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 2:1-3)
앞 장에서 스바냐 예언자가 말했던 그 무서운 심판에 대한 묘사의 본의를 여기서 알게 된다. 시종일관 스바냐의 의도는 그 백성에게 절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을 놀라게 하여 우매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겁을 집어먹고 죄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회개, 곧 거족적인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니, 그것이 그 민족적 파멸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의 방도인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관찰해 보자.
Ⅰ. 국민적 집회를 수집하라고 했다(1절). "모일지어다" 라고 했다. 앞 장 끝에서는, 하나님이 "이 땅 모든 주민을 급히 멸절하리라" 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흩어지라. 빨리 피신처를 찾아 도망하라" 라는 말이 뒤따를 것이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서 최후 멸망을 하리라는 선언이 있었을 때, 그러한 충고가 있었다(마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는 산으로 도망하라" 고. 그러나 여기서는 사정이 다르다. 하나님은 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공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예고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자기의 분노를 돌이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환령은 "바라지 않았던 백성" (우리 성경에는 "수치를 모르는 백성" -역주)에게 내려졌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일 것이다.
1. "원치 않는" 백성 - 하나님을 원치도 않으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싫어하는 백성, 그의 은혜나 호의를 도무지 바라지 않는 백성, 거기에 냉담하고, 그래서 회개나 개심은 마음조차 없는 자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이라, 그러면 서로 격려하여 소망할 것이 있는지 알게 되리라." 때문에 하나님은 때로는 "자기를 찾거나 구하지 아니한 자에게" 나타나신다(사 65:1).2. 아니면 "바람직하지 못한" 백성, 결코 사랑스럽지 못한, 그들에게 무슨 친밀감을 가질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자들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쾌적한 땅, 기쁨의 땅" (단 11:41)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호감이 가지 않고, "바람직하지 못한 나라" 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한, 그런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로 모이라. 그리하면 혹시 이 파멸을 막아낼 어떤 방도가 있는지를 알게 되리라. 모이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라. 모여서 상의하고, 이 결정적 시기에 할 일을 서로 의논하면서, 각자가 신중히 생각하여 의견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할 일은 만인의 동의에 의해서 하는 일, 그래서 거족적인 행동이 되게 하라."
어떤 사람들은 이 문귀를 이렇게 읽는다. "너희 자신을 살피라. 그렇다. 바로 너희 자신을 심문하라. 너희 양심을 심사하고, 마음을 들여다 보라. 너희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을 이토록 너희에게 대해 화를 내게끔 만든 그 죄를 찾아내며,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 갈 길을 찾으라."
하나님이 우리와 다투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필 때라는 것을 명심하자.
Ⅱ. 최대한으로 진지하고도 급속히 하라는 논증이 나온다(2절). "모임을 진지하게 하라. 때가 너무 늦기 전에, 그 명령이 시행되기 전에, 그 날이 오기 전에 속히 할지니라." 이 어법은 아주 생동감이 있고 재촉성이 있다. 모든 죄인들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들 모두를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1. 즉 그들의 위험은 중하고, 그들의 모든 것이 사활의 위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온 마음을 경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을 치기 위해 붙은 그 불은 "여호와의 맹렬한 분노" 이다. 이제 그 불이 막 준비되었으니, 아무도 "견딜" 수 없는 "삼키는 불" 이요, 아무도 막아내거나 참을 수 없는 불이다. "너희에게 다가 올 날은 여호와의 날이니, 너희에게 온전히 보복할 날이요, 그 날은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했도다" (1:14). "그런데 너희가 그 날을 대비하지 않겠는가?"2. 그 위험이 매우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제 속히 자신을 살피라. 그 명령이 시행되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어 기회를 영영 잃고 말 것이다. 그 명령은 마치 해산의 날과 같아서 그날을, 그 무서운 날을 오게 하고 말 것이요, 겨와 같이 지나갈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너희를 급히 사로 잡아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날이 올지 모르는도다" (잠 27:1).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어떤 명령(선고)이 떨어질 것인가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허락된 시간" 에 큰 관심을 가지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다투고 계실 때는, 속히 그와 화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곧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닥쳐오기 전에, 돌아갈 수 없는 그 도중에 있을 때에 말이다. 이런 경우의 지연은 심히 위험스런 짓이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굳어져 있는 한 그런 일을 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떠나기 전에, 은혜의 날 곧 생명의 날이 끝나고, 우리의 영원한 처지가 저 큰 구렁의 건너편에서 결정되고 마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맺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해야 되는 것이다.
