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적합한 자비 행위 (누가복음 6:1-11)
우리는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도 이 두 기사를 봉독하였는데(마 12:1; 막 2:23; 3:1) 이 두 기사가 한데 취급되고 있는 것은 양자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발생하였더라도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몸의 안식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었고 율법을 제공하신 분이 의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엄격성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옳다고 인정하신다.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을 위해 꼭 해야만 할 일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시장할 때 밀 이삭을 자른 일이었다. 딴 복음서 기자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본 기사에는 날짜가 나온다(흠정역에는 "첫 안식일이 지난 둘 째 안식일에"로 되어 있음, 역주). 이 일은 첫째 다음의 둘째 안식일에 있었다. 휘트비(Whitby) 박사가 생각하듯 이것은 무교병절 제2일 뒤 첫째 안식일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무교병일로부터 계산하여 7주 후를 오순절로 지켰다. 그들은 첫 주를 Sa,bbaton deuteroprw,tsn 둘째 주를 deuterodeu,teron 등등으로 불렀다. 우리를 이런 문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하신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이런 상황의 묘사는 그 안식일에 특별한 어떤 영예가 걸린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죄는 더욱 가중된다고 할 것이다.
또는 이것은 그 때가 만물을 바친 뒤 첫째 안식일이므로 단지 곡식이 거의 여물어가는 시기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언제든지 특히 안식일에는 음식에 까다롭거나 별미를 찾아서는 안 되며 극히 손쉽게 얻은 것이라도 먹고 감사해야 하였다.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1절). 그들의 식량이 된 것은 아주 소량이었고 그나마도 맛없는 것이었다.2. 자신의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면서도 극히 무죄하고 악의 없는 남의 행동을 혹평하는 데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가 허다하다(2절).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언쟁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딴 모든 날보다 안식일에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게 그들의 소행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이며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지 못할 링이라고 말하는 많은 일로서도 그들을 인정하시고 용납하실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재판관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언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4. 의식에 관한 약속은 꼭 필요한 경우 면제될 수도 있다. 제사장의 전용물인 진설병도 다윗이 섭리에 의해 궁지에 다달아서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는 예외적으로 그에게 허락되었던 것이다(3, 4절).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규례도 이처럼 보다 큰 선을 위해서 방치되었다면 인간의 전통이야 말해 무엇하랴 !
5.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특별히 꼭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용인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유를 방종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양보와 겸양을 오용하여 그 날의 일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안식일에 필수적인 일은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지만 그 날이 자신의 날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주님께 대한 봉사와 주님을 존귀케 하는 데 보내야만 한다(5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구속주의 나라에서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된다. 어떤 점에서 안식일의 성격은 변경되었다. 안식일이 과거에는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날이었듯이(렘 16:14, 15) 주의 날은 주로 구속주를 영화롭게 하도록 성수 된다. 이것을 상징하여 안식일은 주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그렇다고 해서 옛 이름을 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주인은 여전히 안식의 날이므로) 새 날 즉 주(週)의 첫째 날로 옮겨지게도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타인을 위해 자선 행위를 하시는 가운데 자기를 옳다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셨다. 기회 있는 대로 경건한 집회를 통해 안식일을 성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안식일에는 성회가 있어야 하며 우리는 아주 충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2. 안식일에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교훈을 주고받는 것은 안식일과 회당에 매우 어울리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기회를 이용하셔서 가르치셨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들도 가르치셨다.
3. 그리스도의 환자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 중 하나였다. 그 오른손이 마른 사람은 그리스도께 배우려고 왔다. 그가 그리스도께 고침을 받으리란 기대감을 품고 왔는지의 여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치유함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꺼이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리스도의 훌륭한 교훈을 듣고 그의 영화로우신 기적을 목격한 자 중에는 오로지 그를 흠잡으려는 의도만 지닌 채 온 자도 더러 있었다.(7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도량이 큰 논적답지 않게 예수께 따끔한 경고도 해 주지 않았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실 때 그들은 그것을 제 4 계명의 위반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상 정당한 경고를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여지껏 아무도 그 같은 치유를 함 적이 없으므로) 따라서 정죄받을 성질의 일이 아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야비하게도 사자가 먹이를 노려보듯 그가 안식일에 병을고치는지 엿보았으니 이는 예수님을 송사할 빙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기소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혜로운 의도를 대항할 줄을 뻔히 아시는 자들의 면전에서 자기의 은혜로운 목적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시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셨다(8절). 그는 그들의 잘못과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병자의 믿음과 대담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일어나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5. 예수께서는 자기의 논쟁자들에게 친히 호소하셨다. 그는 안식일에 사람의 선행을 금하는 것이 제 4 계명의 의도인지 아닌지 그들의 자연스런 양심의 확신에다 대고 호소하셨다. 더욱이 그들이 손수 할 일로 찾아내고 기회를 얻으며 다른 때로 미룰 수 없는 선행인 경우에는 말이다(9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핍박하는 자들만큼 엉터리이고 비이성적인 악인도 없다. 그들은 선을 행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려고 궁리하는 자들이다.
