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요나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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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요나의 새로운 사명 (요나 3:1-4)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과 요나 간의 화해에 대한 증거를 또 보게 된다. 그 양자간의 쟁변은 파도처럼 드세었지만 이제는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

Ⅰ. 요나는 새로운 사명을 위촉받고 거기에 기꺼이 순종 한다.

1.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자기 사업에 등용하신다는 사실로 그가 요나와 완전히 화해를 하셨다는 것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이전의 불복종을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증거였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에게 직임을 부여하게 되면 사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마땅히 간주할 수 있듯이 요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1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요나는 이전의 불순종을 진심으로 회개했는지의 여부를 시험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기한 형벌을 받고 진기한 구원을 받았다. 이 두 가지에는 모종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이 선한 의도에 부응할 수 있는지 증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일과 의무를 저버렸고 그 때문에 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안에서 죽음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복종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석방하셨고 그에게 그의 목숨을 주셨으며 그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 것은 그의 선한 태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뜻을 좇을 것인지 시험대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바다에 던짐을 당하고 거기서 다시 올라온 뒤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에게 "요나야, 너는 이제 니느웨로 가겠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반드시 이기실 것이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실 것이다. 그는 불순종하는 완강한 자식도 결국 당신의 발 앞에 데려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내리시며 우리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실 때 우리는 "이제는 너희가 전에 게을리 했던 의무로 돌아가거라. 이들 섭리는 너희를 그 의무로 부르고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전신불구자를 고치신 뒤 하신 말씀과 다름없다(요 5:14).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제 가서 더 심한 것,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누워 있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난을 내리시고 또 그 고난에서 그들을 구출하실 때에는 인간의 태도를 주시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그 잘못, 특히 징계받은 과오를 고치려 하는지 않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나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징계나 구원은 다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2) 요나는 신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요나에게 불신감을 표시하는 말씀을 하셔도 무방했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거나 표리부동하게 대하는 사람을 당장 엄격한 법에 고소하거나 망치려 들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를 신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의 영도 요나가 항거하고 반역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로써 그에게서 떠나야 마땅했다. 그가 비록 목숨을 건졌지만 다시 선지자의 신분으로 봉사할 만한 능력과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할 것이지만 보라! 여호와의 말씀은 다시 그에게 임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잊어버리시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자에게는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주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탕자되고 불순종의 종이었던 자들을 다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을 이전의 지위로 회복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신다는 것은 우리와 화목하신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이로써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호의를 품고 계시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그의 선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부요함을 찬미하고 주 예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시인할 이유를 갖는다. 이는 주 예수께서 인간을 위해 심지어 패역한 자를 위해 선물을 받으사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중에 거하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 가운데서 그들을 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시 68:18).

2. 이로써 요나가 하나님과 잘 화해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제 그는 전과 달리 하늘의 이상에 불순종하지 않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지 않았다. 그는 명령의 경청을 회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행길이 너무 멀다거나 비위에 맞지 않는 심부름이라거나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하여 반대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심판을 경고해도 만일 그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규탄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거나 본국의 불회개가 책망을 받게 될 것을 꺼려하여 그 명령에 불복종하지도 않았다. 그는 불평이나 논란이 없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갔다(3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회개의 본질. 회개는 우리의 언행심사를 바꾸는 것이며 이탈했던 우리의 일과 의무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회개는 우리가 행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선을 다시 행하는 것이다.

(2) 고난의 혜택. 고난은 버리고 떠나갔던 자들을 제 자리로 환원시켜준다. 요나는 다윗과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러므로 고난당한 것이 비록 내게 두렵고 고통스러우며 당장은 기쁘지 않고 슬펐을지라도 그것은 내게 유익하였으며 참으로 유익이었나이다" (시 119:67, 71 참조).

(3) 고난과 함께 역사하는 신적 은혜의 능력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난 그 자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기보다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서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수 있으시며 (눅 1:17), 그 목이 쇠심줄 같던 자들을 그의 권능의 날에는 기꺼이 그의 멍에 아래로 들어오게 하신다.

