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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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그리스도의 적들이 겪은 당혹(1) (누가복음 20:1-8)

여기에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에 보탠 것은 없다. 그러나 다만 첫째 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주님은 이 때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고 계셨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친히 전하는 분이시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해 놓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공포해 주셨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확인시켜 주셨으며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큰 격려를 주셨다. 주님이 복음을 친히 전하여 공포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표시이다. 이 사실은 동시에 복음 전파자들과 그들의 직분과 사업에 큰 영예를 주시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경멸히 여긴다 하더라도 전도인들은 큰 영예와 긍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의 서민적 전도자에게 영예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백성들의 능력을 귀하게 여기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또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에는 방해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사탄과 사탄의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보다 잘 약화시키는 것은 복음의 전파이기 때문이다.

Ⅱ. 주님의 원수들이 "가까이 와서"라는 말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서만 쓰여졌다. 이 말은 다음의 사실을 암시한다.

1. 주님의 원수들은 이 질문으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갑자기 가까이 왔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으시던 것이어서 그 대답에 당황하게 하심으로 주님을 잡기를 원했던 것이다.

2. 주님의 원수들은 그 문제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난폭하게 주님께로 가까이 왔다. 그러나 원수들의 계획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인간의 진노를 두려워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은 도리어 인간의 간악한 계획을 변하여 주님의 찬양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이것이 한 감정의 표현으로써는 논쟁이 되고 눈이 가리어져서 빛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 이상한 일로 여겨져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적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셨으면 당신의 임무를 확인시켜 주셨다. 그런데 그 분명한 사실을 원수들에게 규탄 당하고 계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은 그들이 만일 종교의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원리를 자기들 스스로 캐어물었더라면 모든 사람에게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평범한 문제인 요한의 세례에 관한 문제로 답변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다 그것이 하늘로부터인 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냄새나 경향이 조금도 없고 모두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여 결국 백성들 앞에서 부끄럼만 당했다.

(3) 세평과 세속적인 관심사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분명한 진리에 감금이 되다시피 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장 강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 억눌려서 숨이 막힐 듯이 되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것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신망을 잃을까 봐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강조하지 못하고, 또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두려워한 까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착한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4) 가지고 있는 지식을 파묻어 두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식을 더 얻기를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과 맞섰던 자들이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7, 8절).

 

20:2 없음.

 

20:3 없음.

 

20:4 없음.

 

20:5 없음.

 

20:6 없음.

 

20:7 없음.

 

20:8 없음.

 

20:9

농부와 포도원(누가복음 20:9-19)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으로 주의 권위가 어떻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잘 알 수 있도록 증거를 밝혔는데도 그 권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권위를 자기 자신들의 권위로 몰수함으로써 문제삼은 자들에게는 적절한 비유이었다. 이들이 포도원의 주인을 부인한 것은 포도원에 대한 자기들의 차용권을 무효로 한 것이며 자기들의 모든 자격을 포기한 것이다.

Ⅰ. 이 비유에는 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바에 조금 보태진 것이었다. 이 비유의 의도하는 바는 유대 백성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나중에는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까지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을 분내시게 하여 그들의 교회의 모든 특권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우리의 눈으로 보는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포도원의 소작인과 농부와 같아서 포도원을 돌보고 또 그 포도원에 대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종교를 설립하시고 질서를 설정하심으로써 포도원을 만드셔서 백성들에게 세(貰)로 주시고, 에베소 곧 포도원을 지키는 장막을 마련하게 하셨다(9절). 소작인과 농부들은 해야 할 포도원 일 곧 필요하고도 꾸준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러나 이 일은 유쾌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 때문에 땅을 경작하도록 정죄되어 있으므로 포도원에서 직분을 가진 그들은 순결한 중에 하던 아담의 일로 회복되어 정원을 매만지며 이것을 간수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포도원 다시 말하면 교회는 낙원으로써 그리스도 곧 생명의 나무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포도원의 주인께 바칠 포도 열매를 가지고 있다. 또 이들에게는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고 해야할 봉사 사업이 있다. 이 세금과 일은 빌려 준 토지에 비례하여 내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불해야 되며 해야 될 일을 감당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자들이 할 일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작료 수집원들로서 늦게 오는 농부들을 기억해 두며, 또는 자기들로부터 보고를 받으시기를 바라고 계신 주인이 계심을 기억하고,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의지심의 고백을 받고 또한 주인에 대한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10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유대교로 이 심부름을 하도록 보냄 받은 사람들, 자기들이 하나님께 책임진 의무와 순종을 그들에게 요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3.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은 불행하게도 주인의 소작인들에게 학대받는 일이 가끔 있다. 소작인들은 주인께서 보낸 사자들을 때리고 능욕하여 사자들로 하여금 거저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도록 불리움 받기에 합당치 않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의 몇 사람이 그들의 가장 훌륭한 봉사로써 가장 어려운 일을 하려 내려왔다.

