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 파송과 불순종 (요나 1:1-3)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예언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큰 영광이었다. 요나는 비둘기란 의미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와 그의 백성에게 적당한 이름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며(마 10:12) 그 땅의 죄와 재난에 대해 비둘기처럼 슬피 울어야 한다(사 59:11).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맛대-즉 나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진리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계셨다(원의는 그렇다)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은 바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았고 그의 음성과 낯선 자의 음성을 구별하였다. 이제 그에게 내리진 명령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는 것이었다(2절). 당시에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다(창 10:11). 니느웨는 큰 도시 즉 "저 큰 성읍" 이었다. 그 둘레가 48마일 (어떤 이는 더 크게 잡는다)이 넘는 큰 도시였다. 그 안에 사는 유아의 수효에서 나타나듯(4:11) 성민의 인구로서도 큰 도시였고 부에 있어서도 큰 도시였으며 (그 저축한 것은 무한했다, 나 2:9), 권세나 영토에 있어서도 큰 성읍이었다. 그 성은 한때 세상 임금들 위에 군림하던 도시였다. 그러나 큰 성읍들도 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에 있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었지만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예배가 결여된 이방 도시였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눅 1:79) 큰 성읍과 큰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 이 큰 성읍은 악한 도성이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흑자는 악의라고 읽는다). 그들의 악독은 엄청났고 그들은 강압적으로 범죄했다. 큰 도시에서는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며 얼마나 많은 죄인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슬프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며 서로 범죄하게 만든다. 그들의 악독은 위로 올라갔다. 즉 그들의 악은 고도로 높이 올라갔으며 극도의 높이에 달했다. 그 악의 양은 차서 넘칠 지경이다. 그들의 악독은 올라갔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수가 내려 올 때다. 또는 소돔의 경우처럼(창 18:20, 21) 그들의 악독에 대한 부르짖음이 상달했다. "그들의 악독은 내 앞(원의:내 얼굴)에 상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대담하고도 공공연한 모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를 거스려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는 그것을 쳐서 외쳐야 한다. 그는 그들의 큰 악을 쳐서 증거해야 하며 그 악 때문에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멸망을 경고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치러 오시며 미리 선전을 포고하고 경보를 울리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신다. "크게 외치며 소리를 아끼지 말라." 요나는 한쪽 구석에서 그의 메시지를 중얼거려서는 안 되고 니느웨 거리에서 공포해야 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저 악한 성읍을 쳐서 하는 말을 들을 지어다. 죄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는 복수의 부르짖음이 죄인에게 발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니느웨로 가야 했다. 그는 바로 현장에서 그곳의 악독을 쳐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선지자들은 인근 여러 나라에 메시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훔의 예언은 특히 니느웨의 중한 경고였다(나 1:1). 그러나 요나는 직접 메시지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빨리 일어나라, 선지자에 어울리는 신속, 용기 그리고 결의로 일에 몰두하라,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가는 자는 일어나서 가지 않으면 안 되며 스스로 분기하여 자기에게 할당된 일을 착수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꼭 그들에게만 보냄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녀의 떡을 먹었지만 니느웨는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2.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려 드렸다. 그는 심부름을 가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3). "그러나 요나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는 대신 일어나 다시스로, 바다로 도망하려 했다. 그는 어떤 항구를 목적지로 삼아 도망하려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하였다. 만일 여호와의 찾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감시의 눈길로부터 어디로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피하고 싶어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존전(이 말은 낮과 같은 단어이다)즉 예언의 영이었다. 그는 선지자의 일을 맡게 되고부터 자신에게 예언의 영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한 것이다. 일부 유대인사이에는 예언의 영이 이스라엘 땅에 국한된다는 견해가 있었다. 이런 견해는 에스겔이나 다니엘에게서 오류로 밝혀진 셈이다. 그러나 혹자는 요나가 이런 생각에서 도망했다고 생각한다. 요나는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예언의 영도 피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1) 요나는 니느웨로 가 그것을 쳐서 외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그것이 오래고 위험한 여행이며 그는 길도 알지 못한 때문이거나 아니면 저 크고 강력한 성에 그토록 귀에 거슬리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름없다고 두려워한 때문이다. 그는 혈육의 소리를 듣고 심부름 가기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안전히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기 나라의 특권을 과도히 의식한 나머지 다른 나라가 신적 계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그는 거기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으로부터 다른 민족에게로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구심을 가졌다. 이것은 요나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4:2). 그가 이 여행을 싫어 한 이유는 니느웨인들이 회개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은총 속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예견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민족에 대한 총애는 오래도록 하나님의 특별하신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수치가 될 터였다.
