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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방 박사들의 탐문 (마태복음 2:1-8)

그리스도는 "열방들의 소망"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을 알아차리고 주시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또한 그의 출생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무시된 것은 그가 담당하신 "겸비의 표식"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을 비우셨으며 무명(無名)한 자가 되셨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게 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의식을 갖추고 영접될 것이며, 또한 왕관과 왕 홀이 즉시 그의 발 앞에 놓이고, 세상의 최고 지위에 있는 강력한 왕들이 그를 겸손하게 섬기는 종들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바로 이러한 메시야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이런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아니 그는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치 아니하였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 시킨 것에 대해 그를 만족케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그 자신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받으실 영광을 거절하시고 포기하셨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탄생시에서와 같이 몇 줄기의 영광의 빛이 극도의 비천 가운데서 눈부시게 비쳐 나왔던 것이다. 비록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으나 그의 손에서 나온 광선"(합 3:4)은 세상과 특히 어리석은 유대인들을 정죄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나신 후 맨 처음으로 주목하여 본 사람들은 목자들(눅 2:15 등)이었는데, 그들은 그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들을 보고 들었으며, 또한 "그 사실들을 널리 전파하여"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17,18절). 그 후에 시므온과 안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다(눅 2:38).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러한 암시들을 알아차리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를 두팔 벌리고 맞아들였어야만 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드러나 있는 범위내에서 그는 그 후 거의 2년 동안이나 베들레헴에 계셨지만 동방 박사들이 올 때까지 그를 주목해 본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단 무관심해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깨우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기독교인으로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도 이들에 못지 않게 어리석은 경우가 허다하다.

Ⅰ.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탐문하던 시기. 이 때는 "헤롯왕이 다스렸던 시대"였다. 이 헤롯왕은 에돔으로서 그 당시 로마제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안토니우스(Antonius)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으며, 원래 성격이 난폭하고 간사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헤롯대왕"이란 명칭을 증정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헤롯대왕이 유대를 다스린지 35년이 되던 해에 탄생하셨다. 또한 이 사실을 유의해 보는 것은 "홀(笏)이 유대에서 떠나고, 율법을 주신 자도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났으며", 따라서 지금은 실로가 오실 때이며 "백성이 그에게로 모일 때"(창 49:10)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다. 동방 박사들은 이 말씀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Ⅱ. 이 동방 박사들은 누구며 무엇 하는 사람이었는가? 그들은 여기에서 Maroc(박사들, 술사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를 좋은 의미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박사"(Magi)는 "파사인들" 가운데서 철학자들, 또는 제사장들이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들은 "박사"에 맨 먼저 등록된 자가 아니면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불법적인 마술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박수인 시몬(행 8:9, 11)이나 엘루마(행 13:6)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성경에서는 이 말이 그 밖의 다른 뜻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마귀를 이기신 승리의 첫 실례요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귀를 그토록 숭상하던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최초의 숭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흑암의 권세들을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상패는 빨리 세워지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이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실로 "현명한 사람들"(박사)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1.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축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은 그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종 수단에 가장 가까운 자가 목적과는 먼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8장 11,12절을 보라. 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바친 존경은 행복한 조짐이었으며,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까워"질 때 자연히 따르게 될 사실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였다.

2. 그들은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술, 즉 교묘한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학자는 좋은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울 때"에만 그들의 "학문"은 완전해질 것이다.

3. 그들은 "점치는 것"으로 유명했던(사 2:6)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라비아는 "동방의 나라"라고 불리우며(창 25:6), 아라비아인들은 "동방의 사람들"이라고 불리워진다(삿 6:3). 그들이 가져왔던 선물들은 동방, 즉 아라비아에서 나는 것들이었다. 또한 아라비아인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과 솔로몬에게 신하의 예의를 드린 적이 있었다. 이드로와 욥도 역시 아라비아인이었다. 이 이상은 그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 로마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세 사람(어떤 교부는 열 네 사람이라고도 함)이며 또한 왕들이었으며, 콜렌(그 때문에 "콜렌의 세 왕들"이라고 불리움)에 장사되어 묻혀 있다고 하나 이 전통은 근거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기록된 것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Ⅲ.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찾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동방"에 있는 그들의 나라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이상한 별"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 별이 "유대" 땅에서 태어난 특별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이 별이 유대 땅 위에 혜성이나 유성처럼 낮은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별은 보통 별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이 별이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모습에서 그의 마음과 뜻을 찾아내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나타날 징조들"에 대하여 예고하셨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천사"에 의해 유대인 목자들에게 알려졌으며, "별"에 의해 이방인 철학자들에게 알려졌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또한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이 그리스도가 나시던 날 밤에 그들 주위에 비취고 있는 것을 보았던 그 빛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박사들에게 별(星)로 나타났던 바로 그 빛이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주장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박사들이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을 훨씬 후에 다시 보았고 그 별이 그들을 그리스도가 누워 계신 곳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이 별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세워둔 촛불과 같은 것이었다. 우상 숭배자들, 특히 "동방"의 나라들은 별을 "하늘의 천군"으로 불리웠으며 이로부터 혹성들은 그들의 이방 신들의 명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들이 특별히 숭배했던 "별"에 대해서는 아모스 5장 26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잘못 사용되어온 별들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올바로 사용되었다. 즉 이방의 신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별이 그들로 하여금 발람의 예언, 즉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온다"(민 24:17)는 예언을 생각나게 했다고 추측한다. 발람은 "동방의 산악 지방" 출신이며 이러한 "박사들"중의 하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것은 그 당시 동방에 널리 퍼져 있던, 어떤 위대한 왕이 나타나리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타키투스(Tacitus)는 그의 역사책(lib V.)에서 이 사실에 대해 유의하고 있다. "어떤 제사장들의 고대 문서 가운데 그 때쯤 한 동방세력이 일어날 것이며 유대땅에서 인물들이 나와서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역시 "베스파시안"의 생애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박사들은 이 이상한 현상이 바로 그 "왕"의 출현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신적인 감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별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표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Ⅳ.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찾아내었는가? "그들은 동방에서부터" 이 왕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유대인의 왕을 찾으려면 "모든 여호와의 족속이 올라가는" 어머니 도시, 예루살렘 이외에 락 곳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말하기를, "만일 이러한 왕이 태어난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곧 그 소식을 듣게 될 것이며 그 때에 그 왕에게 경배를 해도 늦지는 않은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왕에 대해 보다 잘 알기를 조급히 원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찾으려고 갈망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를 찾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위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려고 추구한다면 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였다. 그들은 "혹시 그러한 왕이 어디에 나셨는지 아는가?"라고 묻지 않았다(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하였으며, 또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으며 그들이 마음속에 요지부동의 사실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어디에 나셨는가"를 물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해 "더 알기"를 간절히 사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른 것은 메시야가 바로 그러한 분으로 나실 것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의 보호자이시며 통치자이시다. 즉 그는 "왕으로 태어나신"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박사들은 즉석의 답변을 얻게 될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온 예루살렘이 이 새 왕의 발 아래 경배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 질문을 해야 했으며, 또한 아무도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못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이나, 또한 교회에서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무지(無知)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박사들은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물은 것처럼 "내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술람미 여자처럼 계속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왜 그를 찾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박사들은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를 찾으며, 동방 사람들과 유대인의 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우리가 그를 경배하러 왔노라"고 즉시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리스도가 "그들의 왕"이 될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에 늦지 않게 그리스도와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으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샛별이 그 마음속에 떠올라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은 그를 경배하는 일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별을 보았는가?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영광 돌릴 것인가를 연구해 보자.

