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의 운명 (오바댜 1:1-9)
이 예언이 겨냥하는 민족은 에돔이며 혹자는 이것이 조만간 거꾸러질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랍비들은 에돔을 로마로 이해한다. 그들은 에돔이 기독교적 로마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로마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앙심을 품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반기독교적 로마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이 아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돔은 이전에 여호사밧에게 굴복했듯 마카비 시대에도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여기에 예언된 에돔의 멸망은 그들의 조상에서의 배척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것처럼 보이며 멀리 복음 교회에 대적하는 자들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대적은 그와 같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칼이 이두메아 위에 임함을 읽었는데(사 34:5) 이것은 하나님이 시온과의 송사를 위해 복수하실 큰 날을 의미한다(사 34:8).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받은 야곱의 자손이고 에돔은 미움받은 에서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은 환난을 당하였고 에돔인은 형통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인을 보고 기뻐하였다. 혹자가 잘 관찰했듯 이런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큰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에돔의 전체적 최종적 멸망을 조망시키며 이스라엘의 징계의 복된 결과를 전망시키신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에돔에 대한 선전 포고(1절). "우리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문 또는 명령을 들었다. 그는 명령을 하달하셨다. 무릇 그의 백성에게 화를 입히는 자는 정녕 화를 자초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작전이요 명령이다. 그 명령을 번복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한 거소로부터 일어나 심판할 보좌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사자는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았다. "이것은 사자라기보다 오히려 전령이다. 즉 열국에 경보를 전달할 섭리의 사자나 일꾼이다. 또는 이것은 각국에 무거운 경고를 내린 여호와의 선지자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은 서로 외치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분기하라. 우리가 일어나 에돔으로 더불어 싸우자" 라고 한다. 이와 같이 느부갓네살 휘하의 동맹군도 서로 격려하여 분발시켜 그 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너희는 모여 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 (렘 49:14).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의 대적 사이에 유혈극을 벌일 일이 있으실 때는 적격자를 찾아 내셔서 그 마음과 손으로 그 일을 실행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Ⅱ. 승전의 예고. 에돔은 반드시 정복당하고 약탈당하며 무너질 것이다. 왜냐하면 에돔이 신뢰하던 모든 것이 그를 낭패시키며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자도 이와 같이 신뢰하던 것에서 실망을 맛볼 것이다.
1. 그들은 열방 중에 나타낸 자기들의 위엄과 영향력과 세력을 의지하는가? 그런 것들은 감소되고 하락할 것이다(2절). "보라. 내가 너를 열국 중에서 미약하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네 이웃 나라들은 네 우호를 구하거나 너와의 동맹을 청하지 않으리라. 너는 열국 중에서 얼빠지고 충실치 못한 민족으로 크게 멸시를 받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하여 "네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3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2) 제 스스로 좋게 생각하는 자는 남도 자기를 좋게 생각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남들을 시험해 보게 되면 자기 생각이 오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교만은 그들을 속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을 죽인다.
(2)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크다 하며 높이는 자를 쉽사리 낮추실 수 있으시며 낮추는 방법도 찾아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5). 한 때 매우 크게 보이며 큰 애호와 칭송을 받던 자들이 미약해지며 크게 멸시받는 일은 왕왕 볼 수 있는 일이다.
