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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여호와의 날 (스가랴 14:1-7)

그의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 이상하게 변화무쌍하고 혼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Ⅰ. 이상하게 변화무쌍하다. 때때로 조수가 그들을 대항하여 굉장히 거세게 밀려올 것이지만, 당분간은 방향을 바꾸어서 그들에게 알맞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철시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여러 가지를 설정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반대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신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1절) 예루살렘은 정결케 되는 불을 지나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열방을 모아, 예루살렘에 대해 싸우게 하신다" (2절). 그는 그들에게 산헤립처럼 "먹이를 취하고 약탈하는" 직무를 맡기셨다(사 10:6).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이제 "그의 진노의 백성" 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모으신 열방 앞에 누가 설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명령하는 데에는 성공도 주시리라. "도성은" 열방을 장악하고 있는 로마 사람에 의해서 "점령당할 것이다." 적들이 모든 집을 강탈할 것이며, 그들 중에서 부자들을 데리고 갈 것이다. 부정한 탐심에 대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여인들은 능욕을 당할 것이다." 즉 마치 승리는 최대의 악행도 보장해 주듯, "죄가 법에 의하여 보장받게 될 것이다." 그 도성의 절반이 포로로 끌려가서 팔리거나 노예가 될 것이며, 스스로를 도울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두려운 "여호와의 날" 에 일어날 멸망인 것이다.

2. 이제 그는 그의 길을 변경하시어, 예루살렘을 편들어 나타나신다. 왜냐하면, 심판이 비록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더라도,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렘 4:21; 30:11).

(1) 남은 자들은 목숨을 구할, 13장 8절에 나온 "삼분의 일" 과 동일한 자들이다. "절반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며," 언젠가 그들은 거기서 돌아올 것이다. "백성들 중에 남은 자들은 그 도성에서 부터" -어떤 사람들이 두렵게 생각한 것처럼-"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도성과 땅 위의 교회에서 쫓겨남을 면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십분의 일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사 6:13; 겔 5:3 참조).

(2) 그들의 송사가 그들의 대적들을 향하여 변론될 것이다(3절). "그 때에" 곧 하나님께서 그 열방을 그의 백성에 대한 응징으로 삼으셨을 적에, 그는 "앞으로 나아가서 그의 심판으로 그들을 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가 애굽 사람이나 가나안 사람이나 다른 이방 족속과 같이 이전에 "싸우시던 날에," 그의 성전의 대적들을 "치셨던 것" 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 그 자체가 그 진노의 표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잔을 마시는 차례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치신 자들은 반드시 정복될 것이며, 아주 곤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동일하시므로, 그 백성을 위해 "승리의 날" 에 나타나리라는 것이 하나의 약속이듯이, 그것이 그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용기가 된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로는 로마 제국이 이전처럼 번영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3) 예루살렘과 성전은 멸망당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다 이방인도 참여하고 믿는 유대인들도 화합하게 될 교회를 두실 것이다(4,5절). 이 본문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몇몇 훌륭한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1] 하나님은 면밀하게 예루살렘을 수사하실 것인데, 그때에는 그 대적들도 그 예루살렘을 황폐케 할 것이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라고 했는데, 거기서 그는 그 도성과 성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막 13:3). 제련하는 자가 금을 용광로에 넣을 때, 그는 그 옆에 서서 그 금이 상하지나 않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금인 예루살렘이 연단을 받을 때, 그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는 "감람산 위에" 서 계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 산에 오르셨을 적에, 특히 "하늘에 승천하시던" (행 1:12)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곳은 그의 발이 최후로 디디었던 곳이며, 그가 들려 올라간 곳이다. "예루살렘 주위의 산들" 특히 그 산은 그 곳에 가까이 가는 자들의 길목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처럼 되어 있었다.

