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누가복음 24:1-12)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부활을 통하여 재결합하였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일이다.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였다는 그 부활의 "숨길 수 없는 증거"들은 "밝혀져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졌다." 지금 읽은 구절 속에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들이 있다.
Ⅰ. 그리스도가 죽어 장자 지낸 후에도 그를 따르던 선한 여인들이 그에게 보여 준 사랑과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1절).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무덤에 가서" 그의 시체에 향료를 뿌리려 하였다. 요셉이 싼 세마포를 풀어 시체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얼굴에, 특히 상처난 손과 발에 기름을 바르고 그의 시체와 그 주위에 향료를 뿌리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우리가 평소에 친구의 시체나 무덤 주위에 꽃을 뿌려 될 수 있는 대로 무덤의 흉한 꼴을 털어 버리고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쓸쓸한 기분을 없이해 주려는 순수한 의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선한 여인들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안식일 전날 저녁에 준비했을 이 향유는 값이 대단히 많이 나가는 것이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니고 가면서 "무슨 일로 이 비싼 것을 낭비할 것인가?" 하며 생각을 돌이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날이 새자마자 일찍, 아주 일찍 그것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곧 자선의 법칙이다. "각각 그 마음의 정한대로 할 것이다"(고후 9:7).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것이면 어쨌든 그를 위해 쓰도록 하라. 그 여인들의 이름을 살펴보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은 대단히 관록 있는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또다른 목격자가 있었음을 1절과 10절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향유를 마련하는 일엔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무덤에 간다고 했을 때 함께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를 아는 자들이 더 늘리라는 그의 말씀(요 12:24, 32)과 일치한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인들이 너무도 열렬히 사모하며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도 함께 그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다른 여인"들이 그 일행 속에 포함된 것이다. 몇몇 사람의 열심으로 다른 사람까지 열심을 내게 할 수 있다.
Ⅱ. 돌이 굴러져 있고 무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2, 3절).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근심하였다." 사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이 사실 속에 있었다.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우고"(이것을 보면 그는 법적인 석방을 받아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시체를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밖으로 나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위로를 받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일을 가지고 오히려 서로 근심하는 경우가 있다.
Ⅲ. 두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고 여인들에게 나타났다. 단지 흰옷이 아니라 여인들 주위에 광채를 뿌리는 "빛난" 옷이었다. 그들은 먼저 무덤밖에 "한" 천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그제서야 "무덤 안으로 들어 가" 다른 천사와 함께 앉았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맡에 다른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이것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진술은 일치한다. 여인들은 천사를 보고 혹시 그들이 나쁜 소식을 전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천사들에게 캐묻는 대신 그들은 무덤 속에 있는 사랑하는 주님을 보기 위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들보다는 "무덤 옷"을 입은 주님을 보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성도들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죽어가는 예수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 여인들은 파숫꾼들에게 발각되었음에도(천사들은 "파숫군"이라 불린다)그 파숫꾼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부부처럼 "당신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 분을 보셨나요?"하며 속삭였다. 이에 대하여 천사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주었다.
1. 천사들은 여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수색 작업에 대해 깨우쳐 주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는 산 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히 7:8). "나는 내 구세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이 받을 위로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찾는 자들-이방인들처럼 그를 죽은 영웅으로 간주하여 그 가운데서 찾는 자들-그를 형상이나 십자가상,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 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나 인간의 창조물 안에서 찾는 자들에겐 부활의 증거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진실로 피조물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며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 완전을 구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자"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2. 그들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여인들에게 확인해 주었다(6절).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권능으로 살아나가셨다. 그는 자기의 무덤을 버리셨으며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리라." 이 천사들이야말로 합법적인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급히 보냄을 받고 내려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 역시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예언을 믿었거나 명심하고 있었더라면 부활이 일어났을 때 쉽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천사들을 통해 다시 듣게 되자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비록 그 일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지만 그 일들을 처리한 자들이 죄없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또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계속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어떤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사도들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마음속에 새이게 해 주었으며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며 지킬 것인가 가르쳐 주었다.
Ⅳ. 이 말씀을 듣고 여인들은 만족하였다(8절).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믿기로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의 말씀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가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제 삼일에는 부활하리라던 그의 말씀을 잊고 제 삼일에 "그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 온 것이 부끄러웠다. 적시에 그리스도 말씀을 기억함으로 그의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던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9절)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둘 셋씩 각기 흩어져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전하고 그가 또 다른 이에게 전하여 그날 아침 모두 그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11절) 그들이 어떻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여인들의 환상이라고 돌리며 그것은 기억상실에 의한 판단 착오일 뿐이라고 몰아버렸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 전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 뿐 아니라 최근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잠시 동안 헤어져 있으면 너희는 다시 나를 볼 것이고 나도 너희를 보리라"던 말씀조차도 마음에 새겨두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제자들의 우둔함을 볼 때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메시야로 믿는다고 고백을 수차례 하였으며, 그가 죽어야 하며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으로 들어가실 것이라는 말씀도 수차례 듣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몇 차례 목격했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는 이처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그후로 그들이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은 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그를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의심을 지닌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새삼스럽게 여기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말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Ⅵ. 베드로는 이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고자 찾아갔다(12절). 기록한 대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준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요한 복음 20장 1, 2절엔 그가 무덤으로 달려갔다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1. 베드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보다 먼저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그런 소식, 특히 "파숫꾼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때에라도 달려가려고 마음먹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위험이 없을 때엔 "날아갈 듯 달려 가던 자"들의 대부분은 위험이 있을 땐 "황소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전날 "자기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지금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다."2. 그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엔 그리스도의 시체를 샀던 세마포는 벗겨져 곱게 개어져 놓여 있고 시체는 어디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들의 증언보다는 자신의 눈을 더 신뢰한다는 식으로 눈여겨 살펴보았다.
