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선지의 불만 (요나 4:1-4)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요나는 부당하게도 하나님과 논쟁을 벌인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문제 삼았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살려 주셨는데 요나는 이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요나는 니느웨인들에게 진노의 메시지만 전했고 그들의 회개를 방조하거나 격려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어긋난다. 그들은 회개했고 자비를 얻었던 것이다.
1. 요나는 그들이 자비를 얻은 데 대해 불평했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였다.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그는 열화같이 노하였다.(1) 그가 심히 싫어하고 노할 정도로 사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심령을 다스리지 못했다. 따라서 성이 무너지듯 그는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었다.
(2) 그가 하나님의 행위를 불쾌히 여기고 노여워할 정도로 하나님께 대해 존중심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을 때 다윗이 분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삼하 6:8). 우리는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거워해야 하며 비록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
(3) 그가 니느웨인들의 회개와 신적 은총에로의 영입을 싫어하며 노할 정도로 인간들에 대해 애착심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범한 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구주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즐겨 환대하신다는 이유로 불평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이 선하다고 하여 우리 눈이 악한가? 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목숨을 건진데 대해 그토록 못마땅해 하는가? 우리는 그토록 얼토당토 않고 그토록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올바른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이치나 도리에 전혀 상관이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요나를 격동시켰는지 추측할 수 있다. 흔히 열렬한 마음은 고자세가 되기 쉽다. 하나님과든 사람과든 분쟁은 교만심에서만 야기된다. 요나가 고수했던 것은 명예심이었고, 그것이 그를 화나게 했던 것이다.
[1] 그는 자기 나라의 명예에 대해서는 질투심이 대단했다.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은 회개하지 않고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 완고성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이들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총은 유다 민족에게 흉조가 되었던 것이다. 즉 그것은(결국 그렇게 되었듯이) 유대인이 배척받고 교회에서 추방되며 이방인이 유대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듯 한 조짐으로 보였던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게 된다는 암시를 받았을 때 깜짝 놀라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행 11:8 이하)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요나의 이런 행위도 놀랄 것은 못된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총애받는 민족이 된다는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간주하였다. 이 점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다. 그의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 10:2).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행위를 불쾌히 여기는 자가 적지 않다는 데 유의하자.
[2] 요나는 자기 자신의 명예에 대해 질투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니느웨가 만일 40일 이내에 멸망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선지자로 간주되며 그런 불명예스런 낙인이 찍힐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점을 우려하거나 불만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멸망의 경고 속에는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회개해야 하며 회개하면 파멸이 방지된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말보다 더 훌륭한 것이기에 그에게 속았다고 불평할 자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는 그들의 구원에 이바지하였다는 이유로 수치를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가운데에서 신망과 명예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들은(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보이듯) 존재하지도 않고 또 일어날 가능성도 극히 희박한 재앙을 제 혼자서 상상하기 쉽다. 우리의 조바심은 놀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상력 때문에 일어난다. 그런 상상력이란 폭군의 세력 하에 있는 자들은 완전한 노예로서 가련하다고 할 만하다.
2. 그는 그 일에 대해 하나님과 언쟁하였다. 그는 자기 마음이 속에서 뜨거울 때에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2, 3절). 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물고기 뱃속에서 한 기도와 달리 매우 어색한 기도이다. 고난은 우리에게 겸손히 기도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요나는 이것을 망각하였다. 그는 마음에 앙앙불락한채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을 때면 늘 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부패한 마음이 그의 은혜를 짓누르며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간구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그 자비로 다른 사람이 얻은 은택에 대해 불평을 하는 있는 것이다.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다.