이방인과 예루살렘 사이에는, "베데르, 곧 분리의 산" 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그 산은 "한가운데가 갈라질" 것이며 따라서 유대의 경계선은 무너질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니, "막힌 담이 무너졌음이라" (엡 2:14). "오, 높은 산이여, 너는 누구인가?" 이 높은 산은, 결코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유대인의 의식 율법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이전에 벌써 그것은 무너져 버렸다. 그 "산이 떠나며" "그 언덕도 움직이겠으나," "화평의 언약은" "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이란 아직도 "멀리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새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 열릴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새 예루살렘을 보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산은 둘로 갈라져, 절반은 "북으로," 다른 절반은 "남으로" 나누일 것이다. 거기에 "매우 큰 골짜기," 즉 이방인들이 복음의 예루살렘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된 예루살렘과 이방 세계 사이에 열려진 넓은 대화의 통로가 나며, "예루살렘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이방 세계도 복음의 예루살렘에 자유로이 들어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길" 이 예비되어 "모든 산과 언덕마다 낮아질 것이요" (사 40:4), 평탄하고 쾌적한 골짜기가 들어설 것이다.

[4] 믿음의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이방인들과 함께 하고, 복음의 교회 안에서 그들과 화합할 것이다. "너희는 그 산의 골짜기로 도망하라." 그 골짜기는 절반으로 나누어진 감람산 사이로 벌어진 골짜기이다. 그들은 이방인과 더불어서 서둘러 성전으로 갈 것인데, 그것은 마치 8장 23절에서 나왔던, 그들과 함께한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산의 골짜기" 는 복음의 교회이어서, 거기서는 피난처를 찾아 그 골짜기로 도망한 유대인들이 "구원받게 되며," 그러한 자들의 수가 매일 더하여졌던 것이다. "그 산의 골짜기" 는 "아셀" 곧 "멀리 떨어진 곳" 까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친히 남겨두신" 자들에게까지 미치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산" 을 골짜기로 만드셔서 "길이 되게 하셨을 때에" (사 44:11), 그 길은 많은 "길 가는 자들" 에게 열려져 있고(사 35:8), 그러므로 "바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곳으로 갈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도 그 골짜기는 이르게 될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이 가까워질 것이며, "그에게 가까워진 백성" 이 된 유대인들과 더불어, 서로에게 각각 "접근" 할 것이다. 그 결합은 하나이신 성령에 의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엡 2:18).

[5] 그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비롯된 위험에 대한 무서운 불안에서부터 떠나 "산의 골짜기," 복음의 교회로 도망할 것이다. 그들은 "다가 오는 진노" 에서부터 도망할 것이며, 그들을 뒤쫓는 피의 복수자들로부터 "보금자리로 가는 비둘기처럼" "피난의 도성" 인 교회로 도망할 것인데, 그것은 "웃시야 시대에 지진이 나기 전 도망한 것과도 같다" (암 1:1). "그러므로" 복음은 하늘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데(롬 1:18), 그것은 우리가 지진으로부터 도망친 것처럼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도피하도록"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이 밑에서 가라앉게 되었음을 느꼈고, 땅에서는 튼튼히 발붙일 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재빠르게 손쉽게 설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서 나타내실 것이다. 즉 "여호와 나의 하나님과 또한 모든 거룩한 자들도 함께 오실 터인데," 그의 오심으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적들도 멸망당할 것이다. 이 땅에다 그의 나라를 세우실 "인자의 오심(마 24:37)이나 세상 끝날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어쨌든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1] 주께서 오시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거룩한 자들의 신앙이었는데, 그가 그 때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라, 주께서 오신다" 는 것이었다.

[2] 그가 오실 때에는, 그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온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의 역사를 일으키며 그의 관심사에 응할 채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려고 오셨을 때처럼,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수 천의 성도들" 과 함께 오실 것이다.

