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아모스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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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여름 실과의 환상 (아모스 8:1-3)

죄인들이 de die in diem-날마다-회개를 천연하는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시키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주인이 더디 오리라" (눅 12:45)는 노래만큼 그들에게 효과적인 자장가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흔히 선지자들을 통해 진노의 날을 정당하고 확실할 날로 묘사하실 뿐만 아니라 매우 가깝고 급히 촉박하고 있는 날로 나타내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Ⅰ. 경고되던 파멸은 임박하고 있다. 그 멸망의 임박은 여름 실과 광주리로 상징된다. 아모스는 환상으로 이것을 보았다. 여호와께서는 그 환상을 그에게 보여 주셨고(1절) 그로 하여금 그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셨다(2절).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을 실제로 보며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것을 듣고 있는지 자문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말씀하시며 한 번 보이시고 다시 보이시지만 사람을 무관히 여기는 까닭이다(욥 33:14). 우리는 전능하신 분의 환상 한가운데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을 깊이 생각하자. 아모스는 여름 실과 광주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채집된 과일이 담겨져 먹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1. 그들의 멸망은 무르익었다. 그들의 멸망은 익다 못해 부패하고 있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낫을 휘둘러 멸망의 무르익은 과실을 잘라야 할 때였다. 아니, 사실상 그 일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그 과실은 먹기만 하면 되었다.

2. 하나님의 인내의 연한은 마감 시간에 접근하고 있었다. 때는 가을이어서 음울한 겨울철이 되면 그 인내의 해도 곧 끝날 터였다.

3. 우리가 여름 실과라고 부르는 것은 겨울까지 간수하지 못하므로 제때에 즉각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일관성도 없고 견고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Ⅱ. 이 환상의 의도와 의미. 이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의 끝이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 을 의미하는 단어는 ketz인데 이것은 여름 실과에 사용된 낱말 kitz와 매우 근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살려 두시고 용서하셨으며 그들에게 대해 참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참으시기에도 지치셨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백성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빈번히 그들에게 종말을 깨우쳐 주셨지만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들의 종말을 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끝이 이르렀다. 죄인이 자기 죄를 끝내지 않으면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자. 7장 8절 말씀이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결심을 나타낸다. "내가 그들을 다시는 용서치 않으리라. 내가 이전처럼 그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심판을 돌이키지 않으리라."

Ⅲ. 이 결과는 전체적 파멸이 될 것이다(3절). 끝이 이를 때에는 슬픔과 죽음이 의기양양하게 개선할 것이다. 슬픔과 죽음은 함께 다니는 데 익숙하며 마지막에는 함께 사라질 것이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사망과 애통이 없을 것이다(계 21:4). 그러나 여기 죄 많은 세상에서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죄 많은 민족이었다.

1. 그들 중에서는 슬픔이 왕노릇한다. 성전(흠정역)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정도로 슬픔이 판을 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우상의 신전에서는 노래 소리가 들렸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예배하기 위해 먹고 마시며 일어나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 노래는 아마 음탕하고 속된 가요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래가 조만간 애곡으로 변할 것은 확실하다. 또는 그들이 설사 경건과 신앙을 소리로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며 마땅히 애곡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죄 많은 환락에는 애곡이 뒤따르며 신성한 희락이더라도 진지하지 못하면 슬픔이 수반된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발동할 때는 극히 큰 기쁨이라도 곧 최대의 슬픔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너무나 즐거운 소리를 내던 성전의 노래는 한숨과 신음 소리로 변할 뿐만 아니라 큰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 크게 통곡하는 소리는 매우 음울하게 들린다. 그들은 신전에 이를 것이며 신전이 폐허로 된 것을 보고 극히 비통하게 울부짖을 것이다.

2. 죽음이 왕노릇할 것이다. 시체가 많아서 처처에 널릴 것이다(시 110:6). 칼이나 역병으로 죽은 자의 수효는 너무나 많아서 살아남은 자들이 엄숙하고 화려한 장례식으로 매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조종조차 울리지 못하고 잠잠히 시체들을 내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한 밤 중에 시체를 매장하며 주위 사람에게 잠잠하고 눈여겨 보여주지 말라고 명령할 것이다. 이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서거나 아니면 그 병이 전염병이기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일 것이다. 아니면 죽은 자에게 대한 애곡이 알려지면 적병이 노여워할까 봐 두려워해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자타를 막론하고 이 파멸의 심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에 잠잠히 복종하여 그와 다투거나 그에게 불평하지 말라고 이렇게 할 것이다. 또는 이것은 인내의 침묵이 아닌 퉁명스런 침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심판으로도 하나님의 의나 그들 자신의 불의에 대한 단 한 마디의 고백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8:2 없음.

