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위협 (요엘 2:1-1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해 그들과 다투시며 율법에 기록된 심판을 시행하신다. "네 토지의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라" (신 28:4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내리시려던 질병중 하나였다(신 28:60).
Ⅰ. 여기에서는 전쟁이 포고되고 있다(1절).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 이것은 침략군을 모아 진군시키기 위한 나팔이거나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심판의 접근을 주지시키기 위한 나팔이다. 이것은 그들로 나팔 소리를 듣고 준비하여 심판의 길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교회의 최상의 무기인 기도와 눈물로써 공격을 저지시키도록 힘쓰게 하기 위함이다. 나팔을 부는 일은 제사장들에게 속했다(민 10:8). 제사장은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호소하는 경우나 백성을 회집시켜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하는 경우에 나팔을 불었다. 죄악의 치명적 결과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고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늘의 진노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목사들의 일이라는 데 유의하자. 하나님께 득죄하면 시온과 예루살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을 특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할 수 하도록 경고를 받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비록 성산에서일망정 나팔은 울려야 하며 그럴 때 그 나팔 소리는 극히 두렵다(암 3:2). 성읍 곧 거룩한 성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 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6) 정녕코 그들은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하라. 그들은 심판 그 자체로 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판의 경고 소리에도 떨어야 한다."
Ⅱ. 여기에는 전쟁 날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나온다. 전쟁의 날은 이르르며 임박하였다. 그 날을 피할 도리는 없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며, 그의 심판 날이다. 그는 그 날에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며 크게 하실 것이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다(2절).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메뚜기와 황충의 떼는 너무나 무수하여 하늘을 캄캄하고 어둡게 만들 것이다(출 10:15). 또는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 날은 음울하고 절망적으로 고통스러운 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 같을 것이다. 그 날의 어두움은 새벽 빛같이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임할 것이며 멀리 퍼질 것이며, 아침빛처럼 점점 그 농도를 더해 갈 것이다.
Ⅲ. 여기에는 군대가 진열을 정비하고 있다(2절). "그들은 많고 강한 백성이다." 무수한 메뚜기와 황충이 온 땅을 황폐시키는 것을 보는 자는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이 같이 많은 것은 참으로 전무후무하다" 고 말하게 될 것이다. 비상한 심판은 매우 드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심에 대한 본보기라는 점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본문에서 군대는 어떻게 묘사되는지 살펴보자.
1. 매우 대담하고 겁이 없다. 그들은 말 같고 전마 같다. 군마는 전장 속으로 돌진하되 놀라지 않는다(욥 39:22). 그들의 달리는 것은 열화와 격렬함을 갖고 달리는 기병 같다(4절). 어떤 고대인들은 메뚜기의 머리가 말 머리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2. 매우 큰 소리를 내며 시끄럽다. 그 뛰는 소리는 거친 땅 위로 맹렬히 몰고 가는 많은 병거 소리와 같다(5절). 이 표현은 계시록에서 그 일부가 이용된다. 성 요한은 메뚜기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묘사한다.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해 예비한 말들과 같다. 그 날개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와 같다" (계 9:7, 9). 역사가들은 유대 지방이 메뚜기 떼의 습격을 종종 받았는데 그 때 나는 소리는 6마일 밖에까지 들렸다고 우리에게 전해 준다. 또 그 소리는 초개를 사르는 불꽃 소리에 비유되고 있다. 이 소리는 삼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한층 더 두렵다. 하나님의 심판이 발동될 때는 큰 소리를 낸다는 점을 유의하자. 또 그것은 태평스레 안심하고 있는 우매한 세상 인간들을 경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소리이다.
(3) 그들은 매우 규칙적이며 항오를 가지런히 하여 행군한다. 비록 수효는 무수하며 노략품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서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각기 제 길로 나아가며 마치 전쟁 훈련을 받기라도 한 듯이 제 위치를 지킨다. 그들은 그 항오를 어기지 않으며 피차 부딪치지도 않는다(7, 8절). 그들의 수효와 기동성은 아무런 마찰과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고 계획하실 때는 그들을 규칙대로 행동시키신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사용되는 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항오를 유지하며 자기 일에 열중하고 다른 사람의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4. 그들은 매우 신속하다. 그들은 기병 같이 달리며(4절) 용사같이 달리며(7절) 성 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서 달린다(9절) 하나님이 자기 명령을 땅에 보내실 때 그의 말씀은 속히 달린다(시 147:15). 천사들은 날개가 있다. 메뚜기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는 날개를 갖는다.
Ⅳ. 이 가공할 만한 군대는 두렵게 행한다.