3. 그는 현명한 자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기만 했어도 그것으로 그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잊고 있었으므로 그는 단지 그 된 일을 보고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것들이 종종 까다롭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현현(顯現)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에선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막 16:12) 여기에선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다. 그날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 그와 함께 부활한 새 세계의 첫날이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 혹은 "알패오"라 불리는 자로 고대 교부들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요셉의 형제라 한다. 다른 한 사람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는 그가 베드로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날 베드로에게 특별히 나타나셨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 사실에 대해선 열한 제자가 증언하고 있으며(34절) 바울도 이를 언급하고 있음(고전 15:5)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베드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돌아올 때 맞이한 "열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면 글로바가 아니라 그가 "대표적인 목격자"로 지명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Ⅰ. 이 두 제자들의 "여행"과 "대화".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도보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촌이었다. 여기에선 이십 오리, 약 7마일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13절). 그곳에 사업상 가는지 아니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들은 더 이상 이 예수에 대해선 미련을 버리고 갈릴리를 향해 고향으로 가던 중인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쉴 작정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떠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빠져 나온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일 재빨리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여행하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14절). 예루살렘에 있을 대엔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의 귀에서 멀어진 지금엔 아주 자유롭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따져 보았다. 그 결과에 따라 계속 고향으로 가든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이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남의 지식을 계발시키고 남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서로의 독실한 사랑을 증진시키게 된다.
Ⅱ.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도중에서 선한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15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아마도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그들의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며,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마치 그들과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는 이방인처럼 꾸며 그들이 "기꺼이 동행으로" 받아들이도록 다가섰다. 이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적인 연대감을 유지하며 그에 대한 대화를 진행시켜 나갈 때 진지하게 말하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제 삼자로 참여하실 것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며" 진리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꼬여진 그들은 "쉽게 끊여지지 않을 삼겹줄"이 된다(전 4:12).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 구절들을 비교해가면서 그리스도를 구했으며 좀 더 그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를 만날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보이실 것이며 자기들이 지닌 지식을 위한 도구로써 그리스도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곁엔 그리스도가 계셨지만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대상"에 변화가 있었으며(마가복음에는 그때 "그는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감각기관에도 지장이 있었던 것 같다(여기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은 다른 주석가가 생각하는 대로 "시야"에 혼동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공기가 너무도 탁해 그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못알아 보았는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렇게" 그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좀더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그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의 효력은 그의 육체적인 모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 하였으며 그의 육체에 집착했던 제자들도 이제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치셨다. 그는 그의 영적인 모습을 지니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임을 보여 주셨다.
Ⅲ.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 그는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나는 친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1. 그들에게 던진 그리스도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현재 "슬픔"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그 슬픔이 역력히 들어났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이것은 대단히 친절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1)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음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
[1] 그들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고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무슨 수로 그 손해를 만회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가 버릴 때 그들이 슬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신랑"이 그들에게서 납치 당했을 때 그들이 "금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였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아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 슬픔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슬퍼하거나 걱정하곤 한다.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릴 위로를 받지 못하곤 한다.
[3] 슬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로 가득 차 있거나 그의 행적이나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받은 사실에 대해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사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하나님과 그의 섭리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및 사랑에 대해서 "마음의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참된 친구와 참된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 있는 처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슬플 때 각자 각자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내어보내셨던 것처럼 둘씩 둘씩 흩어졌다. 왜냐하면 한 사람 보다는 둘이 나으며 특히 슬픔의 시기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뜨리게 한 것이 때로 울음을 그치게도 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와 친구들은 어느새 좀 맑은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같이 울어 주는 사람은 서로 위로가 된다. 때로 그런 데서 제일 큰 위로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그들 대화의 내용을 물어보고 그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물었다. "너희가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이제 성별된 상태에 계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들을 위로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는 마치 그들의 우울함을 보고 조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창 40:7) 우리 주 예수께선 그의 제자들의 슬픔과 걱정을 아시고 그들의 근심에 함께 참여하심을 명심하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
[1] "붙임성 있게" 행동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그들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형편에서는 그는 이 심각한 두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까다롭거나 수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직한 단체에 소속되어 기쁨을 얻도록 하라.
[2] "동정심 있게" 행동하라. 우리의 친구들이 슬픔과 걱정에 쌓여 있을 때엔, 그리스도께서 여기 보여 주신 것처럼 그들의 슬픔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위로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
2.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글로바는 그에게 정중히 대답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애기 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뭐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돌려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친절한 자들에 대해서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정중히 대해야 함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당시가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글로바는 이 이방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해로운 짓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지나 않나 하여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비로운 행동은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라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2) 그(글로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수난 등으로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이방인들이었음을 명심하자. "너희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시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이 있었던 그들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하겠는가?
(3) 글로바는 이 낯선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참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아는 바를 퍼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도록 이끌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리고 이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쓸 때에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4) 글로바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루살렘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시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온 도시 안에 이야기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면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성령 강림 이후 그 사실은 "설명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대답 대신에 "그들의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셨다(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이렇게 물으심으로 더욱 자신을 낯선 자로 보이게 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의 보상인 장래에 받을 기쁨과 비교하여 자기가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셨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시려는 것일까? "무슨 일이뇨?" 그에게 무슨 일인지 알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쓰라린 일이었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일이뇨?"하고 묻고 계신다. 슬픔은 사라졌다. 우리의 구원이 오게 됨으로 기쁨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약한 중에서도 기쁨을 얻으셨다. 우리도 그를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는 우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시험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들에게 이 일들의 참 뜻을 말해 주며 그 신비에 이르게 할 것이다.