4.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포도원의 열매를 모으기 위하여 등용하셨던 선지자들이 하던 일과 같은 일을 수행하시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종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친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중에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이와 같은 영예를 주시면서 그들에게 보이셨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승리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만하다.

5. 그리스도의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친히 그들에게 가시면 주님도 거역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미 시험한 바로써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의 핍박자와 살인자들은 주님 자신의 핍박자이며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하였다. 소작인과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였을 때에 다른 종들을 보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들만 죽일 수 있다면 또 보낼 다른 아들은 없을 것이며 그러면 더 이상 소작료와 세금을 요구하여 성가시게 굴지 않을 것이다. 포도원을 완전히 우리의 소유로 만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약속하기를 만일 그리스도만 처분해 버리면 자기들이 영원히 유대교의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담한 걸음을 걸으면서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었다.

6. 그리스도를 원수들이 죽인 것은 유대인의 죄악의 극에 달한 것으로써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을 초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시는 도리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고 끝내는 자기들의 젊은 주인까지도 죽이었다. 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와 멸망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Ⅱ. 이 비유의 말씀에는 다른 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말 곧 사람들이 자기들을 멸망시키려는 주인의 경륜을 반대하였다는 말이 있다(16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지이어다." 농부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멸망을 당하는 것밖에 다른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마는 그런 선고를 들으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죄인들은 자기들이 종국에는 멸망당할 것을 내다보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냥 그 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어리석음과 완악이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악을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 그렇게 하지 말아 주시라고 하여 그 멸망을 피하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자기 자신들을 속이는 일을 했는가. 그러나 그들의 만류가 무슨 효과를 나타내겠는가? 하나님의 경륜대로 될지 자기들의 주장대로 될지는 자기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멸망됨을 어리석게 반대한데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1. 주님은 "저희를 보셨다."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만이 기록한 말이다(17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동정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쳐다보시면서 자기들이 멸망의 길을 걸어놓고 나서 스스로 속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저희들을 보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그들의 표정에서 측은하게 여기는 표시가 나타나는지 보려고 그들을 쳐다보신 것이다.

2. 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록된 바가 무엇이뇨? 너희가 경멸히 여기고 반대하는 주님의 의기양양함을 막지 못할 때 너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들려 올려지실 것이다. 주님에게는 위임받으신 모든 심판의 권세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주님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며 머리 돌이시다. 그러니까 주님의 원수들은 멸망될 수밖에 없다. 주님을 경멸히 여기고, 주님을 넘어지게 하고 또 주님을 반대한 자들도 "깨어지겠고"──곧 멸망당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핍박한 자들 곧 유대인과 같은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마주쳐서 그들을 조각으로 부셔서──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이다. 악의에 찬 박해자들은 무관심한 불신앙자들에 대한 정죄 보다도 훨씬 더 엄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의 말씀에 의하여 격노하게 된 것이다(19절).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주님은 사실 그렇게 하신 것이다. 떳떳치 못한 마음은 고발자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주님의 원수들은 양심의 가책이 생기기보다도 자기들의 가슴에 품고 있으나 자고 있는 사자를 일깨워 준 주님에 대하여 "즉시 잡고자" 하였다. 그들의 부패성은 자기자신들의 양심적 가책을 반대하여 이를 물리쳐버렸다. 그들이 주님께 정면으로 대들지 못하고 앙심만 품고 있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이나 그들의 눈앞에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속자니 죽이자." 주목할 사실은 인간의 자손들의 마음이 악행을 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그들이 범하려고 하고 있는 죄와 그 죄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경계를 하더라도 감명을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입맞추기보다도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 이제 그에게 달려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죄의 처벌을 비난했지만 조금 있다가 그들은 도리어 범죄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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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적들이 겪은 당혹(2) (누가복음 20:20-26)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세금에 대한 문제를 제의함으로써 원수들이 쳐놓은 올가미를 피하심을 보게 된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다.

