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안전 (스가랴 12:1-8)
Ⅰ. 먼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행한 언약에 관해 본장의 표제가 붙어 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경고(짐)" 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나르는 것은 꽤 힘든 일이며 백성들을 억누르는 것이며,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납 조각" (5:7, 8)과 같이 성전의 모든 대적들에게 "무거운 짐" 이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위안이요 은혜였다. "불 같은 율법" 처럼(신 33:2)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나온 불 같은 예언과 불 같은 섭리는 그들을 위하여 온 것이다. 대적에게 공포를 주는 말씀이 그들에게는 화평을 전했는데,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고 밝은 빛을 비추어 주었으나 애굽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절망을 주는 흑암이었던 구름 기둥과 불기둥과도 같았다. 축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짐(경고)을 진 자들은 행복하였다.
Ⅱ. 하나님이 그 언약을 맺을 권위와 그것을 지킬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본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표제가 맨 첫머리에 나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시오, 우리의 창조주시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통치를 행하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었는데," 그것은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궁창을 지으셨던 그는 태초에 그런 창조를 행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을 "포장처럼" 펴두시었고, 그것은 계속 그렇게 되고 있으며, "하늘이 두루마리같이 서로 말리게 될" 마지막까지 그렇게 될 것이다. 하늘을 펴시는 그의 능력은 다함이 있을 수 없고, 또한 그에게는 힘겨운 어떤 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2.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그것을 굳게 다져두시며, 그 기초를 고정시키셨다. 또한, 비록 "바다 위에 터를 세우시고" (시 24:1, 2), 땅을 "허공에 달으셨을" 지라도(욥 26:7) 그 땅의 축을 고정시키셨다. 그 땅의 기초를 두신 분은 분명히 땅의 통치자이시며, "여호와께서 땅을 버리셨다" 고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만일 정말로 땅을 버리셨다면, 땅은 빠져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땅의 기초를 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며 그 땅을 지금까지 붙들어 두고 계시며, 앞으로도 들어올리실 분도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심령을 지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영혼을 지으셨다" (렘 38:16). 그는 첫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다. 그러므로 몸은 "우리 육체의 조상" 에게서 왔으나, 영은 "영의 아버지" 께로부터 온 것이다(히 7:9).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령을 지어 놓으셨기에" 인간은 "그의 장중에" 있으며, 또한 그는 "강물같이" 심령들을 바꾸며,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인간을 다루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형제에게는 용기를 주고, 그 대적은 절망케 함으로써 그의 교회를 구해내실 수 있다. 또한 그는 앞으로 영원히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선택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Ⅲ. 교회가 구원을 받아 모든 형제들이 거룩한 화평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1. 교회를 치는 대적들이 순수함과 화평을 파괴하려 해도 분명히 자기들의 혼란만 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이 약속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대적들은 예루살렘에 대해서 사악하고 악독한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자멸을 준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화평 가운데 있고, 반면에 예루살렘을 치던 대적들은 모두 위험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비교하여 설명되어진다.(1) "예루살렘" 은 그것을 에워싸는 모든 자들에게 "떨리는 잔" 이 될 것이다(2절). 그들은 예루살렘이 자기들에게는 손쉽고도 유쾌하게 마실 수 있는 포도주잔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전리품에 굶주려 있고, 더욱이 그 잔과 마찬가지로 피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잔을 손에 쥐고, 이제 자기 것이라고 여길 때에는 이미 마실 수 없는 "독배" 곧 "혼취케 하는 잔" 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 잔의 독기는 그들에게 충분한 것이 될 것이다. "왕들이 예루살렘에 반대하여 모여들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피난처의 왕궁에서 나타나셨는지를" 보았을 적에, 그들은 "두려워 떨면서 달아났다."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시 118:3-6). 그러므로, 알렉산더 대왕은 대제사장 야두스를 만났을 때에 굉장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예루살렘 침범을 아예 단념하였다. 산헤립이 "유다와 예루살렘" 을 에워쌓을 때에 그는 예루살렘이 그 장병을 취하게 만드는, 망쳐버리게 만드는 포도주 잔이라고 생각했다(시 126:5, 6).
혹자는 본문(2절)을 "내가 예루살렘으로 통회 곧 파멸의 푯말로 삼겠다" 고 해석한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어떤 일을 저지르려는 자들은 단지 끄덕도 않는 그 푯말에게 자신의 머리를 부딪는 것이므로, 자신을 상하게 하고 만다.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았고" (사 25:4), 그 벽을 흔들 뿐 아니라, 부숴버렸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형제들에게 위로의 잔(사 116:11)이지만, 부정과 타락으로 교회를 몰락시키거나 전쟁과 박해로 파괴하려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잔이 된다(사 101:22, 23 참조).