Ⅴ. 이 탐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이러한 소식은 마침내 왕궁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며, "헤롯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당황하였다"(3절). 헤롯은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과, 다니엘의 예언에 의해 정해진 메시야의 출현 시기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통치해 왔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메시야 약속들은 이제 영원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왕국은 이러한 예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정해진 메시야의 출현 시기가 다 된 그 때에 이러한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은 실로 그에게는 청천의 벽력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육욕적이고 사악한 심령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에돔 사람인 헤롯은 듣고 소동했지만 예루살렘은 그의 왕이 오신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몇 사람 외에는 "온 예루살렘"이 헤롯과 함께 소동하며 이 새 왕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어떤 나쁜 일이나 초래하지 않을까, 또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그들의 욕심을 억제시키지나 않을까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헤롯 외에 다른 왕을 원하지 않았으며, 메시야조차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보다 어리석게도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영혼의 필연적인 혁명에 뒤따르는 현재의 어려움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헤롯과 예루살렘이 이처럼 소동한 것은 메시야의 왕국이 세속적인 권력들과 충돌하고 간섭할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시야를 왕으로 널리 알린 그 별은 메시야의 왕국은 천적(天的)인 것이며, 이 지상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암시하였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지상의 왕들이나 그 백성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Ⅵ. 박사들이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서 이 질문에 대한 도움을 받은 사실(4-6절). 누구도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지만, 헤롯은 "그가 어디에서 나게 될 것인가"고 물었다. 헤롯이 이 말을 물어본 사람들은 가르치는 일을 맡은 대제사장들과 율법 연구하는 일을 맡은 서기관들이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만 하였다"(말 2:7).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요 7:42). 그러나 헤롯은 이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이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에 문의했던 것이다. 그는 더욱 만족한 대답을 얻기 위해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약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게 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선한 질문을 할 때가 많이 있는데 헤롯의 질문이 이 경우에 해당하였다.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의 의견도 서로 일치하였는데, 모두가 메시야는 "다윗성 베들레헴에서 나신"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불리운 것은 스불론 땅에 있는 같은 이름의 지명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수 19:15).

"베들레헴"이란 말은 "떡의 집"을 의미하는데, 이 곳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이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증거로 제시한 성경 구절은 미가서 5장 2절이었는데, 예언되기를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미 5:2)고 되어 있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영광이 다른 고을들처럼 사람이 많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게 될 왕의 위대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어떤 면에서는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일지 모르나 이 점에 있어서, 즉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시 87:6)라고 한 점에서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고을들보다 뛰어난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 즉 유대인의 왕이 나오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를 "다스리는 자"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었고 다윗은 베들레헴의 영광이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과 계승자는 이곳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베들레헴" 성문 곁에는 다윗이 마시기를 원했던 유명한 샘물이 있었다(삼하 23:15).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값없이" 생명수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징들을 어떻게 서로 비교 대조해 보았는가를 관찰해 보려고 한다.

