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스가랴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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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네 병거의 환상 (스가랴 6:1-8)

예언자는 이 환상을 받으러 나간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눈을 들어 보았다." 비록 이것이 그가 받은 7번째의 환상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바르게 안다면, 하나님께 관해 알면 알수록, 그분과 더욱 친교를 가지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예언자가 서로 다른 색의 말들에 끌리는 "네 병거" 를 보는 것과 그 광경의 설명을 함께 관찰하자(1-5절).

그는 쳐다보자 곧 무엇이 볼 가치가 있으며, 무엇이 이 암흑 시대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을 격려하는데 크게 봉사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환상의 뜻은 매우 모호하다. 혹자는 "네 병거" 가 네 군주국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이라" 고 읽고(5절), 그 안에 다니엘 7장 2절, 즉 다니엘이 이상 중에 네 군주국을 대표하는 "큰 바다로 몰려 부는 하늘이 네 바람" 을 본 것을 관련시킨다. 바벨론 제국은(그들 생각으로는) 여기서 그 후 언급되지 않는 "홍마들" 로 상징되는데, 그 까닭은 그 제국이 이제 멸절했기 때문이다. 둘째 병거에는 "흑마들" 이 있는데, 그것은 바벨론인들을 대하여 북쪽으로 갔으며,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됨에서 자유케 함으로써 "북편 땅에서 하나님의 신을 잠잠케 했던" 바사제국이다. "흰" 말은 희랍인들인데, 그들이 바사를 전복하였으므로, 북쪽으로 "그 뒤를 따른다." "아롱진" 말은 로마인들인데, 희랍 제국을 정복하고 "남편 땅으로 간다" 고 했는데, 그 까닭은 남쪽에 놓여 있던 애굽이 로마인들에 의해 정복된 희랍 제국의 마지막 가지였기 때문이다. "건장한 말들" 은 "아롱진 말들" 과 함께 했으나, 후에 스스로 나아가 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고트족과 반달족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들은 승전하는 군대와 함께 지구상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혹은 셀류키드(Seleucid)나 라기드(Lagid), 즉 희랍제국의 두 가지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그로티우스(Grotius)와 다른 이들의 이해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환상을 더 일반적으로, 이 낮은 세상 속에서의 섭리의 왕국의 행정을 나타내려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싶다. "천사들" 은 흔히 "하나님의 병거" 로 불리운다(시 68:17; 18:10 처럼). 민족들과 교회들에 관한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들은 말들의 여러 색으로 대표된다(계 6:2, 4, 5, 8). 그리고 그처럼 우리가 여기서 살필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는 온 사건들의 원천이며, 그들은 "놋산" 처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 "병거들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정된 것을 완수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약속들이 원래적인 것들이며, 그의 수행은 오직 그들에 대한 복사품에 불과하다. 그는 모든 것을 "그의 뜻의 생각에 따라" 행하신다. 우리는 우리 팔로 산들을 잡을 수 없듯이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다 파악할 수는 없으며, "놋산" 을 제거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의도를 변경시킬 수 없다. "그는 한 마음이신데, 누가 그를 돌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공적이나 사적인 일에 관해 우리들에 관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들 모두가 "놋산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하며, 따라서 그들을 잠자코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듯이, 그들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하나님께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혹은 "왜 당신은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가?(행 2:23; 4:28)

2. 하나님께서 섭리의 역사에 있어서 그의 계시를 수행하시니, 그것은 그가 개방된 병거에 있는 왕처럼 올라타는 병거들과 같아서 세상에 그의 영광을 보여 준다. 그는 전쟁의 병거에서처럼 그 안에 타고 "정복하러" 나아가며, 그의 영광과 통치의 원수를 모두 이기신다. 하나님은 그의 행함에 있어서 크고 두려우신 분이시며(시 66:3), 그것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왕이 행차하시는 것을 본다" (시 68:24). 그의 섭리는 병거처럼 신속히 강하게 움직이지만, 병거가 그들의 운전자에 의해 그러하듯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주권적 의지에 의해 지휘되고 통어된다.

