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위협 (아모스 3:1-8)
이 문단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쟁론을 벌이셨다는 것을 각성시켜 주는 데 있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곧 여호와께서 그들을 쳐서 말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1절). 그들은 다른 백성보다 독특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이를 말씀이 계셨다. 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듣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은 재판정에 선 죄수가 기소장 낭독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듯이 답변할 말을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요청을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이 몇 번이고 그들에게 하신 권면과 위로의 말씀을 주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쳐서 이르시는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가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Ⅰ.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로이 인지하시고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다고 해도 그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족속(원의:가족)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땅으로 내려갈 때는 하나의 가족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거기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셔서 자기 가족이 되게 하셨다.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열지파의 나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다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신 말씀인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을 내리시고 특별히 인정하신 족속이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노라."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땅위의 모든 족속보다 존귀한 족속이라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 알려진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다. 그러므로 유다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께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셨다. 즉 그는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세우시며 친숙한 자들로서 그들과 교제하셨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올 줄로 생각하기 쉽다. 즉 "그러므로 내가 너를 살려 주며 너희 허물을 묵과하고 너희를 용서해 주리라." 그러나 사실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는 말이 나오고 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우리를 범죄로부터 방지하는 데 이용되지 못한다면 징벌로부터 우리를 면제시켜 주지도 못한다는 데 주목하자. 아니, 누구든지 하나님께 더 가깝다고 신앙을 고백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더 인자히 돌보시면 돌보실수록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산은 보다 확실하고 보다 빠르고 보다 엄중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고의적 범죄로 자기들의 명예를 더럽히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치스럽게 하고 약속을 깨뜨리며 그들이 받은 바 각별한 은총과 명예를 무시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죄보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을 더 불명예스럽게 만들며 더 모욕하며 더 슬프게 만드는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자기가 죄를 증오하며 특별히 자기와 가장 가까운 자들의 죄를 제일 미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고 흠없이 증명하실 필요가 있으신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남들과 마찬가지로 악하다면 벌은 남보다 더 심하게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남보다 선할 것이 기대되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며 성소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로 거룩하다 함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레 10:3).
Ⅱ.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편안한 교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3절).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친교는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이 만일 견해 차이를 일으키고 있다면 먼저 차이난 문제를 조정해야 좋은 교분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와 맺은 언약을 깨뜨리며 그의 은총에 악한 보답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들과 동행하시며 자기들을 위해 행동하시고 그의 임재를 확신시켜 주시리라고 기대하였다. 회개와 개혁으로 그들을 대적하시는 분과 합의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애써 그의 분노를 돌이키려 하지 않으면서 기대만 잔뜩 하였다. 하나님은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너희가 내가 대항하기를 계속하는 동안은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대항하리라는 것밖에 기대할 수 없다" (레 26:23, 24 참조)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화하지 않으면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이 합하지 않는 한 동행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종말에 하나님과 동감이 되지 못하면(일치는 그의 영광이다)도중에 그와 동행할 수가 없다.
Ⅲ. 그들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가 근거없고 까닭없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분노의 선언이었다. 그들이 만일 신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그 심판의 결과를 맛보게 될 터였다(4절). "사자가 움킨 것이 없으면서도 수풀에서 부르짖겠는가?" 아니다. 사자는 자기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린다. 어미 사자가 아무 것도 잡아오지 않았는데도 젊은(어린)사자가 굴에서 소리를 내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너희가 죄로써 그의 분노의 먹이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말씀의 위협과 보다 작은 심판으로 너희에게 경고를 하셨겠는가? 황폐와 멸망이 심판으로 너희에게 실제로 엄습하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너희에게 경고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의 위협은 결코 어린애나 바보를 놀라게 하는 허깨비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부터 추리되는 확실한 추론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실한 전조이다.
Ⅳ. 그들은 자기들이 죄악이 심판의 원인이면, 제할 일을 다 할 때까지는 그 심판들도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5절). 하나님이 죄 많은 백성과 다투러 오실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1. 그들을 얽어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죄이다.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서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는가? 피조물에게 덫을 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이다. 새는 우연히 덫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새잡이의 계획에 의해 잡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도 죄인에게 고생을 준비하신다. 그들이 덫에 치이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손에서 되는 일이다. 고난은 땅에서 뛰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징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 자신의 악이다.2. 그들의 얽힌 것을 풀어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회개뿐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무엇인가 잡히지 않고서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그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가 보내신 고난이 제 일을 다하고 보낸 목적을 성취하기까지는 고난을 제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마음이 적당하게 낮아지고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노력 죄를 고백하고 버리게 되면 창애(덫)는 무언가 잡으며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그 존재 의의에 합당한 셈이 된다. 그 때까지는 덫이 꺾여지지 않고 땅에서 제거되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는 사랑과 자비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다.
