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기적(요한복음 2:1-11)
우리는 여기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가 물을 기적적으로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사를 본다. 그를 믿고, 그를 따를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당신은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는 자들이 생기기까지 많은 것을 행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전에도 기적을 나타낼 수 있었으며, 또한 기적을 그의 일상적인 일로 삼아 자기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교훈을 확증해 주는 거룩하고 귀중한 징표로써의 기적은, 그가 말씀을 가르치기를 선포하면서부터 시작했다.
Ⅰ. 이 기적의 필요성을 보자. 마이모니드즈( Miamonides)는 모세가 "필요한 경우는" 광야에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이 모세의 영예였다고 했다. 즉 그는 무리들이 음식을 요구할 때, 만나를 제공했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때." 예수가 갈릴리에 들어 간 "제3일"이다. 복음서 기자는 그날 그날의 사건을 일지에 기록했다. 어떤 특별한 일이나 말씀이 없이 지낸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의 종들보다 더 뜻 있는 나날을 지내신다. 그러므로 밤에 로마 황제처럼 "또 하루를 잃었구나!"하는 탄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2. "장소." 그곳은 아셀 지파가 살고 있는 (삿 19:28) 갈릴리의 가나이다. "거기서 기름진 식물이 난다"고 했다(창 49:20).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에서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고자 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5:41). 그는 오히려 "천한자들을" 높여 왔다. 소박하고 정직한 갈릴리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오만이 가득 찬 랍비들, 지도자들 그리고 귀족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3. "혼인 잔치"가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혼인 당사자 중 어느 한 쪽이 "예수의 모친"도 "거기"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청함"을 받았다는 말은 없다. 이 사실은 예수의 어머니에게는 그 지방이 고향과 같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혼인 의식을 존중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 의식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처음 기적을 나타냄으로써,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하셨다. 그 의식은 인간이 죄 짓기 이전에 축복으로 제정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서 그가 계속 "거룩한 자손을 찾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혼인 의식을 지나치게 성스럽게 여겨 하나의 성례식으로 발전시킨 반면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어떠한 성스러움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부당하게 비하하고 있다.
여기에는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의식을 더욱 뜻 있게 했다. 결혼은 흔히 잔치로 되어져서(창 29:22; 삿 14:10), 그리고 그 제자들이다. "예수의 어머니(이것은 가장 존경스런 그녀의 칭호이다)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청함을 받고,"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이 비록 지위가 낮지만, 그들을 "존경하고," "사귀라"는 교훈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태도와는 달랐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과 같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마 11:18, 19). 교제를 "거절하는" 방법보다는 "신용하는" 방법이 더 사려 깊은 생각이다.
(1) 결혼식과 청함을 받은 예수.
[1] "결혼식"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청한다는 것, 즉 그의 영적인 은혜의 현현으로 혼인을 인정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 때의 결혼식은 참으로 영예로 왔다. "주 안에서 혼인하는" 사람들은(고후 7:39) 주를 떠나지 아니한다.
[2] 결혼식에 주님을 모시려는 사람들은 기도로써 주님을 청해야 한다. 이 때의 기도는 주님을 청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면 주님은 오실 것이다. "네가 부르라. 내가 대답하리라." 그때 주님은 오셔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것이다.
(2) 제자들도 역시 초대받았다. 그 수는 그가 부른 다섯이었다. 아직은 더 제자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가족이었고, 함께 초대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처분에 맡겼다. 예수께서 돈은 없지만, 자기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음을 그들은 알았다. 이 점을 주의하자.
[1] 그리스도를 "따르려는"사람들은 그와 함께 "잔치에 참여"해야 하며, 그가 가는 곳에 동행해야 한다(12:26). "내가 어느 곳에 처하든지, 거기에 내 종들도 있으리라."
[2]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입증되어진다. "우리의 선행이 그에게까지는 못 미치나 성도에게는 미친다."
칼빈은 그 잔치의 주인을 상당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그 주인이 비록 초라하게 차린 잔치이지만, 그가 처음 생각했던 사람 외에 낯선 사람 4,5명을 더 청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주인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임을 알고 청했는데, 이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보다는 낮고 평범한 사람들이 보다 자유스럽고, 활발하고, 그러면서도 참다운 우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Ⅱ. 기적의 내용을 보자.
1. "포도주가 모자랐다"(3절).(1) 포도주는 잔치에 소용되는 것으로써 많이 준비해 두었지만 모자랐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가 풍족하다고 여겨질 때에도 가끔은 궁핍을 겪는다. 항상 쓰면 우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모자라게 될 것이다.
(2) "혼인 잔치" 석상에 부족된 점이 있었다. "결혼해서," "세상 것을 염려하며" 사는 자들은 "육체의 어려움"과 실망되는 점들이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3)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이 부족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준비하고 기대했던 이상의 손님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서 부족한 자는 손해보지 않게 될 것이다.
2. 부족했을 때 "예수의 모친"은 도와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했다. 이 때에 예수와 그의 모친과의 대화가 있다(3-5절).