2. 그들은 천연이든 인공이든 제 나라의 견고한 요새를 의지하며 그로 인한 이점을 자랑하는가? 그러한 것들도 그들을 기만할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바위틈에 거했고 그들의 거소는 높았다. 그들은 자기 이웃보다 높은 데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외적에 대비하여 견고한 데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들의 거소는 너무도 높아서 위험해서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에돔이 중심의 교만으로 하는 말은 무엇인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그는 제 힘만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며 마치 전능자의 능력도 자기를 이길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대적 심지어 하나님조차 멸시하며 무시한다(시 10:5). 그들의 조상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존귀와 능력의 영광이 자기들에게 속해 있는 듯이 스스로를 높인다. 제 특권을 상실해 놓고도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은 많다. 에돔은 높고 자고하므로 자기를 능히 끌어내릴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상상한다. 세상적 안전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죄다. 권세와 번영의 절정에서 뽐내는 자들은 이 죄에 빠지기가 아주 쉬우며 이 죄는 다른 어느 것에 못지 않게 인간의 파멸을 많이 성숙시키며 또 파멸이 임할 때 그 멸망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
(2)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가?(4절) 인간이 만약 전능자에게 감히 도전한다면 그들의 도전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에돔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끌어내리겠노라. 높이 솟아오르며 높은 데 집짓고 사는 독수리와 같이 네가 높이 오르며 독수리의 비상보다 더 아니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그것은 네 자신의 공상에 불과하며)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레미야 49장 15, 16절에도 나왔다. 죄인들은 자기들의 자랑거리가 무너지며 신뢰하던 것이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때 반드시 자기의 교만과 안전감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재산과 보물을 의지하는가? 풍부한 재력은 전쟁군자금으로 중시된다. 돈이 그들의 방패이며 견고한 성인가? 그것은 그들의 생각에만 그럴 뿐이다. 왜냐하면 재물은 그들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위험에 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은 대적을 꾀어 들일 것이며 그들은 재물로 인하여 대적의 먹이가 될 것이다(5, 6절). 우리는 이와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앞에서도 읽었다(렘 49:9, 10 참조). 여기에서는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라는 표현이 더 삽입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너와 네 모든 물건이 어찌 그리 없어졌는고!"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선지자는 에돔의 번영이 단절되리라는 것을 예언하면서 슬퍼하고 있다. "너는 어찌 그리 엎드러졌으며 네 몰락은 어찌 그리 큰고! 너는 어찌 그리 마비되었는고! (갈대아어 판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파멸의 심판 아래서도 마치 그것이 보통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이 무감각함을 한탄하는 표현이다. 선지자는 이것이 보통 재난이 아니라 전적인 파멸임을 증명한다.
(1) 재물을 도둑맞고 많은 것 가운데서 일부를 잃는 것은 보통 흔히 있는 재난이다. 그들에게는 도적이 이르며(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는 때문이다), 강도가 밤 중에 와서 그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만 훔친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 마음에 둔 것만 취해 간다. 그들은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은 가져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재화 중에서 잃는 것은 별로 없다. 과수원이나 포도원을 터는 자들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가져가고 얼마쯤은 남긴다. 도적은 주인을 위해 얼마의 과실은 남기며 주인은 자기 손실을 쉽사리 참고 곧 보충할 것이다.
(2) 그러나 애돔인의 경우는 이와 다를 것이다. 그들의 재산은 남김없이 탈취당할 것이며 파멸시키는 군대의 손을 피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극히 귀하고 중한 것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6절).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에서의 것들은 어찌 그리되었는고! 그가 마음을 기울이며 자기 행복으로 삼던 물건들, 그의 좋은 물건들, 그의 가장 좋은 물건들, 그토록 주의 깊게 비장하고 감추었던 보물들이 어찌 적군에게 탐색되어 탈취되었는가! 그의 숨긴 보물들이 어찌하여 약탈되며 수색되며 수탐되었는가! 여러 해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채 수장되었던 것들이 이제 적군에게 약탈되고 있다." 땅 위의 보물은 도적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아무리 굳게 잠가 두며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더라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없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슬기로운 처사이다.
4. 그들은 인근 유력 국가와의 동맹을 의지하는가? 그러나 그 동맹국 역시 너를 낭패시킬 것이다(7절). "너는 사람들과 약조하였다. 너는 암몬인과 모압인을 동맹으로 삼았다. 너는 다른 강대국과도 화목하였다. 그들은 너와 공격 및 방위 조약을 맺었고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것을 엄숙히 약조했을 뿐만 아니라 네게 온갖 도움을 주겠다는 것도 서약하였다. 그들은 네 식물을 먹었고 관대한 대접과 향응을 받았으며 너를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네 나라에 자유로이 주둔하여 병영을 설치했으며 네 원군으로서 대가를 지불받았다. 그들은 다 네 땅의 경계까지 너를 호송하며 네 사신들에게 매우 정중하였고 귀로에는 자기들 나라 변경까지 네 사실을 매우 정중하였고 귀로에는 자기들이 군대로써 기꺼이 너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네가 침략군을 맞아 싸우려고 할 때 너와 함께 지경까지 이르렀다."
