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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물고기 뱃 속의 요나 (요나 2:1-9)

하나님과 그의 종 요나는 성난 중에 헤어졌고 쟁논은 요나 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일을 회피하기 위하여 제 나라를 떠나 도망길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이 다시 합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데 화해는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다. 앞 장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요나를 건지셨고 대속물을 찾아 내셨던 것이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의무의 길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요나를 볼 수 있다. 요나는 앞 장에서 자기 신에게 기도하라는 촉구를 받았으나 우리는 그가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요나가 기도한 때는 언제인가(1절). "그 때에 요나는 기도하였다." 그 때는 그가 고난 중에서 죄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를 깨닫던 때였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우리가 기도할 일이 생길 때에는 은혜의 보좌 앞에 용무가 생기는 때이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마음이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진지해져서 기도할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신다(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며 일찍이 찾을 것이다, 호 5:15 참조). 우리가 비록 우리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자초하더라도 만일 겸손과 경건한 성실 가운데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요나가 그러했듯 은혜의 보좌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요나가 기적에 의해 생명이 보존되어 구원의 전도가 밝았을 때, 이것은 그를 위하여 자비가 더 많이 예비되어 있다는 증좌였고 그 때 그는 기도를 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범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며 죄의식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막혔던 입술이 열려 기도가 터져 나오게 된다.

Ⅱ. 그는 어디서 기도했는가? 그것은 물고기 뱃속에서였다. 어떤 장소든 기도하기에 부적합한 곳은 없다. "나는 남자들이 각처에서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던지시든지 우리는 우리의 잘못만 아니라면 하늘로 향해 열린 길을 발견할 수 있다. Undigue ad Coelos tantundem est vioe-즉 하늘은 지구 각처에서 접근이 동일하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중심에 거하시게 하는 자는 어디로 가든지 제단을 자기와 함께 휴대하고 다니는 셈이다. 그 제단은 헌물을 성화시키며 그는 그 자신이 산 성전이 된다. 여기에서 요나는 갇힌 상태에 있다. 물고기의 뱃속은 그의 감옥이었고 답답하고 캄캄한 뇌옥이었다. 그럼에도 요나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고 마음대로 하나님과 친교하면서 행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우리를 서로 교제하지 못하도록 축출시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친교는 막지 못한다. 요나는 바다 맨 밑에 있었지만 깊은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실라도 차꼬와 수갑에 채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였다.

Ⅲ. 그는 누구에게 기도했는가? 그의 기도의 대상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던 중이었는데 이제는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다. 그는 자기가 멀리 떠나갔던 하나님께 기도로써 가까이 나아가며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께 접근한다. 그는 기도에서 주 여호와로서 뿐만 아니라 자기 하나님 곧 자기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으로서도 그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어떤 언약을 범해도 우리가 언약 밖으로 쫓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뒷걸음질치는 배역한 자녀들에게 돌아 오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 3:22).

Ⅳ. 그의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나중에 자기 기도의 내용을 회상해 내어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고통과 위험 중에 있었을 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지를 회상하며 그 때 자기 흉중에 있었던 믿음과 죄의식, 희망과 두려움 간의 갈등을 곰곰이 반추한다.

1. 그는 자기 기도의 간절함을 생각하며 들으시고 대답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성과 자진성을 회상한다(2절). 그는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나이다" 라고 말한다. 전혀 기도를 하지 않거나 형통한 중에 있을 때 단지 속삭이듯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난을 인하여 기도하게 되며 부르짖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리고 고난을 보내시는 것도 이를 위해서이며 만일 이 목적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받는 고난을 무익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 때 부르짖지 아니하는 자들은 분노를 쌓는 자들이다(욥 36:13). "음부와 무덤의 뱃속에서 내가 부르짖었나이다." 물고기는 음부라고 부를 만하다. 그것은 감옥이었다. 요나는 불순종 때문에 그 감옥에 들어가도록 정죄되었고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서 거기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음부의 뱃속이라고 불러 무방하다. 이 선량한 사람 요나는 그리로 던져졌는데도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또 그 부르짖음은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가 받는 고난의 소리와 그가 간원하는 음성을 들으셨다. 저 세상에는 음부가 있는데 거기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봐야 들어주신다는 소망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음부의 뱃속에 있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요나처럼 무덤 속에 삼일삼야를 누워 계셨을 때 비록 요나처럼 기도를 하지 않으셨을지라도 그의 누워계심 자체가 가련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절규는 하나님께 청문되었던 것이다.

