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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예수를 돕는 여인들 (누가복음 8:1-3)

우리는 이런 내용을 엿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무엇인가 ? ─ 그것은 "전도"였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는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이 후에 ─ evn tw/ kaqexh/j ─ 적당한 "시기"와 방법을 택하여 선행에 힘썼다(1절).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자기의 일을 갖다 놓고서는, 규칙적으로 그 일을 해 나간다. 그는 사업의 "순서" 또는 질서를 지켰다. 그래서 한 선행의 끝은 다른 한 선행의 시작이 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 "어디서" 전도했는가 ? ─ 그는 "두루 다녔다" ─ diw,deue 말하자면 그는 "순회" 전도자였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광선을 사방에 폈다. Circumibat ─ 즉 그는 순회 여행을 했다. 마치 사사의 한 사람처럼 일했다. 아마 "새로운" 곳일수록 자기의 전도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각 성(모든 도회지)을 두루" 다녔다. 어떤 성읍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녔듯이, 그 제자들은 지상의 모든 민족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는 또한 "성읍"(도회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평범한 시골민들이 사는 "촌"에도 갔다. 즉 "촌의 거민들에게도" 전도하신 것이다(사 5:11).

2. 그는 무엇을 전도했는가 ? ─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즉 사람들 중에 지금 그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온 소식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충성"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자기의 보호하에" 두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개혁"과 "화해"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이었다.

3. 그의 수행자들은 누구였는가? "열 둘이 그와 함께 했다." 즉 그리스도가 계실 때에는 그의 전도에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이 후에 기회가 오면 무엇을 전하고 어떻게 전도하는지를 그에게서 배우는 일에 함께 했고, 그리스도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보냄을 받음으로써 함께 하는 자들이었다. 그의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이러한 그의 종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Ⅱ. 그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어디서 조달했는가 ?" 그는 자기 친구들의 친절을 먹고살았다. 종종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동하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한글은 복수-역주) 섬기던" "어떤 여인들"이 있었다(2, 3절). 그들 중 일부의 이름이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열심이었고, 그래서 "그것(가르침)을 장려하는" 것이 자기들의 "정당"한 의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그 은혜를 입었으므로 또 "자비"를 베풀어서 많은 다른 자들도 자기들처럼 그런 은혜를 입기를 비는 자들이었다.

1. 대부분의 지역에 "그리스도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권능과 자비의 기념비들이다. 그들은 "그에 의해서 악령과 질병을 고침 받은" 자들이다. 어떤 자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우울하게 지냈고, 또 어떤 자들은 몸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유력한 치유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그들의 몸과 영혼의 양편의 의원이시며, "그에게 고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이 "그에게 보답할까"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수종들어야 하며, 그것이 곧 우리가 다시 악에 빠졌을 경우 도움을 쉽사리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과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이 되었던 것, 곧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들어야 한다.

2. 그 중의 한 연인이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였다. 부정확한 숫자가 있는가 하면, 정확한 숫자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앞에서(7:37) 언급되었던 그 "죄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탈무드경의 어떤 저작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는 "머리를 딴 마리아"란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부정함과 치욕된 시절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머리를 땋는 것"은 "정숙한 단장"과는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딤전 2:9). 그러나 그녀가 과거에는 부정한 여인이었을지라도, 회개하고 개심 함으로써 그녀는 자비를 얻었고, 열심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에게도 용서받을 희망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한 과거에 악했던 자들은 회심하고 나면, 그것에 반비례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는 그녀는 "대단히 우울했던"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슬픔 마음"을 지녔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요, 나중에 그녀는 베다니로 이사간 것이다. 막달라란 말은 "우울한 마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일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대동한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절친한 친구요 총애를 받던 이 여인이 그 자리에 대동하지 아니했든가, 아니면 갔더라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녀를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어느 경우도 있을 법하다고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라이트푸트 박사의 거론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갈릴리서부터 예수를 따라 온 여인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마 27:55, 56). 반면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베다니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3. 그들 중 다른 하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이다. 그녀는 (혹자의 말에 의하면) 전에는 구사의 아내였으나 지금은 과부가 되었고, 좋은 여건 속에 살았다. 만일 지금도 구사의 아내라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아내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고 그리스도에게 재물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쾌히 허락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구주가 자신을 얼마나 낮추셨는가 함을 엿볼 수 있는 실례가 된다. 그는 그런 도움이 필요로 할만큼 비천한 데로 낮아지셨고, 그런 도움을 받아들이실 만큼 겸손하셨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자였지만, 우리를 인하여 "그는 가난해졌다" 그래서 기부해 주는 자선금으로 살아나갔다.

