는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대화를 네 개의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그들은 "물에 대해서" 대화한다(7-15절).

(1) 이런 대화를 갖게 된 "주위 사정"이 주목되어 있다.

[1] "물을 길으러" 한 사마리아 여자가 왔다. 이것은 그 여자의 형편이 빈곤해서, 물을 길어 나르는 하인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여자 자신이 생활을 이끌어가야 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첫째,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에서의 정직하고 겸손한 근면을 주목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둘째, 우리에게 아주 뜻밖으로 보여지는 사건들이 실은 신의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훌륭한 목적을 가지고 되는 일이다. 이 여자가 우물가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리브가, 라헬, 그리고 이드로의 딸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한다. 이 여자들은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등 좋은 남편들을 만났는데, 이 만난 장소는 그들이 물을 구하러 우물에 왔을 때였다.

셋째, 개종(改宗)과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기대 밖의 사람들에게 온다. 예수는 찾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2]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정의와 정직에 대해서이다. 바울처럼(살후 3:8)그리스도도 양식을 공짜로 먹지 않으셨다.

둘째, 매일 섭리에 의존했다.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가지 않고, 제자들을 보냈다. 이 양식을 장만하는 동안, 예수는 그와 같이 하나의 선한 일을 했다. 우리의 공허한 순간들을 그와 같이 선행으로 채운다는 것, 그리고 부스러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베드로는 비몽사몽에 빠졌다(행 10:10). 또 그가 식사하러 동네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에게 식사를 가져오는 것이 더 개인적으로 쉴 수 있고, 더 경제적이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돈주머니는 빈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돈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가장(家長)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적어도 많은 일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그리스도는 그 동네에 있는 최고의 여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물가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분위기에 따라서 처신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 여자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증거 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에게 그는 종종 가르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단 한 사람인 여자, 그것도 초라하고 처음 보는 사마리아인에게 공손히 가르치고 있다. 그 가르침이란 비록 "한 영혼"이지만, 사망에서 구원이란 영광스러운 성취임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가르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2) 이 대화의 내용을 알아보자.

[1] 예수는 물긷는 여자에게 공손한 요구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물 좀 주십시오."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보잘 것 없는 자처럼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이곳에서는 하나의 구걸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부족 상태에 있는 자나 우물을 팔 수 없는 자들은 구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가 물을 요구했다. 그것은 그가 물이 필요하고 그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그 여자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와 더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기꺼이 그런 비천한자들을 포용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비천한 자들에게 구걸해서 여기에서와 같이 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생수를 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신다.

[2] 어쨌든 그이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 여자는 아직도 그에게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기질로써는 물조차 자기에게 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9절). "어째서입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어떤 반목이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치 아니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의 적이었으며(에 4:1), 어떠한 경우이든지 그들에게는 해로 왔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대해서 저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또 기록된 율법으로, 그리고 이 율법에 의한 상급과 하급 재판소의 이름으로 그들은 축출되고 저주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사마리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음식물은 먹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이 말은 "랍비 탄쿰"(Rabbi Tanchum)에서 라이트푸트 박사가 인용한 말이다. 종교에 대한 시비는 일반적으로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시비이다. 인간들은 서로 관련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다른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종교는 자선과 자비, 그리고 공동의 예의를 위한 것임을 부정한다면 사람들은 비인간적이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으로 될 것이다.

둘째, 즉시 이 여자는 유대인의 거만과 나쁜 사역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꾸짖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그의 옷차림이나 말씨 혹은 그 둘에 의하여 이 여자는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가 다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인에게 대해서 지나치게 설치지 않음을 이상스럽게 여겼다. 모든 면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처럼(슥 3:8) 놀라울 만한 사람들이다. 이 여자는 두 가지의 일에 놀랐다.

첫째, 그가 매우 친절하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고난을 견디는 것이 그들의 명예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유대인에서 태어낳다는 것은 그의 굴욕의 일부로써 당시 유대는 로마에 예속된,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서도 부도덕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빌라도가 경멸조로 "네가 유대인인가?"라고 물은 것처럼, 그는 세상의 평판에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그는 일반적인 타락의 조류를 거슬러서 헤쳐나가는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비록 우리 사회의 풍조, 또는 우리 집단의 기질이 꽤나 까다롭고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선함과 친절함을 지녀야 한다. 이 여자는 그리스도가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기를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을 집단의 일반적인 잘못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예의가 없는 규칙은 없다.

다음은 그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서 이런 친절을 받을 것으로 그가 기대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 저와는 상종하지 않는데 어째서 제가 당신과 상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시비는 복수와 보복에 의해서 끝없이 만연되어지고 있었다.



[3] 그리스도는 이 여자에게 거룩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다"(10절)고 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첫째, 그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생긴 적대감을 그 여자에게 포기토록 했으며, 적대감정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떤 차별들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책이란 피차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모든 경우들을 무시하고 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 여자를 개심시키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예배 의식이 "종파분리적이다"라고(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알려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여자 자신의 무지와 부도덕,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나타내 줌으로써이다.

둘째, 그는 지금 이 때가 그 여자에게 아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기회(지금까지 그 여자가 알고 있었던 기회보다 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있었다. 이 여자는 때의 징조들을 식별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여자에게 지금이 은혜의 때라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은혜의 때란 그리스도가 이 여자를 만난 때였다.

a. 그는 그 여자에게 암시하기를, 지금 모르고 있지만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즉 그 다음 말이 설명해 주듯,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너는 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물을 주었을 것이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그를 한 유대인으로서, 초라하고 피곤에 지친 여행자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외모 이상의 더 중요한 것을 그 여자가 알도록 했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가장 풍요한 징표이며, 우리의 모든 선에 대한 가장 풍요한 보화이다. 이 선물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빛이 아니며, 그가 우리에게 다시 요구할 "차관(借款)"이 아니라, 하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3:16).

(b) 하나님이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받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특권이다. 즉 우리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지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하나님의 선물인 그가 지금 당신 앞에 있으며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너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시고 있다. 이 선물이 당신에게 간청하고 계시다."

(c) 비록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있어서 그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간청하지만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 안에서 "물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주님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b.그는 그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았다면, 무엇인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와 같이 무례하고 경솔한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결코 그 여자는 그를 모욕하기는커녕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는 그에게 궁하였을 것이다."

(a) 그리스도에 의하여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유익을 구해야 하며, 그 유익에 대한 기도는 진실 되어야 한다.

(b)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를 찾아야 하며, 만약 그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시 9:10).