(1) "그러나 그들은 너를 속였다. 그들은 네가 극도의 곤경에 처했을 때 등을 돌려 퇴각했고 도주했다. 그들은 지친 나그네를 실망시키는 상한 갈대와 같았다. 그들은 목마른 길손을 절아시키는 메마른 여름 시내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그 어떤 무게에도 견디지 못하며 위안을 주지 못한다."
(2) "아니, 그들은 너를 이겼다. 그들은 네게 너무 억센 상대였다. 그들은 네게 사기 약조를 하였고 기만으로 너를 파멸시키며 위험으로 몰아넣고 네 대적의 밥이 되게 하였다." 육체로 자기 팔을 삼는 자들은 그 팔로 자기를 대적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3) "그들은 네 아래 상처(흠정역)를 베풀었다. 즉 그들은 네 아래 지주가 될 것을 베풀었다. 그래서 네게 뒷받침이 되게 하며 의지할 기초가 되게 하며 쉴 수 있는 베개가 되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를 다치게 하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것은 네게 가시 같을 뿐만 아니라 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래에 자기의 권능을, 팔과 사랑의 팔을 괴어 주신다면 그것은 견고하고 편안하게 할 것이다. 우리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약조한 자들을 의지하며 그들이 우리 아래 베풀어 주는 것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상처와 수치로 판명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이렇게 계략으로 속이는 자들을 믿고 의지한 에돔에 대해 공정한 비평이 내려지고 있다.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를 배신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라는 권면을 받으면서도 피조물을 신뢰하여 자신을 기만하는 자들은 자기가 지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점을 명심하자.
5. 그들은 모사들의 계략을 신뢰하는가? 그런 자들도 그들을 낭패시킬 것이다(8절). 에돔은 대정객들로 유명하였다. 그들은 학식과 경험이 많은 자로서 권좌에 앉아서 온갖 통치술에 통달했다고 무릇 조약을 맺을 때면 인방의 모사들보다 탁월한 지모를 나타내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사들이 우매자가 되었다. 지혜자들을 그렇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있는 자를 멸하지 않겠느냐? 일반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며(시 49:10)" 지혜도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할 것이다. 또 지혜자로서도 그들은 그 모든 계교에서 멍청할 것이다. 그들이 온갖 머리를 다 짜서 세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그들의 계책은 실패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과 국민의 이익을 확립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계획 때문에 양자는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데만이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다(렘 49:7). 다음을 주목하자.
(1) 이것은 육신의 팔을 의지한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정한 벌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지각이 없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연약하며 변덕스러우며 거짓된 인간을 신뢰할 정도로 지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각을 멸하실 것이다. 죄의 길을 피하는 데 자기 지각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지각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그들로 위험의 길을 피하지 못하게 하셔 마땅하다는 데 유념하자. 어리석으려고 하는 자는 계속 어리석게 두라.
(2) 그것은 파멸의 전조였다. 하나님께서 모사들로 하여금 국가의 평화에 속한 일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실 때 그 나라의 파멸은 확정된다. Quos Deus vult perdere, eos dementat-즉 하나님께서는 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어리석게 만드신다(욥 12:17 참조).
6. 그들은 자기 군대의 힘과 용기를 의지하는가? 그들은 강건할 뿐만 아니라 용맹한 자들이기도 해서 원수를 대적할 수 있고 제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다르다.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다. 그들의 용기는 떨어질 것이며 이로 인해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며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9절). 용사가 놀라며 전쟁에 질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게 될 때는 약하고 비무장한 자들이야 물론 멸망자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낙심하는 수밖에 없다. "백향목이 흔들리면 잣나무가 어찌 슬피 부르짖지 않겠는가!" 강한 자의 죽음이나 화해는 왕왕 다수의 죽음이나 멸망으로 판명된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보호를 위해 용사를 의지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는 경우에랴!