이방인들은 별에 의해 그가 태어나실 때를 알았지만, 유대인들은 성경에 의해 그가 태어나실 장소를 알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서로의 지식을 교환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서로간에 교환함으로써 많은 지식의 증가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서로 주고받고 교환함으로써 부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기꺼이 그들의 지식을 전달해 줄 것이며 이와 같이 많은 지식이 왕래함으로써 "지식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Ⅶ. 이 질문으로 말미암은 헤롯의 유아 살해 계획(7, 8절). 헤롯은 이제 나이 많아 늙었으며 35년간이나 통치해 왔다. 그러나 이 왕(그리스도)은 이제 갓 태어났으며 앞으로 여러 해 동안은 어떤 일을 꾸밀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그를 시기하였다. 왕관을 쓴자가 그의 계승자를 생각한다는 것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그의 저구에 대해서야! 따라서 그 어린 왕을 살해하는 것 외에는 그의 마음을 흡족케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또한 헤롯은 만일 이 새로 태어난 아기가 참으로 메시야라면 그를 대적하고 해치려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며 이것보다 더 헛되고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흥분과 걱정이 그의 이성과 양심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1. 헤롯이 꾸민 간교한 계획(7, 8절). 그는 이 일에 대해서 박사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을 가만히 불렀다". 그는 공공연하게 그 자신의 두려움과 질투를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박사들에게 알리는 것이 수치스러웠고 백성이 그것을 알게 되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은 그들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남모르는 두려움으로 종종 괴로움을 당한다. 헤롯은 그의 계획을 치밀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어 보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찾게 하였고 또한 아기를 찾게 되면 그에게 알릴 것을 명령하였다. 헤롯은 박사들이 혹 자기에게서 어떤 수상한 점을 눈치챌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려 하노라"는 말로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자신을 꾸몄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종 가장 악한 것이 신앙이란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은폐한다.

2. 헤롯은 그의 명령을 충분히 이행할 사자를 보내지 않고 박사들에게 그 일을 맡김으로 그는 이상하게 조롱당하게 된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의 거리를 불과 7마일 밖에 되지 않았다. 만일 헤롯이 정탐군을 보내어 박사들을 지켜보게 했더라면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할 때 곧 달려들어 아기를 쉽게 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눈으로부터 교회를 쉽사리 파괴할 수 있는 방법들을 숨기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망하게" 하실 때에는 그들의 "판단을 어리석게 만든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박사들의 경배 (마태복음 2:9-12)

여기에는 박사들이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겸손하게 경배한 사실과 그에게 바친 존경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박사들은 "아기를 만날 때까지 계속 찾기를" 결심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박사들만이 그곳으로 갔으며 왕궁이나 교회 또는 예루살렘 성에서 그 누구도 마음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박사들에 대한 외모로나 어린 왕을 보려는 호기심으로도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남방의 여왕"과 같이 "동방의 박사들"도 심판 때에 일어나 그 세대와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며, 한편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바로 옆 고을인 베들레헴에 조차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사들은 그들이 애써 찾았던 그리스도가 이와 같이 자기 나라에서 무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박사들은 실망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먼길을 찾아온 것이 자기 백성조차 무시하고 천대하는 유대인의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밀고 나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단지 혼자만 남게 될지라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함께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

Ⅰ. 박사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보았던 바로 그 별에 의해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다(9, 10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혜스럽게 인도하셨다. 그 별은 최초에 날아서 박사들로 하여금 이 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해 주었으며, 그 후에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왕을 찾기 위하여 평범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유의할 것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일에 있어서 특별한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박사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많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고을이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면 어디에 가서 그를 찾을 것인가? 여기에서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여기에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박사들은 말씀으로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그들을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는 않으셨다. 그것은 "홀연히 동방에서 그들이 보았던 그 별이 바로 그 때에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할 바를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일어나서 행하라, 그러면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라". 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succurrit lex-즉 법은 게으른 자에게가 아니라 부지런한 자에게 도움을 준다.

오랫동안 그들에게서 사라졌던 그 별은 이제 다시 나타났다.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빛이 그들을 위해 비춰지며, 보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된 땅"에 이르기까지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으나 박사들은 그 자신이 "광명한 새벽별"이신 "약속된 씨(후손)"에게 별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다(계 22:16). 하나님은 부지런히 충실하게 그를 찾는 자를 혼란 속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을 창조하신다. 이 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빛이시며 그의 백성을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우리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 자신이 그의 인도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눈으로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며"(시 32:8), 또한 "이것이 그 길이니 이리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한 샛별이 떠 있어 그들을 인도한다(벧후 1:19).

2. 박사들은 기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하여 따랐다(10절). "저희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이제 박사들은 그들의 기대한 바가 어긋나지 않았음과 이렇게 먼길을 여행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박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표식은 그 가치를 아는 자의 영혼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반드시 채워 준다. 이제 박사들은 그들이 공연한 헛수고를 한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오히려 비웃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성 중에 순행하는 자"가 술랍미 여자에게 그 사랑하는 자의 소식을 말해 줄 수 없었으나, 그녀가 "그들을 떠나자마자 그 사랑하는 자를 만나게 된 것"과 같다(아 3:3, 4). 우리가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너무도 적지만, 하나님에게 기대할 것은 너무도 많다.

이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얼마나 큰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던가! 이러한 기쁨은 누구보다도 "속박의 영"인 마귀의 세력 아래에서 지루하고 우울한 유혹과 추방의 밤을 지낸 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 하시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비취는 빛과 같으며, 죽음 가운데서 얻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이제 박사들은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곧 뵙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샛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는 모든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별은 박사들을 맞아 왕을 뵙게 될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이 예전(禮典) 장관의 안내로 박사들은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기뻐하고 행하려고"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만나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사 64:5).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한다.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만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초신자들에게 놀라운 그의 사랑을 즐겨 베푸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삶을 시작할 때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 그들을 격려하신다는 사실이다.