6. 그는 불쌍한 자를 치유하시사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의 바른 쪽 손을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셨다. 그는 자기의 대적들이 그 일에 성낼 것이며 그것을 기화로 자기를 칠 것이란 사실도 아셨다(10절). 우리는 억압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의무나 유용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자.
7.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이 일로써 그에게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 올랐다(11절). 그들은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란 깨우침을 얻어야 마땅했다. 그들은 인류의 은인 되신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기는 고사하고 그들은 분기(원의:미침)가 가득하였고 그를 놀라게 하여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백성의 애호가 증가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실패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성이 났고 민중에게 성이 났으며 자기 자신에게 성이 났다. 분노는 잠시 마치는 것이며, 악의는 오래 미치는 것이다. 무력한 악의는 특히 실망을 주는 악의이다. 이들의 악의가 바로 그러했다. 그의 기적 행사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으며 그를 거꾸러뜨릴 딴 방도가 없는지 모의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아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할만큼 악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것을 견딜 만큼 참을성이 있다는 데 경악함직도 하다.
열 두 사도를 택하심 (누가복음 6:12-19)
이 문단에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와 "자기 가족" 중에 계신 주님과 "공중(公衆)"속에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 세 가지 행동 속에서 그는 한결같이 그 답게 행하신다.
Ⅰ. 우리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12절). 누가복음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 나셨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은밀한 중에 드리는 기도의 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은밀한 기도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도가 없이는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기 대적들이 분기가 가득하여 자기의 처치 방법으로써 의논하고 있던 " 그 때에" 그는 "기도하러" 가셨다. 이는 다윗의 예표에 응하고자 하심이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는 "산으로 가사 기도하셨다." 산에서는 그가 아무런 소요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홀로 있을 때보다 고독한 때는 없다. 혹자가 생각하듯 독실한 자들이 은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이 산에 편리한 장소가 세워져 있었다거나 h` proseuch/| tou/ qeou/(하나님께 대한 기도)란 말이 "기도원" 또는 "기도 장소"를 의미하는지의 여부는 매우 불분명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는 은밀한 것을 원하여 산으로 가셨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남이 잘 찾아오는 곳에는 가려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2. 그는 혼자서 "오래도록"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골방에서 반시간만 기도에 소비해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계속해서 명상하시고 은밀히 기도하셨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할 일이 매우 많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크게 기뻐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에 몰두하게 되는 때도 있다.
Ⅱ.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직계 수행원들을 지명하시고 "자기 가족"으로 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의 가르치심을 변함없이 듣는 고정 청취자가 되고 기적의 목격자가 될 터였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로 파송 될 자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상에 심을 자들이었다(13절).
그가 "밤이 맞도록 기도를 계속하고" 나서 "날이 밝았을 때는" 누구나 그가 휴식을 취하시고 잠깐 잠을 처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는 누구나 일어나는 때가 되자 곧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의 큰 관심사는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선한 의무의 끝냄을 또 다른 선한 의무의 시작으로 삼는 것이어야만 한다. 사역자들은 평범한 "의식" 보다는 "기도"로써 성직에 위임되어야 한다.
사도의 수는 열 두명이었다. 여기에는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사도의 이름을 대하는 것은 세 번째인 데 그 배열 순서는 각기 다르다. 이것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에게 우선 순위에 예민하지 말며 우위를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말고 더욱이 우선권을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인색하고 남보다 우위에서는 일은 눈여겨 볼만한 가치가 없는 일로 간주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라고 불리던 자가 마태복음에서는 별명이 다대오라고 하는 레뷰스(Lebbeus)로 불리웠고(우리 성서와 다름) 누가복음서는 야고보의 형제(우리 성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유다는 유다 서신의 필자와 동일인이기도 하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가나안인이라고 불리던 시몬이 여기서는 젤롯(zealots:열혈당원의 뜻)이라 하는 시몬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명칭은 아마 신앙에 대한 그의 크나큰 열심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열두 명의 이름에 대해서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신복들에게, 대해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 10:8)라고 한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말할 만하다. 이들만큼 특권을 받은 자도 없었다. 단 그들 중 하나는 마귀가 들어 있었고 배반자로 판명되게 된다(16절). 그러나 그를 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속지 않으셨다.