(2) 그는 다시스로 가려 했다. 혹은 다소로 갔다(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아마 이는 그곳에 그의 친지나 친척이 있어서 얼마간 거기에 체류할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욥바로 내려갔다. 욥바는 이스라엘 땅에서 유명한 항구였다. 그는 다시스행 선박을 찾기 위해 욥바로 갔다가 거기서 그런 배를 다시스행 선박을 찾기 위해 욥바로 갔다가 거기서 그런 배를 하나 만났다. 섭리는 그의 의도에 부응해서 도망할 기회를 그에게 주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순풍을 만날 수 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준비된 길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닌 것이다. 그는 배가 닻을 막 끌어올리고 다시스로 항해하려는 것을 보고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아마 그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기 때문에 그 배에 탔을 것이다. 아시스가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가는 배라도 그는 탔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에 있다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선가를 주었다. 그에게는 배삯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만 타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고, 따라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함께 가려고 했다. 선원이든 승객이든 상인이든 다시스로 가려는 사람이면 누구든 좋았다. 요나는 자기 의무 뿐만 아니라 위신도 망각하고 어중이 떠중이와 함께 어울리며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에 올랐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하시면 어떻게 되는지 숙고하자.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는 여호와의 영도 말씀과 함께 임하여 우리 안의 모든 생각도 복종시킨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 주목하자.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귀도 열어 주셨기 때문에 거역하지도 않았고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다(사 50:5)고 고백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에게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사 2:22). 그러므로 시련의 때에 우리 자신이나 남을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하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폭풍 속의 선지자 (요나 1:4-10)
요나는 승선하여 다시스로 항해할 때 이만하면 충분한 것으로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하나님의 탈주자 즉 도망병으로 추격당하고 발각되고 뒷덜미를 잡혀 정죄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Ⅰ. 하나님께서는 추격자를 보내셔서 요나를 뒤따르게 하신다. 그것은 대풍 곧 바다 가운데의 폭풍이었다(4절). 하나님께서는 그 곳간에 바람을 넣어 두고 계시는데(시 135:7) 이 곳간에서 강하고 맹렬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셨고 "던지셨다" (원의는 그렇다). 폭풍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며 왕왕 그의 진노의 사자가 된다. 하나님은 바람을 그의 장중에 모으신다(잠 30:4). 그는 바람을 자기 주먹에 쥐고 계시다가 원하실 때면 손에서 쥐어 짜 내신다. 우리로서는 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람에게 명령하고 지시하신다. 이 바람은 효력을 나타내어 대풍과 폭풍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람이 일어날 때는 파도도 일어나게 되는 때문이다. 죄는 영혼에 대풍을 일으키며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폭풍을 몰고 온다는 데 유의하자. 죄는 분요케 하고 혼란시키는 것이다. 폭풍은 기승을 부려 배가 거의 깨어질 정도로 되었다. 뱃사공들은 "그 배" (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외에 달리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그 배밖에 없었다. 그때 그 바다에는 다른 배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가 탄 배는 다른 어떤 배보다 더 요동했고 더 위험했던 것 같다. 이 바람은 요나를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로 다시 데려 오도록 하기 위해 보내심을 입었던 것이다. 우리가 곁길로 나가 방황할 때 비록 폭풍에 의해서 일망정 다시 고분고분하게 만들며 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는 것은 크나 큰 자비이다.
Ⅱ. 배의 승무원들은 이 폭풍에 놀랐다. 그러나 관계 인물인 요나만이 무관심하였다(5절). 뱃사공들은 자기들의 위험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쟁논하시는 상대는 그들 뱃사공이 아니었다.