(1) 그는 새삼스럽게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간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 줄행랑을 쳤고 앞에서 충분한 이유를 지닌 채 자신을 정죄하였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말한다. "내가 만일 니느웨로 가서 선포하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고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의 말씀은 비난을 받고 시비가 분명치 못하다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내가 예견하지 않았나이까?" 선교가 성공할까봐 두려워하다니 요나는 참으로 이상한 부류의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 봐야 아무 소득이 없다는 데서 실망을 느끼고 일을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을 받는데 반해 요나는 자기 선포로써 좋은 결과가 나올까봐 선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꼭 같은 부패한 견해를 고집하고 있다. 물고기 뱃속도 그의 부패한 생각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고국에 있을 때 했던 말이었지만 그것은 악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요나는 여기서 그 말을 고수하며 다른 선지자와는 아주 달리 자기가 예언한 재앙의 날을 바라며 그런 날이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자기들이 어떤 종류의 영에 속하는지 알지 못 했다. 즉 제자들은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 성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눅 9:55). 그러나 요나는 자기를 영접한 성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멸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요나는 자기가 우려하던 일이 목전에서 실현되자 불평하기 시작했고 자기의 불평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쓴 뿌리가 마음에 일단 붙으면 그것을 뽑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예상하였는가?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관대하고 쉽사리 기분이 좋아지시는 하나님이셔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 말씀은 전부가 다 옳은 말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선포와 모든 시대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기쁨과 찬송의 재목으로 삼은 것을 요나가 하나님께 대한 비난의 재료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도 요나는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신적 속성이기라도 한 듯이 불평한다. "주여, 나는 당신이 굳은 사람인줄 알았나이다" (마 25:24)하고 말한 종은 거짓된 말을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불평의 소재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나는 비록 참된 것을 말한다고 해도 비난의 형식으로 발언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아주 불합리하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덕을 입고 있으며 그의 사유하시는 자비만 아니면 전부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인자와 사유하시는 자비를 트집잡아 언쟁할 마음이 생기는 자들은 참으로 분쟁과 반대의 영을 가진 자들이다. 이것은 마땅히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어야 할 것을 사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로 만드는 행위이다.
(2) 격정을 못이긴 요나는 죽음을 소원하고 있다(3절). 이것은 까닭없는 격정에 의한 이상한 표현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니느웨를 살리셔야 한다면 나로 주의 말씀과 내말의 반증이 드러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인에게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로 죽게 하소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충분치 못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는 충족시키지 못한다거나 니느웨인들이 은총 속으로 영입되기 때문에 유대인은 자비로부터 더욱 멀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이다. 엘리야 선지는 자기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였고 그것은 그의 나약함을 증명했었다(왕상 19:4). 그러나 요나의 수고는 좋은 결과를 얻었고 한 도시를 파멸에서 구출하였다. 그럼에도 요나는 마치 자기가 많은 유익한 일을 행해서 더 이상 살기를 꺼려하는 사람처럼 죽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지 않는다(사 53:11 참조).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얼마나 비꼬인 정신이 뒤섞여 있는가! 요나는 자기가 물고기 뱃속에서 구출되었을 때 생명을 매우 귀중한 자비라고 생각했고 자기 생명을 썩음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2:6). 그의 생명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크나 큰 축복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명은 그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면서 삶에서 편안히 놓여나게 해 주시도록 간청한다. 이와 같은 말은 은혜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그 한 예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여기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사모하였고 그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빌 1:23).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요나의 말은 어리석음과 격정과 강한 부패의 언어가 되고 있다.
[1] 게다가, 더욱 더 나쁜 것은 요나가 이제 한창 쓸모 있는 시기에 있으며 따라서 살기에 적합한 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업을 기적으로 인정하시고 형통케 해 주셨던 인물이었다. 그는 니느웨의 전향으로 더 큰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다. 즉 요나는 전 앗수르 제국을 개종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토록 선한 목적을 이룰 가망이 있는 데서 삶을 포기한 채 죽음을 바란다는 것은 여간 모순된 행동이 아니다.
[2] 요나는 너무도 냉정을 잃고 있어서 죽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실상 하나님과 언쟁을 벌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감히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생각을 하는가? 이것은 세상 밖으로 나갈 자의 심적 자세로 온당치 못하였다. 그러나 흔히 격한 감정에서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죽음을 바랄 이유가 조금도 없다. 우리의 책무는 생명의 사업을 행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의해 우리 생명을 가져가시도록 그에게 맡기는 일이다.