Ⅲ. 우리는 "공중"속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고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시간을 할애하신 두 가지 큰 사업이었다(17절). 그는 열 두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 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그는 자기에게 호소하러 온 자들을 즉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곧 그 주위에는 제자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늘 그리스도를 시종하던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는 많은 무리도 즉시 모여들었다. 이들은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으로부터 뒤섞여서 온 혼합 군중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이 계신 갈릴리 지역까지는 수십 마일의 거리였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유명한 랍비 곧 크게 이름을 떨치고 세도가 당당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다. 또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자들도 있었다. 거기에 살던 자들은 대개 상인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사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심취한 자들이 꽤나 있었다. 그토록 모든 지역에 산재한 자들이었다. 여기 저기에 하나씩 퍼져 있다가 모여든 것이다.
1.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고,"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가까이에서 훌륭한 설교를 듣지 못하는 자들은 설교 듣지 않고 지내느니보다 멀리 여행해서라도 듣는 게 더욱 낫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러 먼 길을 가는 멋과 이를 위해 딴 사업의 길에서 나오는 것이 그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2. 그들은 예수께 "병고침을" 얻으려고 왔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셨다." 어떤 자는 신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또 다른 자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또 딴 사람들은 귀신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다 그리스도께 나옴으로써 고침을 받았으니 그는 병과 마귀를 제어할 능력이 있으셨고 원인뿐만 아니라 결과도 지배할 능력을 갖고 계셨다(17, 18절). 아니, 호소할 만한 특별한 질병이 없던 자들도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막 5:30)을 맛보고 그것이 자기들의 신체적 건강과 원기를 크게 회복시키고 아주 공고히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던" 때문이다(19절). 병든자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도 그랬다. 그들은 전부가 예수님 때문에 이모저모로 더 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낫게 하셨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가 누가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은혜가 충만하며 그에게는 낫게 하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 능력은 그로부터 즉시 나오려고 하며 그것은 모든 자에게 충분하며 각자에게 충분하다.
축복과 화 (누가복음 6:20-26)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실천적 담화가 시작된다. 이 말씀은 본 장(章) 끝까지 계속되며 그 대부분은 산상 수훈에 나온 것이다(마 5, 7장). 혹자는 이 설교가 다른 장소와 시간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꼭 같은 것을 설교하신 딴 사례도 있고 또 각기 다른 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산상 수훈을 복음서 기자가 단축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 또한 단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작과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마태나 누가에도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기사가 곧 뒤따라 나오는데, 그것은 긴요한 게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Ⅰ. 세상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지만 "고난받는 성도"는 "복된" 사람이라고 축복이 선포되고 있다(20절).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셨다.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제자의 허다한 무리도 보셨다(17절). 그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평지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뒤 그는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는 권세 있는 자답게 거기에 앉으셨다. 그들은 그리고 그에게 나아왔고(마 5:1) 그는 그들을 향해 말씀을 하셨으며, 그 말씀을 그들에게 적용하셨고 말씀을 그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말씀을 진리로서 공언하셨으므로 그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복음의 교훈을 스스로 취하여 그 교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은 복음의 약속을 스스로 취하여 그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 말씀에는 특히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자면 만나게 될 곤경과 난관을 빗대어서 그들을 격려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너희는 가난하다. 너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나를 쫓았으며 나와 함께 연보로 살아가기에 만족하는 자들이다. 너희는 나를 섬기면서 결코 세상의 영달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다. 너희는 가난한 사람처럼 열심히 일해야 하며 모질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가난 속에서 복이 있다. 빈궁이 너희의 행복에는 손톱만치의 피해도 입히지 못할 것이다. 아니, 너희는 그 가난 때문에 복이 있다. 너희의 모든 손실은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위로와 은혜가 너희의 것이 되며 후일 하나님 나라의 모든 기쁨과 영광도 너희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희 것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은 너희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는 믿음에 부요하다(약 2:5).2. "너희는 지금 주린 자이다(21절). 너희는 남들처럼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다(렘 5:7). 너희는 흔히 굶주린 채 일어나는 수가 많다. 너희의 식사는 그토록 부족하다. 또는 너희는 일에 너무나 열중하다 보니 떡 먹을 시간도 없다. 너희는 한 때의 식사를 밀 이삭 몇 알로 때우고도 기뻐한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이토록 굶주린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더 이상 주리지도 아니하며 더 이상 갈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3. "너희는 이제 울고 있으며 눈물 흘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요 동정의 눈물이다. 너희는 시온에서 애곡하는 자의 무리이다. 그러나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의 현재 슬픔은 너희의 미래 기쁨을 결코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미래의 기쁨에 대한 예비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너희는 승리를 보류해 두고 있다. 너희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있을 뿐이지만 곧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시 126:5, 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금 근심하고 있는 자들(고후 7:11)은 스스로를 위해 위로를 저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위로를 쌓아 두고 계신다. 그리고 그 입이 웃음으로, 그 입술이 즐거운 소리로 채워지게 될 날이 오고 있다'(욥 8:21).