(2) "예루살렘" 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거운 돌" 이 될 것이다(3절). "천하만군" 이 제각기 "그것(예루살렘)을 치러 모여들" 것으로 예상했다. 교회를 공격하는 대적들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때로 그 성전에 대항하고자 동맹을 맺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아니하도록 이스라엘의 이름을 잘라버리려고" 결정을 내린다 하여도(시 83:4), 그들은 그 일이 자기들에게는 너무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죄의 나라를 지지하고 발전시키려는 자들은 예루살렘,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가 자기들의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것을 길 밖으로 치워버릴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엄청나게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 그들이 예루살렘을 옮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다 교회를 두셨는데, 그 교회는 "반석 위에 지은 집" 이요, "영원히 요동치 않는 시온 산" 과도 같은 것이다(시 125:1).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산에서 떠낸 이 돌" (단 2:35)은 그 땅을 덮을 뿐 아니라 온 땅에 충만할 것이다. 아니
[2] 그 돌이 "우상을 쳐부순 것같이" (단 2:45) "그것을 드는 모든 자들을 조각내리라." 그 돌에 대해서 스스로를 상대자라고 여기는 자는 모두 그 돌에 의해서 "산산이 부숴질" 것이다. 혹자는 제롬이 여기서 말한 조롱이 영국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젊은이들은 제각기 힘을 써서 큰 돌덩이를 들어올려 패권을 차지하려 애쓰나, 만일 그 돌이 너무 무거우면 그에게로 도로 떨어져서 그를 박살낼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자들은 그것이 예리한 연장으로 조롱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 내가 조롱 당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하며) 그것을 가볍게 한다 해도, 그것은 그들에게 더 지탱할 수 없게 빠져드는 죄의 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에게서 기초석을 구하려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가 무거운 돌이라고 말씀하셨을 적에, 바로 이러한 말을 암시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마 21:44). 그들의 기초석이란 "그들에게 떨어져서 그들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3) 유대의 통치자들은 "곡식단 사이에 횃불과 나무 가운데 화로" 같이 그들의 대적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6절). 그들 자신의 열정이 그들을 주위의 모든 사람의 횃불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시온의 왕은 "온유하고 겸손하여," 그의 모든 부하 통치자들도 그와 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명분과 그들의 송사의 보복자로 만들 것이다. 그들과 다투는 자들은 찔레와 형극의 불더미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완전히 결딴내어, 함께 불태워버릴 것이다. 대적을 삼키는 불은 그들의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의 불은 "시온에 있다" 고들 하며, "하나님의 화로가 예루살렘에 있다" 고 한다(사 31:9). 대적들은 그 불을 끄는 물과 같이 생각되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나무나 곡식단같이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불은 그것에 의해서 타오르게 될 뿐 아니라, 더욱 강하게 타오르도록 부채질까지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또다른 파괴자들로 삼으셨을 때에, 그 불은 "한 사람에게서 나와서 또다른 사람들을 불사르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사 9:20). 그래서 여기서 그 불은 하나님의 증거자들의 입에서 나와서 그들을 상하게 하는 자들을 불사른 것같이, "유대의 통치자" 에게서 나와서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불사르게 될 것이다(계 11:5).
초대교회의 박해자들은 이것이 자기들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박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한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고, 배교자 줄리앙(Julian)은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나를 이기고 말았구나" 라고 고백하였다. 그 교회의 표제어는 아마도 "나를 공박하는 자는 반드시 위험 가운데서 그 일을 행한다" 는 것이었을 것이다. 한때, 격언이 되기까지 했던 말, "만일 네가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라" 는 말이 있었다.
