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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관한 기사는 여기에 언급된 것과 마태복음 기사(8:5 이하)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그리스도께 왔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그가 처음에는 장로 몇 사람을 그리스도께 보냈고(3절), 나중에는 벗들을 몇 사람 보냈다고 되어 있다(6절). 그러나 Quod facimus per alium, id ipsum facere judicamur ─ 즉, 우리가 딴 사람을 통해 하면 우리가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법칙이다. 백부장은 자기 대리인을 통해 하는 일을 자기가 한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이 자기 변호사를 통해 재산을 소유를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결국 몸소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마 8:13).

본문은 이 기적이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셨을 때(1절) 행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셨다. 누구라도 그에게 와서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노라"(요 18:20). 이제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칠 권세가 있음을 확실히 증거 하시기 위해 말씀의 고치는 능력과 효능에 대해 명명백백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있다. 병을 명하여 물리칠 정도로 자연계에서 당당한 주권을 소유하신 분을 은혜의 나라에서도 혈과 육에서 거슬리는 의무를 부과하고 최고의 형벌로 그 의무의 준수를 명할 수 있는 주권을 소유하신다. 이 기적은 가버나움에서 행해졌다. 그리스도의 크신 일들은 대개 이 곳에서 시행되었다(마 11:23).

Ⅰ. 백부장의 병든 종은 그 주인이 사랑하는 자였다(2절). 그 종이 근면과 신실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이나 자기 소유를 위해서 하듯 자기 주인과 그 이익을 위해 분명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주인의 존중과 사랑을 입게 된 것은 그 종의 칭찬할 만한 점이었다. 종들은 자기 주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연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종을 두게 되었을 때 그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던 것은 그 주인의 칭찬할 만한 점이었다. 거만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주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극히 훌륭한 종들에게 욕질하거나 때리거나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한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마땅히 그 종들에게 인자해야 하며 친절해야 하며, 그들의 복리와 위안을 위해 애써야 한다.

Ⅱ. 그 주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자 그에게 출원하기로 했다(3절). 주인들은 자기 종이 병들게 되면 그들을 각별히 돌보아야 하며 그대로 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 이 백부장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기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했다. 우리는 지금 신실하고도 열성적인 기도로써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께 의뢰할 수 있다. 또 우리 가족 중에 병든 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의사이기 때문이다.

Ⅲ.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을 그리스도께 보냈다. 그래서 그들로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간청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백부장은 자기가 직접 올 수도 있었지만 자기는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었으므로 그러는 것보다 유대인 장로를 보내는 것이 그리스도께 더 큰 경의를 표하는 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이시기 때문에 이방인인 자기와 담소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유대인들을 보냈다. 그는 유대인이 천국의 총애를 받는 백성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권세 있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신분이 높은 사자를 통해 그리스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발락은 발람에게 장로들(또는 귀족)을 보내었다.

Ⅳ.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진심으로 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바로(우리 성서:간절히) 구하였다"(4절). 그들은 백부장 자신은 들먹이려 하지 않은 것을 들어 그를 변호하면서 간청했다. 그들은 " 이 일을 해 주어도 될 자격이 이 사람에게는 있나이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그가 이 일을 위해 해 주셔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 자"란 말이다. 어떤 이방인이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인정된다면 그는 확실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다. 백부장은 "내가 주의 방문조차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마 8:8)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인 장로들은 그가 치료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이 겸손한 자는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잠 29:23).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칭찬하지 말라(잠 27:2). 그런데 그들이 특별히 주장한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진심으로 유대 민족과 종교가 잘 되기를 비는 자라는 것이다(5절). 그들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도 그 이방인 백부장에게 대한 편견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로마인이었고 군대의 장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 사실을 언급한다.

1. 그는 유대 백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라는 것.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이방인으로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는 아마도 구약 성서를 읽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백성보다 하늘의 총애를 더 받는 민족으로서 유대 민족을 아주 존중하는 마음이 들기 쉬웠을 것이다. 정복자와 권세자들 조차 피정복자와 자기들이 다스리는 자들에게 대해 호의를 품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2. 그는 그들의 예배에 대해 호감을 품었다는 것.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가버나움에 새 회당을 지었다." 그는 그들의 회당이 퇴락하였거나 백성을 다 수용하기에는 좁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새 회당을 지어 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신 유일의 참 하나님이시란 자기 신앙을 입증한 셈이다. 또 그는 다리우스왕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기도로 이득을 얻고 하는(스 6:10) 바램을 나타내었다. 이 백부장은 자비로 회당을 건축하였고 아마 그 곳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게으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건축에 동원했을 것이다. 경건한 예배를 위한 집회소의 건축은 매우 선한 사업이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런 종류의 선한 역사를 하는 이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이다(딤전 5:17).