4. "너희는 이제 세상의 악한 뜻을 겪게 된다. 너희는 악의에 찬 세상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에게 온갖 야비한 취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받들기 때문이다. 너희는 악한 자들이 너희를 미워하리라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의 가르침과 삶은 악인을 정죄하고 그들의 유죄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력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너희를 멀리하고(제외하고, 구별한다는 뜻도 있음) 너희 스스로 분리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너희가 스스로를 구별한다고 하여 너희를 파문시키고 극히 불명예스런 비난을 너희에게 퍼부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말썽 많고 어쩔 도리 없는 범법자라고 하여 너희에게 파문을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극히 화려한 위의(威儀)를 갖출 것이며 그들이 하늘에 고하는 장면은 일대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이는 너희에게 대한 파문이 하늘에서 인준된다는 것을 세상 사람과 너희들까지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그들은 너희로 남에게 보기 싫은 존재가 되게 하며 너희자신에게는 두려움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다." 라는 게 바로 avfori,swsin u`ma.j란 말씀의 고유한 뜻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 할 권세가 없는 자라도 자기 힘 자라는 데까지는 자기들의 악의를 어떻게 해서든지 나타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희를 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희가 전혀 죄가 없는데도 극히 억울한 죄명을 덮어 씌워 욕할 것이며 너희에게 합당하지 않은 오명을 덮어씌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것이며, 크리스챤이라 하여 사도라 하여 너희 이름을 내버릴 것이다. 그들은 이들 이름을 보기 싫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 8복의 해설이다(마 5:10-12). "이와 같은 취급은 가혹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너희가 이런 대우를 받을 때는 복이 있다. 이런 것은 너희 행복을 삭감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크게 증가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자기 주군을 섬기느라 전쟁에 종군하는 것이 용사의 큰 명예가 되듯 그런 것은 너희가 명예가 된다. 그러므로 그 날에 기뻐하고 뒤놀라(23절).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의기양양해 하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로써 너희는 은혜의 나라에서는 신분이 아주 높게 된다. 너희는 너희 이전에 있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을 기뻐해야 옳다. 그것은 너희가 그들과 동일한 영과 동일한 발걸음으로 행하며 동일한 일에 종사하고 그들과 꼭 같은 사역에 고용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너희는 이로 인하여 영광의 나라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너희 봉사뿐만 아니라 너희가 받는 고난도 계산되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천국의 영광이 이 모든 어려움을 풍성하게 상쇄할 것이라는 충분한 확신 속에서 너희 고난을 과감하게 맞이하라.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위해 손실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결코 손실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Ⅱ. "형통하는 죄인들에게는" 비록 세상이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화가" 통고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이것이 나와 있지 않다. 앞에 나온 복과 비교되는 이들 화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가장 잘 설명되는 것 같이 보여진다. 나사로는 이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의 축복을 다 소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그에게 다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는 여기에 나오는 화가 적용되는 자의 특징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이 화를 다 받았다.
1. 부요한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재물을 신뢰하는 자요. 이 세상 재산을 풍족히 소유하는 자며 그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화로다 ! 그들은 자기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행복을 거기 두었고 그것을 분깃으로 취하고 싶어했다(24절). 그들은 생시에 자기의 복된 것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좋은 것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성싶은 모든 아름다운 것이었다. "부요한 너희는 미소짓는 세상에 마음을 두고, '영혼아, 재물에 둘러 쌓였으니 평안히 쉬라. 이것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니라.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화로다."(1) 이 세상의 사물을 자기 위로로 삼는 것은 육욕에 눈먼 세상 속물들의 미련함이다. 그런 사물은 저희의 편의를 위해서만 의도된 것일 따름이다. 그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즐거워하며 자랑하며 지상의 천국으로 삼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시시한 것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2) 그들이 자기 위로가 되는 재물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움으로 여겨야 한다. 그들은 이들 세상 사물과 이별하게 될 때 그들의 모든 위안에는 끝장이 오며 그것은 최종적인 종말이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불행과 고통 이외에 남아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2.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25절). 그들은 포식하도록 배가 부른 자이며 마음의 소원보다 많은 소득이 있는 자이다(시 73:7). 그들은 이 세상의 숨기운 재물로 배를 채우게 된 자들이다(시 17:14, 우리 성서와 다름). 그들은 이런 것들을 풍족한 것도 없고 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 자들이다(계 3:17). "이미 너희는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다"(고전 4:8).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도 스스로 배부른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화로다. 그들은 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뻐기고 자랑하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기를 배부르게 해 준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남기고 떠나 갈 때에는 저희가 옮겨가는 저 세상이 결코 충족시켜 주지 못할 욕망과 소원만 가지고 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토록 배불러 하는 이 모든 감각적 즐거움은 지옥에서는 거절되고 천국에서는 그 위치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3. 이제 웃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기질을 늘 갖고 있으며 기뻐할 일이 늘 있는 자이다. 그들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것 외에는 달리 기쁨을 모르며, 순전히 근심을 추방시키는 세상적 관능적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 말고는 이 세상의 낙을 달리 취급할 줄 모르는 자이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경건한 근심도 몰아내 버리고 언제나 바보의 웃음만 즐기는 자들이다. 그런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웃는 것은 단지 이제뿐이며 잠시 동안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애곡하며 울게 될 것이고 딴 세상에서 영원히 애통하고 울게 될 것이다. 그 세상에는 오직 우는 것과 통곡하는 것과 끝없고 쉬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슬픔만 있을 뿐이다.
