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예언들 (마태복음 24:1-3)
여기에 보면,
Ⅰ.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또한 거기에서의 공적인 활동을 단념하심. 그는 앞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말들을 실증하고 계시다. "그는 성전에서 나와 떠나셨다." 그 표현 방법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성전에서 나오셔서 거기를 떠나셨다. 즉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거기를 떠나신 후 더 이상 그 곳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 다음에 곧 바로 그 파멸에 대한 예언이 뒤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버리는 집은 참으로 황폐하여 버린 바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 9:12; 렘 6:8). 지금은 그들의 "이키봇"(Ichabod),즉 "그 영광이 떠났으며, 그 보호자가 떠나버린 것"을 통곡해야 할 때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삼일 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떠나셨을 때 모든 것은 "속되고 불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쫓아내기까지는 떠나지 않으셨다. 또한 그들이 먼저 그를 거절하기까지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담화하심. 그는 성전을 떠나셨지만 열두 제자들을 떠나시지는 아니하였다. 열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버린 것이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되었던 복음 교회의 종자(씨)들이었다. 그가 성전을 떠나셨을 때 그의 제자들도 그 곳을 떠나 그에게로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거하며 또한 그가 떠날 때는 떠나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적인 설교를 끝내셨을 때 제자들은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그에게로 왔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밀한 것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비유로 유대 교회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여기에서는 늘 하시던 것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 왔다." 그 건물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며, 세상의 기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호화롭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비용도 아껴지지 않았고 어떤 기술도 보류되지 않았다. 그것은 솔로몬 성전에는 미치지 못하고 또한 "그 시작도 보잘것없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 "나중의 형편은 더욱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 성전은 예물들과 현물들로 풍성하게 꾸며졌으며, 계속적으로 이 성전에 첨가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 일들을 나타내 보여 주었으며 또한 그것들에 대해 주목하실 것을 바랐다. 다시 말하면,(1)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크게 만족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렇게 느끼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들 제자들은 대부분 그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에 살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볼 기회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성전에 대해 넋을 잃을 정도로 찬탄해 마지않았으며, 주님께서도 그들이 "이 모든 영광"(창 31:1)에 대해 했던 것처럼 찬탄하시리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 성전들을 둘러보심으로써 그의 기분을 전환시키시기를 원하였다(아마도 그는 설교하신 후에 제자들이 보기에 거의 실망한 듯한 우울한 표정을 짓고 계신 듯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허세나 쾌락에 매혹되기가 쉬우며, 또한 하나님의 일들에까지도 과대 평가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것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또한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 성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1] 그 영광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훼손되었다. 성전을 거룩케 하는 금을 오히려 성전보다 낫게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교리는 성전의 모든 장식물들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2] 그 영광은 "이 나중 집의 영광"(학 2:9)이었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무색하게 되고 쓸모 없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건축물들은 탁월한 영광에 비교해 볼 때 전혀 영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였다.
(2) 제자들은 이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라는 사실을 슬퍼하면서 주님으로 하여금 그것에 주목하실 것을 원하셨다. 그들은 마치 그에게 그 판결(선고)을 번복시킬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 건물들을 그에게 보였다. "주여, 우리 조상들이 당신을 칭송하였던 곳인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을 황폐케 하지 마소서." 그들은 백성들이 사악하게 될 때에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많은 준비들에 대하여 즉 그 백성들이 그렇게 찬미하던 외적인 영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대하 7:21). 이 "높은 집"은 죄로 말미암아 낮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래에 "고귀한 영혼들"을 보시며 "우셨다"(눅 19:41). 제자들은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는 울려고 하였다. 다른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아니하다." 훌륭한 건물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제자들의 영이 연약하고 빈곤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일이었다.
Animo magno nihil magnum - 즉 위대한 사람에게는 위대한 것이 없다(Seneca).
2.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에 있게 될 완전한 파멸과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신다(2절).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이 소멸될 것을 믿음으로 예견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찬탄하거나 과대 평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가장 아름다운 몸이 머지않아 벌레(충)의 음식물이 될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건물들이 폐허의 무더기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곧 없어지게 될 것을 주목하여 보거나 또는 머지않아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을 그렇게 찬탄하면서 보게 될 것인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고 자기들처럼 그것들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같이 그러한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를 원하고 계셨다. 우리들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그 작정을 번복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고 계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1) 그는 그것을 확실한 멸망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즉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내가 말하는 것을 알며 또한 내가 말하는 것을 확증하는 방법을 아는 "내"가 말하노니, 내 말한 것을 들으라. 그것은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아멘이시오 참된 증인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에게 위임된 모든 심판,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형벌들도 "그에게는 모두 예(yea)요 아멘이다"(히 6:17, 18).
(2) 그는 그것을 완전한 파멸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 성전은 벌거숭이가 되고 약탈당하며 볼품없이 될 뿐만 아니라 분쇄되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트리우리라." 둘째 성전의 "건물들"에서 "돌 위에 돌이 첩 놓이는 것"(학 2:15)이 유의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파멸 시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것"으로 유의되고 있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이것이 후대에 성취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티토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탈취하였을 때 그는 성전을 보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분한 군인들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것을 만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투르누스 루프스(Turnus Rufus)는 그 성전이 서 있었던 기초를 파헤치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시온은 너희로 인하여 밭같이 갊을 당할 것이라"(미 3:12)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 후 배교자인 쥴리안 때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항하여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를 받아 부서진 잔해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초를 닦기 위하여 땅을 고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땅에서 뿜어 나온 이적적인 불 때문에 죄절되고 말았는데, 이 불은 그들이 놓은 기초를 파괴해 버렸으며 건축자들은 놀라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성전에 대한 이 최후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예언은 레위적인 제사장직과 의식적인 율법의 기간에 대한 예언을 내포하고 있다.
3. 제자들은 이 판결(선고)의 진리성이나 공평성에 대해 논란을 펴지 않고 그것이 일어나게 될 때와 그것이 임박할 때의 표적에 관하여 질문하고 있다(3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은 어디에서 이 질문을 했는가? 그들은 "예수께서 감람산 이에 앉으셨을 때" 은밀하게 질문하였다. 아마도 그는 베다니로 가시는 도중 쉬시기 위하여 거기에 앉으셨을 것이다. 감람산은 성전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거기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거기에 의자 위에 앉은 재판장처럼 앉아 있었고 그 성전과 성은 그 앞에 피고들처럼 서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그들을 판결하였다. 우리는 에스겔 11장 23절에서 주님의 영광이 성전으로부터 감람산으로 옮겨진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영광이신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 산에로 옮겨 앉고 계시다.
(2) 그들은 어떤 것을 질문하였는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여기에는 세 가지 질문이 들어 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들은 하나의 동일한 일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전의 파멸과 유대 교회와 국가의 기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마 16:28) 또한 그 때가 바로 마지막 완성의 때가 될 것이며(왜냐하면 그렇게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 세대의 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 성전이 황폐해진다면 세상은 능히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랍비들은 성전은 세상을 창조한 일곱 가지 일들 중의 하나라고 늘 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세상은 성전을 잔존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2] 또 어떤 사람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나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다른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복음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세상 끝 날은 심판의 날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질문이 그리스도께서 지금 예언하신 사건 이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미래의 사건에 대해 매우 혼란된 생각을 가졌음이 다른 구절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확고한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대답 가운데서 비록 그의 제자들의 오류를 분명하게 시정하지는 않고 있을지라도(이것은 성령의 부으심에 의해 행해져야만 한다) 그 때의 큰 사건들과 세상 끝 날에 있을 그의 재림에 관하여 그들이 질문한 것 이상으로 주시하고 계시며 또한 그의 교회에게 가르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무의식적으로 이상의 것들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게 되셨으며 이것에 대하여는 이 설교의 계속인 다음 장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계시다.
무서운 예언들 (마태복음 24:4-31)
제자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나이까?"라고 때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의 예언이 언제 어느 시에 성취될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기"(행 1:7)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하여 완전히 대답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마 16:3)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언은 원래 가까이 있는 사건들- 즉 예루살렘의 멸망, 유대 교회와 나라의 기간, 이방인의 부르심,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것 등과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들이 비록 유대인들의 일들과 그들 나라의 변혁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복음 교회와 메시야의 왕국에 대해 확실하게 내다보면서 상징적으로 선포된 것이며 또한 신약에서도 그렇게 해석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표현들도 거기에만 특별히 적용되고 다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이 예언들도 이와 같이 예루살렘이 멸망의 한 모형으로 예언되었지만 일반적인 심판을 내다보면서 예언되고 있다. 또한 예언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같이 어떤 구절들은 대개 모형에 대해 적용할 수 있으며 또 어떤 구절들은 원형(原型)에 적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특히 후자가 원형에 가장 가깝게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의혹심을 만족시켜 주시기 위함보다는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들 자체의 구별된 생각을 제시하시기 위함보다는 일어나게 될 그 사건에 대비케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때에 대해 잘 분별하는 것으로써 우리는 이를 갈망해야만 하며 또한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이 예언은 교회에 대해 그렇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세상 끝 날에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을 것이며"(전 1:5, 6, 7, 9) 또한 사건들의 연속과 연결, 그리고 조짐(전조)이 그것들이 일어났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징후들이 그 사건을 가리키는 본 장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현명한 사람의 마음과 같은, 시대의 표적에 대한 이러한 의미들은 그 개선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속이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 그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일이 언제 있겠다는 대답을 듣기 기원하였다. 즉 그 비밀에 대해 알게 되기를 원하였다. 즉 그 비밀에 대해 알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경고는 그들의 의심에 대한 방해물(check)로써,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희 의무에 유의하고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것에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는 은밀한 일들에 관하여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자들은 대부분 미혹하는 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는다(살후 2:3). 제자들은 그들의 고질적인 원수들인 유대인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안심을 하려는 위험 속에 빠지게 되었을 때 "안 된다"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다른 방법으로 더욱 노출되고 있다." 미혹하는 자들은 핍박하는 자보다 더 교회에 대해 위험스러운 대적자들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거짓 선지자"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1.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징후이다. 참된 선지자들을 죽였던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에 미혹되도록 내버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 거짓 그리스도와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에 의해 속임을 받고 깨뜨림을 당하도록 내버림을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그 백성들을 당파나 파벌로 구분시키는 동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파멸을 보다 쉽게 가속화시켰다.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인도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 양(量)을 채우는 데 기여하였다.2.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큰 시련이었으며 따라서 "완전한 자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시련의 상태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이 위장하였던 허울(외식). 사탄은 빛의 천사처럼 나타날 때에 가장 해롭게 행동한다. 가장 큰 악(惡)이 종종 가장 훌륭한 선으로 위장 될 때가 있다.
