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근 이방국에 대한 예언 (스가랴 9:1-8)
앞 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혜의 귀한 약속을 살핀 이후, 이제 그들을 증오했던 자들의 심판을 보게 된다.
Ⅰ. 수리아(아람)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악한 이웃이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변론(심판)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하드락 땅에서의" 즉 "수리아" 땅에서의 "경고" 일 것이지만, 왜 그렇게 불렸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왕국이 나타내는 것은 명백하다. 그 까닭은 그 왕국의 수도인 다메섹에 이 경고가 "머물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경고된 심판은 그 성읍 위에 임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그 위에 머무는 자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요 3:36) 자들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떨어버리거나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닌,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그의 분노를 머물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표적을 만드는 자들을, 그 진노는 반드시 때릴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고가 다메섹 위에 머무는 까닭은 세상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혹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눈조차") 여호와를 우러러봄 때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과 기도를 통해 구조와 구원을 달라고 그를 우러러보며, 그들의 원수들에 대적하여 그들의 편을 들어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그들의 신앙적 기대와 그에 대한 의존심을 일으킬 때, 그리고 그의 은총에 의해 그들을 우상들로부터 그에게로 돌이키실 때, 그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뚜렷이 나타내려고 하시는 것의 한 표징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볼 것이다" (사 17:7, 8).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다. "여호와께서 사람과 온 이스라엘 지파를 보신다." 그는 성도들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왕이시다. 그는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를 다스리시며, 따라서 그 자신의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백성의 죄도 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심판자" 이시며, 따라서 모두가 그에게 자기를 밝혀야 한다. 성 바울이 다마섹에서 회심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고 유대인들과 논쟁했을 때, 선포될 여호와의 말씀이 거기에 머물렀다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족속" 외의 다른 사람들, 곧 "그 사람들의 눈이 여호와를 향하기" 시작했다(행 9:22 참조).
다메섹 북쪽에 있었던 한 나라 하맛 - 우리는 흔히 그것을 "거기에 접경하리라" 고 읽는다(2절) - 도 수리아에 속하며, 다마섹에 머무르는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 를 함께 당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악인에게 화있을 때는 그 이웃에게도 화있을지어다" 라는 격언이 있다. 그 이웃도 그의 죄와 그의 재앙에 참여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 하드락 땅에" 화있으리라. 그리고 "그 접경된 하맛에 화있으리라."
Ⅱ. 다른 예언에 있어서처럼 두로와 시돈은 여기서 그 다음으로 설명된다(2-4절). 여기서 살필 내용은,
1. 두로는 번창하고, 스스로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멀리 둘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반항하려고 한다. 왜냐하면,(1) 그(두로)에게는 "매우 넓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어적인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까지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왕은 위대한 정책가이며, 그의 정치도 역시 그렇다는 점이 시인된다(겔 28:3). 그러나 그들의 모든 재기와 정책을 가지고도 사명을 띠고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를 거역할 지혜와 계획" 은 없다. 아니, 현자를 그들 자신의 교묘한 데서 취하는 것이 그의 명예인 것이다.
(2) 그는 매우 강하며, 자연과 인공에 의해 아주 견고하게 되어 있다.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요새)을 건축하고" 그것이 결코 붕괴되거나 정복되지 않을 줄로 생각했다.
(3) 그는 매우 부요하다. 그리고 "돈이 수호물인 것이다." 그것은 "군자금" 이 된다(전 7:12). 막대한 무역에 의해 그는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 즉, 그는 그것들을 풍성이 가지고 있으니, 은 무더기가 모래더미 만큼 흔하다(욥 27:16). 솔로몬은 은을 예루살렘에서 "거리의 돌" 처럼 되게 하였다. 그러나 두로는 그것을 능가했다.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 우리 모두가 지혜와 은총의 상품들, 그리고 그 이익에 비하여 지혜와 은총 자체를 중히 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으리라.