(c) 지식을 얻을 수단이 결핍된 자들에게 그 수단이 주어지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를 그리스도는 잘 알고 계신다(마 11:21).

c. 그는 그 여자가 자기에게 청원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서 자기가 어떤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즉 "그가 네게(네가 그를 꾸짖은 것처럼 너를 꾸짖지 않고) 생수를 주었으리라." 이러한 생수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우물 밑바닥에 있는 그런 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즉 "흐르는" 물과 같다.

(a) 성령의 은혜는 "생수"와 같다(7:38 참조). 이와 유사한 메시야의 축복이 구약에 약속되어졌다(사 12:3; 35:7; 44:3; 55:1; 슥 14:8). 성령의 은혜, 그리고 그의 위로들이 갈급한 영혼을 만족시킨다. 그런 영혼은 자신의 본성과 필요를 알고 있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청하는 성령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며, 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4] 이 여자는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겠다는 은혜의 통고를 거절하고 트집잡고 있다(11,12절). 이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큽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가 비유적으로 말한 것을 이 여자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런 해석은 전에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다. 보이는 사물에만 크게 사로잡힌 자들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혼란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예수를 "선생님"으로 혹은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주의 깊게 본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악의 없이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이 여자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우물에는 거의 물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즉 이 여자는 말하기를 "주여, 이 우물에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깊습니다"했다. 이 여자의 말에는, 땅에서 수증기를 만들어 올라오게 하는 그에게 물 긷는 도구가 필요 없다는 그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자기들 눈으로 뭔가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나 그의 약속을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도 우리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서, 두레박이 없으면 그가 물을 길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 여자는 경멸적으로 "당신은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어디서 얻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자들을 위하여 주는 생수의 근원은 감추어져 있으며 아무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생명의 샘은 그리스도에게 감추어져 있다. 비록 그가 감추어 둔 장소를 우리가 모르지만 그는 우리를 위하여 풍족히 간직하고 계신다.

둘째, 이 여자는 앞에 놓여져 있는 이 우물보다 훨씬 더 나은 생수를 그가 공급해 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즉 "우리에게 우물을 준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당신이 더 큽니까?"

a.. "야곱 자신과 그 아들들과 짐승이 이 우물에서 다 먹었다"는 전승은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a) 몸의 혈액순환처럼(전 1:7), 강물의 항구적인 유전(流轉)에 의하여, 그리고 심장의 고동처럼 아마도 바다에 있는 조수의 간만에서 오는 유전(流轉)에 의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샘물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b) 족장 야곱의 검소함을 엇볼 수 있다. 그의 먹는 물은 이 우물로써, 그와 자기 자녀들은 짐승들과 함께 이 물을 먹었다.

b.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몇 가지 일에 있어서는 모르고 있다.

(a) 야곱을 "조상"이라 부름에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을 야곱의 자손이라고 인정할 만한 어떤 권위가 있었는가? 그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 지방에 거주시킨 혼합된 무리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관계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주권을 "침입"해서, 그 땅을 부당하게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혈통과 권위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억지는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b)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이 아닌 듯(6:32), 야곱이 생수를 준다는 것으로 생각하여 야곱의 "선물"로 주장함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하는 "사자들"을 선물 "제공자"로 부르기가 쉬우며, 또한 앞으로 올 자를 잊고, 지나간 과거의 사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야곱은 이 우물을 자기 아들들에게 주었지 지금의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적들은 교회의 특권들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독점도 한다.

(c) 이 여자는 그리스도를 야곱과 비교할 수 없는 인물로 착각하고 있다. 옛 사람을 지나치게 숭배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선한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이런 트집에 대답하여, 그가 주는 "생수"는 야곱의 우물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13절,14절). 여자가 그릇되게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여자를 저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용기를 주고 있다.

첫째, 야곱의 우물물을 단지 "일시적인" 만족과 충족을 주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다. 즉 이 물은 다른 물과 마찬가지이다. 당장의 목마름을 갈아 앉히지만, 다시 목마르게 되어 몇 시간 후에는 이제까지 먹었던 물을 필요로 하고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암시에서, 현 상태에서, 우리 신체의 허약성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물을 필요로 하고 계속해서 갈망하고 있다. 생명은 하나의 불, 하나의 등불과 같아서 계속적인 연료와 기름의 공급이 없으면 곧 꺼지고 만다. 자연의 열은 스스로 없어지게 된다.

또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우리의 만족을 본다. 자연은 쉬임이 없으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만족이란 여전히 불완전하다. 우리가 마시는 물에서 어떤 만족을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목마를 것이다. 어제의 먹고 마심이 오늘에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가 주는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14절). 그리스도의 선물은 이 세상에 있는 물건들과 비교하여 볼 때 훨씬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 물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자마다 복음의 영원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

a. 그 사람은 "목마름"과 "결핍"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열망"은 하지만 "번민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목마름이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것뿐이다.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절망적인" 목마름은 아니다.

b. 그리스도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 되기 때문에 그는 결코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자기 자신 안에 풍족과 만족의 샘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결코 궁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a) 샘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안에 심어진 은혜의 원리는 그에게 만족을 주는 샘이다. 선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방황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그에게 확고한 소망의 근원이 되고, 넘치는 기쁨의 샘이 된다.

(b) 생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물길을 그릇을 손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물이 바닥날 때까지는 목마르지 않겠지만, 곧 이 우물은 고갈되고 만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 생수가 넘쳐서 흐르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휘하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종교의 "원칙"과 "사랑"이란 이런 생수를 말한다.

[a] 생수가 솟아난다는 것은 강하고 쉼이 없는 은혜의 활동을 말하고 있다. 만일 선한 진리들이 고여 있는 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정체되어 있다면, 이 진리들은 우리가 받은 그 은혜의 목적에 응답을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좋은 보화가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틀림없다.

[b] "영원한 생명"이 솟아나고 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으로, 첫째는 은혜로운 활동의 "목표"에 대한 것이다. 성결 된 사람은 그의 눈을 하늘에 두고, 영적인 삶의 결핍을 참지 못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도약한다. 둘째로 이러한 행동의 "항구성"이다. 즉 성취되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도약할 것이다. 셋째로 그들의 상급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것이다. 생수가 하늘로부터 솟아나 하늘로 흐르게 된다(전 1:7 참조). 이 생수가 야곱의 우물물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c] 여자는(농담인지, 진담인지 말하기가 어렵지만) 이런 물을 달라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희구한 발견입니다. 내가 결코 이런 물을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15절). "나에게 이런 물을 주사,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첫째,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여자가 그리스도는 단지 부질없이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조소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런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희귀한 발견입니다. 내가 결코 이곳으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면 더 많은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다른 성서학자는 이 여자의 간청은 좋은 뜻이나, 연약하고 무지한 간청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자는 예수께서 매우 선하고 유용한 어떤 것을 나타냈다고 생각하고, 용기 있게 "아멘"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게 주십시오. 누가 내게 선한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노동을 쉽게 하고, 줄이는 것도 큰 선이다. 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선물에 대하여 연약하고 동요하는 것이지만 갈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또 사람들의 최선의 바람은 육적인 목적 이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생수를 주십시오. 그러나 영원한 생명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여자는 말했다.

