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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하늘로써 오는 표적에 대해 바리새인과 논쟁 (마태복음 16:1-4)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더불어 대화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행전 23장, 7, 8절에 나타난 대로 그들 사이에서 분쟁이었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있어서는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훈은 영들의 존재와 미래의 상태(천국이나 지옥)를 부인하였던 사두개인들의 오류와 이단을 뒤집어엎었으며 또한 장로들의 유전을 빙자한 큰 사기꾼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폭력, 그리고 위선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는 사방에서 반대를 받게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Ⅰ. 그들의 요구와 그 의도.

1. 그들의 요구한 것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보여 줄 것을 소원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표적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게 될 것처럼 표면적인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러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며, 이는 단지 그를 책잡으려고 하는 강퍅한 불신앙에 불과하였다. 그들이 구실삼아 요구한 것은,

(1) 그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다른 그 밖의 표적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표적들을 보아 왔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은 모두가 표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그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기"(역주:요 3:2 참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표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이 선택한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병들고 슬픈 자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을 구원해 주었던 표적들을 업신여겼으며, 교만한 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표적을 보여 줄 것을 강조하였다. 신적 계시의 증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환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선택되어야만 한다. 이미 주어진 증거는 편견을 가지지 않은 자들의 이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헛된 공론을 펴는 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의도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멸시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수단과 특권들에 의해 믿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간사하다는 증거(실예)이다. "만일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그것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행해졌던 것과 같은 이적을 통하여 그의 사명을 입증하도록 요구하였다. 즉 그들이 요구한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란 우뢰와 번개, 그리고 음성들이었다. 그런데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표적이나 무서운 것들은 영적이고 위안을 주는 복음의 섭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접근해 있으며(롬 10:8), 따라서 이적들도 그러하며, 또한 이러한 이적들(히 12:18)을 행하였을 때와 같이 거리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2. 그 의도는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서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공중의 권세 잡은 왕"과의 제휴라고 비웃고 말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그들도 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고전 10:9).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들이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가졌을 때, 그들은 "그가 광야에 식탁을 예비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그가 광야에서 식탁을 예비한 지금에 와서 그들은 "그가 우리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줄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를 시험하였다.

Ⅱ. 이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만하지 않도록" 그는 "그들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셨다"(잠 26:5). 그의 대답에서,

1.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표적을 간과해 버린 사실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였다(2, 3절). 그들은 하늘 나라가 이미 그들 사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적을 찾고 있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불신적인 조상들은 이적이 그들의 일용한 양식이었을 때도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또는 안계신가?"라고 반문하였다.

이것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피시고 계시다.



(1) 그들은 다른 일, 특히 자연적인 천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정확하였다. "너희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을 징조요,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궂을 징조임을 알고 있다." 관찰과 경험에 의해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의해 앞으로의 일기에 대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제이 원인(second causes)이 작동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 활동에 있어서 매우 일정하며 또한 그 자체가 불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름이 평평하게 뜬것을 보고는 알지 못하지만"(욥 37:16), 구름의 모양을 보고 어떤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천기에 관하여 "점성가들이나 별을 보는 자나 월삭을 예고하는 자들"의 무모하고 우스광스러운 예언을 뒷받침해 주지는 않으며,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들로 말미암아 속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씨뿌릴 때와 거둘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이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청우계(weather-glasses)나 다른 방법에 의해 천기 변화의 직접적인 표적과 전조를 알기 전까지는 때와 계절에 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하시는 대로 천기를 변화시키며,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는 천기는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마음은 완악하고 어리석었다. "너희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

[1] "너희는 메시야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홀은 유다에게서 떠났으며, 다니엘이 말한 때와 주간은 만기가 다 되었지만, 그들은 유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이나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든 사실은 "천국이 가까이 이르렀으며," 이것이 곧 "그들이 환영해야 하는 날"임을 분명히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시대의 표적들을 보고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들은 도덕적인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의 동기와 방법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의사들이 어떤 징후를 보고 사람의 병을 알아내는 것처럼 잇사갈 사람들이 그러한 표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이 장차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측정하고 알아내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그들의 절호의 기회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며 또 분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바람이 그들에게 시원하게 불어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레미야 8장 7절, 이사야 1장 3절을 보라.

셋째,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표적을 무시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규정하는 표적을 추구하는 것은 큰 위선이다.



[2] "너희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에 대해 마땅히 임하는 너희 자신의 파멸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화평의 복음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써 말미암아 초래되는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다른 표적 주시기를 거절하고 있다(4절). 앞에서도 그는 똑 같은 말씀으로 거절하셨다(마 12:39). 동일한 불법을 고집하는 자들은 동일한 책망을 받을 것임을 각오해야만 한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1) 그들을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교인이요 동행자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를 배반하고 그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간음한 여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다(잠 30:20)고 생각하는,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보기에만 깨끗한 자들"이었다.

(2) 그는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를 거절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 표적은 그들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즉 이 표적이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사도에 의해 이방인들에 전파하실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신적 사명의 마지막이면서도 최고적인 증거들을 예비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만한 자들의 환상은 만족함을 얻지 못하지만 겸손한 자의 믿음은 후원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의 불신은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가져오며 "모든 입은 닫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논쟁은 갑자기 끝나 버렸다. 즉 "그는 저희를 떠나가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시험하려는 자들과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다투려고 하는 자들에게서 곧 떠나가 버리신다. 그는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자로 내버려두셨다. 즉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며, 자신들의 처분에 맡겨 두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를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

 

16:2 없음.

 

16:3 없음.

 

16:4 없음.

 

16:5

누룩을 경계하심 (마태복음 16:5-12)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떡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다른 많은 대화에서와 같이 그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문제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시지만, 제자들은 그가 육신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줄로 오해하였다. 이 경우는 그들이 강 건너에 가서 함께 먹을 양식을 배에 싣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배를 타고 간 것을 말한다. 흔히 그들은 먹을 떡을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종종 들판에 있을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빈들에 있지 않을 때는 그것들이 번거로운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떡 가져가기를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 제자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더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그렇게 되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이와 같이 세상일에 대해 무관심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경고가 있는데, 그것은, 즉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이다. 그는 지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더불어 대화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자들임을 아셨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자들은 위선자들을 가장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인 것처럼 꾸미는 바리새인들과 또한 진리를 자유스럽고 편견이 없이 추구한다고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고는 "삼가 조심하라"고 이중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타락한 원칙들과 행위들은 누룩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누룩과 같이 시큼하고 부풀며 퍼졌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서나 그들은 들끊어 올랐다(역주:야단법석을 떨며 소동을 피웠다).

Ⅱ. 이 경고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7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경솔함과 건망증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하시는 대화에 너무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떡을 자급자족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친우들의 신세를 져야 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그것을 요청하거나 "그들의" 구제금을 받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제자들을 먹인다는 구실을 붙여 그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제자들이 그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더불어 교제하거나 그들과 함께 먹지 말라(잠 23:6)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떡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으며(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들과 더불어 잡수셨다, 눅 7:36; 11:37; 14:1), 오히려 그들의 원칙(규율)이 위험하였던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심.