(4)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를 살펴 보라. 그들은 모든 면에서 그 말씀에 순응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에 충실히, 즐거이 복종해야 한다. 요나는 일어났다. 그는 게으름을 피며 가만히 앉아 있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는 곧장 니느웨로 갔다. 느니웨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이전에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하며 그가 부르실 때 와야 하고 그가 명하시는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에게 주어진 명령이나 사명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살펴보자.

1. 요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니느웨와의 전쟁을 포고하기 위해 파견된 전령이었다(2절). "일어나 저 큰 성읍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하라." 우리에게 선포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듣고 경고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선포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믿음을 거기에 혼합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를 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파손되었다. 니느웨는 당시 이방 세계의 주요 도시였다. 이것은 때가 되면 신적 계시의 빛을 그들 어두운 지역에 비취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도를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이 만일 은혜의 수단을 소유했다면 회개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수단을 그들에게 허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마 11:21, 23). 그는 니느웨가 은혜의 수단을 소유한다면 회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그런 수단을 주셨고 요나를 보내셨다. 요나는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회개를 선포하진 않았지만(우리는 그가 그런 사명을 받았다는 말씀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에게 선포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받은 사명의 복된 결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은총을 나눠 주심에 있어 어떤 장소에는 은혜의 수단을 보내시고 다른 곳에는 보내 주지 않으시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영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심으로써 독단적이고도 전제적으로 행동하더라도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여 이같이 하나이까?"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써 마음대로 하셔도 무방한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부채를 지지 않은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고 말씀하신다.

(1) "그것은 내가 처음에 네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네게 선포하라고 명했던 것이다(1:2). 가서 니느웨를 쳐서 외치라. 신적 심판을 선언하라.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 상달했고 하나님의 복수가 그들에게 내려온다고 말해라." 이것은 처음에 요나가 전달하기를 매우 싫어하여 다시스로 도망쳤던 메시지였다. 그런데도 요나는 두 번째로 그 메시지에 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비위를 맞추거나 그의 수긍을 보다 많이 얻기 위해 메시지를 변개 시키시지는 않으신다. 아니, 요나는 처음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응하지 않았을 때 의 바로 그 말씀을 전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할 수 없는 것이며 선포자나 청중의 기분에 맞춰서 왜곡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에 부응하지 않으며 사람이 진리와 율법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19).

(2) 또는 "그것은 네가 니느웨로 갈 때 내가 네게 선포하라고 명할 것이다." 이것은 요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요나와 함께 동행하시리라는 것이다. 예언의 영은 그에게 머물 것이며 그가 니느웨에 도착하는 즉시 필요한 지시를 계속 그에게 내려 주실 것이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위태로운 일을 맡은 요나에게 큰 뒷받침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을 보내셨을 때도 이와 유사한 암시를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께서 나중에 지시하시는 산 위에서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선한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께서 정하신다(시 37:23). 그는 자기 백성을 한 걸음씩 인도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따라올 것으로 기대하신다. 요나는 맹목적 신앙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지는 알지만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지는 모르게 될 것이다. 니느웨에 가야 그는 메시지를 받을 것이며 싫든 좋든 그것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시며 그의 말씀과 섭리에 의존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며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 해군 제독들이 전함을 거느리고 파견될 때 그들은 바다 멀리 나가기까지는 명령서를 개봉하지 못하도록 요구받는데 요나도 그와 같이 니느웨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 다달으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지시를 받게 된다.