2. 이 여자와의 다음 대화 주제는 "이 여자의 남편에 관한 것"이었다(16-18절). 어려운 주제들을 생략해서, 대화에 단절을 초래케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가 갑자기 이 말을 시작한 것은 생수에 관한 대화를 중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스러운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은혜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한 것이 그 여자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죄에 대해서 납득을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생수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보류하고, 그는 그 여자의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상처를 열게 함으로써 그 여자는 은혜의 치유를 더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마음을 취급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죄의 멍에로 "피곤하고 지쳐" 있기 때문에, 안식을 주려고 그리스도가 오셨다. 먼저 마음을 건드리고, 그 다음에 치유해야 된다. 이것이 영적 치유의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순서를 거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 그리스도는 이 대화를 아주 신중하고 점잖게 시작하고 있다(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 그리스도가 여자에게 한 명령은 아주 훌륭한 이유가 있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면 네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내가 가르치고, 깨닫게 해 주겠다."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보라"(고전 14:35). 그리고 남편들은 "지식의 사람으로" 아내와 동거하라(벧전 3:7). "너희 남편을 불러오라. 그도 너와 같이 배워야 한다. 그러면 너에게 생명의 은혜가 함께 상속되어 질 것이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면 그는 우리 아이에 전해지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보는 데에서 일들을 정직하게 처리하도록 그리고 어떤 것이 좋은 소식인지를 알도록 가르치곤 했다.

[2] 그 명령이 어떤 훌륭한 이유를 가진 것처럼, 그만큼 그의 좋은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견책을 할 때는 기술과 신중성이 요구되어진다. 즉 드고아의 여자처럼 둘러대어 말해야 한다(삼하 14:20).

(2) 여자는 아주 열심히 자기의 죄된 사실을 피하려고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바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여자는"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자의 이 말속에는 자기 남편에 대해서 말하기 조차 꺼려하며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암시가 있었다. 더 계속되는 대화에서, 그 문제의 사실이 폭로되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 여자는 자기 남편을 이 곳에 데려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러므로 "제발 다른 이야기를 해 쥐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자는 남편도 없고, 처녀나 과부도 아니었다. 육의 생각은 아주 교묘해서 정죄 받기를 회피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서, 조심스럽게 허물을 감추려고 애쓴다.

(3) 우리 주 예수는 그 여자의 양심을 분명하게 깨우쳤다. 예수는 이 본문에 기록되어진 것보다 더 많이 이야기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수가 이제까지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29절). 그러나 이 본문의 기록에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한 기록뿐이다.

[1] 이 여자의 과거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보자. "네게 다섯 남편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가 여자를 책망하려 한 것은 여자의 "불행"(많은 남편들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죄"였다. 여자가 집을 뛰쳐나오고(법률가들이 말하는 애정 도피행각), 남편에게 쫓겨나고,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혹은 여자의 불순종, 부정, 불충실한 행동으로 남편과의 이혼을 야기시켰거나, 혹은 법에 위반되는 부정직한 수단에 의하여 남편과 이혼했을 것이다. 마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끝냄으로써 죄책도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수치스런 관습을 경홀히 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는 매사를 알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여자의 현재의 생활 상태를 심하게 꾸짖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 여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거나 또는 이 남자에게 다른 아내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과거의 남편 또는 남편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여자는 창녀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의 행실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화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여자를 창녀로 부르지 않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만 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말은 여자의 양심에 맡겼다. 책망이란 책망 받는 자들의 감정이 거의 상하지 않도록 할 때가 가장 효과가 있다.

[3]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여자가 책임 전가와 회피의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은 옳다."하고 최소한도로 돌이킬 수 있는 의도가 있었다. 참고로,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하려는 사람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선한 본성이 되찾아질 희망이 있게 된다. 반면 그들을 더욱 질책해서 악화시킨다면, 그들의 악한 성질이 더욱 악화될 것은 분명하다.

3. 대화의 다음 주제는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이다(19-24절).

(1) 예배의 장소와 관련하여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제시한 양심의 소송을 보자(19,20절).

[1] 여자가 예배의 장소를 말한 유인(誘因).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여자는 예수가 책망한 사실이 진실임을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책망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쓰라린 허물이 건드려졌을 때 격분하는 것처럼, 이 여자는 격분하지 않았으며,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가식이 있다고 그의 책망을 비난하지 않고, (드문 일이지만)자기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고 여자는 더 나아가고 있다.

첫째, 여자는 그에 대하여 존경을 가지고 말하며, 그를 "주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와 신실하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이것은 여자를 책망하는 그리스도의 은유함의 결과이다. 그는 여자에게 불쾌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말씨는 어떤 사람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온유함이었다.

둘째, 여자는 그를 한 사람의 선지자로 알고 있다. 즉 하늘 나라와 통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과 양심의 은밀한 죄까지도 정죄함은 그의 신적인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위대한 증거이다(고전 14:24, 25).

셋째, 자기에게 좀더 가르쳐 줄 것을 여자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책망자에게 화내지 않으며, 또 그들을 피하지도 않는 많은 사람도 책망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자와 기꺼이 이야기하기를 바라고 있다.



[2] "공적인 예배 장소"에 관해 여자가 제의한 내용을 보자. 어떤 자는 여자가 자기의 죄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종교의 논쟁은 흔히 열렬한 신앙심에 대한 큰 반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좋은 의도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예배드려야만 하며, 그 예배가 올바로 드려지기를 갈망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만나서 그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가르치기에" 알맞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기꺼이 배우자." 또한 "좋은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질문"을 하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심지어 거짓 신을 섬길 만큼 어리석지만,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않는 짐승 같지는 않은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실 것이며,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예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논쟁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복잡한 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장소" 때문이다. 이 예배 장소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를 보자.