Ⅱ.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았을 때 정중하게 경배를 드렸다(11절). 박사들은 그 아기 왕이 비록 국가에 의해서는 무시를 당하였을지라도 가정에서는 존귀하게 섬김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고 추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박사들이 아기 왕의 궁전이 마굿간이며, 그를 수종드는 자는 초라한 그의 어머니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이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구주"이신가? 이 아기가 유대인의 왕, 아니 "세상의 왕 중 왕이신가? 그렇다. 참으로 이 아기야말로 "본래 부요하셨으나 우리를 위해 이렇게 가난하게 되신" 왕 중 왕이셨다. 박사들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이 멸시받은 아기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지닌 영광"을 분별해 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문이 실패였다거나 헛된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찾던 왕을 발견하였을 때 먼저 그들 자신을 그에게 바친 다음, 그들의 예물을 드렸다.

1. 박사들은 그들 자신을 그에게 드렸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였다" 성경에는 박사들이 최고의 왕적인 화려함을 갖춘 헤롯에게 이러한 경의를 표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에게 이러한 경의를 표했는데, 이것은 왕으로서만의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헤롯에게도 같은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 앞에 엎드려, 그를 찬미하고 그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네 하나님이니 그에게 경배하라." 주 예수를 겸손하고 신실하게 경배하는 것은 가장 현명한 지혜이며, 이로써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참된 유익을 이해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2. 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그들의 예물을 드렸다. 동방에서는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 예물을 바쳤다. 시편에서도 스바의 왕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 것을 "그들이 예물을 가져와서 드리리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시 72:10). 이사야 60장 6절을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리는 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를 위해 버리거나 그에게 바쳐야 한다. 또한 먼저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그에게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을 열납하시고, 그 후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다." 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다. 말하자면 돈이거나 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를 통하여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그들의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때마침 이 예물을 보내 주셨다. 이 예물들은 박사들의 본 고장에서 나는 토산물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으로서 그를 공경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친 예물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황금"을 바친 것은 왕이신 그리스도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기이사의 것은 기이사에게"라는 말씀은 바로 왕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이르시는 말씀이다. "유향"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바쳐졌는데, 이것은 유향을 피워 그 향기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몰약"은 장차 죽으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바쳐졌는데, 몰약은 시체를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

Ⅲ. 박사들은 아기 왕을 찾아 뵙고 난 후에 그를 떠나 돌아갔다(12절). 헤롯은 이전에 박사들에게 그들이 아기를 찾거든 "그 소식을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명령했었다. 박사들이 만일 반대 명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헤롯의 악한 계획을 위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정직하고 좋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은 남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쉽사리 믿어버리며, 실제로 세상이 그만큼 악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를 어떻게 시험에서 건져내실 것인가"을 알고 계신다.

박사들이 헤롯에게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비록 그들이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그 약속에 흔히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반드시 붙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박사들이 헤롯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으며, 이로써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계획한 음모를 막으셨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이 그 계획에 본의 아니게 공모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게 될뻔한 괴로움도 막아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 Crhmatisqegtej 신탁적인 암시-oraculovel responsl accepto)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박사들이 하나님께 지시를 구한 후 받은 응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죄를 두려워하고 올무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께 지시하심을 구하면 옳은 길로 인도함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박사들은 "헤롯이나 예루살렘에로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보고를 들려 그들 자신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게 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으며, 비록 알려 주었다 하더라도 가서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들은 고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에 대한 그 후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으며, 그들이나 그들의 고국 사람들이 그들이 요람 속에 있었을 때 경배했던 그리스도를 그후 성전에서 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시는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오신 주"로 신앙한 사실에 대한 확증이라고 할 수 있다.

 

2:10 없음.

 

2:11 없음.

 

2:12 없음.

 

2:13

애굽으로 피난 가심 (마태복음 2:13-15)

여기에는 헤롯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헤롯의 이 유아 학살은 박사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질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유아시에 받은 존경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져도 그의 백성 가운데서 공경을 받게 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어 위험 속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요셉에게 주어진 피신 명령(13절). 요셉은 아기가 처해 있는 위험을 몰랐으며, 어떻게 그것을 피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이전에 그에게 어떻게 해야할 것을 지시하신 대로(1:20) "꿈 속에서" 요셉에게 말씀하셨다. 요셉은 그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지금처럼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믿음에 의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자는 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하늘 나라와의 교통과 통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 여기에서 요셉은 그들이 처해 있는 위험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지시, 즉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지시를 받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모든 잔인한 계획과 의도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산헤립에게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일반적으로 만년에 고생과 위험을 겪는 사람들도 어릴 때에는 평화롭고 조용히 보낸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의 생애와 고난은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별 되었던"(렘 1:5) 예레미아처럼 "다툼과 침을 당할 자"(렘 15:10)로 태어나셨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나 그의 몸인 교회는 다 함께 "내가 어릴적부터 수없이 그들이 나를 괴롭게 하였다"라고 말한다. 바로의 잔인성은 히브리인의 아이들에게 덮쳤으며, 큰 붉은 용은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2. 요셉은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지시 받았다. 즉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어린 시절에도 후일 그가 명하신 말씀, 즉 "이 동리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리로 피하라"(10:23)는 말씀에 대한 모본을 보이셔야만 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시려고 오셨지만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였다. 자기 보존은 자연법칙의 하나이므로 분명히 하나님의 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애굽으로 피신"하셨을까? 애굽은 우상 숭배와 폭정,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애굽은 "종 되었던 집"이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매우 잔인했던 나라였다. 라마에서 못지 않게 애굽에서도 "라헬이 그 아이를 위해 심지어 애곡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거룩한 아기 예수의 피난처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신다면 최악의 장소로 하여금 최선의 목적을 위해 쓰이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땅은 여호와의 것"이므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때때로 땅은 "그 여인을 돕기도 한다"(계 12:16). 버린 자들을 위해 모압을 피난처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자신의 아들을 위해 심지어 피난처로 삼으셨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이 아기가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와 같이 수치스럽게 피신하는 방법외에 벌레와 같은 인간에게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과 이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화염검을 가진 그룹들을 소집할 수 없는가? 헤롯을 쳐서 죽게 하든지, 그를 적대하려고 내뻗친 그 손을 마르게 하므로써 이렇게 피신하는 고생을 하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고 계속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셉과 마리아는 최근에 그 아기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말을 천사로부터 들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여기에 있지도 못하게 그를 내어쫓는가?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불평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믿음은 시험해 본 결과, 확고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이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다. 오히려 그들은 아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흔히 쓰는 방법인 피신책을 썼다. 요셉은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 됨으로써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광에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영광이 그러하듯이 고통이 수반되었다. 요셉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피신해야만 했다. 이 사실에 분명히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 가까운 관계를 맺게 함으로 아기와 그 모친을 위해 훌륭한 준비를 마련하셨다. 박사들이 가져왔던 황금은 이제 그들의 비용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당하게 될 어려움을 미리 아시고 그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동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항상 변치 않으시고 베푸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하는 자기 백성을 여전히 지키시는 것이다.