Ⅲ. 그는 자기의 사명을 신실하게 그리고 담대히 전했다. 그는 니느웨에 도착하자 자기의 교구가 무척 방대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니느웨는 삼일 길의 극히 큰 성읍이었다(3절). 히브리어로는 "하나님께 큰 성읍"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히 크다는 말로밖에 번역할 수가 없다. 큰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는 명칭을 갖는다는 히브리 언어는 크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니느웨의 위대함은 주로 그 도시의 규모에 존재한다. 니느웨는 바벨론보다도 훨씬 더 컸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는 여태껏 어떤 인간도 이만큼 큰 성은 건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니느웨 성은 길이가 150펄롱(1펄롱은 약 ⅛마일), 폭이 90펄롱, 둘레가 480펄롱이었고 성벽은 높이가 100피트였으며 전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두터웠다. 또 성벽 위에는 1,500개의 망대가 있었고 각 망대의 높이는 200피트였다. 본문에서는 니느웨가 삼일 길이라고 하고 있다. 혹자가 기술하는 대로 성 주위의 길이는 480펄롱이었는데 8 펄롱을 1마일로 잡는다면 60마일이 된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 하루 20마일씩 걷는다 치면 삼일 길로 계산이 된다. 또는 요나가 선포하면서 다닐 때는 천천히 진중하게 걸어야 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니느웨 성의 중요한 거리와 골목을 다 다니면서 이 메시지를 선포하려면 최소한 사흘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로 오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일에 열중했다. 그는 성내로 들어가자 여독을 씻기 위해 주막으로 직행하지 않고 받은 바 지시대로 자기 사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고 외치며 말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특별히 이 말을 선포하도록 지시 받았을 것이다. 그는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을 상세히 설명했을 법도 하다. 즉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과 왜 쟁논을 벌이시며 그들의 악이 얼마나 그의 노를 도발했고 따라서 그들은 멸망을 각오하고 이 경고를 신용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런 설명을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는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한 메시지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1. 요나는 그들에게 이 큰 성읍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니느웨성이 전쟁에 의하지 않고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타격 즉 지진이나 유황불에 의해(소돔처럼) 무너지리라는 것을 공표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도시들의 악은 그들의 멸망을 성숙시키며 그들의 불의의 양이 차고 복수의 수단이 이를 때에는 그들의 재산이나 큰 규모도 그들을 멸망에서 보호하지 못한다. 크신 하나님께서 회계하러 오실 때에는 큰 성읍들도 쉽사리 무너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요나는 그 성이 곧 무너진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40일이 지나면 그 성은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예기간이 허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기다리실 것이다. 즉 이런 경고가 주어지면 그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그 행위를 고쳐서 경고된 파멸을 방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지 살펴보자. 비록 니느웨의 악이 복수해 줄 것을 절규했지만 하나님께서 사십일 간은 그 성을 살려 두실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길로 오시는 하나님을 회개로 자을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더 기다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만일 그 때에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칼을 버리시고 준비를 갖추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판을 연기하시기에는 사십 일 간이 오랜 시간이지만 불의한 백성이 회개하고 개심하여 임박한 심판을 돌이키기에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기한을 정하는 것은 온갖 가능한 확증과 함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귀신같이 앞일을 알아맞치는 자라도 그 시간까지 정할 만큼 대담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경악시켜 준비를 하게 만들 것이다. 태평하던 죄인도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는 정신이 번쩍 들어 진심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파멸을 예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서 일 자체가 확실하고 시기가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각성하여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당면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에 대해 캄캄하며 불확실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사십 일 간 서있겠다는 말씀처럼 사십 일을 살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니, 나는 3, 40년간 산다기보다 3, 40일 이내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는 여러 수십 년 살 것으로 기대하기 쉽다.

Fleres, si scires unum tua tempora mensem;

Rides, cum non sit forsitan una dies.-즉 우리가 한 달을 사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를 사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무심하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니느웨의 회개 (요나 3:5-10)