[3] 하나님을 자기의 주로 믿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은 각기 그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승리를 맛보며, 기쁨으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즉 "주 나의 하나님이 오시리라. 그의 모든 것에 위로를 주시리라" 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송축하라. 모든 성도들이 그와 함께 하리라. 또한 그의 임재하심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의 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오, 나의 하나님이여! 오시옵소서. 모든 거룩한 자들과 함께 오시옵소서" 라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Ⅱ.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게 혼합된 것으로 나타난다(6,7절). 즉, "여호와의 날에는 빛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닐 것이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라고 하였다. 혹자는 이 말을 그때로부터 메시야가 오시기까지의 기간에 관련시킨다. 즉, 유대 교회는 완전한 평화도 아니고 혼란의 계속도 아니며, 구름 덮힌 낮이요, 비도 햇볕도 없었던 때이다. 그러나 이것을 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곧 하나님께서 섭리의 나라와 은총의 나라를 이끌어가시는 통상적인 방법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섭리의 평상적인 진로와 목적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은혜의 날과 섭리의 날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것이다. 즉 의의 태양이 떠올랐으니 어두운 밤일 수는 없으나, 청명한 날도 아니다. 이것은 또한 성도들 각자에게도 해당된다. 즉, 그들은 어둠이 아니라, "여호와 안에서 빛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수한 오류와 타락이 있으니, 완전한 낮은 아닌 것이다. 또 그의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일은 극도로 선한 것도 극도로 악한 것도 아니고,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심판과 자비를 동시에 찬송하고 있으며, 또한 저녁노을과 아침노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세하게 될 것인가를 잘 모른다. 일이 어떻게 되어지는가를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희망과 공포 사이에서 살고 있다.

2. 여기에서 위로에 대한 한 암시가 나온다. "여호와가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라" 는 것이다.

(1) 이 말은, 그처럼 혼합된 사건들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암시하고 있다. 즉 그 모든 사건 속에는 하나의 시종일관된 계획과 의향이 있다는 말이다. 모든 바퀴는 오직 하나의 바퀴를 만들 뿐이고, 모든 유전도 오직 한 날을 이룰 뿐이다.

(2) 그 사건들의 간결성이 암시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날, 아니,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광명을 어둡게 하던 구름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3) 하나님의 눈은 이 모든 사건을 감찰하시고, 그의 손은 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음이 암시되었다. 즉 그 일들은 "여호와께 알려져" 있다. 그는 그 일들을 감찰하시며, 자기 뜻대로 처분하고 규정지으신다.

3. 최후에 가서는 기쁨의 종말이 온다. 즉 "어두워 갈 때(저녁)에 빛이 있으리라" 는 것이다. 분명한 빛이 있게 될 것이며,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저 세상에서 확신하게 되며, 이 세상에서도 그것을 희망한다. "어두워 질 때" 란 아무 목적없이 온 종일 기다림으로 우리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이며, 곧 어두워질 것을 염려하게 될 때이며, 모든 일이 악해지고, 심지어 교회의 일도 개탄하게 되는 그런 때이다. 교회의 적들에 대해서는 "태양이 한낮에도 빛을 잃는 것" 처럼, 교회에 대해서는 태양이 한밤중에도 빛을 발하게 된다. "빛은 어둠에서부터" 곧 바로 치솟게 되는 것이다(시 112:4). 구워낼 벽돌의 총량이 배가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것을 기다리다 지치게 되었을 때에 구원은 임한다. 그래서 놀라운 기쁨이 오게 되는 것이다.

 

14: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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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약속 (스가랴 14:8-15)

Ⅰ. 여기서는 메시야의 날에 복음의 예루살렘에 대해서 축복이 약속되었고, 예루살렘에 넘치는 축복의 덕택으로 모든 땅에, 특히 이스라엘의 땅에도 축복이 넘치리라고 했다.