1. 사공들은 두려워했다. 그들의 직업이 뱃사공이니만치 이런 종류의 위험에는 아주 정통했기에 폭풍쯤은 무시하는 게 상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사공 중 가장 경험이 많고 가장 건장한 자조차 떨기 시작했다. 이 폭풍에는 보온 바람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때문이다. 이 폭풍은 너무도 갑자기 일어났고 너무도 강하게 불었던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극히 담대한 자에게도 공포감을 주실 수 있으시며 큰 자와 두목들도 바위와 산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하실 수 있다는 데 주목하자.2. 그들은 각자 자기의 신을 불렀다.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한 데서 온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은 놀라게 될 때까지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바다로 나갈지니라. "여호와여, 환난 중에 저희가 주를 앙모하였나이다" (사 26:16). 그들은 각기 기도를 했다. 그들의 일부는 기도하고 일부는 욕설하거나 하지 않고 전부가 열심히 기도했다. 위험이 전체적이었듯 하나님께 대한 간언도 전체적이었다. 그러나 그들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다. 자기 나라의 신이든 도시의 신이든 자기 수호신이든 각각 자기 신을 불렀다. 각자가 신을 갖고 있었고 어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무신론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오직 단 한분의 하나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많이 있을 필요도 없는 터에 그들이 많은 신을 두며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신을 모셨다는 것은 이교주의의 어리석은 본보기이다. 그들은 비록 단 한분의 신이 계시다는 자연지(自然知)의 지시는 상실했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이 되며(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사 8:19) 환난과 위험에 부딪칠 때는 특히 기도의 대상이 된다는 자연법이 지시는 여전히 따랐다. "환난 때에 나를 부르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 놀라는 자가 있느냐 ? 저는 기도할 것이다. "
3. 그들의 기도에는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그들은 불러 도와주기를 청하여 자기 신들을 불렀으므로 자기 스스로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네 자신을 도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 철칙인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졌다. 바울의 뱃사공들도 같은 경우를 당하자 배의 짐과 기구와 밀까지 도 바다에 던졌다(행 27:18, 19, 38). 이들은 사를 위해 항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물건과 화물을 싣고 가서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가? 자기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배에 실린 모든 물건을 다 던져 버리고도 만족하며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생에 대한 애착이란 이렇게도 강렬할 것이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4).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익으로도 영혼의 손실을 상쇄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영적 생명 즉 영혼의 생명도 귀중히 여기지 않을 것인가? 세상 재물은 날개가 달려 있어 제 스스로 날아가 버린다. 아니, 우리가 여기에서와 같이 재물에 날개를 달아 주어 쫓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재물이 그 소유주에게 해를 끼치게 될 때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기꺼이 그 재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재물을 내던져 버리지 않으면 재물이 자기들을 내던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 영혼을 위해 지혜롭다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자기 신앙과 선한 양심을 난파시키고 자기 영혼을 영원히 파멸시키지 않고서는 간직할 수 없는 재물과 쾌락과 명예를 기꺼이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영적 행복의 확보를 위해 현세적 이익을 포기하는 자들은 마지막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조건으로 상실하는 것에 대해서 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누구나 요나는 거기에 있던 어느 사람보다 더 분주했을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실 아니 배 밑창에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든 요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도, 안에서 울리는 죄의식도 그를 깨우지 못했다. 아마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실까 두려워하여 얼마간 잠을 피하다가 곯아 떨어졌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과 위험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달디단 잠을 자고 있었다. 죄는 마비시키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히 3:13). 사탄이 유혹으로 사람을 하나님과 의무에서 도망하게 하여 세상적 안전감에서 단잠을 자도록 재우는 것은 그들로 자기 불행과 위험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지키도록 해야 한다.
Ⅲ.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하라고 촉구하였다(6절). 선장은 그에게 나아가서 이르기를 창피한 줄 알고 일어나 생명을 위해 기도하거나 죽음을 위해 준비하라고 했다.
1. 선장은 그에게 지당하고 필요한 질책을 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책망한 선장을 칭찬하고 싶다. 그는 요나와 생면부지의 사이였지만 그 당장에는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귀한 영혼을 가진 자마다 또 영혼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 지성껏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요나가 측은히 생각된다. 그에게는 이런 책망이 필요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만일 제 자리만 지켰더라면 니느웨의 왕을 책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의무의 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는 가련한 일개 선장에게 책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축소시키며 얼마나 비천하게 만드는지 유념하자. 그런데 우리는 이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적시의 책망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나의 회복을 위한 첫 단계였다. 그것은 마치 첫 닭 우는 소리가 베드로에게 정신을 들게 할 것과 같다. 폭풍 속에서 잠자는 자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 받는 것이 여간 복된 일이 아니다.2. 그는 적절한 충고의 말을 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는 지금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있다. 너는 어찌 해서 일어나 네 신을 부르지 않느냐?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위험에 대한 공포와 구원에 대한 바람 같은 것을 품지 않느냐?" 타인의 기도는 우리 신앙을 자극하고 활성화한다는 데 주목하자. 자비에 공동으로 동참하기를 의 희망하는 자는 도리상 제몫의 기도와 나간다고 구를 완수하여 그 자비를 오게 해야 한다. 사회가 환난을 당할 때에 만일 은혜의 보좌 앞에서 발언권이 있는 자라면 마땅히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 발언권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이런 기도의 의무를 촉구받고 환기될 필요가 있다.
3. 그는 이 충고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는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들은 자기들이 부른 많은 신들이 최고신과 그들 간의 중재와 대언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선장은 한 하나님을 언급하며 그로부터 구원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도시키기 위해 그는 위험이 매우 크고 절박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다 망하게 되었다. 우리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다. 게다가 죽음이 한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멸망이 방지되고 그들이 망하지 않을 희망은 아직 다소 남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아직 다소 남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으며 희망이 있는 한 기도할 여지는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또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룰 분은 하나님뿐이시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가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면 우리는 구출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므로 위험이 아무리 절박할 때 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 보며 그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요나가 이 폭풍의 원인과 빌미로 판명된다.