1. 성 밖에서 일선의 군대를 보라. 그러면 너희는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는 것" 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치 불을 호흡하듯 모든 것을 살라버린다. 후미의 군대를 보라. 그러면 너희는 뒤에 오는 군대가 최전방 군대 못지 않게 맹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불꽃은 그들의 뒤에도 태운다." 그들이 가고 나면 그들이 행한 멸망의 자취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아직 침해하지 않은 들판을 바라보라. 그것은 에덴 동산같이 보기에 좋고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들판은 바로 성 밖의 자알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그들이 훑어 먹고 지나간 들을 바라보라. 그것은 황무한 들 같다. 누가 이들이 그 전의 땅이라고 생각하랴! 그 전날만 해도 그 땅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또 누가 그 전의 들이 이처럼 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하룻 밤이면 그 들판이 이렇게 되리라고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리고 그들을 피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무엇이든 남기지 않고 다 먹이로 삼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토지나 신체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이 양자를 다 변화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2. 성안에서. 그들은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7절) 집을 더위 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간다(9절). 애굽에 메뚜기 재앙이 내렸을 때 그들은 바로의 집과 그 신복의 집을 메웠다(출 10:5, 6).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들도 사탄의 사자와 악인의 사절로서 이들 메뚜기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의 심판도 사명을 부여받고 올 때는 문빗장으로 제지되지 않으며 제 길을 찾아 가고야 말 것이다.
Ⅴ. 이로써 백성들은 어떤 인상을 받는가? 그들은 반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대적들은 난공불락이며 따라서 저항할 수가 없다. 그들은 병기와 충돌하고 나아가나(칼 위에 엎드러지나, 흠정역) 상하지 않을 것이다(8절).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상인들이 적 함대의 수중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들으면 자기들의 무역선 때문에 고통스러워 송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떤 자는 자기 밭 때문에, 또 다른 자는 자기 포도원 때문에, 그리고 "모든 자의 낯빛이 창백해질 것이다" (원의:까맣게 될 것이다). 안색이 창백하게 되거나 흙빛이 된다는 것은 극도의 경악을 뜻한다.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안색이 창백해지지만 절망하게 된 사람은 안색이 검게 변한다. 갑자기 놀라 창백해진 안색도 안정이 되면 검게 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랑과 즐거움이 되는 것도 순식간에 우리의 고통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전국이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게 될 것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 것이다." 하늘이나 땅처럼 견고하고 움직일 줄 모르며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같이 보이던 용감한 자도 경악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또는 그 땅의 주민들이 떨리게 될 때에는 마치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생의 부양물들을 줄곧 누려 왔다. 그러나 공포의 엄습이나 양식의 핍절함 때문에 그들의 눈은 침침해지고 시력은 떨어져서 그들에게는 해와 달이 캄캄해지는 것 같고 별들이 빛을 거두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찡그리실 때에는 하늘의 빛들도 아무런 기쁨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창조주께 반역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주는 혜택을 상실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이것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때에는 하늘이 두루마리같이 말리고(사 34:4)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이 불에 탈 것이다(벧후 3:10, 흠정역). 개개의 심판은 우리를 각성시켜 전체적인 심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Ⅵ.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무적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총사령관을 쳐다보라고 지시하신다. 즉 그 총사령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신다(11절).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이다. 그것은 그의 진영이다. 그 군대를 일으킨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신다. 장군이 자기 군대에 명령을 내리고 연설을 하여 병사들을 고무하듯 여호와께서는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신다. 이 모든 곤충에게 명령의 말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며 그들은 그의 명령을 꼭 그대로 준수한다. 어떤 이들을 하나님께서 구름같은 메뚜기와 함께 뇌성벽력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여호와의 소리로 불리우며(11절) 또 뇌성은 애굽의 열 재앙 중에서 우박과 함께 보내졌고 하늘과 땅을 진동하게 하는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날이다(1, 11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전쟁에서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 되어야 하며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진은 심히 크고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전쟁하는 자들을 수적으로 압도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사자로서 자기 명령을 집행시키기 위해 부리시는 자들은 틀림없이 강하게 되며 par negotio-즉 자기 맡은 일에 상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명을 부여하시는 자를 강한 힘으로 무장시키셔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그의 정의의 기념물이 될 모든 자에게 그 날을 크고 심히 두렵게 만든다. 그러니 당할 자가 누구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의 붙잡음을 피할 수 없고 그 힘에 대항할 수 없으며 그 무게 아래서 버틸 수도 없다(삼상 6:20; 시 76:7).
회개의 권면 (요엘 2:12-17)
우리는 여기서 간절한 회개의 권면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앞에서 묘사된 위협적 심판에서 유도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 오라."
이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이 심판은 너희로 죄를 깨닫게 하며 너희 죄에 대해 겸비케 하며 너희로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충성에로 환원시키기 위해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심판의 목적과 의도에 부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으시는 것은 우리를 회개시키고 우리를 본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이다.2. "그와 같이 함으로써 너희는 심판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 현재 네 형편은 몹시 악화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형편이 더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아니, 만약 네가 이 방도를 받아들인다면 네 형편은 곧 훨씬 호전될 것이다." 여기에는 은혜로운 초대가 베풀어지고 있다.