(2) 애굽에로의 피신은 심지어 우리 주 예수님이 낮아지신 겸손의 한 실례이다. 베들레헴에 있는 사관에서 누우실 방이 없었던 것처럼, 유대 땅에는 그가 조용히 계실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이와 같이 그가 지상의 가나안에서 추방되신 것은 죄로 인해 천상의 가나안에서 추방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추방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어느 때라도 곤경을 당하게 될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유아시에 당하셨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것을 달게 받아 들이자.

(3) 애굽에로의 피신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해 버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무시했던 자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은 정당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진정한 호의를 볼 수 있다. 또한 후일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했을 때 이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를 유대 땅에서 추방하였을 때 애굽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내 백성 애굽이 복 있도라"(사 19:25)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질 날이 그리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Ⅱ. 이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14절). 이 여행은 아기나 모친에게 다 같이 불편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애굽에서도 냉대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요셉은 "하늘의 환상에 불순종하지 않았으며," 반대의사를 제기하거나 지체하지도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아마도 명령을 받은 그날 "밤중에" 길을 떠났던 것 같다. 이 사실은 틀림 없이 순종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일을 빨리 서둘러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제 요셉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히 11:8)도 하나님만을 절대로 의지하고 나아갔다. 요셉과 그 아내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렇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났으나 걱정할 것이 별로 없었다. 재물의 풍성함은 급히 피신할 수밖에 없을 때 큰 걱정거리가 된다. 부자들은 그들이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 가난한 자들보다 유리하다면, 가난한 자들은 재물을 버려야할 때 부자들보다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아기가 주요한 인물로서 먼저 언급되고, 마리아가 "요셉의 아내"로 불리우지 않고 그녀의 더 존귀한 신분인 "그 모친"으로 불리운 사실에 유의한다. 이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분노를 사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피해 쫓겨간 그 요셉은 아니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요셉은 옛날의 요셉을 보아서라도 애굽에서 마땅히 환영을 받았어야만 했다.

만일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들이 애굽에 들어가 우연히 어떤 신전에 들어갔을 때 모든 우상의 신상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무너졌으며, "여호와께서 애굽에 임하실 것이며 애굽의 신들이 그 앞에서 요동할 것이라"(사 19:1)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마치 법궤 앞에서 다곤의 신상이 넘어진 것처럼 넘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7년,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달이 못된 기간이었다고 한다. 애굽에서 이들은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으며, 성전에서 섬기지도 못하고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머물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 하시고 자비를 원하신다." 비록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였으나 그 성전은 주님을 그들과 함께 모시고 있었다. 하나님의 규례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떠나 있게 되는 것이나, 악한 자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있게 되는 것은 운명의 탓이라고 할 수 있으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선한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 될 수밖에 없다.

Ⅲ.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의 성취. 즉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노라"(호 11:1)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마태는 특히 그리스도에 관한 일에 있어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가장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복음서가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예언자의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맏아들로 삼으셨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사건을 가리킨다(출 4:22). 그러나 여기에서는 유추의 방법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에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성취된 기록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 가지로 완전하고 풍성하며 또한 질서가 정연하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성경을 이루신다.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범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였고 내가 그를 사랑하였지만 애굽에서 오랫동안 고통받도록 내버려두었으나, 그를 사랑하였으므로 때가 이르매 그를 애굽에서 불러내었노라." 이 말씀을 읽는 자는 옛 일만을 생각하고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생각해야 하며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으리라"(전 1:9)는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 표현 방법이 이 같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내가 그를 불렀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내 아들을 불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낯선 땅, 속박의 집인 애굽에 있게 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며, 그들은 반드시 속박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숨어 지낼지는 모르나 거기에 내버려둠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본래 진노의 자식으로서 영적인 애굽에서 태어났으나 회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그곳에 부름을 받아 나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애굽에 계신 사실을 있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흑암의 땅에서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러나 이 사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더 고귀한 영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애굽으로부터 나왔으며 그리스도가 애굽에서 나오신 사실도 이와 같은 뜻을 가진다.

 

2:14 없음.

 

2:15 없음.