2. 하나님은 교회의 동조자들을 격려해 주실 것이며, 그 대적들의 용기를 꺾으시리라고 했다(4절). "그 날에, 이 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적하여 서로 모여들 적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리라." 또다시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라" 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말은 모두 아무 짝에 쓸모 없게 될 것이며, 말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그 힘줄을 끊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될 것이다. 말과 더불어 말에 탄 자들은 모두 자신이 군사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훈련규칙을 지키는 대신에 점차로 미쳐버려서 결국에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교회의 보병들은 그 적들의 기병에게 너무 힘겨운 군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말에게 의지했던 자들은 말을 번식시키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받았던 자들에 의해서 곤혹을 치를 것이다.3. 예루살렘은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계속해서 그들로 채워지리라(6절).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분 계신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고 하였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병합되지 않을 것이며, 그 곳에 도시를 세워 "예루살렘" 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뉴우 잉글랜드 사람이 옛 잉글랜드 마을의 이름에 비해서 자기 마을을 뉴우 잉글랜드라고 부른 것같이 그 곳에서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같은 기초 위에 새 예루살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온 이후에 일어난 것이지만, "그 본 곳에" 거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인 복음의 교회 안에서 그 완전한 성취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도록 된 것이므로 사람들은 모든 곳을 다 본 곳(본향)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리라(8절). 지옥문에서부터 천당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전하시고 계신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께서 몸소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점령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뿐 아니라, 그 모든 거민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도성을 강하게 하는 "불의 성벽" 이 되실 뿐 아니라, "방패와도 같이" 그의 호의로 각 사람들을 에워 싸실 것이므로 포위한 자들이 그들을 털끝만큼도 다치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스스로를 도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은혜로 베푸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보다도 그들의 보존과 방위에 더 큰 공헌을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그들이 각기 맡은 임무를 다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그의 일을 하실 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1] 그 날에, 예루살렘 거민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가 "다윗같이" 전쟁의 용사처럼 용감하고 능력 있고 강한 자가 되며, 다윗같이 위대한 일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도 다윗이 대적에 대하여 무섭게 한 것과 그 기초를 다져 둔 것같이 예루살렘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살펴 보라. 그 은혜는 어린아이를 성인같이, 또 투사같이 만들며, 연약한 성도를 다윗같이, 선한 군병같이 또한 위대한 군병같이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역사를 손쉽고도 효과적으로 행하시는가를 보라. 더욱이 뛰어난 자보다도 오히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도구를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보라.
[2] "다윗의 족속이 하나님같이 즉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천사)같이 되리라." 스룹바벨은 이제 다윗의 족속 중에서 가장 큰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가 부름받은 일을 위하여 지혜와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백성에게 나아갈 것인데, 광야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아갔던 그 천사와 같이 되리라. 혹자는 그 천사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한다(출 23:20). 하나님은 백성과 방백에게 은혜와 능력을 더 하실 것인데, 그들에게 계획되었던 각자의 임무에 비례하여 줄 것이다. 다윗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했다(삼하 14:17). 다윗의 족속도 마침내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다윗같이 대담하고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며, 다윗의 은혜를 받은 것같이 그들의 치리자들은 정사를 돌보는 데에 현명하고 바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시 다윗의 족속은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그 영광조차도 사라지고 말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의 족속은 이전보다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습은 마치 천사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이전보다도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5. 도시와 지방이 서로 좋은 이해 관계를 가지고 또한 서로 균형을 유지하게 되리라. 그 두 곳은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이익을 가지려 하지 않고 진심으로 공동의 선을 위한 관심에 대해서 언행을 같이할 것이다. 이렇듯 도시와 지방, 머리와 몸 사이의 화목한 협동은 건전하고 부강하고 평화로운 모든 나라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1) "유다의 두목들," 곧 지방의 유지와 치리자들이 "예루살렘 거민" 곧 상인들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두목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겉치레가 아닌 진심에서 "심중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집안과 나라가 힘을 얻을 것이다(5절). 그러므로 언제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주요 도시, 행정 도시로 여기고 존경하여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곳을 (위험과 좌절의 때에) 나라의 방책이요 강한 요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부유한 도시로 군자금을 많이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인구가 많은 도시로 많은 사람을 일터로 보내기 때문도 아니며, 그 거민들이 대체로 아주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거나 가장 훌륭한 군병이나 지휘관(" 이른바 제각기 용감한 자들이 태어난 시온에 사는")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교회의 제사장들이 있고,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성" 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지금은 기도의 도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 거민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10절).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치리자들은 "이것이 나의 힘이다" 라고 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관심과 그와 동거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만군의 여호와" 가 특별히 "그들의 하나님" 이기 때문에(더욱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과 그가 거하시는 처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능력" 이라고 한 것이다.