Ⅱ.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런 격분에 대해 지당하신 책망을 내리셨다(4절). 여호와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고 말씀하셨다. 혹자는 "성을 내는 것이 네게 합당하냐?" 고 읽는다. "무엇이라고! 네가 너의 선한 행위를 후회한단 말이냐?"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런 불경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그를 배척하셔서 무방하였고 죽기가 소원이라고 했을 때 그의 말대로 그를 쳐서 생명을 취해 가셔야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황감하게도 그를 설득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려 하시며 그의 기분을 호전시키시려고 하신다. 이는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큰 아들을 타이를 때와 마찬가지이다. 탕자의 형은 본문의 요나와 같이 자기 아버지가 동생의 죄를 용서하고 기쁘게 받아 들였을 때 불평을 했고, 그 아버지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고, 그를 온화하게 타일렀던 것이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인간에게 얼마나 온화하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하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족한자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고(갈 6:1) 유순한 대답으로 분노를 쉬게 하도록(잠 15:1)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과 그의 양심에 친히 호소하신다. "너의 성내는 것이 가하냐? 네 분노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너는 잘 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행하는 것이 합당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고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을 합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나는 이 행위를, 이 발언을 회개함으로써 다시 취소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파멸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1. "내가 성내는 것은 합당한가?"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이런 점검으로써 분노를 소화해야 한다. "내가 그토록 빨리,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래 화를 내는 것은 합당한가? 내가 그토록 격정에 휘말려서 성난 김에 남한테 그런 욕설을 퍼붓는 것이 합당한가? 내가 이런 고집센 분노가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가한가?"2. "내가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성내는 것이 합당한가?" 그것은 바로 요나의 죄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토록 위하는 일에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합당한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대시키는 것에 우리가 성내는 것은 옳은 일인가? 천사들이 기뻐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 풍성한 감사가 돌아가게 될 일에 우리가 성내는 것은 합당한가? 우리 자신이 필요로 하고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은혜를 우리가 노여워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만일 회개의 여지가 없고 회개해도 용서받은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기쁨이 되는 죄인의 회심을 우리 기쁨으로 삼고 우리의 슬픔으로 삼지 말자.
박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충간 (요나 4:5-11)
요나는 여기서도 자신의 불만족을 고집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는 분쟁이든 사람이 벌이는 다툼이든 그 시작은 물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으나 점차 그 틈이 더욱 더 넓어져 격정이 머리 끝까지 치밀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처음부터 침묵시키고 억압해야 한다.
Ⅰ. 우리는 여기서 니느웨의 운명에 대해 요나가 심드렁한 기대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언을 신용하고 그런 소식을 전해 준 사자를 쾌히 대접하려 했으며 존경을 표시하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요나를 가장 좋은 집과 가장 훌륭한 식탁에 모시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기분이 언짢아서 그들의 친절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고 평상시의 예의로써 대하지도 않았다. 누구나 이로 인해 그들이 요나와 그의 말씀에 대해서 편견을 품을 우려조차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에게 신임이 의탁되었는 데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될 때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후 7:7). 요나는 성에서 나가 성 동편에 혼자 앉으며 침묵을 지키는 데 이는 그가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을 보기 때문이다(5절). 아마 그는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성의 파멸시에 자기도 죽을까봐 성 밖으로 나갔다고 말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소돔이 어떻게 되는지 보기 위해 올라갔듯이 (창 19:27) 요나도 그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나갔다. 이제 40일이란 시효는 거의 다 차가고 있거나 아니면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또는 니느웨가 무너지진 않더라도 모종의 다른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되셔야만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도 남음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결과를 기다리는 그의 불안은 컸다. 그는 집 안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이 자기 머리 위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큰 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비록 풍상노숙일 망정 거기 앉아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의 소유자들은 흔히 스스로 불편한 것을 만들려고 애쓰며 굳이 불평하려고 결심한 자들은 계속 불평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잊지 말자.