Ⅰ. 개인적 회개가 촉구된다. 이것은 각자의 영혼에 작용하는 회개를 말한다.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며 그 아내들도 따로 애통한다" (슥 12:12). 하나님의 심판이 널리 발효될 때에는 각자가 공동 간청에 대한 자기 몫(쿼타)을 이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공동의 범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 잘못을 고치며 자기를 위해 애통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모두 고침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애곡자로 발견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우리가 여기서 촉구 받는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회개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늘 요구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회개를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1)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렸다는 것을 미안해 하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에게 자해 행위를 저절렀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우리 판단과 이익을 그르쳤다. 회개에는 슬픔과 수치에 대한 외적 표현 곧 금식과 우는 것과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으로 인한 눈물은 그 괴로움을 가져 온 죄에 대한 눈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내적 감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슬픔의 외적 표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회개에는 중심으로부터의 애통이 따라야 한다. 내적 감동이 외적 표현의 근원이 될 때 슬픔은 저절로 외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는 말씀이 뒤따라 나온다. 이것은 그 시대의 풍습대로 옷을 찢는 일이 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옷을 찢는 것은 자기들의 죄악에 대한 큰 슬픔의 표시였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자신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옷을 찢는 행위로 충분하기라도 한 듯 회개 중에 쉬지 말라. 너희 옷을 금식일과 고행일에 맞추려느니 보다 너희 심령을 거기에 맞추려고 더욱 애를 쓰라. 아니, 너희가 마음을 찢지 않는다면 너희 옷은 조금도 찢지 말라. 상징은 나타낼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상(事象)없는 상징 즉 알맹이 없는 표적은 장난이며 조롱이며 하나님께 대한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찢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실 것이다(시 51:17). 죄 때문에 우리 마음이 심히 괴롭고, 우리가 죄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욕되게 했으며 우리자신을 얼마나 훼손했는지를 생각하고 마음이 찢어질 때, 그리고 우리가 죄에 대한 혐오감을 품으며 죄의 원리를 일소하려고 간절히 원하며 결코 죄 된 행위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찢는 것이며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고 자비로이 우리에게 내려오실 것이다.
(2)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께로 전향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불화할 때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2, 13절). 우리를 우리 하나님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식과 애통도 아무 가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우리 의무요 이득이라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며 우리가 그에게 등을 돌렸던 일을 충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확고부동한 결의로써 그의 영광을 우리 목적으로 삼으며 그의 뜻을 우리 규칙으로 삼으며 그의 은총을 우리 축복으로 여길 때라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이 일을 명령하고 촉구하며 속히 이 일을 행하라고 초대한다.
2. 이 백성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며 마음을 다해 그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사용되는 설득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죄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죄로부터 마음을 찢을 때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갈 준비가 되며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된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사실을 참작하자.
(1) 우리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선한 신이심을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우리 죄를 벌하심에 있어 그가 정당하고 의로우셨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몰고 간다. 그러나 이것뿐만은 아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회개하는 우리를 받아들이심에 있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는 것이다. 이런 자비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돌이켜 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자기를 거스려 노하게 하는 자들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원하는 자에게는 인애가 크시다. 이 표현은 여호와께서 인자함과 자기의 모든 영광으로 모세 앞을 지나시면서 그 이름을 반포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이다(출 34:6, 7). 그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의 마음이 변화될 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방법이 변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결은 번복되고 율법의 저주는 제거된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일어나는 회개야말로 진실한 회개이며 순수하고 복음적인 회개이다. 우리는 그 자비를 거스려 범죄했으면서도 절망 중에 있지는 않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로 하여금 더 대담하게 계속 죄를 짓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회개를 유발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유인(誘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130:4). 면책 행위(자비에 의한)는 권리 박탈 행위(정의에 의한)로 겁먹고 물러났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2) 우리가 회개하면 죄로 상실하고 박탈당했던 복을 다시 받게 될 것이라고 바랄 만한 이유가 있다(14절).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 것이며 이전에 행하셨듯 우리를 계속 대적하진 않으실 것이며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죄를 뉘우치고 의무의 길로 그에게 돌아가자. 그렇게 할 때라야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대한 심판을 뉘우치고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기대하는 태도는 몹시 겸손하고 정숙하다. "주께서........하실지 누가 알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스럽게 표현된 것은 백성의 엉뚱한 생각과 안일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들을 자극하여 거룩한 경계심과 활발한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수 24:19 참조). 또는 이 의문형 표현의 이유는 그들이 즐겨 기대하는 것이 현재적 심판의 제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가 현세적 심판을 제거해 주실지는 자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우리와 화해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이런 저런 고난을 제거해 주실지의 여부는 의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절반의 가능성만으로도 우리는 힘을 얻어 회개해야 한다. 현세적 복락에 대한 약속은 왕왕 "혹시" 라는 말로 성립된다. "너희가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다윗은 죄를 용서받는다. 그렇지만 아이는 죽을 것이다. 그때 다윗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기에서와 같이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누가 알까?" (삼하 12:22)하고 말했다. 니느웨 사람들도 이런 것을 고려하여 회개하고 개심했다(욘 3:9).