2. 그는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자기가 처한 아주 비탄스러웠던 형편을 회상한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 누워 자기 처지를 깊이 인식하며 각별히 주목했다. 우리가 만일 우리들이 겪는 환난을 통해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그 환난과 그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손길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유의하자. 요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한다.

(1) 그는 극히 낮은 데로 던져졌다(3절).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셨나이다." 정작 요나를 바다에 던진 자들은 뱃사공들이었지만 그는 그들 너머로 자기를 바다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깊음 속으로 던짐을 당하든지간에 우리를 던지실 수 있는 분임을 명심하자. 요나는 바다 가운데, 바다의 중심에(원의는 그렇다) 던져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장사되는 것을 표현할 때 이 히브리 용어를 차용하여 땅의 가운데(중심)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담은 무덤이 아무리 얕다고 하더라도 마치 지구 중심에 놓인 것처럼 그는 산 자의 땅에서 완전히 끊어진 때문이다.

(2) 그는 극히 두려운 상황에 빠졌다. "큰 물이 나를 둘렀나이다." 바닷물의 통로와 원천이 사면팔방으로 그를 포위하였다. 그에게는 바다가 쉴새 없이 넘치고 만조였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와 종들은 때때로 고난에 둘러 싸이며 매우 드세고 격렬한 환난에 휩싸인다. 그 환난은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며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처럼 부단히 밀려와 넘치고 욥의 사자들이 나쁜 기별을 속속 전해 줄 때처럼 한 가지 환난은 또 다른 환난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교회가 호소하듯 그들은 팔방으로 환난에 둘러 싸인다. "그가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가 안전을 위해 달아날 길을 보지 못하게 하신다" (애 3:7).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가 바닷물을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라고 부르는 데 주목하자.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고(바다도 그의 것이니 그가 만드셨음이라) 또 그들을 지배하실 뿐만 아니라(바람과 바다조차 그에게 순종하기에) 그가 바다에게 요나를 치라고 명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고생시키시고 두렵게 하라고 바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요나가 시편 42편 7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번역은 약간 다르지만 다윗의 원래 호소는 축자적으로 요나의 이 기도와 동일하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은유적으로 말한 것을 요나는 문자 그대로 자기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원용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고난에 만족하려면 선례를 궁구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이왕에 있었던 사례를 살펴 봄으로써 우리를 엄습하는 시험이 사람들에게 보통 있는 시험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혹 어느 사람의 사정이 독특하며 유례가 없을 정도라고 해도(요나의 경우는 확실히 그랬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넘친다고 호소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정된 일을 이행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많으며 우리가 받는 고난의 길이 전인미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대할 때 으례 사용하시는 바로 그 방법으로 우리는 다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를 받을 때에는 우리 앞의 성도들이 유사한 경우에 사용한 기도와 호소를 이용하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하나님께 아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성서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명심하자. 성경을 이용할 수 없을 때에도 요나는 순전히 자기 기억력의 도움으로 그의 형편을 유효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성귀를 말할 수 있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나이다." 5절 말씀도 같은 취지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나이다." 물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였고, 그의 목숨은 이로써 절박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또는 물결은 그의 심령에 감명을 주었다. 그는 물결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보았고, 전능자의 두려움은 그를 엄습하여 쳤다(욥 6:7). 이 두려움이 그의 영혼에까지 이르러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이 말씀 또한 다윗의 호소로부터 차용한 것이다(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시 69:1). 밖에 다툼이 있을 때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후 7:5).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깊음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만일 그의 감옥에서 나온다면 물속에 빠져 죽는다는 것은 모면할 도리가 없다. 그는 바다 풀이 자기 머리를 감쌌다고 느낀다. 물고기는 해초를 물과 함께 빨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요나에게는 자신을 구할 방법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며 딴 사람이 구조해 주리라는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도 때로는 곤란과 역경에 따지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다(고전 1:8, 9)

(3) 그는 매우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그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그는 해저의 암반에까지 내려갔다. 해변의 산들이나 곶은 그런 해저 암석에 기저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런 암석 사이에, 아니 그런 암석 밑에 있었다. 땅은 그 빗장을 두르고 있었고 그것은 너무나 꽉 닫혀 있어서 그에게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듯 하였다. 땅은 완전히 폐쇄되고 빗장을 지르고 있어서 그는 다시 그리로 돌아갈 소망이 완전히 끊어졌다. 요나의 형편은 이처럼 어쩔 도리가 없고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하나님과 다투는 자들은 온 피조 세계와 전쟁하는 자들이다.