Ⅰ. 여기에는 임박한 멸망을 경고함으로써 니느웨를 회개시키고 개혁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오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토록 큰 사례를 보지 못하였다. 심판 때에 니느웨가 일어나 복음 시대 사람들을 쳐서 정죄할 것이니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41). 아니,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의 불회개와 고집을 정죄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고 그들은 백성 중에서 말과 일에 능한 자로(눅 24:19)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니느웨에는 단 한 사람만 보내셨고 게다가 그는 전혀 낯모르는 자였다. 우리는 그의 몰골 또한 초라했으리라고 상상할 때는 허약했다(고후 1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했으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요나는 단 한 가지의 설교를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말을 확증시킬 수 있는 표적이나 기적을 보여 주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느웨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이스라엘인들은 여전히 완고하였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씀을 골라서 선포했고 그에 따른 표적으로 확증을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완악하였다. 요나는 단지 진노와 파멸을 경고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거나 회개의 방법을 교시했다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희망이 있다고 격려하는 장면은 더 더구나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뉘우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사랑의 줄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끌고 만약 그들이 회개하며 개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큰 일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회개를 고집하였다. 자, 여기서 니느웨가 회개한 방법이 무엇이었으며 그 단계와 특수한 사례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말씀을 신용했다. 그들은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많이 두고 있었지만 만유의 주권자로 단 한 분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하나님께만 책임적 존재이며 그들에게 죄를 지었으며 그의 공의에 거슬리게 행동했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임박한 파멸의 경고도 그 하나님한테서 나왔고 따라서 파멸 그 자체도 적절한 시기에 회개하여 방지하지 않으면 정해진 시간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이 자비로운 신이셔서 만일 경고된 죄로부터 자기들이 돌이킨다면 위협된 진노를 돌이킬 희망도 다소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 그를 배역한 후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그는 화해할 수 있으신 분이시며 정당한 경로만 취한다면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매우 작고 약하고 도저히 될 것 같지도 않은 수단으로써 얼마나 큰 믿음을 이룩하실 수 있으신지 관찰하자. 그는 몇 마디 위협적인 말로써 니느웨인들을 믿음에 순종하도록 만드실 수 있으시다. 어떤 이들은 니느웨인들이 사공들이나 타인들이나 또는 요나 자신에게서 그가 바다에 던짐을 당했다가 기적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을 들었으며 이야기가 그의 선교를 공고히 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로 하나님을 보다 쉽사리 믿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견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요나의 재생에 의해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복음을 확증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의 사유하심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만방에 선포하는 자들의 크나 큰 성공에 기여하고도 남음이 있다.

2. 그들은 이 말을 니느웨 왕에게 전했다. 어떤 이들은 이 때의 왕이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였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앗수르 왕 불(pul)이었다고 생각한다. 요나는 왕의 위엄을 존중하여 맨 먼저 왕궁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다. 왕관을 쓴 머리도 범죄한 머리일 때는 하나님 앞에서 일반 평민의 머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요나는 궁정으로 보냄을 받지 않고 니느웨거리로 가서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는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 그 정보는 요나를 공안의 문란자로 고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치안 교란자로 몰아 입을 다물게 하려거나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요나가 만일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하고 외쳤더라면 아마 그런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요나에 대한 말을 임금에게 전한 자들은 공중의 안녕과 복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던 자들로서 요나의 말을 듣고 떨며 니느웨 왕에게 범죄인에 대한 보고를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나라의 안녕과 평화에 관한 보고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와 섭리의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에 대해 알려 주는 신하를 거느린 왕들은 행복하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그런 보고에 유념하는 지배자를 두고 있는 백성들도 행복하다.

3. 왕은 겸비하는 모범을 보였다(6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소문을 듣자 모압왕 예글론처럼 보좌에서 일어났다. 예글론은 에훗이 하나님의 전언을 갖고 왔다고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삿 3:20). 니느웨 왕은 자기 보좌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적 존경심에서가 아니라 진노의 말씀에 대한 개별적 두려움과 죄에 대한 근심과 수치심에서 였다. 그와 그의 백성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좌에서 일어나자 제왕의 위의를 표시하는 왕복을 벗어버렸다. 이것은 하나의 자복 행위였다. 그는 압제와 학대를 견제하고 정의를 유지시키는 데 권력을 사용했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 앞에 자기의 왕좌와 왕복을 몰수당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왕으로서의 신임과 명예를 감당할 수 없는 자로 자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빼앗아 가셔도 할 말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는 비록 왕이지만 참회자의 의복을 능멸치 않고 스스로 입기를 주저치 않았다. 이는 그가 굵은 베를 입고 제에 앉았던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스스로 겸비하며 신의 복수를 두려워했다는 표시였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도 스스로 낮추는 것이 어울린다.