4. 여기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고찰해 보자(19절 이하).
(1)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요약해 주었다. 그들이 골몰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은 "나사렛 예수"(평소에 그렇게 불리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하늘로부터 온 교사였다. 그는 진실 되고 놀라운 하나의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을 향하여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기적, 자비의 기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시에 능하신 분"이었다. 즉 그는 하늘의 크신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크신 축복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이며 그의 백성들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흡족하신 분이었으며 나라 안에서 큰 명예를 입었던 자였다. "모든 백성 앞에서 위대한" 자들은 많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사랑 받지만 보통 "하나님 앞에선" 그렇지 못하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나 백성들 앞에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 이라면 이방인밖에 없을 것이다.
(2) 그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겸손한 설명을 하였다(20절).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이였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지으며 그를 로마 권력에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이 사실을 더 과장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의 죄를 더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낯선 자에게 이야기할 땐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을 삼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3) 여기에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로써 그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났다는 암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우리는 그가 모세처럼 예언자이기를 기대했으며 또한 모세처럼 구원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들입니다." "구속을 바라던" 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던 자들은 그를 기대하였고 그가 큰 일을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미워지면 마음이 상하는 법" 특히 이와 같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면 상심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며 주 예수의 죽으심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들의 구속의 값을 치루려고 그가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제 이 가장 힘든 과업을 마치셨으니 "이 자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분이심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 그의 부활에 대해 듣고 놀란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1]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오늘이 사흘째요. 오늘이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과 화려함 속에 서셔서 사흘 전에 치욕을 당하신 그대로 이번엔 영광 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지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그를 박해했던 자들을 깨우치고 혼란에 빠트리며 제자들에겐 위로를 가져다 줄 그런 징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조용합니다."
[2] 그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그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그 얘기를 아주 피상적으로 할 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22, 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단지 놀랄 일뿐이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하고 전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얘기를 그들이 환상을 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지 여인들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또 여인들은 쉽게 흥분해 버리기 때문이라."
[3] 그들은 몇몇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 가 보았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그의 십자가에 달려 그의 무덤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5) 우리 주 예수는 얼굴로는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셨다.
[1] 그는 분별력 없고 구약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2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리석은 자야"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금하신 것은 올바른 책망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어선 안 될 "악한 자들"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러 마땅하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어리석음,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 포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난받은 "어리석음'이란
첫째, "믿기를 더디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불신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인을 어리석은 자로 낙인찍으며, 가장 성스런 신앙을 경거망동한 맹신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더디 믿으며" 공정하게 그 신앙을 평가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멀리하는 자야말로 "어리석은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둘째, "예언자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것. 그리스도는 그들이 여인이나 천사의 말을 더디 믿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명심하였더라면 그날 아침(그가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확신하듯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연속"을 보았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섭리"의 증거를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성서의 말씀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때때로 곤경에 빠지게 만드는 복잡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믿지 못하게 하였던 그의 수난이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다른 길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약속된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그후 통치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되고 이제 그 선포가 밝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사야 53장이나 다니엘 9장을 읽어보지도 못했는가? 그곳에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를 따른 영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벧전 1:1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벗기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첫째, 메시야는 이 모든 일로 고난받으셔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은 그가 메시야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증거가 된다. 이는 마치 성도들의 고통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수난은 그들의 기대를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의 진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수난자"가 아니었다면 "구속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은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를 수행함에는 고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부활로써 그 영광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위로 향한 그의 첫 발걸음이었다. "자기의" 영광이라고 기록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질"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있기 전에 그가 지니고 있었던 영광이었다. 그는 그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 영광을 통해서 비로소 성서의 말씀이 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수난을 받고 다음으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치욕"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도 먼저 "가시" 면류관을, 그리고 다음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게 되었다.
[3] 그는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들이 나사렛 예수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그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27절). 구약 최초의 영적인 성서 기록자, "모세와" 차례로 "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가 받은 고난이 그에 대해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였다. 모세는 메시야께서 뱀에게 "그의 발꿈치를 물리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산산조각날것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예언한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자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첫째, "모든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들은 "모아" "연결"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아무도 성서의 어느 한 부분에 깊이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언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 어떤 것은 예언으로 어떤 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어떤 것은 기도로 혹은 다른 형식의 내용으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구약이라는 "광야에 숨겨진 보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피복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를 보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들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라면 학자라 할지라도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행 8:31) 말씀을 깨달았다고 척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장막은 걷히고 신약은 구약을 설명하게 되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제일의 성서 주석가이다. 특히 자신에 관한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부활 후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자신에 대한 신비의 지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서와 상관없는 새로운 말씀을 들려줌으로써가 아니라 어떻게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는가 보여 줌으로 그 말씀을 연구하도록 이끄심으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자체도 구약 예언서의 두 번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도 계속 구약의 예언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나 예언자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구제 불가능한 자들이다.