[2] 기대의 내용은 경건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시기를 바란다. "그 뒤에" 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막 떠나가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대신 아무 축복이라도 만족하겠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뒤에" 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의 쟁변을 그치신 뒤 축복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전제와 소제" 이다. 땅의 소산물은 복이라고 불리운다(사 65:8). 이는 그 소산물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며 또 우리에게 필요한 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들 복을 박탈당했었고 그동안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제물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제사장이 공궤물을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풍요가 돌아 올 것을 전망하고 위안을 얻는 것은 전제와 소제를 하나님의 제단에 풍성히 갖다 놓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식탁에 고량진미와 금준미주가 풍족하게 배설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제단의 풍요로움을 보는 것이 더 큰 소원이었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도 자기 병 회복을 희망하면서 "내가 여호와의 전(심판의 보좌나 중신 회의장이 아니라)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 하고 말했다(사 38:22). 하나님의 규례를 마음껏 풍성히 향유한다는 것은 국가 번영의 본보기 중 가장 귀중한 것이며,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라는 것을 주목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소제와 전제의 축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다른 축복들을 데리고 올 것이며 그들을 성별시키며 편안하게 하며 안전히 지켜 줄 것이다.
Ⅱ. 그들은 국가적 회개를 하도록 촉구받는다. 이 회개는 국가적 행위로 성회에서 행해져야 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분발 그리고 인근 열방의 각성을 위해서였다. 인근 나라들은 유다의 국민적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를 얻으려면 어떤 자격을 구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었고 그 국가적 회개를 찬양하는 증인이 될 터였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성회는 어떻게 소집하는가?(15. 16절) 앞에서 그들은 전쟁의 경보를 울리기 위해 나팔을 불어야 했으나(1절) 이제는 강화 조약을 위해 나팔을 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적당하다고 판단되기만 하시면 자기 백성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러 모으라. 금식일을 정하라" 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따라 연간에 많은 절기가 정해져 있었으나 금식일로 지키는 날은 일 년에 단 하루 즉 속죄일 뿐이었다. 그 날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그 의무에 충실하기만 했다면 다시는 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기 때문에 종종 금식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1장 14절 말씀이 여기에 되풀이 되고 있다.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라. 미리 거룩한 준비를 위해 시간을 정하라. 그리고 저들로 준비를 잊지 말게 하라. 아무리 큰 자라도 면제시키지 말며 장로들과 재판장들과 관원들을 모아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빠뜨리지 말며 소아와 젖먹는 자까지 다 모으라." 소아가 이해력이 생기면 곧 종교적 집회에 데려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그들을 일찍부터 마땅히 행할 길로 훈육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젖먹이를 성회에 데려 와 금식시키는 목적은 젖 달라고 보채는 유아의 울음을 통해 그 부모가 감동을 받아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죄를 그 자손에게 마땅히 갚으실 수 있었으며 젖먹이의 혀가 입 천장에 붙도록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애 4:4).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유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자녀들도 긍휼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욘 4:11). 신혼부부도 이 일에서 면제받을 수 없었다.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라. 그들로 여느 때처럼 성장하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환락에 빠지게 하지 말고 어느 이웃보다 진중하고 슬픈 마음으로 금식의 의무에 전념하게 하라." 개인의 기쁨은 고난 때문이든 죄 때문이든 공공의 슬픔에 항상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2. 그 날의 일은 어떻게 수행되는가?(17절)
(1) 여호와께 수종드는 자 곧 제사장들은 총회를 주재하며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입이 되고 하나님께는 백성의 입이 되어야 했다. 평상시에 중재 역할을 하던 자들이 아니면 누가 그 틈 사이에 서서 여호와의 노를 돌이킬 것인가?
(2) 그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직분을 행하여야 했다. 그곳은 그들이 희생 제시를 수종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드릴 제물이 없거나 거의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곳에서 영적 제사를 드려야 했다. 백성들은 거기서 제사장들이 그 조상 야곱처럼 울며 씨름하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이 경건한 심정을 갖게 되어야 했다. 목사들은 남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일들에 자신이 먼저 감동되어야만 한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자신의 충성 때문에 죽음을 당한 곳도 낭실과 제단 사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보배로운 피를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경고된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그들은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다 말씀을 두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받은 바 말씀을 자기들의 기도에서 부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탄원해야 했다.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공의에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구원은 그의 자비에서 나온다. 그들은 "여호와여, 우리를 의롭게 만드소서"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변은 "여호와여, 우리는 징계를 받아 마땅하며 징계를 필요로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우리징계를 감하소서" 라고 해야 한다. 죄인의 탄원은 "선하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기들의 탄원을 끌어내야 했다(" 저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특히 그들의 환난 가운데서 손상 받는 하나님의 영광을 탄원의 재료로 삼아야 했다. "여호와여,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마옵시며 기근의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그토록 오랫동안 열국의 영광으로 경애되던 가나안 땅으로 열방의 조롱거리가 되게 마옵소서. 열국들로 저희를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주의 기업이 이처럼 빈한해지며 생존할 능력도 없어질 때에는 열국들이 쉽사리 저들을 주관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으로 저희를 속담과 비방거리로 삼지 말게 하소서. 이스라엘인처럼 가난하고 거지 같다는 말이 생겨나지 말게 하소서." 인근 국가 사이에서 신망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기도할 만한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욕되게 할 교회의 수치는 특히 두려워하고 저주해야 할 대상이다.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게 마옵소서. 이방인은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던 하나님,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신뢰하던 신이 어디 있느뇨 하고 말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거짓 신들에게 대해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신 32:37)고 질타하신다.