1. 사공들은 이 폭풍 자체나 풍랑에 의한 자가들의 재난에 서 독측하고 이상한 점을 너무도 많이 관찰했기 때문에 그 폭풍이 신의 공의의 사자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배 안에 있는 자들 중 누군가가 모종의 큰 죄악을 범하였으므로 신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폭풍을 보냈다는 것이 사공들의 판단이었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토인들처럼(행 28:4) "진실로 우리들 중한사람이 살인한 자거나 신을 모독한 자거나 맹세를 깨뜨린 자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바다의 복수가 이처럼 그를 따를 리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 자 때문이다" 라고 저들은 판단했다. 자연의 이지조차 비상한 심판 가운데는 비상한 죄와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되어 있다고 가르켜 준다. 우리는 언제 어떤 재앙이 임하든지 그 이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다는 단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는 우리가 행한 악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재앙이 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쟁논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다.2. 그들은 그들 중 누가 이 폭풍을 초래시킨 장본인 즉 범인인가 알기 위해 제비를 뽑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의심한 자는 없었다. "주여, 내니이까? 그 자가 내니이까?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자를 의심하면서 그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재앙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 재앙이 무엇으로 인해 우리에게 임했는지 알아서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일이다. 고통의 원인이 교정되면 고통은 물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 나와 다투시는지 그 까닭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내게 가르치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사공들은 그 배의 중량을 치명적으로 초과시키는 장본인과 화근이 누구인지 알고자 원했다. 이는 한 사람이 죽어 여러 사람을 대신하고 온 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이것은 편리할 뿐만 아니라 극히 공정한 처사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제비를 뽑았고 그로써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했다. 하나님께는 모든 자의 마음을 아시며, 그로부터 감추어진 비밀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목과 결정에 순순히 따르기로 합의하고 제비가 가리키는 자를 진범으로 취급하기로 동의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지로써 성경이 말씀하는 사실을 알았던 때문이다. "제비는 뽑으나 그 작정은 여화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잠 16:33). 이방인들조차 제비뽑는 일을 거룩한 일로 여겨 아주 진지하고 엄숙하게 행하며 유희로 행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신의에 호소하는 일을 존중과 경외심으로써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3.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의 양심은 "네가 그 사람이다" 라고 그에게 말했었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사실을 말했더라면 그들을 이 환난에서 구출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인이 흔히 그렇듯 요나는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즉 제비가 자기에게 떨어질 때까지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노력은 그 배 안에 다른 일로 요나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자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폭풍이 추적하며, 제비가 찾는 자는 바로 요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주인이 징계하는 것은 제 자식, 제 종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징계한다. 만일 남이 범죄하면 법에 호소할 것이다. 폭풍을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시키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폭풍은 요나를 다시 데려 오라고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장된 죄와 죄인을 밝히 폭로시키고 모든 산 자의 눈에서 은폐된 것으로 생각하는 미련한 것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으시며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의 오른 손은 자기를 모해하려는 모든 대적뿐만 아니라 자기를 유기하는 자기의 모든 종들도 찾아내실 것이다. 그들이 바다 밑으로 도망하거나 배 밑창으로 내려가더라도 그는 찾아내실 것이다.
4. 요나는 선장과 사공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게 된다. 그는 낯선 자였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죄수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고 고소할 만한 죄상도 몰랐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인한테서 자백을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의 입에서의 나온 말로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때문에 요나를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고동으로 처해 있는 난파의 위험만으로도 그에게서 사실을 실토시키기에 충분했던 때문이다. 비록 그들을 이처럼 손해보게 만들고 위험을 당하게 한 장본인이 제비로 발각되었다 곤 하나 그들은 누구나 우려하듯 요나에게 난폭하게 덤벼 들지는 않고 조용하고 온화하게 그의 사정을 조사하였다. 그것은 범죄자가 발각되고 정죄받을 때 치러야 할 동정심이었다. 그들은 요나에게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청컨대 무슨 일인지 우리에게 고하라." 그들이 묻는 것은 두 가지이다.
(1) 하나는 그가 이 폭풍의 원인임을 자인하려는지 않는지의 의문이다. 제비가 가르쳐 준대로 폭풍이 요나 때문에 온 것인지 아닌지 그들은 알고자 하였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이 재앙은 진정 너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슨 이유인가? 네가 이렇게 벌을 받는 죄는 무엇인가." 아마 그들은 요나의 근엄한 표정과 점잖은 태도에 제비가 잘못 뽑혀 엉뚱한 사람이 화를 당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요나가 자신의 유죄를 인정치 않는다면 제비뽑은 것을 신임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에서 자기들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그에게 간청한 것이다. 자기들의 환난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는 자들은 심문에서 시작해야 할뿐만 아니라 조사를 진행하여 세부적인 데까지 이르고 부지런히 탐색해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2) 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직업은 무엇인가? 그의 나라는 어디인가?