넷째,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말씀들은 질서 있게 다루는 "조직적인" 연구를 함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조금씩" 비추다가 "완성의 날"에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햇빛나는 날"에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이어지는 예언은 언제나 전에 있었던 예언을 보충하고 빛을 비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는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조상들)에 의해 우린 지금 그에 대해 "듣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릇된 목적을 갖고 성서를 펼친다. 그들은 계시록을 먼저 연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에 "모세로부터 시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Ⅳ.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가는 중에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설교나 그가 인용하여 설명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았을 것이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 그가 하신 말씀의 본질은 파악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그 말씀에 매표되어 그들의 여행이 의외로 빨리 끝났다고 여기에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그들은 그곳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계획했던 것 같다.
1.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니," 그는 더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나 행동으로 더 가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오면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예이므로 그는 그들이 머물 친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갔을 것이다. 이처럼 여기엔 위선 같은 것은 없다. 방문객이 "주저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집이나 가족에게 "주제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당신의 손님이나 동료로 기꺼이 맞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그는 당신의 초대를 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초청하고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때로 "그를 찾지 않는 자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분명히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면 그것은 우리의 끈질긴 간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저희가 강권하여"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를 붙잡고 부드럽고 간절한 폭력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기쁨과 유익함을 맛본 자들은 좀 더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갈" 뿐아니라 밤에라도 "함께 유하기를" 강권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됨을 유의하자. "한 날이 다 지나도" "저녁이 가까우면" 우리는 우리가 쉴 곳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도 눈을 돌려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며 "우리와 함께 유하기를" 부탁함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즐거움을 얻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과 위로를 주실 작정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가"고 약속하셨다(계 3:20).2.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 31절). 아마 그는 처음 동행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 그들과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가 길을 가든지, 집 안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지어다. 저녁 식사가 마련되는 동안(그 마을이 작고 초라한 곳이므로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유익하고" "교훈적인" 대화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을 때" 그의 입술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1)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앉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셨으며 그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그가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는 이 일을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권위와 사랑을 보이시며, 옛날과 같은 태도와 몸짓으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도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하셨을 것이다. 이 떡은 보리떡 다섯 개처럼 "기적의" 떡도 아니요, 성만찬에 쓰였던 "성례적인" 떡도 아니라 그저 "평범한" 떡이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여기에서도 전에처럼 같은 형식을 취하셨다. 이는 특별한 성례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매일 먹는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축복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잘 사는 가정 뿐아니라 우리 모든 가정에 우리 주님 주 예수께서 손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으로 앉게" 되면 비록 음식이 볼품없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식탁 끝머리에 앉히고 음식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으로 알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가 우리에게 "축사하신"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 음식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축복이 함께 한 음식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때 "저희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지 보게 되고 "그 인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몰라보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면서 그가 그들의 주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는 타당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을 쓸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그의 형상을 쓸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바로 주님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성령과 은혜를 통해 그의 백성들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알아보자.
[1] 성경 말씀을 펴 주신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그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의 식탁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례를 통해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떡을 떼시는 중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다."
[3] 그러나 베드로의 회심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에 끼었던 때를 벗겨버리심으로 그 일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계시를 주신 그 분께서 오성(悟性)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
3. 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Afantoj evge,neto -즉 그는 자신을 감추셨고 갑자기 사라지셨으며 "보이지 않으셨다." 또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후에도 그가 고난받고 죽었을 당시와 "같은 몸"이었고 그 흉기 자국까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이미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그가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엔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게 변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영광의 몸"이 되는 첫째 단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제자들에게 잠깐 자신의 모습을 비춘 후 그는 즉시 사라지셨다. 그러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그리스도 환상은 오늘 우리들도 보게 된다. 우리도 그를 본다. 그러나 잠시 후엔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때엔 그를 영원히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이같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느낀 생각과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고한 내용이 계속된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를 통해 느낀 감정(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하고 한 제자가 말하자 "내 마음도 그랬어"라고 다른 제자도 동의하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그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설교 말씀에 견주어 "소리"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교해 보았다. 비록 설교자가 누구인줄 알지는 못했었지만 그 설교는 능력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간단하고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더 귀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으며 그들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여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다시 생겨남으로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눈 그 분이 바로 "예수"였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으니 우리 같은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외에 어느 누군가, 그분의 말씀 외에 어떤 말씀이 이처럼 우리 속에서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으랴. 마음의 열쇠를 가진 분은 그 분밖에 없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1) 어떤 "설교"가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선을 이루는" 설교인가. "쉬운 설교" 우리의 수준에 맞으며 친근성 있는 설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성경적인 설교."─ "우리에게 성경을"─자신에 관계되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지 않은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성경의 말씀이 그들의 지식의 샘이며 신앙의 근본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성경 말씀을 그들에게 풀이해 주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음을 명심하자.
(2) 어떤 "반응"이 "선을 이루는" 반응인가?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큰 감명을 받았을 때, 특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큰 감명을 받아 그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그를 사랑함으로 용솟음칠 때, 경건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뜨거워진다." 우리 마음이 앙양되고 용솟음칠 때, 불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날아오를"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당겨져 뜨거운 열심을 품고 우리 자신이나 이웃 안에 있는 죄를 멀리하게 되며, 어느 정도나마 "심판의 성령"과 "소멸의 성령"으로 죄에서 깨끗함을 입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은 이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루살렘에 있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33절). "곧 그 시로 일어나."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사로잡힌 그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생각하였던 것들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엠시오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의 떨리는 믿음을 굳게 해 주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그 위로"로 슬픈 영혼들을 위로해 주지 않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신이 거듭나고, 위로받고, 교훈 받았다면 당신의 형제를 도우시오. 이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서 "충만"한 상태였기에 형제들에게 돌아가 주님이 부활하셨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같이 나누어야만 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다른 증거를 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에 낯이 있었던 열 한 제자들은 밤늦게까지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le,goutaj 원본에 보는 대로 이들은 "두" 제자가 아니라 열 한 제자들이다.)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제자가 들어오자 그들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34절).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만나보았다는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특히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보아(막 16:7)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바로 그날 "천사들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라는 가정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베드로 자신이 여기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두 제자에게 말해 주지 않고(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한 자로서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주께서 과연
o;ntwj─즉 살아나시고"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부활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었다. 아무도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여인들에게 뿐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났으니 말이다.