(1) 그녀는 자기들이 처한 곤경을 예수에게 알려왔다. "그녀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에게 말했다"(3절).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모친이 예수에게서 어떠한 기적적인 도움(예수는 이제까지 표적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 여인은 단지, 손님들에게 어떤 "적절한" 양해를 예수가 해 줄 것을 바랐다고 본다. 그것은 신랑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여겼다. 혹은 칼빈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가 어떤 성스러운 방법으로 포도주의 부족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모친이 미리 알고 청했다고도 본다. 그러나 아마 거의 틀림없이 예수의 모친은 하나의 기적을 기대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가 모세처럼 시의적절하게 이스라엘의 결핍을 채워 주는 위대한 예언자로 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 기적이 예수의 첫 공적 기적이지만, 아마도 그는 때때로 자기의 궁핍한 가정 생활을 돕는 일을 했을 것이다. 신랑측에서는 포도주를 더 가져 오도록 사람을 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모친은 생수의 근원인 예수에게로 나아왔다.
[1] 우리는 우리 친구들의 궁핍이나 부족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다. 단지 "우리 자신의 것에만 집착해서는 " 안 된다.
[2] 우리의 소유와 우리 친구들의 곤궁에 대하여는 기도로써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3] 그리스도에게 고할 때, 우리는 그에게 명령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우리의 처지를 겸손하게 내놓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에게 완전히 맡겨야 한다.
(2) 자기 모친에 대한 예수의 견책이 나와 있다.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어떤 잘못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리라.
[1] 견책의 내용을 보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또 견책도 하고 응징하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라 부르고 있다. 우리가 주제넘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연약하고 어리석고 그리고 부패한 자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Ti, evmoi, kai, soi,라는 질문은 "나와 당신에게는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로 읽을 수도 있다.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해석되어 왔다(삿 11:12; 삼하 15:10; 에 4:3; 마 8:29 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어머니에게 존경과 순종을 나타내야 한다는 제5계명과는 전혀 불일치하지 않는 분개를 말해 주고 있다(눅 2:51). 왜냐하면, 레위가 "자기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고 했을" 때도 오히려 칭찬했기 때문이다(신 33:9). 이제 이 질문에서 의도하는 것을 보자.
첫째, 예수의 신성에 속하는 행위 문제에 참견하려는 모친을 견책한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문제(신성)에 대해서는 그녀가 모친이 아니라는 뜻이다. 비록 그가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고 여인의 아들이지만, 신으로서는 다윗의 주이며, 여인의 주이며, 이 사실을 자기의 모친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훌륭한 출세를 했더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처지를 잊게 하거나 은혜를 경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것은 여기에 참석한 그의 다른 친척들을 향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예수와의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기적을 기대하거나 특혜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굴을 대면한 듯이 알 수는" 없다..
세째, 후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동정녀 마리아를 지나치게 숭배해 하나의 우상 숭배를 범하게 되었다. 본문은 이에 대한 강력한 반증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 "세상의 구원," 자기들의 "중재자," 또 "생명"과 "소망"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그녀의 공적과 중재를 의존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복을 베풀어 달라고 "그녀의 아들에게 부탁하도록" 그녀에게 간구를 드린다. Monstrate esse mathem-즉 구원주에게 당신의 모성적 부탁을 올리소서, 예수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 심지어는 그가 모욕을 당하실 때에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 말은 엄청난 우상 즉 무서운 신성 모독을 "예방하며," 따라서 그런 숭배를 더욱 정죄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우리의 변론자이지만 우리 주의 어머니는 아들과 같이 우리의 변론자가 될 수 없다.
[2] 이런 책망의 이유를 보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나이다."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그의 때, 즉 적합하고 가장 알맞은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본다.
첫째, "기적을 행할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그는 때가 이르기 전에 기적을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줄 필요를 예견하였기 때문이다(11절). 여기에 그의 모든 기적의 목적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가 행한 많은 기적들의 전조였다.
둘째, "공개적으로 기적을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때가 아직도 이르지 않았나이다. 그러므로 공공연하게 기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세째, "아버지가 허락하여, 예언자로서 행동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가 아직 안 왔나이다." 그레고리 니센(Gregory Nyssem)은 그렇게 본다.
네째, "이러한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포도주가 "모자라기 시작하자" 예수의 모친이 저들을 도와 달라고 그에게 왔는데(3절 참고), 그의 때란 포도주가 "완전히 소비"되어, 전혀 없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는 의심을 없앨 뿐만 아니라, 인간의 궁지가 하나님이 인간을 돕고 구원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최악의 궁핍에 이르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의 때가 이르게 된다. 용기 있는 사람이란 비록 그의 때가 이르게 된다. 용기 있는 사람이란 비록 그의 때가 아직도 이르지 않았지만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자비의 지연을 기도의 거절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3)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곤궁에서 도와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의 모친은 용기를 내어,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다(5절).
[1] 모친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꾸중을 들었다.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에게 책망 받지 않는 게 최선이고, 꾸중을 들어도 온순해지고, 침착해지며, 그 책망을 친절한 행위로 여기는 것이 차선이다(시 141:5 참조).
[2] 모친은 자기 소망을 그리스도의 자비에 맡겼고, 그 역시 모친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러 나아갈 때, 우리에게 용기를 꺾는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다. "기도를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안전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우리 주의 분노와 책망"에 대한 생각이다. 계속적인 고통과 구원의 지연, 또한 우리의 기도에 화나신 듯한 하나님의 표징 등이다.
이 두 가지가 예수의 모친의 경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친은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는 안심되도록 하는 대답을 주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기도는 믿음과 열심히 심지어는 섭리가 우리의 기대와 대조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하나님과 씨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희망 할 수 없는 중에서도 희망을 얻어야 한다(롬 4:18).
[3] 모친은 즉시 하인들더러 그를 주시하도록 일렀다. 하인들더러 그녀 자신을 주시하라고 하지 않았다. 모친은 이제 예수에 대한 어떤 주장이나 간섭을 포기하고 있다. 하인들은 예수만 바라보고 있었다(시 62:5 참조).