Ⅲ.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지시를 내린다. 겁을 집어 먹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진지하고 조용하게 각자의 의무에 임하는 일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3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법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 "찾으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온 국민에게 "모이라" 는 소환령이 내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 땅이 구원받으려면, 경건한 소수의 힘과 중재의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특별 권고가 내린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어떤 자들이 그런 권고를 받고 있는가. 그들은 "세상의" 곧 "그 땅의 겸손한 자들" 이다. "땅의 겸손한 자들" 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이다. 이것이 그들의 상징이다. 그들의 제복이다. 그들은 온유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춘다. 그들은 유순하고, 남에게 복종하며, 성미는 급하지 않으며, 화를 오래 내지 않는다. 그들은 "그 땅의 조용한 자들" 이다(시 35:20).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그의 온갖 계명과 섭리에 순종한다.이런 정신과 태도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이룬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 그의 제도를 준행하며, 그에 대한 의무를 의식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예와 이권을 위해서 정진한다.
2. 그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찾아야" 한다.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 주의 깊은 연구와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을 모두 뜻한다.(1) 그들은 "여호와를 찾아야" 한다. 즉 그의 사랑과 은총을 구하고, 그들의 모든 사정을 그에게 아뢰야 하며,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그에게 구하고, 그를 일찍부터 찾으며, 부지런히 찾으며, 계속 찾아야 한다.
(2) 그들은 "의를 찾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 가서 그가 너희에게 한 약속을 실행할 것을 구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행해야 할 많은 의무를 알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임하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의 은총이 너희 안에 임하기를 구하라. 목마르게 "구하고 찾으라."
(3) 그들은 "겸손을 구해야" 한다. 그들이 바로 "그 땅의 겸손한 자들" 로 지목될 만큼 겸손의 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선했던 자들도 더욱 선해지려고 노력해야 하며, 지금까지 훌륭한 덕을 지녀왔던 자들도 더 많은 덕을 구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라. 아니 어느 특정한 덕에 탁월한 자들은 계속 그 덕에 뛰어나도록 해야 한다. 원수들이 가장 공격을 심하게 할 것도 바로 이 점에 있어서이고, 친구들이 가장 크게 기대를 거는 것도 바로 그 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Si dixist, Sufficit, periisti - 즉 나는 단지 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라고 말하라. 그리하면 용서받으리라.
그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도, 겸손한 자들은 -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겸손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또 그런 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 겸손을 실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겸손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을 때에는,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사 자기들이 그 겸손의 미덕을 실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범사에 "겸손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날이 그러하듯이, 강한 자들도 그렇게 되리라."
Ⅳ. 이러한 지시를 따를 수 있도록 격려를 해 주고 있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1. "너희들, 곧 이 땅의 겸손한 자들 말이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그 땅에 올지라도, 너희는 특별한 보호를 입으리라. 진실로 너희 남은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으리라(렘 15:11). 너희 생명을 내가 노략물을 얻음같이 너희에게 주리라(렘 45:5). 그 날에 내가 너희를 구하리라(렘 39:17). 혹 너희는 숨김을 얻으리라. 누군가 숨김을 얻을 자 있다면, 바로 너희이니라."선한 사람이라도 현세적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만사가 만인에게 여일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자들은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들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보호를 받기에 가장 적합한 자들이다. 그들이 자연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혹시" 하는 약속이 있다(영문은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로 되어 있음-역주). 그리고 위안을 못받는 일이 없기 위해서 거룩한 경외심과 경계심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결코 하나님의 보호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기들이 정직을 굳게 간직했다면, 일반적인 재난이 닥치는 때에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서 피난처를 마련해 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거기서, 재난이 온 땅에 미치는 때에도 그들은 안전을 찾을 수 있으리라. 루터가 말했듯이, aut in coedo, aut sub coedo - 즉 하늘에서든 하늘 밑에서든 그들은 숨김을 얻을 것이로다.
2. 아니면 이런 뜻일 것이다. 즉 "비록 바라지도 않는 나라(우리 성경에는 "수치를 모르는 나라" -역주)이지만 이 나라의 너희들이 - 너희 이웃 나라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는 그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분노를 옮기려고 그 틈바구니에 서 있는 저 소수의 겸손한 자들 덕분으로 너희 나라는 보호를 받으리라."하나님의 진노는 큰 날에도 우리는 숨김을 얻으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 다 확신하자.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의무의 방에 숨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의 방에 숨겨 주신다는 것을 믿자(사 26:20). 우리가 방주를 준비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창 7:1).