[1]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11-24절). 속이는 자는 신적인 영감, 즉 직접적인 사명과 예언의 영을 구실로 내세워 위장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러한 일은 전에도 있었으며(렘 23:16; 겔 13:6), 미리 예언된 것이었다(신 13:3).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여기에서 지적된 미혹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교사들과 같은 자들로서 그와 같은 명성을 얻었으나 후에는 그들이 가르쳤던 진리를그러나 배신하고 그릇된 길로 빠지고 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것에서 나온 위험은 더욱 클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둔지(막사)에 있는 한 사람의 배신자는 밖에 있는 천 명의 공공연한 원수들보다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2]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5절), 그 이름이 자신에게 특별히 해당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즉 거짓 그리스도이다"(24절)라고 할 것이다. 메시야의 나타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기대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그에 대하여, "장차 오게 될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오셨을 때 나라의 백성은 그를 거절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했던 자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을 그리스도로 행세하였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이 당시와 예루살렘 멸망 사이에 있었던 몇몇 사기군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데우다스(Theudas)는 코스피우스 파두스(Cospius Fadus)에 의해 실패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벨릭스(Felix)에 의해, 또 어떤 사람은 베스도(Festus)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세데우스(Dosetheus)는 자기가 모세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라고 하였다(Origen adversus Celsum). 박수 시몬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자처하였다(행 8:10).
후대에 이러한 행세자(자칭 무엇인 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일이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이후 약 100년경에 자신을 "발-코크바"(Ba-cochobas)─즉 별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발-코코바"(Ba-cosba)─즉 거짓의 아들임이 입증되었다. 약 50년 전(약 18세기)에 사바티-레위라는 사람이 터키 왕국에서 메시야로 추대되어 유대인들에 의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곧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폴 리카우트(Paul Rycaut)경의 "역사서"를 보라. 천주교도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를 추대하였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그의 대리자로 행세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들을 침범하고 빼앗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와 경쟁자가 되고 또한 그에게 원수가 되고 속이는 자와 적그리스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3]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각처에서 사람들을 자기들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들이 앞잡이와 첩자들을 거느리려고 한다(23절). 사회적인 혼란이 크게 일어나서 백성들이 피난처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할 때 사탄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속이려고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라. 참 그리스도께서는 노력하거나 외치지 않으셨다. 그에 대해서는 "보라, 여기에 있다 ! 보라, 저기에 있다 !"(눅 17:21)고 말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 관하여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한다면, 그것을 시험으로 여겨라. 종교를 수도원의 생활로 대체하는 은둔자들은 "그가 광야에 있다"고 말한다. 봉헌된 성체(천주교의 제물 중 하나─역주)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사제들은 "그가 벽장에 있다, 즉 골방에 있다(eg toij tameioij. 보라, 그는 이 성골함(성인들의 유물을 모신 곳 ─ 즉 그 형상에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리스도나 기독교의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어떤 당파나 종파의 것으로 전유(專有)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과 더불어 세워지고 무너지며, 살고 죽어야만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보라, 그는 이 교회에 있다, 그 회의에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 중의 모든 것으로써 여기나 저기에 있지 않으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신 장소에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으로써 만나신다.
(2) 이러한 거짓 행세를 확증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할 증거. "그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일 것이다"(24절).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확고히 하기 위한 신적인 표적으로써의 참된 이적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표적과 기사로써 우리를 미혹케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옛적에 주어진 그러한 규칙들을 의지해야만 한다(신 13:1-3). "만일 표적과 기사가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신을 믿게 하거나 다른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인하려고 하는 그를 따르지 말라. "왜냐하면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증거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임금"인 사탄에 의해 행해진(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신다) "거짓 기사들"(살후 2:9)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적을 행할 것이다"라고 쓰여지지 않고 "그들이 큰 표적들을 보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보이기 위한 쇼(show)에 불과하다. 그들은 거짓말로 사람들의 고지식함(쉽사리 믿음)을 속이려 하며 또한 애굽의 마술사들이 요술로 속인 것처럼 속임수나 점(占)으로써 그들의 의식을 미혹케 한다.
(3) 이러한 시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루게 될 성취.
[1] "그들은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5절). 또 한번 더 그렇게 할 것이다(11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은 초라한 영혼들을 미혹하는 데 있어서 크게 우세할는지 모른다.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은 적지만 큰길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 사람들이 그들의 표적과 기사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을 원함으로써 그러한 미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적이나 많은 무리가 참된 교회의 확실한 표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온 땅은 그 짐승을 이상히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2]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24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첫째, 미혹의 세력. 그 힘은 많은 사람을 끌어갈 것이며(그 흐름은 매우 강할 것이다), 굳게 섰다고 생각하는 자들까지도 이끌어 가버릴 것이다. 사람의 지식이나 은사들, 학식, 저명한 지위, 긴 신앙 고백이 그들을 안전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영원한 목적에 의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능히 보호해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위험 가운데서도 택함 받은 자들은 안전함. 이것은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삽입구를 보아 알 수 있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미혹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가능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키심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히 6:4, 5, 6)을 미혹할 수는 있지만 택함 받은 자를 미혹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이 미혹을 받게 된다면 그의 선택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외롭다 하셨기"(롬 8:30)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넘기워진) 자들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자들 중 한 사람도 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요 10:28). 그로티우스는 이 구절을 초대 교회의 교인들을 그들의 종교로부터 끌어내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갈렌(Galen)에 의해 격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갈렌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는 "너는 곧 기독자를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4)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미혹하는 자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반복된 경고.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조심하도록(25절) 경고를 하고 계시다. 즉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어디에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해 전해들은 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왕하 6:9, 10).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비록 미혹 받는 데서부터 보호하심을 받게 될지라도 그들은 지정된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또한 말씀의 경고에 대해 적절하게 유의함으로써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던 그의 말씀들을 믿음으로써 보호하심을 받게 된다.
[1] 우리는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23절). 우리는 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그의 영적인 임재가 "그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리스도가 땅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너희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끌어내려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것들을 결코 믿지 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된 기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원수는 공연히 쉽게 믿어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한 자는 모든 말을 쉽게 믿어 버리며, 또 모든 외침에 쉽게 뒤 따라 간다.
???????? ?????????? ─즉 믿는 것을 조심하라.
[2] 우리는 "그가 광야에 있다," 혹은 "그가 골방에 있다"(26절)고 말하는 자들을 따라 나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나 자처하는 행세자들의 말을 경청하거나, 또는 우리들에게 새 그리스도나 새 복음을 가리키는 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나가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따라가면 그들로 말미암아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로운 길에서 벗어나라. 바람에 흔들리는 자가 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헛된 호기심은 그를 악질적인 배교자로 빠지게 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때에 너희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너희의 마음을 은혜로써 강건케 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것이다.
Ⅱ. 그는 그들에게 있을 전쟁과 큰 난리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신다(6,7절).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을 때 나라에는 평온함이 있었고 아누스의 전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이러한 "화평"(눅 12:51)을 "전하기"위함이나 또는 지속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 그의 성과 벽은 고통의 때에도 세워지며 또한 전쟁 때일지라도 그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또한 그가 "그들의 집을 황폐하도록 내버려 둔" 이후로 "그 칼은 그들의 집에서부터 떠나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칼"은 결코 잠잠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검으로 하여금 외식하는 국가와 그의 진노의 백성을 징계하는 책임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그 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보면,
1.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 있다. 너희는 이제 머지 않아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난리(전쟁)가 일어날 때 그들은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전쟁은 어지러히 소리를 내기"(사 9:5) 때문이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라! (렘 4:19) "오 내 영혼아, 너는 듣느냐. 이 전쟁의 경보를 !"(사역) 평온한 땅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일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난리의 소문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복음을 거절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라! 평화의 사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 자는 전쟁의 사자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 즉 그의 새로운 언약에 대해 논쟁한 것을 복수하시려고 칼을 준비하고 계시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즉 유대 나라의 한 부분이나 한 지방이 다른 지방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한 성읍이 다른 성읍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대하 15:5, 6). 동일한 지방과 성에서 한 당파나 종파가 다른 당파나 종파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상대편에 의해 삼킴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박살이 나게 될 것이다(사 9:19-21).2. 그 날의 의무에 대한 서술.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러한 슬픈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음이 확고히 안정되고 하나님을 믿는 곳에 평화가 유지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전재의 불길한 소식이나 난리의 소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도한 "병기"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없을 것이다.
Mhqroei/qe -즉 소동하거나 동요되지 말라. 아이 밴 여자처럼 놀라움으로 고통하지 말라. ovra/te "(무서워)하지 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마음에 근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유의하고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고통의 때에 근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근심하지 말아야만 한다.
(1)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기대하도록 명령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멸망당해야만 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구속자의 명예가 나타나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그 말씀은 적당한 때에 성취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사건들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에 대한 고찰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해 지정된 일을 수행하시는 것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의 지나친 근심은 그 지정된 사실에 대하여 해석상의 논쟁을 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잠잠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더 있다가 있을 일을 끝(end)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의 소산물(necessitate decreti)로써 뿐만 아니라 하나의 수단(necessitate medii)으로써" 이런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옛집은 허물어져야만 한다(비록 그것이 소음이나 먼지 또는 위험이 없이 행해질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진동하게 될 것들(그것은 좋지 못한 진동이다)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변동되어야만 한다"(히 12:27).