Ⅰ. 이것은 주님을 해치려고 계획한 위해였는데 이것은 전에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 음모는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는" 것이다(20절). 그들은 율법 때문에 그들 자신이 주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이 의지할 수 없는 민중의 폭동을 일으켜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심판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짐짓 주님을 박해하는 자와 고발자가 아닌체 하고 주님을 모해할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님을 반대하는 총독에 아첨할 수 있는 요긴한 사실을 알아내기를 바랐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교회의 치리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악행의 도구로써 세속적인 권력을 쓰는 것이 보통 술책이며 또는 자기들이 해야 될 성가신 일을 지상의 왕들이 하게 하는 것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왕들이 악한 무리들의 술책에 선동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이웃은 조용히 살았을 것이며 그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기기까지에 빌라도가 그리스도에게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써 원수들의 저주할 만한 계책에 의하여 주님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Ⅱ. 다음에 생각할 것은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고용된 사람들이 약간의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에는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여"란 말이 첨부되어 있다. 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여 가장 악한 계책을 가장 진실하고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악마는 빛의 천사로 변모할 수 있고 바리새인의 젊잖은 외관과 그리스도의 제자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탐정은 반드시 변장을 하게 마련이다. 이 탐정들은 그리스도의 판단에 대하여 가치를 인정하는 체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체한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주님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도자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조심할 것이며 뱀과 전갈의 자식들 속에 있을 때에는 뱀과 같이 지혜로 와야한다.

Ⅲ. 그들은 내놓은 문제로써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1. 그들의 시작하는 말은 매우 예의를 갖추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21절)." 이처럼 그들은 주님에게 아첨하여 주님이 부주의하시는 중에 마음을 터놓고 자유스럽게 말씀하시는 중에 자기들이 원하는 약점을 잡으려고 했다. 교만한 그들 또 진정한 사랑이 없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오직 아첨하고 친절한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겸손한 예수에게까지 속임수로써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큰 잘못이었다. 주님은 그런 위선자의 말을 즐겨하시지 않으셨으며 또 그런 말로써 당신이 존경을 받으신다고는 생각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임이 사실이고 또한 모든 사람의 심중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며, 원수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하더라도 그들의 심중에는 일곱 가지 가중한 것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께서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주님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책잡히시지 않으셨다."