[4] 모친은 하인들에게 논쟁이나 질문도 하지 말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일러두었다. 즉 모친은 예수에게 지시함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인들에게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그래서 채워 줄 수 있는 그의 때와 방법에 복종하도록 일러두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비록 그의 말이 부적당하다고 생각되어질지라도 괜찮다. 만약 손님들이 포도주를 청할 때, 그들에게 물을 갖다 주라고 말씀하시더라도 그렇게 하라. 혹은 다 비운 포도주 병을 그들에게 부어 주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라. 그는 몇 방울의 포도주로도 많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느니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그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무의 길이란 자비를 받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방법은 어느 곳에서도 구애받지 않는다.
(4) 그리스도는 결국 기적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는 때때로 그의 말씀 이상의 기적을 행하시기는 하나 결코 말에 못미치는 일은 아니한다.
[1]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 물의 본질이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포도주가 되었다. 이런 "변형"은 "기적"이다. 그러나 카톨릭의 "화체설(化體說)" 즉 본질은 변화되나 우연적 성질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설은 하나의 괴물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임을 나타내셨다. 하나님만이 땅에서 포도주를 나게 하신다(시 104:14, 15). 매년 기름진 땅에서 포도즙을 짜내는 것은 능력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자연법칙에서 볼 때는 이 기적만큼 놀라운 일은 못된다.
모세가 기적을 베풀기 시작한 것은 물로 피로 만드는 때부터이다(출 4:9; 7:20). 그러나 그리스도의 표적의 시작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율법의 저주는 물을 피로 되게 하는 즉 일반적인 즐거움을 고뇌와 공포로 바꾸는 것이지만, 복음의 축복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 모두에게 삶의 즐거움을 증진시켜서 참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임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는 "포도주로 옷을 빤다"고 했다(창 49:11). 즉 물이 "포도주로 바뀐"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포도주를 사먹으라"(사 55:1)고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2] 기적의 여건이 거기에 어떤 속임수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첫째, 돌항아리에서 된 일이다.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고 했다(6절). 이러한 물통은 의식법상의 부정을 율법적으로 점화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기 전에는 먹지를 않는다"(막 7:3). 그래서 그들은 씻는데 많은 물을 사용한다. 여기에 6개의 큰 물항아리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물항아리에 대한 속담이 있다. "씻는 데 물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이 돌항아리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던 사용 방법과는 아주 달라졌다. 즉 기적을 드러내는 포도주 항아리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같은(사 9:13). 복음의 은총을 가져 왔다, "유익하고 빈약한" 성질의 물과 같은 율법의 그림자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포도주 항아리로 사용되지 않은 물항아리가 있었다. "물"항아리는 향기를 보존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이 항아리 하나에 "두세 통"(1통은1/4배렐), 즉 2,3밧 또는 에바 들이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주 상당한 크기이다. 많은 기름처럼(왕하 4:7), 포도주는 결혼한 새 부부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지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역시 자기 자신도 이렇게 풍성히 주신다. 풍성한 영광에 어울리도록 주신다. 이 항아리가 두세 통의 크기라는 것은 기록자의 말이다. 성령은 이 항아리의 크기를 아주 정확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6:19 처럼), 우리가 아주 확실한 확신을 가지지 않은 물건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지 말고 이야기하도록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하인들이 항아리의 "아구까지" 채웠다(7). 주의 종의 모세에게 하나님이 명했을 때, 바위로 가서 물을 나오게 한 것처럼, 이 하인들도 그리스도가 명하였을 때, 물을 길어 포도주를 취하였다. 여기서 주위 할 점은, 이제까지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저항할 수가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의 말씀에 반대되어지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세째, 기적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래서 더 놀랍게 되었다.
a. 하인들이 물항아리를 채우자 즉시 "떠서 갖다 주라"라 했다(8절). 그리고 그대로 행해졌다.
(a) 아무런 의식도 거치지 않고 남들이 보는 중에 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아만처럼, 예수가 나아와 서서 여호와의 이름이라도 부르길 바랬을 것이다(왕하 5:11).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없이, 여전히 앉아 계시면서 기적을 행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소란을 피우지 않고" 은밀히 기적을 행했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말씀과 표적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것은"둘러선 무리를 위함이었다"(11:42)
(b)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어떤 주저나 불안이 없다. "떠먹어 보고 갖다 주라"고 말하지 않았다. 비록 이 기적이 첫 기적이지만,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았던 것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알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기적을 시험해 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표적은 잘 되었으며, 처음이지만, 아주 잘 되었다.
b. 우리 주 예수가 하인들에 지시한 것을 보자.
(a) "뜨라." 즉 항아리 속에 두지 말고 마실 수 있도록, 떠서 갖다 주라. 마시게 하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a] 그리스도의 일들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것이란 점이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묻어두라고 재능을 주진 않았다.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지혜와 은혜를 주었는가? 당신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떠서 갖다 주라."
[b] 그리스도를 알려는 사람들은 그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보통의 수단을 사용해서 그에게 시중을 들어보면, 특별한 감화를 받게 될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모두를 위하여 "쌓아 두신" 것이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쓰인다"(시 31:19). 고로 신앙을 발휘하여 "쌓아 둔" 은혜는 "퍼다 써야" 한다.