4. 백성은 왕의 수범에 따랐다. 아니 백성이 왕의 겸비와 회개를 유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니느웨 백성이 맨 먼저 큰 자에서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를 입기 시작했던 까닭이다(5절). 그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즉 성이 무너지면 잃을 것, 극히 적은 자들도 자기들이 이 경고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편안히 누워 으리으리하게 사는 데 익숙한 가장 큰 자들도 겸비의 표지를 몸에 걸치는 것이 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굵은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좋은 세마포만 입던 자들에게는 그러했다. 만일 그들이 깊은 죄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았던들 이렇게 행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죄의식과 위기 의식을 표시하려고 했을 것이다. 파멸을 당하지 않으려는 자는 스스로를 낮춰야 하며 자기 영혼을 멸하지 않으려는 자는 제 영혼을 괴롭혀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그의 능하신 손길 아래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관심하여야 한다. 비록 육체적 행사만으로는 아무 이득이 없으며 사람이 굵은 베를 띠고 재를 뿌리더라도 그것이 전부면 장난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마음이기에, 사 58:5) 그래도 하나님께서 섭리로 애곡을 촉구하시고 굵은 베를 띠라고 부르시는 엄숙한 날에는 내적인 슬픔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우리 몸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

5. 범 국민적 금식이 선포되었고 그 큰 성읍 전체를 통해 시행되었다(7-9절). 이것은 왕이 그의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명령한 것이다. 전 입법권이 금식일을 지정하는 데 일치하였고 온 백성의 무리가 금식의 준수에 합치하였으며 이 두 가지 면에서 그것은 국가적 행위가 되었다. 국가적 파멸을 방지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선포의 내용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선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금식의 엄수가 요구되고 있다. 금식을 위해 지정된 이 날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 것이니라." 그들은 아무리 소량이라도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들은 물을 마셔도 안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래 금식하다가는 건강을 손상시키게 된다거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 번쯤 이 일을 시도해 봐야 한다. 그런 불편을 겪고 얼마간 고통을 느끼면 무슨 상관이냐? 몰락할 도성을 건지기 위해 그런 고행이 필요하다면 그런 참회의 행위에서 빠지기보다 오히려 그것에 승복하는 것이 낫다. 그들은 금식하여 굵은 베를 입음으로써 신체적으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의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짐승조차 사람과 함께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죄의 도구로서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만들어진 때문이다. 게다가 짐승들은 음식을 주지 않으면 불만을 표시하거나 말없이 헐떡임으로써 자기주인들에게서 슬픔과 겸비를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울 안에 갇힌 가축 떼에게 보통 때처럼 꼴과 물을 먹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어떤 음식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먹는 류의 것은 잊어버려야 했다. 먹은 것은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열중할 때는 짐승들에게도 자기와 함께 찬미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듯이 니느웨 사람들이 죄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때는 참회의 표현에 하등 동물도 같이 참여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짐승들을 값비싸고 훌륭한 장식물로 감싸 놓곤 했댔다. 그런 호화로운 장신구는 주인과 짐승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는 굵은 베옷으로 단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큰 자들도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금식과 애곡 외에 기도를 해야 하며 하나님께 탄원해야 했다. 왜냐하면 금식의 목적은 기도의 의무에 있어서 신체로 하여금 영혼의 봉사에 적합하도록 있는 데 있다. 주된 것은 기도이며 다른 것은 예비적인 것이나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힘써(강하게:원의) 부르짖게 하라. 짐승까지도 제 역량대로 부르짖게 하라. 까마귀 새끼와 어린 사자의 부르짖음처럼(욥 38:41; 시 104:21) 먹을 것이 없어 부르짖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으로 온혜로이 해석되게 하라. 특히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라. 그들을 쳐서 부르짖는 죄의 용서를 위해 그리고 요나가 그들을 쳐서 부르짖은 심판의 방지를 위해 그들은 힘써 부르짖어야 한다. 파멸과 그들과의 사이가 한 걸음밖에 되지 않던 그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요,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 였다. 노력은 기도 시에 고정된 생각과 견실한 믿음과 경건하고 돈독한 열성으로 힘써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힘써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 우리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구의 지위를 버리고 우리에게서 떠나실 뿐만 아니라 원수로서 우리를 치러 오실 때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3]그들은 금식과 기도에다 생활의 혁신과 개선을 추가 시켜야 했다.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이라." 그 악한 길은 각자가 좋아서 택한 길이며, 각자가 탐닉한 악한 길이며, 마음의 악한길이고 또 각자의 행위의 악한 길이다. 그들은 또 그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야 했다. 그들은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어야 했고 자기들이 행한 학대를 보상해야 했으며, 자기들의 손아귀 안에 있는 자들을 더 이상 압제하지 말아야했고, 자기들과 거래하는 자들을 속여서는 안 되었다. 권세자는 법정에서 그 손의 강포로부터 돌이키고 불의한 명령을 발하지 않으며, 그릇된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했고, 상인은 장사에서 그 손의 강포에서 돌이켜 부정한 도량 형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고객의 무지나 궁핍을 악용하여 기만하지 말아야 했다. 우리가 죄에 대해 금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죄에서 떠나 금식해야 하며 우리의 기도가 성공하려면 우리 마음과 더 이상 죄악을 품지 말아야 한다(사 66:18)는 데 주목하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열납하신 금식이다(사 58:6; 슥 7:5, 9). 금식날의 일은 그 날에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날에는 그 일 중 가장, 어렵고 필요한 부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죄에서 떠나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며 개처럼 자기가 토한 것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2) 이 금식은 어떤 유인에 기초하여 선포되며 또 경건히 준수되는가?(9절)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뉘우치실 줄 누가 알랴?"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자기 길을 바꾸시고 그들에게 대한 판결을 취소하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런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자인하면서도 그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탄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파멸이 방지되고 멸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평한 심판에 대해 반대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심판을 무효라고 하면서 보다 상급 법원에 항고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기만 바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공의에 이기고 기뻐하실 것만 바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진노하셔 마땅하며 자기들의 죄가 극악하기 때문에 그의 진노는 맹렬하여서 그가 심판하기 시작하시면 치료책도 없고 자기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멸망하며 모두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의 진노의 능력을 누가 알랴? 그러므로 그들이 기도로써 방지하려는 것은 성의 무너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기 돌이키기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서 기도할 때는 모든 선한 것도 간구하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기도할 때는 모든 악한 것에 대해서도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이 이에 대해 품은 소망의 정도는 어떤가?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실지 누가 알랴? 요나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그런 말을 해 줄 다른 선지자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달리 그들은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가 있어서 회개하면 용서를 얻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에 대해 일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로우시며 죄인의 참회와 회심을 기뻐하신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이런 천래의 인식으로부터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려 주실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감히 억측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자비에 대한 소망은 회개와 개혁에 대한 최대의 격려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 자신의 죄의식과 무가치성 그리고 하나님의 참으심을 오래도록 남용했다는 인식에서 야기되는 큰 두려움에 어렴풋이나마 약간의 소망만 번쩍이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진지한 회개와 개혁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더라도 은혜의 발등상 앞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담대히 자유로운 은혜의 발등상 앞에 몸을 내던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여기실지 누가 알랴?