3. 그는 그때 자기 자신에 대해 극히 암담하고도 우울한 결론을 내릴 뻔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었는데 그것을 여기서 회상한다(4, 7절).

(1) 그는 자포자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모든 의도와 목적이 다 무너졌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포기했다. 큰 물이 그를 둘러 영혼까지 하였을 때, 그의 영혼이 안에서 기진하며 낙심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편안감이나 기대를 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심령은 낙망했고 그는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끊쳤다고 했나이다." 그의 영혼이 그 속에서 피곤한 것은 바로 이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고 다시는 자비로이 자기에게 돌아오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앞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 나온 전례가 없었다. 요나가 잿더미 위의 욥과 구덩이 속의 요셉과 굴 속의 다윗을 생각했더라도 이런 것은 그의 경우에 필적하지 못했다. 기적에 의하지 않고는 탈출할 길이 막연했다. 게다가 공의의 기념물이 된 그에게 자비의 기적을 기대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의 양심은 그가 악하게도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그 목전에서 쫓아내시고 그 표시로 성령을 그에게서 거둬 들이시며 다시는 그를 찾지 않으셔야 마땅했다. 그는 그 자신의 행위가 자초한 환난에서 구출되기를 희망할 수 없었다. 요나가 자신의 형편에 대해 최악의 표현을 한다고 할 때 어떻게 말했는지 우리는 관찰해 보아야 한다. 그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나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목전에서 쫓아내신 자들이야말로, 아니 그들만이 참으로 불행하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며 은총을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지옥에서 저주받는 자가 당하는 불행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축출당했다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와 함께 하는 기쁨 외에 천국의 행복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왕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완전히 축출당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지가 역전되는 수도 있다. 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 듯 하고 더 이상 하나님께 존중을 받지 못하는 듯한 감이 든 때가 없지 않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내 길(개역: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사 40:27)고 몰랐다고 했다. 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사 49:14)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때문이다.

(2) 그러나 요나는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다가 제 정신을 차리고 구원에 대해 편안한 전망을 다소 가져 본다. 믿음은 불안과 불신에 의한 추측을 교정하고 통제하였다. 의식과 믿음 간에 맹렬한 투쟁이 벌어졌으나 믿음이 최후의 발언권을 얻어 승리자로 나타난 것이다. 시련의 때에 우리의 신앙만 약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결과는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확보해 주신 것은 왕성한 신앙의 존속이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눅 22:32). 다윗은 믿음이 없다면 차라리 산 자의 땅에서 기진하기를 바랐었다(시 27:13). 요나의 믿음은 "내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고 말했다. 이와 같이 그는 비록 창망 중에 있었지만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자기의 영혼을 확실히 그리고 견고히 붙잡아 주는 닻으로서 하나님께 때해 이런 소망을 품었다. 그가 자신을 지탱시키는 소망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보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나타낸다.

[1] 그는 살게 된다. 그는 다시 하늘을 향해 바라보게 될 것이며 지금은 비록 완전한 암흑 속에 던짐을 당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햇빛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 4:18).