2. 두로는 결국 몰락한다. 그의 지혜, 부, 힘은 그를 구해내지 못하리라(4절).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리니," 그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요새로부터 그리하시며, "그를 가난하게 하시리라" (혹자는 그것을 이처럼 읽는다). 풍부의 꼭대기에서 빈곤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그 큰 부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자들의 본보기들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라." 그가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며, "그가 불에 삼키울 것이며," 타서 땅에 쓰러지리라. 물 가운데 자리잡은 두로는 - 어떤 사람의 생각으로는 - 결국 물에 씻겨버릴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적 요소에 의해 그것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다. 가끔 그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단에 의해 그의 원수들 위에 멸망을 초래하신다. 두로에는 불길을 끌 충분한 물이 가까이 있었으나, 그 불길에 두로는 타버릴 것이다. 누가 전능자의 입김이 불어 일으킨 불을 끌 수 있겠는가?
Ⅲ. 하나님께서는 다음에 큰 성읍들과 뛰어난 군주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블레셋과 변론하신다.
1. 그들은 다메섹 위에 임하고 머무른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놀라며 공포에 가득차게 되리라(5절). 이스라엘의 수치가 수 차례 "아스글론의 거리에 드러났으며," 그것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이제 "아스글론은" 자기 친구와 동맹국의 파멸을 "볼 것이며, 무서워할 것이다." "가사도 그것을 보고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글론은" 그 자신의 차례가 다음이요, 떨리는 잔이 돌아 오리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웃들이 불탈 때, 그들의 집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두로와 시돈을 자기들 나라에 대한 벽으로 여겼다. 그러나 저 강한 성읍들이 파멸될 때, 그들에 대한 "소망이 수치가 되었다."2. 그들은 스스로 파멸되고 황폐화되리라.
(1) 그 정부가 와해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니," 현재의 임금이 폐위될 뿐만 아니라, 계승도, 계승자도 없을 것이다.
(2) 성읍들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다." 정당한 소유자들은 추방되리니,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3) 외국인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 모든 부의 주인이 될 것이다(6절).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나그네들의 거짓된 종족들이 원주민의 유산을 덮칠 것이니, 실은 그들은, 서자가 합법적인 자손의 소유지에 대해서는 권리가 없듯이 거기에 아무런 권리도 없는 자들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으리니," 그들이 스스로 뽐내며, 그들 자신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멸시의 근거였던 모든 힘과 부를 끊으리라. 블레셋, 다메섹, 두로의 멸망에 대한 이 예언은, 이로부터 얼마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승전군으로 이 모든 나라들을 약탈하고, 성읍들을 취하고, 그들 중에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 성취되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는 그의 정복사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혹자는, 아스돗에 거하게 될 서자는 바로 알렉산더를 뜻한다고 본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는 올림피아가 간음으로 그를 낳았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쥬피터에 의해서 낳은 것으로 가장했다.
후에 유다인들은 블레셋인, 수리아인, 그들의 다른 이웃들의 땅을 얻었고, 그들로부터 성읍들을 취하여 그들의 소유로 삼았으니, 이는 조세푸스와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의해 나타나며, 또 이전에 이미 예언된 것이다(습 2:4; 옵 20).
3. 그들 중 몇몇은 개종될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과 은총에 의해 하나님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7절을 약속으로 이해한다.(1) 하나님께서 이 나라들의 죄를 도말하시리라-" 그들의 피와 그들의 가증한 것," 그들의 잔인과 그들의 우상 숭배를 도말하시리라. 또 하나님께서 그들과 이 죄들 사이를 가를 것이다. 그들은 이 죄들을 맛있는 음식처럼 혓바닥 밑에 말아 두고, 또 사람들이 그 입에서 고기를 꺼내기를 꺼리어 잇새에 꼭 잡아두듯이 제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하기에 어려운 것은 없다.