3. 그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들이며, "하늘의 군대들처럼," "땅의 거주자들" 가운데서 그의 생각의 시행을 위해 그에 의해 기용되었다. 그들은 "병거들" 이며, 혹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보면, 그들은 힘과 능에 있어서 큰 병거들을 끄는 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묘사하시는 말처럼(욥 39:19 등), 천둥으로 옷입고 무시무시하지만, "두렵게 되거나 두려움을 줄" 수 없다. 그들은 "불 수레요 불말이니," 어떤 예언자는 하늘로 운반하고, 어떤 이는 땅 위에서 보호한다.

잘 다루어진 말들이 그들의 기수나 모는 사람에게 그렇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유순하게 따른다.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사 그들에게 명예를 부여할 수 있고 그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북돋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4. 섭리의 사건들은 다른 양상을 가지며 시간의 얼굴은 흔히 바뀐다는 것을 알자. "첫째 병거" 에 매단 "말들" 은 "붉었는데," 전쟁과 피흘림, 즉 "말굴레에까지 닿은 피" 를 뜻한다(계 14:20). "둘째 병거" 에 매단 "말들은 검었는데," 전쟁의 음울하고 서글픈 결과를 뜻한다. 그것은 모두를 애통으로 몰아 넣고, 모든 것을 황폐케 하고, 기근과 역병과 황폐를 초래하고, 온 땅을 시들게 한다. "셋째 병거" 에 매단 말들은 "흰" 말이었는데, 평안과 평화 그리고 번영이 이 어둡고 우울한 시대 후에 돌아 올 것을 뜻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들에게 슬픔을 일으키시지만, 그는 동정심을 가지리라. "넷째 병거" 에 매단 말들은 혼합된 색이었으니, "아롱지고 건장한" 말들이었다. "얼룩지고, 점박이며, 회색인데," 조합되고 교착되는 다양하고 복합된 사건들, 번영의 날과 역경의 날이 "서로 엇갈리" 는 것을 뜻한다. 여호와의 손에 놓인 섭리의 잔은 "섞은 것이 가득하다" (시 75:8).

5. 섭리의 모든 도구들과 그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로부터 그들은 명령과 지도를 받는다(5절). "이는 하늘의 네 영들, 네 바람인데," 사방으로부터 임의로 부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 안에" 두시며 그들을 "그의 보고" 로부터 꺼낸다. 혹은, 오히려, 이들은 그를 수종들고 섬기며, 윗 세계에서 그의 영광을 보며, 낮은 세계에서 그의 영광을 받드는 일을 그들의 직무로 하기 위해,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그들은 "온 세상의 주이신 그의 앞에 서서," 그로부터 명령을 받고 이 땅 위의 그들의 봉사에 관하여 그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니, 그 이유는 그것이 모두 그의 관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지정하는 때, 그들은 그의 생각의 전달자들과 그의 공의와 긍휼의 사역자들로서 "나가는 것이다." 그에 의해 섭리의 계획이 수행되는 동안 인간의 영혼 위에 주는 저 은밀한 행동과 영향은, 혹자의 생각에, "하나님으로부터 나가서" "모든 육체의 영들의 하나님" 이신 그가 임명하신 것을 완성하는 이 "하늘의 네 바람(영)들" 이다.

6. 섭리 속에는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고, 한 사건이 다른 것에 대한 균형을 위해 봉사한다(6절). "흑마가 나가매," 그와 함께 매우 어둡고 음침한 사건들, 즉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이 어둡게 보이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곧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고, 사건들에 주어진 새로운 전환에 의해 그들을 다시 즐겁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러한 것이 그의 교회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이다. 만일 흑마가 나아가면, 백마는 곧 그 뒤를 따른다. "환난이 넘치는 곳에 위로가 더욱 넘친다."

