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아모스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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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스라엘에게 대한 메시지 (아모스 5:1-3)

앞에 두 장과 마찬가지로 본장도 "이 말을 들으라" 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 데서는 우리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이익이 된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나 우둔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재삼재사 촉구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그들에게는 "이 말을 들으라,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쏟아라" 고 구해야만 한다. 이것은 확신시키며 각성시키며 주의를 일깨우는 말이다. 우리는 위로와 평강의 말씀처럼 이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는 발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듣든지 안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효력을 발생하며 그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즉 선지자가 아니라 그를 보낸 하나님께서-지은 말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3:1).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은 애가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국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지은 슬픈 묘사요, 그 나라의 완전한 멸망에 대한 비통한 예고였다. 그들의 사정은 비참했다. 처녀 이스라엘의 엎드러졌고 이전의 상태에서 추락하였다(2절). 이전의 상태는 비록 처녀처럼 순결하거나 정숙하진 않았다고 해도 아름답고 쾌활하여 매력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 자신 고결하게 보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처녀로서 구혼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멸시와 궁핍에로 떨어져서 만인에게 백안시당한다. 아니, 그들의 형편은 고립무원하다. "처녀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이전의 존영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근자에 이스라엘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셨다(왕하 10:32). 그런데 그들이 뉘우치지 않았으므로 곧 그는 그들을 찍어 넘어 뜨리셨다.

1.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 일으켜야 마땅했던 방백들은 무능력해졌다. "저가 자기 땅에 버리움이여" (흠정역). 외국의 동맹들이 이스라엘을 낭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조력자들도 그들을 유기하였다. 그가 만일 자기 땅에서 먼저 버림을 당하지 않고 던지움을 당하지 않으며 그의 모든 진정한 이익이 포기되지 않았더라면 낯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는 일으킬 자가 없으며 그 일을 행할 자도 없고 그에게 손을 내밀려고 관심하는 자도 없으리라."

2. 그들을 도와 일으켜 세워야 할 백성들은 감소되었다(3절). 천 명의 용사를 민병대로 거느리다가 전쟁 발발시에 완전무장을 갖춰서 용약 천 명의 유능한 병력을 출진시켰던 성읍은 전투 후 병력을 점고해 보면 남은 자가 불과 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비례하여 백 명을 내보낸 성읍은 열 명만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토록 큰 살륙이 벌어질 것이며 이스라엘 집에는 공공 봉사와 안전에 종사할 자가 그토록 소수만 남게 될 것이다. 이 비천하고 버림받은 나라를 구제할 자는 열에 하나도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나 탈주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의 수효가 감소된다는 것은 애통해할 만한 제목이 된다는 데 주목하자. 야곱이 이처럼 작아질 때 그는 누구에 의해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경건의 쇠퇴는 누구에 의해 복구될 것인가?

 

5:2 없음.

 

5:3 없음.

 

5:4

이스라엘의 가중한 죄 (아모스 5:4-15)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과오를 지적해 주시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 회개하며 개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그들이 돌아오라고 부름을 받을 때 "우리가 어디로 돌아 가리이까?" 하고 물을 필요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체적으로 말씀하신다(12절).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그리고 너희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참회하는 심경으로 우리 죄를 반성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의 공평하신 판단으로 우리 죄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1) 하나님께서는 저 큰 날에 우리 죄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우리의 허물은 많고 그 종류도 가지가지이며 자주 반복될 것이다. 우리 속에서는 헛되고 사악한 생각이 얼마나 많이 기생하였는가! 우리 입에서는 게으르고 어리석고 악한 말들이 얼마나 무수히 나왔던가! 우리가 부패한 욕망과 정욕에 탐닉한 때는 얼마나 많았는가? 누가 능히 자기 실수를 깨달을 수 있는가? 누가 능히 자기가 얼마나 자주 실족하는지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허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계신다. 그의 관찰을 피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허물로써 얼마나 많은 위험에 빠져들었으며 회개할 일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날마다 지은 죄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2) 그 중 일부는 심히 중한 죄이다. 그 죄악은 중하다. 그것은 본질상 심히 악한 죄다. 또 그것은 터무니없이 저질러진 죄이며 강압적 수단으로 한 죄다. 또 그것은 본래의 지식을 거스리는 극악한 죄이며 우리의 확신을 말살시켜 버릴 만큼 강력한 죄며 심판을 초래할 만큼 중한 죄다.