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각을 보자. "우리 조상들은" 동네와 우물이 가까운 "이 산에서 예배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성전은 산발랏이 건립했다. 그녀는 거기의 편들에서 다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즉, 성전이 어느 곳에 있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다. 그것은 그리심산이다. 이 산은 하나님의 축복이 베풀어졌던 곳이다. 어떤 자는 이 곳에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고(창 10:6, 7). 야곱도 제단을 쌓았다고(창 33:18-20)여기고 있다. 또한 관습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들의 유물과 전통 그리고 상속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받았다"는 말 자체가 무익하다. 그 여자는 "조상을" 자랑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안티오커스가 유대인들을 탄압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을 쥬피터 올림푸스에게 바치자는 안티오커스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조세푸스의 고대사, 9권 12:7).

둘째, 유대인은 말하기를 예배드릴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오경으로 결정하며, 그것"만"이 경전으로 채택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선택할 장소가 자주 언급되지만, 그 곳의 이름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과거의 많은 영광들을 잃었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다 제단을 쌓을 수 있다고 했다.



(2) 예배의 장소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을 보자(21절).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리스도에게 전념하는 사람들은, 그가 "온유하고 겸손하게"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여자가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물었을 때(21절), 그리스도는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 "여자야, 네가 나를 선지자로 알고,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라. 하늘의 어떤 계시나, 뚜렸한 섭리에 의하여, 이 문제가 확정되는 때가 올 것으로도 생각하고 있으나, 내가 말하노니, 그 때가 가까이 왔고, 그것이 이제 매우 떠들석하게 했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우리도 한때는 크게 비중을 차지하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고심했던 바로 그 문제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 산에도 말고 예루살렘에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에게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첫째, 예배의 대상은 여전히 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또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둘째, 어느 시기에 가면 예배 장소에 대한 아주 미묘한 차이들이 없어질 것이다. 점차로 유대의 관습이 소멸되고, 복음주의적 국가가 건립되리라. "대체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모두 "공통적인" 것으로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어느 장소이든지 거의 무관심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어느 장소(이 곳이나 저곳)에 매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아래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율법 아래에서처럼 어느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딤전 2:8; 말 1:2). 이성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예배의 장소가 "품위"가 있고 "편리한지"를 알 수 있지만, 신앙은 장소의 우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거룩성과 알맞은 곳을 선택한다. 세워진 집이나 예배 처소 때문에 그곳에서의 예배를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장소가 문제가 안 되는 그런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이다. 성전 때문에 이름난 예루살렘이나 불경건으로 소문난 사마리아 산이나 마찬가지다.



[2] 그는 다른 일들 즉 예배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예배 장소를 무시했을 때, 그것이 예배 자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이완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교훈을 좀더 충분히 전하려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첫째, 현재의 논쟁에서, 그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를 반대하고, 우대인의 예배를 지지하고 있었다(22절). 여기서 여자에게 말하기를

1. 사마리아인들은 확실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했다. 즉 사마리아인들이 단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예루살렘이 선택된 것은 아직 유효했었다). 그들의 예배가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그 예배가 올바로 되었다면, 예루살렘과의 이러한 분리는 "산당"에서의 예배처럼 묵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참 신(에 4:2; 왕하 17:32)에게 예배를 드리지만, 굉장한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방의 신들처럼의 하나님으로(왕하 17:27, 33) 또는 국부적인 하나님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근거이시고 주재자로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무지"란 신앙심의 어머니가 되기는커녕 신앙심의 "살인자"이다. 하나님을 무지(無知)하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눈먼 제물을 드리며, 그것이야말로 "바보들의 제사"이다.

2. 유대인들이 옳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1) "우리는 예배드리는 대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의 분명한 근거들을 가지고 드리고 있다. 그가 성서에서 자신을 드러낸 그대로이다. 성서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완전한" 지식이 아니지만 "확실한" 것이다)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는 "만족스럽고," 하나님에게는 "열납 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배드리는 대상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예배의 타락상들을 책망하고 있지만(마 15:9), 여기서는 예배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장소는 순결하고 순수하지가 않지만, 예배만은 "진실 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알려지기를 기뻐하셨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그 아들은 자유한 아들이다), 겸비의 시절에는 "복종을 배우셨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하찮게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 그렇지가 않으셨다.

(2)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다." 때문에,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알고 있었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모두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과 사마리안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의의 역사하심을 알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가 하나님께 열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 영원한 구원의 저작자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하면 이스라엘인에게서 나오셨고,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며(롬 9:5), 그들에게 먼저 보내어졌다.

[2] 영원한 구원의 수단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구원의 말씀(행 13:26)이 유대인에게서 나왔다." 그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퍼졌다. 이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헌신토록 하는 하나의 참다운 인도자였으며, 글은 이 말씀에 따랐고, 그래서 그들이 예배하는 대상을 알게 되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고(롬 3:2), "하나님의 예배"도 맡겨졌다(롬 9:4).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그들과 견주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만이 받으시고, 매우 기뻐하실 복음적인 예배를 설명하고 있다. 예배 장소에 "무관심"을 나타냄으로써, 근 필요하고 근본적인 것, 즉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23,24절)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장소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그에게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차이점들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다 더 중요한 것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날마다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관심사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의 장소가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 이전에 유대인의 예배를 분명히 좋게 보았으나, 여기에서 그는 그 예배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예배는 의식적(意識的)이었다(히 9:1, 10). 예배자들은 일반적으로 "속된"자들이며, 거룩한 예배의 내적인 부면에 대해서는 낯선 자들이었다.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만큼은 못되지만 우리의 이웃들보다는 나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대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배의 "태도"에 있어서도 옳아야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관찰해 보자.

a.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혁명, 아버지에게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때가 지금이다." 즉 정해진 때로써, 그 때는 옛날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예배가 나타나는 때란 어김없이 정해져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들은 아주 정확하고 틀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속"의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 은혜 받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고후 6:2). 이 때가 넘치는 권능과 광채와 완전함으로 오고 있다. "현재"는 무르익지 않고,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다. "그 완성의 때는 오고 있으며," 현재는 그 완성의 때를 준비하고 있다.

b. 복된 변화, 복음의 때에는 "참다운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에게 예배할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들은 "만물"의 아버지에게 예배해야 한다.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예배드려야 한다. 이제 변화가 올 것이다.

(a) 예배의 "성질"의 변화, 그리스도인들은 모세가 만든 의식의 관습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고무되는 "영적인"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예배의 방법은 합리적이고, 이지적이며, 구약의 예배를 어둡게 뒤덮고 있던 외적인 의식들과 제도들을 탈피했다. 이것이 유형적인 예배와는 대조되며, 진정한 예배라고 불리워진다. 율법적인 예배는 참 예배의 그림자이다(히 9:3, 24). 기독교로부터 유대주의에로 돌아가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나는" 자들이라고 했다(갈 3:3). 구약과 신약의 제도 사이의 차이란 이와 같다.

