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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포도원 농부 비유 (마가복음 12:1-12)

그리스도께서는 이 앞에서의 비유에서 어떻게 그가 복음적 교회를 수립할 것인가에 대하여 보여 주셨던 것이다. 지금 그는 여기 비유에서 어떻게 그가 유대교를 폐기할 것인가에 대해서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줄기에 접붙여졌어야 할 것인데 파멸 위에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에도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유형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포도원을 소유하게 된다. 그 포도원은 크게 개량할 가망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맡은 자들에게서 마땅히 세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 때에(시 147:19),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전을 세우시고 그의 제사장직과 의식을 수립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세로 주었던" 것이다(1절).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님이 소작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량한 지주를 가지고 있으며 싸게 빌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실수만 아니면 그들은 그것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자기의 포도원을 세로 내 주는 자들에게 그의 종들을 보내 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얼마의 정당한 소작료를 받도록 하신다(2절).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요구를 재촉하시지 않으시고 비싸게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추수기가 되어 그들이 마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당신의 종을 보내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세를 마련하는데 복잡하게 하시지 않고 정금으로 취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Ⅲ. 모든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충성스런 사역자들이 교회의 특권을 누리며 이렇다 할 열매도 맺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야비한 취급을 당했음을 생각함은 슬픈 일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교회의 이름 아래서 행사하던 그런 자들에 의해서까지 핍박을 당했던 것이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3절). 이것은 나쁜 상태이다. 그러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4절). 이것은 더욱 나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은 악의 절정에 이르러 그들을 죽이게 된 것이다(5절).

Ⅳ. 선지자들을 학대한 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학대하였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 사랑하는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치 야곱이 요셉을 그 형들에게 보내신 것처럼 말이다(창 37:14). 그들의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그들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6절).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다. 그들이 그만은 공경하고 세를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아들이요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를 공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했다(7절). 그리스도께서 회개의 신앙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선지자들보다 더욱 그의 권세를 요구하므로 그들은 그에게 대하여 더욱 격노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교회의 모든 세력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존경과 순종을 자기들이 독점하려고 한 것이다.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우리가 최고의 세력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리라 생각하였다. 만일 그들이 올바르게 아들에게 공경하였더라면 그 유업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의 유업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값진 유업은 소홀히 여기고 이 세상의 부와 화려와 세력의 유업만 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인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렇게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8절). 그들은 그 아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복음은 그들의 간계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멸과 증오로 그 복음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Ⅴ. 그러한 사악하고 수치스러운 행동들은 두려운 운명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이 일은 무엇보다도 많은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1.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소출을 바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도 그가 그들의 소작을 차압하지 않았고 그들이 세를 안 낸다고 해서 도로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의 종들과 아들을 죽였을 때에 그는 그들을 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예루살렘이 황폐케 되고 유대 나라가 파멸되고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성취된 것이다.

2. 그가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만일에 그가 그 세를 그들에게서 도로 찾으면 그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손해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넘겨짐으로 성취되었고 풍부한 복음의 열매가 온 세상에 맺혀지게 된 것이다(골 1:6).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고 기대하던 자들이 나쁜 결과로 나타났다 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착수하시면서 스스로 용기를 내게 되셨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고 그에게 나오지 않고 그를 거역할지라도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3. 그리스도의 고귀함에 대한 그들의 반대가 그에 대하여 장애가 되지 않는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로써 필요하게 사용되고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들이 "그 맨 끈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려는" 계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왕으로서 시온 산 위에"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이 이것을 유대인들에게는 공의로써 이방인들에게는 긍휼 하심으로써 행해지는 여호와의 일로 보게 되고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심도 그리고 그곳에 보좌를 정하심도 여호와의 행하심이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 사실로 깨달음을 주려고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셨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비유에서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는가?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12절), 그들은 이 비유의 거울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 비유는 그들의 가증한 죄를 보여 주고 그들의 확실하고 심한 파멸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따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했어야 하며 적어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들의 악한 목적을 버리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반면에



(1) 그들은 예수를 "잡고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바로 검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지금 그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한 대로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8절).