(2) 두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말하여 부활의 증거를 더 보충하였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더라." 길 가던 중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쳐 여기에선 "길에서 된 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놀라운 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던 곳, 그냥 지나쳐 버렸던 곳, "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그때에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말하였다. 그때 그가 떡을 떼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를 알아보게 하셨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비교하면 서로 느낀 바와 아는 바를 교환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큰 유익이 됨을 깊이 명심하자.
사도들을 방문하신 그리스도(누가복음 24:36-49)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 다섯 번 자신을 나타내셨다.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셨고(요 20:14), 제자들에게 얘기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마 28:9), 베드로 개인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밤중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는데 요한복음 20장 19절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고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Ⅰ. 그가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은 크게 "놀랐다." 그는 아주 "적절한 때에"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할 때에," 즉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을 놓고 그것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그 여부를 따지며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문제 삼고 토론하려는" 순간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서로 위로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시고 위로하셨듯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증거하시리라"는 보증을 받게 된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볼 때 지금 그리스도가 그들을 방문하신 것은 사랑과 우정의 방문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가 고난받을 때 비록 그들은 무정하게 그를 버렸지만 그는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보았다는 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불신앙에 매여있지 않도록 이제 "그 자신"이 오셨다. 전에 그는 부활 후에 "그들을 갈릴리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으셔서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때로 자기 말씀보다 더 "선한 것"을 이루신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것"은 결코 이루시지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위안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엔 평범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그가 비록 지금은 성별된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그래도 제자들과 가까이 하시려는 평소의 자상함을 나타내셨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높아지면 옛 친구조차 잊어버리고 그들을 깔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과 가까이 하심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첫 마디를 던지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인한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서 제자들과 담판 지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그게 아니라 그는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려는 의미로 "평강으로 오셨다."2. 그로 인하여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37절). "그들이 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여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인기척도 없이 그들 가운데 들어왔으며 그들이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들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이다(마 14:26). 제자들이 "유령이다"고 말했을 때(마 14:26) 쓰인 단어는 fa,ntasma─즉 허깨비, 혹은 요괴이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pneu/ma─즉 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들은 실지 몸을 입지 않은 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영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비교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세계에 호기심이 많다 할지라도 물질과 감각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엔 그와 같은 영이 전혀 다른 본질로써 우리에게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떨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언가 전혀 이상한 일이며 이상한 일을 징조이기 때문이다.
Ⅱ. 그와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은 큰 "만족"을 얻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그들에 대한 책망. "어찌하여 두려워하는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1) "두려워" 할 때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우리를 해치는 "의심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슬픔이나 걱정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의심으로부터 생겨났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은 걱정의 소산인 경우도 있다. 밖으론 놀라고 속으론 두려워하게 된다. 우울하고 마음에 두렵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자신에게도 동요를 일으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이다." "나는 이제 당신의 눈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주께선 나를 버리셨고 나를 잊으셨나이다."
(2)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골치 아픈 의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영으로 생각하였고" 그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까운 형제"임을 잊고 영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 먼 것처럼 그를 우리와 멀리 있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시고 시험하실 때, 그의 섭리로 우리를 시험하고 회개시키실 때, 우린 그가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된다.
(3)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의심은 언제 일어나든 주 예수께서는 알게 된다. 일어나는 즉시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를 유감스럽게 만든다. 그러한 "의심"을 품은 제자들을 꾸짖으셔서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을 꾸짖도록 가르치셨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선도 아니면 진리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에게만 유익을 주며 우리 앞에 놓인 위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 일어나느냐?"
2.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없이하셨고"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그 신앙을 자신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증거는 두 가지였다.
(1)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 눈에도 모습, 체격과 외형에 있어서 그들의 주님과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의 혼이 아닐까? "아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내가 손과 발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않느냐? 진짜 몸이다. 손과 발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느냐? 살아있는 몸이다. 손과 발에 난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너희가 본 것과 같은 몸, 빌려온 것이 아닌 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셨다. "영은 살이나 뼈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처럼 대단히 많은 부분들이 다양한 조직을 이루어 별개의 조직체들이 종합을 이루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영"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그것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서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영이 아닌가는 밝혀 주고 있다. "영은 뼈나 산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바로 나다. 너희가 그렇게도 잘 알고 지내며 그렇게도 가깝게 얘기를 나누던 나다. 바로 나이니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고" 그가 "자신들의" 주님이신 것을 아는 자들은 그가 나타나실 때 갑자기 닥치더라도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 그는 그들의 "시각"에 판단을 맡기셨다.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입은 몸에 그런 자국을 그냥 남겨 두신 것은 그들이 그것을 증거로 그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자국들이 "보여지기를" 바라셨다. 그는 후에 도마에게도 그 자국들을 보이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위한 훈계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하여 이처럼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 주심으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는 표시로 아버지에게도 보이신 셈이 되었다. 그는 하늘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5:6)으로 나타난다. 그의 "피는 말하는 피"이다(히 12:24). 그는 속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일을 마치셨다. 그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역시 아버지께도 "내 손과 발을 보소서"(슥 13:6, 7)라고 말씀하신다.