블레셋인들의 형벌 (스바냐 2:4-7)
이 예언자는 여기에서 느브갓네살과 그의 용맹스런 갈대아인들에 의해 인접 나라들이 어떤 파멸을 당할 것인지를 예고한다. 다른 예언자들도 각각 자기들의 시대에 그런 예언을 했었다. 그런데 이런 경고를 내리는 목적은
1. 유대 백성을 경각시켜, 이제 닥쳐올 재앙의 쇄도가 얼마나 강하고 깊으며 대대적인가를 인식시키려 함이다. 그래서 이제 임박한 "여호와의 날" 을 더욱 두려워하게 하며, 따라서 저 대홍수 때처럼 그것을 대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2. 또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즉 비록 처참하긴 하지만, 그들의 사정이 유별난 것은 아니며(Solamen miseris socios habuisse doloris - 즉 파선당한 자들은 자기들의 재앙을 남들도 당한 것을 보면 위로를 찾을 수가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의 원수처럼 보였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저들의 친구이며 저들의 원수들의 원수이므로,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에 대해 보복하시리라는 생각을 통해서 위로하려 함이다.
이 대목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웃 민족이요, 원수였던 블레셋인들의 파국을 보게 된다. 그 나라에는 다섯 군주들이 있었다. 그 중 단지 4지방만 이름이 나와 있다 - "가사" 와 "아스글론," "아스돗" 과 "에그론" 이다. 다른 한 지방은 "가드" 인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혹자는 가드는 당시에 유다에 부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들은 모두 "해변의 거민들" 이다(5절). 그들의 땅이 지중해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렛 족속" 이 그들에게 연합되어 있는데, 그들은 이들과 경계를 같이하고 있었다(삼상 30:14). 그리고 예언된 대로 함께 망했다(겔 25:16).
블레셋 땅을 여기서는 "가나안" 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서 준 땅이 바로 이 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수 13:3). 당시까지도 그 땅을(블레셋 다섯 방백이)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불법적으로 경계했던 것이다(삿 3:3). 그것이 이제 다시 기억되어 그들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의 권리가 부당하게 오랫동안 유보되어 있더라도, 하나님은 결국 잘못을 시정하실 것이다.
Ⅰ. 여기에는 블레셋인들, 곧 찬탈자들이 소유지를 잃고 완전히 괴멸되리라는 예고가 나와 있다. 대충 말하면, 그들에게 한 재앙이 있으니(5절), 그 재앙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요, 거기에는 모든 불행이 함축되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을 치니라" - 아직 성취되지 않았던, 이전의 예언자들의 말씀이 때가 되면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사 14:31). 이제 이 예언자를 통해 그 말씀이 저들을 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치는 자들이야말로 진실로 저주스런 처지에 빠진 자들이다. 그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율을 어기는 자들은 그들을 치는 말씀을, 곧 "경고" 를 받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그들의 파멸이 되고 말 것이다.
1. 하나님이 친히 그 파멸의 저작자가 되실 것이다. "내가 너를 파멸하리라. 나는 내가 말한 것과 원한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 자로다."2. 그 파멸은 전반적인 것이 되리라. 도시와 시골, 어디나 그 파멸이 미치리라. 지금은 주민이 많은 성읍이지만, "가사가 사람들의 버림을 받을 것이다." 가사가 삭발될 것은 이미 예언된 바이다(렘 47:5). 알렉산더 대왕이 그 성읍을 밀어버렸다. 그래서 가사가 황폐해진 것을 볼 수 있다(행 8:26).
"아스글론은 황폐," 곧 황폐의 한 전형이 될 것이다. "아스돗은 백주에 쫓겨나리라." 뜨거운 뙤약볕에서도 그들을 가려 줄 은신처가 없을 것이다. 날씨가 몹시 부적합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니, 이것이 그들의 비참을 더해 줄 것이다.