1. 그는 이 곤란한 상황에서 그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책망하기고 계신다(8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당황하여, 너희 선생이 너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채워 주실 수 있으며, 또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걱정했던 것 같이 그들의 준비성 없음에 대하여 책망하시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부모들이나 주인들은 그들의 자녀나 하인들이 건망증에 대해 화를 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다른 때에 조심하도록 타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의 의무에 대해 잊어버리기가 쉽다. "우연히 지나쳐 버렸다"(우연히 잊어버렸다)는 말은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쉽게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적은 믿음이었다.



(1) 주님께서는 비록 빈들이라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먹는 문제에 대해 그를 의지하고 또한 그것에 불안하게 생각지 않기를 원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비록 제자들이 자신들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궁핍과 곤궁에 빠져들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그를 신뢰할 것을 재촉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 자신이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낫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생각할 때에만 부족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거기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혹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궁핍할 때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2)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일에 연약하고 무능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자칫하면 책망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에 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부주의해서도 안되며, 그 극단 사이에 중용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둘 중에서도 특히 세상일에 지나치게 염려(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합당치 못한 일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염려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궁핍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이며, 만일 그러한 궁핍과 어려움이 꼭 필요한 연단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 염려해 주시는" 주님께 맡김으로써 무거운 염려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자들이 최근에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그들의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을 직접 체험하였으면서도 그를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8, 9절). 제자들은 떡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위하여 떡을 마련해 주실 수 있는 분(예수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물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샘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그들의 이해심이 부족하고 곧잘 잊어버리는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자비스럽고 이적적인 식사를 거듭 제공하였던 사실에 대해 잊어버리고 말았느냐? 즉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떡 일곱 덩이와 몇 마리의 생선으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사실을 기억지 못하느냐? 너희가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는 기억하라." 이 바구니들은 법궤에 보관되었던 만나 항아리와 같이(출 16:32), 하나님의 자비심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식사의 부스러기들은 지금 진수성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많이 그들을 먹이실 수 있으셨던 주님은 지금 필요한 것으로 그들을 먹이실 수 있으셨다. 그들의 몸을 위한 식사는 그들의 신앙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으며(시 74:14), 따라서 그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으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현재의 염려와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황하게 되는 것은 이전에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해 적절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경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계시다(11절). "너희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뇨?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신적인 일을 더디 이해하고, 잘못 이해하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들이 오랫동안 은혜의 방편을 누려 왔을 때는 더욱 그러해야만 한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신 것은,

(1) 제자들이 자기들처럼 그가 떡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음식과 음료수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이 그의 설교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님께서 비유법으로 말씀하신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였던 무리들과 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마 13:13).

Ⅳ.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책망을 하심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심(12절). "그제야"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물들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두드러지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누룩에 대해 깨닫도록 그가 말씀하신 바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에 있는 지혜의 영을 통해 가르치시며, 말씀 속에 있는 계시의 영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캐어내고 또한 약간의 오류를 거친 후 찾아낸 진리들은 매우 귀중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그들의 교훈과 방법에 비유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나 방법은 부패하고 사악한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누룩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쉽사리 침투해 들어가서 "좀과 같이 먹어 치우는"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인도하였고 또한 명성도 얻었지만,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독을 감염시켰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두개인들의 누룩과 같은 무신론과 자연신론, 또한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교황주의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모든 기독자들은 이 두 가지 누룩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16:6 없음.

 

16:7 없음.

 

16:8 없음.

 

16:9 없음.

 

16:10 없음.

 

16:11 없음.

 

16:12 없음.

 

16:13

베드로의 신앙 고백 (마태복음 16:13-20)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에 관하여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대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은 가나안 땅의 최북단에 위치한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다. 가장 구석진 곳이었으므로 아마 다른 지방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며, 그곳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적인 사역에서 여유가 생기면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단란한 시간을 가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문답을 하고 계시다.

Ⅰ. 그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가를 질문하고 계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 그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1)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그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그는 당연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눅 1:35).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여자에게서 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왕궁에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최고 칭호에 의해 구별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는 했지만 인자라는 칭호에 의해 알려지게 되실 것이다. 에스겔도 종종 그 자신을 낮추게 하기 위해 인자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신 것은 그가 겸손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2) 중보자이신 그에게 붙여진 특별한 명칭이다. 그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로 알리워졌다(단 7:13), 나는 메시야, 즉 예언된 인자이다. 그러나.

2. 그는 자신에 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고 계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나는 이 구절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인자라도 하더냐?"로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를 메시야로 인정하더냐?"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묻지는 않고 계시다. 그들은 주님께 대해 편협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를 속이는 자 또는 사탄과 연합한 자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멸시하였던 서민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시는 주님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환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그 자신의 칭찬을 듣기 원하여 하신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그 자신이 그러한 분이심을 나타냄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 전파의 성취를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서민들은 주님과 더불어 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과 더불어 더욱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서민들이 말한 바를 제자들에게서 더울 잘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보고 추측하도록 내버려두셨다(요 10:24, 25). 이제 주님께서는 그의 사도들이 그의 이름으로 행한 이적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것이다.

3.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그에게 답변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다윗의 자손"(마 12:23), 또는 큰 선지자(요 6:14)라고도 불렀다. 제자들이 말한 것은 그들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 견해들은 각기 다르다. 즉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다. 그러나 진리는 바꾸는 사람에 의해 서로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결과적으로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눅 12:51).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제나름대로 그에 대해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즉 "여러 사람이 여러 마음을 가진 것이다." 그를 그리스도(즉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끝없는 미로에서 방황하였으며, 또한 불확실한 추측과 무모한 가살을 뒤쫓았던 것이다.

(2) 그 견해들은 훌륭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최선의 판단에 의해 그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견해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적들의 감정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랑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던 자들의 소박한 생각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최고로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 그 견해들은 모두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요나에 대해 생각하였던 것처럼 메시야가 그의 공적인 전파 이전에 부활하셨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혹은 그들의 견해는 옛 것에 대한 지나친 가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특출한 사람이 그들 세대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는 다시 소생한 옛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4) 그러한 견해들은 고의적인 오류에 근거한 그릇된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이적들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나게 그의 모습이 초라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오히려 그를 그보다 못한 자로 인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1]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하나이다." 헤롯이 그렇게 말하였으며(마 14:2), 그 주위에 있는 자들도 그가 말했던 것처럼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 견해는 그들이 가졌던 견해, 즉 순교자로 죽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마카비 2서 7장 9절에 있는 것같이 안티오커스에 대한 답변에서 일곱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언급한 내용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즉 "법을 위해 죽은 세상의 왕은 영원한 생명에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다."

[2] "더러는 엘리야라 하나이다." 이것은 분명히 "보라,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마 4:5)는 말라기에 대한 예언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그리스도와 같이)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며, 그 자신이 최고 이적인 승천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3] "더러는 예레미야라 하나이다." 그들이 예레미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처럼 종종 우셨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셨는데"(렘 1:10), 그들은 이것이 메시야의 개념과 일치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4]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말은 그들이 선지자들에 대해 매우 훌륭한 환대를 하였음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렇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은 자들의 후손"들이다(마 23:29).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지방 중의 하나님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그의 사역들이 나타내 보여 주듯이 비범한 사람임을 인정하려고 했지만,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옛 선지자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Ⅱ.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면 너희는 보다 낫게 말할 수 있느냐?"