높은 자들이 의로운 자를 소중히 여길 때, 또한 통치자들이 신앙과 신앙인들을 자기들의 힘이라고 여기고 자기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기도의 백성과 힘있는 믿음의 지도자를 부르고자 할 때, 그 나라는 융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나라를 소란케 하는 자라고 함과는 달리 요아스가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2) 궁궐과 도시도 지방의 거민들을 보잘 것 없는 자로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유다의 치리자들은 물론이요, 지방민 중 가장 하찮은 자도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영광의 징조를 보이사, 그들을 그 형제들의 모욕에서부터 구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특별한 규례에 의해서 위엄을 지닐 수 있었듯이, 유다도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그 위엄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4절), "내가 유다 족속" 가난한 지방민들을 "돌아 볼 것이다" 라고 하셨다. 교만한 자는 그들을 경멸할 것이나, 하나님은 그들을 귀하게 여기셔서 돌보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가 먼저 유다의 장막을 건지시리라" 고 했다(7절). 장막에 거하는 자는 아주 위험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 앞에서 그들을 구하여 보호하실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모든 마을의 거민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로 인해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사 5:11). 그러므로, 신비스런 몸 안에서, 하나님은 "부족한 부분에 더 풍성한 영광을 베푸시사, 몸의 분열이 없게 하신다" (고전 12,22,25장 참조). 그러므로 그것이야말로 큰 힘을 가진 "다윗 족속의 영광" 과 기쁨으로 살던 부유한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 이 "유다와 유다의 장막" 곧 잘 먹지도 못해 헐벗고 일만 하는 자들에게 대해 "자기를 자랑하지 말아야" 될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조정의 신하와 시민들이 지방민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중히 여기시며) 먼저 "구원하실" 자들을 경멸치 말아야 한다. 반면에, "부자와 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은 매우 힘들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써 유다의 장막에 사는 자를 크게 나타내시며 세상에서 못나고 연약한 자를 택하여 사용하신다면, 그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에게 우리를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약 2:5, 6).
이 언약은 나아가 복음의 교회를 증거한다. 즉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노예와 자유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차별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께 환영받으며, 그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골 3:11). 그때에는 예루살렘이 옛날같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곳 중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유다에 대한 약속 (스가랴 12:9-14)
여기서 말한 "그 날" 이란 예루살렘의 수호의 날이요, 구원의 달이다. 따라서,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을 나타내실 영광의 날이다. 사실 그 날은 마카비 시대의 유대인이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날과 관련되며, 더욱이 그리스도가 어둠의 권세를 이겨 승리하고, 택하신 백성에게 그 크신 구원을 이룬 "복음의 날" 에 비길 만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날에" 계획되어진 두 가지의 중대한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Ⅰ.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실 영광스런 일인데, 9절에서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고 했다. 무수히 많은 강대국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파멸당할 것이고, 모든 힘도 쇠약해지며, 애씀도 허사가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하려던 행악은 도리어 자기들의 머리 위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시기를 힘쓰실 것이다. 그가 그 일을 행할 많은 수단과 방법을 모르듯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지혜는 결코 당황치 않는다), 그렇게 하심은 그 일에 대한 그의 성실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그는 시온을 질투하시며, 그 심중에 "복수의 날" 을 생각하신다). 또 그는 모든 수단과 제 2의 원인을 그렇게 다스리신다는 점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해서 "악(재앙)을 만들고" 계신다. 마치 그들을 부지해 주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그때에, 그는 그들을 멸할 계획을 짜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 그는 "죽음의 권세" 를 가진 자를 멸하기를 힘쓰셨고 또 그를 멸하였으며, 뱀의 머리를 부수었고,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신실한 친구와 백성을 치는 모든 "어둠의 권세" 를 깨뜨리셨다. 그는 그들을 "망하게 하셨고, 그들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으셨다." 그가 재림하실 때에는, 그들을 멸하시기를 완수하실 것이며, "모든 억압하는 법과 원칙과 권세를 낮추시며, 죽음까지도 그 승리에게 삼킨 바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던 모든 최후의 적들도 멸망할 것이다."
Ⅱ. 그들에게 행하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영광스러운 역사를 행하셨다. 그가 그 대적들을 멸하기를 힘쓸 때에, 그는 "그들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실 적에, 맨 먼저 하는 일은 그들로 간구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적을 멸할 때는 그들이 자기에게 그 일을 행하도록 범죄하는 일을 버려둠으로써 멸하시기를 꾀하셨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일을 계획하시고 약속하셨으며, 또 그 일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것을 위해서 구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겔 36:3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 영광은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요, 또한 기도하는 백성과 그 기도 위에 임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구원을 바라고 있는 억눌린 교회에 기쁜 전조가 된다. 말하자면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게 될 그 날의 여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할 성령의 은혜에 대한 증거이며(사 64:3) 또 그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의 영을 너희의 후손에게 부어 줄 것인데 그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날에 이루어지리라" (요 7:39)고 하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리라고 한 하늘의 모든 영적인 축복" 은 바로 성령에 대한 약속이다.