"에그론" 도 이 비슷하게 "뿌리가 뽑히우리라." 그 깊이 박았던 뿌리가 뽑히리라. 블레셋 땅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거기에 "거민이 없게 되리라" (5절). 하나님은 "사람이 거처하게 하도록끔" 땅을 만드셨다(사 45:18).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공연히 땅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사람이 어긋난다면, 인간의 죄가 이 피조물을 허무에 종속시키고 만다.
3. 그것은 완전한 파멸이리라. 배와 상인들의 서식처였던 해변이 이제 버림을 받고, "목동의 움막" 과 "양떼의 우리" (6절)가 되리라. 그리고 그때가 블레셋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때보다 더 유용하게 그 땅이 이용되는 때일 것이다.Ⅱ. 또한 가나안 땅의 정당한 주인인 유다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는 예언이 나와 있다(7절). 하나님이 권고하시면, "포로됨에서 돌아 온" 남은 자들이 "아스글론의 집에" 안전하게 "눕게 될 것이요," "그들이 피곤하고 졸리는 저녁 때에" 눕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과 자기들의 양떼를 먹일 것이다." 비록 오랜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마침내는 하나님이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실 것이다.
여러 다른 민족의 형벌 (스바냐 2:8-11)
모압 땅과 암몬 땅은 모두 롯의 자손들의 땅이었다. 그들은 서로 연합했으며, 이스라엘 땅에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치는 예언이 여기에 나와 있다.
Ⅰ. 그들은 모두 같은 죄로 고발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비난하고 못살게 굴었으며, 저들의 재난을 기뻐한 것이 죄였다(8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했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는 동안은, 저들의 종교의 독특성을 들어 비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의 진노를 사게 되자, 다시 그것을 비방한 것이다. 언제나 이런 저런 이유로 비방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반적인 운명이다. 이처럼 그 늙은 독사는 독을 내뿜는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항상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들이 저들처럼 선하고 위대하며 행복한 듯이 생각하면서, "만군의 주의 백성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과대시한" 것이 바로 그들의 교만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교만한 자들의 비난으로 배부르게 된다(시 123:4). 그들은 "저들의 경계를 쳐서 크게 말했다" (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magna lo cuti sunt - 즉 그들이 위대한 것을 말했도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역주). 즉 자기들과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 말을 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을 중상했다. 또는 그들이 주장하는 번영을 비방하거나, 자랑하던 보호책을 조소했다. 그들은 "만군의 주의 백성을 거슬러서 크게," 곧 버림받은 백성인 양 말했다. "크게 헛됨으로 부풀어오는 말이 교회의 원수들의 본래적인 말씨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너희로 알게 해 주리라. 내가 들었노라. 그러므로 그것을 심판하리라" (유 15).
하나님이 만일 우리가 당하는 비방을 들으신다면, 우리가 왜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같이" 잠잠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안 셈이다(시 38:14, 15). 아니 하나님은 그런 비난의 소리를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 대한 비난인 양 간주하신다. 그들은 바로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의 백성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을 비난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모압과 암몬이 바로 그 같은 죄로 고발된 것이다(겔 25:3, 8).
Ⅱ. 그들은 모두 같은 운명을 당한다. 죄악에 동참한 자들은 또한 멸망에도 동참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 얼마나 엄중한 선고가 포고되는가를 보라(9절). 이 선고를 내릴 권위와 또 실생활 능력을 지니신 분은 인민의 절대 군주, 곧 "만군의 여호와" 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오, 저들의 명예를 질투하시듯 보호하는 자이시다. 그는 그것을 말씀하셨다. 아니 "나의 말씀을 가리켜 내가 맹세하노라" 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시다. 여기에 내려진 선고는 이러하다.
1. 모압족과 암몬족이 완전히 멸망하리라.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리라" 고 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모압과 암몬 부근의 도성으로서, 사해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제 모압과 암몬이 똑같은 하늘의 불로서는 아니더라도, 그와 거의 비슷하게 황폐케 되리라. 즉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며, 오랜 역사를 누리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또 땅은 곡식 대신에 "잡초" 를 낼 것이다. 그 땅을 적셔 주었던 좋은 샘물 대신에 "소금 구덩이" 가 생길 것이다.2.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혹독하게 대하며, 그들의 재물을 "노획" 하며, 합법적인 전쟁을 통하여 그 땅을 "차지" 하게 되리라. 교만한 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해서 자기들이 이전에 거만하게 유린하던 자들의 발굽 아래서 신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이 교만했으므로 이런 일을 당하리라."