[2] 그들에게 "만져 보게" 하신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앞서 막달라 마리아에겐 만지지 못하도록 막았다(요 20:17). 그러나 그의 부활에 대해 전하며 그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겐 만지게 하여 그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치기 위하여 "자기를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실지로 영이나 유령 같은 존재가 없었더라면(실제로 제자들은 그러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기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해 주심으로 그들의 헛된 미망을 깨우쳐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유령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라면 구태여 그가 영이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고대 기독교 시대엔 상당히 많은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떤 본질적인 육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고 고통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발렌틴교도(Valentinians), 마니교도(Manichees)들, 그리고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추종자들이 그러한 야만스런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Dokh,tai 와 Fantusiastai. 라 불리운다. 이런 이단교리들이 "매장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진짜 몸을 지녔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알고 확신한다.
(2) 그는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이는 그가 진짜 몸을 지니고 있으며 마치 친구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그의 심정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행 10:41).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1] "그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희가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다"(41절). "아직" 그를 믿지 못한 것, e;ti avpistou,ntwn auvtw/n ─즉 아직 믿지 못한 자들처럼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부활의 진리를 확증시켜 주고 있다.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대제사장들이 주장했듯 빈 무덤을 보고 "그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부활했음에도 계속해서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후에 부활을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되었을 때 그 부활이야말로 모든 가능한 일들의 완전한 근거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증거들을 멸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너무 기쁨으로 오히려 믿지 못하였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야곱과 같은 형편이었다. 사실치고는 너무도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랑과 욕심이 "과하여" 믿음과 소망이 약해질 때엔 약한 믿음을 배척하지 말고 북돋아 주어야 한다.
둘째,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 사실이 "너무도 기쁘고"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그 순간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권능도 잊어버리고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2]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심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엠마오에서도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았으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부활한 후 몸의 상태가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지는 못하였으나 이제 그가 실지로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나사로도 부활 후에 생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생활 상태대로 돌아가 살다 다시 죽었다). 그들은 그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42절).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의 식사였다면 그들의 주님도 그들과 같은 식사를 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선 그와 같은 식사를 대접받을 것이며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들은 그 말씀을 읽고 "들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그들 속에 박히게 되었을 때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1) 그는 그들과 함께 있을 당시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천사들이 그들에게 해 준 것처럼 그 말씀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게 해 주셨다(44절).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옛날에 몇 번이고 "너희에게 말한 바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가기만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다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구약에서 읽었던 말씀들을 인용해 주었다. 그들은 그가 직접 자기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의 기대를 규정지어 주는 하나의 일반적인 힌트를 제시하셨다. 즉 구약에 메시야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그의 나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수난에 대한 모든 기록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이 모든 일들을 섭리로써 "함께 매어놓으셨으므로"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모든 일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을 거치지 않고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약의 몇 가지 성경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모세의 율법"─즉 모세가 쓴 "다섯"권의 책, 모세 오경을 말한다. "선지자의 글"─순수 선지자들의 글 뿐 아니라 예언자적인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인 문서들도 포함한다. "시편"─소위 "헤지오그라파"(Hagiographa)라 불리는 문서들을 언급하셨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옛날의 뜻을 밝히셨음을 알고 있으라. 이 모든 기록들은 하나의, 영원히 변치 않는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성령은 말씀을 통해 메시야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 주었다. "모든 선지자들은 그의 증인이 되었노라."
(3) 그들의 마음속에 큰 충격을 준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구약 말씀의 참 뜻과 진리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으며 그 모든 예언이 그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주셨다.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령을 깨닫게 하시고(45절)" 두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실 땐 성경을 "펴심"으로 성경 말씀의 베일을 거두셨는데 이제는 "마음을 여심"으로 마음에 쳐져있던 베일을 거두셨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 그의 제자된 자들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키신다. 우리의 영혼을 충동시키시며 깊은 영향을 끼치신다.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의 "영혼"에 그의 "영을 통하여 새 힘을 불어넣은 주었는가. 그 중요한 두 가지 "실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심으로 하나님의 빛에 의해 지적인 깨달음이 있게 되었으며 둘째로 그들의 마음을 하늘의 열심히 뜨겁게 하여 능동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2] 아무리 착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본성이 "어두운" 자는 아닐지라도 "어둠 속에 있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내 눈을 여소서. 내게 명철을 주소서"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던 바울도 계속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3] 그리스도께서 영혼 속에 신앙을 심어 주시며 거기서 면류관을 얻으시는 일은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믿어야만 하는 일들의 증거를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문을 여시고" 마음속에 들어오시나 사탄은 도적이나 강도처럼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4] 우리 마음을 여시는 목적도 "우리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기록된 말씀보다 뛰어나게 슬기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안에서 보다 슬기롭게 되어" "그 말씀을 통해 얻는 구원을 슬기롭게 소유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이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경 외의" 것을 배워선 안 된다.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워 성경 말씀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자라도록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품으며 그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4. 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도"로 보시고 그들에게 훈계하신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고용된 자들이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던 때에 그들은 각자 영광된 자리를 꿈꾸고 있다가 그가 죽게 되자 실망하고 만 적이 있었다. "아니다, 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부활의 소식을 온 세상에 들고 나가야 한다. 단지 소식으로 보고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팽팽하게 대립되어 왔던 싸움의 결과가 이제 분명히 들어났음을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라. 그 소식을 듣고 세상의 왕들은 넘어지고 쫓겨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들을 너희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았다. 너희는 이 일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그 일들을 전하라. 너희를 깨닫게 한 영이 너희와 함께 동행하며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할 것이다." 이제 그들이 지시 받은 내용을 살펴보자.