(2) 그는 그들 중 남은 자를 자기의 백성으로 용납하시리라. "남은 자가 우리의 하나님을 위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이 나라들에조차 남은 자를 보류시켰으니, 이는 그의 긍휼과 은총의 기념물이었고 그를 위해 따로 남겨졌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타고난 불리함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데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블레셋인은 복음에 의거하여 유대인, 아니, 유대의 통치자나 우두머리처럼 용납될 것이며, 에글론 사람은 여부스인, 혹은 예루살렘인으로, 곧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처럼, 개종된 여부스 사람으로 여겨지리라(삼하 24:16).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민족의 구별이 없으며, 모두다 그 안에서 하나이며, 모두다 한결같이 그에게 환영된다.
Ⅳ.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의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과거지사에 있어서 그들의 논쟁을 보복하시며, 미래를 위해 그들을 안보하기 위해 이웃 나라들을 이처럼 취급하시리라는 것은 그들에 대한 친절에 기인하는 것이다.
1. 이리하여 혹자는 7절이 다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1)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피에 굶주린 대적들로부터 구하시려 했다. 이들(대적)은 그들을 미워했고,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었으니, 그때 이들은 그들을 막 삼키려 했고, 그들을 먹이로 삼으려 했다. 나는 블레셋의 입으로부터 와 "그들의 잇사이에서 그 피를(즉, 이스라엘의 피) 제할 것이다" (암 3:12). 그 때 그들은 게걸스럽게 유대인들을 삼키고 있었다.
(2) 그는 이처럼 그들에게 원수에 대한 승리와 지배를 주었다. 그리고 "그도 남아서(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이며," 그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를 소유하고 그에 의해 소유될 것이며, 그리고 "그는 유대의 한 두목같이 되리라." 비록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종노릇을 해왔으나, 그들은 옛 위엄을 회복할 것이며, 다윗과 다른 통치자들이 유다에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에그론(즉, 블레셋인들)은 여부스 사람같이 또 그들 아래 복종하게 되었던 그밖의 나라들처럼 될 것이다.
2. 그러나, 이는 명백히 8절,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의 특수한 보호 아래 택하실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이웃들을 약하게 하여, 그들에게 불행을 행할 힘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으리라." 하나님의 집은 원수의 나라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의 교회는 가시나무들 가운데 있는 백합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와 선하심은 그것의 특수한 보전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한다. "성도의 모임" 은, 그 둘레에 포진한 어두움의 세력의 수많은 군대들과 비교할 때 적은 무리이므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엘리사에게 했듯이, 구원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싸지 않았다면 확실히 삼켜졌을 것이다(계 20:9; 시 34:7). 시대가 매우 위태로울 때, 군대가 이리저리 다니며 모두가 시온에게 악의를 품을 때, 섭리는 소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그 보호를 배가할 것이다. "그는 다시는 이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그가 정복자로 돌아 오건 피정복자로 돌아 오건 간에 아무 해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자가 결코 그들을 해하지 못하듯이, "포악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라." 그들에게는 그들을 힘있게 통치하며, 옛날에 애굽에서처럼, "아픈 속박으로 그들의 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원수도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카비가의 투쟁 이후 얼마 동안 유다가 자유롭고 번성하는 국가가 되었을 때, 혹은 아마 알렉산더 대왕이 대제사장 야두스의 경외심에 감동되어 유다인들에게 호의를 가져, 그들을 자기 보호 아래 두면서, 그와 동시에 인접 국가들을 황폐하게 했을 때,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주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이제 나는 주의 깊게 나의 백성들과 다른 백성들 사이를 구별하였으니, 이전에 그들은 다른 백성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듯했으며, 내가 나의 사람들을 안다는 사실을 나타나게 하였다." 이는 시편 34편 15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는 구절과 일치한다.
이제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그의 눈은 그들에게 고정되어, 그들에 대한 그의 온화하심을 나타내고, "그들을 위해 능력을 베푸실 것이다" (대하 16:9).
메시야에 대한 예언 (스가랴 9:9-11)
이것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9절의 문자적 성취와 그 분명한 적용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찬 입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마 21:5; 요 12:15).