 

2:16

헤롯의 유아 학살 (마태복음 2:16-18)

Ⅰ.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함. 헤롯은 박사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는 비록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반드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그의 경쟁자가 나타나면 단번에 없애버리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알아본 결과 그들은 다른 길로 떠나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것은 그의 질투심에 더욱 부채질하였고 그로 하여금 박사들이 이 새 왕의 편이라는 의심을 자아내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기대가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거의 필사적이 되어 버렸고 난폭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뿌리깊은 악은 죄를 지으려고 하는 일에 있어서 방해를 받게 되면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Ⅱ.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리스도를 없애기 위한 헤롯의 정치적인 음모. 헤롯은 만일 그가 특별히 그리스도만을 색출하여 죽일 수 없다면, 전쟁의 칼과 같이 모두 다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불법을 없애려는 자는 모름지기 "모든" 불법을 없애려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롯은 에돔 사람이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이 뼈 속까지 스민 사람이었다. 다윗 때문에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모두 살해했던" 도엑, 역시 에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은 헤롯이 어떻게 이런 야만적이고 잔인한 학살을 수행해낼 수 있을 만큼 비인간적인 하수인들을 선발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손에게 악한 일을 저지를 악한 도구가 부족한 법은 없다. 어린아이들은 인간의 법률이나 본성에 의해 언제나 특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들은 네로의 통치 아래에서와 같이 결백이 아무런 안전책이 되지 못하였던 이 폭군의 분노에 희생되었다. 헤롯은 그의 전 통치 기간을 통해 피를 많이 흘린 왕이었다. 이 얼마 전에 그는 전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살해하였다. 피에 굶주린 자에게 피는 마치 수조병(dropsy)에 걸린 환자에게 주는 물과 같은 것이다. Quo plus sunt potae, plus, sitiuntur aque - 이들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더 갈증을 느낀다.

헤롯은 이제 일흔살 쯤 되었으며, 따라서 "두 살"도 채 못된 어린 아기가 결코 그에게 방해가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자녀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들이 높아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전에 그는 자기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왕위 문제로 죽였으며, 그 후에 역시 자기 아들인 안티파텔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헤롯은 그 후 닷새만에 죽었다. 따라서 헤롯이 이러한 학살을 감행한 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야수적인 자만심과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물에 걸리는 고기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유아 학살이 얼마나 대규모였는가를 살펴보자.

1. 시간적으로, 그는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모두 살해하였다". 아마도 우리 예수님은 이 때쯤 한 살도 채 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그리스도가 그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전부 살해하였다. 헤롯은 자기가 죄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피하지만 않는다면, 무죄한 사람들이 얼마가 죽든지 상관치 않는 사람이었다.

2. 장소로서, 그는 "베들레헴뿐만 아니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모두 살해하였다. 이것은 "그 악의 도가 지나친 것"이다(전 7:17). 여기에서 우리는 불법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그의 분노를 절제하지 않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게 되면 때때로 가장 터무니없는 잔인한 일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그 권리가 박탈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공통적인 죄(원죄) 이상의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 즉 이 어린이들이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그들이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깊은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병이나 죽음은 원죄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유아 학살사건은 다른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즉 그들은 순교를 당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에 대한 박해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10:34, 3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 예수에 대한 소극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아직 모태에 계셨을 때 그가 가까이 접근하자 엘리사벳의 태 속에서 기뻐 뛰놀았던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으신 적이 있었다. 이제 두 살이 되셔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나이의 어린아이들에 의해 증거를 받으신 것이다. 그 어린 아기들은 후일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렸다. 이들은 "고귀한 순교자들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아기들이 이와 같이 피로 세례를 받아(비록 그 피는 그들 자신의 피였지만) 영광스런 교회 안으로 들어 왔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천국에서 받은 것들로 풍성하게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일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 일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와 같이 어린아이들을 괴롭게 하신 일이 전능자에게 합당치 못한 것이 될"것이다.

희랍정교회의 전설(에디오피아어로 된 미사 속에도 포함되어 있음)에 의하면 이때 살해된 아기의 수가 14,000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주간 통계 보고서에 의해 남자 아기의 출생수를 계산해 보면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에서도 남아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물며 그 40분의 1도 못되는 베들레헴 같은 작은 고을에 그렇게 많은 수가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이것은 다만 허황된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인 조세푸스(Josephus)가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하나 그가 저술한 시기는 마태보다 훨씬 뒤의 일이며 따라서 아마 그렇게까지 기독교 역사를 옹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열렬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만일 이 사건이 사실이 아니고, 충분히 입증될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 사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교도인 저수가 마크로비우스(Macrobius)는 다음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구스도 가이사는 헤롯이 그가 두 살 아래로 죽일 것을 명했던 아이들과 함께 그의 소생인 아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헤롯에 대해 농담하기를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 나라의 관습은 헤롯으로 하여금 돼지를 죽이게 하지 못할 수 있었으나 아무 것도 그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을 말리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 베들레헴에는 유모에게 맡겨진 헤롯의 아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또한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사건, 즉 유아 학살 사건과 그의 아들 안티파텔의 살해 사건이 잘못 혼동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소위 "거룩한 아기들의 날"을 제정하여 연중행사로 지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야만적인 학살 행위로써 헤롯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또한 헤롯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선지자들의 묘를 세우면서도 그들 자신은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의 나머지를 채우던 유대인들의 행위와 같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 학살 사건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있음을 관찰한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에 의하면 메시야의 탄생 장소는 베들레헴이며 그 시기는 이때였음이 분명하다. 이제 이 시기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모든 아이들이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전부 살해되었으므로 예수님 이외에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헤롯은 그가 모든 구약의 예언들을 좌절시켰으며, 별의 지시나 이 새 왕의 나라로 먼 여행을 했던 박사들의 정성을 쓸모 없게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 벌집을 불태워 버렸으니 왕벌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를 비웃으시고 조소하였다." 인간이 아무리 간교하고 잔인한 계획을 마음에 품을지라도 "여화와의 도모는 영원히 설" 것이다.