1.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가르침을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친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과 은혜의 방편들을 더욱 많이 누려온 자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와 더욱 친근한 자들은 그에 관하여 보다 참된 생각을 가져야만 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그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2.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가 진리를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였다.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너희들은 너희를 보내신 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자들은 그들이 보내심을 받기 전에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며, 또한 그는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점검을 받아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잘 모르거나 틀린 생각을 가진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인정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마음속으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누구이며 또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는 우리에게 귀한 분이신가? 그는 우리가 보기에만 사람의 대장이 되시는가? 우리의 영혼은 그를 사랑하는가?" 등에 대해 질문을 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옳고 그름에 따라서 그에 대해 좋게 말할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질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어떤 것이었는가에 말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질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어떤 것이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16절).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앞서의 질문에 대해 몇몇 제자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대로 그에게 대답을 하였다. 또한 그들 제자들의 명의로 베드로가 답변을 하였을 때 그들은 이에 동의하였으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베드로는 이런 경우에 앞장을 서서 말하는 기질이 있었으며, 어떤 때는 잘 말하지만 어떤 때는 실수할 때도 종종 있었다. 어떤 단체를 보면 그 가운데서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온정이 있고 대담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대변인처럼 말하였던 그 밖의 사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요한"(막 9:38), "도마, 빌립, 유다"(요 14:5, 8, 22)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로마교회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베드로를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가장 우선적이고 탁월한 사도로 치켜세우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로마 교회는 베드로에 대한 편견을 수정해야만 한다. 그들이 베드로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표해서 임기웅변으로 앞장서서 말하였고 그것도 "이 경우에 한 번"(prohac vice) 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구적인 명령자나 대변인이 아니라 이 경우에만 의장이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 짧았지만 그것은 완전하고 참되고 적절한 답변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자의 신앙 고백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헌신의 행동이 유발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벙어리이며 또한 죽은 우상에 반대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영생을 알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에 대한 결론이다.



[1] 사람들은 그를 "한 선지자, 그 선지자"(요 6:14)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있다. 즉 그를 위대한 선지자, 제사장, 교회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참된 메시야는 족장들에게 약속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그를 "장차 오실 자"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는 정반대 되는 겉모습을 지닌 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이미 죽었던 엘리야나 예레미야의 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 즉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세상의 생명"이 되게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는 하나님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 그의 신적인 성품이 지금 육신의 구름 속에 가리워 있었지만, 그 속을 꿰뚫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본 자들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뜨거운 열정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에게 말하도록 하자. 주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2)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답변을 칭찬하심(17-19절). 여기에서 베드로는 성도와 사도로서 응수를 받고 있다(역주:성도와 사도로서 칭찬을 받고 있다).

[1] 성도로서(17절).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매우 만족하셨다. 그의 신앙 고백은 매우 분명하였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만일에"나 "그런데"라는 전제 조건이 없는 고백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지식이나 은혜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숙달은 그에게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어디서 받았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복음의 희미한 여명 시대에 이 진리를 처음 발견하고 그것을 믿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었다. "사람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첫째, 베드로는 그 지식의 행복을 가졌던 것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의 출신과 가문, 즉 그의 부모들의 비천함과 그의 혈통의 낮은 신분을 일깨워 주고 계시다. 그는 "바요나"─즉 "비둘기의 아들"이었다(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가 "찍혀서 나온 반석"임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신의 출신이 고귀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발탁된 것이 신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도록 하자. 그를 구별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였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들의 아버지이신 분을 기억해야만 한다(삼상 10:12). 주님은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성도로서의 큰 행복을 깨닫게 하고 계시다. 즉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된 성도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되다고 선포하신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 그들이 복이 있게 된다. "베드로야, 너는 즐거운 소리를 아는 행복한 사람이다"(시 88:15). "너희 눈은 복이 있도다"(마 13:16). 모든 행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동반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은 그 영광을 마땅히 가지셔야만 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다. 네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은 네 자신의 지혜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정보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 빛은 인간의 천성이나 교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기독교는 계시된 종교이며, 그 기원을 하늘에 두고 있다. 기독교는 철학자들의 학식이나 정치가들의 정책에 의해 주어진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하늘로부터 주어진 종교이다.

2.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그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빌 1:29). "내 아버지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하셨으므로" 너는 복되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대한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분명한 표식이며 참된 행복의 견고한 기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큰 은혜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교만하고 허영 된 어떤 것을 간파하신 것 같다. 즉 간교한 죄를 간파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선한 의무에 혼합되기 쉬운 죄이기도 하다. 선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된 것이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에 의해 성취된 것임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 115:1; 고전 4:7).



[2]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나 사역자로 대답하고 계시다(18, 19). 베드로는 교회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의도된 약속이 그에게 지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손해볼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그는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경이며 예배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 위대한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주님은 이 왕적이며 신적인 헌장에 조인하고 공포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통일체(body politic)는 통합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과 신부와의 연합인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세상에 교회를 가지고 계셨으며, 그 교회는 약속된 후손(창 3:15)의 반석 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약속된 후손이 왔으므로 교회는 기독자로서의 새 헌장을 가져야만 하며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 헌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큰 지주(支柱)인 이 말씀이 왜곡되고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침입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귀는 그 말씀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간교함을 사용하였으며, 그 약속까지도 왜곡시켰다(시 91:11 . 마귀는 하나님 자신의 의도를 변경시키려고 하였다. 마 4:6). 마귀가 이와 같이 성경 말씀과 그 약속을 왜곡시키려 한 것은 그것들이 분명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들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헌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그 목적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교회 설립을 승인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교회의 머리요 통치자이시며, 모든 심판권을 위임받으셨으며,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 이에 따라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권위를 받으셨으며, 선택된 자의 구원을 떠 맡으셨다. 그 설립 허가장은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교회와 연관된 구약의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신앙과 거룩함이 탁월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우선권(최고직)을 부여하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그 계승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헌장은 여기에서 대리자인 베드로에게 교부되었는데, 이 헌장은 그 속에 구체화되고 내포된 목적에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의 유익을 위해 교회에서 사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약속된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치적 통일체(body poiltic)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체제와 명칭에 의해 통합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되어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너의" 교회가 아닌, "나의" 교회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였으므로,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업에 대해 주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오직 그의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속에 사는 자들도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선택된 남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표제를 지니고 있다.

(1) 교회의 설립자와 창시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자가 되시는 성전이다(슥 6:11-13). 여기에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와 고레스의 모형이다(사 44:28). 그 재료와 솜씨는 그의 것이다. 그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영혼 속에 교회를 더 첨가시키시며, 또한 교회를 살아있는 돌(벧전 2:5) 위에 세우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건축은 점진적으로 행해진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건축에 있어서 집과 같이 "형상"(in fieri)에 지니지 않는다. 신적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을 책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교회가 잘 지어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2)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는 "이 반석"이다. 건축가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공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초가 썩어버린다면 그 건물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기초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다른 기초 위에는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28장 16절을 보라.