2. 그는 이들 중한 죄 중 몇몇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신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부패시키면서 우상에로 전향하였다. 이것은 5절에 암시되고 있다. 그들은 벧엘을 찾았었다. 그곳은 금송아지 중 하나가 있던 곳이었다. 그들은 길갈을 자주 찾아갔다. 길갈은 그들이 우상을 세우기 위해 택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여호수아 당시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출현으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위해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족장시대에 유명했던 곳 브엘세바도 이제는 우상의 회합처가 되어 있었다(8:14). 그 곳이 유다 땅 멀리 위치했었지만 그들은 그리로 나아갔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치욕적인 음행을 했기 때문에 의당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어야 했다.

(2) 그들은 공의를 왜곡시켰다(7절). "공법을 인진으로 바꾸는 자들아 너희는 하나님께나 인간에게나 사법의 실시를 쓰게 만들고 해롭게 만들고 매우 역겹게 만드는 구나." 정의의 열매는 동산의 잡초로 화했다. 올바로 행사되는 공법보다 존엄한 것도 없고 귀중한 것도 없듯이 정의를 행한다는 구실 하에 고의적으로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유해하고 가증스러운 것도 없다. Corruptio optimi est pessima-즉 최선의 것이 부패할 때는 최악의 것이 된다 "너희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는 마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하늘의 하나님께만 책임을 지고 땅의 방백들이나 재판관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기라도 하는 듯이 정의를 땅에 버리는 구나." 이와 같이 그들의 상황은 홍수 이전과 마찬가지여서 땅에는 강포가 충만하였다(창 6:11 참조).

(3) 그들은 가난한 자를 몹시 압제하여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짓밟으며(11절). 유린하며 큰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자기들의 발등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극히 고분고분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극히 횡포하며 야만적으로 대하였다. 그들은 가난하여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는 자들에게 어떤 수치를 입히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재판관들은 오직 자기 부의 추구에만 급급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로부터 밀의 부당한 세를 취했고 뇌물이나 수탈의 형식으로 착취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곡식을 수레로 실어다가 바치는 것밖에 달리 자신이 밟히는 것을 모면할 방도가 없었다. 가난한 자들은 그 가족과 함께 먹고살아야 할 곡식이라도 바치지 않으면 그들에게 밟혀 진흙 속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강요를 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강요를 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밀의 세를" 부당하게 취했다. 소작료나 곡물세를 거두는 것은 법적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납부가 불가능하게 된 자들한테서도 추호의 사정을 두지 않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했다(느 5:2, 5). 우리는 정당한 부채를 요구하는 회수하는 데 있어서도 부당하게 행하거나 무자비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다시 이 압제의 죄를 책망받는다(12절). 그들은 의인을 학대한다. 그들은 무죄하고 이 땅에서 잠잠한 자를 향해 율법과 공의의 칼날을 돌린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의롭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미워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그 때문에 그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들은 부자들한테서 뇌물을 받는데 이는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들의 학대를 후원하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이다. 수중에 돈을 갖고 있는 자들은 사건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판결을 틀림없이 자기 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 이처럼 그들은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 즉 그들은 재판소에서 가난한 자들을 그 정당한 권리에서 비켜나게 한다(직역하면 그렇다). 가난한 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소송하는 경우 재판관들에게 뇌물을 줄 형편이 못되거나 너무 정직하여 뇌물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건이 분명히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당한 판결로 인해 억울함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는 잠잠할 것이다(13절). 사람들은 억울함을 당하며 부당한 피해를 입을 때 침묵을 지키고 행정관들에게 호소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법이 공평히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들과 백성들을 악의로 박해하였다(10절). 그들은 너무도 행악에 열중하였으므로 책망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못 견디게 싫어한 책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말씀의 책망.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했고 율법을 읽어 주며 해하였으니 이것이 곧 말씀의 사역이다. 그들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싫어한다. 성문은 여호와의 전이나 법정이나 사람이 운집하는 곳을 말한다. 그런 곳에서는 지혜가 그 소리를 높인다(잠 1:21).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는 그 직책상 책망하는 자이다. 그들은 이들 책망자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미워하며 아합이 미가야를 미워했듯 그 책망자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들은 책망자들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적의를 품으며 해를 입히려고 노력했다. 책망을 미워하는 자는 파멸을 사랑하는 자이다.