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부장에게 아주 기꺼이 자비를 베풀려고 하셨다. 예수는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곧 그들과 함께 가셨다(6절). "그는 홀로 유대인의 구세주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구세주는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구주도 되시느니라"(롬 3:29). 백부장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7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의 방문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셨다.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Ⅵ. 백부장은 그리스도께서 황송하게도 자기 집에 오신다고 듣자, 또 다시 자기의 겸손과 믿음에 대한 증거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성도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접근으로 더 활기를 띄게 된다. 이에 그리스도가 그 집으로부터 멀지 아니하고 백부장이 그 기별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영접을 위해 집안을 정돈하기는커녕 친구들을 보내어 참신한 표현으로 그를 맞이하게 한다.

1. 그의 겸손한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나는 이방인이기에 그런 영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그가 권세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낮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 초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그를 높이 생가하고 있음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비록 사람들 중에서는 멸시받고 배척받으셨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를 존귀하게 할 줄은 알았던 것이다.

2. 그의 믿음의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주는 내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서도 저 전능하신 권능으로써 내 하인을 낫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주의 권능으로써는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게 없나이다(욥 42:2)." 이 백부장은 나아만의 망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한테로 나아와 서서 상처 위에 손을 흔들고 그래서 자기를 고쳐 주리라고 공상하였던 것이다(왕하 5:11). 백부장은 자기 직업에서 한 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이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 수하의 어느 병졸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어느 병사든 심부름을 보낼 수 있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쉽사리 질병을 명하사 물러가게 하실 수 있으시며 자기의 그 하인을 치유하라는 사명을 천사에게 주어서 보내실 수 있다고 믿고 있다(8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신다. 그는 원하신다면 자연의 운행도 바꾸실 수 있으시며, 자연의 혼란도 바로 잡으실 수 있고 인체의 생리적 붕괴도 고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그에게 추어졌기 때문이다(마 28:18).

Ⅶ.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면서 아주 기뻐하시고 더욱이 그가 이방인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백부장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영예롭게 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믿음을 얼마나 존귀하게 하셨는지 살펴보자(9절). 그는 놀란 자처럼 돌이키사 자기를 쫓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이따금씩 그들 앞에 제시되는 믿음의 큰 본보기를 관찰하게 하시고 주목하게 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특히 직업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만큼 열심히 따르지 않는 자들 중에서 그런 큰 믿음의 소유자가 발견될 때는 그렇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강한 믿음을 통하여 약하고 동요되는 우리 믿음을 부끄러워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Ⅷ. 치료는 즉각적으로 완전히 실행되었다(10절).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강건해지고 병색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종들의 고생하는 사정을 인식하실 것이며, 즉시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롬 2:11; 엡 6:9; 골 3:25).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이라고 하여 자기 은혜의 혜택으로부터 제외시키지도 않으신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될 때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서 발견될 보다 큰 믿음의 표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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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의 과부 (누가복음 7:11-18)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사를 읽게 된다. 그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장사하기 위해 운구되고 있던 중이었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마 11:5)고 하신 대답 중에 이것을 얼핏 기록하였다. 다음 사실을 눈여겨 살피자.

Ⅰ. 이 기적은 언제 어디서 행해졌는가? 그 시기는 그가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그 다음 날이었다(우리 성서: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고 계셨다. 그는 하루인들 놓쳤다고 불평할 만한 이유가 없으셨다. 그 기적은 나인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성 또는 읍의 성문에서 행해졌다. 그 성은 가버나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소이었다. 그 성은 아마 나이스(Nais)라고 불리우는 성과 동일한 성일 것이다. 제롬(Jerome)은 이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

Ⅱ. 이 기적의 목격자는 누구였는가? 이 기적은 가장 잘 입증된 셈이다. 왜냐하면 성문 안이나 성문 근처에서 두 무리가 마주쳤는데 이 기적은 그 두 군중의 목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한 무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와 백성들이었고(11절) 또 한 무리는 젊은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었다(12절). 이와 같이 그 자리에는 이 기적의 진실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있었다. 이 기적은 병치유보다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대한 증명을 보다 크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자연의 어떤 능력이나 수단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기적을 행하셨는가?