Ⅲ. 이 일에 있어서 성경이 이루어진 사실(17, 18절). 이로써 "라마에서 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31:15)이 성취된 것이다. 성경이 그대로 이루어진 이 사실을 보고 찬미하라! 이 예언은 예레미아 당시에 느부살라단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모든 포로를 라마에 끌고 와서(렘 40:1) 그곳에서 그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칼로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을 때 성취되었다. 그 때 라마에서의 통곡 소리가 베들레헴에까지 들려왔다(이 두 고을은, 하나는 유다 지파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동일한 예언이 유아들이 살해당한 슬픈 사건에서 도 다시 성취되었다. 이 예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취되었다.

1. 애곡하는 장소에서의 성취. 애곡하는 소리는 베들레헴으로부터 라마에까지 들렸다. 이것은 헤롯의 잔인한 학살이 베들레헴의 온 지경과 라헬의 베냐민의 지경에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들레헴 부근의 지방이 "라헬"이라고 불리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라헬이 그곳에서 죽어 장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었다.(창 35:16, 19). 사무엘 상 10장 2절과 비교하라. 라헬은 자녀들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라헬은 그녀가 해산하다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불렀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들도 라헬과 비슷하였는데, 그들은 라헬의 무덤 근처에 살았고 그들 중에 다수가 라헬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슬픔을 "라헬의 애곡하는 소리"라는 우아한 표현으로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다.

2. 애곡하는 정도에 있어서의 성취. 그 슬픔을 "애통과 통곡, 큰 슬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이 극심한 재난에 대해 그들이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하다. 애굽에서 처음 난 모든 것들이 죽임을 당할 때 큰 통곡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본성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갓난아기가 살해된 이곳에서도 그러하였다.

여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 슬퍼하는 소리"를 듣게 되며, 이런 저런 것으로 인해 "압제당하는 자의 눈물"을 보게 된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길에는 "눈물의 골짜기"가 놓여 있다. 이들이 당하는 슬픔은 너무도 극심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 슬픔에 젖어들어 그 슬픔을 즐기기까지 하였다.

이 세상에서 슬퍼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물론 죄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슬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슬픔에 대해서는 우리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 것은 그들의 아기들이 이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 있지는 못하므로, 즉 산 사람들의 땅에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참으로 "없어져 버린"것이라면 마치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슬퍼해야 할 구실이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들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앞서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만일 그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때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가장 좋은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다(살전 4:13).

어떤 사람들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당한 이 큰 슬픔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한 데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 그들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통곡하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기쁨으로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인용은 이 슬픈 사건을 근거로 그리스도에 대해 제기할지도 모르는 이의를 반박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즉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실 메시야께서 과연 이런 슬픈 사건들을 끌어들일수 있겠는가?"라고 이의를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이 미리 예언되었으며,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 예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라마에서 애곡하는 소리는 가장 큰 즐거움의 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예언 다음에, "네 수고가 보답될 것이며, 네 결국에 소망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그 치료도 빠른 법이다. 그들에게 한 아기가 태어난 것은 그들의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2:17 없음.

 

2:18 없음.

 

2:19

나사렛으로 귀환함 (마태복음 2:19-2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애굽은 잠시 머물거나 피신하는 곳은 될지 모르나 영원히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오셔야만 했다.

Ⅰ. 그리스도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헤롯의 죽음이었다. 헤롯은 유아 학살 사건 후 오래지 않아 죽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3개월 미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급히 보복하셨다! 헤롯은 죽어야만 했다. 교만한 폭군들이나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가야할 구덩이에 깊이 떨어질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인간이란 죽을 때에 그들의 시기심이나 증오도 다 사라지며(전 9:6), 괴로움도 그치나(욥 3:17),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찌 죽을 인생을 두려워하겠는가?"(사 51:12, 13)

모든 죄 중에서 무죄한 피를 흘린 죄가 가장 급속히 보응을 받게된다. 요세푸스는 이 헤롯의 무서운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Antiq. Jub. lib. 17. 6,7장). 헤롯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속이 타는 듯 뒤집히는 괴로운 병에 걸렸으며, 육식(肉食)을 한없이 탐하였고 산통(疝痛)과 통풍, 수종에 걸려 있었다. 또한 병에 걸린 그에게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서 아무도 그의 곁에 갈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곧잘 분노하였고 성질이 매우 조급해져서 이것이 그 자신에게도 큰 괴로움이 되었고 그들 곁에서 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포를 주었다. 그의 천성적인 잔인함은 이렇게 격노하게 되면 더욱 난폭하여졌다. 그는 그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다음에 많은 귀족들을 투옥했으며, 그가 죽고 나면 곧 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처형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고 발해하던 자가 어떤 인간이었는가를 보라! 기독교를 핍박한 자들은 거의가 네로나 도미티안과 같이 먼저 그 자신의 인간성을 팽개친 자였다.

Ⅱ. 그들의 귀환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19 -21절).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으며, 요셉은 그를 애굽으로 보내신 그 하나님이 거기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애굽에 머물렀다.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든지 우리가 가는 일을 똑똑히 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가시는가를 살피는 것이 좋다. 우리는 그의 명령 없이는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이 명령들은 요셉에게 천사들이 전해 주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통은 우리편에서 지키는 한 우리가 어디 있든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 어느 장소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문을 거절할 수는 없다,. 천사들은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 찾아 왔으며,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과 밧모섬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도 찾아왔다.