[2] 정직한 이웃의 행실에 의한 책망. 사회 전체가 매우 악했을지라도 개중에는 정직히 말하며 양심적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칭찬이 되었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수치가 되었으며 거짓말장이들을 정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믿음이 옛 불신 세계를 정죄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이 정직히 발하는 자를 싫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정직이란 것에 대해 너무나 고질적인 적의를 품고 있어서 정직한 사람을 보기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인류의 공동 이익을 인식하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정직하게 말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존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직은 인간 사회를 공고히 다져 주는 접착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대한 생각을 자기 마음속에서 전부 추방시켜 버리고서도 흡족치 못해 세상에서도 정의란 정의는 모두 추방시켜 인류를 전쟁 상태로 몰아 넣으려는 자들은 어리석음과 광란의 절정에 도달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지혜자는 그 때에 잠잠할 것이다(13절). 그러나 선지자들은 침묵을 지키지 못하며 감히 그럴 수도 없다. 위탁받은 말씀을 외치려는 그들의 충동이 결코 그들로 하여금 사려 깊은 생각에 근거하여 행동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높은 소리로 외쳐야 하며 목소리를 아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혜있는 선인들은 침묵을 지킬 것이며 침묵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첫째, 지혜자는 불평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들은 의인을 학대했다. 그 한가지 방법은 거짓 제안과 억지 풍자로 말씀에 거치는 자로 만드는 것(사 29:21)이었다.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말이 오해되고 왜곡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신중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때가 악했으므로 구설에 의한 화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시대가 불의하므로 말미암아 선한 사람들이 은둔하며 침묵을 지키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말이 적으면 수정도 빠르다. 그러나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대상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

둘째, 그들은 책망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혜자들은 악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아덴 사람의 죄악에 분노를 느꼈듯이 속이 뒤끓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 공공연한 증거를 않는 것이 슬기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으며 책망하지도 말라(호 4:4). 왜냐하면 그것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에게 말했듯 신중한 사람은 대담한 책망자에게 abi in cellam etdic, Misere mei, Domine-즉 네 골방으로 들어가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어라 하고 말 할 것이다. 진중한 교훈과 훈계는 보다 선한 자와 보다 나은 시기를 위해 간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잠잠할 때가 있다(전 3:7). 악한 때는 정직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악인은 솔직한 행동을 참지 못할 것이다.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사로 생각하며 그들과 관계하기를 두려워했던 때문이다.

Ⅱ. 선지자는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며 그들이 이런 죄 때문에 어떤 심판을 받기 쉬운지 말해 준다.