1. 생명을 되찾은 사람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생애의 시작에 요절한 젊은이였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진다(욥 14:2). 그 청년이 정말로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할 수 있었다. 이 일에 공모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관에 든 그 청년을 만나기까지는 그를 보지도 못하셨다. 그는 성으로부터 운구되고 있었다. 유대인의 매장지는 성 밖에 있었고,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 젊은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녀는 자기 노년의 지팡이로서 그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한 갈대로 나타났다. 아무리 좋은 상태에 있는 자라도 다 상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은 얼마나 무수하며 다양하고 비참한가 ? 세상은 얼마나 말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인가 ! 세상은 곡하는 장소(Bochim)이다. 우리는 자기 외아들에 대한 이 불쌍한 어머니의 슬픔은 매우 깊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독자를 잃은 슬픔은 최대의 슬픔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슥 12:10). 그 슬픔은 그녀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깊었다. 아들의 죽음은 설상가상이었으며, 그녀의 위안의 완전한 끝장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나오면서 그녀의 손실을 위안하고 그녀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소생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긍휼심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로써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견본을 보이시려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구속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일이다.

(1) 고난받는 자에게 대한 그의 긍휼심이 얼마나 따스한지 살펴보자(13절). 주께서는 묘지까지 아들을 따라가는 그 가련한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이 일에서 과부를 위해 어떻게 해주십사 하는 요청을 받지 않으셨다.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일 조차 요구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ex mero motu ─ 즉 순전히 그의 인자한 본성에서 그는 그 여자 때문에 아픔을 느끼셨다. 사정은 딱하였다. 그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일을 보셨다. 그의 눈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는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해 하는 자에게, 불쌍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왕왕 그의 인자하신 축복으로 영접하신다(시 59:10)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구원과 구속 역사를 떠맡으셨다(사 63:9).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자비와 그의 무한한 긍휼하심에 대해 얼마나 뜨거운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슬픔에 잠겨 있는 때에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과부들은 슬픔 가운데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역경 중에 있는 자기들의 영혼을 아신다는 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딴 사람은 이런 자의 슬픔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 외의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죽은 아들을 위해 울지 말 것은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과부에게만 특유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에게도 울지 않아야 할 공통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터무니없이 과도한 슬픔에 대해 동등한 힘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며, 영광 중에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살전 4:13).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라헬은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으며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렘 31:17).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기심을 생각하고 우리의 격정을 억제하며 진정하자.

(2) 그의 명령은 죽음조차 이긴다는 것을 살피자. "그는 가까이 오사 그 시체가 들어 있던(또는 올려져 있던)관에 손을 대셨다." 그는 그렇게 하셔도 오염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행동으로써 관을 멘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시사하셨다. 그는 죽은 청년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다. "그를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노라"(욥 33:24). 그러자 관을 멘 자들은 정지했다. 그것은 아마 관을 어깨로부터 땅에 내려놓고 만일 관이 닫혀 있었다면 그 뚜껑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는 권세를 가지고 죽음에서 놓여나게 하는 자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엄숙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청년은 죽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자였다(허물과 죄 안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것은 추호도 엉터리가 아니었다. 청년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그의 말씀에 수반하였던 때문이다. 모든 사람 특히 청년에게 대한 복음의 부르심은 "일어나라. 죽은 자 중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지배는 그 말씀의 즉효로 증명되었다(15절). "죽었던 자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스도께서 청년에게 생명을 넣어 주셨을 때 청년이 일어나 앉음으로써 그 사실을 나타나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를 얻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 청년이 살아났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는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 때마다 그는 기도와 찬미로 입술을 열어 주신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에게 자기 제자들처럼 자기와 함께 가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지 않으신다. 그는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셨으나, 자기를 섬기라고도 아니하셨다(비록 그 청년의 목숨까지도 살려 주신 은인이었지만). 더군다나 그는 기념물이나 전시품으로서 그에게 따라다니라고 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지도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어미에게 내어 주사 자기 어머니를 시중하는 효자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자비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 과부에게는 이 기적이 큰 자비의 행위였다. 이제 그 여인은 위로를 받았다. 그 위로는 여인이 고통 당한 시간에 비례하였다. 아니 그 고통보다 한층 더 많은 위로였다. 그 여인은 이제 자기 아들을 하늘의 특별한 총아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죽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즐거움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Ⅳ. 그 기적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다." 죽었던 자가 한 사람의 명령으로 대로상의 관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는 순간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 기적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크심뿐만 아니라 여호와와 그의 인자하심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이 이 일에서 얻은 결론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오랫동안 대망 하던 큰 선지자였다. "이와 같이 죽은 장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는 신적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던 대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이분을 통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눅 1:68 참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으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이 될 터였다. 죽었던 영혼이 복음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영적 생명을 얻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또 그 일을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문으로 간주해야 한다.