(1) "말할 내용." 그들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구약"의 완서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진행과 결과로써 "신약"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특히 유대인들에게 전할 땐 꼭 지녀야 한다.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한 그의 첫 설교에서 예언서를 참고하도록 일러주었다. 행 10:43). 그리고 사람들에게 메시야에 대해서, 그의 나라의 영광과 은혜에 대해서 구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 확고한 지혜의 기반에서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말해 주어야 한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사람의 자녀들에게 "선포"해야 한다(46절). 이처럼 영원 전부터 하늘의 비밀 책에 구원의 계약에 대한 비밀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밝혀진 것들 중에 구약이란 공개된 책에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늘의 섭리는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에 따라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것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전하라."
첫째,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 기록한 바대로 고난받으셨다. 가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라.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고난받으신 예수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그가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그가 어떻게 고난을 받았는지, 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이 그의 고난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들에게 전하라. 그가 고난을 받아야 했음을 전하라. 이는 세상 죄를 사하기 위함이요, 파멸과 죽음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함이었음을 말하라. 나아가서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였음을 전하라"(히 2:10).
둘째, "그가 제 삼이레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십자가를 막던 모든 세력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가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으며 역시 부활로써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라(고전 15:3, 4 참조). 가서 세상을 향해 너희가 복음에서 부활한 그를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그와 얼마나 가깝게 대화를 나누었는가 말하라(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그들에게 말하듯). 당신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창 45:12). 가라, 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죽으셨던 그 분이 살아셨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며 죽음과 은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고 하라."
[2] "회개의 의무에 대한 복음. 사람의 자녀들에게 강하게 권해야 한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의 권위로 전해야 한다(47절). 어디든지 사람을 다 불러모아 회개하라 명해야 한다"(행 17:30). "가라, 가서 사람들에게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키우신 하나님께서 이 소식을 듣는 즉시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지 말고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며 요구하고 계심을 전하라. 그 뿐만 아니라 세상과 육체의 이익만을 구하는 것에서 헤어나오기를 바라고 계심도 전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모든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모든 죄악된 습관을 버려야함도 전하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이 변해져야 하며 전체적으로 그들은 새롭게 소생되어야만 한다."
[3] "죄사함"의 "영광"에 대한 "복음"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한다. "가라.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매여있는 죄악 많은 세상에 전하라. 보상의 속죄가 하나님의 법정에 인정받았으므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가 그 은혜를 입을 것이며 그들은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택함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세상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라."
(2) "말할 대상." 이 말씀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나? 그들의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제 그 내용을 살펴 보자.
[1] "모든 족속"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자손들처럼 각자 자기나름대로 어디를 가든 이 빛을 가지고 흩어져야 한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전했지만 사도들은 "온 세상"에 그것을 전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복음이 요구하는 바 "회개"의 책임에서 "면제될" 이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회개한 자가 얻을 수 있는 은혜에서 "제외될" 이는 없다. 단지 자신의 문에 빗장을 걸고 믿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는 어쩔 수 없다.
[2]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복음의 첫 설교"를 행해야 하며 그곳에 "복음 교회"가 최초로 세워져야 하며 그곳에서 복음의 날이 밝아 그 빛이 온 세상에 퍼져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그곳에서 시작되어야만 할까?
첫째,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식으로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퍼져나가야" 한다(사 2:3; 욜 2:32; 3:16; 옵 1:21; 슥 14:8 을 참조).
둘째, 복음의 근거가 되는 사건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선 그곳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정당한 이유에서라면 그곳이야말로 복음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영광이 너무도 강하고 빛나게 비침으로 그를 모욕적인 죽음에 가두었던 자들의 얼굴을 비추어 그들을 무색하게 만드셨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라. 그리하여 대제사장들이 복음에 대항하여 있는 힘을 다하다 스스로 실망하여 분노케 하라."
셋째,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의 본보기를 다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예루살렘은(관리든 무리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에게 욕을 돌리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도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제공되게 되었으니 잠시 동안이나마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수많은 자들에게 주어진 셈이 되었다.
(3)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얻을 도움." 지금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은 대단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부닥치게 될 반대와 괴로움을 생각하면 대단히 어렵고 광범위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이를 감당할 자가 누가 있겠읍니까?"고 당연히 질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지리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49절). 그는 여기서 잠시 후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전에 볼 수 없었던 정도로 그들에게 내려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은총과 선물로 무장하게 될 것을 밝혀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권능," 초자연적인 권능, 자신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권능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항상 하늘로 향하게 하며 "높은 곳"에 목적을 두도록 해 준다.
[2] 이러한 권능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울 수도 없으며 복음을 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을 보면 능력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오심이 구약의 약속이었듯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권능"은 신약의 위대한 약속,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아버지의 약속"이라면 그 약속이 어긋나거나 약속된 일들이 "쓸모 없는 것"들로 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약속이 성취될 시간이 임박해서 그들을 떠나셨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열흘만에 성령이 "강림" 하였다.
[5] 그리스도의 대사들은 능력을 받기까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충분한 훈련과 신임장을 받기 전에 섣불리 대사 임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언뜻 생각되기는 지금처럼 시급하게 복음 전파가 요구되는 때는 없다고 여겨지겠지만 그래도 전도자들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비록 위험한 곳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이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질 곳이었기 때문이다(욜 2:28).