1. 무엇보다 먼저 우상 숭배의 장소가 파멸당할 위험에 처해있다(5절). 우상 숭배의 총본산인 길갈은 그 거민뿐만 아니라 그 신상들도 사로잡힐 것이며 벧엘은 금송아지와 함께 허무하게 될 것이다. 승전한 적군은 길갈을 초개같이 여길 것이며 길갈은 너무도 쉽사리 약탈될 것이다. 적군은 벧엘을 오유화시킬 것이며 깡그리 노략하고 말 것이다. 우상은 언제나 헛된 것이었으며 허무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상들을 훼파하러 나타나실 때에는 우상이 허무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2. 이스라엘 왕국은 우상과 함께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6절). "너희가 그를 제 때에 찾지 않으면 그가 불같이 요벳의 집에 내리사 멸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시자 소멸하는 불이시며 이스라엘인들은 죄수로 그 앞에서 그루터기와 같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연료로 내어놓는 자들에게 화로다. 그 다음에는 "벧엘에서 그 불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는 말씀이 나온다. 벧엘에는 그들의 우상과 우상의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물을 가져 온 곳도 벧엘이었고 기도를 드린 곳도 거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심판의 불길이 그들 위에서 타오를 때에는 그들이 벧엘에서 섬기던 모든 신들이라도 그 불을 끌 수 없으며 심판을 돌이키지 못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줄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세상을 우상으로 삼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 우상 숭배에 대해 셈하러 오실 때에는 세상도 그들을 보호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압제와 착취로 얻은 것을 탈취당할 것이다(11절). "너희는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고 그 집이 영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너희는 그 집에 거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그 집을 불살라 버리거나 자기 소유로 만들거나 너희를 사로잡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고 어떻게 하면 그 포도원을 쾌적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하며 또 거기서 유쾌한 산책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너희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게 되며 그 포도주도 결코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율법에는 사람이 집을 짓거나 포도원을 심으면 전장에서라도 돌아갈 자유가 있다고 자상하게 규정되어 있다(신 20:5, 6). 그러나 여기에서는 형세가 너무도 촉급하여 그런 자유는 어쩔 수 없이 제한되고 마는 셈이다. 누구나 다 전장에 나가야 했으며 집을 짓고 포도원을 심는 자들 중 다수가 전쟁에서 엎드러지며 애써 수고한 보람을 맛보지 못할 터였다. 정직하게 취득한 것이 아니면 오래 누리지 못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Ⅲ. 그들은 자기 의무에 대해 충고를 받으며 그 일에 착수하라는 큰 격려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정당한 이유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그들에게 규정된 의무는 경건과 정직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때 진지해야 했고 인간과 거래할 때는 정직해야 했다. 이 의무는 각각 적당한 논증으로써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권면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1.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찾음에 있어서 성실하고 독실할 것을 권고한다(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고 이르신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사 8:19).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그들은 자기 보호자를 놔두고 어디로 갈 것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왕자였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 역시 그처럼 여호와를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숭배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만일 전적으로 하나님만 찾지 않는다면 진정한 찾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고 벧엘을 찾지 말라(5절). 너희 우상에게 신탁을 묻지 말며 벧엘의 제상장들에게서 지시를 구하지 말라. 금송아지에게 보호를 구하지 말며 너희 기도와 제물을 더 이상 벧엘이나 길갈로 가져가지 말라. 이는 너희가 만일 그 허탄하고 거짓된 것을 지킨다면 너희 자신의 긍휼을 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찾으라(6, 8절). 그에게 물으라. 그에 대해 물어 보라. 너희의 규칙이 되는 그의 의사를 알려고 노력하며 너희 행복이 되는 그의 은총을 확보하려고 노력해라." 이 권면을 강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1)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 안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기가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4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멸망할 잡신들을 찾는 자는 그들과 함께 멸망당할 것이지만(5절).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현재 죽음의 심판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그 심판에서 구출하리라. 너희 민족도 살게 될 것이다. 너희 국가도 현재의 피폐에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너희 영혼은 살리라. 너희는 성화되고 위로받고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살리라."

(2)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은 어떤 하나님인가?(8, 9절)

[1] 그는 전능의 신이시다. 우상은 무능한 물건이어서 선악을 불문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상을 두려워하거나 신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시며 그 어떤 일도 다 해 내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께 구해야 마땅하다. 그는 우리의 복종과 충성을 촉구하신다. 그는 모든 권세를 장악하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그런 분을 우리편에 둔다는 것은 우리의 이익이다. 자연계를 짓고 지배하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와 사례가 제시되고 있다(4:13 과 비교하라).

첫째, 별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 이방인들이 섬기던 별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해 만들어 신으로 삼은" 별들(26절)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종이다. 그는 묘성(칠성)과 삼성(오리온)을 만드신다. 이 두 성좌는 매우 눈에 잘 띄는 것으로서 목자였던 아모스는 밤에 양을 치면서 이 두 성좌의 운행을 각별히 관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도 이들을 만드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만드신다. 즉 이 지구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조성에 의존하며 하나님은 묘성과 삼성의 영향력을 매거나 풀거나 하신다(욥 38:31; 9:9). 아모스는 바로 전기한 욥기의 성귀를 참조시킴으로써 고대인의 신관을 상기시키고 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리시기 전에 이들 별들의 운행을 신적 영광의 발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변함없는 주야의 교대도 하나님의 지시 하에서 행해지며 그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 유지된다. 사망의 그늘처럼 음침한 밤을 일출에 의해 아침으로 바꾸며 일몰에 의해 백주를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그 권능이 겸손한 참회자에 대해서는 고난과 슬픔을 번영과 기쁨으로 쉽사리 바꾸실 수 있고 주제넘은 죄인의 형통을 완전한 흑암으로 쉽사리 바꿀 수 있다.