[1] 그들은 그의 직업에 대해 묻는다. "네 생업은 무엇이뇨?" 이것은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에게는 적절한 질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그의 직업이 이런 환난을 그들에게 초래할 만한 것이리라고 의심하였다. "너는 점쟁이냐, 술객이냐, 점술의 문하생도냐" 너는 이 바람을 주술로 오게 했느냐? 너는 무슨 일에 종사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발람의 직업 같은 것이 아니냐? 이 폭풍은 너를 지지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냐?"
[2] 그들은 요나의 나라에 대해 묻는다. 한 사람을 "너는 어디서 왔느냐 ?" 하고 물으면 다른 사람은 그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네 고국은 어디뇨?" 하고 물었다. 또 세번째 사람은 같은 취지로 "너는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 점술로 유명한 갈대아 출신이냐? 아니면 도둑질로 유명한 아라비아 출신이냐?"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요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이것은 어느 나라인지를 알면 그 나라의 신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폭풍 중에 있는 자기들에게 혜택을 베룰 수 있는 신인지 아닌지도 추측하나 있게 되기 때문이다.
5. 이러한 심문에 대해서 요나는 자기 신분을 완전히 밝힌다.
(1) 그들은 그의 나라에 대해 물었는가?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자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부조로부터 받은 이스라엘 종교에 속하기도 한다고 말한다(9절). 그는 히브리 사람이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가 범죄인이라는 것을 자인하기가 더욱 수치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앙을 소유하고 그런 특권을 향유하는 히브리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의 죄보다 더 크고 훨씬 더 악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의 직업에 대하여 물었는가? "네 생업이 무엇이냐?"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그의 종교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를 본업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내가 예배드리는 것도 그 하나님이요, 내가 기도 드리는 것도 그 하나님이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주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그 모두를 지배하는 분이시다." 그는 그들이 묻듯 특정한 나라의 신도 아니며, 그들이 각각 부르던 그런 신들도 아니다. 그는 온 세상(땅) 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다와 육지를 다 지으셨기 때문에 바다와 육지에 자기가 하고 싶으신 일을 행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신다. 요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자신을 정죄하려는 뜻에서 일뿐만 아니라 많은 신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사공들로 하여금 살아 계시고 단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우리가 낯선 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 대난 우리의 관계와 경외를 기꺼이 고백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친숙히 알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그들은 그의 죄에 대해 물었는가? "이 재앙이 너의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하였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는 자기가 의무를 버리고 달아나는 중이었고 폭풍은 자기를 데려가려고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요나가 슬픔과 수치감에 젖어 이 말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칭하고 자신을 정죄하면서 사공들에게 배반한 종을 데려오기 위해 이 같은 폭풍의 사자를 보낼 수 있으신 여호와가 얼마나 위대한 신이신지를 암시했으리라
6. 이 발언이 사공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 언급된다.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였다. "이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1) 하나님 곧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셨다. 그 폭풍은 진노한 공의의 손길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그들은 그 폭풍이 자기들을 사정없이 몰아붙일 것이라고 두려워할 만했다.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내리는 심판은 특별한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온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섬기던 자가 단 한 번 어떤 특정한 업무에서 도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진노하셨다. 이 일은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단 한 번의 범죄로 이처럼 혹독하게 벌받는다면 그토록 많고 크고 악한 죄를 지은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의인이 이처럼 겨우 구원을 얻으며 단 한 번의 불복 행위로 이렇게 추적을 받는다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찌 서리요?" (벧전 4:17, 18) 그들은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고 말했다. "네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어찌 그의 낯을 피해 도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둔한가" 그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고 까닭 모를 짓인가!" 그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꾸짖음을 당하듯(창 20:16) 뱃사공들에게 이처럼 책망을 받았다. 경건한 신앙의 고백자들이 그릇된 일을 행한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책망을 들을 것으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한테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도 이 일에 연루시켰느냐?"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들은 그 범죄의 해로운 결과가 얼마나 멀리까지 미치며, 그 죄로 말미암아 어떤 해가 발생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자.
선지자의 운명 (요나 1:11-17)
요나라는 사람 때문에 이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재앙의 빌미가 요나라는 것을 알아 내는 것만으로는 이 폭풍의 요구에 부응하기가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이 소동의 장본인 요나를 찾아 냈다. 그러나 무언가 더 이상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여전히 요동하고 점점 흉용해지며(11절) 또 더욱 더 흉용해지기(13절) 때문이다. 죄가 우리 고난의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도 그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데 유의하자. 그러므로 사공들은 계속해서 힐문한다.