2. 그들의 문제는 매우 좋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라는 말은 누가복음에만 있다. 아브라함의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자손인 우리 곧 하나님께 세를 바쳐야 할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교만심과 탐욕심이 많은 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싫었다. 그러므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부한지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 말씀하시면 백성들이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주님께서 메사야를 가장 첫 자리에 앉으실 분으로 인정하여 로마의 압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여 가이사에게 세 바치기를 거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원수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씀하시면(만일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일반 백성들이 전처럼 주님을 떠받드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원수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총독에게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Ⅳ. 주님께서는 원수들이 쳐놓은 올가미를 피하셨다.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셨다"(23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해치려는 원수들의 간계가 아무리 교묘하다고 하더라도 가장 교활한 변장도 뚫어보실 수 있고 가장 위험한 간계의 올가미도 피하실 수 있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곧바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약점을 잡으려고 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고 당시에 상인들의 통화 한푼을 가져오라고 하셨다.──셋돈을 내게 보여라." 그리고 물으시기를 그것이 누구의 돈이며, 누구의 인이 찍혀 있으며, 누구의 화상이 그려 있느냐고 하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하고 시인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왜 너희들끼리 가이사의 돈을 주고받는 것이 가하냐고 먼저 물을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이미 이 돈을 너희들의 거래의 도구로 쓰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이의없이 인정하고 있고, 너희의 행동으로 결론짓고 있으니 너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너희의 거래에 편리하도록 마련해 준 그 사람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또 이것으로 너희가 보호를 받고 너희 돈의 가치에 대하여 그 사람의 권위를 인가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권력자에게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가이사가 법률과 공정한 행정으로 너희를 보호한다면 너희는 마땅히 그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거룩한 일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의 왕이시다. 너희는 가이사의 종교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찬미하며, 가이사가 마련해 놓은 금으로 만든 우상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대로만 경배하고 찬미해야지 가이사가 만들어낸 것에 따라서 하면 안 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어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으시다.

 

20:21 없음.

 

20:22 없음.

 

20: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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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인의 트집(누가복음 20:27-38)

이 주님과 사두개인들과의 담화는 여기에 기록된 그대로 다른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부활 후의 상대가 약간 더 충분히 또한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다.

Ⅰ. 어느 시대에나 계시 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칭 자유사상가라고 하는 오늘날의 자연신교 신봉자들은 실상 허위사상가들이다.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시대에 있었는데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상 이 교리는 구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으며 유대교 신앙의 한 조목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고, 육체에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 속에 영혼이 계속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영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며, 육신으로 행했던 일이 보상된다든지 보복되는 상태로 될 수 없다는 말했다. 이 부활을 빼버린다면 모든 종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Ⅱ. 하나님의 진리의 토대를 침식하려고 계획하는 자들이 흔히 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케 하며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바로 이렇게 하였다. 그들이 부활의 교리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할 때에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수 없을 만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며 적어도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던 한 여인의 예를 들어 부활의 문제를 삼은 것이 그 하나이다. 그들은 부활에 있어서 "부활의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의 아내이든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음으로 끝났을 때에는 그 부부관계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Ⅲ. 지상에 있는 사람의 자녀들의 상태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태와의 차이는 크며,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감정의 세계에서 우리의 현실적인 향락으로 저 영의 세계를 우리의 이해력으로 형성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인간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이 시대와 이 세대의 자녀들은 좋고 나쁘고 다 저희끼리 결혼하며 자기들의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가정을 일으키고 다스려 나가며 또한 가정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즐거움의 대부분은 우리의 친척, 부부, 자녀간에 이루어지며, 자연 그런 편으로 기울어진다. 결혼은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결혼생활의 상태로 우리의 육체를 지니고 살게 된다. 간음을 금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타고 난 욕망이 야수적이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방향과 통제하에 충족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 결혼의 과정을 열망하여 또한 그대로 해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며 또한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그래야 인간 세계에 필요한 일군들을 공급하게 되고, 한 세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가 오게 되며 또 자손들을 갖게 되어 자기들의 노력의 열매 특히 미래의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사람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곧 결혼에 의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니"(말 2:15) 하나님을 섬길 자손이며 하나님에게 한 세대가 될 자손이다.

2. 내세에 있을 일은 전혀 다르다. 그 주요성과 고귀성으로 보아서 저 세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가시 세계와 미래의 가시 세계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 누구나의 관심사로써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비교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주의는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저 세상의 주민은 누가 될는지, 그런 사람은 그 세상에서 살 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하여 저 세상을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이해가 깊은 사람이어야 하며 성령에 의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성령과의 거룩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저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신다.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저 세상의 주민이 될 만한 법적인 정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도 없다. 그러나 복음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소유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불하신 헤아릴 수 없는 값이 있는 것이다. 이 값으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롭게 되었으며 저 세상의 주민이 되기에 합당하게 되었다. 부패된 성품에 있는 못마땅한 요소들은 제거해버리고, 영혼의 기질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 세상의 주민의 자격에 합당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저 세상을 얻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자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저 세상을 얻게 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며,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저 나라를 얻기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저 나라를 믿는 사람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리니 곧 복 받은 부활을 얻을 것이며, 심판의 부활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요 5:29) 사망으로의 부활, 둘째 사망 곧 사망으로부터 가 아닌 영원한 사망이다.