(2)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더 악화될 것을 기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은 아니니라." 마지막 때는 아니며,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고통을 각오해야만 하며 더구나 하나의 고통이 끝나면 다른 고통이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통들의 끝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 유대인의 세력을 꺼꾸러뜨리기 위해 사용된 심판보다 더 큰 심판들이 있어야만 한다. 더 많은 진노의 대접이 쏟아져야만 한다. 지나간 재앙은 단지 하나에 불과하며 장차 와야 할 재앙들이 더 많이 있다. 하나니님의 화살통에서 그들을 향하여 쏘아야 할 화살이 더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거나 근심하려고 하지 말라. 현재의 짐에 깔려 가라앉지 말라. 아직 너희 앞에 있는 것에 부닥치기 위하여 온 힘과 마음을 다하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라. 기근과 온역이 닥쳐 올 때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도(소식)을 깨닫기 위한"(사 8:19) 초조감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뼈와 살을 건드릴" 때는 어떤 충격을 느끼게 될 것인가? 만일 우리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려고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길 도중에 있는 작은 시냇물을 보고 놀란다면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Ⅲ. 주님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보내어진 다른 심판들-즉 "기근과 온역과 지진"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시다. 기근은 종종 전쟁의 결과이며, 온역은 기근의 결과이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세 종류의 심판이었다. 다윗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가장 나쁜 것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백성들에게 쏟아졌을 때 얼마나 무섭게 황폐시켰을 것인가! 전쟁 이외에(그것으로 족한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재앙이 있게 될 것이다.
1. "기근." 이 말은 "세번째 인봉"이 있을 때 나타난 "검은 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계 6:5, 6). 우리는 그리스도 이후 오래지 않아 유대에 기근이 있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매우 심한 것이었다(행 11:28). 그러나 더 심한 기근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그 곳에 있었다(애 4:9, 10 참조).2. "온역." "네번째 인봉"이 있을 때 "청황색 말과 거기에 탄 사망"과 "음부"에 의해 표시되었다(계 6:7, 8). 이것은 무분별하게 마구 멸망시키며 또한 잠시 동안에 무더기를 쌓아 올린다.
3. "처처에 일어나는 지진" 또는 장소마다 일어나는 지진. 그들이 "웃시야 때"(슥 14:5)있었던 지진에서 피하여 도망하였던 것처럼 그곳에서 도망하는 자들을 따라 이곳 저곳으로 피하여 따라갈 것이다. 큰 파멸은 종종 최근이나 이전에 있었던 지진으로 말미암아 행해져 왔다. 이 지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계시적인 환상에서 주목할 것은 지진이 교회에 대해 유익하였으며 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계 6:12, 15; 11:12, 13, 19; 16:17-19 을 비교).
하나님께서 "무섭게 땅을 진동시키실 때"(사 2:21), 지진은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하며"(욥 38:13), "만국의 소원(역주:개역 성경에는 보배라고 번역됨)"을 나타내게 한다(학 2:6, 7). 그러나 여기에서 지진들은 무서운 심판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슬픔의 시작," 즉 wvdiwn -즉 해산의 진통의 시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빠르고 맹렬하며, 그러면서도 지루하게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는 압도하실 것이며, 그가 분노를 나타내기 "시작하실때"는 "끝까지 하실"(삼상 3:12)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자들 앞에 놓여 있는 영원한 참상을 내다보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큰 현세적인 심판에 관하여 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들은 슬픔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도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뒤에는 더 나쁜 것이 있다."
Ⅳ.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과 또한 종교적인 일반 적인 배교와 부패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9,10,12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십자가"가 예언하고 있다(9절). 모든 미래적인 사건들 중에서 비록 우리가 대개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기근과 온역이 만연하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이 기독자들 때문이라고 전가시킬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그들을 박해하는 구실로 삼을 것이다. Christianos ad leones- 즉 기독자들을 사자들에게 보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실 때에 그들이 직면하게 될 어려운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그들은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고난받을수록 그것이 더욱 채워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기억케 하고 계시다(골 1:24).(1) 그들은 바울처럼 쇠사슬에 매임과 투옥, "비방, 매맞음"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고후 11:23-25). 즉 그들은 즉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종종 실제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죽음을 맛보도록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고전 4:9, 11).
(2) 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너무도 잔인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피 이외는 그들을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물과 같이 피에 목말라 있으며 그것을 빨아먹으며 쏟을 것이다.
(3) 그들은 주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마 10:22)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일반적으로 기독자에 대한 적개심과 악의에 차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자들처럼 그들에 의해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기독자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으며, 세상의 악의에 대한 공통적인 표적이 되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대우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순교자를 만들고 또한 그를 위로하는 이유가 된다. 그들이 이와 같이 미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향하여 분노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왕국에 떨어진 치명적인 충격과 또한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귀는 "큰 진노를 가지고 내려왔다."
2. "십자가의 방해물"(10-12절). 이와 같이 사탄은 힘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의 백성과 사역자들의 고난으로부터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실 것이다. 박해의 나쁜 결과들에 대하여 여기에서 세 가지로 예언되었다.
(1) 어떤 사람의 "배교." 기독교의 신앙 고백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방해를 받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맨 먼저 불화가 생기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이탈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다투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냉담하게 되고 지치게 되며, 마침내는 그것을 배반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의의 길을 알았던 자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그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종종 처음에는 잘 시작하였으나 어떤 것이 그들로 하여금 방해를 한 탈선자들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에게서 나간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는 전에 이에 대하여 들은 바 있다.
[2] 고난의 때는 흔드는(shaking)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돌밭과 같은 경이자"(마 13:21)들로서 좋은 날씨에는 견디나 폭풍이 불 때에는 넘어져 버리는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햇빛이 비칠 때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구름 낀 어두운 날에 이리 저리로 움직이실 것이며 그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만을 남겨 두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값싸게 소유할 수 있을 때 또는 안일무사하게 그것과 더불어 잠잘 수 있을 때 자신들의 종교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신앙 고백이 그들에게 부담을 준다면 그들은 즉시로 그것을 그만 둘 것이다.
(2) 또 어떤 사람들의 "악의." 박해가 유행하게 될 때 시기와 적개심, 악의는 감염에 의해 사람의 마음속에 이상하게 퍼지게 된다. 또한 자비와 온유, 겸손은 특이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며, 이것은 사람을 적은 새와 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서로 잡아 줄 것이다." 즉 "자신의 종교를 배반하여 버리는 자들은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 자들을 미워하고 배반할 것이다. 그들은 저들에 대하여 우정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였었다." 배신자들은 대개 가장 잔인하고 낙폭한 박해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박해하는 때는 발견하는 때라는 사실이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은 그 때에 자신의 변장을 벗어버릴 것이며 또한 이리로 본색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잡아 주고 미워할 것이다." 배교와 미움, 즉 두 가지 최상의 것(진리와 사랑)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일들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일들은 그것들이 우세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몇 개의 논쟁하는 종파들이 다른 종파에게 행하였던 야만적인 대우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마치 떡을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킨 자들이 "서로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이와 같이 서로 물고 뜯도록 내버림을 당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것은 마태복음 10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가까이 있었던 자들이 그들에게 행하였던 악행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죽는 데 내어 주며."
(3)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법이 성하게"되고 사랑이 식어짐(12절).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는 미혹의 때와 성도들이 미움을 받게 되는 박해의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될 것이다.
[1] 불법이 "성함." 세상에는 언제나 사악함이 있지만 종종 거기에 "불법"이 특별한 방식으로 성하다고 말해진다. 즉 그것은 평상시보다 불법이 더 많아진 경우이며, 옛 세상과 같이 "모든 육체가 제멋대로 타락한"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평상시보다 도가 "지나친 것"을 말하며, "포악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을 때"(겔 7:11)를 말한다. 그러므로 지옥과 같은 상태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과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출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2] 사랑이 "식어짐." 이것은 전자의 결과이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여기에 언급된 사랑은 일반적으로 "사랑"안에 모두 총괄되어 있는 참된 경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악한 자가 열심히 뜨겁게 악한 일을 할 때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그들의 신앙 고백에서부터 점점 식어지는 일은 너무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에베소 교회가 어려운 때에 "첫사랑을 버렸던 것"(계 2:2-4)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특별히 형제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법, 즉 미혹케 하는 불법이나 핍박하는 불법이 성하게 될 때, 이러한 은혜는 대개 식어지기 마련이다. 기독자는 서로를 꺼리게 되고 의심하게 되며, 사랑이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거리감이 조성되고 분파가 만들어지며, 그리하여 사랑은 없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마귀는 형제들을 그들의 원수들에게 고소할 뿐만 아니라(그들의 원수들은 박해하는 불법을 성하게 만든다), 서로 서로에 대해 고소하도록 만든다(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식게 한다).
이 사실은 장차 이와 같이 사랑이 매우 식어질 것이라는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첫째,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최악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고 열심 있는 남은 자를 남겨 두고 계신다. 이는 엘리야 때에 그가 홀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사랑은 점차 식어지는 것이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점점 감소되는 것이며,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뿌리에는 생명이 있으며, 겨울이 지난 후에는 그 자체가 드러나 보일 것이다. 새로운 성품은 "식어질 수"는 있지만, "낡아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점점 시들어져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이러한 상황 아래에 놓여 있는 주님의 백성을 후원하기 위하여 이 십자가의 방해물과 연관하여 보충된 위로(13절).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 비록 많은 사람이 방해를 받게 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대개 그리스도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뒤로 쳐지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큰 대의가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라앉게 되거나 또는 그의 이름이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망각되지나 않을까 하는 사실에 대하여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은혜로 택하심를 따라 남은 자"가 있다(롬 11:5). 이것은 이러한 예언이 관련된 동일한 때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멸망에로 떨어진" 자들이 아닌, "영혼이 구원받기 위하여" 믿고 견디는 남은 자들에게 관하여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끝까지 견디어야만 한다. 즉 그들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현재 시련 상태가 끝날 때까지 또한 이러한 고난의 시험기간이 끝날 때까지, 비록 그들이 피흘리기까지 참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마지막 會戰(회전)까지 견디어야만 한다.