(b) 예배자들의 "기질"과 "성격"에 있어서 다르다. 진정한 예배자들은 위선자들과는 구별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진리로" 하니님을 마땅히 예배할 수밖에 없고, 또한 할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특성이듯(23절), 또한 저들의 의무 또한 할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특성이듯(23절), 또한 저들의 의무24절)이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사람 모두에게 요청된다. 우리는

[a] "영으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한다(빌 3:3). 우리는 그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우리의 심령에 미치도록 하여, 능력과 도우심을 받도록 하나님의 영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하니님을 섬기고, 봉사도록 해야 하며(롬 1:9), 확고한 사상과 열정적인 사랑으로써,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전부로써 그에게 예배해야 한다. 성령은 때때로 부패한 "육"에 반대되는 새로운 본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영으로" 하니님에게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 그에게 예배한다는 것이다(히 12:28).

[b] "진리로" 즉 "신실로" 예배한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도 요구하신다(시 51:6). 우리는 형식보다는 능력에 유의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야지, 인간들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10:22).

세째, 하나님에게 이와 같이 예배해야 할 이유들을 암시하고 있다.

a. 복음의 시대에는, 그런 자들만이 참 예배자들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복음이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 방법을 수립하였으므로, 만일 그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는 다면, 그들이 고백하는 복음이 진실이 아니며, 복음의 빛과 방법대로 않는 것이다.

b. "아버지가 그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a) 그와 같은 예배자들이 아주 희귀하며,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렘 30:21). 영으로 예배하는 길은 협소하다.

(b) 그와 같은 예배는 필요하며, 하늘의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바이다. 하니님이 예배자들을 "조사하러" 오실 때는, 누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가?" 하는 것을 묻지 않고 "누가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가?"하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시금석이 될 것이다.

(c)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배와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받으신다. "나는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받으신다. "나는 그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시 132:13, 14; 아 2:14).

(d) 그와 같이 예배자들의 남은 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날까지 있게 될 것이다. 그가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찾는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그와 같이 "만들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자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계신다.

c.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포하시려고 오셨으며(1:18). 이 말씀이 하나님에 관한 그의 선포였다. 그가 이 말을 불쌍하고 초라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했다. 그것은 가장 비천한 자도 하나님을 알려하기 때문이며, 이런 의도로써 예배에 관한 몇의 오류들을 고쳐 주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공헌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a)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는 영원하고 불멸하시며, 이성적인 존재이며, 일시적이 아니고, 물질적이 아니고, 보이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다라고 말하기 보다 ××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쉽다. 영은 "육과 뼈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누가 성령의 방법을 알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불완전하고," 제한되어 있고, 영원하시지 않고, 독립적이 아니고, 영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b) 신성(神性)이 영성(靈惺)이란 영적인 예배의 아주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수 없으며, 예배 행위를 할 수 없고, 그의 은혜와 용납하심을 차지할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예배의 목적을 잃게 될 것이다(마 15:8, 9).

4. 여자와의 마지막 대화 주제는 메시야에 관한 것이다(25,26절). 이제 자세히 살펴본다면,

(1) 메시야를 기다렸던 여자의 믿음을 보자. "나는 메시야가 와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여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자는 잘은 모르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그가 기다렸던 메시야임을 추측했고, 그러한 암시를 받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제까지의 자기 고집을 중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손안에 있는 것의" 값을 알지 못한다(잠 17:16). 왜냐하면 그들은"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현재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여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냐? "나는 메시야가 오실 줄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심한 적대 관계에 있지만, 메시야와 그의 나라가 오심을 서로 기대하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법전들을 받아서, 선지자들과 유대 나라의 소망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일반적이었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대로부터 주권이 나누어져, 다니엘이 예언한 기간이 거의 만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다가왔다. 그래서 여자는 메시야가 오실 뿐만 아니라 그가 바로 오실 메시야라고 생각했다.

메시야는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진다. 비록 그가 히브리말인 메시야로(여자가 존경으로써 거룩한 말로 사용하며, 유대 교회에서도 그 말을 친숙하게 사용한다) 불리어지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사용토록 적은 복음 기자는 같은 의미인 그리스말로써 메시야를 그리스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란 말은 사도들의 규례에 따라 주어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제나라 말로 불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해석을 해 주어야 한다(고전 14:27, 28).



[2] 여자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하나님에 대해, 예배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해 줄 것이며, 우리의 결점들을 충족시켜 주고, 우리의 잘못들을 확인시켜 주어서, 우리의 논쟁들을 모두 끝나게 해 죽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어서 어떠한 것도 밝혀 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이미 발견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미흡하고 온전하지 못하며, 그들의 예배 규칙도 그러하다. 게다가 "예배의 규칙만으로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어떤 큰 개선과 향상 즉 개혁의 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둘째,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메시야의 능력에 대하여, "그는 우리가 알려고 하는 즉 우리가 무지 속에서 논쟁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말하여 줄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서 잘못의 안개를 걷히게 함으로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말하는 것으로써, 선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당황해서 방황한다면, 그들에게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말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과 같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하여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될 것이다.



(2) 그 자신을 여자에게 알리는 우리 주 예수의 은혜, "네가 말하는 내가 그 사람이다" (26절).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또 소경에게(9:37)서 처럼, 그렇게 분명히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불쌍하고 경멸받는 사람들을 존중해 주셨다. 이 여인에게는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던 확증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기적을 볼 기회도 없었다. 하나님은 복음의 빛을 "얼굴에"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라고 "그 마음에는" 받게 해 줄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께 가까이 오려는 자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신다.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 여인에게 얼마나 친근하셨나를 보라.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몰랐다(창 28:16).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재를 탄식하며, 그의 출현을 고대한다. 그러나 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말씀하시는 중인데도 그러한 그의 출현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4: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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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없음.

 

4:27

사마리아의 복음(요한복음 4:27-42)

Ⅰ. 제자들이 돌아옴으로써 "대화가 중단되었다." 얘기가 한참 절정에 이르렀을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며, 여자와 단독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을 때의 처지를 다 잊어버리고서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비천한 여자하고 상대할 수 있을까 하고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필경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무엇하십니까?" 혹은 "왜 여인과 이야기합니까"하고 묻는 자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언행은 다 좋은 것이다. 저들은 "생각"이 구구했겠지만 "아무말"도 안했다.

Ⅱ. 여인이 자기 이웃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린 것을 볼 수 있다(28,29절).