에돔의 죄 (오바댜 1:10-16)
우리가 에돔의 운명이 전적인 멸망에 붙여졌다는 것을 읽었을 때 "그는 어떤 악을 행했기에 이런 심판을 받는가?" 하고 묻을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이 에돔과 다투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에돔에는 잘못이 많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범죄한 백성이요 허물진 민족이었다(사 1:4). 그러나 그들이 책망받는 죄는 단 한 가지이다. 이것은 그들의 죄의 양을 채우며 이 파멸을 초래시킨 죄였다. 그 죄 때문에 그들이 여기서 기소되며 유죄 선고를 받으며 정죄된다. 그 죄는 곧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10절). "그것은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며 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해 품은 옛날의 유전적 원한을 인하여 너는 이 모든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인간에게 대한 가해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의로운 신이시며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신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심판관으로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에게 신원해 주시고 억울케 하는 자에게는 복수하실 것이다. 모든 포학, 모든 폭력은 전부 불의이며 죄이다. 그러나 다음 두 대상에게 행한 횡포일 경우에는 그 포학을 크게 악화시킨다.
1. 동족에게 대한 포학. "그것은 네 형제에게 행한" 포학이다. 그는 네게 가까운 피붙이다. 너는 그의 속량자(go l)가 되어야 할 신분이다. 남이 그에게 나쁜 일을 행하면 그것을 시정해 주는 것이 네 의무이다. 그런데 네 자신이 직접 그에게 괴로움을 주다니 얼마나 악한 일인가! 너는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며 모욕한다. 이것은 심히 악한 죄이다(시 50:20).2.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한 포학이라면 더욱 더 악하다. "네가 포학하게 행한 자는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네 형제 야곱이다. 그는 하나님께 친근한 자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를 미워했고 또 하나님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시며 질투로 그의 일을 옹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일에 관여하기를 아주 기뻐하시며 그에게 대한 포학을 자신이 당하는 포학으로 간주하신다. 무릇 야곱을 범하는 자는 야곱의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슥 2:8)." 그래서 이 포학은 crimen loesoe majestatis-즉 대역죄이며 이 죄에 대해 에돔은 치욕적인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이로 인해 너는 파멸시키는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다음에는 보다 세부적 사항이 언급된다.
Ⅰ. 에돔이 그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은 어떤 것이며 이 책망의 증거는 무엇인가! 에돔인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침략할 의사가 없어서라기보다 힘이 모자라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침략을 행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책망 내용이 되는 것은 유다와 예루사렘에게 대한 그들의 야만적 행위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곤고한 중에 있었고 멸망 직전에 있었다. 이것은 아마 갈대아인에게 멸망당하려 할 때거나 아니면 유대인이 재난을 당하던 다른 경우일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야만적인 태도를 나타냈던 것이다. 유다에 대한 그들의 성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에돔인에게 대한 비난은 이외에도 있다(겔 25:12). 예루살렘의 날에 그들은 "훼파하라, 훼파하라" (시 137:7)고 말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행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말해 주고 있다(12-14절). "네가 방관할 것이 아니며 네가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너는 이러이러하게 행했다."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우리가 행했어야 하는 일과 행한 일을 비교해 보며 행위와 규칙을 비교해 보는 것은 유익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디에서 그릇되게 행했는지를 밝힐 수 있으며 행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행하였구나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모한 때에 어느곳을 갔었는데 그런 곳에는 가지 말아야 옳았다. 우리는 이러이러한 자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했으며 이러저런 말은 하지 않아야 했다. 이와 같이 죄를 계명의 거울에 비춰 보면 그것은 심히 악하게 나타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에돔인이 이처럼 야비하게 행동하며 모욕하던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처지는 어떠했는가!(1) 그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환난을 당하는 날이었다(12절). 그것은 고난의 날이었다(13절). 이 말은 세 번씩이나 나온다. 이스라엘인에게 그 날이 환난과 재난의 날이었을 때 에돔인에게는 그 날이 변영과 평강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심판은 흔히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방 사람이 방임될 때 자녀는 징계된다.
(2) 그 날은 그들의 패망의 날이었다. 성읍과 농촌이 다 황폐하며 폐허로 화하는 때였다.