셋째, 비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대로 오르거나 내리거나 한다. 그는 바닷물을 버리신다. 태양 열로 바닷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지면에 쏟아져서 땅을 적시며 열매를 많이 내게 한다. 이것은 근자에 그들에게서 억제된 자비였다(4:7). 그러므로 그들은 주실 능력이 있는 분 외에 누구에게 구해야 하겠는가? 열방의 허무한 것들은 능히 비를 내리지 못하며 하늘도 제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렘 14:22). 이런 조화를 일으키고 이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시다. 자연의 하나님, 온 세계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란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고 그 이름으로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다.



[2] 그는 전능의 하나님이시기에 자기를 찾는 자기 백성에게 힘과 권능을 주시며 힘을 잃은 자라도 만일 자기를 섬기면 새 힘을 주신다. 그 이유는 그가 "노략당한 자로 강하게 하사 강한자를 치게 하시는" 때문이다(9절, 흠정역). 노략당하던 자가 산성을 치러 오며 자기들을 노략하던 자에게 대담한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강해진다. 이것은 여호와를 찾는 백성에게 대한 격려이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들은 아무리 쇠망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정을 호전시키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약탈당하고 대적은 강성할지라도 만약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개입하시게 할 수만 있다면 곧 새로운 힘을 보충받아 그 다음에는 공격자가 될 뿐만 아니라 정복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성을 치러 와서 보복하며 점령하게 된다.

2. 그들은 인간과의 거래에 있어 정직하고 정당하라는 권면을 받는다(14, 15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요구되는 의무는 무엇인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공의가 추방된 성문에서 그것을 재확립하라(7절)." 정당한 경로를 취한다면 돌이키지 못할 만큼 악한 사태는 없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한 것이 교정되고 학대가 시정되지 못한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불의가 폭군 노릇하는 데서도 정의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선을 구하며 사랑해야 하고 악은 미워하고 더 이상 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선한 원리를 사랑하고 고수해야 하며 선행을 사랑하며 선행이 풍부해야 하며 선한 사람들과 선한 행실과 선한 의무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선을 행하든지 사랑의 원리에서 행해야 하며 기쁨과 선택에 의해 행하여야 한다. 이처럼 선을 사랑하며 구하는 자들은 가능한 대로 모든 선을 행하려고 궁리할 것이며 선행할 기회를 찾을 것이며 자기 능력이 닿는 데까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악을 미워할 것이며 부정한 행위에 대한 생각까지도 싫어할 것이며 불의한 것이 보이기만 해도 삼가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전 행위 속에서 선을 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앙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체해도 그것은 헛된 일이다.

(2) 어떤 이유가 추가되는가?

[1] 이것은 우리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며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너희가 살기 위해서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가 추구하고 사랑해 온 악의 형벌에서 피할 수 있으며(의는 너희를 사망에서 건진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너희 생명이며 생명 그 자체보다 승한 것이다. 또 너희는 선을 구해야 너희 자신에게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선한 목적으로 살 수가 있다. 너희는 살 것이다. 왜냐하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며 너희 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의 길로 행하는 자는 만군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데 주목하자. "그는 너희가 말한 것과 같이 즉 너희가 영화롭게 한 대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너희는 의로운 길로 계속 행하는 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듯이 보였을 뿐이며 너희는 마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듯이 자랑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너희로 하여금 실세로 나의 임재를 소유하게 해 주겠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개심하는 자는 이전에 상상으로 기대하던 위로를 향유하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을 때 기도하였다. 이제 너희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저희 기도대로 살아가거라. 그리하면 너희는 기도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2] 이것은 민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너희가 만일 선을 구하고 사랑하면 나라를 멸망에서 구할 수 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비록 소수의 무리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면 그들은 다시 큰 민족으로 흥기하게 될 것이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이 만약 죄에 세운다면(우리가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어도) 나라의 꼴이 면목을 일신하고 복된 급선회를 할 것이며 만일 사람들이 생활을 개선한다면 만사도 호전될 것이다. 현세적 약속에는 "혹시" 라는 단서가 붙는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도 그에 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5: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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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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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위협과 책망 (아모스 5:16-20)