(2) 그들이 이런 악행을 행하려고 함에 있어서 그들을 억제하게 한 것이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워서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만일 그들이 군중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잡으면 군중들이 일어나 그들을 잡고 그리스도를 구출하게 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3) 그들은 "예수를 버려 두고 가니라." 그들은 결심하기를 만일에 그들이 그를 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의 능력 있는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고침 받지 않으려고 그 곳을 떠났다. 만일에 사람들의 편견이 확실한 진리로 정복되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완고해지는 것이다. 만일에 심령의 부패함이 진실한 증거들로 점령되지 않으면 그 심령은 계속 화내고 혈기를 내게 된다. 복음이 인생에게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못한다면,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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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가복음 12:13-17)

그리스도의 피에 목마른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은 그가 그들에게 한 말에서 책잡을 기회를 찾지 못하자 그에게 나와 질문을 함으로써 그를 올무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일의 적부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태복음 22장 15절에서 살펴 본 바가 있다.

Ⅰ. 그들이 기용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협조했던 것이다(13절).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자유에 대하여 열렬히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민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록 선동할 것이요, 헤롯당원들도 내밀히 그들과 보조를 같이할 것이었다. 헤롯당원들은 로마의 권세에 대해 아부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일에 가이사에게 세를 내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총독을 선동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할 것이고, 바리새인들도 그들의 원칙을 어기고 그들에게 협조할 것이었다. 그들이 다른 일들에는 서로 모순되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적함에 있어서는 연합하는 일이 이번에만 나타난 새로운 일은 아니다.

Ⅱ. 그들은 현 시점에서 대단히 중대한 양심의 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고귀한 견해를 갖는 것처럼 하였다(14절).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높은 경의를 나타냈고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선생님, 진리 안에서 참된 길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진리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이 무엇인가를 가르쳤고, 미소나 찌푸린 얼굴로 평등과 선의 규율로부터 일보도 떠날 분이 아님을 표시했다. "당신은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당신은 한편으로 질투하는 군주의 노여움을 또 한편으로 질투하는 백성들의 범죄에 대하여서 두려워 아니하나이다. '당신은 참되고' 항상 참되시며 올바른 태도로 선악을 선포하며 진리와 거짓을 선포하나이다." 만일에 그들이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들이 생각했던 것을 말하였다면, 속이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그를 죽인 일은 자기들의 지식에 거역한 죄인 것이다. 그들이 그를 알았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증언이 그들 자신에게 대하여 가장 강하게 말한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그들을 심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쳤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충고를 거절하였다. 위선자들의 고백과 가장은 본인은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며, 정죄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알지 모사고 믿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입으로 하나님께 거짓 말함이요 자기들의 혀로 그에게 아첨한 것이다.

Ⅲ. 그들이 던진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알고자 하는 것같이 하였다.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한다"(사 58:2).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느 편을 취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알고자 하였고 그리스도를 고소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시민의 권리에 대한 투쟁, 주종간의 한계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목사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일은 더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마땅한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일에 관여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해결하기에 적당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왕들이 다스리고 군주들이 공의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히 질문하기를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태도에 따라 자기들의 입장을 취하여고 하였다. 만일 당신이 우리가 세를 바쳐야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것 때문에 거지가 되어도 그렇게 해야 될 것인가? 또 우리가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여 우리가 반역자들로 몰리어도 그렇게 해야된단 말인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교만한 사람들같이 많은 사람들이 결코 이행할 마음이 없으면서도 자기들의 의무를 알기를 바라는 척한다(렘 42:20).