[1]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진다. 즉 세월이 오래 흘러도 못쓰게 되지 않고 건물이 무겁기 때문에 가라앉지도 않는 견고하고 강하고 영구적인 기초 위에 새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래 위에 그의 집을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폭풍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반석은 높다(시 6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과 동일한 위치에 세워지지 않는다. 반석은 크고 넓다. 교회의 기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크면 클수록 더욱 견고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 기초가 좁은 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2]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진다. 너는 "베드로"이다. 베드로라는 뜻은 "돌이나 반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처음 베드로를 불렀을 때(요 1:42) 그 명칭을 부여하셨으며, 여기에서는 그것을 확인하고 계시다. "베드로야, 너는 네 이름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너는 견고하고 실속 있는 제자이며, 불변적이고 참을성이 있으며, 또한 통솔력을 가지고 있는 제자이다. 베드로는 너의 이름이며, 강함과 견고함이 너에게 있도다. 너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에 현혹되어 요동하지 않고 현재의 진리에 굳건히 서 있구나"(벧후 1:12). 이 의미심장한 이름을 언급하신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은 이 반석이라는 말을 사도 중에서 우두머리인 베드로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열두 사도 중에서 왕은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서 손위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보다 월등한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다(엡 2:20). 그 건축물의 첫 기초는 그들의 사역에 의해, 사역 가운데서 놓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겨진다"(계 21:14)고 말해지고 있다. 이제 베드로는 유대인을 회개시키고(행 2:) 이방인을 회개시킴으로써 교회의 첫돌을 놓은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바"는 기둥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갈 2:9). 그러나 단지 건물의 첫돌을 놓은 사람을 교회의 기초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첫돌을 놓는 일은 일시적인 행동에 불과하며, 기초를 놓는 일만이 영구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이 로마 교황의 위선적인 교리를 지지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의 계승자들, 최소한 로마 교회의 주교들에게까지도 그 지도권이 이어져 내려올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로마의 주교들이 실제로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도 문제가 되겠지만, 기독교의 진리에서 볼 때 그들의 이러한 전통성의 재론성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너는 베드로라. 너는 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반석 위에(자신을 가리키면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 아마도 그가 "그 자신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셨을 때" "이 성전을 헐라"(요 2:19)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손을 가슴에 얹으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에 그가 계셨던 곳이 성전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고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 자신이 반석임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가 베드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 줄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리스도만 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고 말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에 의하여 설명되어져야만 한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 베드로전서 2장 6절을 참조하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자이시며 또한 그 기초이시다. 그는 영혼을 이끌어 내시며, 자신에게로 모으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연합되어 있으며, 그를 의지하고 영원히 신뢰하는 것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이 "반석"이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고백했던 신앙 고백이라고 해석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나머지 제자들도 그의 신앙 고백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이 위대한 진리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1. 이 진리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보편적(universal)인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일종의 속임수이며 단지 하나의 환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그대로 있으리라"(고전 15:14-17).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를 소유한 자들은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 어떤 특정한 교회로부터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 고백을 없애버린다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지 못하고 불신 상태와 신분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즉 교회가 일어서느냐, 또는 무너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조항이 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문을 돌리는 중요한 돌찌귀(hinge)"가 되는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는 자는 기초를 붙잡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기독자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위대한 진리의 확실성 위에 설립된 성스러운 단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위대하며, 지금까지 승리를 해오고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교회가 세워질 때 그 교회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음부의 권세(또는 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진리를 이기거나 이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1) 이것은 교회가 대항해야 할 원수를 가지고 있으며, 그 파멸과 전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원수는 "음부의 문(권세)," 즉 음부의 도성으로 표현되고 있다(이 도성은 하늘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과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이 음부의 도성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권세라고도 할 수 있다. 음부의 문은 마귀의 왕국의 권세와 교활함, 즉 용의 머리와 뿔이며, 마귀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어린 양"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음부의 문에서 나오는 것들은 음모와 모략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거나 복음의 규정을 타락시키거나 선한 사역자나 기독자를 박해함으로써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다. 즉 간사하게 이끌리는 체하거나 강제적으로 시키게 하는 방법(이러한 것은 종교의 순수성에 위배되는 일이다)을 사용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말살하거나(시 83:4), "아이를 삼키려고 하거나"(계 12:9), 이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음부의 문(권세)의 악한 음모인 것이다.

(2)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교회의 원수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세상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교회를 가지실 것이며, 흑암의 권세가 아무리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진리와 규율들은 교회에서 인정되고 보존될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시 129:1, 2).이것은 어떤 특정한 교회나 교회 지도자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또한 이단이 되거나 파멸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록 순수성과 광채에 있어서 그 정도가 일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쨌든 계속적으로 존속할 것이며, 따라서 그 상속권도 결코 해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여자가 비록 광야에서 살지라도 (계 12:1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을 것이며(고후 4:9),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는 사는도다"(고후 6:9). 교회는 어떤 특정한 싸움(국부전)에서는 패할 수 있지만 주요한 싸움(전면전)에서는 "큰 승리자"가 될 것이다. "특별한 성도들은 믿음으로써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벧전 1:5).

넷째, 이 헌장의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질서와 통치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19절). 도시나 단체가 설립이 될 때 행정관리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임명되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통치체제가 없는 도시는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 정치의 제정은 여기에서 열쇠를 교부함으로써 또한 그들에게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마치 천국문의 유일한 문지기이거나 또는 다윗의 후손에게만 소속된 다윗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이러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도하고 통치하도록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사역적인 권세로 주어지고 있으며, 복음의 규칙을 따라 어떤 특별한 모임이나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축복 받은 사도 베드로 대신에(in persou of) 천국 열쇠를 받았다"(Claves regni caelorum in B. Petro apostolocuncti suscepimus sacerdotes, 암브로스의 De Dignit Sacred). 열쇠는 단지 맨 처음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맨 처음으로 신앙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행 10:28). 왕이 자치지구에 현장을 수여할 때 지방장관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재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심리하고 법에 따라 결정하며, 대법원에서 정규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확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교회를 설립하실 때 질서와 통치를 유지하고 또한 그의 법이 적절하게 집행되는가를 살피게 하기 위하여 사역의 직분을 임명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는 "내가 그 열쇠들을 이미 주었다"거나 "지금 주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의 부활 후에 주실 것임을 나타낸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그러한 선물들을 주셨다(엡 4:8). 그때에 이 권세는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실제적으로 주어졌다(마 28:19, 20; 요 20:21). 그는 열쇠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 열쇠들을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은 그들의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권세는 그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고전 5:4).

1. 여기에서 위임된 권세(권한)는 영적인 권세이다. 그것은 "천국," 즉 교회에 속한 권세이며,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는 복음 시대에 속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사도적이고 치리적인 권세도 이러한 권세에 속한다. 여기에 표현된 권세는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권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사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가르쳤다(행 1:3).

2. 여기에서 주어진 것은 곧 열쇠의 "힘"(권세)인데, 이것은 어떤 장소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관례적인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는 집주인이 청지기에게 "때를 따라 그 집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거나"(눅 12:4) 또는 필요할 때 가족의 규칙을 따라 거절하도록 창고 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역자들은 "청지기"이다(고전 4:1; 딛 1:7). 다윗 집의 "열쇠"를 가졌던 엘리아김은 "집"을 다스렸다"(사 22:22).