(2) 저 세상의 주민의 행복한 상태는 "눈으로 보질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전 2:9). 그러면 주님께서 저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보자.

[1]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주님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주님의 즐거움에 휩싸여서 신랑으로서 신부에게서의 즐거움을 필요를 하지 않는다. 사랑의 세상인 저 세상에서의 사랑은 모두 고상하여서 감정의 세상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즐기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즐거운 사랑도 마치 일식이 되는 것처럼 가려져 버린다. 육체 자체가 영적인 육체가 될 것이며 감정적 쾌락은 다 없어지고, 완전히 거룩한 것만 있어서 죄로부터의 예방제로서의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는 불결한 것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

[2]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다." 이것은 저희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된다. 이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는 사망으로 인하여 생기는 빈곳을 채우기 위하여 결혼해야 한다. 그러나 무덤에 장사 지내는 일이 없는 저 세상에서는 결혼이 필요치 않다. 이 사실은 사망이 다시는 없는 저 세상의 즐거움을 빛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 사람이 모든 아름다움을 더럽게 하고, 모든 즐거움을 시들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망이 다스린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사망이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

[3] "저희는 천사와 동등이요." 다른 복음서에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천사와 동등이요"라고 기록되었다. 곧 천사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영광과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이들은 같은 광경을 볼 것이며 같은 일을 하게 되며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 성자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는 하늘나라에 귀화되고, 성격으로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지불하신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으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로 태어난 천사들과 동등한 특권을 갖게 되는데 그 천사들은 저 하늘나라의 원주민들이며 토착민들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친구가 될 것이며 그들을 정답게 사랑하는 복 받은 영들과 담화하며, 이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온 많은 무리들과 한패가 되어 교제하게 된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우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 곧 "아들들의 기업으로 아들의 명분을 다하게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리라" 하였다(롬 8:23). 그러므로 육체가 무덤으로부터 구속을 받을 때까지는 양자가 다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2). 우리는 아들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는 완성되지는 않는다.

[5]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래의 상태에서 등용되고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그들은 저 세상에서 태어나 그 가족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 이를 위하여 교육을 받았고 또한 거기에서 자기들의 유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난 부활의 자녀들만 당신의 자녀로 시인하시며, 이들은 영의 세계에 결연되어 있으며, 저 세상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으며, 그 가정의 자녀들이다.

Ⅳ. 이 세상에서의 생명 후에는 다른 생명이 있음은 의심 없는 진리이며 교회의 초대 시대에 이 진리에 대한 뛰어난 발견을 했다(37, 38절).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였느니라."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은 우리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었었다. 그들은 여러 해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육체는 막벨라의 굴속에서 흙으로 변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실 수 있으실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신 분이 보통 흙과 다름이 없는 굴속에서 흙이 된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관계를 계속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다른 세상에 가서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가는 여기에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을 첨가했는데 이 말은 곧 그들과 같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믿는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고, 그들의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전 12:7)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살고, 그들의 몸은 끝날에 다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살 것이다. "그는 믿는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다"(롬 4:17).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더 없는 복이며 행운이고, 그들에게 전능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창 17:1) 그들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창 15:1). 그런데 그들의 역사를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의 큰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계획과 범위로 응답해 주신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세상에서의 생 이후에 다른 생이 있어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하신 바를 완전히 이해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래야 그들의 참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실 수 있으며, 당신과 함께 있는 모든 영혼들을 행복하게 하시되 모든 영혼에게 또한 각 영혼에게 만족하게 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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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의 패배(누가복음 20:39-47)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이었으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설해 주는 자들로서 지식과 명예로 평판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 왔던 서기관 중의 몇 사람을 보게 되는 이들에 관한 기사에서 네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른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Ⅰ.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하신 답변을 칭찬한 서기관이 있는 것이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39절). 주님께서는 주님의 반대자들에게서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는 증언을 들으셨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이 주님의 반대자이었던 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종교의 기본적인 관례를 정당하다고 인정하시고 그것을 변호하신 것으로 보였을 때에 서기관들까지도 주님의 하시는 일을 칭찬하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옳게 여겼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 중에도 많은 수가 이러한 정신까지도 부족하다.