1. 예루살렘에서는 온 세상으로 생수를 뿜어내게 될 것이다. 즉, 거기서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임하게 될 때,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은 주변 나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8절).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 흐를 것이다." 왜냐하면 "열방에" 죄의 "회개와 용서" 를 전파하게 될 자들이 그곳에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24:47). 복음이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의 은혜가 뒤따르게 되며, 그 곳에서는 생수가 흐른다.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그 생수의 흐름은 나라를 기쁘게 하고 좋은 물이 나는 여호와의 동산" 곧 낙원으로 만든다. "거기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퍼져나갔다" (사 2:3)는 것이 예루살렘의 영광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가장 약하고 타락된 시대에서도, 옛적 약속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 생수 중에서 절반은 "동해로 흐를 것이며"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강물이 동편으로나 혹은 서편으로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계 도처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복음은 여러 길로 퍼져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로부터 이루어지게 된 구원자의 통치 영역은 "바다에서 바다로" 퍼져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시 72:8). 그러므로 온 땅은 여러 가지의 통로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물처럼, "물이 바다를 뒤덮듯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야 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1) 모든 길로 흘러갈 것이다. 이 생수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를 낳게 될 것인데, 그 각각은 때를 따라 찬란하게 될 것이다.

(2) 매일같이 흘러갈 것이다. 즉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할 것이다." 복음을 퍼치는 데에 봉사할 자들은 "겨울과 여름" 에도 일거리를 발견하게 되며, 사시사철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이다(행 20:18).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은 그 생수를 따라 흐르는 것인데, 그 생수는 마르지도 않겠고, 그 진로는 여름의 한발이나 겨울의 찬 서리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2. 우리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이고 통일된 나라가 될 것이다(9절).

(1) 그것은 보편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라" 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되시기에 마땅하였다. 그의 섭리의 통치에 의해서 그 나라는 "모든 것을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권에서 제외된 것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그가 그 백성들의 마음을 실제로 사로 잡으심으로 그렇게 되리라고 약속되었다. 즉 그는 모든 곳에서 왕이라고 인정받을 것이다. 그의 권위가 인정될 것이고,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며, 그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취될 것이다(계 11:15). 즉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와 우리 주의 나라가 되었다" 는 것이다.

(2) 그 나라는 통일 왕국이 될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도 홀로 하나이실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우상이 아니라,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한 것이며, 그를 예배하는 데에 모두 하나가 될 것이다. 모든 거짓된 신들은 철폐되고 모든 그릇된 예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중심이 되신 것처럼, 성경도 그들이 걸어야 할 통합된 통치 기구가 될 것이다.

3. 유대의 땅과 그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은 다시 회복되고 다시 채워질 것이며 특별한 하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10,11절). 이것은 유대 백성에게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며, 예루살렘이 예시해주는 복음의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받아야 한 풍성한 은혜와 성도들의 열매와 그밖의 많은 것들을 나타내고 있다.

(1) 교회는 땅의 풍성한 소산을 내는 비옥한 지방이 될 것이다. 천연적으로 언덕이 많고 울퉁불퉁한 유대의 땅은 "평탄하게 바뀔 것이다." 즉 최북단인 게바 곧 기브아에서부터 "예루살렘의 남편" 인 유대의 최남단에 있는 림몬까지 평탄한 골짜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을 발할 때 평지를 이룬다. 즉, 모든 산과 언덕은 평탄케 되어, 오직 여호와만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2) 그것은 인구가 많은 도회지와 같이 될 것이다. 거룩한 땅이 평탄케 되는 것처럼 거룩한 성에는 사람으로 가득찰 것이며, 재건되고 다시 채워질 것이다. "예루살렘" 은 그 낮은 지위에서 "들림을 받으며," 그 멸망에서부터 일어날 것이다. "땅이 평탄하게 바뀌어져서," "감람산" 뿐 아니라 다른 산들도 사라지게 되면, 예루살렘은 "들림을 받아" 더욱 눈에 잘 띄게 될 것이다. 즉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이다" (12:6). 성 전체가 거민들로 빽빽이 차서 황폐한 곳은 아무 데고 없게 될 것이다. 그 성의 경계는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언급되었는데, "베냐민 문" 북동편에서 "모퉁이 문" 북서편까지이고, 남편의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북편의 "왕의 포도주 짜는 곳" 까지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모든 곳에서, 많은 거룩하고 겸손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채워지고 많은 수가 매일 더하여진다면, 이 언약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3) 그 지방과 도회지가 안전하게 될 것이다. 즉 시골의 식량과 도성안의 입이 모두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 곳에 거하는 자들은" 안전하게 거할 것이며, 그들을 두렵게 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즉 모든 지방과 도읍을 황폐케 하는 극심한 멸망이 더 이상 없을 것이며, 슬피 울게 될 괴로운 심판도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단지 "안연히 서게 될 것이다." 어떠한 위험도 없고, 위험을 알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동료들은 그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게 되고, 그 적들도 그들을 불안케 하도록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지옥의 문(권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호에 의지하여, 마음의 신성한 안전과 평온을 누리게 된다.