3. 여기에서 위임된 권세는 "매고 풀 수 있는," 즉(열쇠의 은유법을 따른다면) 닫고 열 수 있는 권세이다. 바로 집의 주인이었고 창고지기였던 요셉은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 하였다"(시 105:21, 22).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닫히게 될 때 그들은 묶이게 되는 것이다. interdico tibi aqua et igne─즉 내가 너에게 불과 물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노라. 그러나 그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다시 그들에게 열리게 될 때 그들은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난을 면하게 되며, 그들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4. 여기에서 위임된 권한은 그리스도께서 적절한 지배권을 인정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권세(권한)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지기들의 판결을 그 자신이 시인하심으로써 정당화하실 것이다. 즉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고 그르든 간에 교회의 모든 단점을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다. 말씀에 따라 clave non errante─즉 열쇠를 옳은 방법으로 돌리면 당연히 문이 열리듯이 이러한 것이 하늘에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즉 신실한 사역자의 입에 있는 복음의 말씀은 사람의 말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며 또한 이와 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살전 2:13; 요 12:20).

그러면 "천국 열쇠는 어떤 열쇠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지식"의 열쇠라고 불리우는 "교훈"의 열쇠이다. "너희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고 책임감 있게 세상에 설명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하여 너희는 임명장, 즉 신임장을 받게 될 것이며, 매고 풀 수 있는 완전한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표현은 금지나 허락을 의미하였다. 불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매는"것이요, 합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푸는"것이었다. 이제 사도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권세를 가졌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금지된 어떤 일들, 즉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등의 일들은 지금 허락이 되었으며 또한 모세 율법에 허락이 된 이혼과 같은 일은 지금 금지되었다. 또한 사도들은 이것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권한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말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아무 것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때 이 능력은 실천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임명된 직임자(officers)로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모든 사역자들에게 나타내어진(암시된) 일반적인 권세가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 말씀을 따라 "무엇이 선한 것이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그들에게 일반적인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선포하는"자는 이 열쇠를 잘 쓰는 자이다(행 20:27).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열쇠를 주신다고 하신 것은 율법사들이 창안하였던 관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관습에 의하면 율법사는 율법책을 취하여 읽는 권한을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의 열쇠를 손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고 푸는 것"은 그들의 책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실로 매어 그 두루마리를 닫았으며, 열때는 그 실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할 때 백성들에게 복음의 책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시고 계시다. 이 능력의 실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3장 46절, 18장 6절을 보라.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한 모든 자에게는 용서와 화평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와 저주를 전파할 때 그들은 이 "매고 푸는" 권세에 따라 행동하였다.



(2) "천국 열쇠"는 "훈련"의 열쇠인데,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개성과 행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앞서 말한 교훈을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수여된 권세는 법률적(입법적)인 것이 아니라 재판적(사법적)인 것이다. 법관은 법을 만들 수 없고 단지 법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그 원인에 대한 결과를 편견 없이 조사한 후에 이에 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쇠의 권세"이며, 교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이 권세와 그 특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것이다." 사역자들은 "명하심을 받은 자들을 잔치 석상에로" 들여보내야 하며 또한 거룩한 교제를 하기에 분명히 합당치 못한 자들은 들여보내지 말아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교인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을 추방하거나 내쫓는, 즉 매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복음의 약속들의 적용과 그것들의 표적을 믿지 않는 자들을 거절하는 일이다. 베드로가 박수 시몬(그는 세례를 받기는 하였다)에게 하였던 것처럼, "쓰디쓴 뿌리와 불법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로 하여금 분깃을 얻지 못하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여 "매는 일"이다.

[3]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한 번 내쫓겼으나 회개할 때에 다시 받아들여 회복시킬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이 매었던 자를 풀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회개한다면 사죄의 약속이 그들에게 해당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사도들은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이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 만일 사역자들이 능숙하고 신실하다면 외모만을 보고도 그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행 8:21; 고전 5:1; 고후 2:7; 딤전 1:20).

다섯째,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 일에 대하여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계시다(20절).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고백한 내용을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몇 가지 이유로는,

1. 이 때는 그의 나라를 위한 준비의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 전파된 가장 큰 내용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따라서 이 내용이 지금 강조되어야 하며, 그것이 곳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회개의 교리와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이 실제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는 지금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매사는 그것이 적당할 때 아름다운 법이며, 또한 "네 일을 예비하라, 그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잠 24:27)라는 말씀은 참 좋은 충고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일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려고 하셨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 증거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하시는 일들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며, 그는 이러한 것을 강조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5장 31, 34절을 보라. 그는 많은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다른 증거들을 보이려고 하지 않으셨다(요 10:25, 38).

3. 만일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4.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단언할 수 있기 전까지는 이 사실에 대해 선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위대한 진리는 그것들이 충분히 입증되기 전에는 상당한 박해를 받게 되는 법이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이시라는 큰 증거는 그의 부활이었다. 부활하심으로써 "그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러므로 신적인 지혜(역주:지혜스러운 그리스도)는 이 진리가 확실히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필수적으로 지금 사도들이 가진 것보다 더 큰 분량의 성령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그들이 이 사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시고 성령이 부으신 바 되었을 때, 우리는 베드로가 집 모퉁이에서 말한 내용, 즉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내용을 지붕 위에서 선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행 2:36).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반면에 말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16: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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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

수난의 예고(1) (마태복음 16:21-2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난을 예고하심. 비로소 그는 그의 수난을 예고하기 "시작"하셨으며, 이때로부터 그는 종종 그것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이미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고난에 대해 암시를 주었다. 또한 그는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의 수난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것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셨으며," 또한 그것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지금까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매우 약하였으며, 또한 이상하거나 우울한 말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지식에 있어서 성숙하였고 신앙에 있어서도 강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점진적으로 그의 마음을 계시하시며, 그들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게 빛을 비추신다는 사실이다.

"이 때로부터," 즉 그들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완전한 신앙 고백을 그에게 한 그때로부터, 그는 이러한 수난의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떤 진리를 발견한 것을 아셨을 때 다른 진리를 가르치셨다. "가진 자에게는 더 주어지게 될 것이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들을 확고히 하게 한 다음 더욱 완전함에 이르는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다(히 6:1).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신앙 위에 잘 기초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한꺼번에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질 수 없다. 그들의 현재 상황에 맞도록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말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에 대해 그 환경과 특색을 자세히 예고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 그가 고난 받게될 장소. 그는 거룩하고 주요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에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냈지만, 죽을 때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하였다. 거기에서는 모든 제사가 드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신 희생 제물이신" 그는 그곳에서 죽으셔야만 한다.

(2) 그는 누구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되는가? 그들은 곧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대 산헤드린 회원들이었으며,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하는데 앞장을 서야만 했던 자들이 그를 매우 박해하였던 것이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대한다고 공언하였고 또한 자칭 거룩한 성품을 가졌다고 내세운 성경에 박학한 자들이 그가 실제로 오셨을 때 이와 같이 천대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로마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맨 처음 선동자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언급하고 계시다.