(b)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주라 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이 주빈으로 가장 상석에 앉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오로지 우리 주님이 주빈으로서 그 좌석을 차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마도 상좌에는 그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마 23:6), 그래서 그것을 선택한 사람(눅 14:7)이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규율에 의하여 "가장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비록 그가 연회의 주빈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자신을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과의 친구임을 친히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잔치를 베푼 자는 아니지만 잔치의 최고 후원자였다.
또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이 연회의 감시자이고 운영자라고 생각한다. 즉 플루타크(plutarch)의 연회장(symposiarcha)과 같은 것으로써, 그의 직책은 매사가 충분한가, 지나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는가, 음란한 행위자나, 무질서한 자들이 없는가를 감시하는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연회는 통제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자체의 통제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을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무 담당자"(chaplain)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축복을 빌고, 감사제를 드린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연회장에게 술잔을 주었고 이 연회장은 술잔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축복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출현과 능력의 독특한 시현이 있었지만, 경건과 헌신의 일반적인 규칙과 방법을 깨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네째, 이와 같이 기적으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연회장에게 인정받은 가장 최상의 종류이었다. 즉 과찬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것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그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만큼 사실이다(9,10절).
다시 떠온 술이 포도주임이 확실했다. 비록 연회장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모르지만, 그가 맛봄으로써 포도주임을 알았다. 하인들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만, 아직 맛을 보지는 못했다. 만약 맛본 자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를 알았다면, 혹은 떠다 준 자가 그 맛을 알았다면, 이 사실을 환상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좋은 포도주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의 기적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드러난다는 점이다. 기적의 결과는 항상 최고의 품질이다. 이 포도주는 일반 것보다 더 "강한 밀도"와 더"좋은 맛"을 지녔다. 이 연회장은 더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신랑을 바라보았다.
a. 그것은 흔히 하는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좋은 포도주는 먼저 손님들의 정신이 맑고, 욕구가 신선할 때 가져다주어, 그 포도주를 칭찬하게 한다. 그리고는 손님들이 적당히 취해 그들의 정신이 몽롱하고 욕구가 침체되었을 때는 좋은 포도주가 아니라 나쁜 포도주를 내온다. 그래서 즐거운 기분이 사라지고, 곧 싫증이 나 불쾌해지며,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다.
b. 이 신랑은 비축 둔 좋은 포도주로, 손님들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 연회장은 이 좋은 포도주를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좌석에 앉아 있는 신랑에게 감사했다. "곡식과 포도주를 내가 저에게 준 것을 저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있다(호 2:8).
(a) 그리스도는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풍성하게 제공함으로 특별히 즐거운 시간에는 포도주를 사용하여 건전한 즐거움을 삼을 것을 허용했었지만(느 8:10) 그렇다고 그가 우리의 마음이 어느 때나 심지어 결혼 잔치에서라도 "방탕함과 술 취함"으로 지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경고의 말씀을(눅 21:34) 무효화시킨 것도 아니요, 그 말씀을 손상시키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그들이 마시도록 좋은 포도주를 제공한 것은 그들이 절제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었고 "인간의 수단에는 결핍이 따른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풍성함이 있음을 보여 주려는 데 뜻이 있었다. 강요된 절제는 칭찬할 만한 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섭리로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받고 또 신의 은혜로 그것을 절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칭찬 받을 만한 자기부정(극기)이다.
(b)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즉 "끝까지," "좋은" 포도주를 비축해 그들의 봉사와 수고의 보답은 하늘 나라에서 받을 것이다. 장차 드러날 영광이다. 죄의 쾌락은 술잔을 보기 좋게 하지만 "마직막에는 쓰다" 그러나 신앙의 쾌락은 갈수록 더한 즐거움으로 변하게 된다.
Ⅲ. 이 이야기의 결론에서(11절) 다음을 듣게 된다.
1. 예수가 "처음으로 기적"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에서-그러나 그 자신이 바로 가장 큰 기적이다. 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이 기적은 그가 행하신 첫 기적이었다. 그는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할 때가 이르지 않았었다. 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때는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었다. 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때는 "능력을 감출 때"였다.2. 여기서 그는 "그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고, 하나님의 영광이 독생자이신 예수의 영광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 일의 성격과 목적을 나타내셨다. 그의 모든 기적들에서, 특히 이 혼인 잔치의 기적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메시야임을 명백히 했다.
3.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그가 불려던 제자들은 아직도 기적을 보지 못하고 그를 따랐는데, 이제 기적을 보고,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1) 믿음이 진실하더라도 처음에는 연약하다. 가장 강한 사람도 어린아이였을 때가 있는 것처럼 아주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2) 그리스도가 영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다.
성전 청소 (요한복음 2:12-22)
Ⅰ.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 잠간 동안 계셨다(12). 이 가버나움은 가나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크고 잘 알려진 도시이다. 그곳은 "예수의 본 동네"라고 했다(마 9:1). 그 이유는 그가 그 곳을 갈릴리의 사령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거기에 잠시 머물렀다. 그 곳은 사람이 있는 집합지이므로, 그 곳을 택해서, 그의 설교와 기적의 소문이 퍼져나가게 하려 했다.
1. 그 지역으로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 그의 형제,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1) 혼자가 아니라,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취하사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은 그의 기적을 증거 했다.
(2) 그는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들이 그를 따르려 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 혹은 포도주의 맛을 좋아했기 때문이다(4:26). 예수는 자기의 전도 사업에 있어서는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알려주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따랐다. 즉 그를 방해하지 않고 그에게 배우려고 따라 다녔다. 역시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가 행한 기적을 보고 따라 다녔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도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낯선 사람으로 여길 때가 오히려 잘 안다고 생각할 때보다 그의 기적에 더 영향을 받는 것 같다.