1. 이 기적에 관한 소문은 전국에 퍼졌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 곧 그가 큰 선지자라는 소문은 명성의 날개를 타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온 유대와 사방이라고 할 수 있는 온 갈릴리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은 거의 대다수가 들었지만 그를 믿고 그에게 헌신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한 소문은 들으나 그 영혼으로 복음의 냄새와 맛을 향유하지는 않는다.

2. 구체적으로는 이 소문이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주의 깊게 전달되었다(18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요한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였으니 이는 비록 그는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메여 있지 않다(딤후 2:9)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는 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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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보낸 세례 요한의 메시지 (누가복음 7:19-35)

세례 요한에게 관한 이 모든 담화는 요한이 사람을 보내서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물은 데서 발생하였다. 우리는 본문의 기사를 역시 마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마 11:2-19)

Ⅰ.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내린 답변이 나온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우리가 그리스도께 관해 물어봐야 할 큰 일은 그가 죄인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즉 기름 부으신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확실히 믿는다. 이 예수가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하고 딴 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메시야에게 대한 대망을 품고 그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2. 세례 요한 자신의 신앙 내지는 적어도 그 제자들의 신앙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때까지 아직 자신이 참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명은 그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유대 교회의 유력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그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힐 기미가 보이는 이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세라든가 장엄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그의 주변에서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권력과 위엄 속에서 출현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오실 메시야가 당신이오이까?"하고 물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더라도 딴 누구를 기다리라고 자기들에게 지시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예수께서는 자신의 칭찬과 자신의 정체에 대한 판정과 증명을 자기의 행한 일에 다 맡겨 버리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마침 그 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 치료를 행하셨다. "마침 그 시"란 말은 아마 그들이 예수와 단 한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가 ! 예수께서는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많이 고치셨고 악귀들린 자, 정신적으로 광증이나 우울증에 빠진 자들도 많이 고치셨으며 많은 소경도 보게 하였다. 그는 많은 치료를 베푸셨으므로 속임수로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자 예수께서는 그들더러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고 말했듯이(요 7:31), 쉽사리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 이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설명이기도 했다.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을 치료하고 흑암에 앉은 자에게 빚과 광명을 주며 악령을 억제하고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수께서 백성의 신체에다 바로 이 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로 이 사람이 백성의 영혼에다 그런 일을 행하려 오신 분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연계의 이런 기적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은혜계의 기적까지 첨가시키신다(22절). 그들이 알기로는 이 일은 메시야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란 가난한(또는 겸비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사 61:1),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생명(또는 영혼)을 구하게 하려고(시 72:13)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너희는 메시야의 특성과 그가 오시는 그 의도에 보다 완전히 부합된 다른 이를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4. 예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이토록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자기에게 편견을 품을 우려가 있다는 암시를 그들에게 주신다(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23절). 현세에서는 우리는 심리(審理)와 유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상태라면 충분한 변론과 이의 제기가 있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진리의 탐구에 정직하고 무사공평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진리를 확증시켜 줄 만한 충분한 변론이 있듯이, 부주의하고 세상적이며 육욕적인 자에게 진리를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반대도 있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으신 교육이라든가 그의 갈릴리 거주라든가 비천한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의 빈궁, 보잘 것 없는 추종자들 등등, 이런 것들은 많은 자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으로도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고 마음씨 고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거침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다는 표시이다. 그런 자는 참으로 복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Ⅱ.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대해 던지신 극찬이 나온다. 요한의 사자들이 있을 때에는 찬사를 늘어놓지 않으시다가 그들이 떠난 후에(24절)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신 것은 백성들에게 요한의 사역으로 그들이 이익을 누렸고 그의 투옥으로 그 혜택을 상실하게 됐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토록 많은 말과 그토록 크고도 전반적인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던 그는 과연 누구였는지 그들은 이제 고찰해야 했다. 그리스도가 "자 !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1. 그는 확고부동하고 "시종일관한" 자였고 끈기 있고 지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먼저 이쪽으로,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뀌는 그런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아니하고 반석처럼 견고하였다. 만일 그가 갈대처럼 헤롯에게 굴복하고 궁중의 환심을 샀더라면 그는 그곳의 총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 중 어느 것에도 동요되지 않았다"(흠정역, 행 20:24).

2. 그는 견줄 데 없는 "자기 부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금욕과 세상 멸시의 큰 표본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아니었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의욕과 식생활은 그것에 준하였다. 그는 신체를 장식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몸을 억제하고 복종시켰다.