7. 섭리의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국면은 섞이고 복합적인 것이다. "얼룩진 말과 건장한 말" 양자가 "넷째 병거" 에 있었고(3절), 비록 그들이 처음에는 "남편 땅으로" 나아갔지만, 그 후 그들은 "땅에 두루 다니려고 했으며,"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7절). 만일 우리가 세상을 두루 다닌다면, 우리는 섭리의 사건들이 전부 검거나 전부 희지 않고, 잿빛, 혹은 회색, 즉 검정과 흰색의 혼합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와 같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은 혼합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시에 "긍휼과 심판" 을 노래하며, 우리는 양자의 "하나님에게 노래하며" (시 101:1), 우리 자신을 섭리의 혼합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적응하기를 애써야 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기쁘지 않은 듯이 우리의 평안을 기뻐하는 것은, 그 평화 속에도 그것을 막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울지 않는 듯이 우리의 질고를 울어야 하니, 그 까닭은 그것과 섞인 많은 긍휼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8.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섭리의 작용 모두를 기뻐하신다(8절). "이는 내 마음을 시원케 했도다." 비상한 심판을 뜻하는 "흑마들" 과, 비상한 구원을 뜻하는 "백마들," 양자가 공통적으로 혼합된 섭리들이 온 세상을 가는 동안 "북편 땅으로 나갔다." 이들은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이는 근래에 교회에 관련된 가장 현저한 행동 광경이었다. 즉, 이 이상한 모양과 섭리의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의 원수들 위에 집행되었고, 그의 은혜가 교회의 원수들 위에 집행되었는데, 양자는 오랫동안 지체되어 왔고, 양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완성하시고 그의 말씀을 성취하사,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의를 위하여 기뻐하시며," 그가 말하실 때(사 1:24), 그 마음을 편케 하셨다.

 

6:2 없음.

 

6: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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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여호수아를 존귀케 함 (스가랴 6:9-1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대들" 뿐만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과거에 예언자들을 통해 교회에 말하셨다. 본장의 앞 부분에서는 환상에 의해 말했다. 이것은 오직 예언자 자신만 볼 수 있었다. 여기, 이 후반부에서는 표적, 혹은 모형을 많은 사람이 보았다. 그의 교회의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메시야의 현격한 예언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Ⅰ. 하나님께서 정하신 중요한 의식. 그리고 그것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대관식" 이었다(10,11절). 여호수아라고 이름하는 그리스도의 두 뛰어난 모형이 구약 성서에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일이다("예수" 와 같은 이름이다. 70인 역에 의하면 신약 성서에서 "예수" 를 가리켰다. 행 7:45). 대장, 즉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 여호수아, 그리고 우리 신앙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 둘은 각기 그들의 시대에 있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요,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특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모형, 즉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시라는, 하나님의 의도적 치정에 의해 그에게 행해지는 일이다. 여호수아는 결코 면류관에 대한 야망이 없었고, 백성들이 면류관을 쓴 머리를 그들 위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는-그 둘도 크게 놀랐다-마치 여호수아가 왕인 것처럼 그에게 관을 씌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스룹바벨의 신중함과 경건이 이를 자기에 대한 어떠한 모욕이 결코 되지 않도록 하였듯이(그와의 경쟁자를 세우는 것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바사 왕들이 그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 그 일에 성내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확신하는 것을 함에 있어서는, 인간들의 못마땅히 여김을 무릅쓰는 용기를 내어도 좋을 것이다.

1. 여기에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에 제물을 가져온 몇몇 유대인들이 있었다. 여기서 명명된 "포로 중 몇 사람" 은 영예스럽게도 예루살렘을 방문하러 "바벨론에서부터 돌아 왔다." 그들은 바벨론에 대해 최종적 작별 인사를 마쳤어야 했고, 그들 자신의 고향에서 형제들과 함께 거주하러 왔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행한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에 그들은 이 방문이 그들을 용서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에서 평안하고 충족히 살고 있던 유대인 집단의 사절들로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 자금의 부족으로 서서히 진척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예물로서 금과 은의 헌물을 함께 보내왔다. 거리가 멀거나,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인적 자원으로 선한 사업을 도울 수 없는 자들은, 가능한 대로 그들의 지갑으로 그 일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일 누가 손이 모자란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채울 것이다.