2. 그는 거기서 "여러 날을 머무르지 않았다." 나중에도 단지 "필요한" 정도로만 친숙해지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는 "한" 장소에만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나그네"처럼 행동해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리고 일이 이끄는 대로 가라고 가르치곤 했다. 당시는 그리스도가 회당 안에서 가르친 것이 아닌 것 같다. 단지 개인적으로 자기 친구들에게 가르치면서, "점차적으로" 자기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사역자들은 개인적으로 경건하고 덕성을 기르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들은 더 나은 준비와 더 큰 경외심을 가지고 공적인 일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가야 하기 때문에 가버나움에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만사에 때가 있는 법이다. 작은 선은 보다 큰 선에게 양보해야 한다. 또 야곱의 모든 거처들은 시온의 문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Ⅱ.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세례 받으신 후 첫 유월절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후 예수가 지키시는 유월절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 그는 4변의 유월절을 지키셨는데, "4번째에" 수난을 당하셨으며(3년 이후), 지금의 유월절은 그의 세례 후 반년 때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에 매여" 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출 23:17 참조). 이와 같이 그는 모범적으로, 거룩한 의식의 철저한 준수와 집회의 열성적인 참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 행사에 먼저 참석하셨다. 이 행사가 유대인들에게만 특별하기 때문에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이시다). 그러나 이제 곧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치 않으실 터였다. 그리스도는 12살 이후부터 율법에 따라, 매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맞이하셨는데, 이제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올라갔다. 우리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머무심에서 두 가지 일을 볼 수가 있다.
1. "성전을 깨끗이 하셨다"(14-17절).(1) 예루살렘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 처음 장소는 성전이다. 이 성전에 나타나기까지는 어떤 공적인 나타남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의 그의 나타나심과 가르치심의 사실이 제2 성전의 보다 큰 영광이었다(학 2:9). 또 예언된 말씀을 보면(말 3:11), "내가 내 사자," 곧 세례 요한을 "보내리라."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으나, 너희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임한다는 것이다. 이 때가 예언되었다. 그 때이며, 성전이 그 장소이며, 그분은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야이시다.
(2) 성전에서 그가 하는 첫 사업은 성전의 "청소"였다. 이일은 예언되어진 것이다(말 3:2, 3). "그는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않아서 레위자손을 깨끗케 하리라." 이제 개혁의 시기들의 방법에 따라서, 그는 먼저 나쁜 것부터"제거했다"(히스기야 시대처럼, 이것이 유월절에 할 일이다. -대하 30:14, 15 - 요시아 시대에도 그렇게 했다- 왕하 23:4). 그후 그들에게 잘 하도록 가르쳤다. 먼저 "묵은 누룩을 치운 다음 잔치를 한다." 먼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이 세상의 개혁이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각이었다(창 35:2). 성전을 청소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가르치셨다.
[1] 부패한 것들을 청소해야 한다. 그는 성전의 한 모퉁이가 시장터임을 발견했다. 그 장소는 이른 바 "전의 산" 안에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라고 불리웠다.
첫째, 그곳에서 그들은 제물에 쓸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일반장사의 용도가 아니었다.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희생 제물을 가져 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편리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신 14:24-26 참조). 아마 이 "시장"은 원래는 베데스다 연못 곁에 있었을 것이다(5:2). 그런데 대제사장이 부정한 이득을 위하여 성전 안에서 팔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그 안에 설치한 지다(地代)와 거기에서 파는 동물들을 검사시키기 위한 수수료에, 그리고 흠이 없는 동물로 인증(認證)하기 위한 보수 등은 그들에게 상당한 수입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내의 큰 타락은 사역자들이 돈에 대한 집착을 늘일 때 온다(딤전 6:5, 10).
둘째, 그들은 "돈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성전의 사업을 매년 정금(正金)으로 반 세겔을 세금 형식으로 지불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였다(출 30:12).
[2] 우리 주께서 이런 부패들을 일소하신 과정을 보자. 그는 이전에도 성전 안의 이런 부패를 보아 왔다. 그때는 사적인 신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성전의 부패를 일소하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공적인 예언자의 성격을 취했다. 그는 이제 대제사장들이 이런 부정을 암암리에 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그는 장사치들이 "팔고 있는 양과 소들을" 성전 밖으로 추방했다. 그는 성전 안으로 어떤 것을 끌어들이려고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을 더럽히는 것들을 추방하려고 그랬다. 비록 그는 짐승들이 성전을 모독하는 침입자라는 것을 알지만, 그 짐승들을 직접 붙잡아서 가두어 두지 않았다. 단지 장사치들과 짐승들을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장사치들이 짐승들을 모는 데 쓰다가 버린 "가느다란 줄"로 된 회초리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가 성전 밖으로 쫓김을 당하려고 채찍을 휘두른 게 아니라(그의 징벌은 전혀 성질이 다르다), 단지 성밖으로 쫓으려는 것이었다. 즉 그의 목적은 오직 개혁이었다(롬 13:3, 4; 고후 10:8 참조).
둘째, 그는 "환전상의 돈을 쏟으셨다." 돈을 쏟으심으로써 돈에 대한 경멸심을 보이셨다. 돈을 땅에다 던지셨다. 그는 상을 뒤엎으심으로써 종교를 빙자해서 세속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에게 적대감정을 나타내셨다. 성전 안의 환전상들은 성전의 수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개혁에는 철저한 개혁이 좋다는 것이다 그는 가축을 모두 내쫓을 뿐만 아니라, 환전 상인들과 거래자들을 내쫓았으며, 상을 뒤엎어 버렸다.