(3) 그 날은 외국인이 예루살렘 성문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오랜 포위 끝에 성은 붕괴되고 바벨론 군대의 대장들이 입성하여 그 땅의 유사처럼 성문에 좌정한 때였다. 그 때 군인들은 로마병정들이 그리스도의 의복을 나누듯 예루살렘의 전리품을 제비뽑았다. 그들은 정복자로서 땅도 제비로 나누었다. 또는 그들은 공격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그 날은 이방인이 "그의 군대" 를 포로로 끌어가던 날(흠정역, 11절)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어가며 빈궁과 수치 가운데 본국으로 데리고 갔거나 포로가 너무 많아 마치 군대와 같았을 것이다.
(5) "그 날은 오래도록 데 땅에서 편안히 쉬던 네 형제가 낯선 땅에 유형된 이방인같이 된 날이었다." 유대인의 처지가 이처럼 흉하고 슬펐을 때 그 이웃이요 형제인 에돔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며 위로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자기들 차례가 돌아 오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떨어야 했다. 푸른 나무에게 이같이 하였으면 마른 나무리요?
2. 그러나 유대인이 이런 곤경에 처했을 때 에돔인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보라. 그들이 여기서 정죄받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그들은 고난받는 이웃을 구조하러 왔어야 할 때 건너편에 서서 그들과 그날을 수수방관했고 그들의 환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도 멀리 피해 지나가던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았다(눅 10:33). 능동적으로 구조할 능력이 있으면서 자기 이웃의 어려움과 고난을 할 일없이 방관만 하는 자는 보상해야 할 것이 매우 많은 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유다의 고난을 멸시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만족과 흔연의 시선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환난을 보고 웃으면서 "아, 고소하다" 하고 말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파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실컷 바라보았고 그 일을 오래도록 갈망하고 소원하던 자처럼 바라보았다. 우리는 형제의 고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동정과 친절의 은혜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없다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너는 네 형제의 날에 했듯 방관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기뻐하며 모욕하고 슬픔 중에 있는 형제를 비난하며 다른 자들을 동반해서 기뻐하였다. 그들은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하였다.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면서 그 즐거움을 감추거나 숨길 만한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공공연하게 선언하며 무례하고 교만하게 공언했다. 그들은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며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들을 짓밟았다. 재난의 날에 있는 자 특히 고난 당하는 참 이스라엘인에 대해 기뻐할 수 있는 자는 에돔인의 심성을 지닌 자이다.
(3) 그들은 교만하게 말했다(원뜻은 "입을 크게 벌렸다" 이다). 그들은 고난받는 이스라엘인을 크게 멸시하면서 말했고 에돔의 현재의 번영과 안전에 대해 거만한 투로 말했다. 현재의 상이한 형편에서 추리해 보면 형세가 역전되어 에서는 하늘의 총애와 사랑을 받고 야곱은 미움과 배척을 받았다는 것이 역연하다는 듯이 그들은 말했다. 다른 자들의 낮춤과 굴욕에 의해 스스로를 올리며 뽐내게 되는 자는 이런 저런 방법에 의해 효과적으로 낮춤을 당하고 굴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들은 한수 더 떠서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 성문에 들어가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었다. 그들은 정복자를 돕지는 않았을지라도 약탈자는 도왔던 것이다. 그들은 노략물을 얻는 데는 가담했다(13절). 예루살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때 그들은 그리로 들어갔다. 재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그들은 없어지게 놔두느니 취하는 게 낫다는 변명을 하면서 재물을 노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황폐시킨 것은 바벨론이나 에돔은 약탈에 가담함으로써 pariceps crimins-즉 범죄의 가담자가 되었고 그들은 ex post facto -즉 사건 후 공범자로 간주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파멸을 기화로 부유해지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가난하게 할 뿐이라는 데 주목하자. 재난의 날에 손 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자기들의 재산이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를 기만하는 자들이다.