2. 예언자가 그들을 만나기 위한 시간과 장소가 약속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예물을 하나님의 정규적 사역자인 제사장에게 가져올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특수한 사람인 한 예언자를 마련하셨다. 이는 포로 중에 처하여 "우리는 우리의 표적을 보지 못하니, 더 이상 예언자가 없도다" 라고 자주 불평했고, 예언의 영이 그 안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그들과 다른 이들을 초청하여 당시 그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성지와 같은 그들 자신의 고향에 재정주시켰던 자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스가랴는 그들이 온 "이 날에" 집회를 열라는 명령을 받았고(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즉시" 그들의 헌물을 내 놓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물을 이제 받으신다고 확신시킴으로써 환영을 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아마 성전의 제물 수령의 대표였고 그것을 보고에 간직했던,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가져와서 성전에 사용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의 명예를 위해 쓰여질 것을 명령했다(마 12:6).

3. 면류관이 "만들어져서,"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졌다" (11절). 제공된 면류관은 두 개로서, 하나는 은으로, 또 하나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는(혹자의 생각에)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위엄을 뜻하고 후자는 그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뜻한다. 혹은, 오히려, 그가 이미 제사장으로서(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능력을 보이기 위해) 금면류관을 받았으므로, 이 은과 금으로 된 면류관은 "왕의 위엄" 을 뜻하니, 은면류관은 아마 메시야가 이 땅 위에 오실 때, 그의 왕국을 상징하려고 고안된 것 같으며, 그 때 그는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 이며(요 1:49), 금면류관은 그가 들려진 상태에서의 그의 왕국을 뜻하니, 그 영광이 금이 은에게 그러하듯이 전자의 (은)면류관보다 훨씬 뛰어났다. 태양은 "힘있게 나아갈" 때 금처럼 빛난다. 그리고 달의 빛은 "밝게 걸어갈" 때, 우리가 "은빛" 이라고 부른다. 해와 달을 숭배하던 자들이 이제 들려진 구속자의 금과 은으로 된 면류관 앞에 엎드릴 것이며, 그 두 분 앞에 태양은 부끄러워하고 달은 당황하여, 그 빛을 잃는다.

Ⅱ. 하나님께서 이 의식에 부여하신 의미를 보자. 모두가 "이처럼 여호수아가 관을 쓰게 된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기꺼이 물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들에게 기꺼이 그 뜻을 말할 것이다. 이 말하는 표적 위에 예언이 새겨지며, 표적은 예언을 더욱 더 주목되게 하고 더 잘 기억되도록 하곤 했다.

1.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 여호수아와 같은 큰 대제사장을 일으키실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그가 단지 오실 이의 모형, 곧 그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라(12절).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리라고 그에게 말하라." 그는 그의 출생지로 예정된 곳인 다윗성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비록 그 가족이 마른 땅에 내린 뿌리이지만, 이 순(가지)이, 마치 태양이 돌아오는 봄에, 꽃들이 묻혀서 모이지 않고 마음에서도 사라진 뿌리들에서 뻗쳐 나오듯이, 그것으로부터 솟아 나오리라. 그는 "홀로 자랄 것이요" (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propria virtute - 즉 그 자신의 활력에 의해 그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리라.

2.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유용한 도구였듯이, "그 사람, 그 순" 은 훌륭한 건축의 대가, 영적 성전인 복음의 교회의 유일한 건축자가 될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리고 이 말은 되풀이 되니(13절),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는 자라서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며 인류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복음의 교회는 "여호와의 성전, 영적 집(벧전 2:5), 거룩한 성전이다" (엡 2:21).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셨고, 거기서 그는 그의 백성의 예배와 존경을 받았다. 그처럼 복음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말씀에 의해 빛나고, 기도와 찬양의 영적 희생이 바쳐진다. 이제 그리스도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 이 성전의 건축자(창설자)가 되신다.