(3) 그가 받으실 고난은 어떤 것인가?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것이다." 그의 원수들의 악독한 잔인성과 그의 끈질긴 인내는 그의 고난의 다양성과 중복성을 나타내 보여 주며(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고난의 극한성을 말해 준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곧 그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많은 고난은 죽지만 않는다면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난의 전제가 없는 죽음은 한결 덜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4) 그의 모든 고난의 행복 된 결과는 무엇인가? 그는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고난을 미리 예고하시면서 장차 뒤따르게 될 영광을 말씀하셨다(벧전 1:11). 그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그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그가 이 사실을 언급하신 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그 수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가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 수치를 개의치 않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사실에 유의해야 하며 그의 영광에로의 과정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눈여겨보면서 그 보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2. 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을 예고하셨는가?

(1) 그것은 그들이 영원한 섭리와 동의(역주:예지와 예정)의 소산물(product) 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영원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합의를 본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그 일은 "확고한 섭리와 예지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자신의 자발적인 감수성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고난은 그에게 놀라운 것이 못되었으며, 덫과 같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고난에 대해 확실하고 분명하게 예견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요 18:4).

(2)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나라의 영원한 위엄과 권세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오류를 시정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를 메시야로 믿으면서도 제자들은 세상에서의 위엄과 권세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또 다른 교훈, 즉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아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아마도 제자들은 그들이 메시야 왕국의 후원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은 그 왕국의 가장 큰 원수와 박해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 스스로가 전파하였던 천국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그릇된 오해는 시정되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분명하게 취급을 받아야만 하며, 이 세상에서 큰 일들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야만 한다.

(3) 그것은 제자들이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최소한의 슬픔과 두려움을 예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떤 고난도 받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의 선생이 죽음을 당한다면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미리 알리신 것은 그들이 이에 따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미리 경고"하신 것은 그들이 "미리 무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Ⅱ.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간함. 그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그는 앞에서와 같이 나머지 제자들의 감정을 대변하여 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중요한 대언자였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였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엄청난 사실로 말미암아 약간 마음이 들뜨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욱 담대하게 만들었다. 크게 진보하는 가운데에서 침착하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만류하거나 그에게 충고를 한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는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미치지 않으리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에게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번잡하고 엇갈리게 보여질 때 우리는 신적인 뜻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말고 묵묵히 따라가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그가 행해야 하실 바에 대하여 잘 아신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사가 될 수 없다(롬 11:34).

2. 베드로가 그의 고난을 열렬히 반대하고 십자가의 거침돌에 대해 이와 같이 놀란 것은 육적인 지혜의 기미가 농후하였다(역주:육적인 생각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안일하게 잠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타락한 성품이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그 고난들이 불편한 현재의 생활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 버리기 쉽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함으로써 그 고난을 잘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롬 8:18).

베드로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금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주여, 제발 당신의 몸을 생각하십시요"라고도 읽을 수 있다. i[lew,j soi ku,rie─즉 제발 당신의 몸을 아끼십시요. 그러면 누구도 당신을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돌보십시요. 그러면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이 두려워한 것처럼 고난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를 자신의 힘으로 측량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인간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당신과 같이 백성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백성을 두려워하는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지는 결코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만일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편에 설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셨다(23절).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성을 내게 할지라도 그들에게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책망하시거나 어떤 행동을 하신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는 어떻게 그의 분노를 표시하셨는가? 그는 베드로에게로 돌이키시면서 성난 얼굴로(아마도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간청에 대해 생각해보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그 시험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박을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사실에 대해 얼마나 분개하셨는가를 나타내 보여 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품에 않으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두 경우에는 각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험을 당하게 될 때에는 곧 그 자신의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에게 대하듯 답변하셨다(마 4:10).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사탄은 간교하게도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친구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와를 통해 아담을, 아내를 통해 욥을, 여기에서는 사랑하는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간계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사탄이 우리를 선동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죄에 대해 경계를 함으로써 그 궤계와 유혹을 대항해야만 한다.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의 친절한 호의도 사탄에 의해 종종 악용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대한 유혹으로 이용될 수 있다.

(2)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은 친구나 제자나 교역자들에게 그들의 직무를 단념케 하는 사탄의 음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보다는 말해진 내용에 대해 더 유의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탄이 뱀으로 말할 때나 성도로 말할 때에 그 목소리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좋은 일을 못하게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자는 모두 사탄의 말을 하는 자이다.

(3) 우리들의 친한 친구가 친절을 가장하고 잘못되게 말하거나 행동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신실하게 책망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잘못된 호의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책망해야만 한다. "신실함은 친구에게 상처를 준다." 이렇게 때리는 것은 호의로 간주되어야만 한다(시 141:5).

(4) 죄로 이끄는 유혹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를 단호히 물리쳐야만 하며, 그것과 더불어 교제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2. 그리스도를 불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해롭지도 않고 오히려 친절한 호의를 보이는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왜 그와 같이 분개하셨는가?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1)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Ska,ndalsn msi/ ei`- 즉 너는 나를 방해하는 자이다(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 "너는 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일에 조급하셨으며 또한 그의 마음도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괴롭고 힘겨운 임무를 방해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려고 하는 베드로의 간언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속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그만 두도록 애쓴 자들은 매우 상냥하고 현명하게 그에게 접근하였다. 베드로는 그가 어려움에 처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절하였던 때에도 그의 일을 못하게 방해한 지금 만큼 혹독한 책망을 받지는 않았다. 전자는 친절함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친절함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을 때는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준다. 롯과 같이 "나로 당신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자신의 안일과 안전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셨기"(롬 15:3)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베드로가 충고한 것과 같이 그 자신을 돌보시기(아끼시기)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버리시기(사용하시기) 위함이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왜 "사단"이라고 부르셨는가를 살펴 보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원에 대해 철천지원수인 마귀에게서 오는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후에 사악하게 그의 임무를 말살하려는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후에 사악하게 그의 임무를 말살하려고 유다 속에 들어갔던 바로 그 사탄이 여기에서는 베드로를 내세워 주님의 임무를 그만두도록 종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위대하고 선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친구와 원수로부터, 안과 밖으로부터 방해와 반대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2] 우리의 의무를 계속적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우리를 방해하는 자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의무가 요청되는 것이 고민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된다.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또한 고난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탄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2)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경외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고난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실제로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일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기가 쉽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일들을 즐기며 또한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16:22 없음.

 

16:23 없음.

 

16:24

수난의 예고(2) (마태복음 16:24-28)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 고난을 기꺼이 받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후 여기에서는 그들도 역시 고난을 받아야 하며 또한 기꺼이 그것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다. 이 구절들은 비중이 큰 말씀들이다.