Ⅰ. 그들은 요나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직접 묻는다(11절).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들은 요나가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와의 상의없이는 그의 일일지언정 아무 행동도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범죄자인 것 같지만 동시에 참회자로도 여겨지기에 그들은 그를 모욕하거나 그에게 무례히 행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실을 범하고 그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자에게 아주 친절하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요나가 배를 구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을 달래 생각해 낼 수 만 있다면 그를 바다에 던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는 아마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사건이 너무나 분명하여 그를 배에서 들어 바다로 던지는 것밖에 달리 방책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를 자기 자신의 고발자인 동시에 심판자가 되게 하라. 그리고 그 역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죄악이 폭풍을 일으키고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 아래 갖다 놓을 때 우리는 바다를 진정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는 폭풍 속에 있을 때 기도하며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폭풍을 보내신 목적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폭풍은 잔잔해질 것이다. 그러는 우리는 특히 폭풍을 야기시킨 죄악에 대해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 죄를 발견해 내어야 하며, 참회하며, 고백해야 하고 싫어있으며, 부인하며, 완전히 버려야 한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리요?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 죄가 이런 재앙을 가져온 때문이다.
Ⅱ. 요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는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려고는 하지 않고 그들의 수중에 맡기며 자기를 바다에 던져 주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해야만 바다가 조용해질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그는 사공들에게 대한 자비심에서 이 일을 제의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요나 자신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다윗은 "주의 손으로 나를 치소서,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내니이다. 나로 내 죄 때문에 죽게 하시고, 무죄한 자로 내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하시지 마소서" (대상 21:17)하고 말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자의 언어이다. 참 회개자는 그들의 죄나 어리석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쓰라린 아픔을 당하거나 곤란에 처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간절히 소원한다. 마찬가지로 요나도 자기를 잡으러 이 폭풍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이 일을 제의한다. 그는 여호와께 영원한 불행의 심판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백히 그를 이 심판에 처하시는 것을 보았던 까닭에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여 바다에 던져달라고 요구한다. 죄에 대해 진심으로 겸비하는 자들은 사형 선고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승복하려 한다는 데 주목하자. 요나가 이것이 자기 죄에 대한 형벌임을 알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 승복하며 그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외롭다고 인정한다. 비록 육신은 멸망을 당하며 아무리 멸망을 당하더라도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고전 5:5). 그는 여기서 이유를 제시한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모든 허물을 기꺼이 자기에게 돌리고 모든 환난을 그들의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 대풍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순전히 범죄한 나 때문이라.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지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악하게도 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 그가 너희에게 노여워하시는 것은 나 때문이다. 나는 실로 나를 위해 급파된 이 바람을 호흡할 자격도 없고 나 때문에 이처럼 요동하는 배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 너희는 나 때문에 화물을 바다에 다 버렸다. 그와 같이 나도 바다에 던지라. 내게는 물에 빠져 죽는 것만 해도 너무 후한 벌이다. 그토록 복합적인 범죄에 한 번 죽는다는 것은 너무도 약과이다."2. "바다를 조용하게 진정시키려면 나를 던지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폭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라면 물건을 바다에 던져봐야 바다를 진정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바다에 던져야 한다." 양심이 잠에서 깨어나고 거기에 폭풍이 일어날 때는 혼란을 야기시킨 죄와 결별하며 그 죄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으로도 양심을 잔잔하게 변화 시킬 수가 없다. 우리 양심을 가라 앉히는 것은 돈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배 위에서 던져야 하는 것은 요나이다.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준다는 점에서 요나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러나 이 양자 간에는 구체적 차이점이 있다. 즉 요나는 폭풍을 잔잔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었지만 그 폭풍은 요나 자신이 불러 일으킨 것이었는데 반해 그리스도께서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폭풍은 우리가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도 요나가 흉용한 바다를 잔잔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도록 내어 주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즉 그는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Ⅲ. 가련한 사공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을 피해 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13절).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만일 요나와 굳이 헤어져야 한다면 그를 안전하게 육지에 내려 놓으려고 노력했지만 능히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모든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바다가 그들의 능력보다 더 세찼고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떤 수단으로도 육지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때때로 그들이 육지 쪽으로 나간다 싶으면 어느 새 바다로 다시 떠밀려 나왔다. 그들의 배는 여전히 너무 무거웠다. 요나가 그 배 안에 타고 있는 한 그들이 모든 화물을 바다에 내던져 배를 가볍게 한다고 해도 배는 가벼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바람과 조류 곧 하나님의 복수의 바람과 신적 계획의 조수에 거슬러 노를 저었다. 