3.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누릴 것이다. 영광은 짐이지만, 모든 것들을 떠받치시는 이에겐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그의 영광이며, 그는 그것을 졌다. 그와 같이 면류관은 "영광의 큰 무게" 이지만, 그는 그것을 감당한다. "정사(政事)가 그의 어깨에 있고," 그 안에서 "그는 영광을 누린다" (사 9:6).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라." (사 22:24). 그것은 그에게 걸리고, 그는 par negotio-즉 그것을 지기에 합당하다. 제사직과 왕위의 영광이 아론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서 갈라졌다. 그러나 이제 그는 홀로 양자의 영광을 모두 누릴 것이다. 그가 감당할 것, 그가 누릴 것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영광" 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를 기다려야 하며, 그에 대한 기대 속에서 그것들이 전에 가졌던 외적 영광의 부족 속에서도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큰 나중 집의 영광을 낳는 그러한 영화를 누릴 것이다. 그는 "영광을 높이리라" (이것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던져져 침체되었으나, 그는 그것을 티끌로부터 올릴 것이다.

4. 그가 보좌를 누릴 것이며, 그의 보좌 위에서 동시에 제사장이며 왕이 될 것이다. 보좌는 위엄과 통치, 그리고 확대된 세력과 함께 높여진 영예를 뜻한다.

(1) 이 제사장은 왕이 될 것이며,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직책은 왕으로서의 그의 위엄을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중보하기 위해 항상 사신다. 그러나 그는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서 그리하신다(히 8:1). 우리는 이스라엘에 일찍이 없었던 "그러한 대제사장" 을 모시는 것인데, 그 까닭은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오른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중재에 중대한 미덕을 부여한다. 휘장 안에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신 자는 거기서 앉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위해 희생을 드리도록 임명받은 그리스도에게는 우리에게 율법을 줄 권위가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에게 보좌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의해 어떤 유익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그를 위한 보좌를 준비하며, 그가 "그 보좌에서 앉으사 다스리시기를" 원하고 즐거워하게 해야 한다. 또한 그에게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이 순복하게 되어야 한다.

(2) 이 왕은 제사장일 것이니, "그의 보좌 위에 계신 제사장" 이시다. 왕의 위엄과 능력과 함께, 그는 "사람 가운데서 취해지고, 사람들을 위해 임명되어 무식한 자에게 동정하실 수 있는" 제사장의 온유함과 단순성을 가지실 것이다(히 5:1, 2). 왕으로서의 그의 정사의 각부분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은총의 의도를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소유인 자들로 하여금, 비록 영광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이지만, 그의 보좌를 공포와 경이로 보지 말게 하라. 왜냐하면, "보좌 주위에 무지개" 가 있듯이, 그는 "보좌 위의 제사장" 이기 때문이다.

5. "평화의 의논이 그들 사이에 있으리라." 즉,

(1) "여호와" 와 "순이신 사람 사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이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평화에 관한 의논은 구속의 언약 속에 있는 무한한 지혜에 의하여 협의될 것이다(즉, 협의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완전하게 충분히 서로를 이해한다. 혹은 오히려,

(2) 제사장과 보좌 사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격인 직임과 왕격인 직임 사이이다. "순이신 그분" 은 "평화의 의논" 을 수행하러 자라나리니, 땅의 평화와, 그것을 위하여 하늘과의 평화를 의논해야 한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화의 생각" 이며, 그것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며 동시에 구세주" 로 들어 올렸다. 그는 그에게 보좌를 주셨는데, 그가 그의 보좌 위에 제사장이 되어야 하며, 제사장과 왕의 두 직임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 안에서 복을 누리도록 하는 위대한 작업을 초래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그것이 왕과 제사장의 분리된 직임자들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지금 그러하듯이,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목적으로 서로 의논을 하는 유대 국가의 이전 정사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들을 돕는다" 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그처럼 복음의 교회와 모든 신도들의 평화와 복지가, 비록 두 분리된 사람들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하나에서 만나는 두 분리된 직임 덕택에 시행될 것이니-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사직에 의해 모든 평화를 사시며 그의 왕국에 의해 그것을 유지하시고 수호하신다. 펨블(Pemble)씨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자직은 이 위대한 계획 속에서 양자에게 봉사한다.