Ⅱ. 또 예루살렘을 "쳤던" 교회의 적들에 대한 두려운 심판이 예언되었다. 즉, 이러한 심판의 "경고" (위협)는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재앙을 보고 듣는 자들은 예루살렘을 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그 두려움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실현된 것을 보고 들으면 더욱 더 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과 거역할 수 없는 백성을 치는 자들은 결국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치는 것임이 알려질 것이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라" 고 하였다(12절). 그들이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벌하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1. 그들은 괴로운 재앙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이 발로 섰을 때에도," 그들은 쇠약해져서, 마른 뼈가 걷는 것같이 될 것이다. 즉 뼈와 살가죽 이외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아니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약탈한 것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에, 그들이 실컷 먹어서 만족하게 예비해 두었던 육체는 "이제 파리하여지고," "보이지 않게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들어날 것이다" (욥 33:21). 그들은 "서 있을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기어다니면서도 "땅에 서 있기를" 바랄 것이나,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야 말 것이다. 시각 기관, 죄의 출구였던 "그들의 눈은 구멍 속에서 썩을 것이며," 그 머리 속으로 빠지거나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들의 질투에 불타는 눈, 악의에 찬 눈, 부정한 눈, 때로 비참한 모습이 비쳤던 그들의 눈은 썩어져서 그들의 생김새를 송장같이 만들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비굴하게 만들 것이다. 말하는 기관, 죄의 출구인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하나님은 당신께 대한 그들의 모독과 그 백성에 대한 그 독설로 인하여 혀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그들의 혀는 그들에게 떨어질 것이요," 그들의 징벌이 그들의 죄에 대해서 확실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들의 혀가 지옥의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안티오커스와 헤롯은 이렇게 멸망하였다.

2. 그들은 서로서로 파멸시킬 것이다(13절). 즉,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소란케 하시리라," 그러나 "질서의 하나님이고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신"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소란인가? 그 소란은 그것을 일으킨 자들의 죄인 한,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과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고통당한 자들에 대한 징벌인 한,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과 침착치 못한 마음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치고 멸망케 하는 것" 은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나, 그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것" (갈 5:15)은 의로운 심판자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것이다. 즉 여호와께로부터 온 거짓을 말하는 영에게 아합이 속아 넘어 간 것처럼, 아비멜렉과 세겜 족속들은 "나누어" 졌고,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한 영에 의해서 멸망당하였던 것이다" (삿 9:23). 교회를 치려고 연합하고 동맹한 자들은 곧 분열될 것이며, 서로 갈라져 대립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거역한 그들의 소란은 그들 사이에서의 소란에 의해 복수될 것이다. 그들은 피차 칠 것이다. 교회를 멸망케 하려고 계획하는 자들은 때때로 서로를 멸망케 하게 된다. 즉 그들이 모두 칼을 쥐고 있는 한 모든 사람의 칼이 그들의 동료를 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로마 사람들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킬 때,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파벌 싸움과 분쟁에서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예루살렘 곧 복음의 교회를 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울 것이라" 는 말에 잘 어울린다(14절). 즉 유대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게 되며, 자신의 손에 의해서 죽게 될 것이다. 지방과 도성이 서로 싸울 것이며, 그리하여 멸망할 것이다. Suis et ipsa Roma viribus ruit 즉 로마는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3. 그들의 진영의 약탈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14절). 즉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먹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읽는다). 백성들은 먹이를 나누기 위해서 모든 곳에서 올 것이다.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 앞에서 참패당했을 때, "서로 나눈 많은 탈취물" (사 33:23)이 있었듯이, 이제 그렇게 될 것이다. 약탈한 "주위의 모든 이방인의 재물" 금 은과 의복이 "예루살렘" 으로 심히 많이 모아질 것이다. 참가자들이 모두 공정하게 상급을 분배받는 것이다. "죄인의 재물은 때로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비축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애굽의 약탈물로 부하게 되었다.