하나님과 다투어도 소용없으며 우리 죄를 멸하는 길 외에 달리 우리 자신을 구원하려고 생각해 봐야 헛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이로써 사공들이 비록 요나 때문에 대풍이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요나 자신의 판결을 집행하기를 몹시 싫어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들이 이처럼 그 일을 꺼려한 것은 피 흘리는 죄가 자기들에게 돌아올까봐 두려워한 때문이기도 했고, 가련한 요나에게 대해 동정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련한 요나에게 대해 동정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나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죄인들이 겸손해지고 자신을 더 낮추며 스스로 심판하고 정죄하면 할수록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더욱 더 동정을 얻기 쉽다는 데 주목하자.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라고 말하는 데 적극성을 보이면 보일수록 사공들은 그 일을 실행하는 데 더욱 소극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Ⅳ.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피를 흘리는 죄가 자기들에게 돌아 오거나 전가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14절). 그들은 아무리 힘차게 노를 저어봐야 헛 일이라는 것을 깨닫자 노젓기를 중지하고 기도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참되시고 살아 계신 주 여호와께 부르짖고 더 이상 각자의 많은 신들, 많은 주인들에게 부르짖지 않았다(5절 참조).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는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로써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혼자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한 뒤 먼저 하늘의 법정에 자기들이 기뻐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호소한다. 더 더구나 요나 때문에 이런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여 악의로 그를 바다에 던지거나 복수하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행한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처럼 그의 하나님도 그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달리 자기들의 목숨을 건질 길이 없으므로 자기를 방위하기 위해 부득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요나 자신이 그토록 큰 죽음의 판결을 내렸으므로 정의의 사도로서 이 일을 행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나가 경외한 하나님께 그의 생명 까닭에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그들은 피흘리는 죄를 지을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이 특히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와 친교하는 자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요나가 비록 단 한가지의 사례로 잘못을 범했다고는 하나 그가 바로 그런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래의 양심을 지닌 자라면 피흘리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윗처럼 그 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시 51:14). 여기의 사공도 그러하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전에 그들이 바다의 위험에서 구해 주기를 기도할 때와 마찬가지의 열성으로 이제는 피흘리는 죄의 위험에서 구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요나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선한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이요,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의 경배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 무례한 사공들조차 그에 대해 존경심을 품었고 그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무죄한 자의 피는 고귀하지만 성도의 피, 선지자의 피는 더욱 더 고귀하다. 그래서 그런 자의 피를 흘리는 자는 기어코 죄를 지게 되는 것이 그 값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공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복수에 추격 당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의 처형은 두려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요나와 다투고 있는데도 그들은 "우리로 그에게 손을 대지 말게 하셨으면" 하고 생각한다. 당시에 이스라엘인들은 선지자들이 의무를 이행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마구 살륙하고 있었다. 이세벨의 박해가 그 좋은 본보기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생명이 아까운 줄 몰랐다. 이것은 이들 이방인들의 온정 때문에 더욱 악화된다. 사공들은 요나가 의무의 길에서 벗어났음에도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대해 온정을 품었던 때문이다.2.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봐 무척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대상 16:22; 시 105:15)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나를 죽이면 생명이 위험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이 일로 우리가 치명적 딜렘마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우리는 그의 생명을 살려 주면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취한다고 해서 우리를 멸망하지도 마소서." 그리고 그들의 탄원은 훌륭하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불가불 행하게 하셨나이다. 요나를 추격한 바람이나 그를 찾아 낸 제비는 다 주의 지시하에 있고 우리는 그 지배를 받나이다. 우리는 섭리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에 반하여 이 일을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우리가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우리 취향과 의도에 전혀 어긋나는 일을 행하게 될 때, "여호와여, 주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다소 만족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설령 우리를 기쁘게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Ⅴ. 그들은 두려워하던 그 죄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탄원하고 나자 집행에 착수한다(15절). 그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다. 그들은 요나를 배에서, 그들로부터 들어 노도와 폭풍으로 요란한 바다에 던졌다. 바다는 "다오, 다오, 그 반역자를 넘겨다오. 그를 내게 넘기지 않으면 평화를 기대하지도 말아라" 하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가련한 요나가 매우 당황하고 놀랐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고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심판관 되신 여호와 앞으로 대령 당하기 직전에 있는 자신의 신세를 관조한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도망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어떤 파멸에 발을 내딛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저들에게 화 있을진저, 저희는 내게서 도망했음이니라." 죄가 폭풍을 일으키는 요나가 될 때 우리는 그 죄를 이처럼 바다에 내던져야 한다. 우리는 그 죄를 버려야 하며, 죽여야 하며,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가 도리어 노력을 멸망과 나락에 빠뜨려 익사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철저한 회개와 개심으로써 우리 죄를 바다에 던지고 다시는 회상하지도 않으며 그리로 되돌아 가지도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유의 자비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진압시키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실 것이다(막 7:19).