Ⅰ. 여기에는 약속된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주목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 교회에 큰 기쁨이 되는 사건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도다." 그리스도는 왕의 권세와 특권을 부여받으신 임금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권자요 절대군주이다. 그는 시온의 왕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시 2:6). 시온에서 그의 왕으로서의 영광이 빛난다. 거기로부터 "율법이 나왔으며,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나왔다." 복음의 교회에서 그의 영적 왕국은 통치된다. 교회의 율례가 제정되고 그 공직자들이 위임되는 것은 그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보호 아래 놓인다. 그는 교회에서 전투를 행하시며, 그 왕으로서 그의 이익을 확보하신다. "이 임금은 오랫동안 오는 중이었으나, 보라, 이제 그가 오셨다. 그가 문 앞에 계시도다. 계속 진행될 것은 몇 세대일 뿐이며, 오실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는 너희에게 임하신다. 말씀이 곧 육신이 되어 지경 안에 거하시리라. 그는 자기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하라.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부를지어다. 그것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며, 그것이 참된 것임을 확신하자. 그가 오시고 계신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라. 그는 너를 향해 오시고 있다. 또한 기쁨이 너무 커서 그것을 감출 수 없으며, 그것이 너무 당연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처럼, 기쁨의 환호로 그를 맞으러 나갈 준비를 하라. 그에게 호산나를 외치라." 그리스도의 오심은 교회의 환호가 됨이 마땅하다.
Ⅱ. 여기 그가 아끼는 모든 신하들의 눈에서 매우 온후하게 하며, 그의 강림을 매우 즐겁게 하는 묘사가 있다.
1. 그는 의로운 통치자이다. 그의 모든 정사(政事)는 정확히 공평의 법칙에 근거할 것이다. 이는 "그가 공의로우시기" 때문이다.2. 그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참으로 충성하는 모든 자들에게 강력한 보호자이다. 이것은 그가 "구원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힘 안에 구원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는 그것을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려고 소유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하나님" 이시다. 구원의 보고가 그 안에 있다. 그는 servatus - 즉 그 자신을 구원하시는(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분이시니, 그 자신의 힘에 의해 무덤에서 일어남으로써 스스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자격을 갖추신다.
3. 그는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그러듯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아버지" 이시다. 그는 "겸손하시다." 그는 "가난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 말이 함축하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그의 상태가 비천한 것을 뜻한다. "자신을 비우셨다." 그는 "멸시받고, 사람들에게 거절되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것을 그의 정신의 기질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해석했다. 그는 "온유하시니," 위엄을 부리시거나 해받음을 개탄하지 않으시고, 시종일관 "자신을 낮추사," 천한 자에게 친절히 대하시고, 불행한 자에게 동정하신다. 이는 예언자로서의 그의 찬란하고 훌륭한 성품이었으며(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왕으로서의" 품격만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 자신의 성읍으로 입성하실 때(그리고 그것은 그의 생애 중 세인의 눈에 장엄하게 비쳤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지위높은 사람들이 즐겨 타는 장대한 말이나 마차가 아니라, 참으로 봉사의 짐승이며 매우 어리석고 멸시받는 것이요, 낮고 매우 느려서 당시에도 오직 비천한 사람들만이 탔던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의 증명이 되었다. 더욱이 그것은 타기에 좋은 나귀가 아니라, 매우 어리석어 다루기 힘든 것으로서, 그 위에 탄 사람에게 신뢰를 주기 보다는 수치를 끼치기에 더 좋은, "나귀새끼" 였다. 그리고 그것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가끔 불쌍한 말이 그렇듯이, 좋은 마구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으니, 그 나귀새끼에는 안장도, 말장식도, 마구도 마차도 없었고, 오직 그의 제자들의 옷이 위에 걸쳐졌을 뿐이었다. 이는 그가 우리를 큰 겸비로서 방문했을 때 "명성을 날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Ⅲ. 그의 왕국은 여기서 그 영광 중에 설립된다. 이 왕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 즉 "하늘 나라" 를 가지시며, 또한 가지실 것이다.