[2] 그는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선한 사람은 신의 찬미 이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시 119:175). 그는 거룩한 규례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게 될 것이며 성전을 향해 바라보며 또 그리로 올라갈 것이며 거기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찾으며 바라보게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자기의 병 회복에 대해 확신시켜 주기를 바랐을 때 그는 마치 성전에 올라가는 일이 건강을 비는 유일의 목적이기라도 한 양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사 38:22). 마찬가지로 요나도 여기에서 성전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는 기뻐하면서 즐거이 그 쪽으로 바라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일을 기억만 해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그는 성전에 낯선 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 곳에 갈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쪽을 향해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는 성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성전 쪽을 향해 바라보게 되며 성전을 바라보며 들여다보게 되기를 희망한다. 요나가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는지 관찰하자. 다윗처럼 자신의 죄와 몰가치성을 의식하는 자답게 그는 감히 하나님의 전에 거하게 된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가 아들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향해 바라보는 것은 허용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집의 거룩함이 곧 그 집의 아름다움이었고, 이 때문에 그가 이 전을 사랑하며 그곳을 향해 바라보았던 때문이다. 성전은 천국의 예표였다. 그래서 비록 이제는 사로잡힌 자로 유형 중에 있어서 놓여남을 받지 못하고 구덩이 속에서 죽더라도 천국 성전을 바라보게 되며 그리로 안전히 인도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는 바다 밑 물고기 뱃속에서 죽더라도 천사들이 자기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 주기를 희망한다. 또는 이 말씀은 요나의 서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서원한 것을 갚겠다고 말하고 있다(9절). 그의 서원은 하나님께서 만일 자기를 구원해 주신다면 시온의 딸의 성문에서 그를 찬송하리라(시 9:13, 14)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추적하신 그의 죄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그 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는 다시스를 바라보지 않으며 다시 성전을 향해 바라보며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겠다고 약속한다(시 84:7).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의 영락한 상태에서 믿음 소망이 어떻게 그의 위로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덧붙여 언급한다(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곤핍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사옵고 나는 그것을 강장제로 삼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했고 환난으로 극히 멀리 팽개쳐진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지를 생각했다. 또 그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멀리 몸을 내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도 기억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남들을 위해서도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그를 자지러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는 그에게 호소한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나이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였나이다." 우리는 고난시에 우리 하나님을 상기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리 영혼이 피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그에게 기도를 드려야 하며 적어도 경건한 부르짖음을 내야 한다. 또 우리가 그의 이름을 생각할 때는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4. 그는 이처럼 고난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그를 신뢰하였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회상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그의 기도를 용납하시고 인정하시며 경청하셨다(7절). "내가 보낸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까지 미쳤나이다. 그 기도는 극히 낮은 바다 밑에서 한 것일지라도 극히 높은 하늘에 들렸나이다."

(2)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를 위해 구원을 베푸셨고 그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구원에 대한 확신과 보응을 그에게 허락하셨다(6절). "그런데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흠정역:썩음)에서 건지셨나이다." 혹자는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했을 때 그가 이 기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감사의 언어이다. 그는 자기의 아주 큰 곤경에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구원으로 더욱 더 크다 칭송받을 수 있다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또는 이것은 그가 아직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기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믿음의 언어이다. "주께서는 나를 여기 이 구덩이에서 살아 있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실 능력과 의사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자기의 구원이 이미 이루워진 듯 확신을 갖고서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 고 말한다. 그는 구원에 대한 명백한 약속을 받지는 않지만 그 증거를 가지고 거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에게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생명이 썩음에서 구원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확신을 하나님께 여쭙고 있다. "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는 이 일을 행하셨나이다. 주는 여호와십니다. 그러므로 주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 따라서 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이 되실 것이며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이 되실 것이며 멸망에서,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 생명을 속량하실 것이다.

5. 그는 타인들에게 경고를 하며 하나님을 고수하도록 가르쳐 준다(8절). "무릇 거짓 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나이다."

(1) 이방의 사공들처럼 다른 잡신들을 예배하고 부르며 그들로부터 구원과 위로를 기대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빛을 가로막고 자신의 행복에 등을 돌리며 모든 선의 길에서 아주 벗어나 버린다. 우상은 거짓되고 헛된 것이며 하나님께만 돌려야 마땅한 충성을 우상에게 바치는 자들은 자기 의무와 이익에 배치된 행동을 하는 자들이다.

(2) 또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요나처럼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리는 자이다. 그 은혜와 자비는 하나님한테서만 찾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의무만 고수한다면 제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언약 상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헛되고 거짓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은 바로 요나처럼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요나처럼 자기들의 봉사를 버림으로써 더 낫게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못 마땅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판단함으로써 그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주장한다. 선지자 파송의 적부도 그들 자신이 심사한다. 그들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근거없고 어리석은 망상에 이끌리어 요나처럼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리며 그런 망상에서는 아무런 유익도 나오지 않는다. 자기 의무를 버리는 자는 제 은혜와 자비를 버리는 자라는데 유의하자. 자기 때와 장소의 일에서 달아나는 자는 그 일의 위안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다.