세째, 비둘기(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희생물)를 파는 자들에게는,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비록 그들은 소나 양을 파는 장사치들보다 장소를 덜 차지하고, 폐를 덜 끼치지만, 성전 안에서의 장사행위는 허용할 수 없었다. 참새와 제비는 섭리에 따라서 주의 집에 거할 수 있었지만(시 84:3), 비둘기는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으므로 성전에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님 성전은 비둘기의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열성 속에서도 신중함을 보라. 양과 소들을 내쫓을 때는 주인들이 그 흩어진 가축들을 붙잡아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며, 돈을 쏟아도 주인들이 다시 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둘기들을 흩어서 날아가게 한다면, 아마 다시 붙잡을 수 없을 것이므로,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고 말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중성이 항상 우리의 열성을 인도하고 통제해서, 우리 자신을 가다듬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째,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개혁하려는 힘은 확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a. 여기에는 장사치들이 성전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지, 장사치들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사란 성전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좋은 일이다.
(a) 그러나 이 행위는 하나님의 위엄을 "저해하는" 신성모독이며, "약탈" 행위이다.
(b) 성전의 신성과 엄숙을 저하시켜서, 천하게 만들었다.
(c) 사람들이 가장 귀중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생겨 야 할 예식들을 혼란시키고 왜곡시켰다. 특히 양과 소와 함께 떼를 지어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이방인에게서 모욕당하게 했으며, 시장의 소음 속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이 시장은 이방인들의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d) 종교의 업무를 세속적인 이해(利害)에 부수적인 것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장소의 거룩에 대한 생각이 시장을 번창케 하고, 상품의 판매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a] 종교 의식에 참석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세상일의 염려로 가득차 있다(암 8:5; 겔 33:31).
[b] 부정한 이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성령의 은사를 팔았다.(행 8:18).
b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그것을 청소했다고 했다.
(a) 그는 "아들"이므로 그 집을 청소할 권위를 지녔다(히 3:5, 6).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말하던 메시야가 자기임을 드러내고 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3, 14).
(b) 그러므로 그는 성전을 청소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계셨다. 즉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므로, 그 집이 더럽혀지고 아버지가 모욕당함을 참을 수가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약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따라서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면,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야지 그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성전 청소는 당연히 놀라운 기적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다. 히에론(Hieron)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사(奇事)중에서 이 성전 청소의 사건이 나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다"고 했다.
[a] 그는 "친구"의 "도움" 하나 없이 이 일을 수행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을 충동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전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항해서 "폭동"을 선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코 무질서와 소란을 방조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수행하셨다.
[b] 그는 장사치들이나, 그것을 팔도록 허용해 준 "원수들"의 "저항"하나 없이 그 부패는 너무나 명백하여 정당화될 수 없었다. 죄인 자신의 양심이야말로 개혁자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즉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필요한대, 이 능력 안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필요한대, 이 능력 안에서는 인간의 어떤 저항도 소용이 없다. "그가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 3:2, 3)
다섯째, 그의 제자들의 말을 보자(17절). 즉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믿었던 그가, 사소한 일에 이렇게 열심을 내고 혼자서 덤벼드심을 보고 다소 놀랐지만, 이 행동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순함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성경 구절을 생각해내게 했다. 다윗도 메시야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을 주목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크나 "그를 삼키었다"고 했다(시 69:9).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a. 제자들은 성경 구절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가 행하신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를 설명하고 예증한다는 것이다. 섭리 안에서 감추어진 성서의 의미들이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이 둘을 성서로 비교함으로써 난해한 섭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용한 이런 방법이 얼마나 훌륭한가! 제자들은 성경으로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한 기억에 의하여 그들은 선한 일들을 해 나갈 것이다.
b. 그들이 기억한 성경 구절은 매우 적절했다. "당신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다윗도 그리스도의 예형으로써,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었다(시 132:2, 3). "내가 이미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대상 29:2 참조). 이 구절의 후반부(시 69:9)도 전반부처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롬 15:3). 구약의 성도들에게서 발견된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며, 특히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러하며, 또한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제시한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 즉 교회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전의 존엄과 번영을 위하여 열성이었다.
(b) 심지어 이러한 열성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이 열심히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진력토록 하며, 자신을 드러내도록 한다.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시 119:139). 우리의 위신, 안일, 평안이 우리의 의무와 봉사에 경쟁이 될 때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이 그것들을 돌보지 못하게 한다. 때때로 의무에 우리의 마음을 전념할 때 우리의 몸이 마음과 보조를 같이하지 못하게도 된다. 그래서 그 때는 "자신을 아끼십시오"하는 자에게 귀머거리가 되었던 주님처럼 우리도 자신의 안일에 귀머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시정되고 있는 불평은 작은 일이다. 너그러이 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열성이었다.
2. 성전을 청소하신 그리스도가, 이런 행위를 하는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여 하나의 표적을 주었다. 이제 그 표적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1) 표적을 요구했다. "그때 유대인들이 대꾸했다." 즉 지도자들과 더불어 있던 군중들이다. 이들은 유대인이므로, 성전의 권위를 옹호하는 그를 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 대신에 그를 반대하고 나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심으로 개혁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이들은 반대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일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대도 할 수 없었지만, 예수에게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네가 이러한 일을 하도록 위임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성전 청소는 참으로 선한 일이지만, 무엇이 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했으며, 누가 하도록 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 청소 사건을 사법권의 행사처럼 간주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를 "예언자," 아니 "그 이상"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일 자체로 충분한 표적이 되지 않을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많은 자들의 지위를 추락시킨 그의 능력이 그의 권위를 증명하고 있다. 그가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것은 그가 신적인 위임을 받은 것이다. "왜 도망치고 물러났는가?" 오로지 "주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시 114:5, 7).