 

8:3 없음.

 

8:4

압제자의 죄와 운명 (아모스 8:4-10)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압제자들과 다투시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Ⅰ. 그들이 범한 죄의 악함.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눅 18:2)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1. 그들의 신앙 생활을 살펴보면 누구든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비록 악하긴 하지만 참으로 경건의 모양을 유지하며 과시한다. 그들은 안식일과 월삭을 지킨다. 그들은 그런 날과 평일을 구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날들에 싫증을 느끼며 전혀 애착심을 갖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전적으로 세상과 세상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슬픈 특성이다. 그들은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일을 내게 할꼬?"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많은 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1) 그들은 안식일에 싫증을 느꼈다. 그들은 안식일과 월삭의 속박에 권태를 느끼고 그런 날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이는 그런 날에는 어떤 육체 노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과 월삭의 일에 싫증을 느끼고 그런 날에 코웃음을 치며(말 1:13) 도엑처럼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다(삼상 21:7).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 주변에 있는 것보다 다른 곳에 있기를 더 원하였다. 하나님과 영원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할까봐 꺼려하는 세상적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안식일과 안식일의 일이 부담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만이 우리 시간을 가장 잘 보내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과 얼마나 즐겁게 지내는가? 안식일은 우리가 안식일의 일을 다 마치고 그날의 이익을 얻기 전에 지나가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해서 우리는 그토록 황급히 그 날과 헤어지려고 한단 말인가?

(2) 그들은 장날을 좋아했다. 그들은 곡식을 팔고 밀을 내게 되기를 동경했다. 그들은 경건한 예배에 참여하고 있을 때 장보기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따라갔고(겔 33:31)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집을 잡화점, 아니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 사업이 잠시 정지했다고 해서 거룩한 의무에 싫증을 느꼈다. 그들은 이 세상 사업에서는 제 영역 내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성소에서는 마치 고기가 마른 땅 위에 놓인 것과 같았다. 안식일보다 장날을 더 좋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느니 차라리 곡식을 팔겠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이방인이요 자기 자신에게는 원수이다.

2.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게 되면 누구든지 그들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전자에 수반되는 것이다. 경건의 냄새를 상실한 자들은 공중도의감도 오래 보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공평을 행하지 않으며 자비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1) 그들은 상대방을 속인다. 곡식을 팔 때 그들은 사는 사람을 기만한다. 즉 곡식을 되 줄 때나 돈을 받을 때 사는 사람을 속인다. 그들은 자기들이 되로 곡식을 되어 주며 고객이 달라는 양을 주는 척한다. 그러나 그들은 에바를 작게 한다. 그 되는 모자라며 규격이 법정 칫수에 미달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는 사람을 착취한다. 또 그들은 사는 사람의 돈을 받을 때는 기어이 자기 저울, 자기 추로 계산해야 하며 그들이 다는 세겔은 표준치를 능가한다. 그들은 세겔을 크게 하여 받는 돈의 무게가 자연히 너무 가벼운 눈금을 가리키면 더 많이 얹으라고 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기하며 그나마 공정히 행하고 정확하게 한다는 구실과 미명 아래 속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악한 행위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과도한 자기애와 인류 전체에 대한 멸시 그리고 자기들이 거래하는 개개인에 대한 모멸을 나타낸다. 그들은 신성한 공평의 법을 무시한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은 곧 거짓 추와 저울을 가증히 여기신다고 분명히 언명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의 부재를 뜻한다. 그들의 기만 행위에 대한 또 다른 사례는 그들이 잿밀 즉 밀찌꺼기를 판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이웃의 무지나 궁핍을 기화로 잿밀을 팔며 그나마 극히 고운 밀가루를 팔 때와 꼭 같은 가격으로 판다.

(2)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야만적이며 무자비하다. 그들은 궁핍한 자를 삼키며 그 땅의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한다.