하나님의 섭리가 궁핍으로 몰아넣었을 때, 어떤 자들이 이웃의 자선으로 살아나가게끔 되어 남의 신세를 진다고 하여 결코 그들을 조롱하지 말라. 오히려 그런 자들로 하여금 호의를 구하게 하고, 그 호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자. 그리스도도 자기가 전도하러 들어간 도회지나 시골의 낮선 자들에게 부담을 지우기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과 자기의 제자들의 생계를 신세지는 편을 택하셨던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각종 좋은 것으로 교육해 주는 자들에게 상호부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렇듯 아낌없고 활달한 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가지고 주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기들의 소유에 또한 축복을 가져왔던 것이다.

 

8:2 없음.

 

8:3 없음.

 

8:4

씨 뿌림의 비유 (누가복음 8:4-21)

앞 대목에서는 그리스도가 "전도"에 열심하고 있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다(1절). 이 대목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4절). 그는 전도하시려고 "각성(各姓)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들의 마을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각 동리에서 그에게로" 나아온 자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고, 또 그가 "자기들"을 떠나더라도 만족하다고 생각지 않던 자들이요, 그가 자기들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만나고," 자기들을 떠나려 할 때는 "그를 좇으려고"했던 자들이다. 또한 그는 "그에게도 나아온" 자들이 사는 그 마을에서 "나온" 자들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도 있는가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올 만큼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지극히 겸손했으므로, 그는 친히 그들에게 나아가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찾지 아니한 자들 속에서 발견된다"고 했기 때문이다(사 45:1).

마치 큰 대회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물을 던져야 할 고기들이 풍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배를" 준비했듯이, 그리스도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기를" 기뻐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Ⅰ. "씨 부리는 자"의 비유 속에서는 말씀을 듣는 데에 필요하고도 우수한 법칙과 주의사항이 있으며, 그 해설과 의미 활용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두 번씩이나 자세히 살펴본 것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자,

1. 제자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뜻을 물었다"(9절). 그들은 물었다.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의 내연(內延)과 외연(外延)을 알려고 애써서, 지식에 잘못이나 결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는 그 비유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밝히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심오성과 의미를 잘 알게 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으려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는 그런 때에 자기들에게 그 교훈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을 알아서 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서 끝나고 마는 바로 그것이 ─ 그래서 그들은 단지 "감탄할" 말이다 ─ 우리들에게는 "알기 쉬운 진리"로 드러난다면, 우리들이야말로 행복한 자들이요, 영원토록 자유로운 은총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진리에 의해서 "비추임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그러한 형태로 우리는 지음을 받도록 "인도된다."



(1)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에 대해서는 "토양"과 같다. 마음은 그것을 받을 역량이 있다. 또 그 열매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씨가 거기에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와 "토양"을 병행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뿌려지지" 아니했다면, 우리가 성서 속에 "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리고 그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토양이 있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

(2) "씨뿌림의 성공"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즉 그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되고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된다."

(3) 마귀는 미묘하고 짓궂은 원수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이다. 그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든다(12절).

이러한 사실이 부가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1] 우리는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한다. 복음의 말씀은 거기에 신앙이란 것이 혼합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그러므로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에게서 "믿음"을 앗아가려 하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었을 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또는 그 말씀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해진 때에, 잊어버리게 하거나 떠내려가게 만든다(히 2:1). 또는 다시 우리가 기억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그 말씀에 대한 나쁜 편견을 유발시키거나, 다른 데로 우리의 마음을 "돌린다." "우리가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즉 우리가 믿어 "기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마귀는 믿고 "떤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부주의하게" 들려지는 곳에는, 역시 말씀에 대한 "경멸"이 있게 되기가 일쑤이다. 이 비유에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혔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5절). 실상 고의적으로 말씀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의 발로 짓밟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계명을 경멸한다."