산헤립도 이처럼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고 뽐낸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대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자기 전에 계시는 것이 확실한 때문이다(시 115:2, 3; 11:4).
자비의 약속(1) (요엘 2:18-27)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속히 자기 백성을 구조하고 구원하려 하시며 은혜를 베푸려고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주목하자(사 30:18).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그 얼굴을 찾자마자 그는 즉시 은총으로써 그들과 만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기도했었다(17절). 그런데 그는 여기서 어떤 선한 말씀이 위안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지 주목하자.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의 기도에 대한 실질 응답이다. 그에게는 말씀과 행동이 별개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약속되고 있는 자비는 어디서 일어나는가?(18절)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는 다음 두 가지를 주목하실 것이다.
1. 그 자신의 명예와 이스라엘과 맺으신 자기 언약의 명성. 그는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그 복지를 주셨고 그 땅의 가치를 매우 높이셨다. 이제 그는 그 땅이 경멸당하고 비난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실 것이며 자기 땅과 그 거인의 명예를 인하여 중심이 뜨거우실 것이다. 그 거민들은 복된 민족으로 찬양을 받아 왔다. 그러므로 불행한 백성이란 수치를 당해서는 아니되었다.2. 그들의 고난. 그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대한 연민에서 그들의 빼앗긴 위로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동정은 참회자와 탄원자로서 그에게 겸손히 나아오는 자들한테 큰 격려가 된다.
Ⅱ. 몇 가지 사례에서 그의 자비는 어떠한가?
1. 멸망시키는 군대가 흩어지고 패주할 것이다(20절).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리라." 그것은 북풍의 날개를 타고 북쪽에서 너희를 침략한 메뚜기와 황충의 군대이니 너희는 그들의 행군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과 강화했으므로 그가 너희에게 진치고 있는 이들 군병들을 제거하여 너희를 편안히 해 주실 것이며 그들을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이 떠돌아 다니던 광막한 땅으로 쫓아내실 것이며 가나안의 풍족한 것을 실컷 먹은 그들은 그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멸망할 것이다. 그 얼굴을 동쪽 바다(사해는 유다 동쪽에 있다)로 향한 자들은 동해에서 망할 것이며 후군은 대해(흠정역, 먼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 "그들은 그 땅을 볼모와 황무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불모와 항량한 곳으로 쫓아내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자들은 나중에 그들 자신도 셈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채찍과 막대기를 불 속으로 던지실 것이다. 이 곤충 떼는 악취 외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애굽이 메뚜기 재앙에서 벗어났을 때 메뚜기들은 홍해로 쫓겨났던 것이다(출 10:19). 환난이 제 소임을 다할 때에는 가나안의 메뚜기가 참회하는 백성으로부터 물러났듯 자비한 가운데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애굽의 메뚜기는 뉘우치지 않은 군주로부터 진노 중에 물러났으니 그것은 다른 재앙을 불러들이기 위한 자리 양보였던 것이다. 많은 해석가들은 이 북편 군대를 산헤립의 군대로 이해한다. 산헤립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산헤립의 군대로 이해한다. 산헤립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통해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자기일을 완수하신 뒤 풍지박산되었던 것이다(사 10:12). 이 대적은 큰 일을 행했으므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아주 많은 해를 입히면서 그것을 크다 하며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였다. 그러므로 21절에는 이런 말씀이 따라 나온다. 원수는 그들을 대적하여 큰 일을 행했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즉 원수는 교만하게 이 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에서 그들 위에 계시며 그들보다 높으시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큰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범위 이상의 일은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더러 가라 하면 갔고, 오라 하면 왔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 수하의 병정이었음을 나타내 준다.2. 하나님은 멸망된 땅에 물을 대시며 그 땅으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군대가 멀리 흩어진다 해도 그들이 저지른 황폐가 그대로 존속한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들의 풀이 싹이 나고 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메뚜기들은 초장을 광야처럼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광야의 초장에 다시 싹이 날 것이며 나무 특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전국이 얼마나 황폐했던지 이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해골들이 다시 살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는 말이 거의 입 밖에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 일은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셨고,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 비를 자비 가운데에서 주신다면 적당히 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 비는 심판으로 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비를 적절한 시기에 주실 것이니 처음 달에는 늦은 비를 주실 것이다(이 비는 몹시 기다려지는 비이다). 그 비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며 그의 지혜로 정해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손과 지혜가 있는 일이라면 잘될 것이 확실한 때문이다. "그가 너희에게 의의 선생을 주시리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비를 의미하는 단어는 선생이란 뜻도 간다. "적당히" 는 "의를 따라" 라는 뜻이다). 랍비 중 한 사람은 이 의의 교사가 메시야라고 말하며 그렇게 이해하는 자도 많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며 또 그는 우리에게 의의 길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의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모든 선지자로 이해하며 특히 히스기야의 선지자로 이해하고 이사야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 의의 교사들, 목사들을 보내실 때는 자기 백성을 위해 자비를 쌓아두고 계신다는 좋은 표징임을 명심하자.