Ⅰ. 여기에는 매우 두려운 심판이 예고되고 있다. 그 심판은 임박했다(16, 17절). 그들은 정당한 경로를 취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획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효과적 방도를 취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노여움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게 하려고 하신다. 그들을 벌벌 떨게 하기 위해 이 경고에는 보통 이상의 엄숙한 선언이 도입되고 있다. 이것은 선지자만의 말이 아니다(그렇다면 무시당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무한하시고 영원무궁토록 존재하시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그 권세가 무한하여 항거할 길이 없는 만 군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도나이(Adonai) 즉 주이시다. 그는 경쟁할 수 없는 절대적 주권과 우주적 지배권을 소유하신다. 그런 분이 이 말을 하셨고 또 그는 자기 말을 이행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자기 말을 실행하실 것이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이스라엘 땅에는 애곡과 애곡 소리가 일어날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이 그들에게 임하는 재난으로 인해 애곡하는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도시를 가 봐도 거리마다 사람이 슬피울 것이니, 큰 거리나 작은 거리가 일반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고 "우리는 망했구나" 하고 통곡할 것이다. 애곡하는 소리는 너무나 커서 집 안에 유폐되거나 예의범절 속에 갇힐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광장과 거리에서 광포될 것이며 제멋대로 목놓게 될 것이다. 농부도 조국의 재난에 부름을 받아 쟁기를 놓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애곡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에 애곡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호출되어 진정으로 애곡하는 자들의 울음소리에다 "오호라, 오호라" (ahone, ahone)라는 곡을 더할 것이다. 심지어, 환락과 즐거움의 대명사로 통하던 모든 포도원에서도 곡소리가 진동할 것이다. 외적이 침입하여 모든 것을 쑥대 밭으로 만들지만 대항할 자가 없고 기도와 눈물 외에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땅은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파멸의 진행이 바로 이 모든 애곡의 원인이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멸하는 천사는 애굽땅 가운데로 지나가면서 장자들을 죽였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서 지나갔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그들 곁으로 통과했지만 이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며 그들을 관류할 것이다.

Ⅱ. 이 경고를 무시하고 주제 넘게도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대해 공정하고 엄한 책망이 나온다(18절). "화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이들은 정신이 불안정하여 변화를 바라는 자들처럼 실로 전쟁과 혼란의 시기를 원하는 자이거나 아니면 조국의 패망을 기화로 가족의 부양을 바라면서 흉용한 물결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 황폐가 너무나 커서 아무도 이득 볼 자가 없다고 말한다. 또는 이것은 욥처럼 자기들의 재난을 애곡하고 통곡하는 가운데 격정으로 자지러지고 불행에서 해탈하기를 소원한 자들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 또한 어리석은 짓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죽음이 너무나 비참하며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 될 것이란 사실을 몰랐다. 또는 이것은 오히려 여호와의 날을 농담조로 얘기하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는 무척 진지한 태도로 여호와의 날을 말했으나, 그들은 농담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을 사모했다. 즉 그 날에 도전했다. 그들의 태도는 바로 이 것이다. "여호와로 하여금 자기 마음껏하게 하라. 최악을 다하게 하라. 그로 자기 일을 속히 행하게 하며 이루게 하라(사 5:19). 그가 온다는 약속은 어디 있느뇨? (벧후 3:4)"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여호와의 날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 날의 도래를 믿지 않기에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날을 보지 않는다면 믿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2. 그들은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여호와의 날의 도래를 다소 믿는다. 치더라도 거의 중시하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은 다른 일로 꽉 차 있어서 위기 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은 그 날을 두려워할 만한 양심을 지니긴 커녕 그 날을 사모하는 호기심마저 갖는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한다.

(1) 무례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며 여호와의 엄중하심을 희롱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너희는 그 날이 확실하고 슬픈 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날은 희롱의 대상이 아니다. 그 날은 올지 안 올지 의문시할 대상도 아니며 그 날이 올 때는 소홀히 일축되는 것도 아니다.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다(18절). 그 날이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20절) 너희 양심이 그 날은 매우 캄캄하여 그 안에 광명이 없다고 말하지 않느냐? "여호와의 날은 회개치 않는 모든 죄인에게 어둡고 음울한 운명의 날이 되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심판의 날은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의 현재적 환난의 날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날을 어둡게 만드실 때에는 온 세상도 그 날을 빛으로 만들 수 없다.