Ⅳ. 그리스도께서 그 질문의 취지를 아시고 그들의 나라에서 이미 규정한 바를 그들에게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됨으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물러난 것이다(15-1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비록 입으로 이 모든 사랑을 말하나 자기를 대적하는 그들의 심령 속의 위선과 악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위선이 제 아무리 기술적으로 가장 하여 드러나지 않더라도 주 예수께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은으로 도금한 질그릇을 알아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그런 문제를 제기함을 아시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한 말에 의하여 그들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세를 정직하고 침착하게 바치도록 하였고 동시에 그들의 이의에서 당신을 보호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돈은 로마의 화폐로서 한 면에는 가이사의 화상이 나와 있고 뒷면에는 가이사의 글이 나와 있음을 인정하게끔 하시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1. 가이사는 그들의 돈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라를 보호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돈의 순환은 마치 샘과 같이 그에게 나왔다. 그러므로 그에게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화폐가 가이사의 것인 한 그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가이사의 것이 되는 한, 그리고 그에 의해서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라면 그 정부의 헌법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것이며 왕의 특권과 백성들의 재산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2. 가이사는 아마 그들의 양심을 짓밟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또한 그렇게 하는 듯 가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불평이나 논쟁을 말고 너희 세를 바치라.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아마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얼마 전에 말씀하신 비유와 이 일을 연관시켜 보셨을 것이다. 그 비유에서 그는 그들이 소출을 그 주인에게 바치지 않는 일에 대한 정죄를 의미하시었던 것이다(2절). 납부해야 할 세금에 대해서는 세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무관심한 자들이 많다. 따라서 소작인이 그 주인에게 소출을 드리고 군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됨같이 우리의 심령과 최대의 사랑은 하나님께 드림이 합당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이 대답을 들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뛰어난 대답과 현명하게 그 올무를 피하심을 보고 "기이히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아무도 자신들을 설교의 기술에 대하여 말하나 그것은 설교에 대한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명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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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대한 논쟁 (마가복음 12:18-27)

당시의 합리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이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같이 예수에 대하여 어떤 악의적인 목적으로 질문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고집쟁이나 핍박자들은 아니었으나 회의주의자들이며 불신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교리를 전파하지 못하게 하려는데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부활이나 영계나 사후의 어떤 상급이나 형벌등을 부인하였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이 부인한 그러한 크고 정통적인 진리들을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수립하고 증거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전에 전승되어 온 것보다 훨씬 그 개념을 새롭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에 당황하게 된 것이다.

Ⅰ. 그들이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던 방법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형이 자손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과부인 형수를 취하여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율법을 인용하여 질문하였다(19절). 그들은 한 경우를 상상하여 말하기를 율법에 의해 칠형제가 모두 한 과부와 결혼하였다고 하였다(20절). 아마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불경스런 언행에 따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 율법을 조소하고 율법을 실행함에 있어 비합리적이고 불편함을 들어 모세의 율법의 전 윤곽을 경멸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대개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율법과 규율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점차로 그렇게된다. 그들은 부활의 교리를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일에 미래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그 교리는 믿을 수 없는 불합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부활 후 한 여인이 칠형제와 결혼하든가 아니면 어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어떠한 계교로 이 이교도들이 진리를 침식하려 하는지 보라.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부활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부활을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마귀가 그리스도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말한 것 같이 "만일 부활이 있다면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치 광야의 이 짐승들이 뱀보다 더 교활한 것처럼, 마치 그들이 사두대인들이 아닌 것처럼 그 진리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누가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부활이 있는 것을 시인하는 듯하였고 그것에 관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그 부활의 교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고 계획하여 그렇게 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이교도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감히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어지럽히고 올무에 걸리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술책이었다.

Ⅱ. 그들이 어둡게 하고 충격을 주려고 시도했던 이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하고 굳게 하려고 취한 방법을 여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세히 말씀하였다. 그것은 설혹 그들은 교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확고해야 되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비난하셨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들의 "무지"의 탓임을 비난했다,

우리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부활의 교리를 비웃는 자들은 오직 인간들만 아는 자들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대로 생각하는 자들"은 실로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며 세계에서 가장 노예적이고 편견적인 사고자들이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이 일에 대하여 민감하여 너희의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하라.



(1) 너희가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런 준비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잘못된 사고를 주입시킨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성경에 위배된 부패한 이성을 내세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였다. 모든 계시된 신앙의 유출하고 있는 샘이요, 진리가 그 위에 확립된 터전이 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참된 지식은 오류에 대한 최선의 방비가 되는 것이다. 진리를 즉 성경적인 진리를 간직하라. 그러면 그 진리가 그대들을 지켜 줄 것이다.