4. 모든 사람이 칭찬해 주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갈채를 얻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와 유일의 관심사로 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열납하심보다 인간들의 칭찬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다(26절).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 너희가 아무도 불쾌하지 않을 말로만 설교하면 그것은 너희가 맡은 바 신뢰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신실하지 않았다는 악한 표적이 될 것이다. 너희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선포한다면 너희는 결코 칭찬이 아닌 비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길로 행하는 너희 조상들에게 아첨하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말로(사 30:10)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은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 너희가 만일 그들과 마찬가지로 환호를 받는다면 그들처럼 거짓되이 행했다는 혐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해야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 하는 말에도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우매자의 비난을 무시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칭찬도 무시해야만 한다.
공의와 자비에 대한 권면 (누가복음 6:27-36)
이 말씀은 마태복음 말씀과 부합된다(마 5:38-48). "내가 너희 듣는 자에게 이르노라. 제자들뿐만 아니라 듣는 너희들 모두에게도 말하노라. 이것은 보편적 관심의 교훈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리스도께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며 그 말씀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는 모든 자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갚으며 모든 거래에 있어서 정직하고 공정해야 한다(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이성을 가진 우리는 정의감에서든 자비심에서든 남이 우리에게 행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 서로 처지가 뒤바뀐 경우라면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상태에서 바로 그것을 남에게 행해 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 자리에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한다(욥 16:4). 그런 뒤 우리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그대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조해야 하는 것이다.
Ⅱ. 우리는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유로이 주어야 한다(30절).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자선을 베풀기에 알맞은 대상이면 누구에게든지 주라. 네게 남아돌아서 공급할 여력이 잇거든 부족한 자에게 주라.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와 도울 능력 있는 친척을 갖지 못한 자에게 구제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즉시 나눠주고 기꺼이 전달하게 하고자 하셨다. 보통 일에서는 그들의 능력대로, 비상한 일에서는 그들의 능력을 벗어나서라도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
Ⅲ. 우리는 어쩌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는 데 관대해야 한다.
1. 우리는 우리의 권리가 부정될 때 권리의 주장에 극단적이어서는 안 된다. "억지로든 속여서든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어떤 폭력에 의한 수단으로 네 속옷 가져가는 것도 금하지 말라(29절).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느니 그에게 그것도 주라. 그리고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빌려가거나 물품을 외상으로 가져가는 자에게 억지로 그것을 요구하지 말아라(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섭리에 의해 그런 지불 불능자가 생겼다면 법을 이용하여 그를 고소하지 말며 목을 잡느니보다(마 18:28) 차라리 손해를 보라. 사람이 네 빚을 지고 달아나며 네 물품을 갖고 도망을 치더라도 너는 당황하거나 분해하지 말라."2.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복하는 데 엄해서는 안 된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고소하거나 영장을 신청하러 보내거나 법정에 호소하는 대신 저 뺨도 돌려 대라. 즉 이로써 네가 또 다른 뺨을 점잖게 맞아야 하는 위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묵살해버려라. 그런 경우에는 흔히 사람들은 법에 호소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위신을 내세우는 법이다. 누가 네 뺨을 때리거든 그에 응수하여 곧장 한 주먹 날리기보다 그에게서 또 한 대 더 맞을 채비를 갖추라. 네 일을 신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모욕을 받더라도 가만히 앉아 있으라." 우리가 이같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실 것이다(시 3:7). 그들도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셨다(롬 12:19). 우리가 복수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는 바로 이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3. 아니,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구주가 이 성구 가운데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주된 목표이다. 그는 자기 종교에 특유한 율법과 그 율법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가지로서 이것을 가르치려고 하신다.