6.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복음의 교회 안에서 서로 행복한 연맹을 가질 것이며, 그들은 양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그들의 일치의 중심으로서 그의 보좌 위에 제사장이 될 것이다(15절).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혹자는 그것을 포로생활 뒤에 있는 바벨론에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이해하는데 이는 돌아와서 성전을 짓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에게 큰 실망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다수와, 유대교로 개종한 다른 나라들도 들어와서 성전 건축에 돕는 손을 빌려 주고, 많은 손들이 가벼운 일을 할 것을 약속하신다. 바사의 왕들도 성전 건축에 기여했고(스 6:8), 그 장식을 도왔다(스 7:19, 20). 그 후대에 헤롯 대왕과 이방인들이 성전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이것은 나아가서 장차 "순인 사람" 이 지을 "여호와의 성전" 을 가리켰다. "먼 데 사람" 인 이방인들이 그 건축을 도우리니, 그 이유는 그들 중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 건축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일꾼들이 될 사역자들을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 모두는 이 건물에 부착되는 돌들이 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할" 것이다(엡 2:20).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야 할 때 그는 먼 데 있는 자들로부터 데려올 것이며 그 건축에 그들을 기용할 것이다.

7. 이 뜻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 약속,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성전 건축에" 있어서 그들을 도와 주리라는 약속은 소위 "그들에게 표적을 주었다." 이에 의해 그들은 다른 약속들도 때가 되면 이루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제 매우 신속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왕의 칙령에 순복하여서, 그들의 원수요 고소자들이었던 사람들이 그들을 돕는 자가 되었고, 그 일의 진척을 위해 명령받은 일을 신속히 행하였고, 그에 의해 그 일이 계속되었고 끝마쳐졌기 때문이다(스 6:13, 14 참조).

이제, 그들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멀리로부터 감행된 이 놀라운 도움에 의해, 자기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 곧 스가랴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고, 그리하여 "순" 이신 그 사람에 관한 그의 말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 이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의무를 요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너의 성전 건축을 돕게 되리라). 너희는 만일 선한 열심을 스스로 품고 그 일을 하면 성전 건축에 있어서 이 외국인들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타인의 도움은, 우리의 나태에 대한 핑계가 되는 대신에, 우리의 근면에 대한 박차가 되어야 한다. "만일 네가 너의 의무를 양심적으로 행하면 저 모든 약속들의 유익과 평안을 향유하게 되리라." 그들은 선한 행실 위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하나님께서 긍휼의 방식으로 그에게 오시지만, 그들은 만일 그들이 그의 율법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계속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계시된 그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면한 순종이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주의와 고통없이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없고, 우리의 순종은 우리가 애쓰지 않고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Ⅲ. 이에 대한 기억을 위하여 행해진 준비를 보자. 이 의식 속에서 사용된 "면류관들" 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지지 않고, "여호와의 전에 기념하기 위해 보존되어야" 했다(14절). 그들이 교회 보고 안에 간직되든지,(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모든 사람이 보도록 성전의 창문 위에 걸어야 했다. 즉 in perpetuam rei memoriam - 즉 영속적인 기념을 위해,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전통적인 증거를 위하여 또한 그 약속의 확인에 사용되는 이 전형적인 처리를 위하여, 그 재료를 찾아낸 자들에게 전해져서(혹자는 그들의 이름이 면류관 위에 새겨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경건한 봉헌에 대한 공적 증거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집에 예물을 가져오도록 타인을 권면하는 뜻에서 보존되었다. 다양한 수단들이, 정해진 시간,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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