(2)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교리를 이 문제에 적응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진리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진리를 포기하였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교리를 붙들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그들은 모든 해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에 있어서 아무것도 능치 못함이 없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두 번 들으려고 해야 한다. 즉 듣고 믿으며, 듣고 적응하려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시 62:11; 롬 4:17-21). 영혼과 육체를 창조하시고 그 영욕이 동거하는 동안 그것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동일하신 능력이 영육이 분리될 때에도 육체를 보호하시고 영혼이 활기를 갖게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팔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봄이 다시 돌아오는 데서도(시 104:30), 밀알이 썩어 다시 사는 데서도(요 12:24), 비참한 백성들이 번영하는 회복에서도(겔 37:12-14), 신 구약의 수 많은 생명들을 기적적으로 살리는 데서도,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엡 1:19, 20)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은 그 동일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우리의 부활을 진지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2. 그리스도께서 참된 빛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미래의 상태에 대한 교리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반대적인 모든 세력들을 굴복케 하시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으니라"(25절). 그러므로 "그들이 살아날 때에는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사의 낙원을 이루게 되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하늘에서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회교도들이나 불신앙자들은 그들의 어리석은 낙원에서 감각적인 쾌락을 바라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고전 15:50). 그러므로 더 좋은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 안에서 충만한 만족까지도 바라라(시 17:15).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곳에서 아내도 자녀들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감각의 세계의 일들로 영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한히 어리석은 혼란 속에 빠뜨리게 됨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미래 상태의 교리와 그 상태에 있어서 의의 축복을 아브라함과 하신 하나님의 언약 위에 수립하신 것이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26,27절).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대하여 호소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모세의 책 중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우리는 성경을 읽어본 자들과 대할 때에 어떤 유리한 점이 있는 것이다. 비록 많은 자들이 사두개인들같이 성경을 읽고 의곡하고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더라도 무식한 자들보다 깨우쳐 주기에 유리하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하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내가 과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브라함의 분깃이며 행복이다. 아브라함에 모든 만족이 되신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계속되어야 하며, 그래서 만일에 아브라함이 죽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의 분깃과 행복이 되며, 영원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1. 아브라함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2. 그러므로 언젠가는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그 육체로 돌아가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영원한 분리는 안일과 휴식을 취할 수 없으며,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신 영혼들의 지복과 기쁨은 더 말할 필요 없다. 전체적인 결론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었다.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비난을 듣게 된다.

 

12:19 없음.

 

12:20 없음.

 

12:21 없음.

 

12:22 없음.

 

12:23 없음.

 

12:24 없음.

 

12:25 없음.

 

12:26 없음.

 

12:27 없음.

 

12:28

서기관과의 변론 (마가복음 12:28-3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에게 적수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들었을 때에 그들이 바울이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쟁론할 때에 그러한 것처럼(행 23:9), 그리스도에게 호의를 보일 것으로 기대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를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교적 의식에 있어서 그들에게 동의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본질적 요소를 논쟁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의식을 조금도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들 중 한 사람인 한 서기관에 대해서 기록된 글을 대하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대답하는 것을 목격한바 이상으로 대답을 잘하는 것을 보고 그 안에 공손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28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서기관들과 합세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 그는 그리스도에게 가르침 받기를 간청하였고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가 사귀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Ⅰ. 그가 예수에게 묻기를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였다(28절). 그는 계명의 차례에 있어서 첫째를 의미하지 않고 그 계명의 중요함과 위엄에 있어서 첫째를 의미한 것이다. 아마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태도로 주목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가 그 계명을 순종함이 나머지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 하는 초석이 되는 계명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계명은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계명들은 다른 계명들 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개념보다 도덕적인 개념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계명을 우리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라고 부르게 된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해 주시었다(29-31절). 그들의 의무에 대하여 신실한 마음으로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는 "공의로 인도하시며" "그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1.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크고 모든 계명을 함축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1) 영혼 안에 이 계명이 지배적인 원칙이 될 때에 다른 모든 의무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받는다. 사랑이 그 사람을 주도하는 감정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신생한 영혼을 주도하는 은혜가 된다.