Ⅰ. 여기에는 제자 된 자가 갖추어야할 신분이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그 조건이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에 근거하여 제자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가질 수가 있다(24절). 주님께서 이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이 규칙에 의해 그들이 자신의 진실성을 시험해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그를 따르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셨을 때 그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를 의무적으로 따르는 자이며,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라야만 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지. 베드로가 그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지금 간언하는 것처럼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양이 목자를, 종이 주인을, 병졸이 상관을 따르듯이 그를 따라가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목표로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의 영광을 동일한 목표로 삼는 자이다. 또한 그가 걸어가신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자는 그의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행동에 순응하면서, "어린양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자에게 크게 요구되는 일이 무엇인가? "아무든지 오려거든" "eiv tij qe,lei -즉 누구든지 기꺼이 오려거든," 이 구절은 임의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즐겁고 단호하게 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자신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제자가 되거나 또는 우연히 제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자원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시 110: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내 제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나에게로 오려는 생각을 굳게 지키고 있다면, 또 내 제자인 너희가 역시 나에게 붙어있으려 생각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켜야 한다. 즉 너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따라야만 한다. 즉 너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너희가 앞일을 내다보고 앉아서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조건의 뜻은 무엇인가?

(1) "자기를 부인하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을 아낄 것을 충고하였으며 또한 동일한 처지에서 충고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자신을 "아끼지"(돌보지) 말고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다. 그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하는 이유는 그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이 모두 자기 부정과 포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빌 2:7, 8). 만일 자기 부정이 어려운 일과이며 혈과 육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그것은 우리 앞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속과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체험하시고 실천하신 우리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종은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그 자신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근본적인 법이며 또한 배워야 할 최초의,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근본적인 법이며 또한 배워야 할 최초의, 그리고 가장 큰 과목이다. 그것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우리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좋은 과목들을 배우기 위하여 거기에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적으로 부인해야만 하며, 우리 자신의 모습에 경탄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심에 치우쳐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일을 추구하거나 우리 자신의 목표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뜻, 그의 영광, 그리고 세상에서 그와 관계된 일을 위하여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그들의 반성을 위해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며,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육체의 정욕을 부인해야만 한다.

(2) "자기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는 여기에서 보통 사람이나 기독교인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 지워지고 있다. 섭리에 의한 고통, 의로 말미암은 핍박, 좋은 일을 하거나, 또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이다. 기독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된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라고 불리 우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졌으며 또한 그가 우리 앞에서 그것들을 참으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달게 받게 하며 그것들의 두려움을 제거해 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각기 그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각자는 행해야 될 특별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짐이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몫이며, 그 공통적인 몫 중에서 각자는 그의 특별한 분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우리에게 정하고 주권적인 섭리가 우리에게 지워 주신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우리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생각하고, 따라서 그것을 환영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 자신의 십자가보다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더 잘 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며, 또한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벌을 선고받은 죄인은 그 자신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했던 로마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구레네 시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갔을 때 이 구절은 설명되었다.

첫째, 십자가는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십자가를 만들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십자가를 순순히 져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든지 또는 벗어버리기 위하여 의무의 길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조급하고 무분별하게 우리의 십자가를 밑으로 끌어내려서는 안 되며, 그것들이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다면 마땅히 그것들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되거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고통을 잘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장해물"을 극복함으로서 그 고통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것들 중에 그 어느 것도 나를 요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무거울지라도 그것을 지고 계속하여 나가야만 한다."

둘째, 우리가 해야만 할 것은, 그 십자가(그것은 재산이나 돌, 찌르는 것일 수도 있다)를 참아야만 할 뿐 아니라, 그 밑에서 잠잠해야만 하며 그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길 수 잇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나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견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 있는 "영광을 기뻐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부인할 때에 당연히 뒤따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의 즐거움이나 이 세상의 특권들을 부인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것들이 밀어닥칠 때 자기의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을 결코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와 같이 살려고 결심하자 않는 자는 그 자신 속에 자기는 결코 순교자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고 틸로츤(Tillotson) 주료는 말하였다.



(3) 특별히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난받는 성도는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며, 또한 고난을 받을 때에 그에게서 지시와 격려를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앞에서"(before), 우리를 "위하여"(for), 십자가를 견디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다. 그는 무거운 십자가의 끝, 즉 저주의 십자가의 끝을 견디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을 위해 그 밖의 다른 부분을 가볍고 쉽게 하였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그것을 질 수 있으며, 또한 거룩함과 순종의 모본을 따라 그리스도를 뒤따라가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모방하려고 애써야만 하며, 매사의 그의 모본을 따라 순응해야만 하며, 그들이 나가는 길에 어떤 것이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선행을 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그것은 idem per idem(동일한 것을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심)인 것처럼 보인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누구든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나를 따라오려거든, 또한 그렇게 하여 제자의 칭호와 자격을 얻으려면, 참으로 나를 쫓으라. 그렇게 하여 제자의 일과 의무를 행하라"이다. 또는 "누구든지 처음부터 좋게 나를 따라 오려고 출발한다면, 끝까지 참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갈렙이 행하였던 것처럼 "주를 끝까지 따르는"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를 쫓아가야만 한다.

Ⅱ. 여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 법에 순종하고 또한 이 한계에 도달하도록 설득하는 논증이 있다. 자기 부정이나 고난을 참는 일은 어려운 과목(lesson)이며, 만일 우리가 혈육과 타협한다면 이것들을 배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과 타협하자.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하시는 충고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자. 그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1.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우리의 현재 선택에 의존되어 있는 영원(eternity)의 중요성(25절).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정함으로써 "제 목숨을 잃는 것을 만족히 여긴다면, 그것을 찾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축복과 저주가 놓여져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가장 그럴 듯하게 꾸미는 배교자에게 임하게 될 불행.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이 죄에 의한 것이라면 다른 세상에서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목숨을 보존하고 일시적인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버리는 자는 정녕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 영원히 그것에 의해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배교와 불법에 의해 제 목숨을 구원했다고 그러한 것이 정당한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자기 보존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자기 파괴에서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한 목숨은 잠시동안에 불과하며, 그렇게 해서 피한 죽음은 잠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잃어버린 그 목숨은 영원하며, 뜻밖에 만난 죽음은 가장 비참한 죽음이요 불행의 완성이며, 일체의 선과는 영원히 단절된 것이다. 사람이 배신함으로 비록 지위와 명성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얻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지각 있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한 다음 자기의 본심을 말하고, 충고를 해야 한다.

[2] 가장 위험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값지게 저조를 지킨 자들에게 임하게 될 유익.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더 나은 세상에서 무한히 훌륭하게 "그것을 찾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대개 목숨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일을 할 때에, 또 그 이름을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잃게 된다. 또는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방법들을 부인하느니 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써 잃게 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수천만 명의 피로 날인(조인)되어 우리들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지만"(욥이 다른 경우에 말한 것처럼), "그들의 생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그들의 의무를 인하여 투쟁하였으므로 매우 값있는 자들이다(계 20:4).

둘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도 잃었지만, 마지막 날에 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어버린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도로 찾게 될 수 있다(막 10:30). 그러나 잃어버린 목숨은 이 세상에서 도로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은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시대에 있어서 고난받는 성도들을 뒷받침해 준 신앙적인 기대였다. 그들이 목숨에 대해 위태롭게 느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발견하였던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그들로 하여금 웃으면서 교수대로 가게 하였고, 노래하면서 처형대에 서게 하였으며, 또한 원수들의 극악무도한 형벌도 "가벼운 고통"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2) 처형대에 놓여있는 영혼의 가치성과 그것에 비교되는 세상의 무가치성(26절).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제 목숨" (th,n yuch.n aivtou/)은 "제 영혼이"(역주:흠정역에는 "영혼"으로 되어있음)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생명"이기 때문이다(창 2:7). 이것은 일반적인 법칙, 즉 사람이 무엇을 얻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 얻은 소유물을 즐길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불멸적인 영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죽음에 의해 잃어버린 영혼은 온 세상의 소득으로도 도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각 사람은 그 자신의 영혼(또는 목숨)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생각하고 추리하는 사람의 불멸적인 기능으로써 회상과 예상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머지않아 몸에서 분리되어 작용을 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목숨)은 그 지배와 소유적인 면에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영혼은 내 것이다"라고 하셨으므로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되었다는 점에서만이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속할 때이다.