(2) 이런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9절)을 보자. 그는 그들을 확신시킬 기적을 즉시 나타내지 않고, 앞으로 되어질 어떤 사건 즉 신명기 18장 21,22절에 따른 사건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날 진리의 한 표적을 주었다.
[1] 그들에게 준 표적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는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그들에게 유의시키고 있다.
첫째, 그것은 그의 마지막 표적이다. 만일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으로 확신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둘째, 메시야됨을 나타낼 수 있는 "큰 표적"이다. 그에 관계된 예언의 말씀을 보면, 그는 상함을 받으시고(사 53:5), 끊어짐을 당하신다(단 9:26). 그러나 그는 부패되지 않으신다(시 16:10). 이런 일들이 복되신 예수에게서 이루어짐으로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아버지 집인 성전을 숙청할 권리를 가졌던 것이다.
[2] 그는 때때로 자기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상징적인 표현을 구사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한 표적을 주었는데, 그 표적을 "예언자 요나의 표적"이라고 불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와 같이 그는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마 13:13, 14).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징적인 표현이 그들에게 장해물이 되어 그를 성전 모독 죄로 입증하려는 거짓 증인들이 많이 있었다.(마 26:60, 61). 만일 그들이 겸손하게 그가 말한 뜻을 물었다면, 그는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되었을 것인데, 흠을 잡아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깨닫지 못한 그들은 완고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예언의 성취를 가져 왔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는 이 말에서, 예수는 자기가 유대인들의 원한을 받아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너희가 성전을 헐라. 너희가 허는 것을 내가 허락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의 전도 시초에서부터 그리스도는 마지막에까지 고난의 연속인 것을 분명하게 예언했지만, 기꺼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초에서부터 죄악을 대비한다는 것은 좋다.
그는 자신의 권능에 의하여 부활을 예언한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킨 일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살아나 생명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3] 그는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운다"는 표현을 선택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더럽힌 성전을 청소하는 자기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말과 같다. "성전 하나를 더럽힌 너희는 또 하나를 헐리라. 그러나 청소를 통하여 다시 세움으로써 성전에 대한 나의 권위를 증명하리라." 성전을 모독한다는 것은 성전을 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은 재건을 뜻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참으로 유대인 성전의 멸망을 의미하며, 그의 부활은 새로운 성전 즉 복음적인 교회의 발흥을 뜻하기 때문이다(슥 6:12). 저들의 땅과 "민족"의 멸망(11:48)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풍요를 주었다(암 9:11; 행 15:16 참조).
(3) 이런 대답에 대한 그들의 트집을 보자. "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다(20절). 성전 건축은 언제나 많은 시일을 요하는 데, 네가 그렇게 빨리 지을 수 있느냐?"
[1]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성전 건축이 얼마나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지를 대답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고레스 즉위 제2년에 있었던 스룹바벨의 성전 기공에서부터, 아르탁세케스 제32년에 있었던 준공까지가 꼭 46년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또 헤롯 재위 18년째에 이 성전 건축이 시작되어, 유대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지금까지도 46년이라 한다.
[2] 그들의 "무지"가 나타났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 뜻"에 대한 무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가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사람들은 흔히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많은 잘못이 해석에서 온다. "이것이 나의 몸이다"란 말을 육체적 형체적으로 보면 안 된다.
둘째, "그리스도는 전지전능"에 대한 무지이다. 만약 그들이, 6일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그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3일 동안에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들의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변호를 보자. 용어를 설명함으로써 어려운 뜻이 풀렸다. "그는 자기 몸을 성전으로 말하고 있었다"(21절). 그리스도가 성전 청소에서 성전에 대한 큰 존경을 표했지만 그가 그렇게 열심히 갈구하는 성전의 성스러움은 단지 "예형적인" 것임을 알려 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그것이 본질적인 성전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히 9:9; 골 2:17).
어떤 성서학자는 그리스도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할 때, 자기의 몸을 가리키거나 더럽혀진 유대인의 성전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말씀하신 성전이란 자기의 몸을 두고 한 말이란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한 성전이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하나의 예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 성전처럼 몸도 직접적인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지어졌다. "주께서 나를 위해 몸을 마련하였도다"(대상 28:19).
[2] 성전처럼, 몸도 "거룩한 집"이다.
[3] 성전처럼, 몸도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이다. 즉 영원한 말씀, 진실한 세키나가 거하는 곳이다. 그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시다.
[4] 성전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처이며 "중간점"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바치고 그에게 봉사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배자들은 그러한 성전을 바라보아야 한다.(왕상 8:30, 3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5) 오랜 후에 자제들이 예수의 이런 말씀을 기억했다(22절).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기억하는 제자들을 볼 수 있는데(17절), 여기서도 그에게 들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제자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억은 "엣 것"과 "새 것"을 갖추어둔 좋은 살림꾼의 보옥과 같다(마 13:52).