(2) 이 사랑의 계명이 없는 곳에는 아무 선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거나 올바로 되지 않거나, 영접하지 않거나, 더디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은 우리의 영혼들 안에 보좌에서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방비토록 우리를 무장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기뻐하는 모든 일을 우리가 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이 주도하는 곳에는 다른 계명도 슬퍼하지 않는다. 여기 마가복음에는 우리 구주께서 이 계명에다 그 위에 이것이 수립된 중대한 교리적 진리를 접두사로 붙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29절). 만일에 우리가 이 진리를 확실히 믿는다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여호와시며 당신 자신 안에 모든 자비한 성품을 완전히 구비하신 분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과 우리는 관계를 가지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애정을 그분에게 바쳐야 한다. 우리들의 바램이 그를 향하게 하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자.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독점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독점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이 유일한 분이시니 우리의 심령도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보좌에서 그분의 적수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둘째의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31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진실하고 신실하게 그리고 동일한 실증으로 우리가 이웃에게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들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은 한 분의 주이시며 그분과 같은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야 된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웃은 우리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들은 다 같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 이웃과 내 자신은 한 사회와 같은 인류란 한 몸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동료 그리스도인, 곧 같은 성도 사회에서라면 그 의무는 더욱 강한 것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 한 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지 않으셨느냐?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절)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잘 말씀하시었다. 왜냐하면 이 사랑 안에서 모든 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에 우리가 이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순종한다면 다른 모든 순종의 예들도 물론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Ⅲ. 그 서기관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동의하였고 그 말씀에 설명도 덧붙이었다(32,33절).

1. 그 서기관은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칭찬하였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32절). 그리스도의 분명한 설명에 서기관의 보충 설명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권세를 가진 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설명을 부가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그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고 서기관들 중의 한 사람인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시인하였고 잘했다고 칭찬하였으므로 사기꾼이나 배신자로 미움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고 그 말씀이 진리라고 우리의 인을 쳐야 한다.

2. 그 서기관이 예수의 말씀에 주석을 붙였다. 그리스도께서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한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었다. 이 말씀에 그가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더 부가하여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적수들을 배제하고 우리의 심령 속의 보좌는 완전히 그분에게만 드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이 말씀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라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것이 전적인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지성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지성적인 사랑을 해야만 한다.

evx o;lhj th/j sune,sewj─즉 지혜를 다하고.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이나 기능은 전부 우리의 영혼의 애정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인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었다. 그 서기관은 말하기를 이 사랑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이 모든 계명보다 가장 크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과 번제물보다 더 크다고 하시는 주님에게 찬동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가장 받으시려는 제물은 이 사랑의 계명임을 깨달았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이 한 말을 인정하였고 자기의 질문에 있어서 그토록 대답함을 칭찬하여 주시었다(34절).

1. 예수께서 그가 그토록 잘 이해함을 기쁨으로 인정하였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더욱 기뻐하시었다. 왜냐하면 최근에 그리스도께서 많은 서기관들과 식자들을 대했으나 그들은 무식한 자들과 무관심한 자들같이 지혜롭지 못한 대답을 하였기 때문이다. nounecw/j ─ 즉 지혜 있게 마음이 깊은 자, 생각이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는 이성적인 지혜가 구비된 사람, 자기에 관해서 식별이 있는 사람, 그의 이성이 어둡지 않은 사람, 그의 판단이 편벽 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다른 서기관들이 대부분 그 세력 아래 속박되어 있는 편견에 그 생각이 속박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허락한 사람과 같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던 사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그가 더욱 소망이 있음을 인정하시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하시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너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기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이다. 너를 이 진리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리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더욱 강조하여 가르치셨고 계획하시고 주의를 기울이신 것이다." 자기들이 소유한 진리의 빛에 대하여 잘 활용하며 그 빛이 인도하는 데까지 따라가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신 더욱 분명한 진리의 발견들로 말미암아 더욱 깊은 데로 인도됨을 유의하라. 이 서기관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바라기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하여 주시고 그 자신이 만족하여 대답한데 이어서 그가 그리스도에게나 그의 사도들에게 복음의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고도 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여기에서 더 진전이 없었다 해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리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물었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결과는 그와 반대였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일은 당당한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하셨기 때문에 모든 자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서 있었다. 그리스도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묻기를 부끄러워하였고 그리스도를 트집잡기 위해 나온 자들은 묻기를 두려워하였다.