둘째, 영혼(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위험성이 있다.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은 그 영혼이 가장 선한 것에서부터 가장 악한 것에로 영원히 분리될 때이다. 그 때에 영혼은 죽을 수 있을 만큼(ao far as a soul can die) 죽게 된다(역주:아주 죽어버리지는 않을 정도로 죽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그 때에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분리가 되어, 그의 분노와 저주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사람은 그가 지옥에 있기 전까지는 결코 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역주:내버림을 받게 되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만일 영혼이 잃어버린 바 된다면, 그것이 죄인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그가 분명히 제 목숨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또한 유일하게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을 멸시하기(호 13:9) 때문이다. 죄인이 죽는 것은 그가 마땅히 죽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피가 그의 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의 영혼(목숨)은 온 천하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우리의 영혼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명예, 그리고 쾌락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것들보다 더욱 값어치가 있다. "온 천하"를 한쪽에 놓고 또 한쪽에는 "한 영혼"을 놓고 저울로 달아보면, 비료도 안 될 만큼 "온 천하"쪽이 위로 올라가게 되어, 결국 무게를 재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물을 이와 같이 판단하신다. 그는 유능하신 재판장이시다. 그는"영혼"(목숨)의 가치를 알 만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그들을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세상을 경시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다섯째, 세상을 얻는 것이 곧 영혼(목숨)을 잃는 것이 될 때가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전폭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염려함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중대사를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세상을 열심히 뒤쫓아가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파멸과 멸망에로 빠지게"한다.

여섯째, 영혼(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상실(a loss)의 때문에 온 천하로도 그것을 메꾸거나 상쇄할 수 없다. 만일 세상(천하)을 얻었다 할지라도 제 목숨을 잃어버린 자는 스스로 악조건의 거래를 한 자이며, 결국 말할 수 없는 손해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가 잔액을 계산하고 이득과 손실을 비교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이익 대신에 그의 모든 의도와 목적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돌이킬 수 없도록 파산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한 번 목숨(영혼)을 잃어버린, 그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불될 수 있거나 영수될 수 있는 "재평가"(avntalla,gma)가 없다. 보상되거나 상쇄될 수 없는 상실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목숨)을 구속하기 위하여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목숨을 도로 찾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시고 난 후에 그 영혼들이 세상에 대해 너무 소홀히 생활한 나머지 그것들을 잃게 된다면 그들을 얽매이게 하는 저당 증서는 결코 말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영혼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거나 값을 지불할 수는 도저히 없으며, 구 속의 평등성은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회를 선용하여, 스스로 잘 처신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을 받는 일에 있어서 몇 가지 격려를 하고 계시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때 그의 영광을 보리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27절). 우리가 이러한 일들의 나중, 즉 세상 끝 날과 그 때의 영혼들의 표정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사물들의 현재 상태에 대해 다른 생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때에 나타날 것으로 사물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지금 나타나야 할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역주:우리는 어떤 사물이 그 때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상상한다면 현재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그 때에 나타나게 될 모습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확신을 주는 데 가장 큰 격려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실이다.



[1] 그의 재림은 그의 영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라." 어떤 고통이나 위험가운데 처한 그의 제자들이 겸손의 신분을 가지신 그리스도, 비천하시고 초라하시며 "사람에게 비난을 받으시고, 백성들에게 멸시를 당하신" 그를 바라볼 때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의역). 그러나 천상 세계의 모든 위엄과 권세를 갖추시고 영광 가운데 오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활력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위하여 일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자가 장차 오리니" 그가 여기에서 자신을 그의 겸손한 신분의 칭호(그는 "인자"이시다)로 부르시는 것은 그가 그러한 신분을 인정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가 세상에 처음 오실 때는 그의 자녀의 비천함을 입으셨으며, 그들과 같이 육신의 형상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오실 때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는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동반하셨지만, 그가 두 번째 오실 때는 영광스러운 천사들을 동반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딤후 2:12).

[2] 재림은 우리의 관심사(우리와 관계된 중대한 문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세상 권력자들보다 더욱 탁월하게 보상과 형벌을 실시하시기 위하여 재판장으로서 오실 것이다. 사람의 재판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판을 기대하는 믿음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둘째, 그때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얻은 소득에 따라서 보상을 받게 되지 않고, 그들의 행한 일과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또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날에 배교자의 반역은 영원한 파멸에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며, 신실한 자의 지조(정절)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셋째, 그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재판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친구로 삼을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 이러한 일들은 계산될 때에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들의 행위에 따른 보상은 그날까지 보류된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제멋대로 판결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우리는 배교적인 행동이 즉각적으로 형벌을 받거나 신앙적인 행동이 하늘로부터 즉각적인 격려를 받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날에는 모든 것이 올바르게 시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딤후 4:6-8).



(2) 이 세상에 그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28절). 그 나라는 매우 가까이 와 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어떤 자들은 죽기 전에 그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시므온이 육신으로 오신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처럼,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나라에 임하시는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죽음은 느낄 수 있다. 그 두려움은 나타내 보여지며, 그 쓰라림은 맛보게 될 수 있다)는 확약을 받고 있다. 마지막 날에 그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찬 지금 그는 자신의 나라, 즉 그의 중재적인(mediatorial) 나라에 오셨다. 그의 영광은 이 일이 있은지 며칠 후 그가 변화하실 때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마 17:1). 그때에 그는 자신의 왕복(왕이 입는 옷)을 입고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의 부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과 복음 교회의 설립, 예루살렘의 파멸, 기독교를 가장 쓰라리게 박해하였던 유대인들의 나라의 제거 등을 가리킨다. 이분이 바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인자"이셨다. 그때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 멸망후까지 살았던 것을 직접 목격하였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1] 그들의 사업은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립하는 일에 채용되었다. 어떠한 반대를 만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노고에 대해 알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들은 위로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고난받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성도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나라가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의 주장은 변호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보상(보복)이 될 것이며, 그들의 핍박자는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다.

[3] 이것은 머지않아 곧 현 시대에 행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구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욱 즐거움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보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서 있도다." 현재 구름이 낀 때에 생존하게 될 자들이 더 좋은 날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는 은혜라고 말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단 12:12).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아닌, "몇"(some) 사람만이 살아서 그러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유의하라. 몇 사람만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은 광야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살아서 보게될 자가 "누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것을 알므로써 죽는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역주:우리말 개역에는 "볼 자들도")고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서 있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인내하라."

 

16:25 없음.

 

16:26 없음.

 

16:27 없음.

 

16:2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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