1. 그것은 외적 강제력이나, 물리적인 전쟁무기로 무장함으로써 세워지거나 전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는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을 것이니" (10절), 그가 나귀를 타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백성에 대한 친절에서, 그들의 말들과 병거들을 끊어,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힘에만 두어야 했던 신뢰를 자신에게 둠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하실 것이다. 그 자신이 그들의 보호를 책임질 것이며, "예루살렘 둘레에 불벽이" 되며 그의 천사에게 그 일을 맡기시리니(저 "불병거와 불말"), 그 때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병거와 말은 전혀 쓸모없이 버려지고 끊겨질 것이다.2. 그것은 복음의 선포, 곧 "이방 사람에 대한 화평의 전언" 에 의해 파급되고 정립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과 가까이 있던 자들에게 화평을 설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 위의 인간에 대한 평화와 호의를" 선포하심으로 그의 왕국을 세우셨다.
3. 그의 왕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편만하여 그들을 다스리게 되는 한, 그들을 화평하게 하고, 모든 반목을 살해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하는 화살을 끊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입술의 열매인 평화를 창조" 하리라.
4. 그것은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 그것에 대한 반대를 꺾을 것이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시온의 왕의 진출에 반대하려고 나오는 병거와 말은 죽임을 당하리라. 그의 복음은 세상에 선포되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용납되어, 다윗의 예언처럼,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 72:8). 복음의 설교자들은 그것을 이 나라 이 섬에서, 저 나라 저 섬으로 전하리니, 세계의 가장 먼 구석도 복음에 의해 밝혀지고 바꾸어지기까지 그리하리라.
Ⅳ. 여기에 메시야에 의해 인류에게 주어진 큰 유익이 설명되어 있다. 즉 심한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으로서, 유대인들이 바벨론 유배에서 구원된 사실이 이에 대한 모형이 된다(11절). "또 너로 말할진대(너, 오 예루살렘의 딸아! 혹은 오 왕이신 메시야여!)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할례의 피로 인친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덕택에 의해, 또한 그 언약의 계속이며 완성으로서, 희생의 피로 인친 바 되고, 시내산에서 맺어진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의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근래에 건졌나니라." 곧 그들에게 매우 블편한 장소였던 바벨론에서 너희 갇힌 자들을 놓았다. 만일 그들이 갇혔던 나라에서 여호와를 찾는다면, 그가 그들에게서 발견되리라는 것이 언약의 일부였다(레 26:42, 44, 45; 신 30:4).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모두가 긍정되고 아멘이 되어, 그들이 유배에서 해방되었던 바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예표되는 "언약의 피에 의해서" 였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의 왕에" 의해 행해진 크신 구원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 오, 시온의 땅아!" 죄된 상태는 얽매인 상태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것은 영적인 감옥이다. 그것은 그 속에 "물이 없고," 전혀 위로가 없는 구덩이거나 토굴이다. 우리 모두는 본래 이 구덩이에 갇힌 죄수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 아래 있다" 고 결론지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공의에 묶어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수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또 하나의 계약 상태로 들어가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위해 해방을 사서 그 모든 유익을 주는 계약의 피이다. 그 계약의 피에 의해 이 죄수들을 쉽고 명예스러운 이유로 놓아 줄 효과적인 방도가 마련되었고,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듯이, "묶여있던 자들에게 자유와 감옥에서의 석방" 이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격려해 주신 모든 자들이 와서 이로부터 그 유익을 취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승리 (스가랴 9:12-17)
예언자는,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자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계약의 피" 와 메시야의 약속에 돌리라고 가르친 후에(왜냐하면 그들이 그처럼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그 축복이 그들 가운데 있었고, 그들의 나라의 태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즐겁고 행복한 정착과 그들 앞에 놓인 영광스러운 시대에 대한 전망으로 그들은 얼마동안 그러한 행복을 크게 즐겼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향유하는 복음의 영적 축복 속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Ⅰ.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피난성으로 여겨 그에게로 도망하라는 권유를 듣는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포로 생활로부터 모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직도 사실상, "갇힌 자"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다. 느 9:36), "소망 곧 기대를 품은 갇힌 자" 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스 9:8, 9). 