(5) 말씀에 대해서 "다소"의 감명을 받았으나 "깊고" "지속적인" 감명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시련의 시기가 오면 자기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만다. 그런 자들은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 동안은 믿으나,"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를 고백하고 약속하나, "시험의 때가 오면 그들은 넘어져서" 좋은 출발점을 이탈하게 된다. 세상의 미소나 짓궂은 장난에서 시험이 오게 되면 그들은 쉽사리 정복되고 만다.

(6) "현생의 쾌락"은, 말씀이라는 좋은 씨앗에 대해서는 다른 요인들처럼 그 씨앗을 질식시켜 버릴,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덤불과 같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것이다(14절). "현생의 염려에 휘말려 들지 않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자기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죽은 자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헛된 태만과 안일과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늘과는 차단될 수가 있다. 감각의 환희는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다. 아무리 합법적인 즐거움이라도 거기에 참석해 있는 자들의 즐거움이 바로 그러하다.

(7) 단지 열매를 맺은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전에 이른 결실을 해야"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열매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결실치 못한" 것이라 한 말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견인(堅忍)이 일의 완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8)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정직하고 좋은 마음"을 말하여, 가르침과 계명을 받을 자세가 잘 된 마음이다(15절). 죄악 된 타락에 물들지 않은 마음, 하나님과 의무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 정직하고 부드러운 마음, "말씀을 듣고 떠는" 마음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니, 그런 마음은 들은 것을 "이해하고"(마태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받아들이며"(마가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간직한다"(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치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함과 같다. 또한 배가 음식물이나 약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도 하는 것과 같다.

(9) 말씀을 잘 간직하는 곳에는, "인내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견디는" 인내와 또한 "기다리는" 인내가 모두 필요하다. 즉 "말씀 때문에" 일어나게 될 "소동"과 "박해"를 감수하는 인내,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10)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 가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18절). 우리가 들은 말씀에서 유익을 얻게 됨을 방해할 만한 것을 조심하며, 듣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말씀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부주의하거나 가벼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가 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우리가 일단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우리의 정신 자세를 살펴서, 우리가 얻은 유익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Ⅱ.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미 들은 사람들에게 대한 요긴한 지시 사항이 있다.

1.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섬겨야"한다. 복음의 경륜을 위탁받은 사역자들, 곧 말씀으로 유익을 얻었고, 그래서 남들에게로 그런 유익을 끼칠 자격을 구비하게 된 자들은 자기들이 "불이 켜진 등경"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엄숙하게, 권위를 가지고 전도하고, 사람들은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의 강론을 들어서, 그들의 불빛을 퍼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등경"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들은 "선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

2. 지금 당장은 "은밀히" 되었고, 보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났던 일도 멀지않아 "드러나서 알려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17절). 당신에게 "은밀하게" 맡겨진 일을 "당신 자신이" 밝히 드러내야 하리라. 왜냐하면, 당신의 조물주는 당신에게 당신의 재능을 묻어두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숨겨진 것이라도 "알게"하자, "당신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을 고발하는" 것으로 드러나서 당신의 부정함을 입증하는 증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교화에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지속되든가 사라지든가 한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게 되리라"(18절). 은사를 가지고 그것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을 것이다(마가복음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즉 그가 "가진 줄로 알고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이다(누가복음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잃어버리게 될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이는" 은총일 뿐 "참된"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이 "사용하지"않음은 단지 가진 "줄로 알기만"함과 같고, 종교의 허식은 결국 사라지고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서 나갔다.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가 은혜를 신실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 속에 "일의 뿌리"가 있게 하는 것임을 알자(욥 19:28 참조). 즉 그것이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아니하는 좋은 비결이다.

Ⅲ. "실행하는 자"가 됨으로써, 특히 그리스도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인척보다도 실행자를 더욱 귀히 여김으로써 자기의 제자들에게 보여 준 본(19-21절)을 따라서, "말씀을" 신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커다란 격려의 말씀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두 번이나 살펴본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점을 관찰해 보자.

1.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에게 시중드는 무리들이 많았으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지만, 예수는 자기의 회중에게서 밀려나가려 하지는 않으셨다.

2. 그의 가까운 친척 중의 어떤 자들은 조금도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때에 왔더라면 쉽사리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여 그를 "맞아들이는" 대산, "그를 보기도" 싫어하여 "밖에다" 세워 두었다.