(5)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욱 악한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형제가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을 강탈할 뿐 아니라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댈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손을 댔던 것이다(14절). 갈대아인의 호기로운 칼이 유대인 사이에서 난무하며 유혈극을 연출하고 있을 때 피해 도주한 자도 많았다.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구명도생할 수가 있었는데 야비하게도 에돔인들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사거리에 섰다." 사거리는 여러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이어서 어느 쪽으로 가든 추격자의 맹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돔인들은 거기를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일부 겁약한 자들은 에돔인이 직접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고 다른 자들은 잡아서 추격군에게 넘겨 버렸다. 이것은 단지 정복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이렇게 잔혹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생사가 자기들 손에 달린 자들 더구나 자기들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또 가해할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이토록 잔인하였다. 보호하기에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는 때에 그들은 그 피난자들을 배신하였다. 악인의 온정과 자비란 이렇다. 누구든지 이것을 읽으면 그토록 학대받는 자들에 대해 동정을 금할 수 없다. 즉 원수의 칼을 피해 도망하면서 위험을 가까스로 벗어났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전혀 위험을 예상치 않던 이웃의 배신적 칼에 엎드러졌기 때문이다. 또 동정해 마땅한 대상에게 잔혹한 칼날을 휘두를 정도로 간성을 완전히 상실한자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6) 이 모든 일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공적 경건한 백성의 박해자와 합세하였다.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 그들은 주범과 동등한 죄가 있는 종범이었다. 행악자에게 가담하여 악행을 방조하고 교사하는 자는 행악자의 한 사람같이 간주되며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Ⅱ. 이런 포학을 인하여 그들이 입을 수욕은 어떤 것인가?
1. 그들은 잔 곧 떨림의 잔이 돌아온다는 것을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에는 자기들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15절). 여호와의 날이 만국에 가까이 왔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괴롭히던 자들에게 환난으로 보상하실 것이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더라도 거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효과적인 방지책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형편이 언제 우리 처지로 바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2.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적의와 가해는 그들 자신의 가슴에 보상될 것이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대로 열국과 각 개인에게 갚으실 것이다. 왕왕 형벌은 죄에 꼭 그대로 부응하며 날을 학대한 자들은 꼭 그대로 학대받을 것이다. 공의로우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학대한 자들에게 복수할 시기와 방법을 찾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 만국인도 마시리라" (16절).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거하는 그의 백성이 환난의 잔을 흠뻑 마셨듯이 (거룩한 산에 있어도 환난을 면하지 못했지만) 만국인도 제 차례가 되면 마찬가지의 쓴 잔을 들이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 재앙을 내리신다면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 성읍들이 어찌 형벌을 면할 것인가?(렘 25:29) 그리고 그것은 에돔의 형벌의 일부이다(렘 49:12).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 즉 형벌의 면제를 기대할 만한 자들도 확실히 마셨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세대인 에돔이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아니다. 너는 반드시 그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틀걸음 치게 하는 떨림의 잔을 자기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 자기 백성을 곤고케 하는 자의 손에 주실 것이다(사 51:22, 23). 아니, 그들은 환난 날의 자기 형편이 이스라엘의 고난당하던 때보다 더 심할 것으로 각오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일시적이며 순식간에 끝이 나지만 그들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끊임없이 마시게 된다(계 14:10).
(2) 그 잔에 남은 찌꺼기는 땅의 악인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시 75:8). 그들은 그것을 마시고 삼킬 것이다. 또는 그것을 빨아 먹을 것이다. 그래서 밑바닥까지 다 마셔 버릴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은 놀람의 포도주를 일순간 마시게 되는 수도 있지만 (시 60:3) 곧 회복하며 다시 제 정신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마셔서 본래 없던 것같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흔적도 기억도 없을 것이며 그들은 완전히 멸절당하며 뿌리째 뽑힐 것이다. 오! 주 여호와여! 주의 대적들로 모두 망하게 하소서.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약속 (오바댜 1:17-21)
교회의 대적들의 멸망이 앞에서 경고되었는데 이것은 저 큰 보상의 날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한 번 오셨으며 또 다시 오실 것이다. 교회 대적의 멸망이 경고된 뒤 여기에는 교회의 구원에 대한 귀중한 약속이 잇달아 나온다. 본 예언서는 요엘이나 아모스의 예언과 아모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약속으로 끝맺고 있다. 에돔인은 유대인의 포로 상태가 영원히 지속하기라도 하는 듯이 득의만만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바벨론 포로가 귀환함으로써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약속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이룩될 저 큰 구원에서 완전히 성취될 터였고 모든 선지자들은 이것을 증언한 것이다. 여기에서 약속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시온 산에는 구원이 있을 것이다" (흠정역). 산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름부음받은 왕을 세우시는 거룩한 산이다(시 2:6).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라" (17절). 성산에 남은 이스라엘인은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셨다(요 4:22).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해 구원을 베푸셨고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속을 상징했다. 그러나 시온산은 복음 교회이며 저기서는 신약 율법이 나왔다(사 2:3). 그 산에서는 구원이 선포되며 간구될 것이다. 복음교회에는 구원을 받을 자가 가세될 것이다. 계속해서 멀리 서있는 자들이 파멸을 당하도록 방임될 동안, 믿음과 소망으로 이 시온 산에 나아오는 자에게는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며 그것은 진노와 저주로부터의 구원이며 죄와 사망과 음부로부터의 구원이다.