3. 그들의 모든 손실은 복구될 것이다(25절). "내가 메뚜기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라. 너희는 고통받은 시간대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며 기근의 햇수를 상쇄시키는 풍년을 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 종들이 회개할 때 그들을 인하여 후회하시고(신 32:36) 자기가 그들과 완전히 화해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그들이 심판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시며 간수처럼 그들의 맞은 자리를 씻기신다(행 16:33).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에게 차압하며 직접 해를 가하지 않으셨으나 긍휼심에서 그들에게 보상을 하신다. 탕자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가 죄와 어리석음으로 상실했던 모든 것을 보충해 주고 자기 가족으로 맞아들이며 이전 상태로 회복시켰다. 메뚜기와 황충은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낸 그의 큰 군대로 불린다. 메뚜기는 자기 군대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삼킨 것을 보상하실 것이다.
4. 그들은 온갖 선한 것을 크게 풍족히 소유할 것이다. 땅은 그 소산을 다시 낼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쌓아 둔 창고를 들여다보면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24절). 이에 반해 곤고한 날에는 그들이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 하였으며 곳간은 무너졌었다(1:10, 17). 그들의 식탁을 보라. 거기에는 그들의 저장품이 나열되어 있다. 그들은 먹되 풍족히 먹고 만족하게 될 것이다(26절). 그들은 먹되 과식하지 않으며 식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취하던 주정뱅이들이요 앞의 고생으로 인해 술과 폭음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고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궁핍 때문에 슬피 울었었지만(1:5) 여기서는 그 풍족함을 인하여 찬송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자가 충분히 먹으며 자기들이 충분히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식을 자양분 있게 만들며 만족할 정도로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이상 여러 가지가 약속되고 있는 자비이며 이런 일들로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행하시며(21절) 자기 백성을 기이해 대접하신다(26절). 그는 이 일로 자기 권능을 영화롭게 하시며 그들의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들을 능히 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신다. 그는 이 일로 자기의 인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는 그들의 도발이 아무리 크더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이렇게 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불쌍한 죄인을 기이해 대접하실 때에는 그가 기이히 대접하시며 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해석가는 이 약속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여 이것이 복음의 은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은 은혜의 언약 가운데에서 신자들을 위해 쌓여 있는 풍성한 위로와 그들이 누리는 영혼의 만족에서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보내사 위로의 재료가 되게 하시고 그의 은혜를 우리 위로의 근거로 보내시며 위로의 시술자로 성령을 보내실 때 우리는 그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19절) 또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은 것을 보내 주셨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써 흡족하다고 할 수 있다.
Ⅲ. 자비의 회복은 어떻게 이용되며 그들은 하나님의 돌아오심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1.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23절). 그들에게 기쁨의 재료가 되는 것은 감사의 재료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다(26절). 그들은 우상을 찬양하지 않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자기들의 연애하는 자들이 준 값이라(호 2:11)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위안물의 풍족이 우리에게 참으로 자비로운 것이 되는 때는 우리가 그들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를 드리게 될 때라는 것을 유의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값싸게 섬기지만 그는 우리에게 온갖 비싼 향유물을 주신다. 우리가 부족을 경험한 뒤 하나님께서 풍족한 것으로 회복시켜 주실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먹어 배를 불릴 때는 즐거움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주신 옥토를 인하여 여호와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신 8:10).2. 그들은 이로써 명예와 위로와 영적 혜택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풍요로움을 주시고 그들로 흡족하게 하실 때 그들의 형편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의 명성이 회복된다. 그들이 의무의 길로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자비의 길로 그들에게 돌아오실 때 그들이나 그들의 하나님이나 다 서로 신실치 못하다는 비난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될 것이다(19절). "이방인들은 너희 재난을 보고 기뻐하며 너희를 모욕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이것은 26, 27절에도 되풀이 된다.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들이 다시는 그 좋은 땅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과거에는 그 땅을 항상 자랑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들은 그것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명예를 건지는 행위를 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에도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은 일시적으로는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할 수도 있으나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 죄를 올바로 부끄러워한다면 하나님께로서 얻는 우리 영광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2) 그들의 기쁨이 소생한다(23절). "땅이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땅의 모든 거민아, 즐거워하라." (22절). 풍족할 때는 대개 기쁜 법이다. 그러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많아지는 자들보다 하나님의 은총의 기쁨을 마음에 주시는 자들이 더 즐겁다(시 4:7). 그러나 특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자는 시온의 자녀들이다(23절). 그들은 시온에서 슬퍼하였다(15절). 그러므로 그들은 특히 시온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회의 눈물로 씨 뿌리는 자들은 정녕 감사의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의 자녀들은 금식에서 다른 사람들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쁨에서도 남들의 인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물로 받는 좋은 것들을 기뻐한다기보다 그런 것을 주시는 선하신 손길과 그들에게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그 좋은 것들은 언약으로 그들에게 속한 것들이며 은총의 보증과 징표인 것이다. 추수의 기쁨과 잔치의 즐거움은 하나님에게서 끝이 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기 위해서는 후히 주시는 그의 모든 선물 속에서 그의 사랑을 맛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선이시며 우리에게 대한 모든 선의 근원이신 까닭이다.