 

12:29 없음.

 

12:30 없음.

 

12:31 없음.

 

12:32 없음.

 

12:33 없음.

 

12:34 없음.

 

12:35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 (마가복음 12:35-40)

Ⅰ.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서기관들이 그들의 설교에 있어서 얼마나 약하고 결함이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해석을 하여 가르치도록 책임을 맡은 구약 성경에서 일어나는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이 점에 관해서 그리스도께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시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많은 사실들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과 같이 주의를 끌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자극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그를 묻게 하였다.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서기관들에게서도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곧 좌초될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였다(35절). 그리고 그들은 옳았다. 그는 다윗이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왕위를 이을 자인 것이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라"(눅 1:32). 성경은 이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었고 백성들은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대로 배웠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목사들에게서 보다 우리의 성서에서부터 인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리의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그 원천에서 바로 떠온 것이 가장 감미로운 것이다."

2.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라고 부른 것이 대단히 합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백성들에게 어떤 뜻인지 가르쳐 줄 수 없었다(시 110:1).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나라의 영광이 될 것이며 그들의 왕족에서 나오는 가지가 될 메시야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메시야 자신에 대하여 영광인가에 대해서 즉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주가 됨에 대하여는 가르쳐 주려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고 구약에 대하여 율법과 마찬가지로 복음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임을 말할 수 있었고 그렇게 증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에 누가 묻기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한다면 그들은 그 반문을 피할 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모세의 자리에 앉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은, 비록 그들이 진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어떤 분량에 있어서는 그들이 가르칠 때에 그것을 옹호할 수 없으며 반박자들을 설득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일은 서기관들이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무식함을 폭로하게 되었고 그들을 성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더욱 대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37절).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놀랄 만하였고 매력을 지니었다. 그리하여 이 말씀들은 서기관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가져오지 못하였지만 그 백성들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그들은 결코 그런 설교를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의 음성과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비범하고 훌륭한 매력 있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그점이 일반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그를 믿게 하고 그를 따르게 할 무엇이 없고 그가 그들에게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을"것이다(겔 33:32 절). 그리고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달게 들으면서도 그의 머리를 벤 것처럼 이 백성들 중에 어떤 자들은 예수를 향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하고 외쳤을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서기관들로 인해 어떤 해를 입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고 그들의 교만과 위선에 영향을 닫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시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서기관들을 삼가라"(38절, 39절). "너희는 그들의 괴팍스런 의견에 동화되지 않게 하고 그들에 관한 사람들의 의견에도 동화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들에 반하여 긴 훈령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었으나(마 23장)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나와 있다.

1. 그들은 대단히 크게 보여지고 싶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옷단이 발까지 내려오게 하고 다녔다. 그들은 마치 군주나 재판관이나 긴 옷을 입은 귀인같이 시장을 돌아다니었다. 그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닌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한 것과, 그 옷을 입고 교만한 것과, 그 옷을 입고 자기들을 높게 보이려고 한 것과, 그 옷을 입고 존경을 받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다. 그들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한 것처럼 자기들의 옷을 향하여 "이 백성들 앞에서 나를 존귀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생산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시었다.

2.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기도하면 길게 기도하였다. 마치 그들이 하늘과 대단히 친하고 하늘의 일들이 많은 것처럼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하였다는 것을 알리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게 기도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자기들 자신들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독특하였고 많이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가장된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듯 보이는 하나님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봉사하여 주기를 원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이웃을 위해 기도하기를 사랑하는 것 같이 하였다.

3. 그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 자신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환호를 바랐고 그것을 즐기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였다. 이런 일들은 헛된 공상을 즐기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들이 누리면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존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4.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들 자신들을 부요하게 하기를 목적하였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어떠한 꾀를 써서 그들의 재산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기성에 대한 의심을 가리기 위해 그들은 동정의 가면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가장 선한 것 같이 신중을 보였다. 우리는 그들의 불경스럽고 은혜롭지 못한 긴 기도가 가증스런 죄악임을 생각하고 반박하도록 하자. 그러나 기도가, 긴 기도가 겸손하고 성실하게 드려진다면 나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를 하면서 동정을 베푸는 것 같은 가증스런 일을 하면 이중적인 범죄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벌도 이중으로 무거울 것이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기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욱 중한 벌, 그렇게 위장하지 아니하고 불상한 과부들에게 나쁜 일을 범하는 자들보다 더 중한 벌을 받을 것이다. 위선에 대한 형벌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중한 것이다.