1. 그렇다면 과연 그 축복은 누구에게 내려지는 것인가?(1) 위대한 "다윗 족속" 에게 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그들을 훌륭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다윗의 족속은 여호와의 사자(천사)같이 되리라" 고 약속되었다(8절). 이제 그 일을 위하여 은혜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은혜의 영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거룩한 사자같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땅에 임하실 적에 그는 그의 은혜의 영을 다윗의 족속, 곧 그 땅의 지도자들에게 부어 주셨다. 그것은 왕족과 위인들이 선한 남은 자들 앞에 나아갈 적에 백성들에게 전조를 나타내는 것이다(대하 20:5). 다윗의 족속은 "다윗의 아들" 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머리가 되신 그에게 은혜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며, 그에게서부터 모든 그의 지체들에게 퍼져나갈 것이다. "우리는 그의 풍성하심으로부터 받고, 은혜를 입을 것이다."
(2) 서민은 "예루살렘 거민에게"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강하고 성숙한 자에게 임하는 것과 같이 현재 보잘 것 없고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거민은 다윗의 족속 중 위인들 같이 자기들의 능력과 정책을 통하여는 공적인 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로 훌륭히 그 일을 성취했기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다. 하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든 참된 신앙인은 그 예루살렘의 거민이므로 그들에게 그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될" 전조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하게 되며 봉인될 것이다.
2. 축복의 내용은 "내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리라" 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삼아주시는 것 같이 모든 선한 일과 모든 기쁜 은사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1) 그 성령은 우리를 깨끗케 하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은혜의 영" 이다.
(2) 그 성령은 우리를 도와 기도하게 하는 "간구의 영" 이다. 그 영이 은혜의 영으로 임할 때는 언제나 그에게는 성화(聖化)의 영이 임하게 된다. 그가 선택의 영을 받게 되면, 그는 "아바 아버지라고 간구하도록 하는 가르침" 을 받는다. 바울은 그가 회심하자마자,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행 9:11). 기도하지 아니하는 성도는 실상 숨이 끊어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율법에서 보다도 복음 안에서 많은 기도의 영이 넘쳐 흐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성화의 역사가 일어남에 따라서 더욱 간절한 간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3. 축복의 역사는 "내가 그들에게 은혜의 영을 부어 주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며,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자를 보고 기뻐할 것이지만(그것은 "성신의 기쁨" 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성령이 충만한 열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곧 "그들은 애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애통이며, 성령이 넘치도록 충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받아들이게 하는 애통이다.그들이 애통하리라는 약속이 여기에 있는데, 이것은 기쁨 안에서 끝나게 될 애통이요, 축복을 가져오게 하는 슬픔인 것이다. 이러한 애통이야말로 은혜로우신 성령의 역사요, 영혼 안에 은혜가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기도 가운데 역사하는 사람으로 생생하게 나타난 바 간구의 영과 더불어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간구하는 것과 눈물 흘리는 것은 한꺼번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왕하 20:5).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했던 야곱도 "눈물로써 간구하였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은 곧 성령이 넘쳐나는 역사임에 틀림없은 것이다.
(1) 그것은 그리스도를 보았음에 근거한 애통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라" 고 하였다.
[1] 이것은 그리스도가 찔림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언한 것인데,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옆구리에 찔림을 당하였을 적에 이루어졌다고 인용되었다(요 19:37 참조).
[2] 우리가 찌른 자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그를 죽기까지 핍박했던 유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그를 찌른 자들은 그로 인하여 슬퍼할 땅의 다른 혈족" 들과는 다르다. 계 1:7). 그러나 죄인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찌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상처를 입음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그 허물은 "그의 영혼의 고통" 이기 때문이다. "그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며" 수치를 당하게 하는 죄인의 "사악한 마음" 이 그를 죽인 것이다.
[3]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는 자는 그들이 찌른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는 그들의 죄를 인해 찔림을 당하고, 그들의 손에 의해 찔림을 당하셨다. 그들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4]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다본 결과이다. 그것이 그들을 슬퍼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일은 특별히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전파한 자들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들이 그 말을 들었을 적에 그리스도를 찌른 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우리는 이제 어찌할꼬?" 하고 소리쳤다. 경건한 마음씨 때문에 죄를 애통해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은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의 고난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을 사로잡은 죄 때문에 "애통하였다." 참회하는 영혼이 진실되게 슬퍼하는 것은 믿는 마음으로 찔림을 당하신 구주를 쳐다볼 때에 생겨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다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에 따른 죄의 회개를 가지게 할 것이다.