아마 그들은 어리석은 두려움이 들어, 그가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게 하려고, 방해하려는 생각만 했고, 그의 말이 중단되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일에 분주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기의 "모친과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자기의 전도를 중단하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그 전도가 그의 "먹고 마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가장 가깝고 귀중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을 쾌히 인정하셨다. 그런 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중했기 때문이다.

 

8:5 없음.

 

8:6 없음.

 

8:7 없음.

 

8:8 없음.

 

8:9 없음.

 

8: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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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없음.

 

8:21 없음.

 

8:22

풍랑을 이기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8:22-39)

우리는 여기서 이미 보아왔던 우리 주 예수의 권능을 입증해 주는 두 가지의 놀라운 사례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바람"을 지배하시는 그의 권능과 "마귀"를 지배하는 그의 권능에 대한 증명이다(막 4:5 참조).

Ⅰ. 그는 바람을 제어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즉 인간들에게, 특히 바다에서는 더욱 무서운 공포를 야기시키는 "공중 권세"를 제어하는 권능이신데, 그 권세는 때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그가 바다를 잠잠케 하심으로써 바다에서 자기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고, 그 바다 건너쪽에 있는 가엾은, 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자비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는 제사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22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면, 그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했다면, 그들은 어디를 가나 안심하고 전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라사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했다. 그가 거기에 가서 해야 할 선한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돌아서, 육로를 이용하여 그 바다(호수)를 건너가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로" 감으로써, 그의 "깊은 기사(奇事)"를 보여 주실 수 있는 길을 택하셨다.

2. 고요히 바다에 나아간 자, 그리고 또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아간 자들도 역시 "풍랑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 풍랑에서 지극히 큰 위험을 만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광풍이 그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는데(23절), 이것은 다른 지역에는 없는 바람이 그 지역에만 출현했다는 듯한 표현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에 배가 요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목숨은 위기에 빠졌다.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임금"이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바람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 마귀는 그리스도가 지금 그 호수 건너편에 있는 불쌍한 사람에게서 마귀의 군대를 내쫓으려고 호소를 건너려 하지만, 과연 말씀 몇 마디로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고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물에 빠져 죽게 하려고 그의 배를 광풍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승리를 미리 막으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 폭풍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셨다(23절). 그에게는 육체에 기운이 다소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기의 일에 가능한 한 아무런 방해도 일어나지 않을 그런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바다 가운데서도, 그 광풍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를 실제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는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들의 구제에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아니, 만사가 최악의 사태로 변해가고 있는 때에도 그리스도는 자기들을 위해 나서지 않으려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들의 신앙과 인내심을 연단하시고, 그들이 구원이 막상 닥쳐왔을 때는 그들이 그 구원을 더욱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끔 하신 것이다.

4. 우리의 위험, 교회가 처한 곤경을 그리스도께 탄원하는 길은 그를 깨워서 우리 앞에 나서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24절). 저들은 소리쳤다. "주님, 우리가 죽겠나이다 !" 우리의 공포를 침묵케 하는 길은 그 공포를 그리스도께로 가져다가 그 앞에 내려놓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 그리고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그를 "자기들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능히 가질 수 있다.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가엾은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는다면, 나는 망하겠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길밖에는 구제책이 없다.

5. 그리스도의 업무는 "광풍을 잔잔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업무는 "광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지금 하셨다. 그는 그런 일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땅 위에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과 노한 물결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쳤다"(24절). 다른 경우에서처럼 차차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돌연히 "크게 잠잠해졌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은 임금인 양 날뛰지만 여전히 자기가 마귀를 사슬에 묶어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6. 우리의 위험이 끝나고 나면, 우리가 겁을 먹었던 일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전능에 대해서 찬양을 드려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을 "고요"로 변화시키시자, "그들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했다"(시 107:30). 그리고 나서

(1) 그리스도는 그들의 과도한 공포를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25절).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 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자연의 현상이 불길해지면, 공포에 떨고 낙담한다. 하찮은 것이 그들을 낙심시켰다. 그때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2) 그들은 그의 권능 때문에 그에게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풍랑을 무서워하던 자들은, 이제 그 풍랑이 물러가자, 그 풍랑을 침묵시킨 그리스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쩐 사람인가 !' 하나라." 아마 그들은 "주와 같은 신이 누구이오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다의 소리와 그 물결의 소리를 고요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기 때문이다(시 65:7).