1. 그녀는 "우물에 온 이유를 잊어버렸다"(28절). 그녀는 "제 길로 갔다." 그녀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식사할 겨를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를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께서 여행을 계속할 것이며, 따라서 급히 이웃 사람에게 알려야겠음을 알았다. 그녀가 시간을 얼마나 잘 쓰는가 보라. "선을 받을" 기회가 없어졌을 때에는 "선을 행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아마 그리스도에게 친절을 베푸는 뜻에서, 그리스도께 식사 때에 물을 들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혹은 마을을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 물동이를 신경 안 쓴다는 듯 내버리고 간 것은 더 중대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2. 그녀가 "마을에 대한 심부름"을 얼마나 잘 했는가 보자. 그녀는 "마을로 들어갔다." 가서 "사람들에게"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와서,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는 분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는지요?"

(1) 그녀는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이 그리스도를 알기를 몹시 바랐다(눅 19:9 참조). 그녀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기뻐하고, 동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영광을 주셨는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를 아는 영광을 누리도록 하자. 우리 자신이 더 큰 영광을 누리리라 기대하지 말자.

이 여인은 사도가 되었다. 모든 내 이웃들이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지만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할 "책임"이 더욱 크다. "나무가 쓰러지면," 거기다 두고 이용하도록 하자.



(2) 그 여인이 이 나그네를 소개하는데 얼마나 정당하며 지혜로운 가를 보라. 그녀는 자기가 그를 경탄하게 된 이유를 솔직히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한 모든 일을 알아맞혔습니다." 그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들려 준 이야기는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양심과 하나님만 아시는 일을 그녀에게 해 주었다. 특별히 두 가지가 그녀를 움직였다.

첫째, "그의 지식의 범위"였다. 우리는 한 일조차 모두 기억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인생들의 모든 것을 아신다(히 4:13 참조).

둘째, "그의 말의 권능"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크게 감동시켰다. 즉 그가 그녀의 "은밀한 죄"를 말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내 죄를 죄다 말해 주던 그 사람을 와 보십시오." 흔히 생각하기로는 그녀가 다시 입에 오르내리기를 부끄러워할 것 같은 사실을 그녀는 오히려 강조했다.

우리를 겸손케 해 주고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지시(앎)은 가장 건전하고 구원을 주는 것이다.

그녀는 "와서 보라"고 그들을 초청했다. 그저 "와서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다(그녀는 그들에게 어떤 구경거리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와서, 그와 이야기하고 그의 지혜를 들으라. 내가 했던 식으로 하라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기가 설득 받게 된 그 논증을 펴서, 남들도 설득시키려고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진리의 증거를 보았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남들에게 그것을 보게 해 줄 수는 없다.

그때 그리스도는 마을의 끝에 있었다. "지금 와서 보시오."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했던 그분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넘길것인가? 그녀는 "그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그녀는 날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제시만 했다. 이와 같이 정당하고 설득력 있는 호소는 때때로 본인들이 알기도 전에 그 양심을 차지해 버리기도 한다.



(3) 그녀는 이 초청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왔다"(30절). 그들이 그에게 나왔다. 사람을 불러 그를 마을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갔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곳에 가야 한다.

Ⅲ. 여인이 없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하신 대화를 살펴보자(31-38절). 주께서 "시간 절약"에 얼마나 민감하신가 보라. 우리도 이토록 시간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은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는 두 가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자기 일을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적으로 일에 사로잡힌 그런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1) "그는 일을 위해서 식음을 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물가에 않아 있을 때 피곤하여 휴식이 필요한 처지였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기회가 오자, 그는 피곤과 시장기를 잊어버리셨다. 그리고 그는 "음식"을 별로 생각지 않았으므로, 그의 제자들이 식사를 하시라고 당부해야 될 정도였다. "선생님, 청컨대 잡수십시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의 일면이다. 그러나 더욱 큰 것이 있다면, 이것은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단면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도 음식 생각을 안하시므로, 제자들은 자기가 없는 동안에 누가 음식을 많이 가져다 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39).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그리스도께서 너무도 식욕을 보이지 않으시므로, 이미 배불리 먹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일을 음식 삼았다." 여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그가 "한" 일, 사마리아인들에게 "해야 할" 일, 이것이 그에게는 성찬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지 영혼을 구제하는 선한 일의 기회를 요구했다.

시실 이것은 제자들도 "알지 못하던 음식"이었다. 선한 일의 기회를 요구했다. 선한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나그네도 간섭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그 식사를 한다.

예수의 이 같은 말이 그들에게 질문을 가져 왔다. " 누구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 왔을까?" 그의 일이 그의 음식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요,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34절).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그 구원을 위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다. 예수는 이 일을 자기의 임무와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할 때, 그의 마음은 자기가 목마른 자들과 갈급한 자들, 즉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자들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열심으로," "철저히" 그 일에 임했고, "그의 일을 완수하신다." 그는 결코 도중에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했다. "다 마쳤다"는 말을 할 수 있기까지는 결코 일을 집어치우는 일을 하지 않을 각오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출발하나 마지막까지 열심을 내어 일을 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일에 근면해야 됨을 주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를 닮은" 일군들이어야 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복음 전파"였다.

그리스도는 그 일을 여기서는 "추수"에 비교하고 있다(35-38절). 추수 때는 "바쁘다." 그때는 모든 일손이 등원된다. 추수란 그 때에 맞는 때에 해야 되는 일이며, 때가 지난 다음에는 소용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3가지 일에 열심을 내라고 암시하신다.



(1) 그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부지런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때가 절박하다(35절). "너희는 아직 추수 때가 넉 달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이 이미 희어졌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매년 추수를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추수의 기간"을 지정해 주셨다. 따라서 언제쯤이면 추수를 해야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지금 "복음의 추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들이 이미 희어져서, 추수를 기다리는도다." 여기에서, 지금 "그가" 해야 할 추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음식을 권했다(31절). 그러나 그는 말씀하셨다. "먹어라. 나는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더 긴요하다. 보라, 이미 복음을 받으려고 준비하고서 이리로 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앞을 다투어 모여들 때, 주의 일군들은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들의 곡식이 다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듯,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들이 "추수를 위해서 희어졌다," 사실 지금이 그 일을 할 저기라는 표정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그만큼 열심히, 용기 있게 해 나갈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주를 위해서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눅 16:16).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낫을 댈"때다. 지금 일해야 될 "필요"가 있다. 익은 곡식을 추수하지 않고 그냥 두면 "알곡이 떨어져" 도망간다. 뉘우치고 있는 영혼들에게 즉각적인 도움이 없으면, 그들의 좋은 시작도 무위로 끝나게 된다.