[1] 그들은 자기의 부를 너무나 존중한 나머지 가난한 자라면 무조건 극히 멸시하며 능멸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미워하며 용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행했다. 가난한 상태를 종식시켜 주기 위해 구제하기는커녕 그들의 존재 자체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들을 추방하거나 멸망시켰다. 아니면 적어도 그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욕되게 하는 자는 그들을 지으신 여호와를 멸시하는 셈이며 빈부는 하나님의 손 안 에서 서로 만나며 섞여 산다(잠 22:2).

[2] 그들은 자기 재산을 불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이 스스로 부유해지기 위해 가난한 자를 강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달라붙어 그들을 먹이로 삼았다. 가난한 자들은 구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자기를 압제하는 자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복수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던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파멸로 획득된 부는 그 재물을 얻는 자들에게도 파멸을 몰고 올 것이다. 그들은 가혹한 거래와 사기 흥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삼켰다. 그들이 거짓 저울로 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스스로 부유하게 되려 하며 돈을 제 수중에 장악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도 업무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려고 하며 아주 낮춰서 강제로 노예가 되게 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것을 죄다 빼앗아서 자기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앉아서 먹으려고 한다. 그들은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산다. 그들은 가난한 자가 곡식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해서 그들과 그 자녀를 종으로 만든다(느 5:2-5). 아주 많은 자들이 이렇게 가치가 떨어져 막다른 지경으로까지 전락하였다. 압제자들은 사람의 값을 너무나 깎아내려서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 종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차적으로는 재산이 침해받고 그 다음에는 자유가 박탈되었다. 먼저 사람을 알거지로 만들고 그런 다음에 그들을 종복으로 만드는 것이 압제자들의 수법이다. 이와 같이 짓밟히는 자의 불행 속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상실되고 짓밟는 자의 죄 가운데서는 인간의 따뜻한 인정이 사라진다.

Ⅱ. 이런 죄 때문에 그들에게 과해질 형벌의 엄중함, 가난한자들은 이처럼 피해를 입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가해자들과 셈하실 것이다. 가난한 자 역시 그의 수혜자이기에 그는 그들이 당하는 피해를 자신이 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출 22:23, 24).

1.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죄를 기억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셨다(7절). 즉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실 수가 없는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야곱의 영광이며 영화인가? 그는 자기 임재와 은총의 표상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남용하고 모독하였으며 그에게 역겨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6:8). 그는 자기의 진노하심 중에 맹세하시며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신다. 그 이름은 너무도 잘 알려졌고 이스라엘에서 너무나 큰 이름이었다. 그는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 하니라" 고 맹세하신다. 여기에는 가난한 자에게 대한 모든 행위가 기억된다는 것이 언외에 함축되고 있다. "내가 저희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는 것은 "내가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는 말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의 형편이 참으로 비참하며 영원히 불행하다는 것을 선포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맹세도 사유하시는 자비에 의한 모든 혜택에서 단절되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무자비한 심판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갖는 자들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한 멸망과 혼란을 내리실 것이다. 가능하면 그들을 놀라게 하여 진지한 회개와 개혁으로 유도하려는 것이 여기서 다양한 강조적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1) 전체적 공포와 경악이 임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 땅으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가난한 자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생각하였다.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애통하게 될 것이다." 국민적 심판 때문에 떨며 애통하게 될 것이다. 압제자의 죄를 보고 마땅히 떨어야 할 자가 무관심하게 보며 피압제자의 불행을 보고 마땅히 애통해야 할 자들이 아무 관심없이 바라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압제하는 자의 맹렬함에 떨게 하실 것이며 자신의 손실과 피해로 애통하게 하실 것이다.

(2) 전체적 홍수와 황폐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러 오실 때에는 환난과 재난의 물결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를 것이다. 하수는 둑이 막히면 부풀어 올라 곧 제방 위로 넘치게 된다. 모든 것이 다 그들을 방해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진행을 제지할 뿐이다. 심판은 하수가 범람하듯 제 갈 길을 강행군 할 것이다. 온 땅은 애굽 땅이 해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유실되듯 침수될 것이다. 또는 이 표현은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들의 파멸은 하수의 넘침 곧 노아의 홍수처럼 솟아오를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온 세상을 점령했듯이 이 파멸은 온 땅을 함몰시킬 것이다. 그 땅은 바로와 애굽인 들이 홍해에 수장되었듯이 뛰놀다가 낮아질 것이다. 홍해는 그들에게 애굽강 같았다.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 이 두 가지 심판은 횡포와 압제에 대한 형벌이며 여호와가 그 복수자가 되신다.