4. 육축에게도 애굽의 재앙 때처럼 하나님의 교회의 적들을 끊어버릴 재앙이 미칠 것이다(15절). 즉 그 사악한 자의 "장막에 있게 될 모든 육축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기 위하여 오실 적에 그 사람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것은 말처럼 전쟁에서 사용된 육축뿐 아니라, "노새, 약대, 나귀" 처럼 경작이나 여행에 사용된 것들이다. 하등피조물은 가끔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의 재앙 속에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에 대해 분노를 나타내시면, "썩어짐(허무)에 종노릇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 속에서 "구원받기를 신음하며 갈급하게 된다."

 

14: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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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

약속과 심판 (스가랴 14:16-21)

여기에서는 3가지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교회에는 복음적인 예배 방식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많이 참예케 될 것이다. 신앙의 적으로 남아 있던 자들도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이고, 그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16절). 소멸되지 아니한 것들은 개혁되어져, 이것이 그들에게 자비, 곧 이중적인 자비를 주리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바로 커다란 변화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자들은 그들의 시도가 헛되고 무익한 것임을 알게 되어서, 이전에 대항자였던 것만큼 찬미자가 될 것이며,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 것이며," 자기들이 대적했던 자들과 함께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떤 대적들은 그의 발판이 되듯, 또 어떤 대적들은 그의 친구가 될 것이다. 즉 적개심의 정신이 그들에게서 사라지면, 적의에 찬 이전의 행동은 용서받을 것이며, 그들의 봉사도 용납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이 결코 이전에 "예루살렘을 치지 않았던" 것같이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었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의 상징인 성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1. 회개케 하는 은총은 우리를 우리의 예배의 대상 속에서 의롭게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들이 섬기는 몰록(왕)과 바알(주)를 섬기지 않을 것이며," "왕이시며 만군의 주 되시는" 영원하신 왕, 왕의 왕, 만인의 통치자를 예배할 것이다.

2.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정하신 예배 규례 속에서 우리를 올바르게 한다. 복음의 제사가 여기서는 "초막절을 지키는 것" 으로 나타나 있다. 그 절기 속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세상을 경멸한다는 두 가지 큰 은총이 특별한 방식으로 표상되어 있다(느 8:17). 선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되는 "초막절" 과도 같아서, 모든 헌신의 행동에서 세상과는 멀어지고, 여호와를 기쁘게 예배해야 한다.

3. 또 그 절기에서 예배처럼, 주 안에서 우리를 올바르게 한다. 즉 우리는 모든 제물을 가지고 우리의 성전되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영적인 희생 제물" 을 용납하시기 때문이다(벧전 2:5).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만 머물고 만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게 된다. 즉 우리는 그에게로 나아가야 하며, 그의 의로우심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4. 그 시기에 대해서 바로 서게 한다. 즉 우리는 도중에 끊임없어야 한다. 그들은 그 절기가 정해진 시기에 "매년마다" 올라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하루하루는 "초막절" 의 날과 같으며 특히 모든 여호와의 날과도 같다(즉 그것은 "절기의 큰 날" 이다). 그러므로 매일 우리는 만유의 주되신 여호와께 예배하고, 특별한 의식이 있는 모든 주의 날에도 예배드려야 한다.