Ⅱ.이와 같이 요나가 어리석게도 자신을 괴롭히며 자신의 고난을 더욱 더 많이 추가시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그의 피난소와 휴식처를 마련하셨다(6절). 요나는 자기 초막에 앉아서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다 그를 괴롭혔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그가 좋아서 하는 짓이며 그 집은 그가 손수 지은 것이니 그로 그 집을 최대한 선용하게 놔두라" 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그 자식에게 하듯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그가 자의로 만들어 낸 불편을 덜어 주셨다.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셨다. 박은 잎사귀가 넓고 많은 식물이다. 박넝쿨이 갑자기 자라서 요나의 초막을 뒤덮었고 그래서 요나는 더위와 추위를 많이 피할 수 있었다. 그의 괴로움을 면케 해 준 것은 박넝쿨의 그늘이었다. 그는 신체의 원기를 북돋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마음의 불안을 더 잘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왕왕 마음의 불안은 외부적 곤란과 괴로움에서 야기되며 증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얼마나 자애로우신지 주목하자. 그는 비록 그들이 어리석고 패역하더라도 인자하시며 그들의 잘못을 심하게 주목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앞서도 요나를 바닷물의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는데 여기서는 공기의 해로부터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큰 박넝쿨을 준비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재해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보호자시며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충당시키시기 위해서는 그들을 곧 예비할 수도 있으시며, 자연의 경로로는 그 자람이 느리고 점차적이지만 자신의 소용에 따라서는 그 성장을 급작스럽게 하실 수도 있다. 누구든지 박넝쿨은 기껏해봐야 가느다란 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1. 박넝쿨은 그 때 실제로 요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자체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도 시기만 적절하면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축복이 될 수 있다. 적소의 박넝쿨은 백향목보다 우리에게 더 소용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작은 미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큰 재앙이 될 수 있으며(파리나 이가 바로에게 그랬듯이) 큰 위안이 될 수도 있다(박넝쿨이 요나에게 그랬다).2. 그는 상상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만족히 여겼다. 그는 그것을 심히 기뻐하고 자랑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감정이 격한 사람들은 조금만 난관에 봉착해도 좌절에 빠지기 쉽듯이 조금만 즐거운 일을 당해도 들뜨기 쉽다는 데 주목하자. 때때로 조그마한 장난감이 골난 어린아이를 달래는 데 유용하듯, 요나에게 대해 박넝쿨도 그랬다. 그러나 지혜와 은혜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해서도 울지 않는 자같이 울며 안락한 중에서는 기뻐하지 않는 자같이 기뻐하라고 가르쳐준다(고전 7:30). 우리는 피조물의 위안을 즐기며 감사해야 마땅하나 그들을 인하여 심히 기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심히 기뻐해야 할 것은 하나님뿐이다(시 43:4).
Ⅲ. 하나님께서 그를 상쾌하게 하시려고 준비하셨던 이 박넝쿨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고 그에게는 괴로움이 다시 돌아온다(7, 8절). 요나를 위해 위안물을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안이 되었던 바로 그것을 통해 그의 고난도 준비하셨다. 그 고난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와 정하심에 따라 왔다.
1. 하나님은 박넝쿨을 없애기 위해 벌레를 준비하셨다. 주신 분이 가져 가셨고 요나는 이 두 가지 일로 그의 이름을 송축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박넝쿨의 위안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한 찬미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의 혜택을 그에게서 박탈하셨고 그것은 지당하신 처사였다. 우리의 모든 위안물은 어떠하며 그들에게 대한 우리의 기대는 어떠한지 곰곰이 살펴보자. 피조물의 위안은 전부가 다 이 박넝쿨과 같아서 뿌리를 흙 속에 파묻고 있으며 만세 반석과 비교하면 가늘고 여린 방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들어 버리는 것이며 사용하노라면 못쓰게 되어서 우리는 그 위안을 곧 빼앗기고 만다. 그 박넝쿨은 솟아 오른 다음 날 시들고 말았다. 우리의 위안물은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곧 쇠하여진다(욥 14:2). 우리가 그들로 인해 극히 기뻐하며 그들에게서 극히 많을 것을 기대 할 때는 실망을 당하게 된다. 아주 작은 것이 그것들을 시들게 만든다. 뿌리에 있는 한 마리의 작은 벌레 큰 박넝쿨을 멸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식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일을 행한다. 우리의 박넝쿨이 시들지만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가 심히 기뻐해 오던 것이 맨 먼저 마를 것이다. 가장 소중하던 것이 가장 안전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박넝쿨을 따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벌레를 보내셔서 그것을 씹게 하셨다. 그 박넝쿨은 여전히 쑥쑥 자랐지만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마 우리의 위안물도 여전히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피조물은 계속해서 있지만 그 위안은 사라져 버린다. 그 나머지 또는 그것의 앙상한 찌꺼기는 그것을 심히 기뻐한 우리의 미련함을 꾸짖을 뿐이다.2.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박넝쿨의 혜택을 절감하게 하시기 위해 동풍을 준비하셨다(8절). 그것은 뜨거운 동풍이었다. 그 바람은 떠오르는 태양의 열기를 요나의 머리 위로 날려 보냈다. 이 바람은 열을 식혀 주는 부채가 아니라 열을 한층 더 가열시키는 풀무 같았다. 이렇게 해서 가련한 요나는 태양과 열풍에 노출된 채 있었다.