(2) 심판 다음에는 더 나아지고 더 참을 만하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성급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변화를 사모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그들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것은(자기 마음과 생활은 개선하지 않으면서) 자기 형편을 향상시키겠다는 희망에서거나 아니면 최소한 최악을 알아보겠다는 바람에서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자기가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19절).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는 것과 같다. 곰은 사자보다 더 잔혹하고 탐욕스런 맹수이다. 또는 그것은 마치 사람이 밖에서 온갖 위험을 피하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진정하기 위해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도 개심하지 않는 자들은 그 심판의 추격을 받게 되며 한 심판을 벗어나더라도 또 다른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가 엄습할 것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다(사 24:17, 18).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을 무시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5:17 없음.

 

5:18 없음.

 

5:19 없음.

 

5:20 없음.

 

5:21

위선적 예배의 배척 (아모스 5:21-27)

이 문단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계속 죄 가운데 행하는 자들의 외면적 신앙 행위를 얼마나 대단챦게 여기시는지, 아니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나타내는 데 있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그들의 위선적 예배는 하나님을 매우 불유쾌하게, 아니 매우 노엽게 해드렸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명절을 모방하여 벧엘에서 절기를 지켰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척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예배를 위한 성회를 열었다. 그들은 그의 백성이 나아오듯 하나님 앞에 나오며 그의 백성이 앉듯 그 앞에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번제와 함께 소제를 하나님께 드려 그를 영화롭게 했고 이것은 율법에 의해 드리기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탄원하기 위해 화목제를 드리며 자기들이 가진 살찐 짐승의 화목제를 드렸다(21, 22절). 그들은 또 성전 음악을 모방하여 성악과 기악을 혼용하여(23절)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이런 예배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의 범한 죄를 보상해 주시고 계속해서 자기들의 범행을 묵인해 주시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 용납하시긴커녕 그들을 가증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셨다. 그는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예배를 귀중히 여기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대한 모욕과 도발로서 미워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면을 쓰고 대하며 실제로는 우리를 전혀 존경하지 않으면서 존경하는 체하는 것을 보게 되면 미운 생각이 든다. 위선보다 밉살스러운 것도 없으면 가식보다 비열한 것도 없다. 큰 소리로 자기 친구를 송축하는 자가 그 마음이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게 드러날 때는 그것이 저주로 간주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회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회에는 은혜로운 것이 없고 역겨운 것만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생은 하나님께 노아의 제물처럼 향기롭지가 않았다(창 8:21). 그는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것을 존중하지도 않으실 것이며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비파 소리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죄가 화음을 이루며 소리를 낼 때 하나님의 귀에는 그것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쳐라. 내가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암시한다.

1. 도덕적 의무와 비교하면 희생 자체는 하나님께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더 낫다.

2. 악인의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잠 15:8). 경건의 위장은 이중의 죄이다. 그래서 지옥의 어느 한 장소가 다른 곳보다 더 뜨겁다면 바로 그곳이 외식자의 분깃이 될 것이다.

Ⅱ. 희생 제물을 열납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결여된 제물은 여하한 것도 열납될 수가 없을 것이다(24절).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1. "너희 중에 전체적인 정풍 운동이 일어나게 하라. (하나님의 공법인)종교와 정의가 너희에게 정당한 영향을 입히게 하라. 너희 땅에 공법과 정의를 뿌려서 악과 불경의 반대를 씻어 버려라. 그 물로 하여금 범람하는 강물처럼 넓게, 하수처럼 강하게 흐르도록 하라."

2. "특히, 재판관과 통치자는 법을 올바로 행사하라. 편파와 뇌물에 공법과 정의의 흐름이 막히지 않게 하라. 물이 수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 공법과 정의도 자유롭게 시행되게 하라. 그것으로 하여금 흐르는 물처럼 순수하게 하며 부패로 흐려지지 않게 하고 정의의 법을 왜곡시키지 말아라. 그것으로 하여금 하수처럼 세차게 흐르게 하며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여 그 흐름이 장애물에 걸리거나 지체되게 하지 말라. 누구든지 냇물에 자유로이 나가듯 모든 자로 하여금 자유로이 공법에 접근하게 하며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누구든지 공법의 혜택을 입게 하라." 이스라엘이 크게 책망받은 것은 공법을 인진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7절). 그러므로 그들의 개혁은 그 부분에서도 일어나야 한다(슥 7:9). 이것은 하나님이 제사보다 더 바라시던 일이었다(호 6:6; 삼상 15:22).