3. 그는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그의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사명은 인간에게 속하거나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제사장이었지만 아무도 그점을 주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지자로서의 영광이 그의 제사장 된 존귀를 가리웠던 때문이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26절). 그는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자였고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으니, 구약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 있는 자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밖에 계신 분으로 말했던 때문이다.

4. 그는 메시야의 향도관이자 선구자였고 그 자신도 구약에 예언된 인물이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할 것이다"(말 3:1).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셔서 백성들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현세적 군왕의 특성을 띠고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일 메시야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면 그의 사자도 화려한 장군의 차림이나 기치를 든 전령의 호화스런 모습으로 나타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서 보내진 사자가 마음과 생활의 회개 그리고 개선을 선포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적 성질에 대한 충분하고도 분명한 전조가 된다. 이와 같이 맞아들인 그 나라는 확실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가 넣은 자 중에 지극히 큰 자였고 왕궁 귀족보다 더 존귀한 자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였다. 세례 요한이 전파와 세례에 착수했을 때 그 나라는 얼마나 귀중한 자가 그 안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주께로 말미암아 그의 일에 "숙달되고 신실하도록" 자비를 얻은 복음의 사역자는 지극히 작은 자였다. 복음의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 전파한 이들은 극히 초라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훌륭한 통지 가운데 고용된 자들이기에 세례 요한보다 명예로운 직분을 맡은 자였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자기보다 앞서 간 극히 큰 자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 시대에 살고 있는 자는 책임질 일이 더욱 더 많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당한 힐난을 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받지 않은 세대였다.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동안에 어떤 경멸을 받았는지 설명하신다.

(1) 요한에게 존경을 나타내 자들은 평민층에 불과했다. 상류계급의 인사들의 눈에는 이들 하층민이 요한에게 명예라기보다 수치로 비쳤다(29절). 백성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그들에게 대해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하였다.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품행이 나쁘거나 부도덕한 자로 간주되었으므로 세평이 좋지 않은 자였다. 이런 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서 영광스런 기념비적 존재가 되긴 했으나 세상 사람의 눈에 요한을 큰 자로 비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개심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지혜를 의롭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로써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란 것을 나타내었다. 그 일이 남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들에게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2) 교회와 국가의 큰 자들, 곧 요한에게 이 세상적인 신망을 다소 보내려 했던 그 정중한 정치가들은 요한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온갖 굴욕을 퍼부었다. 실로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경건한 신앙과 기도로 명성이 자자하던 바리새인들과, 학식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하던 율법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헛되이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들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친절한 의도를 지니셨고 그로써 그들의 구원을 도모하셨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의도에 응하였더라면 그것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됐을 것이고 또 영원히 자기들을 위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적합하도록 해 줄 규율을 거절함으로써 자기들에게 주려고 의도된 이익을 그르쳤고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문에 빗장을 걸었고, 스스로를 메시야의 나라에 차단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 나라에서 배제 시켰을 뿐더러 남까지도 방해하고 가로막았다.

2. 그는 그 세대 사람들의 이상한 패역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은 요한이나 예수께 험담을 퍼부었고 편견을 품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31절) 이것은 이런 말씀이다. 이들의 불합리성을 충분히 나타내려면 내가 무엇을 생각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다. 장터의 아이들은 진지한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다 취해 보신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의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장난이라도 하고 계시는 듯이 그 모든 조치를 농담으로 일축해버리며 하나의 구경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많은 자들이 이 때문에 파멸을 당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 영혼의 일에 성실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산헤드린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단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을 뿐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놀이에 무심하듯 영원한 평강에 속하는 일에 관심하지 않았다. 눈멀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과 헛됨은 얼마나 놀라운가 ! 주님께서는 안심하고 있는 그들을 일깨우신다.

(2) 그들은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계속 찾아냈다.

[1] 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근엄한 사람이었으며 고독하게 지낸 적이 많았다. 그는 겸허하고 착실하고 극기하는 자였기에 그런 자로 경모 받아야 마땅했고 사상가나 명상가로서 그의 말은 경청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칭찬이 되어야 할 이런 점이 도리어 그의 비난으로 변해 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남들처럼 자유롭고, 풍성하고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그가 귀신들렸다고 한다"(33절)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귀신들린 자만큼 광포하진 않으나 그와 같이 침울하고 귀신 든 자라고 말하였다.