Ⅳ. 이로 인해 요나는 더욱 초조해졌다(8절). 그는 혼곤하여 죽기를 구했다. "박넝쿨이 죽는다면 나도 죽여 주소서. 나로 박넝쿨과 함께 죽게 하소서." 자기 생명이 잡초의 생명에 속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다. 불평하기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꼭 불평할 일이 남아 있으며 그들의 어리석음이 밝히 드러나고 징계되며 가능하다면 치료된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는 데 주목하자. 한 쪽 극단에 빠지는 격정은 흔히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도 관찰하자. 요나는 박넝쿨이 무성하자 기쁨이 넘쳤지만 그 박넝쿨이 시들자 슬픔의 고통에 휩싸였던 것이다. 과도한 애착은 과도한 고난의 기초를 놓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서 그것을 너무 기뻐하면 그것을 잃을 때는 너무 슬퍼하게 되기 쉽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Ⅴ.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요나를 책망하신다. "내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9절) 박넝쿨이 시드는 것은 우리가 화내어 마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자. 괴롭게 하는 섭리가 우리의 친척이나 소유물이나 향락물을 빼앗아 갈 때 우리는 그것을 참아야 하며 하나님께 화를 내서는 안 되며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교적 작은 손실,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박넝쿨이요 시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시든다는 것밖에 달리 기대할 게 없었다. 시든 박넝쿨에 대해 성을 내보았자, 그것이 회복될 리는 만무할 것이다. 우리들 자신도 잠시 후면 그처럼 시들 것이다. 만일 하나의 박넝쿨이 시든다면 또 다른 박넝쿨이 솟아나서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불만을 침묵시키는 것은 비록 우리의 박넝쿨이 시들어 없어지더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라지지 않으시며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박넝쿨에 대해 성내는 것은 매우 그릇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듯(시 131:2) 잠잠해야 한다.
Ⅵ. 요나는 자신의 격노와 불만은 정당화시킨다(9절). 그는 "내가 성을 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라고 말했다. 잘못 말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만약 황급히 한 말이라면, 만일 잘못 말한 것을 신속히 취소하고 철회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그릇된 말을 해 놓고 여전히 그 말을 고수하려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악하다. 요나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를 친히 책망하셨지만 그의 양심에 호소하심으로써 요나가 자기 자신을 책망할 것을 기대하셨다. 자제하지 못하는 격정은 야만적인 것이며 우는 사자와 배회하는 곰 같은 이들 정욕을 쇠사슬로 묶어 두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 되며 우리는 또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죄와 사망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두 가지 악이지만 요나는 격분에 못이겨 이 두 가지를 소홀히 여긴다.
1. 요나는 하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들으면서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합당할지라도 우길 만큼 하나님께 대한 존중심을 거의 품고 있지 않았다. 격정은 때때로 양심을 휘어잡으며 호소받을 때에는 양심에서 거짓된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를 한다. 여기의 요나가 그러했다.2. 요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던지려고 하며 죽기까지 분노에 탐닉하고 신경질로 자신을 죽여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련한 자를 죽이는 분노와 어리석은 자를 죽이는 시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읽었다(욥 5:2). 그런데 자신의 격정으로 제 목을 찌르고 투정하다가 기진맥진하여 다른 약점에 빠지게 되며 부당한 노여움의 열병에 걸리는 자는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Ⅶ.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선용하사 요나로 하여금 각성을 얻게 하신다. 그가 니느웨의 구원에 불평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의 입으로 그를 판단하려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이 요나를 사로잡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주체할 수 없던 분노를 진정하여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갔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어떻게 쟁론하시는지 살펴보자(9, 10절). "너는 박넝쿨을 아꼈고 불쌍히 여겼다. 너는 할 수만 있으면 그 박넝쿨을 살리려고 했고, '이 박넝쿨이 이렇게 시들다니 얼마나 불쌍한가'하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 네가 박넝쿨을 불쌍히 여기는 만큼 내가 니느웨를 측은히 여기며, 네가 벌레로 하여금 박넝쿨을 씹지 못하도록 금하고 싶었던 만큼 나도 니느웨를 폐허로 만들 지진을 금하지 않겠느냐?"다음 사실을 참작하자.