(2) 제자들 스스로도 득을 보게 되는 그 일은 "유익하고" "좋은"것 임을 말해 주셨다. "수확하는 자는 삯을 받는다" (36절). 그리스도의 추수군은 자기들이 엄한 주인을 만났다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의 일에는 "그 자체의 삯"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수군들은 "열매"를 갖는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구할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자들까지도 구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실한 일군들의 보람이다. 즉 그들의 일이 귀중한 영혼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즐거움"을 누린다. "씨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리라." 선한 사업을 시작한 행복한 도구가 되었던 목회자가 바로 "씨뿌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고 완성시키는 목회자가 바로 "거두는 자"이가. 그런데 그들이 다 줄거워하리라. 수확하는 자는 "추수의 기쁨"에 참예한다.

(3) 그것은 "쉬운"일이다. 이미 앞서간 사람들이 절반해 놓은 일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뿌리고, 한사람은 거둔다"(37,38절). 모세, 예언자들, 세례 요한 등등이 복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 놓았다."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려고 너희를 보낸다." 이것은 구약 성서의 목회의 두 가지 일을 암시해 준다.

첫째, 구약의 목회는 신약의 목회에 배해서 대단히 미흡하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씨를 뿌렸으나 "거두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의 저작이 오히려 그들이 한 전도보다 더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둘째, 구약의 목회는 신약의 목회에 대단한 "이바지"를 하였다. 그 길을 마련한 셈이다. 예언자들이 씨를 뿌려 놓지 않았더라면, 이 사마리아여인이 "우리는 메시야 올 줄 압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목회에 대한 "두 가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첫째, 그것은 "열매 있는" 목회이다. 그들은 풍년에 추수를 하는 자들이다.

또 그것은 예언자들의 글에 의해서 잘 "촉진되어 온"일이다. 예언자들은 "눈물로 씨를 뿌리면서," "우리는 공연한 짓을 했도다"하고 탄식했다. 그런데 사도들은 즐거이 거두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는 항상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고 말한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간 목회자들의 수고로 인해서 뒤에 남아서 그들을 계승한 목회자들이 많은 유익한 결실을 얻는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서간" 사람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됨을 깨닫는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에 들어간다."

Ⅳ. 이 그리스도의 방문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끼친 "좋은 영향"을 살펴보자(39-42절). 그들은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1. 그리스도에 대한 "그 악인의 증연"은 무엇을 주었는가? 그런데 그녀의 증언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는 내가 한 모든 일을 알아맞혔소!" 두 가지를 보자.

(1)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용"하게 되었다. "그 동네에서 온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인하여 그를 믿었다"(39절)고 했다.

그를 믿은 자들은 누구인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집 자손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은 이방인들의 "신앙의 전조"였다 하겠다.

또 어떤 계기로 믿게 되었는가? "그 여자의 말을 인해서"이다. 이 점을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때로는 아주 연약하고 가망없는 자를 도구로 살아서 선한 일을 시작케 하시고 진행시키기를 아주 즐겨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작은 불씨가 얼마나 큰 것을 태우는가를 본다. 우리 구주는 한 가련한 여인을 가르침으로써 온 마을에 당신의 교훈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그들의 설교를 "부주의"하게 하지 말 것이며, 아무도 그들의 설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의 설교를 "업신여기지"를 말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수가 "작고," "미천하다" 해도 상관없다. "그들에게" 선을 행하면, 그 결과로 "많은 이"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자기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그대로 증거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자들이 가장 훌륭한 주님의 종들이 될 수 있다.



(2) 그들은 "그에게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40절).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해"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그 여자의 말을 믿고 그가 예언자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에게 왔다. 그리고는 그를 "보고," 그를 예언자로 존중했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머물러 있어서 자기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또한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장래(운수)"를 말해 주는 사람에게 떼지어 몰려든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자기들의 "과오"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내쫓았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초대하였다.

복음의 성공의 "증거"는 언제나 그 "가망성"에 달려 있지 않으며, "기대한"것과 그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청을 수락했다. 그는 "거기서 머물렀다." 그는 선을 베풀 기회가 주어지자 "거기에 머문"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41,42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는 아마 자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했을 것이다. 일군의 노고는 그 결실이 잘 입증해 준다. "이제 그들이 직접 그를 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이것이었다.



[1] 그들의 수가 늘어났다(41절). "더 많은 사람이 믿었다"라고 했다.

[2] 그들이 "이제는 그녀의 말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42절). 이러한 그들의 신앙 성장속에서 세 가지를 찾아보자.

첫째, 신상의 내용의 성장이다. 그들은 그 여자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를 예언자로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다.

둘째, "확신"의 상징이다. 그들의 신앙은 이제 완전한 확신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 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줄 "압니다."

세째, 그 신앙의 근거의 성장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았기 때문이오." "우리가 직접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믿습니다. 우리는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에 아주 만족하여 자신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들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음은 "사람들의 보고"를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부모와 설교자들의 교훈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친근해지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를 들음으로써" 성경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생을 발견했기에 믿는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서 산다"

이리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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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서의 제2의 기적 (요한복음 4:43-54)

Ⅰ.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셨다"(43절). 그들을 떠난 "이틀 후"였는데, 그것은 "다른 동네에도 복음을 전파해야"했기 때문이다(눅 4:43). "그는 갈릴리로 들어가셨다."

1. 그리스도가 가신 곳은 어디냐? 갈릴리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나사렛은 아니었다. 여러 마을을 두루다니셨지만, 나사렛에 가시기는 꺼렸다. 여기에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신"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가까운 친척들이 그리스도를 가장 경멸적으로 말했다(7:5). 인간은 교만하고 시기하는 존재라, 한때 자기들과 같은 학교에 다녔거나 같이 놀던 자들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을 업신여기는 동네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달자를 멸시하는 자들은 그 전달자가 가져 올 메시지를 알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줄 혜택도 못 누리게 된다.

2. 그가 마을로 들어갔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환영해 주었다(45절). 그들이 "그를 영접했다"고 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공연히 보내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떤 자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른 어떤 자들에게서는 받으리라.

여기에 보면 왜 갈릴리인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다. 즉 그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45절). 그들도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갔다. 곧 "유월절을 맞아 갔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친숙해진 것이다. 공중 예배 의식에 부지런히 참례하는 자들은 때로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영적 혜택을 입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다." 그 기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을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대상자들이었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도 갈릴리 사람들이 더 유익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혼합된 군중"에게 전파된 말씀은 정규적인 청중 이외에 "우연히 참여한"자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3. 그는 어느 동네로 가셨는가? 그는 갈릴리 가나를 선택하셨다. 그곳은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이었다(46절). 이 기적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된 사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역사를 "일단 보았으면" 그것을 잘 기억해 두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Ⅱ. 거기서 "귀족의 아들"을 고쳤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1. 간청하러 온 사람과 돌보아 달라고 간청하는 그 환자는 "귀족(귀인)"이었다.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왕의 신하로서 귀인이었지만, 그 아들은 앓고 있었다. 관작과 명예로운 칭호자라도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격에서 면제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15마일이었다. 우환을 당한 이 가정은 15마일이나 되는 먼 곳에 있었지만 사람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청했던 것이다.