3. 이것은 그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그들이 전해 생각지도 못할 때에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9절). "그 날에 내가 대 낮에 해가 지게 하리라. 그 열과 빛이 한창일 때 해를 지게 하리라. 그들이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다고 기대하고 적어도 반나절은 족히 남았다고 생각할 때 해가 질 것이다. 땅은 백주에 캄캄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즐겁고 유망하게 보이는 때에 땅이 캄캄해 질 것이다." 우리의 모든 위안물과 향유물 아니, 생명 자체까지도 이처럼 불확실하다. 최고의 건강이나 번영도 왕왕 질병이나 역경과 종이 한 장 차이로 판명되는 수가 많다. 욥의 해도 한낮에 졌다. 많은 자들이 한낮에 취해 감을 입으며 그 해가 백주에 진다.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안전감 속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처럼 두렵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대낮에 해가 지는 것과 같다. 심판에 대한 예상을 적게 하면 할수록 혼란은 더욱 심할 것이다. 그들이 평강과 안전을 부르짖을 때 멸망은 홀연히 임하며 덫과 같이 임한다(눅 21:35).

4. 그것은 그들의 태도를 일변시키며 그들의 환락을 중단시킬 것이다(10절). "너희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듯(3절) 내가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변하게 하리라." 죄인의 환락과 즐거움은 슬픔으로 끝나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중에 빛이 일어나며 흑암이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게 하지만(시 112:4; 사 61:3) 악인에게는 광명 중에 흑암이 임하여 그들의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고 그들의 희락을 슬픔으로 변하게 한다. 그들의 황폐는 너무나 크고 전반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굵은베로 허리를 동이게 되며 모든 머리가 대머리로 되어 잘 빗긴 머리나 항상 입던 화려한 의상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날의 애곡은 독자에 대한 애통함 같을 것이다. 이것은 몹시 비통하고 오래 계속되는 애곡을 의미한다. 게다가, 사태가 최악의 상태로 되어서 호전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녁 때라 하더라도 잔광은 남으며 새로운 여명에 대한 희망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 결국이 곤고한 날 즉 비통한 애곡의 날과 같게 될 것이다. 뉘우치지 않는 죄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맨 마지막은 모든 것 중 가장 극악한 상태가 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에서 받게 되며 슬픔 중에 누울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8:5 없음.

 

8:6 없음.

 

8:7 없음.

 

8:8 없음.

 

8:9 없음.

 

8:10 없음.

 

8:11

영적 기근에 대한 경고 (아모스 8:11-14)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경고된다.

Ⅰ. 영적 기근에 의한 전체적 심판. 온 땅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임할 것이다. 신탁도 끊어지며 선한 설교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이 일은 멀리 있는 일처럼 언급되고 있다.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날들은 금후에 이를 것이다. 그 때에는 다른 종류의 암흑이 그 광명의 땅에 임할 것이다. 아모스가 예언하던 때나 그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도록 그들에게는 철을 가리지 않고 간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고 아주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교훈에 교훈을, 경계에 경계를 더 하였고 예언은 그들이 나날이 먹는 양식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만나에 물리듯 예언에 싫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후에는 그들에게서 이 특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신다. 아마 이스라엘 땅에 멸망이 임할 무렵에는 유다 땅과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열 지파가 포로로 잡혀 갈 때에는 그들에게 표적이 보이지 않았고 선지자도 더 이상 없었으며 그런 일이 얼마나 오랠지 아는 자도 없었다(시 74:9). 말라기 선지 이후의 유대 교회는 오래도록 선지자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위협이 보다 멀리 메시야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부분적으로 발생했던 맹목성과 불신 유대인의 마음에 덮인 휘장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며 하나님이 보내신 복음의 사역자들을 배척하고 그 조상들처럼 독자적인 선지자를 소유하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서 탈취되어 다른 백성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한 사람의 선지자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경고되고 있는 심판 자체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기근의 심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식과 물의 부족이 아니라(양식과 물은 신체의 유지에 필요한 것으로 그것이 부족하면 아주 큰 괴로움을 겪는다) 그 보다 훨씬 쓰라린 심판 곧 여호와의 마련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다. 사역자들이 설교할 회중도 없을 것이며 설교한 사역자도 없고 사역자로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일에 적합한 교훈이나 능력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귀하고 드물며 이상은 없어질 것이다(삼상 3:1). 그들은 기록된 말씀 즉 성경을 가지고 읽게 될 것이나 그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해 줄 사역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물물은 있되 떠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양식은 부족하더라도 은혜의 수단은 풍성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란 약속(사 30:20)은 차라리 은혜로운 약속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역경의 양식과 환난의 물을 주실 것이나 그들의 눈은 가르치는 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청교도들 사이에는 갈색의 빵과 복음은 좋은 음식이라는 속담이 성행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 것은 그 반대로 그들이 양식과 물은 풍족히 소유할 것이지만 가르치는 자들은 제거되리라는 것이다.