(2)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와 같이 끝까지 견디며 꾸준히 참는 자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인내는 거저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면류관을 얻으며, 그것을 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괴로움에서 구출되어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말한다. 생의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과 소망의 결과(end)를 얻게 될 것이며,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9; 롬 2:7; 계 3:20). 영광의 면류관은 모든 사람을 보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유의함으로써 박해자들과 더불어 궁전에 사는 것보다는 박해받는 자들과 더불어 화형을 받는 것을 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그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14절).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천국 복음"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것이 영광의 나라에로 인도하는 은혜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천국 복음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립하며, 저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나라를 확고히 하고 있다.2. 이 복음은 조만간에 온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될 것이며, 또한 모든 민족들은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상 끝까지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첫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3. 복음이 전파된 것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와 사랑이 하나님에게 기대할 수 있는 보상에 관하여 하나님의 생각고 뜻을 신실하게 전파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자들과 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 "기록"(요일 5:11)이요, "증거"이다(막 16:6 참조). 그런데 이 사실이 어떻게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가?
(1) 이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 그 당시 알려진 세상 전역에 최소한 알려지게도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구약 교회는 신약 교회가 훌륭하게 세워지고, 두드러진 기반을 가지며, 서서히 그 자태를 드러나기까지 완전히 해체되어서는 안 되었다.
완전히 타락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는 면목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40년 안에 복음의 "소리"는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갔다"(롬 10:18).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 근처까지 완전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다른 사도들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한 것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함으로써 "각처로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파하게 하였다"(행 8:1-4). 구원자의 소식이 온 세상에 전달될 때에 유대 민족의 종말이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죽게 함으로써 그 복음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그들이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그 복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믿었으며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그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버렸다"(요 11:48). 바울은 복음이 "온 세상에 이르렀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다'(골 1:6-23)고 말하고 있다.
(2) 이것은 시험과 고통, 박해의 때에도 천국 복음이 전파되고 널리 퍼질 것이며,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고 나갈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교회의 원수들이 "뜨겁게"되고 많은 친구들이 "냉정해"진다고 할지라도 복음은 전파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검과 화염으로 멸망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며 아첨에 의해 부패하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큰 공적을 쌓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단 11:32, 33; 빌 1:12, 14 참조).
(3) 여기에서 주요하게 의도된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세상 끝이 복음이 그 사역을 다 완수한 "때"가 될 것이며, 그 이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너희가 죽을 때 전파되며 또한 그 사역은 수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은 처음이든 나중이든 복음을 즐거워하든지 거절하든지 하게 될 것이다. 나라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넘겨주게 될"때 "세상 끝이 온다." 하나님의 비밀이 끝이 나고, 신비스러운 몸이 완성되고, 민족들이 복음에 의해 개종되거나 구원될 때 또는 깨닫거나 잠잠하게 될 때에야 그가 전에 말씀하신(6, 7절) "끝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즉 그러한 중개적인 계획이 완성되기 전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부르심을 받게되기까지는 계속적으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함께 모아질 때 즉각적으로 세상은 화염에 싸이게 될 것이다.
Ⅵ. 주님께서는 특별히 유대인들과 그들의 성읍, 성전, 국가에 임하고 있었던 파멸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시다(15절 이하).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성전 파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관하여 더욱 자세하게 말하고 계시다. 또한 그가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위대한 사건들과 연관하여 그들의 행동과 위로에 큰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재난의 몇 가지 단계들을 묘사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흔히 전쟁시에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1. 로마인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곳에 두었다."(15절).(1)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을 로마 총독이 성전에 세운 어떤 형상이나 동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상은 유대인들에게 몹시 걸리는 것이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모반하도록 하는 동기가 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디오커스가 하나님의 제단에 세우도록 명하였던 쥬피터 올림푸스의 형상은 bde,lugma evrmw,sewj ─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역사가에 의해 여기에 사용된 것과 똑 같은 단어이다(마카비 일서 1:54).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곳에 있는 동상보다 더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갈리굴라가 자신의 형상을 거기에 세우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행했던 거센 반발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일은 그것은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빚어냈으며 페트로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그 일이 조정되었다. 그러나 헤롯은 성전 문에 독수리를 세워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티토의 동상이 성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2)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누가복음 21장 20절에 있는 병행 구절, 즉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에 의해 해석하려고 하였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요,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며, 예루살렘 주위에 자리잡고 있는 모리아 산은 성전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성읍들에 로마 군대는 진을 쳤으며, 그것이 바로 멸망케 한 가증한 것이었다. 원수의 땅이 "너의 미워하는 땅"(사 7:16)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적군은 연약하면서도 사악한 백성들에게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더욱 명백하게 말하였다. 그는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디오커스에 의해 세워질 것이었다(단 11:31; 12:11).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을 천사가 다니엘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단 9:27), 그것은 앞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고 난 오랜 후에, 70주의 끝에 와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널리 퍼지게 되기 때문에" 또는 난외주의 읽기와 같이 "가증스러운 군대로써"(여기에 있는 예언과 같다) "그는 그것들을 황폐케 할 것이다."
우상 예배자들의 군대가 "가증한 군대들"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소동과 폭동 그리고 성전과 성읍에서의 가증스러운 내분과 난동이 최소한 황폐케 하는 가증스러운 것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성읍과 성전의 멸망이 구약에 어떻게 언급되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다니엘의 예언을 언급하고 계시다. 구약은 그의 예언을 확증하며 그것에 대한 증오를 제거할 것이다. 그들은 이로부터 그 시간을 추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즉 왕이신 메시야가 잘리고 난 후 곧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멸망을 초래케 한 죄 ─ 즉 메시야와 그 말씀의 확실성을 거절해 버린 것 ─ 는 "이미 결정된 멸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규칙으로써 그 율법을 확고히 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예언으로써 구약의 예언들을 확고히 하셨으며 또한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대개 어둡고 불분명한 예언이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망록을 삽입하고 계신다. 즉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즉 다니엘의 예언을 읽는 자는 그것이 머지 않아 예루살렘의 멸망 시에 성취될 것임을 깨닫도록 하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을 읽는 자들은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읽는 것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사용할 수 없다. 요한복음 5장 39절과 사도행전 8장 30절을 보라. 이 예언을 다니엘에게 전달하였던 천사는 "그에게 깨달아 알 것"(단 9:25)을 고취시키고 있다. 우리는 비록 애매 모호한 예언들이라 할지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위대한 신약의 예언은 "비밀"이 아닌, "계시"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제 "계시된 것들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며," 따라서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탐구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하여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 때를 깨닫도록"하라(대상 1:32). 살피고 주목하도록 하라(어떤 사람은 그렇게 읽고 있다.) 미혹된 백성들이 품고 있는 헛된 소망에도 불구하고 가증스러운 군대들을 황폐케 할 것임을 확신하도록 하라.
2. 생각 있는 사람이 취하게 될 생존의 수단.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 때에는 도망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1) 우리는 이 말씀을 파멸 그 자체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거나 다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마지막 수단인 도망치는 방법을 써야만 한다. 이것은 예례미야가 공연한 헛수고라고 강조하며 말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가지 예루살렘이 갈대아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저항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차라리 굴복하고 항복하는 것이 지혜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것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명하고 있다.
(2)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부귀를 정욕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성읍과 나라의 보존을 위해 싸우고 항쟁하는 자들과 더불어 "동맹"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로마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다툼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멸망하기 몇 해 전에 사도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약 4:1-3). 롯이 소돔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을 포기하였듯이, 진행된 섭리에 순응하며 될 수 있는 데로 빨리 성읍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1] 그들이 어디로 도망가야만 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 즉 유대에서 산으로 도망갈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산들이 아니라, 그 나라의 먼 곳에 있는 산들을 말한다. 이러한 곳은 그들의 힘에 의한 것보다는 은밀한 곳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난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산에 흩어져 있다"(대하 18:16)고 말해진다. 선동적인 유대인들이나 격분에 찬 로마인들 가운데 있는 것보다는 사자굴이나 표범들이 있는 산에 거하는 편이 오히려 안전할 것이다(히 11:38 참조).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임박한 위험이나 멸망의 때에 선하고 정직한 수단들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도망가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이 위대한 곳인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무의 길에서가 아닌, 위험의 길에서 벗어나가는 동안에 우리는 "쫓겨난 자를 위해 거처"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사 16:4, 5). 우리가 가정에 있을 때 안전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야만 안전하게 될 공공적인 재난 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도망가도록 하실 것이다. 도망가는 자는 다시 싸울 수가 있다.