[2] 우기 주 예수께서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 처신을 하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셨지만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셨다. 그는 세리가 자기에게 명예가 되지 않는 줄 아시면서도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 양자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바램에서 그는 그들과 흉허물없이 사귀셨다. 이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상이한 기질과 성미를 소유할 수도 있으며 매우 다른 전도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심은 그로써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다(고전 12:4-7 참조).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모든 모든 딴 사람의 표준으로 내세워서는 안되며 자기들과 꼭 같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했고 그리스도는 그를 칭찬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반대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공동의 적은 이 두 분을 다 비난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여 그를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먹고 마신다고 하여 예수님을 그 품행이 타락된 자로 몰아쳤던 것이다. 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혹평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는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악인들의 원한을 살펴 보라.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와 고백자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극히 나쁘게 해석하지 않는가 ! 그들은 이로써 복음과 복음 전파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남은 무리의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에 몰두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지혜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혜의 안내와 통치에 복종하게 될 것이며, 자기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법으로서도 지혜를 옳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법이 그들에게는 유효할 것이며 이로써 그 방법이 잘 선택됐다는 것도 나타날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전부가 다 이의 없다. 그들은 모두가 다 지혜의 하나님께 취하시는 은혜의 방법에 만족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 하여 그것을 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7:20 없음.

 

7:21 없음.

 

7:22 없음.

 

7:23 없음.

 

7:24 없음.

 

7:25 없음.

 

7:26 없음.

 

7:27 없음.

 

7:28 없음.

 

7:29 없음.

 

7:30 없음.

 

7:31 없음.

 

7:32 없음.

 

7:33 없음.

 

7:34 없음.

 

7:35 없음.

 

7:36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7:36-50)

이 기사의 내용이 언제 어디서 발생한 일인지는 미상이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 서술에 있어 딴 복음서 기자들보다 시간적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 기사는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으심에 즈음하여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 교제하신 것이 오직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는 걸 나타낸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가까이에 용납하신 자들은 개선되었거나 그럴 가망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 이토록 큰사랑을 나타내 보인 이 여인이 누구였는지는 나오지 않으나 흔히는 막달라 마리아라고들 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럴만한 근거를 성서 안에서 찾아보지 못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눅 8:2; 막 16:9).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께 정중한 환대를 베풀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롭게도 그 대접을 받아들이셨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셨다"(36절).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그런 귀빈을 자기 식탁에 모시면 그의 명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와 동석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인하려 들지 않았던 때문이다(39절).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를 응락하시고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소망에서 세리들과 자유롭게 동석하셨듯이 바리새인들과도 꼭 같이 자유롭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 대해 편견을 품은 자들을 가르치고 설득하기에 충분한 지혜와 은혜가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그런 자들과의 교제에 과감히 진입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가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불쌍한 죄인이 회개하면서 그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는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창기였으며 불명예스런 여인이었다. 아마 그런 여인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한 인생 행로에서 돌이킨 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식으로 감사드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발을 씻기고 약간의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그녀는 그럴 목적으로 이 향유를 갖고 왔던 것이다. 당시 식탁에 앉는 방식은 발을 부분적으로 뒤에다 놓는 식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그의 뒤로 와서 여종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종의 직분은 손님의 발을 씻기고(삼상 25:41). 향유를 준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선한 여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1. 죄에 대한 그녀의 깊은 희오. 그 여인은 그리스도 뒤에서 울며 서 있었다. 그 여인의 눈은 죄의 입구와 출구였었으나 이제는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 얼굴은 과거에는 아마 화장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예쁘게 닿아 단장을 했던 그녀의 머리털이 이제는 수건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전에는 죄 때문에 슬퍼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 기회를 얻게 되자 그 상처의 출현은 새로운 것이었으며 그녀의 슬픔도 새로운 것이었다. 침회자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순간에 저들의 경건한 근심과 죄악에 대한 수치감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 때에는 그가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겔 16:63).