Ⅱ. 복음의 제사를 드릴 의무를 무시하는 자는 그들이 무시한 것대로 처분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서 긍휼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앞으로 오게 하고 예배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다(17절).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서, 하늘의 말씀의 비가 거두어지고, 그 말씀에 따라오는 하늘의 은혜의 비도 걷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는 구름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비를 내리지 않도록" 하실 것이다. 은혜의 길을 가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은혜의 축복을 걷어가시는 것이나, "목자의 장막" 에서 떠난 자들에게 "푸른 초장" 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는 정당하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그들에게는" 그들의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가 끊길 것이라" 는 뜻이다. 일반 섭리의 은사가 제도화된 규례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성전 건축을 거부했던 자들은 비의 고갈로 말미암아 징벌을 받았다(학 2:17).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에 거기에 참예하기를 거부했던 자들도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무기력하고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면, 땅도 우리에게 대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많은 일이 엇갈리고 잘 안 되는 밑바닥에는 이런 사실이 있다. 즉 그들이 마땅히 할 바를 따라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갔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거나 뒤로 미룬다면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긍휼이 거부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애굽 땅에 사는 태만한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가뭄의 위협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경고가 못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때고 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고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다(18,19절). 그들에게 있어서는, 나일 강이 구름을 대신하여 땅에 물을 대주고, 땅을 기름지게 했다. 그러므로 이 징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한 것이지,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과 만나시는 다른 길을 찾아 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열방이 태만 때문에 맞았던 것과 똑같은 재앙이 그들에게도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름을 걷어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물이 넘쳐흐르지 않도록 하실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하셨다. 이것은 구름을 걷어감과 같다. 또 강물이 이전처럼 그 임무를 다하더라도,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열가지 재앙처럼 그들에게 기근을 임하게 하거나, 땅의 소산을 멸망시키는 또다른 방도를 찾아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열방에 대한 징벌과 같은 것이 "애굽에도" 있을 것이다. 하늘의 자비에 의지하거나 또 그 자비에 빚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그렇다고 하여" 자기들은 하늘의 정의에 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비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늘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것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인간의 삶의 방식도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징벌" 이 될 것이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열방의 죄와 애굽의 죄가 이러할 것이다." "죄와 죄에 대한 징벌" 을 나타내는 말은 똑 같은 말이어서, 그것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여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창 4:7 처럼). 그렇기 때문에 죄는 곧 죄 자체에 대한 징벌이 된다. 소홀함과 태만함은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하여진 때에 "제사 드리러 올라가지 않는" 죄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징벌" 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의무를 저버린 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마저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Ⅲ. 복음적 예배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자들은 복음적 생활의 의무를 통해서 자신들의 고백을 아름답게 꾸미는 은혜까지 받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약속되었다(20,21절). 그것은 또한 교회의 은혜와 행복을 완성시키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물이 다 "여호와께 성결" 이 될 것이다.

1. 성결이란 이름과 성격이 전과 같이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 대한 성결" 은 대제사장의 이마에만 기록된 것이었으나, 이제는 그렇게 독점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성전" 이며, "영적인 제사장" 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헌신하고, 그의 역사에 참여할 것이다.

2. 참다운 성결이 이전 보다도 더욱 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에는 전보다 더 강한 성결의 길과 더 훌륭한 규례와 더 유력한 의론과 더 찬란한 성결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이며, 성결과 성화의 성령이 더 풍성하게 퍼져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또한 그 성결은 평범한 물건에도 해당되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바쳐지기에는 매우 낯선 듯하게 생각되던 것도 하나님께 봉헌되리라.