Ⅱ. 그리스도의 권능은 "마귀," 곧 "공중 권세를 잡은 왕"을 제어한다. 이 이야기의 그 다음 대목에 가 보면, 그리스도는 "바람"을 명령하셨을 때보다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마귀와 대결하심을 볼 수 있다. 바람이 조용해지고 나자, 그들은 그들이 소망하던 항구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아갔다(26, 27절). 거기서 그리스도는 즉시 그의 일거리를 만났다. 그는 풍랑을 뚫고 끝까지 그 일을 수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에서 이 더럽고 악의에 가득찬 영들의 세계에 간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영들이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은 꼭 같은 식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악령들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1. 이 악령들의 수효는 대단히 "많다." 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의 이름은 자칭 "군대"였다(30절).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귀에" 걸려 있던 자이다(27절).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자들은 아마 우리 구주께서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 싸움이 "결정적인' 전투가 되리라고 판정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풍랑으로 그를 저지시키려 했으나 불가능했던 점을 알았고, 이제는 이렇게 많은 더러운 귀신들을 그가 쫓아내지야 못하겠지 하고 바라면서 그를 패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군대"였든가,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여김을 받아서, "깃발을 든 군대"처럼 막강한 존재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최소한 로마의 "제 2 군단"- 이들은 오랫동안 체스터(Chester)에 주둔했었다 -을 본따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legio victrix - 즉 승리하는 군대였다.

2. 그들은 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편의와 행복을 싫어한다. 악마에게 잡혀서 오랫동안 고생하는 이 사람은 그들의 권세에 조정되어 "옷을 입지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했다"(27절). "의복"과 "주거"가 인간 생활의 2대 필수 요건 중의 하나였지만 말이다. 나아가 인간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므로, 그 악마들은 이 사람을 조종하여 "무덤 사이에 거하게" 했고, 본인에게나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생을 지겨워하는 자이 삶을 살아야 했고,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

3. 그들은 대단히 "강했고 힘이 셌다." 통제할 수 없었고,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해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맨 것을 끊었다"(29절).

어떤 힘으로도 "다스릴"수 없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은 사탄의 정부의 앞잡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셈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들의 매는 끈을 끊어버리자." 이것이 그들이 하는 말이요, 심지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자기들의 가장 귀한 친구들에게도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구속도 받기 싫어하며, 단지 자기들의 자신의 유익이란 것 외에는 무엇이든 거부한다.

"그는 악마에게 몰려갔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정부 아래 있는 자들은 사람의 끈과 사랑의 유대에 의해서 "민첩하게 이끌린다." 그러나 악마의 정부 밑에 있는 자들은 "강포하게 몰린다."

4. 그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해 몹시 격노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지독히 무서워했다. 그들이 사로잡고 있던 " 그 사람이 -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한다 - 예수를 보자," 괴롭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진노를 무마하면서, 그를 "지극히 높으신 자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했다. 실상 그는 그들에 비하면 무한히 높으시고, 너무나 어려운 분이다. 그러나 그와의 어떤 동명이나 계약을 맺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그것만으로도 아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독적인 트집을 능히 침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말했다. 악마들은 그리스도에게 봉사를 한다거나 그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러나 그들은 그의 권능과 진노만은 무서워했다.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했다. 그들은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만 말했다. 지옥을 고통의 장소로 두려워하기만 하고, 천국을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서 동경하지 아니하는 자들, "그들이" 하는 말투가 무엇인가를 깨닫자.

5. 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의 "명령"과 "권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들도 그 점을 알았다. 그들은 eivj to.n a;busson - 즉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는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저갱이란 그들이 고통받을 곳이요, 그리스도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견제와 조정 아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주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 그는 그들을 모두 쇠사슬에 묶어두고 계신다. 그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향"으로 보내실 수 있다.