Ⅱ. 여기에는 회개하는 니느웨인들을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가 나온다(10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한 것을 감찰하셨다. 그들은 선한 말로 참회를 고백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말을 들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선한 행위로써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고 하나님께서는 또 이것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셨고 그것은 그가 찾고 요구하시던 것이었다. 하나님이 만일 그런 것을 보시지 못했다면 그들의 금식과 굵은 베옷도 그가 보시기에 보잘 것 없을 터였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죄악에 대한 거족적 각성과 다시는 죄로 돌아가 않겠다는 거국적 결의가 번뜩이는 것을 보셨다. 그는 얼마간이긴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그 성읍의 면목이 일신되었다는 것을 감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개과천선하는 하나 하나의 사례를 다 주목하신다는 데 유의하자. 비록 세상 사람은 회개하는 죄인의 모습을 낱낱이 관찰하거나 인식하진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사례도 빠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는 누가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며 누가 그러지 않는지를 보신다. 그는 진정한 회심으로 자기를 맞아들이는 자는 은총으로 그들을 맞으신다. 그들이 자기들에 의해 자행된 죄의 폐해를 뉘우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언하신 심판의 재앙을 돌이키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살려 주셨으며,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렸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인 것이다. 니느웨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심령, 곧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가 너그럽게 보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3:6 없음.

 

3:7 없음.

 

3:8 없음.

 

3:9 없음.

 

3:1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