Ⅲ. 다른 나라들도 이와 비슷하게 낮아짐으로써, 여호와만 높아지게 될 것이다(11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공포를 주었던 모압과 암몬에게 특별히 "여호와가 두렵게 되리라." 그 이유는 이렇다.
1. 이방신들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신들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고, 그 경배자들은 그 신들을 찬미했고 또 자랑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세상의 모든 신들을 쇠폐케 하리라." 그들의 오랜 요새에서 쫓아낼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우상이 자기들이 드리는 예물로 즐거워하고, "그 드린 희생 제물을 먹었다" 고 생각한 즐거운 속임수를 품고 있었다(신 32:38). Onnia com esta Belo - 즉 벨이 모든 것을 먹었다.그러나 여기에 약속되어 있는 것을 보면, 기독교 종교가 세상에 수립되는 날에는, 사람들이 벙어리 우상들과 그 제단을 버리고, 다시는 거기에 제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신들은 쇠진, 곧 "쇠약" (문자적 의미이다)해지리니, 그들의 제사장들도 그리되리라. 이것은 우상들의 공허성을 암시해 준다. 그것을 경배하는 자들의 능력 속에 그것들을 쇠진케 하는 것이 있다. 반면에 참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굶주렸다면, 네게 말하지 않으리라."
또한 이것은 신들에 대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승리를 암시해 준다. "이제 그가 모든 신들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라."
2. 이방 나라들이 전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땅에 떨어지면,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 처소에서" 영원히 살아계신 자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그것이 영원한 복음의 명령이다. 계 14:7).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으리라.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든 기도하게 하니라." 그래서 이스라엘과 그 민족에게 귀속한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의 모든 섬들(해변)" 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리라.
구스와 앗수르에 내린 경고 (스바냐 2:12-15)
느부갓네살이 정복하려 할 즈음에, 이 잔도 "사방으로 돌아 가려" 한다. 이스라엘의 인접국 뿐만 아니라 아무리 멀리 있는 나라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에게 끼친 피해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에티오피아(구스)인들과 앗수르인들이 지목되고 있다.
1. 에티오피아 또는 아라비아인들은 종종 이스라엘에게 겁을 주었으므로(아사의 시대처럼 대하 14:9), 이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내 칼에 살육되리라" (12절). 느부갓네살이 바로 하나님의 칼이었다. 즉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원수들을 전복시키고 벌 주시는 도구였다(시 17:4).2.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그 다음 차례이니, 같은 운명을 감당하리라. 하나님의 칼노릇을 하는 "그가 손을 북방으로 펴고, 앗수르를 멸하고," 정복할 것이다. 앗수르는 그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칠 때 쓰는 막대기였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이 앗수르를 치는 하나님의 채찍노릇을 하고 있다(사 10:5). 그는 최근 아주 자세히 나훔 예언자가 예언해 주었던 대로, "니느웨를 황폐케 하니라." 이에서 다음을 주목하자.
(1) 이전의 니느웨의 처지는 얼마나 찬란했던가! "이는 기쁜 도성이라. 염려없이 거하도다!" (5절) 니느웨는 너무나도 강해서 어떤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런 염려없이, 위험스런 생각없이 지냈던 것이다. 또 그 도성은 너무나도 부유해서 자기들이 모든 재화를 다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산해진미와 열락이 가득한 기쁨의 도성이 되었다. 또한 많은 주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적이었다. "나 외에는 다른 것이 없도다. 세계 어느 도성도 나와 필적할 수 없도다" 고 자부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장 방심하고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사, 놀라게 해 주시며, 그 즐거움을 조롱거리로 삼으실 수 있다.
(2) 이제 니느웨는 완전히 파멸될 것이다. 그것은 "황폐" 케 되리라(13절). 그렇게 찬란하던 도성이 파멸의 무더기가 되어,
[1] "들짐승" 의 서식처가 되리라. "열방의 짐승들," 온갖 야수들이 그 황폐한 곳을 거처로 삼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호화로운 주택이나 값진 가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오래 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2] 과객들의 조소거리가 된다. 니느웨의 위광을 보고 기쁨을 얻으려, 먼 곳에서 온 자들이 이제 그 도성의 비참상을 보고 놀라게 되리라(15절). "그리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조롱할 것이다. "교만하던 니느웨의 종국이 이것이로다." 그들은 니느웨의 멸망을 보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들의 파멸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조소하며 손을 흔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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