2. 주 예수께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그녀의 사랑이 많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 47절). 그녀가 그의 발을 씻긴 것은 극히 보잘 것 없는 직분이라도 주님만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표시였다. 아니, 그녀는 그리스도의 발을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그의 발을 닦았다. 그녀는 자기가 구세주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도취경에 빠져있었다. 그분은 그녀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기에 너무나 무가치한 자처럼 그의 발에 입맞추었다. 사랑하는 자는 입맞춤을 열망한다(아 1:2). 그것은 애정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예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자답게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겼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의 발을 씻길 물이 나올 것이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의 발을 닦는 수건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이로써 그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녀가 그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즐거움의 기름으로(히 1:9) 그의 머리에 부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라면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Ⅲ.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회개자가 표한 경의를 용납하셨다고 하여 그에게 못마땅한 생각을 품었다. "그 바리새인은 (자기 생각을 그리스도께서 아신다는 걸 거의 생각지 못하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요, 이방인 여인이며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인 줄 알 만큼 지식이 많고 따라서 그토록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걸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결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런 품성을 가진 자가 선지자라 할 수 있는가? 그의 마음은 그걸 보고도 동요치 않는가?"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교만하고 편협한 정신의 소유자는 타인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살피자. 만일 그녀가 시몬 자신을 만졌다면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행한 일로 그녀를 옳다고 인정하시며 그녀의 행위를 용납한 자신도 의롭게 여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는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답을 주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40절).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의 식탁에서 친절한 접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시자 그를 책망하셨고 그의 죄를 용납하시고자 아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반대하실 일이 있는 자에게 이르실 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영이 꾸짖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몬은 기꺼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려 한다.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예수를 선지자라고 믿을 수 없었다(그는 선지자만큼 엄하고 정확하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생님이란 칭호를 예수께 바칠 수 있었다. 그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면서 주가 이르신 일은 행치 않는 자들 중에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하는 가운데 이렇게 이치를 따져 설득하신다. 즉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녀는 사함 받은 죄인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녀가 그리스도께 행한 것은 구주께 대한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사함을 얻었다면 딴 사람들보다 구주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녀는 남들보다 자기 사랑에 대해 더 큰 증거를 보여야 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었고 자기 죄가 용서함을 얻었다는 의식에서 발로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열납하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었고 바리새인이 그 일에 역정을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가서 딴 것도 의도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였다. 아니, 그는 사실상 그 점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선지자 이상 가는 존재임을 나타내신다. 그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께서 회개하여 사함 받은 죄인이 애정과 감사의 고백을 해서 마땅하다. 그의 대답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게 된다.

1. 예수께서는 비유로써 시몬에게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을 때 보다 큰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과 보다 큰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다 게으른 자였는데 하나는 다른 한 사람보다 그에게 열 배나 더 많이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빚 진 사람은 아주 마음 가볍게 그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법에 걸어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그들과 그 자식들을 팔도록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고문하는 자에게 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자 빚진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러니 이 중 어느 사람이 그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이 얘기가 바로 바리새인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비유였다. 이에 그 바리새인은 "틀림없이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이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바리새인의 판단은 옳았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준 자 사이의 도리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탕감을 받고 또 탕감 받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이 탕감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1) 빚진 자가 만일 갚을 게 있으면 빚을 준 자에게 그걸 변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라곤 없으며 자기 소유라고 해도 편안히 누릴 수가 없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서 그 빚진 자로 하여금 부채를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면 빚을 준 자는 그 채무자에게 엄하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냉엄한 법에 의지할 게 아니라 그의 빚을 거저 탕감해 주어야 한다. Summum jus est summa injuria ─ 즉 가혹하게까지 적용되는 법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무자비한 채주는 마태복음의 비유(18:23 이하)를 읽고 전율해야 할 것이다. 자비함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달은 빚진 자는 그에게 아주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그가 달리 보상할 수가 없는 경우라면 그 채권자를 사랑하기도 해야 마땅하다. 일부 성실치 못한 채무자는 자기들 때문에 손해를 입는 채권자에게 고마워 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는다. 채권자가 불평을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채무자들은 채권자에게 좋은 말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손해를 입는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자유가 있는 법이다. 이 비유는 창조주(Creator) 하나님을 채권자(Creditor)으로 묘사하고 있고(또는 오히려 주 예수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말하는지 모른다. 죄인들은 채무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죄는 빚이며 죄인들은 전능자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은 율법의 교훈에 대한 순종의 빚이다. 그걸 갚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서 벌을 받기 쉽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물어야 할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주 여호와의 물품을 써버림으로써 빚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입힌 피해와 그에게 대한 우리 의무의 불이행을 들어 우리를 고발하신다.

[2] 어떤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그 부채가 더 많다. "하나는 오 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 십 데나리온을졌다." 그 바리새인은 빚이 덜한 자였지만 그도 역시 빚진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빚이 많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꾸어준 분이었다(눅 18:10, 11 참조). 이 여인은 추문과 악명이 높은 죄인으로서 큰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그들 스스로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되고, 어떤 죄인들은 여러 가지 약화시키는 형편 때문에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된다. 즉 이를테면 그들은 극히 노골적으로 괘심한 범죄를 행한 자이며 더 큰 빚과 지식에 대적하여 범죄하고 보다 많은 확신과 경고, 보다 많은 자비와 은총의 방편에 거역하여 죄지은 자들이다.