(1) 우리는 우리의 가해자에게 친절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에게 선의를 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형편이 우리의 선행을 요구하고 우리에게 선행할 능력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선한 직분이라도 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원수들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고 있지 않으면, 복수를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극적 행위로써 나타내 주어야 한다. 원수가 우리를 저주하며 비방하며 잘못되기를 비는가? 그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우리를 학대하는가? 그들이 우리를 형편없는 존재나 미운 존재로 만들려고 애쓰는가? 그러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고 좋게 말하며 그들이 잘 되도록 기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들이 영혼이 잘 되기를 빌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자가 되자. 이 말씀은 반복되고 있다(35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 이 어려운 의미를 우리에게 권장하기 위해 그것은 관대한 일로 묘사되며 도달할 자가 거의 없는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범한 데라곤 조금도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특유한 일도 아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는 자기 부정이라고는 추호도 없다. 그것은 타락된 상태에 잇는 본성을 따르는 일에 불과하며 본성에 대해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않고도 되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덕분이 아니다. 우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고 그들의 친절에 답례한다면 그것은 관습과 체면과 의리의 원칙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칭찬 받을 일이 무엇이뇨?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슨 명예가 되며 그의 이름에 명성을 쌓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죄인들도 꼭 같은 일을 행한다. 그러나 보다 훌륭하고 혁혁한 일을 행하며 너희 이웃을 능가하는 일을 행하는게 너희한테 어울린다. 너희는 의당 죄인이 행할 수 없고 그들의 원리가 추종할 수 없는 일을 행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칭찬은 우리에게 돌아올게 아니다. 우리는 이름과 찬미를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그가 받으실 것이다.
(2) 우리는 어떤 이득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친절해야 한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35절). 이 말씀은 부자는 가난한 자가 꼭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소액의 돈이라도 빌려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과 그 가족이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거나 그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빌려주라는 뜻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빌려 준 돈에 대한 이자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물건을 구입하거나 장사하기 위해 돈을 채용해 가는 자에게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여기서 끝나진 않는다. 우리는 빌려주는 것을 떼먹을 염려가 있는 자에게도 빌려주어야 한다. 즉 너무 가난해서 우리에게 상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자한테도 빌려주어야 한다. 이 교훈은 모세의 율법(신 15:7-10)으로 가장 잘 설명이 될 것이다. 이 율법에는 면제년이 임박해 있더라도 가난한 형제에게 그 요구하는 대로 꾸어줄 것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관대한 자비심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1] 그것은 우리의 이익을 늘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35절). 땅에서 진정한 자비의 원리에서 구제하거나 투자하거나 빌려주거나 잃은 것은 저 세상에서 우리에게 보증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득이 될 것이다. "너희는 상환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상을 받을 것이며, 큰상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오라. 복된 자여 !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우리의 명예를 높여 줄 것이다. 우리는 이 일로 선하신 중에 계신 하나님을 닮게 될 것이다. 선하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다.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에게 자기와 같다는 이유로 그의 자녀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극히 악한 자에게도 일반 섭리의 선물을 주신다. 날마다 자기를 격노케 하고 자기에게 반역하며 바로 그 은사를 악용하여 자신에게 수치를 돌리는 극악한 자에게도 보통 섭리의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여기에서 그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추론하신다. 이것은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의 설명이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그의 극히 광명하고 온전하신 일들로 너희 아버지를 모방하라"는 말씀이다.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까지 자비하신 하나님처럼 자비한 자들은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한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가 무한히 부족하긴 하지만 은혜로써 그 행위를 기뻐 받으신다. 자선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불리운다(골 3:14). 이것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울 것을 강력히 책임지운다. 우리를 해롭게 하던 자들에게까지도 자비로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에게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악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닌가 ! 우리가 불로 소멸되지 않는 것은 그의 자비 때문인 것이다.