(3) 그들의 믿음은 견고하게 되고 증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현세적 자비가 베풀어지고 그것이 우리의 영적 이익이 되며 신체의 풍족함이 영혼의 원수가 되긴커녕 도리어 우리 영혼을 번영시키는 친구가 될 때라야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비가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이 나온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다" (27절; 호 11:9). 이것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 다른 자가 없다는 것을 밝힌다. 왜냐하면 상하게 하시는 이도 그요 낫게 하시는 이도 그며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는 이도 그며 복과 화를 주시는 이도 그이신 때문이다(신 32:39; 사 45:7). 동시에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요 그들을 낳은 아버지시다. 아버지로서 그는 그들이 범죄할 때 징계하시며 그들이 회개할 때 위로해 주신다. 에스겔의 예언에서 경고의 후렴같이 따라 다니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이러이러한 재앙을 내리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는 표현인데 여기서도 같은 표현이 여러 약속들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너희는 먹게 될 것이며 풍족히 먹고 흡족하게 될 것이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자비로운 섭리든 고통스런 섭리든 우리는 모든 섭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면식이 성장하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풍요한 평강과 기쁨을 주시며 그 때에는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그들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도 깨닫게 하신다. 그는 여느 때처럼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깨닫게 하신다. 그들은 동일한 언약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때문이다. 그들은 동일한 교제 속으로 용납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의 부르는 모든 일로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해가 태양계 중심에 있듯, 그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 땅에 두루 자비로운 영향을 미치신다.
3. 짐승도 이 일에 동참하여 편안하게 될 것이다. "땅이여, 두려워 말라, 들짐승들아(21절) 두려워 말지어다(22절)." 짐승들은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인간과 벌이시는 하나님의 쟁변 때문에 수난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인간의 회개와 하나님의 화해로 인해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아니, 짐승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고 한다(흠정역, 1:20). 이제 그 부르짖음은 응답되었다. 그들은 두려워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능과 생리의 욕구대로 풍족히 먹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가축도 눈여겨 보셨다(욘 4:11). 이는 가축들도 금식했기 때문이다(욘 3:8).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만물의 보상받는 때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 때에는 허무한 데 굴복하고 그 아래서 탄식하는 피조물이 비록 영광스러운 기쁨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롬 8:21).
자비의 약속(2) (요엘 2:28-32)
앞에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약속이 나왔는데 그것은 황폐한 나라로 볼 때 여간 반가운 약속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런 일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나은 것들을 예비해 두셨는데 본문 말씀은 그 훌륭한 것들 곧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진정한 신자의 행복은 그 두 나라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접하게 된다.
Ⅰ. 은혜의 왕국은 성령의 풍성한 유출로 도입된다(28, 29절). 우리는 이 약속의 의미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으며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어디서 성취되었는지를 분명히 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약속을 명약관화하게 설명해 준다. 그는 오순절날 성령이 사도를 위에 쏟아져 내렸을 때 그것이 바로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언한다(행 2:1 이하,행 2:16, 17). 이 예언을 따라 오리라고 하신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였다. 우리는 다른 이를 찾아서는 안 된다. 메시야의 약속의 성취는 다른 어떤 자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여기서 약속되고 있는 축복은 성령의 부음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와 위로는 복되신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이따금씩 등장함을 읽는다. 여호와의 신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일으키신 사사들과 선지자들 위에, 말하자면 한 방울씩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이 냇물처럼 풍성히 쏟아질 것이다. 그것은 복음 시대를 겨냥하고 약속한 대로이다(사 44:3). "내가 네 후손에게 내 신을 부으리라."2. 이렇게 하기로 작정된 시기는 세말이다. 앞에 나온 약속이 성취된 후에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말일 즉 메시야의 날로 해석한다. 세상은 유대 교회의 말일 즉 유대 교회가 와해되기 직전에 메시야에 의해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대한 마지막 계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3. 이 축복의 범위. 즉 이것은 성령의 부음을 받을 사람들의 범위를 말한다. 이제까지는 여호와의 신이 유대인에게만 임했지만 후에는 이방인에게도 내릴 것이다. "내가 내 신을 만민(모든 육체에)에게 부어 주리라."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롬 10:11, 12).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한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땅에 속한 자가 아니면 예언의 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말일에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사 40:5), 그 앞에 경배하러 나올 것이다(사 66:23).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스라엘 땅의 모든 사람으로 이해한다. 베드로 자신도 성령이 고넬료와 그 친구들 위에 내림으로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행 10:44, 45)을 보기까지는 이것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인 줄 완전히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고넬료와 그 친구들은 이방인이었고 그것은 오순절에 내린 은사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에 그의 신을 부어 주실 것이다. 즉 육체는 고기 덩어리다. 고기는 말랑말랑하며 부드럽다. 따라서 성령은 육의 마음으로 된 모든 자 곧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인자하게 되어 성령의 감화와 영향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자 위에 부어질 것이다. 모든 육체는 온갖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과거처럼 인색하지 않을 것이며 한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보다 일방적이며 보다 확산될 것이다.