Ⅱ. 구원이 있는 곳에는 이를 위한 성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산은 거룩할 것이다." 이것은 시온은 자녀들에게 이 구원을 예배시키며 그들을 구원의 적격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주려고 예정하시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현세적 구원이 자비 속에서 참으로 베풀어지는 때는 그 구원에 성결함이 있는 때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함으로 그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 나는 때이다. 우리가 성화될 때 구원도 성화된다. 거룩함은 그 자체가 큰 구원이며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다. 그 산 즉 복음교회의 시온 산은 거룩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합당하며 복음의 위대한 목적과 은혜는 거룩함을 심고 진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산에는 거룩한 법도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혼의 택함받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혼의 택함받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거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다. 거룩함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Ⅲ. 이 구원과 거룩함은 세상에 퍼질 것이며 이길 것이며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야곱 족속(원의:집) 곧 시온산은 거기에서 베풀어지는 구원과 거룩함과 함께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다. 즉 복음 교회가 열국 중에 세워질 것이며 땅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전도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획득하며 기업으로 삼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요 사역자들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사람들의 기업도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 자기 자신까지도 헌신하는 자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루디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열렸을 때 그의 집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개방되었던 것이다. 열방이 구원을 받아 제자가 되며 여호와의 빛 가운데로 다니며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새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 왔을 때(계 21:24)는 야곱 족속이 자기 기업을 누렸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에 수립될 때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으며 사탄의 위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보좌가 설치되고 사탄 왕국의 폐허 위에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리품이 쌓일 때는 더욱 더 성취를 볼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이 예고되고 있다.
1. 야곱의 기업은 획득되며 그에 대한 반대는 진압될 것이다(18절).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이 현재나 장차나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에서의 집(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 불에 쉽사리 삼키며 소멸될 것이다.(1)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수한 자들이 회심하는 데서 성취된다. 야곱과 요셉의 집에서 선포되고 인정받고 고백된 복음은 불과 불꽃같이 되어 완악한 심령을 녹이며 부드럽게 하며 죄와 부패의 찌기들을 소멸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정화되고 순화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을 것이다(말 3:1, 2).
(2)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적하며 회개하지 않는 모든 자의 낭패에서 성취된다.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며 할 수만 있으면 온갖 수단을 다 해서 메시야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그러나 복음의 날은 화덕같이 타오르는 날이다. 그 날에는 모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모든 자가 초개 같을 것이다(말 4:1). 야곱과 요셉은 불과 불꽃 같을 것이다. 그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간섭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간섭이 목숨을 건 위험한 짓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간섭자들에게 곡식단 사이의 횃불 같을 것이다(슥 12:6). 하나님이 자기 사역자의 입에 두신 말씀은 불과 같고 백성은 그 불에 살라지는 화복 같다고 표현된다(렘 5:14). 그리고 불법한 자는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불 기운으로 소멸될 것이다(살후 2:8). 복음의 불로 정금처럼 연단되지 않는 자들은 찌꺼기처럼 타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생명의 향기나 사망의 냄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과 우상 숭배가 철폐되고 만국의 재물과 권세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섬기게 되며 무장한 강한 자의 재물을 더 강한 자들이 나누게 되었을 때는 야곱 족속과 요셉 족속이 에서 족속을 살라서, 그들 중에는 남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으며 자기 사도들을 통해 이루셨다.