공의와 성실 (누가복음 6:37-49)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나온 것이다. 그 중 일부는 7장에 나왔고 다른 것들은 그외 딴 데 나와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사용하시던 말씀이다. 단지 언급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었고, 그들을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우리가 일관성을 찾아 여기에서 너무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들은 솔로몬의 잠언의 비유처럼 주옥같은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Ⅰ. 우리는 남을 비평하는 데 매우 공평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도 조금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37절).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자비를 남에게 행하라(고전 13:7). 그러면 남들도 그런 자비를 네게 베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비판하지 않으실 것이며, 정죄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랴 !" 딴 사람들의 이름에 자비로운 자들은 남들도 자기들 이름에 자비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Ⅱ. 우리가 주고 용서하는 심령이면 그 혜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우리에게 입힌 피해를 입힌 딴 사람을 용서해 주면 남들도 우리의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께 죄지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곤대한 일을 도모하는 관대한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그것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남에게 준 것은 하나님께 빌려 준 것이다. 그는 그걸 잊으실 만큼 불의치아니하사(히 6:10) 그것을 다시 갚아 주신다. 사람들이 그것을 너희에게 안겨 주며 돌려 줄 것이다. 하나님은 흔히 인간을 자기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인간을 복수의 도구로만 사용치 않으시고 상 주시는 공의의 도구로도 사용하신다. 우리가 남이 궁핍할 때 정당한 방법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궁핍할 때 남의 마음을 움직이사 우리를 구제하게 하시며 후히 주게 하시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게 하실 것이다. 풍성히 씨뿌리는 자는 풍성히 거둘 것이다. 하나님께 보상을 받는 자는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
Ⅲ. 우리는 남에게 해 주는 대로 우리도 그렇게 받을 것으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 남을 가혹하게 다루는 자는 아도니베섹처럼(삿 1:7)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남이 자기들에게 학대하면 마찬가지의 앙갚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데 감사를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들은 기회 닿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친절히 행할 친구를 일으키시리라고 희망할 이유가 충분하다. 비록 섭리가 항상 이 규칙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가혹한 행위를 막고 모든 자선 행위를 권장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는 이 규칙에 의거한다. 더군다나 완전하고 정확한 보상은 저 세상을 위해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Ⅳ. 무지하고 그릇된 자의 안내를 자청하는 자들은 같이 멸망하기 쉽다(39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자만심과 편견과 아집(我執)으로 눈먼 바리새인들이 소경 된 백성을 정도로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여론과 세상 경로와 관습에 이끌리는 자는 스스로 눈먼 자이며, 소경에서 인도함을 받는 자여서 흑암에 앉아 있는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무지하게 모험심으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출 23:2) 자들은 소경을 따라 많은 자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나가는 자이다.
Ⅴ.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선생이 받는 것보다 나은 대우를 기대할 수가 없다(40절).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것보다 많은 명예와 즐거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세상적 화려함이나 장엄함을 노려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이런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셨고 오히려 거절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떠맡지 않으시려던 세상 권력을 좋아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온전한 자라는 걸 나타내고 싶은 자, 즉 확실히 제자라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자기 선생과 같아야 한다. 선생이 그러한 것처럼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 선생이 그런 것 같이 수고와 자기 부정의 삶을 살며 모든 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부려 수고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는 완전한 제자가 될 것이다.
Ⅵ. 남을 책망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그들을 떠맡는 자는 자신이 결백하고 무해하며 책망 당할 일이 없는 자인지 살펴보는 데 관심 해야 한다(41, 42절).
1.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을 혹평하는 자는 매우 그릇된 호의를 가진 자이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한 존재하면서 눈의 티 같은 남의 작은 잘못을 캐낼 만큼 눈치 빠르다고 자부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억설이 아니다.2. 개선시키려는 자선을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개선하도록 도와주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못한 자이다. 네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두고서도 어떻게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나설 수 있느냐? 그것은 선한 눈뿐만 아니라 선한 손도 필요로 하는 일이다.
3. 타인의 영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형제의 눈에서 띠를 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려면 우리는 자신부터 먼저 착수함으로써 그런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개선함으로써 솔선수범한 그 영향력으로 남의 개선에 이바지할 수가 있다.