[2] 그들은 어떻게 서둘러야만 하는가?(17, 18절) 생명에는 즉각적인 위험이 있게 될 것이며, 천벌은 갑자기 파괴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지붕 위에 있는"자는 경고가 있을 때 자신의 휴대품을 찾기 위하여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도망가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길로 가라. 이와 마찬가지로 "밭에 있게" 될 자는 즉각적으로 도망가며 또한 자신의 옷이나 집에 있는 재물을 가지려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의 물건을 싸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의 도망가는 것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죽음이 문 앞에 있을 때에 지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롯에게 주어진 명령이었다. 비참한 죄악의 상태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멸망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갈 필요성에 대하여 깨닫는 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고 난 후 그들이 지체함으로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둘째, 자신의 옷을 가지거나 그밖에 소용되는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짐만 될 뿐이며 그가 도망가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수리아인들은 도망갈 때 자신들의 겉옷들을 다 던져버렸다(왕하 7:15).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지만 "우리의 생명이 노략물처럼 주어진"(렘 45:4, 5)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가장 적게 가진 자는 가장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다 Cantabit vacuus coram latrone viator ─ 즉 돈이 없는 여행자는 강도에게 빼앗길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옷들과 집들을 잊어버릴 것을 말씀하신 대상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하늘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원수도 탈취할 수 없는 보물과 영구적인 옷을 거기에 가지고 있었다. Omnia meamecum porto ─ 즉 나에게 있는 것이 내 재산의 전부이다라고 철학자 비아스(Bias)는 맨 손으로 도망하면서 말하였다. 마음속에 은혜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요한 이외는 그 누구도 살아서 이 비참한 날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그들은 산 속에 숨을 필요가 없었지만(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하늘에 숨기셨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이 명령을 남겼으며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이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기독자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멸망을 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안전한 "펠라"라는 성읍에 모두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죽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기독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유세비우스의 역사책 3권 3장을 보라. 이와 같이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잠 22:3; 히 11:7). 이 경고는 사사로히 지켜지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오래 전에 발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이것을 믿지 않음으로 멸망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는 진노에 관하여 하셨던 경고를 믿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멸망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3] 그 때에 이러한 재나은 누구에게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는가?(19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제 막 죽게 되실 상황에서 말씀하신 사건과 동일하다. 즉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 23:29). 아이가 없기 때문에 그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때에 아이를 밴 자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자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비참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첫째, 그들에게 기근은 더욱 쓰라린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 자신들은 재난 때문에 바다의 괴물같이 더욱 잔인하게 될 것이다(애 4:3, 4).
둘째, 그들에게 칼은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칼은 성난 맹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아이를 밴 여자가 성난 정복자에 의해 베임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실로 비참한 조산술이 아닐 수 없다(왕하 15:16; 호 13:16; 암 1:13). 또는 "살인자에게 어린아이가 인도되어 오는 것"(호 9:13)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셋째, 그들에겐 역시 도망가는 것도 매우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서둘러 가거나 앞장서서 갈 수 없다. 젖먹이는 결코 버릴 수 없다. 만일 버린다고 할지라도 "여자가 그 아이에 대한 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아이를 가지고 도망한다면 도망치는 어머니의 걸음은 지체하게 되어 생명이 위태롭게 되며, 간호원이 데리고 도망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된 무비보셋의 운명과 같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삼하 4:4).
[4] 이 때에 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가?─"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절).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고통과 재난의 때에 많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울린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각처에서 고통을 받게 될 때에 때를 맞추어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고통에 대하여 위안을 가져다준다. 너희가 도망가는 것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진노를 결코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 비록 "노아나 다니엘이 그 앞에 서서" 간구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의 진노를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그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러나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노력하라. 또한 너희가 도망가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가 없을 때에는 그 환경이 은혜스럽게 명령되도록 기도하라. 즉 그 심판의 대접이 너희에게서 지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심판의 절정이 너희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건들의 형세를 처리하시며, 이것은 종종 여러 방법으로 큰 변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눈은 그러한 일들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일 때문에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가 그들에게 그러한 것을 주시려는 의도가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재난 가운데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베푸시는 긍휼함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점에서 그것이 악화되었는가를 알고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위하여,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도망가게 될 때에 그 일이 가장 편리한 때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고통이 먼 거리에서 예상될 때 미리 기도의 재료를 쌓아 두는 것이 좋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첫째, "그들의 도망하는 일"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겨울에는 낮이 짧고 날씨가 추우며, 길이 지저분하기 때문에 특히 전 가족이 여행하기에는 너무도 불편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속히 올 것을 재촉하고 있다(딤후 4:21).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몸의 안락은 "주요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못되지만, "적당하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보내시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육체적인 편의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몸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즉 유대인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여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날에 밀 이삭을 뽑아 먹는 것에 화를 냈던 그들에게 걸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날에 여행하도록 강요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비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일의 안식일(일요일)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 교호에서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의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교회의 어떤 규례에 대해서도 읽어볼 수 없다. 그것들은 순전히 의식적인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도 이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도 가지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종종 안식일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일반적으로 여행과 세상의 수고로부터 휴식하는 날로 준수되는 날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제 4 계명에 대한 주님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안식일에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원수들에게서 도망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안식일에는 도망가지 말도록 하라. 비록 그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가장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가장 적은 죄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은 선한 사람이 안식일에 하나님께 엄숙하게 봉사하거나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것은 좋지 못하고 불유쾌한 일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조용하고 안정된 안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하며, 안식일에 행하는 안식일의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혼란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도망하여 피신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임무를 떠맡게 해 줄 또 다른 안식일의 유익과 위로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임으로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겨울에 도망하는 것은 몸에 별로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안식일에 도망가는 것은 영혼에 대해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이전 안식일을 회상하게 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시 42:4 참조).
3. 즉각적으로 일어나게 될 큰 고통(21절).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불법의 量(양)이 가득 찼을 때, 하나님의 종들이 갇히고 투옥될 때 그 환난은 임할 것이다. 롯이 소알로 들어가고 즉각적으로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 전에는 어떤 일도 소돔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성읍에 온역과 기근이 만연해지고 또한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은) 종파와 분파가 생기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동료들에게 대적하여 검을 들게 될 때 그것이 실로 큰 환난이 아닐 수 없다. 그때에 거기에서는 가련한 여자의 손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있었다. 성 밖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반역한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격분하여 그들을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다윗이 기피할 수 있었던, 세 가지 비참한 심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전쟁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다 기근과 온역이 겁쳐 있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의 전쟁사"에는 어떤 역사책에 있는 것보다도 더 비극적인 구절들이 담겨져 있다.(1) 그러한 황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창세로부터 지금까지도 없는 것이었다." 많은 성읍들과 나라들이 황폐하였었지만, 이와 같은 황폐는 결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철부지와 같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악의 것을 향하셨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보다 큰 가증한 것들을 보시게 될 때 풀무불을 일곱 번이나 아니 그 이상 일곱 번이나 뜨겁게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를 쉽게 정복하였던 그들의 조상들의 명예와 위신을 떨어뜨렸다. 또한 유대인들의 고집과 완고함이 환란을 더욱 증가시키는 데 한 몫을 하였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예루살렘의 죄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죄였으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멸망이었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 고백과 특권에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만일 그들이 그러한 특권을 남용하고 거짓된 신앙 고백을 한다면 그의 심판은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 될 것이다(암 3:2).
(2) 그러한 황폐는 오래 계속이 된다면 참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22절). 그러한 많은 비참한 상태와 이러한 부수적인 일들에서 사망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을 것이며 대체로 모든 사람이 잘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칼을 피한 자는 다른 칼에 의해 쓰러지게 될 것이다(사 24:17, 18). 요세푸스는 그 당시에 몇 장소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약 200만 명에 이른다고 계산하였다.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그는 "모든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육체가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날에 영혼이 구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삶이 그렇게 덧없이 희생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삶이 잠시만 더 지속된다면 완전히 끝장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작정
무화과나무의 비유 (마태복음 24:32-51)
Ⅰ. 우리는 그것들을 기대해야만 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32, 33절). 너희가 들은 바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배우라. 때의 징조들을 살피고 깨달으며 또한 그것들을 말씀의 예언들과 비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실을 보고 이에 뒤따른 준비를 하기 위하여 문 앞에 와 있는 것을 예견하도록 하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것이 싹이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여름이 왔다는 전조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역주:단지 그 사실만을 가리킬 뿐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황새"와 같이, 땅에 있는 나무도 "자신들의 정해진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제 2원인을 그 활동을 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진행과 완성을 보장해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을 성취하기 시작하실 때 그는 결말을 내시고야 말 것이다. 자연의 활동에 있는 것과 같이 섭리의 활동에는 어떤 연속성(series)이 있다. 때의 징조는 "천기"의 예측(마 16:3)과 비교되며 여기에서는 "地勢(지세)"와 비교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싹이 돋을 때 우리는 여름이 오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즉각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멀리서 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지가 연하여지면" 우리는 여름이 오기 전에 3월의 바람들과 4월의 소나기를 예상할 수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는 복음의 시대가 끝나갈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완성의 날이 올 것임을 깨닫도록 하라. 계시된 일들은 반드시 속히 일어나게 될 것이다(계 1:1). 그것들은 지정된 순서를 따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는 여기에서,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마음이 쏠려있는 것이며 그들이 찾고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계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박하였느니라'라고 병행 구절(눅 21:31)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의의 나무가 싹이 트고 꽃이 필 때, 하나님의 백성이 신실성을 약속할 때 그것은 좋은 때에 대한 행복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시며 먼저 그들이 마음을 준비시킨 다음에 그는 그것을 계속적으로 진행시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날들에서 그것을 소생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예언된,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들에 대해 하나씩 다루어 나가도록 하자.
1.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계시다(35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천지는 이 날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속되었으나,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시 102:25, 26; 벧후 3:10).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천지보다 더욱 확실하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말씀하셨는가? 그는 그것을 하지 않으실 것인가?" 우리는 하늘의 기둥이나 땅의 단단한 기초 위에 보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더욱 확고하게 세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흔들리고 기우뚱거릴 때 또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될 때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남게 될 것이며 또한 강력하고 힘있게 효력 있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1:24, 25).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쉬우리라"(눅 16:17; 사 54:10 비교).이러한 예언들의 성취가 더딘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며, 중간에 삽입된 사건들이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말한 시간과 방법대로 성취도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최상의 때인 하나님의 때에, 또한 가장 최선의 방법인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말씀은 정녕코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매우 정결하며 따라서 매우 확실하다.
2. 그는 여기에서 그것들의 때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시다(34, 36절). 이 점에 대해서는 박학한 그로티우스가 잘 관찰하였는데, 즉 그에 따르면 tauta ("이것들," 34절)과 ekeinh ("그 날과 시간," 36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예언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1) "이 일들," 즉 여기에 예언된 난리들과 미혹하는 일고, 박해하는 일들에 관하여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4절).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과 또한 유대교회가 끝장이 나게 되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될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엄숙한 강조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이에 대한 나의 말, 즉 이러한 일들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 멸망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과 백성을 더욱 감동시키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준비하도록 재촉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시험과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늙은 자들은 아낙 자손이 그들의 마지막 교전을 위해 예비 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
(2)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종말을 고하게 될 "그 날과 그때"에 관하여(36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편지로부터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살후 2:2)는 사실을 추론하였던 "자들"처럼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결코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 세대"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세대들은 "그 날과 그때"가 오기 전에 "없어질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장차 오는 심판을 위해 정해진 확실한 날과 시간이 있다. 그것이 "주님의 날"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변경할 수 없이 고정된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떤 심판도 "무기한으로"(sine die) 연기되지는 않는다.