Ⅱ. 이 때에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와 권위로 인하여 경외심을 일으키게 되었다(40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왜냐하면 서기관들이 주님과 논쟁하기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너무도 어려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기 원해서 무슨 질문이든지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에 반대하고 트집잡으려고 하는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묻지 못하였다.

Ⅲ. 서기관들은 주님의 메시야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어리둥절하여 꽉 막히고 말았다(41절). 여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았었다. 소경들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18:39). 그리고 다윗이 메시야를 자기의 주님이라고 부른 것도 분명하다(42, 42절). 주님이라고 한 것은 자기의 소유자, 치리자 또한 후원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다"(시 110:1).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말씀하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그의 주님이라고 부르셨을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님이시라면 왜 우리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부를까? 이것을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생각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 문제를 조화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다윗의 주님이면서도 다윗의 자손이신 인간 예수로 모실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시다"(계 22:16). 주님의 인간성에 의하여 주님은 다윗의 자손 곧 다윗의 가족의 지체이시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에 의하여 주님은 다윗의 뿌리로써 주님으로 인하여 다윗이 존재했으며 생활했고 또한 모든 은혜의 공급을 받았다.

Ⅳ. 여기에는 서기관들의 나쁜 성격이 기록되어 있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공개적인 주의의 말씀이 있다(45-47절). 이 기사는 마가복음 12장 38절에는 여기와 꼭 같이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 23장에는 보다 과장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다음의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1. "그들로 인하여 죄의 길로 끌려 들어갈까 조심하라. 그들의 생활태도를 배우고 그들의 생활수단을 좇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들이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위선적인 정신을 조심하라.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하는 짓을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하지 말라."

2. 그들로 인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질까 조심하라. 이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과 같은 뜻이다(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이 이러한 짓을 할 것이다. 그들을 삼가라. 왜냐하면,"

(1) "그들은 교만하고 불손한 자들이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거리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마치 상류계급의 사람들인 것처럼(일하는 사람들은 허리를 동이고 당겼기 때문에) 점잖을 빼고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처럼 "한다." 겉치레로 위엄을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심중에 백성들이 장거리에서 그들을 보고 절 받기를 좋아했으며,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를 원했으며 많은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서 자기들에 우선권을 주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좌석에 앉고, 잔치자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 앉게 될 때에는 자기들을 과대평가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았다. 자기들은 왕이나 된 듯한 태도였다.

(2) "그들은 탐욕이 많았으며 다른 사람을 압박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를 가면적인 것이며, 범죄를 가리우는 덮개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서 과부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었으며, 간계를 쓰거나 다른 수단으로 그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에게 기대서 살았으며 과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먹으며 지냈다. 과부들은 그들의 만만한 낚시밥 이었다. 왜냐하면 과부들은 서기관들의 허울좋은 겉모양에 미혹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아마 과부들이 슬퍼하는 중에 있을 때에 자기들이 과부들을 측은히 여길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과부들과 오래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부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힘써서 그들에게 돈을 받고 또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식적인 경건한 사람들에게 과부들은 정녕코 많은 돈을 맡겼을 것이나, 그 경건한 체하는 서기관들은 저희들의 것으로 삼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의 운명을 다음의 몇 마디로 판단하셨다. "이들은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이들은 이중의 천벌 곧 불쌍한 과부들을 능욕하여 그들의 집을 삼켜버린 죄와 종교 특히 기도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세속적인 악한 계율을 보다 그럴듯하고도 유효하게 성취하기 위한 핑계로 삼은 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가식적인 경건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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