아직 바벨론에서 그들의 일들 때문에 계속 붙잡혀 있는 자들은, 언젠가 다시 그들의 모국을 보리라는 소망 중에 살고 있었다. 이제 이들은 모두 눈을 돌려, 그들 앞에 계신 보장으로서의 메시야를 바라 보게 된다. 그는 약속 중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자신에게 머무르게 하신다. "그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 45:22). 메시야의 약속은 그의 강림 오래 전에 살던 신자들의 요새였다. 그들은 멀리서 다가 오는 그의 날을 보고 기뻐했으며, 이 "예루살렘의 구원" 에 대한 믿음의 기대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위로와 지주가 되어 왔다(눅 2:25, 38). 그들은, 위험과 비통 중에, 구원을 위하여 이런저런 피조물에게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래도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렸고, 구원을 가지고 그들에게 오시는 그들의 임금에 대한 기쁨으로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이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의 예표가 되듯이(11절), 이 보장에로의 초대는 복음의 부름의 언어를 말한다. 죄인들은 갇힌 자들이나, 그들은 희망을 품은 갇힌 자들이다. 그들의 상황은 비통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그들에 대하여 이스라엘 중에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 대한 보장(요새)이요, 그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율법의 저주, 그들의 영적 원수들의 공격에서부터 안전하고 평화스럽게 될 수 있는 강한 탑이다. 그들은 기운찬 믿음으로 그에게 돌이켜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로 도망하여, 그의 이름을 신뢰해야 한다.
Ⅱ.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너희는 일들이 최악의 상태에 있어 너희 경우가 최고도로 개탈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에게 배나 갚을 것을 엄숙히 약속하노라. 오 예루살렘아! 너희 희망을 품은 모든 갇힌 자들에게 약속하노라. 나는 너희가 경험한 슬픔의 배가 되는 위로, 또는 너희 조상들의 최상의 처지 때 내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것에 배가 되는 축복을 너희에게 주리라. 너희 나중 집 뿐만 아니라, 너희 나중 상태(천국)의 영광이 더 클 것이요, 너희 이전 상태보다 두 배나 더 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에 의해 가능했고, 그의 복음의 선포와 그의 왕국의 설립에서 이루어졌다. 이 하늘에 속하는 영적 축복은 그들이 가장 반성할 때 즐겼던 것의 배나 되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승리, 풍부 기쁨을 그들의 모국에서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있을 더 영화로운 승리, 부, 기쁨의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했다.
1. 그들은 원수들에게 승리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돌아 온 이후에 사방으로 원수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얼룩무늬 새" 와 같았다. 들의 모든 새가 그들에게 대적했다. 그들의 땅은 두 강대국 수리아와 애굽, 즉 헬라 군주국의 가지들 사이에 놓여 있었으며, 얼마나 자주 그들 사이에서 위험에 빠질 것인가가 예언되었었다(단 11장). 그러나 여기서는, 저들 모두로부터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하시리라고 약속된다. 그리고 이 약속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원수에 대항하여서 목숨을 보존하고, 많은 투쟁과 환난 후에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던 저 마카비가의 시대에서 일차적인 완성을 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약속된다.(1) 그들은 자기들의 박해자를 무찌르고 좌절시키는 데서 하나님의 손의 도구가 될 것이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았다. 내 화살인 에브라임을 먹인 그 활은 충분히 당겨져서, 그 살이 꼭대기까지 갈 것이다." 혹자는 "활을 채웠다" 는 말이 이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있는 표현들은 매우 훌륭하고, 그 표상이 매우 생생하다. 유다는 "활 사용법을 배웠고" (삼하 1:18), 에브라임은 그것으로 유명했다(시 78:9).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활로 성공을 획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활과 화살, 즉 그가 좋으신 대로 쓰고 다루시는 그의 손의 도구들에 불과하며, 그가 활처럼 당기고 화살처럼 과녁을 향하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가장 담대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에 불과하며, 그가 가능하게 하시는 것 이상의 봉사를 할 수 없다. 복음의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활이니, 그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사, 전진하며, "이기고 또 이기신다" (계 6:2). 그 다음 말이 이를 설명한다.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노라!" 이는 헬라 군주국의 왕 중에 하나 였던 "안티오커스에 대적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백성들이 "강하여 용맹을 발휘했을" 때(단 11:32)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무도 그 앞에 서지 못할, "용사의 칼과 같이" 되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칼이라고 하여(시 17:13), 가끔 선인들도 그렇게 불리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양자를 기용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모든 원정과 교전에 있어서 그들의 대장이 될 것이다(14절). "여호와께서 그들 위해 나타나시리라." 그는 자신이 그들의 일을 주재하며, 그들의 모든 이동에 있어 그들이 그의 지시 아래 있어서, 비록 가시적으로는 아니지만 그가 광야를 통해 그들을 인도할 때 불기둥과 기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위에 나타나셨듯이" 분명히 행하시리라.