(1) 이것은 그 땅에서 그들의 영광 중 큰 몫이 떠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나라가 크고 높게 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때문이었다(롬 3:2).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게서 제거되자 그들의 아름다움은 얼룩지고 그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것이다.

(2) 이것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극도의 노여움을 나타냈다. 하나님이 이전과 달리 그들에게 더 이상 마련하려고 아니하셨을 때는 참으로 노하신 때이며 회개의 수단을 더 이상 공급하려고 아니하셨을 때는 그들을 파멸하도록 포기하신 때였다.

(3) 이것은 그들에게 임했던 다른 모든 재난을 참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위로해 주거나 희망적인 전망을 보여 줄 선지자가 없었던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이든 말씀의 기근이 가장 쓰라린 기근이며 가장 괴로운 심판이라고 말해야 하며 환난의 때에도 그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2. 이 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12절)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리베리야 바다에서 대해까지, 그 나라의 한 지경에서 다른 지경까지 방황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로부터 육로나 해로로 선지자를 보내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들 중에는 선지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그들은 북에서 동까지 가 볼 것이다. 한 곳에서 실망하면 다른 곳으로 가 볼 것이며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달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찾으려고 황급히 왕래할 것이며 선지자나 예언자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 왔다 갔다 하겠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1)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고난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큰 괴로움으로 인식할 것이며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아주 멀리까지도 쾌히 여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자들이 어리석게도 범죄 함으로써 날려버린 여러 자비의 상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2) 선지자가 자기들 중에 있을 때는 그들을 무시하던 자들도 그들을 빼앗기게 될 때는 사울이 사무엘을 원했듯 그들을 소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비의 부족을 체험하게 될 때까지는 그 자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또는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여 바다에서 바다까지 방황할지라도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은혜의 수단은 가동적(可動的)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촛대는 우리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 자리에서 옮겨질 수 있다(계 2:5). 지금 인자의 날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날 보기를 소원하나 헛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기근의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기진할 것이다(13절). 누가 보아도 그 괴로움을 충분히 참을 수 있을 것 같던 자들이 그 고통으로 기진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처녀와 젊은 남자가 유대 교회와 회당장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과 신적 계시의 혜택을 상실하게 되고 말씀의 궁핍으로 기진하게 되며 힘과 아름다움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자들은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란 곧 자기 공로와 의를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 갈하여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그 때에 배부르며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Ⅱ. 우상 숭배의 앞잡이가 된 자들의 개개의 멸망이 예고된다(14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책망받는 죄는 무엇인가? 그들은 사마리아의 죄 즉 사마리아의 우상을 가리켜 맹세한다. 그 우상은 사마리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벧엘에서 숭배되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으며 죄가 되는 것을 신으로 여겨 그것을 가리켜 맹세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망하게 하고야 말 우상들이 자기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극도의 혐오감으로 바라보아야 할 우상에게 최고의 존귀를 바쳤던 것이다. 그들은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금송아지였다. 말못하는 죽은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것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것을 사랑하며 찬사를 바쳤다. 그들은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했다. 그들은 브엘세바의 종교 즉 거기에서 사용되는 예배 방식대로 맹세를 하였다. 그들은 그곳의 예배 방식을 신성시했고 따라서 그대로 맹세하며 논쟁의 재판관으로서 그것에 호소를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주의자들도 브엘세바의 방식처럼 미사를 가리켜 맹세한다.

2. 그들이 경고받는 파멸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드리는 자들은 자기들이 모독하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엎드러질 것이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도 그들을 돕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며 자기에게 가한 모욕에 분개하시며 그는 승리하실 것이며 그와 다툰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12 없음.

 

8:13 없음.

 

8:14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