Ⅶ.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실이 그들의 인간 됨에 따라 나온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의 언행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원칙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1. 마음은 나무이고 말과 행동은 나무의 종류대로 열린 열매이다(43, 44절). 사람이 참으로 선한 사람이고 그 마음에 은혜의 원리를 가진 사람이며 영혼의 주관과 경향이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자라면 설사 그 열매가 풍성하지 못하고 열매 중 일부는 못쓰게 되고 그가 때로는 겨울 나무 같다손치더라도 그는 못된 열매를 맺지 않는 자이다. 비록 그가 네게 마땅히 해야 할 선을 다 행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구체적 사례에서 네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라 나쁜 품행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행실을 못되게 타락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맺는 열매가 "썩은" 열매이고, 그의 신앙적 태도가 마음과 행실을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의 말이 악하며, 그가 음주자나 간음자나 맹세자나 거짓말쟁이이며, 어떤 사례로 부정하고 천륜에 어긋나는 자이면 그의 열매는 못된 열매이고, 그렇다면 그런 자는 "좋은 나무"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반면에 못된 나무는 푸른 잎은 낼지언정 좋은 열매는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시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며 찔레에서 포도를 얻지 못하는 때문이다. 너희는 원한다면 가시나무에 무화과를 붙이고 찔레에 포도를 얹어 둘 수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그 나무의 자연의 산물도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악한 성품의 소유자로부터 선한 행위를 기대할 수가 없다. 따라서 너희는 열매가 좋으면 나무도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음을 바로 알아 맞출 순 없더라도 그 행위가 경건하고 거룩하며 규칙적이면 그것은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일 것이라고 온정 어린 생각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알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악한 것을 말한다(한글 개역 성서: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사 32:6). 현대의 경험자도 이런 점에서 "악은 악인에게서 나온다"(삼상 24:13)는 고대의 잠언에 수긍한다.2. 마음은 곳간이다. 말과 행실은 그 곳간의 지출이거나 거기서 나오는 산물이다(45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12장 34, 35절에서 읽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속에서 왕노릇하는 자를 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에 쌓은 선이다(쌓은 것이란 말은 창고와 보물의 뜻도 있다) 그것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타인의 복리를 위해 소비할 수 있는 좋은 재화를 제공해 준다. 사람은 그런 선한 창고에서 선을 꺼낼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과 육에 대한 사랑이 왕노릇하는 곳에는 마음에 악한 것이 쌓여 있어서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끊임없이 악한 것을 낸다. 너희는 항아리에서 떠내 봐야 그 속에 든 것이 술인지 물인지 알 수 있듯이(요 2:8)나오는 것으로 마음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들이 보통 입으로 말하며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며 말하는 것은 대개 마음에서 가장 깊고 높은 데 있는 것과 일치한다.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땅에 속한 자이다(요 3:31 참조). 그러나 선한 사람이 악한 말을 흘릴 리가 없고, 악한 자가 나쁜 목적으로 선한 말을 악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마음과 말이 일치하는 법이다. 말이 헛되냐 성실하냐에 따라 마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뿐만 아니라 그 가득한 것으로도 우리 마음을 채우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Ⅷ.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에게 대한 관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1. 우리가 정작 그리스도의 뜻에 순응하는 일과 r이러 나라의 세력에 이바지하는 일을 본분으로 삼지 않으면서 마치 그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라도 하는 듯이 주여, 주여하고 부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모욕을 가하는 일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주여 주여하고 부르면서도 우리 마음의 길과 우리가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비웃으면서 말한 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조롱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에서 그를 주여, 주여하고 부르는가 ? (마 7:21, 22 비교)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2.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 고백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아도 천국에 이르게 될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시는데(47-49절), 그것이 나타내 주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자기 영혼이나 영원을 위해 틀림없는 작업을 하는 자들이란 바로 이런 자이다. 즉 제자로서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의 말씀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곧 그 사람이다. 그는 매사에 자기의 거룩한 신앙의 확립된 규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만이 연단 받을 때에 소용이 될 수 있는 올바른 경로를 취하는 자이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 짓는 자들처럼 신앙 생활에서 수고하는 자이다. 그들은 낮은 데서 시작하는 자이다. 그들은 깊이 파는 자이다. 그들은 소망의 주초를 그리스도께 둔다. 그리스도는 만세의 반석이시며 어떤 사람도 딴 주초를 놓을 수 없다. 이들은 나중을 위해 준비하는 자이다. 그들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는 자이다. 그들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고 장차 올 영원한 시간을 위해 좋은 주초를 예비하는 것이다(딤전 6:19). 이렇게 하는 자야말로 자기를 위해 잘 행하는 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시험과 박해의 시기에도 자기의 온전성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남들은 자기들의 견실함을 버리고 실족하게 되는 때에도 이들은 여호와 안에서 굳게 설 것이다.
[2] 그들은 최대의 고난 속에서도 위로와 평화와 소망과 기쁨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환난의 폭풍과 물결도 그들을 흔들지 못할 것은 그들이 반석 곧 그런 것보다 더 높은 반석을 딛고 서 있는 까닭이다.
[3] 그들은 영원한 복리를 확보해 두고 있다. 죽음과 심판에서도 그들은 안전하다. 순종하는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은 치명적 실망을 예비하고 있을 따름이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자기 의무를 알면서 그 의무에 대해 태만한채 살아가는 자)는 주초 없이 집을 줄이는 자와 같다. 그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근거와 기초는 동의어임, 역주) 소망에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그가 극히 그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유종의 미를 기대할 때 그에게 실망이 될 것이다. 탁류가 그 집에 맹렬히 부딪칠 때 그 집은 떠내려가고 만다. 그 집 밑에 있는 모래가 씻겨가 버리면 그 집은 곧 무너진다. 외식하는 사특한 자가 비록 소득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취해 가실 때에는 그의 소망이 바로 이와 같다. 그의 소망은 거미줄과 같고 유령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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