[1] 그들의 말과 장식물도 하나님께 성별될 것이다. 즉 "말방울까지도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며," 말의 "굴레나 장식물" 도 그렇게 될 것이다. 전쟁에 사용된 말이 이전처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치는데 사용되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전쟁도 거룩한 전쟁이 되고, 그들의 기병들은 하나님의 깃발 아래서 섬기게 될 것이다. 화려한 종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말을 타는 지위 높은 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예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좋은 장식물이라고 여길 것이다. "여호와께 대한 성결" 이란 말이 마차 위에 그린 표지가 들어있는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같이, 저들의 병거의 마구에 기록되었다. 모든 선비들은 대제사장의 표지를 자기 것으로 취할 것이며,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그것을 값진 것으로 여기리라. 그것을 항상 곁에 두어서 언제나 마음에 두기를 바라며 또한 그 규례에 따라 행동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여행자들은 자기 말의 굴레에다가 그것을 기록할 것이다. 여행중에 말이 빨리 가게 하고 또 접근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말방울" 들은 "여호와께 대한 성결함" 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어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공언한다.

[2] 그들의 말에 달린 장식물도 하나님께 바쳐지고 그의 봉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첫째, 제사장들의 집의 가구나 여호와의 전에 딸린 방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보통 마실 수 있는 잔들이 "제단 앞의 주발처럼" 될 것인데, 그것이 제물의 피를 받아 둘 때나 "성물" 을 위한 술과 기름을 바치는 데에 사용된다.

그들이 자기 신탁에서 사용하던 그릇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경건하게 사용되리라. 즉 매우 절제있고 온건하게 사용되리라. 즉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의 식탁과 잔에 넘치도록 채워진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가족들은 일상적인 행동도 특별히 경건한 성품에 맞게 행해야 한다.

둘째, 다른 집의 장식물, 즉 일반 백성들의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이라" 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중에서 그들이 술을 따라 마시는 잔과 음식을 넣고 끓이는 솥들은 결코 과도하게 남용되지도 아니할 것이며, 이전처럼 "온 상에는 토한 것과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을 때에도" (사 28:8) 순종의 바퀴에 기름이 되어야 할 것이 욕망의 음식과 연료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몸을 양육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 중에서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아낌없이 줄 것이다. 개종한 두로 사람들의 상품과 임금에 대해 말한 것처럼(사 23:18), 그때 그것들은 "여호와께 성결한 것" 이 된다. 우리는 취함에서나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법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참된 성물이 그처럼 풍부히 있게 될 때에는, 백성들이 의식법상의 성결에 대해서는 신경을 과도히 쓰지 않게 되리라. 즉 "희생 제물이 보통 그릇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과 제단 앞 주발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으리라." 복음의 시대에서는 참된 예배자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니요,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다" (요 4:21). 어느 곳이나 다른 곳에서처럼 하나님께 용납될 것이며(" 내가 너희로 어디서나 기도하게 하리라"), 어느 그릇이나 꼭 같이 용납될 것이다. 무질서한 것이 아닌 한, 주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으나, 실체(본질)는 잘 보존되리라.

혹자는 이것이, 성소의 그릇보다 더 많은 양의 제물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어떤 것을 되돌리고 제거하기보다는 레위인들이 필요한 경우에는 제물을 죽이는 제사장을 도왔던 것같이(대하 29:34), 그들은 모두 보통 그릇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2) 그 성물에는 더럽히는, 성결치 못한 것도 들어 있지 못할 것이다. 즉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다. 그것은 "장사꾼" 들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도 생각되어지는데, 그 이유는 때때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전 마당에 있는, 팔고 사는 자들을 내쫓으실 때에,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또는 비록 가나안 사람과 나그네와 이방인이었지만, 그들도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갈 것이나,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자신 안에 가나안 사람의 마음과 성품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는 복음의 시대에 비록 백성들이 거룩한 그릇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하게 될지라도, 그들은 역시 교회의 규율에 아주 엄격하고, 특별한 규례에 속된 것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며, 이스라엘 사람과 가나안 사람 사이, 곧 귀한 것과 천한 것 사이를 구분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의 집(전)에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리라" 는 이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마지막 때에-그 전에는 아니다-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에서 모든 부정한 것을 쫓아 내시고, 알곡과 가라지를 완전히, 영구히 구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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