[2] 그 날과 그때는 큰 비밀이다.
Prudens futuri temporis exitum
Calginosa nocte premit Deus.
하늘은 현명하게 사람의 시야에서 가리워져 있네.
어두움은 앞날의 운명을 정하나니,
그들의 씨앗들은 밤의 심연 속에 뿌려 졌어라. ─ Horace ─
"아무도 그 때를 모른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그들의 명철로도 알지 못하며, 가장 훌륭한 사람이 어떤 신적인 발견으로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날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아니, 천사들도 알지 못한다. 지식에 대한 그들의 재능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유익한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할지라도(그들은 빛의 근원에 살고 있다), 그들이 그 날의 제전에 초대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날이 언제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듣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주 하나님에게 속한 은밀한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시간의 불확실성은 깨어 주시하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맛"이며, 그들로 하여금 더욱 깨어 있게 한다. 그러나 무관심한 자들에게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이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더욱 무관심하게 만들어 버린다.
Ⅱ.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방심과 호색에 대한 경고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비참한 날을 가져다 줄 것이다(37-41절). 이 구절들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일깨우고 경성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심판의 개념을 우리들에게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놀라운 날이 될 것이며 또한 구분시키는 날이 될 것이다.
1. 그 날은 대홍수가 옛 세상에 대해 놀라움을 주었던 것처럼, 놀라운 날이 될 것이다(37-39절). 그가 여기에서 서술하려고 의도하시는 것은 인자가 임할 때에 펼쳐질 세상의 정세이다. 그는 처음에 구원하러 오셨지만 다음에는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는 "내가 심판하러 왔노라"(요 9:39)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장차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말씀과 검의 심판이 모두 그에게 위임되어 있다.여기에 있는 심판은 다음의 심판에 적용할 수 있다.
(1) "일시적인 심판"으로 특히 지금 유대 국가와 백성들에게 재촉하고 있었던 심판을 말한다. 그들은 이에 대해 분명한 경고를 받았고 또한 그것의 전조였던 많은 이적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평안과 안전"(살전 5:3)을 부르짖으면서 무사안일을 추구하였다. 예루살렘은 티토 베스파시안(Titus Vespasian)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그 때가 바로 유월절에 환락의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였다. 라이스 백성들과 같이 그들은 멸망이 그들에게 임박하였을 때도 무관심하게 생활하였다(삿 18:7, 27). 구약과 신약에 있는 바벨론의 멸망은 그들이 "내가 영원히 주모가 되리라"(사 47:7-9; 계 18:7)고 말할 때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앙은 순간적으로 하루만에 임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노(협박)를 결코 무익한 것으로 만들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영원한 심판"으로. 큰 심판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불리우고 있다(히 6:2). 에녹으로부터 심판에 대해 유의하도록 경고를 받았지만, 막상 그 심판이 이를 때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가까이 이른 마지막 날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 3:4; 눅 18:8)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있는 세상이 불로 멸망당할 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이 범람하여 옛 세상이 멸망하였을 때도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벧후 3:6, 7).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멸망이 임박하였을 때 옛 세상의 정세가 어떠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1] 그들은 육욕적이었고, 세속적이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을 갔다." 그들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모독하였다고 말해진다(이것들은 그들 중의 가장 사악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죄였다. "땅에는 강포가 가득하였다."). 그들은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에 도취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을 멸망케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교에 대해 보편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은 이곳 저곳의 산재해 있는 무모한 반종교의 특별한 사례들보다 더 위험한 조짐이라는 사실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인류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Licitus perimus omnes ─ 즉 이러한 당연한 일들이 우리를 파멸시키며 부당하게 실행되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 무분별하였으며, 육욕적인 즐거움과 세상의 유익을 좇아 지나치게 몰두하였다. 그들은 전적으로 이것들에 흥미를 가졌으며, h-san trw,gontej 즉 그들은 먹었었다. 그들은 마치 "먹고 마시는 것"(사 56:12)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둘째, 그들은 이 일에 무분별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경고를 받았던 그 멸망이 문 앞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육신에 전혀 몰두하였다. 그들은 회개하고 기도해야만 할 때,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통곡하고 애곡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그들은 "쾌락"을 즐겼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으며, 후에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죄를 범하였다(사 22:12, 14). 특히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던 것은 그들이 일깨움을 받았던 그러한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그것이 짧은 목숨이 될 것이니 더욱 즐기도록 하자." 사도 야고보는 이것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부요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생활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해야 할 때 그들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그들의 마음을 살지게 하였다'(약 5:1, 5).
[2] 그들은 안심하였으며,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39줄어들). "깨닫지 못하였다." 참으로 그들은 알지를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그것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던가?(벧전 3:19, 20)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즉,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알 수 있었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평화에 속한 일들"에 대해 안 것은, 만일 우리가 그것에 믿음을 혼합시키고 이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결혼하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이유를 열거하면,
첫째, 그들은 안심하였기 때문에 육욕적이 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고 이 세상이 쾌락에 휘말려든 이유는 그들에게 임한 영원성을 깨닫거나 믿거나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이 곧 결말이 지어져야만 하며 또한 우리가 확실히 오래 살아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이처럼 그런 것들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들은 육욕적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먹고 마셨기 때문에 홍수가 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현재 보이는 일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경고를 받은 보이지 않는 일들을 생각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머물게 했던 것처럼 육욕은 그들을 세상적인 안심 속에 잠들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홍수가 날 때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2. 그들은 홍수가 나리라고 예견하지 못하였지만 홍수가 났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느낌으로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악한 날은 사람이 그것을 멀리 연기한다고 해서 더 지연되는 것은 아니다.3. 그들은 홍수를 막기에는 너무도 늦은 시간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적시에 알았더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이 재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안심하는 자들과 비웃는 자들에게 심판은 가장 두렵고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것을 옛 세상에 적용시킨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즉,
(1)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며 그를 고대하지 않은 자들을 찾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안도감과 육욕은 후대의 유행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졸며 자는 한밤중에 신랑은 온다."
(2) 주님께서는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이러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홍수가 옛 세상의 죄인들을 모조리 남김 없이 쓸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이 오심을 조롱하였던 안심하던 죄인들은 "진노의 날이 임할 때 어린양의 진노"에 의하여 쓸어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날은 도망갈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의 날이 될 것이다.
4. 그 날은 분리시키는 날이 될 것이다(40, 41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이것은 두 가지 면으로 적용될 수 있다.
(1) 우리는 이 말씀을 특별히 첫 복음 전파시에 복음의 성취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구분시켰다. "어떤 사람은 말해진 일들을 믿었으며," 그리스도에게 데려감을 당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으며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도록 버려둠을 다할 것이다." 세상에서 같은 시대, 장소, 재능, 직업, 조건을 가진 자들, 다시 말하면 "같은 매를 갈고 있는 자들," 즉 같은 가족들, 결혼에 의해 같은 고리에 매어있는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또 다른 사람은 쓰라림 가운데 버려둠을 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던지러 오신"(눅 12:49, 51) 구별하는 불이다. 그것이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값없는 은혜를 더욱 호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나타내지 않으신다"(요 14:22). 아니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같은 들과 같은 매, 같은 집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타내지 않으신다. 파멸이 예루살렘에 임박하였을 때, 전에 신적인 은혜에 의해 정해진 것을 따라 신적인 섭리에 의해 구별이 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있던 모든 기독자들은 하늘의 특별 배려에 의하여 그 재난에서 멸망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들에 함께 있었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기독자였다면 그는 피난처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적군의 검에 내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면, 그가 여자요 불쌍한 여자요,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며, 그러나 다른 사람은 버림을 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는 하늘 안에서나 하늘 "아래"에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될 것이다"(습 2: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반적인 파멸의 때에 구별하여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호의의 표식이며, 또한 그와 같이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좌우 편에서 넘어질 때 우리는 안전하다면 즉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서 소멸될 때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주님의 자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비이다라고.
(2)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또한 그 날에 행해진 구분에 적용시킬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에(31절), 선택함을 받은 자가 "함께 모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자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선택하고 선택받은 사람들은 영광에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요, 그 밖의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에로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땅 속에 잠자는 자들은 동일한 무덤 속에 있지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수치와 영원한 멸시"에로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단 12:2). 여기에서는 장차 살아 있게 될 사람에게 적용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기치 않은 때에 오셔서 "밭이나 공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이 영광에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인가 혹은 멸망에로 예비 된 그릇인가에 따라서 그대로 되어질 것이다. 한 사람은 "영원히 주님과 천사들과 함께 있기 위하여 공중에서 그들을 만나도록"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속한 자를 모을 때 남은 자들을 휩쓸어 가버릴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게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영광에로 데려감을 당할 때 뒤에 남게 될 죄인들에게 더욱 비참한 정죄가 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위로를 해 주고 있다.