Ⅵ.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폭풍은 즉시 멎었다. 바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만족하여 편안히 쉰다. 바다의 뛰노는 것은 그쳤다. 하나님께서 광풍을 곧 조용히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지고한 능력의 증좌이며 고난의 목적이 응하고 달성될 때, 그 고난을 즉각 제거하신다는 것은 그의 공평한 통치의 본보기이다. 그는 영영토록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굴복하여 제 주장을 포기하는 시기가 그의 쟁논의 상한선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킨다면 그는 곧 진노에서 돌이키실 것이다.
Ⅶ. 이로써 사공들은 요나의 하나님이 유일한 참 신이라는 신앙이 더욱 더 확고하게 되었다(16절).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혔고 장차는 오직 그 하나님만 예배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런 모양으로 능히 멸하고 능히 건지실 수 있는 하나님은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폭풍을 일으키시고 진정시키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을 때, 그들이 자기 종 요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을 때, 그들이 파멸 직전에 있는 그들에게 구원을 내려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을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렘 5:22). 여호와께 대한 두려움의 증거로서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다시 상륙하자 제물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데 대한 감사와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보상을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다. 또는 아마 배 위에는 아직도 하나님께 제물이 될 만한 것이 남아있어서 그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제물로 드렸을 것이다. 또는 이것은 기도와 찬송의 영적 제물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뿔과 발굽이 달린 황소나 수송아지의 제물보다 기도와 찬송의 신령한 제물을 더 즐거워하신다(시 107:22 이하 참조). 우리는 자비가 따라올 때 뿐만 아니라 자비를 받을 때에도(이것은 한결 더 관대한 것이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계속 연구하는 자답게 서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Ⅷ. 결국 요나의 목숨은 기적에 의해 건짐을 받게 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이 나올 것이다. 심판 도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기억하신다. 요나는 해를 입는다기보다 놀라게 될 것이며 자기 죄에 대한 징벌을 받는다기보다 자기 의무에로 환원될 것이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하다가 그의 복수의 손아귀에 빠지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하실 일이 많으시기 때문에 큰 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그를 삼키게 하신다(17절). 우리의 구주께서도 그것을 큰 물고기라고 부르신다(마 12:40). 이 고기는 아마 다른 것보다 목구멍이 더 큰 가장 큰 종류의 고래였을 것이다. 고래의 뱃속에서는 때때로 전신갑주를 한 사람의 시체가 발견된다. 창조의 기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크는 물고기를 지으셨다고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창 1:21). 그리고 시편(시 104:26)에는 바다 속에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개역 성서:악어)이 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리워야단의 할 일도 찾아 내셔서 그를 예비하시며 그를 "세시며" (원의는 그렇다) 그를 요나의 수용자와 구출자로 지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지배하시며 그들을 이용하여 자기 백성에게 대한 자비의 계획을 이루실 수 있으시며 인간의 인식 범위에서 극히 멀리 있는 바다의 고기들과 인간의 지배에서 전혀 벗어나 있는 큰 고래까지도 부리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이 물고기는 예비되었고 배 바로 곁 물 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요나가 비록 죽어 마땅한 존재였지만 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게 하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이 구원을 바라보고 이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으신 그의 능력과 자기에게서 도망치며 노엽게 하였던 자를 구원하려고 하신 그의 긍휼에 찬미를 보내자. 요나가 멸망을 당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자비에서 연유한 것이다. 물고기나 요나를 삼킨 것은 요나를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온다(삿 14:14).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삼야를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니 고기의 체온에 타죽지도 않았고 공기 부족으로 질식하지도 않았다. 자연 현상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했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자연의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요나를 기적에 의해 보존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그를 신적 자비의 기념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간 자들에게 회개하며 돌아오라고 격려하기 위해서이다.2. 그를 니느웨에 보내어 성공적인 선포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베풀어진 이 기적의 소식이 니느웨에 다다르면 그의 선포 사업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3. 그를 그리스도의 훌륭한 예표로 삼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성서의 말씀 곧 이 성경 말씀대로 장사한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던 것이다(고전 15:4).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0). 요나의 삼일 장사는 그리스도 장사의 예표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무덤을 예비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묘지도 예비하셨다. 그리스도의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된다는 것은 오래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사 53:9). 요나의 무덤이 새롭고 이상한 무덤이었는가? 그리스도의 묘지도 사람이 전에 장사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요나가 삼일삼야를 거기에 꼼짝 않고 있었는가? 그리스도도 그러셨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다시 일어나 이방 세계에 회개의 교훈을 전해 주기 위해 사흘 동안 장사되었던 것이다. 와서 주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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