Ⅴ. 그들은 모든 환난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부터 오며 그의 의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6절). 여호와가 시키시고 정한 바를 행하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과 가정과 나라에 임하겠느냐? 죄로 인한 재앙은 우리 자신에게서 유래한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환난의 재앙은 공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로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다. 누가 그 도구로 사용되든지 간에 하나님이 그 주된 행위자이시다. 그의 입에서는 재앙과 복이 다 나온다. 성읍에 어떤 재앙이 임하든지 그 일을 행하신 이는 여호와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끈기있게 국가적 재난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Ⅵ. 그들은 임박한 심판의 경고를 하는 선지자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만 백성들에게 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1. 하나님께서는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미리 알리신다(7절). "여호와께서는 그 성읍에 임하리라" 고 말씀하신 재앙 중 그 어느 것도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비밀이지만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미리 알리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심부름을 시키시는 종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하나님의 비밀은 선지자에게 있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모든 의인(잠 3:32)에게 보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보인다(시 25:14).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선지자들에게 보이는데 그들에게는 예언의 영이 계시의 영인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자기의 의도를 선지자들에게 보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만 해도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충분한 명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치 그들이 자기 모사라도 되는 듯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고 하는 말은 여간 큰 명예가 아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선지자인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자들과 반드시 셈하실 것이다. 선지자는 그가 존귀하게 여기시는 때문이다.2.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없다(8절).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지자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비밀리에 말씀하시며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백성들에게 공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신적 일들이 속에 가득하고 그 일들에 대해 확신을 가지며 또 그 일들로 많은 감동을 받으므로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마 12:34; 눅 6:45).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20). 영감과 동행하여 말씀을 골수에 사무치는 불처럼 만드는 예언적 충동 외에(렘 20:9) 그들은 위탁받은 것을 전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들이 만약 그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렸을 것이다. 복음의 선포자들처럼(고전 9:16) 그것은 그들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었다.
Ⅶ. 그들은 하나님의 따끔한 경고를 받을 때 그 앞에서 떨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들은 마치 다음 두 가지 경우에서와 같이 두려워해야 했다.
1. 대적의 접근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적군의 내습을 알리는 나팔 소리로 모든 사람은 각기 경계 태세를 갖추고 무기를 쥘 수 있게 된다.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또는 '함께 도망하지 않겠느냐?'라고 읽는 이도 있다) 그들은 즉각 놀라서 모일 것이며 또 공동 안전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지 심사숙고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위험을 경고하시며 와서 그의 깃발 아래 편입하도록 소집하시는 데도 그것은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받은 선지자 보다 오히려 성벽 위의 파숫군을 더 신임하려 하며 이 세상의 통치자의 소집 명령 보다 오히려 그들의 성주의 소집령에 복종하려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듣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분명히 이야기한다(렘 6:17).2. 사자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유다집에 사자 같으시며 어린 사자 같으시다(호 5:14). 사자는 찢기전에 포효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상처를 입하시기 전에 경고를 하신다. 만일 사자가 나그네에게 부르짖으면(삼손에게 그랬듯, 삿 14:5)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는 데도 두려워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그들은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이 태연히 행동한다. 태무 심한 세상에게 따끔한 경고가 내려지는 데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 다른 날 그들의 정죄를 더욱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는 데 주목하자. 사자가 울부짖었는 데도 그들은 두려움으로 감동되지 않으며 방주를 예비하지도 않았다. 오! 불신 세계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놀랄 만한가! 그들은 여호와의 경고에도 감동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정죄받는 이스라엘 (아모스 3:9-15)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유죄를 선고받고 정죄당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범한 죄와 정죄받는 형벌이 구체적으로 고시된다.