(1) "네가 아까와한 박넝쿨은 하나지만 내가 아낀 니느웨 거민은 무수하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며 유아의 수로도 나타나듯 매우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유아를 두 살 이하의 아이로 가정하여 니느웨에는 그런 유아가 십 이만 여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아직 갓난 아이들이라 좌우를 분별할 정도의 지각력도 없다. 특히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를 주목하시는 이유는 유아기는 흔히 무죄한 시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니느웨에는 아직 실제로 죄를 짓지 않은 자기들이 그토록 많았고 따라서 그들은 공동의 범죄에 이바지하지도 않았는데 만일 니느웨가 무너진다면 그 아이들은 전부 다 공동의 재난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들을 주목하고도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라?" 하나님께서는 자애롭게도 어린아이들을 중시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기꺼이 구조하려 하신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아이들 때문에 전 도성을 살려 주신다. 이것은 믿음과 기도로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부모들에게 격려가 된다. 비록 자녀가 하나님께 아무런 봉사도 할 능력이 없지만 (그들은 좌우 선악, 그리고 죄와 의무를 분별치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고 구원을 획득할 능력은 있다. 위대하신 구세주께서는 당신께로 데려온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히 인자하셔서 아이들을 안고 그 머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막 10:16).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많은 가축들도 주목하시고, 아끼셨다. 요나가 박넝쿨을 불쌍히 여기고 아까와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짐승은 식물보다 그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이다.
(2) 요나가 관심을 기울인 박넝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박넝쿨을 위해 수고도 하지 않았고 자라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니느웨 거민들은 모두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이었다. 그는 그들의 창조주요 그 생명의 보호자며 그들을 심고 자라게 하셨다. 그는 그들을 지으셨고 그들은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고 아낄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지으신 것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때문이다(욥 10:3). 또 욥은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시고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주는 이제 나를 멸하려 하시며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 10:8, 9)하고 하나님께 말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과 토론하신다.
(3) 요나가 아까와한 박넝쿨은 갑자기 자랐고 따라서 가치도 덜하다. 그것은 하룻밤에 났다. 그것은 밤의 아들이었다(원의는 그렇다). 그러나 니느웨는 오래된 도시이다. 오랜 세월 동안 풍상을 겪으며서 있던 도시이기에 쉽사리 포기될 수 없다. "내가 아낀 주민들은 박넝쿨처럼 순식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년 간 자라난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내 섭리의 보호를 받고 내 일꾼의 보살핌 아래 있던 자들을 내가 아끼지 않겠는가?"
(4) 요나가 아까와한 박넝쿨은 하룻 밤에 망하였다. 그것은 시들었고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끼신 니느웨의 영혼들은 그렇게 단명하지 않은 귀중한 생명들이다. 그들은 썩어질 것이 아니기에 정성스럽게 그리고 자상하게 보살펴야 할 생명이다. 한 사람의 영혼은 온 세상보다 더 귀중하며,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한 영혼은 많은 박넝쿨보다 더 귀중한 것이 틀림없고 많은 참새보다 귀한 게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그렇게 간주하신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하등 동물보다 인간을 더 소중히 관심해야 하며 이 세상의 재물이나 향락물보다 우리들 자신이나 남의 귀중한 영혼에 관심을 더 크게 가져야 한다.
2.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기 백성이 죄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시더라도 그들이 죄 중에 가만히 있는 것을 허용하시지는 않으시고 효과적인 방도를 취하셔서 그들에게 그 잘못을 보여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제 정신을 차리게 하신다. 우리는 요나가 이 일 후에 니느웨의 구원을 수긍하게 되어 이 왕에 성을 냈던 만큼 이제는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하나님께서는 배역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에게나 다 의로운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에게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법도 의롭다고 하실 것이며 반역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사용하시는 공의의 방법도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 생각과 길보다 훨씬 높아서 하늘과 땅 차이가 있으므로) 그의 자비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요나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쓰시는지 주목하자. 요나는 "내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고 말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비함이 합당하다" 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증명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하는 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심으로 기꺼이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자비의 기념물이 되는 자들을 기뻐하사 그 눈이 악한 자들에게 자기 눈이 선하시다는 증거로 내세우신다. 그런 불평자들은 아무리 그들 자신의 마음이 원리가 편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리 독점하고 싶더라도 만유의 유일하신 여호와께서는 무릇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신 주시라는 교훈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이루는 자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서도 아니, 세계만방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신다. 회개하면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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