[1] 그들은 들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매를 가는 하녀들처럼(출 11:5) 세상에서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인가? 그러나 그들은 그 날에 잊어버리거나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라고 할지라도 만일 신앙이 부요하다면 "천국의 상속자"가 돌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영광의 상속자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먼 곳이나 그럴 듯하지 못한 장소들, 즉 "밭이나 공장에"흩어져 있는가? 그러나 천사들은 그들을 거기에서 찾게 될 것이며(왕위에 앉히려고 할 때 사울이 여러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거기서부터 데려갈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큰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변화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즉 땅을 갈고 매를 가는 일로부터 하늘로 가게 되는 변호를 가지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하늘로 옮겨가는 데 연약하고 무력한가? 그들은 롯이 은혜스러운 강압에 의해 소돔에서 데려 감을 당한 것처럼 데려가거나 붙잡힘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창 19:16). 그리스도께서 한 번 붙잡은 자들을 그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4]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거나, 또는 같은 습관이나 사회, 직업에서 그들과 결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참된 기독자들을 실망케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귀중한 자와 사악한 자, 동일한 무더기 속에 있는 금과 찌꺼기, 동일한 마루 속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Ⅲ. 여기에는 그 날이 올 때를 대비하여 신중한 사리분별에 의해 "깨어 준비할 것"을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있다(42절 이하).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요구되는 필요한 의무, "깨어 예비하고 있으라"(42, 44절).(1)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42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생각나도록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는 것은 그들이 할 큰 의무요. 관심사라는 사실이다. 죄악된 상태나 방법이 "잠자는 것," 즉 무감각하고 비활동적(살전 5:6)인 것과 비교되고 있듯이, 은혜스러운 상태나 방법은 "깨어 있는 것"이나 "각성하는 것"과 비교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임종시에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만 한다. "임종 후에는" 우리에게 "큰 날"이 될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세상 끝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인류에게 있어서 "큰 날"을 기다려야만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가 오실 것을 소원하거나 종종 그의 오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언제나 그가 오시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또 가까이 이르렀으며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것은 그가 오셔서 우리를 찾으실 것을 즐거움으로 소망하는 은혜스러운 마음의 기질과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의 오심을 첫 번째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의 행동에 참예할 수 있으며 그를 만나는 의무를 본격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것은 잠자는 시간인 밤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밤"이다. 또한 우리는 항상 깨어 있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2)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우리가 예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공연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일들을 "찾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벧후 3:11, 14). 우리는 그때에 우리 주님을 시중들게 될 것이며, 또한 이미 불을 켠 등불을 준비해야만 한다. 우리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때에 우리의 대언자가 이미 지시해 준 대로 간구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계산을 해야만 되며, 그 때에 이미 계산된 계산서를 가져야만 한다. 그 때에는 우리가 얻기를 소원한 기업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에 참예하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해야 한다(골 1:12).
2. 우리로 하여금 그 날을 위해 깨어 있고 또한 부지런히 준비해야할 것을 권면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1)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시간이 매우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적인 권면(42, 44절)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은 비교에 의해 설명되어 있다(43절). 그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의 죽는 날"을 알지 못한다(창 27:2). 우리는 "얼마 동안 살아 있을 때"는 알 수 있다("내가 떠날 날이 가까웠도다." 딤후 4:6).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오래 사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 동안 짧게 살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우리가 예상하는 시간보다는 오히려 더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가 심판을 위하여 예비된 그 정한 시간을 어찌 알 수가 있을 것인가 ! 우리가 이러한 시간들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그 날이 올 때를 고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년이 계속될 것이라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약 4:13). 아니 마치 내일이 자기의 날인 것처럼 내일이 돌아올 것을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잠 27:1; 눅 12:20).
[2] 그는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이다"(44절). 시간은 이와 같이 불분명하지만, 임하는 그 일 자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가 "언제"올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오시라는" 것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그가 떠나시면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정녕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그를 기대하도록 해 준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기대하도록 해 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대기하고 있도록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 않은 때에," 즉 준비하거나 예비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 때에(50절) 주님께서는 오실 것이다. 아니 가장 열렬하게 기다리는 자들이 아마도 그가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오실 것이다. 신랑은 지혜있는 자가 졸 때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종 공연히 미혹을 받아 기다리는 특별한 징조나 조짐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언제나 기다리는 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 될 것이다.
[3]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그 세대에 있어서 지혜롭다. 즉 위험이 다가 오는 것을 알 때에 그들은 깨어 그것에 대비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한 실례로써 말씀하고 계시다(43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밤에 이러한 경점(그들은 밤을 사경으로 구분하였는데, 각 경점은 세 시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에 올 것을 알고 또한 그의 집을 덮칠 것을 안다면, 그것이 가장 깊게 잠이 드는 한밤중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일어나서 여러 곳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그 도적을 격렬하게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언제 꼭" 오시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속히 오실"것만을 우리가 알고 있으므로 언제나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우리는 각자가 지켜야만 할 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집은 밖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 속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 집은 우리 자신의 영혼으로서, 우리는 그 집을 "힘써 지켜야"만 한다.
둘째, 주님의 날은 "밤에 오는 도적과 같이 감짝 놀라게" 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장 적게 고대하는 때를 골라서 그 때에 오신다. 이는 그의 원수들의 승리가 가장 큰 수치로 바꾸어지며 또한 그의 친구들의 두려움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졸고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는 도적이 부당하게 뺐는 것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의롭고 법적인 절차를 거쳐 행해질 것이다. 죽음과 심판은 우리가 범한 돌이킬 수 없는 손상과 전적인 게으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취하여 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즉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좋은 집주인이 도적이 올 시간을 대비하여 시시각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항시 예비하고 있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악한 날에 설 뿐만 아니라 정복자 이상으로 약탈자를 분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준비한 자들에게서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다 줄 것이며, 준비하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비참과 두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45절 이하). 이 사실은 종들의 주인이 그들과 계산하려 올 때에 선한 종들과 악한 종들의 서로 다른 처지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그 날에 준비하고 있는지 또는 준비하고 있지 않은지에 따라서 영원히 좋게 될 것인지 또는 나쁘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기"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본 장의 끝에 있는 이 비유는 신앙 고백이나 직무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들이 된 모든 기독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이 비유는 사역자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종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선한 종"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그가 "집의 관리자"가 됨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렇게 되려면 그 종은 "충성되고 지혜있어야"만 하며 또한 만일 그가 그런 종이라면 그가 영원히 "복이 있는 자"일 것임을 나타내 주고 계시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좋은 교훈과 격려를 해 주고 계시다.
첫째, 우리는 여기에서 그 종의 위치와 직무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주인이 집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로 임명된 자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집사람들이나 가족으로서, 그 교회의 아버지이시며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 즉 그리스도로부터 명령된 가족이다(엡 3:15).
2. 복음 사역자들은 이 집의 "관리자들"로 임명되어 잇다. 군주로서가 아니라(그리스도는 이에 대한 소송 정지를 신청하였다), 청지기나 또는 그 밖의 부하 관리들로 임명되어 있다. 주인이 아닌, 안내자로 즉 새로운 길을 명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길을 보여 주고 그리로 인도하는 자로 임명되어 있었다.그 뜻은 h`gou,mnoi로써 우리는 "너희를 다스리는"(히 13:17)으로 번역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을 지시하고 재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어 있다. 그것은 evpi,skopot - 즉 감독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된 관리자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된 것이며, 또한 아무도 그 권세를 그들에게서 취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그 종은 "주인이 다스리도록" 임명된 자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자들을 직접 임명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하에 있는 관리자들이며 또한 그에게 예속되어 행동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 관리자들인 것이다.
3. 복음 사역자들의 하는 일은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의 집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분배된 열쇠를 가지고 있다.(1) 그들이 하는 일은 "주는 일"이다. 즉 그들 자신에게 주는 것(사복을 채우는 것, 겔 34:8)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것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며, 그리스도께서 "구입한 것"을 "분배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행 20:35)라고 말해지고 있다.
(2) 사역자들의 하는 일은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다." "율법"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다), 교회에 그러한 교훈들을 나눠주는 것인데, 그 교훈들은 잘 소화되면 영혼에 대한 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릇된 교훈의 독을 나누어주어서는 안 되며, 또한 단단하고 무익한 교훈의 돌멩이를 나누어주어서도 안 된다. "건전하고 온전한" 양식을 나누어주어야만 한다.
(3) 양식은 "때를 따라" 나눠주어야만 한다(evn kairw/ ─즉 그것을 할 시간이 있는 동안). 영원한 것이 올 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너무 늦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낮이 있을 동안에 일을 해야"만 한다. 또한 "적당한 시간에 때를 맞추어," 즉 그것을 줄 기회가 있을 때 일을 해야만 한다. 또는 정해진 시간에, 때를 따라, 즉 매일 매일의 의무가 요구하는 대로해야만 한다.
둘째, 이러한 직무에 대한 그리스도의 올바른 이행. 선한 종이 이러한 일을 솔선수범하였다면 선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는 "충성되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충성되어야만 한다(고전 4:2). "신뢰를 받는"자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신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이 기대된다.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딤후 1:14). 또한 그들은 모세와 같이 충성스러워야만 한다(히 3:2). 그리스도께서는 "충성스러운" 사역자들만을 귀하게 여기신다(딤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은 그 자신이 아닌, 그의 주인의 영예를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말하며, 그 자신의 환상이나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규칙만을 따르며, 그것들만을 지지한다. 가장 비천한 자를 돌보며, 가장 위대한 자를 책망하며, 외모를 취하지 아니한다.2. 그는 자신의 의무와 그것이 적합한 때를 깨달아 아는 데 지혜롭다. 마음과 익숙한 손을 가지고 무리들을 필요할 때 인도하는 데 있어서 지혜롭다. 정직만 있으면 능히 선한 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선한 청지기"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가르치기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는 실행을 한다. 그의 직무가 요구될 때마다 그는 실행을 한다. 목회(사역)는 선한 일이며 또한 그 직무를 맡은 자는 언제나 해야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안일 속에 몰두되어서는 안 되며, 그 일을 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러가 경솔하게 그 일을 타인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되며, 요령 있게 실행해야만 한다. 즉 집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그들 자신의 직무를 기억하며,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에 쓸 데 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이 명한 대로 행하며, 그 직무와 관련된 것과 그 간곡의 처지가 요구되는 것을 적절하게 실행한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실행"한다. 퍼킨즈(Perkins)씨는 "여러분은 말씀의 사역자이다"(Minister verbi)라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행하라"(Age)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행하라"(Hocage)이다.