Ⅰ. 그것은 이웃 나라들에 고시된다. 선지자는 그것을 아스돗의 궁들에 광포하라고 명령받고 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주요 성읍 중하나이다. 아니, 그것은 애굽 땅 궁들에 까지도 알려져야 했다. "이 양국의 위인들 즉 왕궁에 거하여 인근 열방의 형편에 호기심을 갖고 대외 정보에 정통한 자들로 하여금 사마리아 산들에 모이게 하라" (9절). 심판은 높이 들리워진 보좌 위에서 베풀어진다. 재판에 회부된 자는 사마리아이다. 그들을 재판정에 대령시켜라. 왜냐하면(다른 재판들처럼) 이 재판은 중인환시리에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로 사마리아에서 회집할 약속을 하게 하라.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포도원 사이의 시비곡직을 판단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평무사한 의인에게 호소하신다(겔 23:45). 그들은 사건의 시시비비를 목격하면 하나님의 처사가 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죄인들과 벌이시는 하나님의 논쟁은 하등 꺼림직한 데가 없고 의심받을 요소가 없다는 데 주목하자. 블레셋인과 애굽인들조차 보고 여호와의 길은 공평하며 자기들 길은 불공평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블레셋인과 애굽인도 소집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은 그들 역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고 그가 공평히 행하신 다는 데 있어 그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경고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보는 대로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마지막은 어떠할 것인가?(벧전 4:17) 푸른나무도 이같이 한다면 마른나무이리요? 또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도 악명이 높아 그들의 인방도 그들을 쳐서 증거할 정도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형벌도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숨길 수만 있다면 갓에서 고하지 말며 에스글론 거리에 공포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자기들의 명성을 안중에 두지 않는 터에 그들의 우방이 그들의 명예를 위해 애쓸 까닭이 어디 있는가? 그들이 더욱 후안무치하게 범죄한다면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한 수치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아스돗과 애굽에 그것을 광포하여 말하라."
1. 그들은 죄상이 얼마나 악하며 증명이 얼마나 충분한지 알아야 했다. 그들은 사마리아 거민의 태도를 관찰해야 했다. "그 들로 가까운 산 언덕에서 보게 하라.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얼마나 무례하며 난폭한지 보게 하며 저들이 지은 죄의 부르짖음이 소돔인의 죄악처럼 얼마나 드높은지도 듣게 하라."(1) 그들의 거리를 들여다 보라. 그러면 너희는 소동과 무질서밖에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큰 요란함이 있나 보라." 어느 경우에나 이성과 정의는 난폭한 폭도들의 훤화와 격분에 짓밟힌다. 어느 나라든지 폭도의 지배는 그 백성의 죄이자 수치이며 파탄을 몰고 오기 쉽다.
(2) 그들의 형옥을 들여다 보라. 그리하면 너희는 그곳에 무죄한 피해자들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학대함이 그 중에 있다." 학대받는 자들은 학대자들에게 짓밟히며 압착을 당하되 그들에게는 위로하는 자가 없다(전 4:1).
(3) 그들의 재판정을 들여다 보라. 너희는 정의의 뜰을 주재하는 자들이 항상 행악에 익숙하기에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정의의 정자도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 그들은 나남을 막론하고 정의를 행하는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4) 그들의 보고와 창고를 들여다 보라. 그러면 너희는 그 곳이 포학과 겁탈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부정으로 번 것이 채워져 있으며 아직도 부당하게 간수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아 두었으나 그 재물은 진노의 날에 진노의 재물로 판명될 것이다. 나쁜 일을 행함으로 부유해지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는 자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얼마나 엄중하며 얼마나 잘 집행되는지도 알아야 했다(11, 12절).
(1) 그들의 국토는 침략당하고 파멸을 받게 될 것이다. 벌이 죄와 얼마나 상응하는지 주목하자.
[1] 그 나라 가운데는 큰 요란함이 있다. 그러므로 대적이 그 땅 사면에 있게 될 것이다. 앗수르 군대가 그 땅을 포위하고 사방팔방으로 침입하게 될 것이다. 죄가 한 백성 중에 정착하며 만연하게 될 때에는 대적이 사면에 있어 어디로 가든 위험의 호구에 들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눅 19:43).
[2] 그들은 악함 중에 자기 자신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대적은 그들의 힘을 쇠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힘을 남용하여 가난한 자를 확대고 자기 주위의 모든 자에게 포학을 행했던 까닭이다. 불의의 도구가 된 힘은 마땅히 쇠하고 파괴될 것이다.
[3] 그들은 자기 궁절에서 겁탈을 쌓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궁들은 약탈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릇되게 획득하고 부정하게 간수되는 것은 오래 가지지 못할 것이다. 왕궁조차 기만과 압제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권세있는 자들이 남을 약탈하면 그들도 약탈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런 모든 자의 복수자가 되시는 때문이다.