[1] 그들의 군대가 일어나거나, 소집되거나, 전장으로 인도되는가?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 것이니," 군대를 집결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경고를 울리고, 행진할 길과 이동할 길을 지시하시리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면, 불명확한 소리나, 약하고 효과없는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군대는 전장에 나가 행동을 개시하는가? 전투가 어떻게 벌어지든, 하나님께서 그 군대의 맨 앞에 나설 것이며, 무시무시하게 빠르고 맹렬한 "남방 회오리 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 회오리 바람 앞에, 오 너 헬라의 아들들아! 너희는 겨와 같을 것이다.
[3] 군대가 실제로 임전하는가? 하나님의 "살이 번개같이 날아갈" 것이며, 힘차게, 갑자기, 막을 길도 없게 날아갈 것이다. 그의 "번개는 살처럼" 나갈 것이다(시 18:14 참조). 그는 "그의 살을 쏘아내시며 그들을 흩으셨으니," 즉 그는 "그의 번개를 쏘아 그들을 쳐부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인들을 예전에 애굽에서 인도해 내사 가나안으로 이끄셨고, 그들에 대한 신적 섭리의 특수 현시에 의해, 마카비 시대에 그들을 공격했던 일들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때 유대인들이 멋지게 승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사탄과 모든 암흑의 세력들을 이긴 십자가의 선포에 의해 성취되었고, 그에 의해 우리가 더욱 더 승리자가 되었던 그 영광스러운 승리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4] 그들은 원수의 힘에 눌릴 위험에 놓여 있는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실 것이다" (15절).
2.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승전가를 부르리라.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저들의 성공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어떤 사람들은, 저들이 가진 것은 "저들이 먹으리라" 고 15절을 해석한다(즉 조용히 향유하리라는 것이다). 저들의 충만한 즐거움 속에서, 저들은 하나님을 위해 많은 제물을 바칠 것이요, 따라서 "저들은" 저들의 제물의 피와 기름으로 "주발과 제단 뿔들을 모두 채우리라."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굳은 관계를 맺어왔고, 나아가 "그의 백성의 양떼" 요, 그는 그들의 목자가 되시며, 저들은 그에게 "왕관의 보석같이" 귀중한 대접을 받은 것을 기뻐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땅에서 기호처럼 높이 들리리니," 승리가 기쁨의 표징으로 내걸린 왕의 깃발과 같이 되리라. "그의 선하심이 얼마나 크시며, 그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소리를 낼" 노래의 제목이다.
이것은 "오실 왕" 메시야를 가리킬 수도 있다. 보라 "저 아름다운 왕" (사 33:17), 그는 "천하 왕 중 가장 아름답도다." 비록 세인의 눈에는 모양도 맵시도 없어보이나, 신앙인의 눈에는 그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가!"
여기에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실례가 있다. "소년은 곡식으로 부강해지며, 처녀는 포도주로 그리되도다."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땅의 풍성한 열매를 축복으로 주시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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