2. 그 탄원자는 의사에게 "자기의 처방"을 지시했다. 그는 직접 예수께 가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47절). 물론 여기에는 자기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 아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지대한 존경심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직접 예수께 나와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에게 간청했다"고 했다. 그는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서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그런 처지에서 말이다.

한편 그가 이런 사명을 띠고 온 데는 "신앙"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신실성"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아들을 고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약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멀리서는 고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고쳐 달라고 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가 처방까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없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나 말씀으로든, 만져서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3. 그는 예수께 점잖은 꾸중을 들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표적을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 그는 비록 "귀족"이고 지금 아들 때문에 "근심"에 쌓여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책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의 좌와 약점을 지적하시어서, 자비를 받을 준비를 시킨 다음에 부탁을 들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총애"를 내려 주려 하는 사람에게 먼저 "분노"를 보이사 "겸손"케 만드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 행하였던 기적에 대해서 신빙성 있는 보고를 들었다. 따라서 자기들 눈으로 그 같은 기적을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존경을 받아야"하고, "기분을 맞추어 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여러 가지 기적들을 이미 보았다. 그런데도 표적과 기적에 의해서 "할 수 없이" 믿게 되기 전에는 믿으려 들지 않는다.

말씀의 "신령한 권능"은 "그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매력을 끌지" 못했다. 단지 기적의 가견적(可見的)권능만이 그들에게 소용이 있었다.

4. 그의 말에는 계속 성급함이 깃들어 있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그는 책망을 인내심 있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에게 정중히 말했다. 마치 그 책망을 불쾌히 여기지 않았다는 듯, 그는 그 책망을 부정적으로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요구를 내놓았다. 될 때가지 씨름할 판이었다. 그는 자기 아이의 문제로 깊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밖에 다른 믿음이 연약했다. 그리스도가 자기 집까지 내려가 주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병든"아이를 고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죽은"아이까지 살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너무 늦으면 죽을 줄 알았다.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어린아이를 살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혹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그들의 권능만 못하다는 것인가? 그의 서두는 태도를 보라.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낭비할 위험이라도 있다는 식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에 대해 평화스런 대답을 주셨다(50절).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리라." 그리스도는 여기서 당신의 "권능"의 실례를 보이셨다. 즉 당신은 병든 자를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쉽게 살릴 수 있음을 보이셨다. 여기에 무슨 "말"이나 "한"일, 혹은 하라는 "명령"도 없다. 그러나 치료가 되었다. 이 신하는 "그리스도께서 내려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주기"바랐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을 내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또 이렇게 치료가 빨리 됨으로써, 그 신하는 자기의 실수를 고쳤다. 그리고 신앙을 돈독히 했다. 이렇듯 매사에 그리스도의 방식이 더 우수하다.

우리가 구한 것을 그가 부인하실 때는, 우리의 유익에 더 큰 것을 주신다. 그는 신하가 아들의 일로 "고통 중에" 있음을 보시고 책망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그 자식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 신하의 믿음을 보라. 그는 "믿고" 갔다. 그는 그리스도가 취하신 방식에 만족했다. 당시 그는 "아무런 기적이나 표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네 아들이 살리라." 그리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라." 그리고 그는 믿음의 정직성을 입증리라도 하려는 듯, 그대로 "집으로 갔다."

7. 그의 하인이 돌아와 하는 보고와 비교함으로써, 더욱 그의 신앙이 돈독해졌다. 그의 신하들은 그를 만나서, 그의 아들이 회복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주었다(51절). 그리스도께서는 "네 아들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종들이 같은 말을 했다. 좋은 소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희망을 둔 자들을 즐겁게 해주리라.

신하는 그 아이가 언제부터 회복되었는지 그 시간을 물었다(52절). 그는 자기의 신앙을 더 굳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과 말씀을 부지런히 비교해 보면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신하의 대답의 과정이다. "그는 종들에게 아이가 낳기 시작한 때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대답했다. "어제, 제7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회복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갑자기 다 나아버렸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때임을 알았다." 두 가지가 그의 신앙을 돈독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첫째, 아이의 회복이 "순식간"에 된 일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 정확한 시각을 말해 주었다. "어제, 제7시" 언제 "쯤"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 때 "열이 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의사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에게는 수술 시간과 효과를 걷는데 걸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치료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 그가 "말씀하시고" 다시 얼마간의 일이 필요한 그런 사건이 아니다.

둘째,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던 시간과 똑 같았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의 일들이 섭리의 조화미를 더욱 북돋운다. 사람의 일에서는, 거리의 차이가 시간과 일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에는 그런 법이 없다.

8. 이 사건의 행복 된 결과를 보라. 한 식구의 치료가 가정 전체의 구원을 가져 왔다. 그 신하 "자신도 믿었다." 전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현세적" 자비를 내려 주시사, "더 좋은" 것을 대비하게도 하신다.

또한 "그의 집안"이 모두 믿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 기적과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적이 그 가정의 "희망"을 되살려 놓았던 때문이다. 그 기적이 그 가정의 "희망"을 되살려 놓았던 때문이다. 이 사건이 그들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리스도를 그 모두가 사랑하게끔 했다. 이 사건이 그들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리스도를 그 모두가 사랑하게끔 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으므로 "큰 집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그는 그들 모두를 동료로 삼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한 아이의 질병이 이런 일을 가져오다니! 이래서 우리는 환란이 와도 견디게 된다. 우리는 그 환란에서 어떤 유익을 얻을지 모른다.

9. 이 치료 사건에서 복음서 기자는 한 말이 나와 있다. "이것은 두 번째 기적이다"(54절). 2장 11절과 관계된 구절이다. 유대 지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갈릴리에는 처음 기적이 있었다. 갈릴리에서도 여러 기적을 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원한다면 "자기집"을 닫아서 햇살이 못들어 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햇살을 "이 세상에서" 차단시킬 수는 없다.

이것이 "두번째 기적"이라고 지목되어 있다. 처음 기적을 상기시키려 했을 것이다. "새로운" 은총은 이전의 자비를 상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전의 자비를 상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전의 자비는 앞으로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아마 이 환자는 귀인이었던 고로,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을 것이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다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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