(2) 그들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12절) 그들은 사자의 입에 든 어린양처럼 대군의 수중에 들게 될 것이며 전부가 삼키고 먹힐 것이다. 그들은 저항할 능력이 전혀없게 될 것이다. 원수의 칼에 엎드러지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됨을 모면하려고 도망치는 자들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극소수일 것이다. 사자가 먹다가 떨어뜨리는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처럼 그들 중에서 살아남는 자들은 극히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극소수의 무리일 것이다. 또는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새끼의 두 정갱이나 귀 한 조각을 건져내는 것같이 남는 무리도 극소수의 미미한 자일 것이다. 아마 앗수르의 왕이 사마리아와 다메섹을 공략할 때 여기 저기서 하나씩 도망치는 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도망친다고 하는 자들도 극히 어렵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서야 구명도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침상 모퉁이나 걸상 아래 몸을 숨김으로써 위험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혼비백산하고 간이 콩알만해지며 위기를 맞는 순간 극히 수치스럽게 모면할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굴이나 동굴에 몸을 숨기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침상 모퉁이나 가난한 백성이 만족하며 지내는 침상 한 조각에 은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7:34) 고 예언되었듯이 아주 간신히 화를 피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명을 띠고 백성을 치러 올 때는 모면하려고 생각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침상 모퉁이나 걸상에 앉는다는 것이 그들의 현재에 대한 만족과 육욕에의 안주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들은 침상이나 의자에 앉든 펀안히 지내며 안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투러 오실 때에는 그들을 편안치 못하게 만드실 것이며 나태와 수면을 침상을 그들에게서 빼앗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발동 중인데도 게으르게 침상과 의자에 사지를 뻗고 기지개를 켜는 자들은 사로잡히는 자 중에 맨먼저 사로잡힐 것이다(암 6:7).
Ⅱ. 그들 자신에게 고시된다(13절). "너희는 이것을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하라. 이는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 판결을 내릴 권세와 그 판결을 집행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들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실 날이 가까왔다는 것을 알게 하라.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조사하고 심문하실 것이며 그들의 범죄에 대해 회계하실 것이다. 보응의 날, 형벌의 날은 올 것이다. 그 날에는 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던 모든 것들이 그들을 실망시키고 낭패시킬 것이어서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뼈저리게 의식할 것이다.
1. 그날은 그들의 제단에게 화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단들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제단에서 지은 죄를 조사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미신과 우상 숭배를 추궁하실 것이고 거짓 신들에게 들인 모든 비용과 그들에게 대한 모든 기대를 셈하실 것이다. 그는 노여움의 표시로 그 단들을 그들의 발 아래 놓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단은 그들과 함께 훼파될 것이며 박살이 날 것이다. 우리는 벧엘의 제단도 이런 예언을 받고(왕상 13:2) 곧 갈라졌으며(3절) 요시야가 하나님의 사람의 뼈를 그 위에서 살랐을 때 이 예언이 성취 되었다는 것(왕하 23:15, 16)을 읽었다. 본문은 그 예언을 지지하며 바로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우상의 제단을 훼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며 그 때에는 우상의 공경자들을 함께 멸하실 것이다. 단의 뿔은 그들이 피해 도망가며 신뢰하며 도피처로 삼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꺾여서 그들은 붙잡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2. 그 날은 그들의 집에 화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집도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자기 집에서조차 지은 죄와 그들의 집에 쌓은 겁탈과 그들의 호사스런 생활을 추궁하실 것이다. "내가 그들의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라" (15절). 귀족과 상류 계급과 부유한 상인들은 성안에 겨울 궁들을 지어 두며 성 밖에는 여름 궁을 지었다. 복지의 기후는 우리들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무척 온화하여 추위도 더위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 밖이 너무 춥다고 생각될 때에는 성안에 겨울 궁을 짓고 너무 덥다고 생각될 때는 여름 궁을 성안에 지어 더위와 추위를 방지하는 데 만전을 기하였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변화와 다양한 것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으로든 지진으로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다 치실 것이다. 두 가지 궁이 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상아궁들은 파멸될 것이니 소실되거나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들은 천정이나 벽 또는 장식품이 상아로 돌리거나 상감되어 있기 때문에 상아궁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큰 궁들이 결딴 날 것이다. 그들의 권세가가 사는 집 곧 극히 화려하고 광활한 집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적어도 그들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집의 위용이나 쾌적함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는 요새가 되지 못하며 도리어 그들을 더욱 비참하고 괴롭게 만들 것이니 이는 그 집들에 대한 사치와 낭비는 죄와 미련함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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