Ⅲ. 하나님은 제사법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를 하지 않으신다. 제사법은 하나님 자신의 율법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도덕적 교훈에 비할 때 별반 중요한 게 아니었다(25절).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드렸느냐? 너희는 드리지 않았다." 광야 생활 당시에는 대부분의 제사가 그들의 미정착된 생활 환경 때문에 매우 소홀하였다. 출애굽한 지 제 2년이 지나서도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다른 규례도 중단되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기뻐하고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의 태만을 과오로 돌리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그들에게 인자를 베푸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여워하신 것도 제사법에 대한 태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불평과 불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른 일로 그를 고수할 때는 비록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자기백성으로 인정하셨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제사는 드릴지라도 다른 일로 하나님을 떠난다면 틀림없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의식에 의한 제사가 비록 이렇게 취급된다고 해도 영적 제사는 그렇게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기도와 찬미, 상한 심령과 하나님 사랑의 결어에는 비록 공의와 정직이라도 그 변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스데반은 이 성구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에게 의식법의 폐기를 이상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행 7:42). 당초부터 제사법은 비교적 경하게 간주되었던 것이다. (렘 7:22, 23 참조).

Ⅳ. 그들은 자기들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될 것으로 기대할 만한 이유를 거의 갖지 못했다. 그들과 그 열조는 줄곧 이방 신들의 예배에 빠져 있었던 때문이다. 어떤 이는 25절을 이렇게도 해석한다. "너희는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즉 내게만 드렸느냐?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전혀 열납받을 만하게 바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는 법은 오직 그분만 섬겨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몰록의 장막을 받들었다(흠정역, 26절). 너희는 몰록의 작은 사당을 만들어 함께 지고 다녔다. 그리고 감히 공공연히 보이기가 뭣할 때 개인의 미신용으로 호주머니에 휴대할 수 있는 우상도 만들었다. 너희는 너희의 몰록-너희 왕이란 뜻이다-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이것은 아마 천체들 가운데서 군림하고 있는 태양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기윤 또는 레판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스데반은 70인 역을 따라 그렇게 부른다(행 7:43). 이것은 일곱 혹성 중 가장 높은 토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월성신의 숭배는 아주 옛날부터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럴 듯한 우상 숭배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별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삼았다. 그들은 특정한 별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거나 그 이름을 자기들의 신에게 붙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이런 류의 우상숭배에 물들기 쉬웠다(신 4:19). 거짓 신들에게 대한 애착심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은 참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가 없다.

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우상 숭배를 고집함에 따라 형벌을 내리려고 하셨다(27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들은 사탄에게 포로로 잡혀서 우상 숭배로 끌려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상 숭배자 가운데로 사로잡혀 가게 하셨고 낯선 이방 땅으로 걸음을 재촉하게 하셨다. 그들은 이방 신들을 그토록 좋아한 때문이다. 그들은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갔다. 앗수르인에 의한 포로는 수리아인에게 끌려 가는 것을 훨씬 능가하였다. 이는 작은 심판이 작동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심판을 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은 디글랏빌레셀 치하에서 다메섹에 포로된 것보다 훨씬 비참하고 괴로왔을 것이다. 이것은 1장 5절에서 예언되었다.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범죄는 다른 사람의 죄보다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그들의 형벌도 그 죄에 비례할 것이 예상된다. 우리는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다 약탈을 당하여 앗수르 왕에게 옮겨진다는 기사를 읽는다(사 8:4). 스데반은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즉 유다가 끌려가는 것보다 더 멀리, 돌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너희를 끌어가리라" (행 7:43)고 읽는다. 그리고 이 판결을 보다 확실하고 보다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이 판결을 선고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과 자기가 만군의 하나님임을 밝히신다. 그는 만군은 지배하시기에 이 판결을 집행할 수 있으시다.

 

5: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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