6. 그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제 이 가엾는 사람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을 알고는, "돼지의 무리"를 점령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32절). 처음에는 사람에게 들어가서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더니, 악마가 이제는 모든 피조물에게 그와 비슷한 저주를 가져왔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의 적대심의 연장의 한 발로로서, 그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게 되자 돼지라도 멸망시키려고 한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사람들의 재물-때때로 이것은 본문에서처럼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이간시키는 거대한 유혹이 되고 만다-을 해치고자 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허락을 내리면, 그 악마가 그 마을에 어떤 피해를 끼칠지를 알면서도, "그들에게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했다." 악마는 허락을 받자마자 "돼지"에게 들어갔다. 그러자 곧 돼지 때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했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로잡은 자들이 파멸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비로운 기적이다. 이런 경우나 다른 사례는 울부짖는 사자와 붉은 용이 삼킬 "것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7. 악마의 권세가 파멸되면, 그 악마에게 걸렸던 자는 회복되어 올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 통제를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악마가 나간 그 사람이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고 했다(31절). 악마의 권세 밑에 있을 때에는 예수의 "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 이것은 그의 "정신이 온전"하여졌다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점령하시면, 그는 우리의 자율적 통치를 보장하신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점령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자율적 통치와 자아의 향유를 몰수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권세를 전복시키자. 그리고 "예수"의 권세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드리자,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람에게서 군대 악마를 내쫓아 낸 기적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이 사건으로 자기들의 돼지를 잃은 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돼지 치던 자들이 성내와 촌," 즉 도시나 시골에 모두 "가서 고했다"(34절). 아마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를 조장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악마 들렸던 자들이 어떻게 고침받았든가"를 보고했다(36절). 즉 그들은 그가 악마를 돼지에게 보냄으로써 구원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돼지를 악마들의 수중으로 몰아버리지 않고는 그 사람을 악마들의 수중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는 식의 나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되어진 일을 보려고 나아왔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37절). 그들은 그 진상을 보고 놀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은 고통받던 자기들의 한 불쌍한 형제가 구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발광으로 인해 공포로 떨고 있던 그 지방의 해방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 사람의 발광은 실상 그 지방이 공안 방해였었다.

그리하여 "온 무리가 그리스도께서 더나가 주시기를 구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또 어떤 심판이 닥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잊으려 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 고아무도 자기들을 그에게 복종시키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는 배에 오르사, 돌아가셨다." 자기들의 돼지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구주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대한 자기들의 소망을 잃게 된다.



(2) 그 사건을 통해서 고쳐진 그 불쌍한 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남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있게 되기를" 구했다. "그로 인하여 악령과 병에서 고침 받은" 다른 자들도(2절) 역시 그리스도가 보호인과 선생이 되어 주기를 빌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찬양을 위해 살게 되기를 구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떠나 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에게로 돌아가서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오, 나의 영혼아, 이 죄인들과 함께 보이지 말지니라 !"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대동하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베푸신 그 위대한 일(기사)을 그를 아는 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시고자 하셨다. 그럼으로써 그가 과거에 그 지방의 짐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지방의 축복이 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기회가 되기 위하여는 우리의 영적 은혜와 위안이라는 만족까지도 부정해야 한다. 아마 그리스도는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돼지를 잃은 그들의 분노심이 조금 사라지면 그 기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을 자기 마을의 산 기념비로 삼고, 그 사건에 대한 조언자가 되어 달라고 하리라는 것을.

 

8:23 없음.

 

8: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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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야이로의 딸의 소생 (누가복음 8:40-56)

그리스도는 거라사인들에게 쫓겨났다. 그들은 그에게 싫증이 났고, 그래서 그가 없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호수를 건너서 "갈릴리인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은 "그를 영접했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 마음을 다해 "환영했다"(40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은혜를 "원치 않지만," 또 어떤 사람은 "원한다." 거라사인들은 모이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건너편에서 일을 마치시고, 이쪽으로 오셨을 때 또 다시 새로운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행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기회가 없어서 선행을 못하는 법이 없다. 가난한 자는 항상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 대목 속에 두 가지의 기적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그렇다. 그 하나는 야이로의 딸의 소생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증 앓던 여인이-예수께서 무리와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 고쳐진 사건이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렇다.