1. 천사는 요셉에게 헤롯과 그의 공범자들의 죽음을 알렸다. "아기의 생명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그들은 죽었으나 아기 예수는 살아 계셨다. 때때로 박해를 받던 성도들이 살아남아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죽어 묻혀있는 무덤 위를 걸어다닐 때가 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환란의 폭풍을 이겨내셨으며, 또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찾던 자들," 즉 헤롯과 그의 아들 안티파텔은 이제 죽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하였으나 이 새 왕을 살해하려고 찾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협력했던 것 같다. 먼저 안티파텔을 죽이고 그 후 그 자신도 죽어버렸으므로 이제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 악한 도구가 다른 악한 것을 멸망시킬 때 "여호와는 그가 행하시는 심판에 의해 알려지신다."

2. 천사는 요셉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했다. 요셉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즉시로 그렇게 하였다. 요셉은 애굽에서 견딜 만하게 자리를 잡은 지금 왜 떠나라고 하시는가라고 항변하지도 않았으며, 여행 중에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추측컨데 헤롯이 죽은 이 시기는 겨울이 시작되는 때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또는 어디에 머물게 하시든지 그의 지시를 따른다. 우리가 만일 이 세상을 우리가 종 되었고 추방당한 곳, 즉 애굽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천국만을 우리의 가나안 복지로, 우리의 고향, 안식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부름을 받을 때 요셉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기꺼이 "일어나" 거기에서 떠나야할 것이다.

Ⅲ.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자세한 지시, 즉 어느 길로 가야할지 또는 이스라엘 땅 어느 곳에 정착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22, 23절).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이러한 지시를 먼저 번 지시와 같이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를 바라고 그에게서 무엇을 더 듣기를 기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의 마음을 그들에게 점차로 조금씩 계시하신다. 요셉은 이 명령들을 아마 전 번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의 사역에 의해 "꿈속에서"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아기 예수를 통해 나타내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피신 길에서 아기 예수가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유의하셨거나 알리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틀림없이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린 아이였을 때는 아이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으며 그의 무한한 지식과 권능을 감추셨다. 어린아이로서의 그는 지혜가 더해 가셨다."

이제 이 거룩한 왕의 가족에게 주어진 지시는

1. 유대 땅에 정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22절). 요셉은 예수가 "베들레레헴에서 태어났으므로" 그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매우 사려 깊게 "아기를 위해 근심"하였는데, 이것은 요셉이 "아켈라오가 헤롯을 대신해" 다스린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켈라오는 그 부친 헤롯이 다스리던 전 왕국을 모두 다스리게 된 것이 아니라 유대만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나머지 영토는 다른 사람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어떻게 대(代)를 계승해 가며 대적하는가를 살펴 보라!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다른 하나가 곧 나타나서 옛날의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아기 예수를 유대 땅으로 데려갈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험한 지경에 밀어 넣지 않으시며 다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그들을 연단 하실 때는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도의 생명과 또한 그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며 그들이 흘리는 피가 그에게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지시는 갈릴리에 정착하라는 것이었다(22절). 이 곳에는 그 당시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인 빌립이 다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보통 그의 백성이 폭풍을 피해 조용히 지낸 수 있는 곳이 핍절치 않도록 역사 하신다. 즉 어느 한 곳의 기후가 너무 더워찌는 것 같으면 다른 곳은 좀 더 서늘하고 온화하게 만드신다.

갈릴리는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마리아가 이곳과 유대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스불론 땅 중심에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한 나사렛이란 고을로 보내졌다. 우리 주의 모친이 "거룩한 아기"를 잉태하셨을 때 이곳에서 살았으며, 아마 요셉도 이곳에서 살았던 것 같다(눅 1:26). 이곳으로 그들은 보내졌으며 또한 이곳은 그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친척들 속에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바로 그들이 살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계속 살았으며, 이러한 연유로 우리 주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울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나사렛 사람"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비록 이 명칭이 본래 의미는 "나사렛 출신의 사람"이란 의미 이상은 아니지만 영광스럽고 존귀한 명칭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이 말 속에는 어떤 암시 또는 신비 같은 것이 있어서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1] "그 가지"(사 11:1)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말은 "네차르"로서 "가지" 또는 "나사렛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이란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지"라고 선언된 것이다.

[2] 또한 그리스도가 "위대한 나실인"이심을 말해 준다. 구약의 나실인들은(특히 삼손, 삿 13:5) 이 위대한 나실인의 모형이며 상징에 불과하다. 또한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나실인"이라고 불리운 요셉도 그의 모형이었으며(창 49:26), 나실인에 관해 규정된 규례들도 이 위대한 나실인에 관계되는 것들이다(민 6:2 등). 물론 그리스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나실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죽은 시체를 만지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더욱 "탁월한 의미에서" 나실인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그는 뛰어나게 구원하기 위하여 그랬던 것처럼 구속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별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은 바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름이며 그 이름으로 그를 알 수 있다.

(2) 이 명칭은 또한 비난과 멸시를 받는 명칭으로 볼 수도 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선한 것을 기대할 수도 없고 존경할 가치도 없는 사람, 멸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귀는 제일 먼저 이 명칭을 그리스도에게 붙였으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천하게 나타내 보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편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명칭은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별명으로 붙어 다니게 되었다. 이것은 특별히 어느 한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그는 "멸시 당하시고 배척 당할 것이며"(시 53:2, 3),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 7),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모르는 바 될 것이요"(시 69:7, 8) 등으로 예언되었다. 우리 주님 자신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셨음을 생각한다면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어떠한 비난 욕설이라도 견디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2: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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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5장
235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6장
234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7장
233 마태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28장
232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1장
231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2장
230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3장
229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4장
228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5장
227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6장
226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7장
225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8장
224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9장
223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0장
222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1장
221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2장
220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3장
219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4장
218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5장
217 마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6장
216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1장
215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2장
214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3장
213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4장
212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5장
211 누가복음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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