4. 그는 주인이 올 때 "이렇게 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그의 일의 항구성. 그의 주인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는 그 날의 일에 분주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주인이 빌 시간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빈 시간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선한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비가 끝나면 또 다른 자비를 베푸실 시작이 되는 것처럼, 선한 사람 즉 선한 사역자는 하나의 의무가 끝나자마자 곧 다른 의무를 시작해야만 한다. 칼빈은 자신의 사역을 그만 두가는 권고를 받고 성을 내면서 대답하기를, "무엇이라고 ! 당신은 내 주인이 게으른 나를 찾게 되기를 원하는가?"라고 하였다.
(2)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 "그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 일들을 계속하라"(딤전 4:16; 6:14). 끝까지 견디라.
셋째, 이 일을 인하여 그에게 주려고 하는 보상 세 가지가 있다.
1. 그는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 때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될 것인가? 라는 구절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러한 특성에 부합된 사람이 매우 적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는 "천 명 중의 한사람" 정도가 있을 것이다. 현재 자신들의 직무에 있어서 겸손하고 근면하고 성실함으로 이와 같이 눈에 띄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는 큰 심판 날에 그들에게 영예를 부여함으로써 더욱 돋보이고 눈에 띄게 하실 것이다.2. 그는 복음 받게 될 것이다.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축복을 받은 자이다(계 14:13). 그러나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인정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발견된 자들에게는 더욱 큰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 순교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전쟁터에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의 영예에 버금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의 터전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추수한 자들의 영예이다.
3. 그는 승진이 될 것이다(47절). "주인이 이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이러한 암시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즉 집의 관리를 맡은 청지기가 자신의 직무를 잘 처리한다면 일반적으로 그 집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 승진되는 법이다. 요셉은 이와 같이 함으로써 보디발의 집에서 승진되었다(창 39:4, 6). 그러나 이 세상에서 친절한 주인이 그의 가장 모범적인 종에게 부여한 최상의 영예도 세상에서 주 예수님이 그의 충성되고 늘 깨어 있는 종들에게 부여할 큰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비유로 말해진 것은 "내 아버지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과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와 같이 승진될 때에 그들은 그러한 큰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지혜와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들이 다스릴 때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게 될 것이다.
[2] "악한" 종에 관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에게 대한 묘사(48, 49절). 거기에서 우리는 그들 자신의 색채로 그려진 비참을 찾아 볼 수 있다.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사악한 인간이며, 인간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사악한 기독자이며, 그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자는 사악한 교역자이다. Corruptio optimi est pessima ─즉 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 예루살렘의 선지자들 가운데 있었던 사악함은 실로 "무서운"것이었다(렘 23:14). 여기에 보면,
1. 그이 악함의 원인.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신앙하는 것이다. 그 사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결코 오시지 않을 것이며 교회를 완전히 포기하셨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살펴 볼 것은,(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 있는 종들처럼 입술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신다.
(2) 그리스도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그의 인내심의 좋은 본보기이지만 악한 사람들은 이를 남용하여 자신의 길을 가는데 마음을 강퍅케 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아득히 먼 일로 여겨질 때 "인생의 마음은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전 8:11).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올 때에 백성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노라."감각적으로 행하는 자들이 그러므로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 즉 세상을 신으로, 배(bely)를 신으로, 무엇이든지 신으로 만들자 한다.
2. 그 악한 종의 사악함의 특징들.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죄악들이었다. 그 악한 종은 자신의 정욕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1) 여기에서 그에게 해당되는 죄는 박해이다. 그는 "동무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유의하라.
[1] 집의 청지기라고 할지라도 집의 종으로 여기지 말며, 따라서 그들은 동무가 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금지가 되는 것이다. 천사가 자신을 요한의 "동무"(형제, 계 19:10)라고 부른다고 한다면 아시아의 교회들의 기독자를 그의 "형제"(계 1:9)라고 부른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2] 악한 종이 그들의 동무들을 때리는 것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은밀한 기독자들이나 충성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들을 때리는 것은, 그들이 그를 비난했거나 또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경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양심을 거스리면서까지 그가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악한 종은 선지자들을 때리는 것이다(렘 18:18). 만일 그 악한 종이 권세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혹은 짐승의 머리에 난 열 개의 뿔처럼 그들을 자신의 하는 일에 강제적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면 더욱 심하게 진행될 것이다.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때렸고, 그를 착고에 채워 넣었다(렘 20:2). 반역하는 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보다 "살륙죄에 깊이 빠진" 자들이다(호 5:2). 청지기가 그의 동무들을 때릴 때는 주인의 권위와 그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실지어다"(사 66:5). 그러나 그는 장차 반드시 그가 주인에게 무례한 짓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모독과 부도덕. "그가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49절).
[1] 그 악한 종은 가장 사악한 친구들과 더불어 교제하고 있으며, 그들과 더불어 교분을 맺고 그들과 친숙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꾀를 좇고 그들의 길에 서며, 그들의 자리에 앉고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술 취한 자들은 즐겁고 유쾌한 무리들이며, 그 악한 종도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2] 그는 술 취한 자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 즉 "먹고 마시고 취하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그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죄악의 출입구이다. 술 취함은 두드러진 죄악이다. 이것에 노예가 된 자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주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한 자들은 대개 가장 사악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이었다. 박해하는 양심들은 그 구실이야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대개 가장 방탕하고 타락된 양심들이다. "성도들의 피에 취한 자들"이 무엇인들 마시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학식과 언변의 일반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악하기 짝이 없는 사역자들에 대한 묘사임이 틀림없다.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해 말했듯이, 강단에서 설교를 잘하기 때문에 그가 나가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언행이 일치해야 하므로). 또한 그가 강단 밖에서 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들어와야만 한다는 것도 실로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그에게 내려진 판결(50, 51절). 사악한 사역자들의 입은 옷과 명성이 그들을 정죄에서 지켜 주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로마 교회에서 문관으로부터 면죄를 받았다고 구실을 붙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책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하는 칭호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의 판결에 동반하게 될 놀라움(50절). "그 종의 주인이 이르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1)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연기시킨다고 해서 그의 오심이 연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어떤 망상에 사로잡히든지 간에 그의 주인은 올 것이다. 사람의 불신앙이 위대한 약속이나 두려움을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오심은 안도감에 사로잡혀 태만한 죄인들에게, 특히 악한 사역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놀라움이 될 것이다. "그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올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말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리며 장차 올 심판에 관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경고를 묵살해 버리는 자는 그 밖의 어떤 경고도 기대할 수 없다. 이것들은 취하든지 안 취하든지 간에 충분한 법적 경고 없이 갑자기 임하신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불공평하다는 말을 할 수는 결코 없다. 보라, 그는 전에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
2. 그에 대한 엄격한 판결(51절). 그것의 공의대로 하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삼한 것이 아니다. 그 판결에는 "사망과 정죄"라는 무서운 말들로 감싸진 완전한 멸망이 뒤따르게 된다.
(1) 사망. 그의 주인은 "그를 엄히 때릴 것이다." dikoth,hsei auvto,n─즉 그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자의 땅에서 끊어질 것이며, 그를 악한 것으로 구별할 것이다. 이것은 "저주"에 대한 정의로써(신 29:21), 땅만 버리는 나무를 자르는 것처럼 그를 잘라 버릴 것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율법에서 종종 사용된 선고, 즉 "그 목숨이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제거를 의미한다. 선택된 가지가 더 좋은 줄기에 접붙여지기 위하여 잘리우는 것처럼 사망은 좋은 사람을 잘라 버린다. 그러나 시들은 가지는 불에 던지기 위해 잘리우듯이 사망은 악한 사람을 잘라 버린다. 즉 그의 마음을 전적으로 기울였고 말하자면 한 몸이 되었던 이 세상으로부터 그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말씀을, "쪼개어 낼 것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그 말은 즉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몸은 벌레들의 먹이로 무덤에로 보내고 또한 영혼은 마귀의 먹이로 지옥에로 보낸다는 것이다. 죄인은 쪼개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임종시에 영혼과 몸이 깨끗이 분리되어 하나는 하나님께로 즐겁게 올라가며, 하나는 흙 속에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의 영혼은 임종시에 쪼개어지며, 갈기갈기 찢기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왕'(욥 18:14)이시기 때문이다. 사악한 종은 스스로 하나님과 세상, 그리스도와 벨리알,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정욕을 나누었으며, 따라서 그 가 이와 같이 구분될 것은 당연하다.
(2) 정죄. 그는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비참한 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슬피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저 세상에는 영원히 비참한 장소와 나라가 있다. 거기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 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영혼의 시련과 고뇌를 말한다.
[2] 신적인 선고(판결)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벌을 받기에 합당하게 된 자들의 몫(율)으로 이 장소나 나라를 지정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한 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율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 "구세주"이신 그는 그 때에 "재판장"이 되실 것이며, 또한 사람의 자녀들의 영원한 상태는 그가 지정하시는 대로 될 것이다. 현세에서 세상을 자신의 몫으로 선택한 자는 저 세상에서 지옥을 그들의 몫으로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니라"(욥 20:29).
[3] 지옥은 외식하는 자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이 사악한 종은 "외식하는 자가 받는 분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외식하는 자들)은 말하자면 자유 부동산 보유자들(the freeholders)이며, 다른 죄인들은 그들과 동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비참의 분깃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 세상에서의 가장 엄한 형벌을 나타내려고 하실 때 이를 "외식하는 자의 분깃(율)"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지옥에 다른 곳보다 더 뜨거운 곳이 있다면(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싫어하는 자의 몫이 될 것이다.
[4] 악한 사역자들은 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죄인들(몰론 외식하는 자들까지도)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될 것이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사악한 외식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 즉 그들이 모독함으로써 자신들의 발아래 짓밟아 버린 피와 또한 영혼의 피, 즉 그들이 신실치 못함으로써 자신의 머리 위에 가져 온 피는 그 "고통의 장소"에서 그들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다. "아들아, 이것을 기억하라." 곧 사역자가 다른 죄인들과 같이 망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말을 중단시키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들이 던짐을 받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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