[3] 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고 타협할 근거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부채는 막대한데 우리가 지불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은과 금은 우리 빚을 면제하지 못할 것이며, 희생 제물이나 제사로도, 일 천 마리의 수양으로도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도 갚지 못할 빚이며, 장래에 회개하고 순종하더라도 갚지 못할 빚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매인 빚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4] 인간의 부채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조건 위에서 탕감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솔직히 불쌍한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하신 것으로 선포하셨고 기꺼이 탕감해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셨다. 그의 아들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위해 사유하심을 갚아주고 사셨으므로 그의 복음은 빛의 탕감을 그들에게 약속하며 그의 성령은 그걸 인치고 보증하시며 그들에게 그 위로를 주신다.

[5] 자기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자기를 사유해 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용서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그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하기 전에 더 큰 죄인이었으면 죄인이었을수록 그들은 나중에 더욱 더 훌륭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그들의 마음은 순종하는 데 더욱 많이 경주되어야 한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로 되었을 때 그는 더욱 수고를 많이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에게 대한 그 바리새인과 죄인의 상이한 태도에다 적용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선지자로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를 의인(義認)된 상태에 있는 자로 인정하시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적게 탕감함을 받긴 하였지만 탕감을 받은 자, 용서를 받은 자로 인정하려고 하시려는 듯하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가운데서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얼마간 표시한 셈이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인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살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여인은 탕감함을 많이 받은 자이다. 네 판단대로 하자면 이 여인은 너보다 많이 사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너는 이 여자를 멸시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 잘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내가 네 호의는 받아들이고 이 여인의 호의는 거절해야 하겠느냐?"라는 말씀이다.

(1) "너는 내가 들어 왔을 때 내 발을 씻기기 위해 물대야를 들여오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내가 걸어서 피로하고 발이 더러워졌을 때 네가 물을 떠오라고 하여 내 말을 씻겨 주었더라면 그것은 나를 무척 상쾌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 많은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내 발을 눈물로 적셨다. 그 눈물은 내게 대한 애정의 눈물이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한 큰사랑의 표시로 자기 머리털로써 내 발을 씻겼다."

(2) "너는 내 볼에 입맞추지도 않았으나(이것은 친구에게 대한 진심의 애정어린 표현이다) 저는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함으로써(45절)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타냈다."

(3) "너는 으례껏 내놓는 보통 기름도 내 머리에 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옥합에 든 보배로운 향유를 내 발에다 부었다(46절) 그녀는 이토록 너를 능가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열심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적 수고와 지출을 두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진하여 그런 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 않으며 값싸고 편안한 종교에 안주하려는 결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험구를 침묵시키셨다. "내가 시몬 네게 이르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많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있다. "그러나 저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합당치 못한 것은 아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해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러므로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로 보아 그녀의 사랑함이 많았다는 것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녀가 그걸 위로로 깨달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너와 같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네가 하듯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대한 바리새인의 사랑이 너무나 적어 정말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의심할 만하다는 것을 바리새인에게 시사하셨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의 죄는 비교적 적기는 하였으나 그 적은 죄의 사함을 정말 받았는지도 그가 의문시할 만하였다. 우리는 보다 큰 죄인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자비를 얻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원한을 갖거나 그리스도께 불평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는 대신에 그들의 본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들 자신이 참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불안을 일소시키셨다. 그 여인은 아마 그 바리새인의 인정없는 처신에 풀이 꺾였을 것이지만 도망칠 정도로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네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우리가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많이 표명하면 할수록 우리 죄의 용서하심에 대한 증거를 더욱 분명히 갖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시는 은혜의 행위를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됨으로써인 때문이다. 그 여인이 "네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듣고 해방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기 수고와 비용에 대한 보상을 아주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녀가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예방책이 되었다.

(2)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신다(49절)고 하시고 죄를 소멸한다고 선언하시데 대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힐난한 자들이 있었다(마 9: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신 말씀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는 이전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죄사할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험담에 개의치 않으려고 하셨다. 여기서는 그가 죄를 사하시는 일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신다. 그것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는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말하기를 즐겨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절). 그녀가 자기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죄의 사함에 대한 그녀의 위로를 확증하고 배가 하는 말씀이었다.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이 모든 표현은 믿음의 결과요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온갖 은혜의 믿음은 하나님을 극히 존귀하게 해드리듯, 모든 은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는 믿음을 또한 존귀하게 하신다. 자기 믿음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평안히 갈 수 있으며, 즐거워하면서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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