[1] "그들이" 그 말을 "기억했던" 때를 보자. 그 때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이다. 그들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란 그들은 지혜에 있어서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만 있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지혜가 있고 유능하게 활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장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사 42:23). 현재는 의미나 용법을 잘 모르는 진리들도 몇 년 후에는 쓸모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보다 훌륭한 숙달에 이를 때에야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피타고라스 제자들에 관한 실화에 보면, 그의 제자들이 40세가 되어서야 그의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했다.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야 그이 제자들이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때서야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는가?
첫째, 그 때에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의미를 분명히 그리고 즉시 기억에서 되살리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14:26).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바로 그 날에 그는 제자들을 이해시켰다.(눅 24:45).
둘째, 그때가 말씀을 성취시키는 때이다. 그의 몸인 성전이 멸하고 다시 3일만에 세워졌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른 말씀들 중에서 그가 이런 목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을 기억했다. 성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고,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건을 통하여 예언은 설명되어질 것이다.
[2] 그의 말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들은 성경과 그의 말씀을 믿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은 새로운 확신과 힘을 주었다. 그들은 믿는 마음이 더디지만(눅 24:25), 확실했다. 성서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기서는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의 일치나 정확한 동의가 아니라, 상호간에 서로 예증하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구약에서 알고 있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성취를 들었을 때, 이 둘에서 그들의 믿음은 더 확실케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요한복음 2:23-25)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월절을 지키는 동안 그의 가르침과 표적 행하심에 대한 성공의 이야기들이다.
Ⅰ. 우리 주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가르치시고 표적들을 나타내셨다. 사람들이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거기서 전도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그들은 그가 표적을 나타내심을 보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계시니, 거기서 "주의 말씀이 전파되어 갔다." 대부분 갈릴리에 머무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는 매우 분주했다. 유월절은 거룩한 때이고, 축제의 날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 날에 레위 사람들은 여호와의 선한 지혜를 가르쳤다(대하 30:22). 그리스도는 많은 무리들이 모일 수 있는 이 때를 이용해서 가르쳤으며, 거룩한 제도인 유월절을 그는 인정하고 귀히 여겼다.
Ⅱ.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믿었다. 니고데모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는 것처럼(3:2),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약속된 메시야로 믿어, 그의 첫 나타나심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기로 했을 것이다.
Ⅲ. 그러나 아직도 예수는 "그의 몸을 저들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다.(24절). 그는 저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 "의탁한다"와 "믿는다"는 같은 단어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그에게 "맡기고"(의탁하고) 그의 지도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변화에, 어떤 신뢰를 둘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 곳에서 는 또한 그를 파멸시키려고 애쓰는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다.
1. 그들은, 적어도 그들 중 몇몇이 "거짓됨으로" 기회만 있으면 그를 배신하거나 파멸시킬 궁리를 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갈길리인들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인들이 더 많다. 위험스러운 때와 장소에서 사람을 조심하는 게 현명한 처사이다.2. 혹은 이 무리들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는 게 아니라,
(1) "소심해서" 열심과 용기가 없으며,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매우 겁을 먹게 될 것이다. 어렵고 위험한 때에 무리를 신뢰한 다는 것은 합당치가 않다.
(2) 또는 그들은 "소란스러우며," 신중성과 처리의 수완이 결핍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해, 그들의 지도자로 내세워진다면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예루살렘에 속한 이 무리들은 다른 지도자들보다 더 들리워진 메시야의 감정적인 통치를 기대하고서, 그들은 정부에 대한 어떤 대담한 시위를 할 준비를 할 것이다. 이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마는 이들은 소란스럽게 들떠서 이들과 같이 행동을 한다면 우리 주님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Ⅳ. 그가 "자기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신 것은 저희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25절). 또 저들 속에 있는 사악함과 무력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런 경우에서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1. 그는, 우리가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 "모두"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심지어는 자신조차도 거의 모르는)본성, 의향, 기호 등을 모르지만, 그들의 이런 생각까지도 전부 알고 계신다. 그의 능력 있는 손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을 감찰하시며, 속까지 들여다보시기 때문에, 그는 그들 모두를 알고 계신다. 그는 자기의 교활한 적들과 그들의 음모를 자기의 거짓 형제들과 그들의 진짜 성격을 그리고 그들이 누구이며, 누구인 체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는 그들 중에서 정말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완전함과 그들의 결점도 알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2. 그에게는 "어떤 사람이든 시험해 볼 필요가 없다."그의 지혜는 사람들의 전달에 의존해 있지 않고, 전혀 오류가 없는 직관에 의해서이다. 세상 왕자들의 불행이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귀를 의지해서 듣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순전히 자신의 지혜에 의해서 판단하시고 처리하신다. 천사들은 그의 사자이지 첩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땅을 이리저리 감찰하시기 때문이다(대하 16:9). 이것이 사탄의 고발에 우리의 위로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로 인간을 판단치 않으신다.
3. 그는 "사람이 어떤지를 알고 계신다." 즉 구체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종족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떠한지를, 즉 마음을 시험하시고 굴레를 시험해 보신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영원한 말씀의 특권이다(히 4:12, 13).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히 판단한다면, 그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세주"이신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의사로서 환자의 상태와 경과, 쾌와 불쾌 등등을 완전히 알고 계시는 명의이시다! 또한 만물의 심판자이신 것이 정말 합당하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체를 아시는 그의 판단은 진실에 의하여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그리스도의 순례 중,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의 가르침과 표적 행하심의 모든 성공을 볼 수 있었다. 주께서 성전에 이르자, 단지 약하고 천한 한 무리만이 따라 왔는데, 그는 그들을 믿고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고난을 예견했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