그리스도의 승천(누가복음 24:50-53)
이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그의 제자들과 만난 중요한 사건은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에선 부활하신 그날 밤 제자들과 만난 첫 번째 방문의 기록 마지막에다 첨부시키고 있다. 현재로선 그리스도의 승천보다 더 중대한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천에 대해 우리는 아주 간단한 내용으로 읽게 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그리스도는 엄숙하게 제자들과 작별을 고하셨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고 그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손을 하늘과 땅에 두시며 그 일을 위하여 "오셨다" 다시 "가셔야"만 하였다. 그에겐 하늘과 땅의 두 군데에서 하실 일이 있으셔서 성육화되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셔서 이곳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셨으며 이제 그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돌아가사 그곳에 계시며 우리의 일을 아버지께 고하는 일을 하시게 되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승천한 장소. 그곳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 "감람산"과 연해있는 "베다니"란 곳이었다. 그는 전에 그곳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크신 일을 하셨으며 이제 그곳에서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그곳엔 그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었으며 그가 고통 중에 빠지게 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베다니란 말은 "슬픔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자들은 마땅히 슬픔과 고통의 집을 거쳐 그곳으로 가야하며 괴로움을 통하여 기쁨으로 나가야 한다. 감람산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가 승천하실 곳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 그리고 얼마 전 이곳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던 바로 그 장소였다(눅 19:29).2. 승천을 목격한 이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승천하는 그를 보게 하셨다. 아마도 그가 승천한 시간은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 후 자신을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선택된 목격자들"에게만 보여 오셨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무덤에서 부활하는 장면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부활이 충분히 증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천하는" 그리스도는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승천을 보지 않고는 다른 식으로 그의 승천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승천하는 그를 볼 목적으로 이끌려 나갔으며 그들의 눈은 승천하는 그에게 고정되었고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3. 제자들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그리스도는 불쾌하게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떠나갔다. 뒤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축복을 남겨 두고 떠났다. 그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할 때하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레 9:22 참조). 그는 권위있는 자로서 축복하였으며 그가 값을 주고 산 축복을 내려 주었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듯 "그들에게 축복하셨다." 사도들은 이제 열두 지파를 대표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축복하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이다. 그는 모세와 야곱이 임종할 때 각기 자기의 아들들과 족속들에게 축복하신 것처럼 그들을 축복하셔서 세상에 있을 때 사랑한 것처럼 끝날까지 사랑할 것을 보여 주셨다.
4. 떠나는 장면. "축복하실 때에 저희 떠나셨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날지라도 그들을 축복하시는 그 축복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오르사 그곳에서 계속 축복을 내리실 것을 암시하시듯 떠나 가셨다. 그는 땅에서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 하늘에 오르사 그 일을 "계속 하시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들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기를 믿을 "모든 백성"에게 베풀어질 축복을 내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이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다."
5. 승천에 대한 묘사.
(1) "저희를 떠났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머리 위로 떠나갔듯이 그는 제자들의 머리 위로 떠났다. 가장 절친한 친구는 헤어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야만 한다." 몸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육으로 그를 찾던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 그는 "하늘로 올리우셨다." 강제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행위로 오르셨다. 부활하셨을 때와 같이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승천하실 때에도 천사들이 둘러 쌓다. 불마차나 화마(火馬)는 필요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었기 때문에 길을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노아가 제사드릴 때 연기 속으로 천사들이 올라간 것처럼 그리스도는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다(삿 13:20).
Ⅱ. 제자들은 그가 떠나갔음에도 계속해서 그를 기쁜 마음으로 섬겼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드렸다.
1. 그들은 그가 떠나갈 대 그에게 경배를 드림으로 비록 그가 먼 세계로 간다할지라도 계속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언제나 그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5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부터 "경배"받기를 원하고 계심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를 예배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새롭게 나타냄으로 그것에서 새로운 지혜와 예배가 비롯된다. 그들은 비록 그가 "그들을 떠났지만" 자기의 예배하는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시며,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진 구름도 그리스도의 눈을 가릴 수 없어 그들의 예배는 숨기워질 수 없을 것이다.2.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기까지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이 위험한 곳 인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갔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은 "큰 기쁨으로" 그곳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며 그들의 마음이 열린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엔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떠나가신 것을 보고도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떠나야만 했으며 그가 보혜사를 보낼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기쁨, 넘치는 기쁨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날 그 곳에서 영광 중에 계신 그를 보게 될 때 얻는 기쁨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으랴.
3.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경건한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53절).
(1) 기도 시간마다 성전 예배에 참석하였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늘 하셨던 대로 "그들은 늘 성전에 있었다." "주님께선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몇몇 레위인들에게 속한 성전 방을 빌려 제자들처럼 그들 나름대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그런 회당은 대제사장이나 "성전관리들"에게 "비밀로 하거나" "묵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2) 성전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필요 없는 것이 되었지만 성전 찬송엔 함께 참여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엔 찬송으로 그를 맞이하도록 명심하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은 따로 시간을 정해해야 할 성질의 일이 결코 아니다. 성령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있어 거룩한 기쁨과 찬송보다 더 나은 준비는 없다. 걱정은 사라지고 슬픔은 위로 받으며 회망만이 계속된다. 끝맺는 "아멘"은 교회와 복음서를 읽은 교인들의 복음의 진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진심으로 마음이 일치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후에 첨부된 듯하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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