2. 그들의 기업은 멀리까지 확장될 것이다(19, 20절). 이것은 히브리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바벨론 귀환 후 그들이 이스라엘 땅을 취득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오래도록 포로 생활을 하다가 이제 돌아온 이스라엘 무리로서 여기에서는 여전히 사로잡혔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고토를 회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의 땅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일부의 이웃 민족들은 개종자가 되어 유대인과 연합하게 될 것이며 유대인은 거룩한 친교로 그들을 소유하여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이 회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우리와 연합하게 되면 우리 자신을 참으로 부유한 자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얻게 되면 재산을 얻는 것보다 더 많은 부와 힘이 우리에게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는 그 땅의 옛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 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은 인접한 땅을 기업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증가하여 본토로는 너무 비좁을 것이며 이웃 나라의 토지가 ob def ectum Sanguinis-즉 상속인의 부재로 그들에게 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접 지역을 점유하게 될 것이다. 에서의 땅은 가나안 남방의 사람이 얻을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인접 지역인 때문이다. 가나안 서쪽은 평원 지방으로 그곳에 있는 평지 사람은 그 이웃 블레셋 땅을 점유하게 될 것이다. 돌아 온 두 지파 중 주요 지파였던 유다 사람들은 에브라임 들과 사마리아 들을 얻을 것이다. 이 땅은 전에 열 지파에게 속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지파인 베냐민은 요단 저편의 길르앗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땅은 두 지파와 반지파에게 속해 있다.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 왕국과 정치 종교 양면에서도 연합할 것이며 친구와 형제로서 서로를 기업으로 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양자는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과 시돈에 속한 사르밧(사렙다)까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스바랏까지도 얻을 것이다. 요즈음의 랍비들은 학생들에게 사르밧과 스브랏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이해 하도록 가르치는데 이것은 언젠가 유대인들이 상기 지역을 점유하게 되리라는 무모한 기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을 에돔인이라고 부르며 또 그렇게 간주하고 자기들이 기독교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약속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복음 이스라엘인 기독 교회가 세상에 수립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확대되고 증가하여 그 신비로운 몸이 완성될 때까지 더욱 더 성취될 것이다. 목사와 교인들이 자기들의 이웃을 설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며 주님께 굴복하게 할 때 그들은 그 이웃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회심시킨 자들은 그가 "얻은" 사람이라고 표현된다(창 12:5). 소유는 획득된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나 무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기는 세상 무기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소유를 얻게 하고 보존하게 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와 그에 수반하는 신적 은혜의 능력이다.
Ⅳ. 구속주의 나라가 수립되며 유지되어 그의 충성된 백성에게는 위로를 주며 그의 모든 원수들에게는 공포와 수치를 심어 줄 것이다(21절). "나라가 여호와(원의:주)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수중에 붙이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그에게 위임하심으로써 나라를 그에게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충성된 백성으로 그리스도께 기꺼이 복속하고 그를 자기들의 수장으로 삼음으로써 나라를 그에게 바칠 것이다. 왕의 일은 백성을 보호하고 대적을 진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왕 중 왕으로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포상도 하시고 징벌도 하실 것이다.
1. 시온산은 구원될 것이다. 구원자들은 시온산에 올라 올 것이다. 복음의 전파자들은 구원자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들의 직무인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꾼이다. 만일 그가 은혜로써 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든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 에서의 산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시온산에 구원자로서 올라오는 자들이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에 담긴 복음의 말씀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며 믿지 않은 자를 심판하며 그들을 확신시키며 정죄하는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파하는 주의 사역자들은 시온산에 오르는 구원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전파할 때는 에서의 산을 심판한다. 그들은 이런 일을 사명으로 위탁받고 행하도록 명령받았다(마 16:16).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진행 가운데서 성경은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의 자기 교회에서 친구를 세우실 때 (옛적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 사사를 세우셨듯. 삿 2:16) 구원자들은 시온산에 올라와서 교회를 몰락과 파멸로부터 건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대적이 몰락하고 그들의 권세가 분쇄될 때 에서의 산은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하다는 생각하시는 방법으로 각 시대에 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고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쳐서 이긴다는 것을 믿어도 된다. 왜냐하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왕국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큰 권세와 통치를 스스로 취하셨고 취하실 것이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