 

12:36 없음.

 

12:37 없음.

 

12:38 없음.

 

12:39 없음.

 

12:40 없음.

 

12:41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41-44)

이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고 여기와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다. 이 성경 구절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는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신 말씀이다. 복음 전하시기에 분주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여가가 있을 때에 연보 궤 맞은편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었다.

Ⅰ. 자선을 위한 모금이 있었고 이 모금함에 헌금들을 하였다. 그리고 이 모금된 기금은 전부 분배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 구호금 함은 성전 안에도 있었다. 자선 사업이나 구호 사업은 대단히 알맞게 병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는 일은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기도와 구호는 사도행전 10장 2-4절과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은밀한 구제를 권장하고 알선하기 위해 자선 모금함을 설치해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를 얻게 하는 대로 저축하여 자선을 베풀 목적으로 준비해 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고전 16:12).

Ⅱ.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보 궤를 주시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41절). 예수께서 돈 넣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돈 넣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경건과 자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무엇을 드리나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드리나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나를 보시는 것이다. 그렇다 주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에 어떤 원칙에서 행동하며 우리의 견해가 어떠한가를 보시며, 우리가 이것을 주께 드리듯 하는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지 살펴보고 계신다.

Ⅲ. 예수께서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것을 보시었다. 부자들이 자선을 베푸는 것을 보는 것은 좋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많은 부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돈을 넣되 많이 넣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훌륭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부자들이 많이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이 주시었다면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풍성이 구제하는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이 말하기를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만큼 바치었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소유한 것의 극소수밖에 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에 알맞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자선의 대상이 자기 자신들을 드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무엇을 구제해야 할 가를 알아내야 할 것이며 후한 일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Ⅳ.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달란트를 넣는지라"(42절).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크게 칭찬하시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 일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였다(4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여인은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 절약하여 모은 많지 않은 돈이지만, 그것은 그 여인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 여인은 하루하루 일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보실 때에는 그 여인이 참다운 구제를 하였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여인이 많이 하였다고 하시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넣었느니라(44절)." 많은 사람들이 이 가난한 과부를 비난하면서 그 여인이 잘못 행하였다고 생각해 왔다. 그 여인 자신도 그토록 어려운데 남에게 구제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가정에서부터 구제를 시작할 일이라고 한다. 또한 만일 그 여인이 구제하고 싶었다면 그 여인이 아는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지 않았는가? 여하튼 이 과부를 비난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과부를 모방하는 사람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주께서 그 여인을 칭찬하시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여인이 잘하고 현명하게 행하였음은 확실하다고 본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잘하였다"고 하신다면 누가 무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 구제는 대단히 좋은 일이고 주 예수를 크게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구제를 하면서 겸손하고 신실하다면 주께서 기쁨으로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다.

2. 적은 소유를 가진 가난한 자도 그 적은 가운데서 구제를 해야만 한다. 노동을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들도 구제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구제를 해야 한다(엡 4:28).

3.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부인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구제하려고 함은 좋은 일이다. 구제하기 위해서 여분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도 절약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절제하여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4. 대중을 위한 자선을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가의 공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구호금의 처리 과정에서 잘못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몫을 내지 말아야 된다는 정당한 이유는 못되는 것이다.

5. 비록 우리가 적은 것을 구제금으로 내 놓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능력 것 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올바른 마음에서 내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요구하시지 가지지 못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두 렙돈을 내더라도 올바른 마음에서 내면 두 파운드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6. 우리가 우리의 "능력 것" 드릴 뿐 아니라, 우리의 능력에 지나치게 드리는 것도 찬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게도니야 교회는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던" 것이다(고후 8:2).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것 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쁘게 공급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자. 이 일이야말로 감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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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7장
253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8장
252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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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1장
249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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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1장
239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2장
238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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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5장
235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6장
234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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