(2) 그것은 굉장한 슬픔이었다.
[1] 그것은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부모의 애통함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가족의 모든 희망을 무덤에 장사지낸 후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는 것처럼" 죄를 위하여 애통할 것이다. 또한 애굽의 온 땅이 장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울음바다가 된 것같이, 그들은 마치 "자기의 장자를 위하여 슬픔에 잠긴 것처럼" 가슴깊이 슬픔에 잠기게 될 것이다. 자식들이 자기의 부모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은 때로 겉치레가 될 수도 있고 별로 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자식, 그것도 아들, 독자나 장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모의 슬픔은 자연적이며, 신실하고, 강제적이거나 꾸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은 은근하며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자의 슬픔이다.
[2] 그 슬픔은 또한 덕망있고 현명한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백성들의 슬픔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은 것인데," 바로 거기서 선한 왕 요시야가 죽었고, 그를 위하여 모두가 통곡하였었다(11절). 아마도 이 슬픔은 더 컸을 것인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큰 축복을 그들에게서 거두시도록 재촉한 이유가 그들의 죄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면류관이 우리의 머리에서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애 5:16)라고 울부짖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 되시며,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슬픔을 당하여야 마땅한 것이다.
(3)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당하는 슬픔이었다(12절). "온 땅이 애통할 것이다." 온 땅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에 "온 땅에 어둠이 둘렀고" 땅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죄를 애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되리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스라엘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던 것" (삼상 7:2)과 마찬가지로 누구나가 당하는 보편적 슬픔이었다.
혹자는 이 말씀을 유대 민족 전체의 회개에서 앞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그것은 또한 개인적으로 당하는 슬픔이었다. 전체적인 모임에서 그 대표자들에게 의한 "온 땅" 의 슬픔뿐 아니라(삿 2:5 에서, 그곳이 보김, 즉 "애통하는 자의 땅" 이라고 불려진 것처럼), 그 슬픔은 방방곡곡에 퍼지게 될 것이다.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12절), "남은 모든 족속도 그러하리라" (14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슬픔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전체적인 예배에 참예하는 자들도 별도로 각자 헌신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민족적 금식은 회당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지켜져야 하였다.
여기서 예언된 슬픔 속에서는, 모든 아내들이 각각 서로 떨어져서 애통해 하였는데, 마치 에스더와 그녀의 하녀들이 각기 자기의 처소에서 애통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것이 전체적인 참회의 시기에는 정당한 기쁨이라도 삼가라고 함을 말해 준다고 본다(고전 7:5).
여기에 네 족속(집안)이 애통의 모범적인 예로 명시되어 있다.
[1] 그들 중에 둘은 왕족이었다. 솔로몬에서 이어지는 "다윗 족속" 과 솔로몬의 형제, 다윗의 다른 아들인 "나단 족속" 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족보가 보여 주는 대로, 나단 족속에게서 스룹바벨이 나왔다(눅 3:27-31). 다윗의 족속, 특별히 당시 그 족속의 종가를 이루고 있던 나단 족속은 이 선한 일에 앞장 설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방백들이라도 자기들은 회개의 법에서 면제받았다고 여기지 말고 아주 엄숙하게 회개를 표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의 겸비(대하 32:26)가 왕족과 왕들(대하 12:6)을 그리고 니느웨의 왕(욘 3:6)이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켰기 때문이다.
[2] 나머지 둘은 거룩한 혈통(13절), 즉 하나님의 권속이었던 "레위 족속의 혈통" 이었다. 자세히 말하면 레위 족속의 일족이었던 시므이족속(대상 6:17)과, 당시에 제단을 섬기거나 백성에게 설교하는 자들로 알려져 있던 레위 지파의 어떤 후손들이었다. 왕족들이 행정직에 대한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한 것같이, 제사장들도 "거룩한 것에 대한 죄악" 때문에 애통해야 했다. 전반적인 시련과 수치의 시기에 주의 사역자들은 "제단과 현관 사이에서 우는데" 관심을 두었다(욜 2:17). 그리고 거기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그러하였다. 능력과 형식에 있어서, 사역자의 혈통에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족속에서 거룩함이 발견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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