Ⅰ. 한 회당장이 그리스도에게 "공공연한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그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였고, 자기의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말씨는 대단히 겸손하고 경외에 찬 것이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지만,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다." 마치 예수가 자기의 "위에" 있는 상급자임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대단히 간곡한 간청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집으로"와 달라고 "간구했다." 믿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더구나 "말씀"만이라도 멀리서 한 마디 "해 주시면" 낫겠다고 하던 백부장 정도의 "생각"에도 못 미치는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셨다. 그래서 "그는" 그와 "함께 갔다." 강한 믿음이야말로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믿음이라도 결코 거부될 수 없다.

병든 자와 죽은 자가 있는 집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예수께서 가고 있는 도중, "무리가 그를 옹위했다." 어떤 자는 그를 보려는 호기심으로, 또 어떤 자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몰려 나왔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고 "선을 행하고" 있는 동안, 무리가 모여들어 법석을 떤다하여 불평을 하지 말자.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조용한 위치를 지키려 할 것이다.

Ⅱ.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그리스도에게 "은밀히 간청"한 일이 있다. 혈루증이 그녀의 몸을 좀 먹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재산을 좀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의 생활비를 의원에게 모두 써버렸다"(한글 개혁과는 다름 - 역주). 그러나 조금도 낫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다(43절). 그녀의 질병은 공공연하고 말할 수도 없는(여인으로서 수치스러워서) 그런 병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리 중에" 끼여서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이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를 "감추기"가 더욱 유리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대단히 "강했다." 그녀는 자기가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능히 고침을 받을 줄로 확신해, 그리스도를 마치 차고 넘치는 자비의 샘물이라 생각하여 자기가 치료약을 "훔칠"수 있을 것이요, 그는 그것을 "모르리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이리하여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도움을 입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잃어버림을 당하던" 자들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던 자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즉시 건강이 찾아온 것을 발견했다. 즉 자기의 병이 고쳐졌음을 알았다(44절).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안락한 교제를 나누듯이 또한 그들은 incognito─즉 은밀하게 그와 연락하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식물(食物)을 먹으며," "이방인은 개입하지 못하는" "기쁨을" 향유한다.

Ⅲ. 이 은밀한 치유가 "발각되었으니, 그것은 그 의원에도 영광이요 환자에게도 영광이었다."

1. 그리스도는 치유가 되었음을 알았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46절). 그리스도께서부터 나간 능력으로 고침을 받은 자들은 그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불평조로 말씀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이 일을 통해서 자기의 힘이 "약화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듯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한" 태도로 말씀하셨다. 자기에게서 나간 "능력"이 뭔가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쁨이지 조금도 인색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마치 태양의 빛과 열에서처럼 그런 일은 얼마든지 그의 능력에 환영받는다. 또한 그에게 능력이 부족하여 "그에게서" 나갈 능력이 모자라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넘쳐흐르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불쌍한 환자는 자기의 치료와 자기가 입은 은혜를 인정했다. "그녀는 숨길 수 없는 자기를 알고는," 그에게 "나아와 엎드렸다"(47절).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숨길 수" 없는 것, 곧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48절). "두려움"이 있는 곳에도 구원하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손을 댄 연고로 일어난 일을 사람들 앞에서 고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짐으로써 자기의 병이 나으리라고 믿고 그렇게 했더니,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고침 받은) 환자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남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3. 그 위대한 의원은 그녀의 나음을 확증해 주셨다. 그리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8절).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몰래, 계략을 써서 받아냈다. 그러나 그 속임수가 드러나자, 이삭은 그 축복을 의도적으로 비준해 버렸다. 그 축복은 "부정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얻어진 것이지만, "공명하게" 보장을 받았다. 여기에서의 치유도 그러하다. 야곱이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축복을 받게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 여인이 이미 고침을 "받았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고침을 받게 "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Ⅳ. 이것은 야이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으라고 하는 "격려"가 되었다. "비록 그의 딸은 이제 죽었고," 이 소식을 가져온 자들은 이 일로 "선생을 더 괴롭게 마옵소서" 하고 예수께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에 대한 열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대담한 용기도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뭔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하려는 자는 자기들이 생각하거나 그리스도께 구할 수 있는 일보다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에 베풀어주시는 위대하신 일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앓던 자가 죽었으니, 더 이상 기도를 할 필요나 어떤 수단을 강구해 볼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었지, 여전히 "믿기만 하면" 만사가 잘되리라는 것이다.