(1) 성령은 일부 남녀 위에 부어진다. 너희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예언을 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정의 네 자매가 여선지였다는 기사를 읽는다(행 21:9). 부모뿐만 아니라 자녀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얼마 동안이 은사가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2) 각 연령층 중 일부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진다. 원기를 잃고 정신이 쇠하기 시작하는 늙은이 그리고 신적 일에 대해 지식과 경험이 미천한 젊은이가 꿈을 꾸며 이상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꿈과 이상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3) 극히 비천한 신분과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질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유대인 박사들은 "예언은 지혜롭고 용감하고 부유한자 위에만 머물며 가난한 사람이나 슬픔 있는 자의 영혼에게는 임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다(갈 3:28). 종으로 있으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많았지만(고전 7:21) 그것이 성령을 받는 데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4) 이 축복의 효과. "그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그들은 신적 일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그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게 되며 은밀한 일과 멀리 있는 일과 장래 일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극히 높은 지능과 천부의 능력으로써도 통찰하거나 직관하거나 예견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에 이런 비상한 은사로 창시되고 확립되었다. 또 성경도 그런 비상한 은사로 기록되었으며 목회도 그렇게 해서 정착되어 왔다. 나중에는 이와 함께 성령의 일상적 활동과 영향력에 의해 교회의 사역은 유지되고 발전했다.
Ⅱ. 영광의 나라는 본성의 전면적 변화에 의해 도입될 것이다(30, 31절). 성령의 부음은 의인에게 매우 안락할 것이지만 의롭지 못한 자는 이것을 듣고 떨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고 있다. 그 날은 하늘과 땅에 이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의 이적이며 해는 어두움으로 변하고 달은 핏빛같이 변할 것이다. 이것은(포코크 박사가 생각하듯) 종말의 심판날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며 그 전에 이 표적들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루어졌고(이것은 땅이 흔들리고 해가 어두워졌을 때 이 세상의 심판이라고 불리웠다. 그 날은 크고 두려운 날이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더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것은 전체적 심판의 예표였다. 그리고 그 전에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그 외에 나라와 나라의 대적과 격동도 있었다. 이것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 는 비유적 표현으로 예언되었다. 그리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었고 열방의 환난이 있었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것을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마 24:6, 7) 그러나 최후의 심판 전에 하늘과 땅에는 참으로 놀라운 이적이 있을 것이니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하늘과 땅이 풀어질 것이다. 죄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불과 칼에 의한 악한 나라들의 빈번한 멸망은 말일의 심판에 대한 전조요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자들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미리 보고 예언하게 될 것이며 그에 앞서 하늘과 땅에 베풀어지는 이적을 해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에 대해서는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했고 증거하기 때문이다(계 10:7).
Ⅲ.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시에도 모든 진정한 신도들은 안전하고 행복하다(32절). 이것은 특히 개개의 신도들에 대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보다 개인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며 나라와 왕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하는 까닭에서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구원이 베풀어진다. 여호와의 날이 크고 두려울지라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는 그 공포로부터 구원(피하는 자:한글 개역)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요, 그의 심판일이다. 그는 옥석을 구분할 줄 아시며 귀한 자와 악한 자를 가려낼 줄 아신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는 피할 자가 있을 것이다. 영원한 복음은 시온산에서 나오며 시온산은 처음 열매 맺은 교회를 상징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예루살렘이다. 따라서 영원한 복음과 첫 열매의 교회에는 구원(피할 자)이 있다. 장차 올 진노로부터 도피하는 길은 이미 발견되어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바로 구원이시다. 그는 땅 끝까지에서도 구원이시다. 우리를 위해 은혜의 언약 속에 쌓여 있는 이 구원은 열조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이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구원이 있을 것이다(눅 1:72 참조). 형편상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죄인들 자신만 질문하지 않는다면 구원이 있으며 그들을 위한 구원이 있다는 것은 죄인에게 대한 위로와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이 구원에 동참하려고 한다면 복음의 시온 산,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2. 이 구원에는 남은 자가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 남은 자를 위해 구원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이 남은 자 중에 있고 그들의 영혼과 심령에 있다. 이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있으니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 (골 1:27)이시다. 그들은 남은 자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멸망에 내버려진 바 된 무수한 사람들과 비교할 때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수의 남은 자이지만 택함 받은 자이며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 큰 날에 구원받을 자는 어떤 자인지를 듣는다.
(1) 진실하게 여호와를 부르는 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사도도 그렇게 해석한다. 그는 로마서에서 우리 모두가 판단받아야 할 복음의 최대 기준으로서 이것을 설정하고 있다(롬 10:13).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신앙 그리고 그를 향한 열망과 의지를 전제로 하며 이 모든 것에 대한 성실한 증거로서 하나님께 대한 양심적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 없이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어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잔존자가 되려면 기도하는 잔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게 용이한 조건으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의 파멸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2)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자.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는 구원이 확실하다. 그들은 택함받지 못한 많은 자들도 받는 복음의 부름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로의 특별한 부름을 받는다. 그들은 여호와의 미리 예정하심 또는 예비하심을 받을 자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차용하고 있다(행 2:39). 지금 죄에서 하나님께로 부름 받으며 자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아래 것에서 위에 있는 것에로 부름을 받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