6. 그는 자기 영혼으로 굳은 맹세를 하고 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구원을 베푸신다면 그가 은혜의 하나님을 찬송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서약이다(9절). 그가 하나님과 맺는 언약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는 감사의 제사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존귀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자들을 격려하시기 위해 찬양을 드리는 자는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감사의 제사를 드릴 것이며 자연 법칙을 따라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릴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이 제사 의무의 요체요 생명이다. 이런 것이 결여되면 감사의 제사도 감사하는 목소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감사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희생 제물로 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 이것은 제사드리는 자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의 감사는 우리 입술의 송아지(호 14:2)요, 우리 입술의 열매(히 13:15)인 감사하는 목소리로 표현 해야 하며 우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발하며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요나는 여기서 이것을 약속하고 있다. 즉 그는 감사의 제사와 함께 여호와의 인자를 입에 올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게 할 것이다.

(2) 그는 행실로써 하나님을 존귀하게 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물고기 뱃속에서 행한 서원을 꼭 그대로 이행할 것이다. 혹자는 요나가 서원한 것이 모종의 자선 사업이거나 아니면 야곱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마치겠나이다" (창 28:22)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한 서원으로 한층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마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기꺼이 가겠다는 내용일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니느웨로 보내고 싶어하신다고 해도 그는 즉시 그리로 출발하겠다는 서원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저버림으로 말미암아 따끔한 장계를 받을 때는 곧 우리가 그 의무를 굳게 고수하겠다고 약속해야 할 때다. 또는 그가 서원한 것은 감사의 제사일지도 모른다. 다윗의 경우처럼(시 116:17-19) 감사의 제사는 그가 갚아야 할 것이었다.

7. 그는 하나님을 그 백성의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기도를 끝낸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나이다(시 3:8)." 그는 구원의 하나님(시 68:19, 20)이시다. 그는 구원을 능히 이루실 뿐만 아니라 위험과 고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구원을 이행하실 수 있다.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백성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전체 교회와 개개 성도들의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셨다. 그는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딤전 4:10). 언제나 그랬듯이 구원은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구원은 하나님 한 분한테서만 기대되며 우리는 하나님께만 구원을 의존해야 한다. 요나의 경험은 어느 시대 사람을 막론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 신뢰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무릇 이 기사를 읽는 자들은 구원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말하며 찬양하며 말하게 될 것이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뭍에 나온 요나 (요나 2:10)

여기에는 요나의 석방과 구출 장면이 짤막하게 기술되고 있다. 그는 투옥에서 방면되며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된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 있었지만 그것은 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산 자의 땅으로 귀환한다. 그것은 그의 부활이었다. 그것은 비록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아니었지만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요나처럼 물고기의 뱃속에 그렇게 생매장 당했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는 결코 없었던 때문이다. 그의 석방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의 석방은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한다는데 대한 증좌이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하셨다. 하나님은 전에 배에서 떨어지는 요나를 받으라고 물고기에게 명령하셨듯이 이제는 그를 육지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에게도 명령을 내리시며 그 명령은 곧 이행된다.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순종하는 종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한 번 두 번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존중하지 않고 그의 말씀에 귀를 막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장악하고 계시며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부리시고 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에 주의하자.

2. 그의 석방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불쌍한 참회자에게 대한 자비의 본보기이다. 요나는 범죄했고 매우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는 이 패역한 행위로도 자기 잘못을 교정하지 않았다. 이 징계의 채찍에도 그의 어리석음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나중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도 요나가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자마자 자연계에서 그를 구원하기 위한 기적이 베풀어지고 있다. 이것은 참회하며 돌아오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들이시며 위로하신다는 것이 은혜의 기적, 거저 주시는 은혜의 기적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사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때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와 영원히 다투시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3. 그의 석방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표와 상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죄가 야기시킨 폭풍을 진정시키기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요나처럼 삼일삼야를 무덤에 누워 계셨고 우리의 빛 때문에 죄수가 되셨으나 삼일만에 나오셨다. 그는 자신의 사자들을 통해 요나가 한 것같이 이방인에게조차 회개와 죄의 사유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내가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 (호 6:2)는 다른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물고기가 요나 때문에 떨었듯이 땅은 그 무거운 짐으로 가득차기라도 한 듯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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