Post mortem medicus ─ 즉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post mortem Christus ─ 즉 사후에 그리스도를 칭함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Ⅴ. 그녀의 생명을 소생시킬 "준비"를 했다.

1. 그리스도는 증인을 "선정"하셨다. 그들은 일어날 기적을 목격해야 할 자들이다. "무리"가 따랐지만, 그들은 아마 무례하고 시끄러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많은 사람들을 신사의 집, 게다가 그 온 가족이 슬퍼하고 있는 그런 집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적합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자기의 기적이 그들의 검사를 받아 불합격할까봐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와 과부의 아들을 "다 보는 가운데서" 소생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제자들 중 3총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과 부모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 기적의 유일한 목격자들로 삼았다. 그들만으로도 진실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한 수효였기 때문이다.

2. 그는 애곡을 "저지" 시켰다. "그들이 그 아이를 위해 울며 애통했다. 아마 그 딸은

그 집안에서 매우 귀염받는 유명한 아이였고, 부모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까지도 매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도는 "울지 말라"고 명했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 아이의 경우는, 그가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아이는 곧 다시 생명을 찾게 되고, 마치 잠시 잠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자기의 친지들에게 되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이 이 말씀은,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대해 "희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란 그들에게는 잠시 동안의 "잠"이요, "세월의" 모든 "수고"를 떠나 "쉬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멀지 않아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부활은 "영원한 날의 영광"으로 다시 깨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애곡자들에 하신 말씀은 지극히 고무적인 말씀이었으나, 그들은 악하게도 가소롭게 여겼다. 그리고 "그 말씀을 비웃었다." 여기에 바로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가 잇다. 죽음을 "잠"이라고 했대서 비웃는 자들은 구약 성서에 무식한 자들이다. 그러나 "저" 악한 것에서 "이렇게" 선한 것이 나옴으로써 그 기적의 진실성이 증명되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그 아이의 소생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그들이 절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답변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자기를 해명했다." 그들도 만족했으리라. 그래서 다시는 그의 말씀을 비웃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모두 내어쫓았다"(54절:한글 개역과 희랍어 성경 Nestle 판에는 없음 - 역주).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의 증인들이 될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즐거워 그가 하신 "말씀"을 듣고 즐거워(비웃음을 말함 - 역주)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그가 한 "일"을 보고도 역시 웃음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당연히 쫓겨나야 한다.

Ⅵ. 그 여자아이는 "죽음 자들의 회중을 잠시" 방문한 후 생명의 세례로 되돌아왔다. "예수는 손으로 잡아 그 아이를 일으켰다"(마치 우리가 잠자는 아이를 깨울 때의 행동이다). 그리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셨다(5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의 손"은 "그의 말씀의 요청"에 상응하여, 그 말씀의 뜻을 현실화하였다.

또 본문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단지 암시적으로 말한 사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즉 "그의 영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도 다시 돌아와 그의 몸에 생명력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실재하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고, 그러므로 영혼은 불멸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죽음이란 것이 "주님의 등불"을 끄지 않으며, 오히려(빛을 가리어 일면만 비추는) "각등"속에서 그 등불을 끄집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아주 잘 지적해 주었다. 즉 몸의 kra/sij ─ 즉 기질 (temperament)이나 몸과 함께 죽은 무엇이 되돌아 온 것은 아니며, avnqupo,staton ti ─ 즉 어떤 본질적 실체 ─ 죽음 후에도 몸이 아니 그 어느 곳엔가에 실재하는 것 ─ 가 돌아온 것이라고 본다. 그 중간 시간에 그 아이의 영혼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영들의 아버지"의 손에 있었다. 영혼들은 모두 죽으면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녀(아이)의 영이 돌아오자" 그녀는 일어나서, 거동함으로써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또한 식욕이 있음을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아기가 새로 태아나듯이, 새로 소생한 자들은 그들이 "자라기 위해서 양식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 구절에, "그녀의 부모들이 놀랐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놀랐고, 그리스도를 비웃던 구경꾼들은 놀라지 않았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상히 여길 수 있다. 아마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널리 공포하기를 원치 않았던 이유가 될 것이다(물론 그들은 그리스도의 겸손성을 보여 준 한 실례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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