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호세아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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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참회자에게 대한 격려 (호세아 14:1-3)

Ⅰ. 회개의 초대가 죄인에게 친절히 발송되고 있다(1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회심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교회 울타리 내에 있는 자들에게도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의무와 감사와 이해 관계로서도 너는 하나님께 매여 있다. 네가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만큼 더 악하며 네가 그에게 돌아오는 일은 그만큼 더 필요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다음 사실을 알아야 했다.

1. 그는 무슨 회개할 만한 일을 저질렀는가?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거쳤느니라)." 우상은 그들의 거침돌이었다.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서 죄에 엎드러졌으며 모든 선에서 추락했으며 죄와 저주의 짐 아래서 쓰러졌다." 이것이 돌아와야 할 자의 행동이었다. 죄는 타락이요, 엎드러지는 것이며 죄로 넘어진 자는 회개에 의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2. 그는 회개 시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는 네가 의지하는 주 여호와시요, 언약상 네 하나님이시며 네가 관계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의 최대 관심사는 그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며 그것이 맨 처음 해야 할 일이라는 데 주목하자.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서 엎드러졌고 그분만이 너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에게 돌아오라. 너는 여호와께 완전히 돌아 오라. 그를 쳐다보거나 그를 향해 몇 걸음만 옮기지 말고 완전히 돌아 오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고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만들었다. "회개는 위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회개는 사람을 영광의 보좌에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Ⅱ. 회개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생이나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참회의 기도와 간원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하신다. 그것은 입술의 열매이다. 아니, 그것은 입술만의 열매가 아니라 마음의 열매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랍비 중 한 사람은 그 말들은 먼저 속 사람이 하는 말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마음이 먼저 혀에게 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생각과 선한 사랑을 품고서 선한 말을 가져가야 한다. verbaque proevisam rem non invita sequentur-즉 자아를 지배하는 자는 좀처럼 말이 막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할 일 없이 나아가면 대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우리가 이제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스 9:10)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가야하며 성령께로부터 은혜와 탄원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며 우리 안에서 대언을 하신다.

2.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숙고해야 했다. 그들은 말씀을 가지고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했다. 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야 할 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로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다.

Ⅲ. 그들을 돕고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할 말을 우리 손에 준비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할 말을 지어 주실 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림없이 잘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작용이 여기에 권면된 말씀과 일치하면 우리 일은 틀림없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1. 그것은 간청하는 말들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간청하도록 지시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1) 죄로부터의 사면,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는 "여호와여, 우리의 모든 불의를 제하소서" 하고 아뢰어야만 한다. 그들은 무거운 고난 아래서 죄로 인한 가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왕처럼 "이 죽음을 내게서 제하라" 고 기도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이 죄를 제하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일수록 고통의 제거보다 우리 죄악의 용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불의를 제하소서. 그것은 우리를 무게에 못이겨 무릎 꿇게 하는 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입니다. 여호와여, 그것을 치워 주소서.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의 혼란과 정죄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 모든 죄를 제해 주소서. 아무 대가없이 완전히 사면해 주소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제거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 큰 빚을 전부 다 탕감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죄에 대해 기도할 때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죄를 다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열납되는 것. "선한 바를 받으소서(흠정역:은혜로이 받으소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받게 하시며 주께서는 우리와 우리 행위를 중시하시옵소서. 우리 기도를 은혜로이 받으소서.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할 수 있게 된 선한 바를 기뻐하소서. 선한 바를 받으소서. 선이 우리에게 부과되게 하소서. 선을 주소서." 이것은 불의를 제해 달라는 청원에 이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의가 제거될 때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선한 것을 기대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불의의 제거는 길을 막던 방해물이 치워지는 것(removendo pr ohibens)을 뜻하며 선의 수여를 위한 길의 예비가 된다. "선을 주소서." 그들은 어떤 선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조건 맡긴다. 그것은 세상에게 보일 선(시 4:6)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이다. "선을 주소서, 우리가 몰수당한 선을 주소서. 당신께서 주마고 약속하신 선을 주시며 우리 형편상 필요한 선을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서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열납과 그 열납의 복된 열매요 표징이다. "선을 주소서,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다시는 불의로 되돌아 가지 않게 할 선을 주소서."

2. 그것은 약속의 만듬이다. 하나님이 이런 말들을 그들의 입에 두심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거나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함이며 그들로 하여금 의무에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용서와 열납을 위한 우리 기도에는 언제나 진지한 의도와 새로운 순종의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두 가지 일을 약속하고 서약해야 했다.

(1) 감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기뻐 받으소서. 그러시면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70인 역에는 우리 입술의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번제에 사용하는 말로서 히브리서와 일치한다. 사도는 이 구절을 인용한다(히 13:15). 우리 입술의 열매라는 것은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를 말한다. 찬미와 감사는 우리의 영적 제사이며 그것이 만약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황소나 수송아지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만든다(시 69:30, 31). 우리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열납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 마음의 찬미와 감사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로이 열납 되는 자들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 값비싼 열납에 비해 드리는 것은 값이 싸긴 하지만 진심에서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외양간의 소 몇 마리보다 더 기쁘게 받으신다.

(2) 생활의 개선. 그들은 약속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구두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개혁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언약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버리고 멀리 하지 않으면 죄의 용서와 제거를 기대할 수 없다.

[2] 죄를 짓지 않겠다는 우리의 언약과 결의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서와 같이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말과 총괄적 말에는 거짓이 깃들기 때문이다.

[3] 우리의 언약은 우리가 극히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 특별하고도 명백히 선언되어야 한다. 그 언약은 우리가 극히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 특별하고도 명백히 선언되어야 한다. 그 언약은 우리가 극히 쉽사리 사로잡히고 극히 자주 압도당하는 죄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에서 우리를 지키고 또 자신을 강화해야 한다(시 18:23). 그들이 여기서 범했다고 시인하며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언약하는 죄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게 바쳤다는 것이 그들이 하는 약속은 다음두 가지이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고 피조물을 결코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 동맹군을 의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으리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과거처럼(5:13; 7:11; 8:9) 앗수르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리이다. 우리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그를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찾아갈 하나님이 계시고 의뢰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시므로 앗수르에게 신세지는 것을 냉소하나이다." 그들은 국내의 전쟁 준비를 믿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증강이 금지된 전쟁 준비는 않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을 타지 않으리이다. 즉 우리는 애굽에 원조를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말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신 17:16; 사 30:16; 31:1, 3). "대적들이 침입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보병을 구조해 주실 것으로 의지할 것이며 기병 확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는 "외적의 침입시에 우리는 구원을 위해 황급히 파발과 사절을 이 나라 저 나라로 보내지 않을 것이며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을 취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겠나이다" (사 20:5). 진정한 회개는 혈육의 팔에 대한 의지를 끊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선을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만든다는 데 주목하자.

둘째, 그들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충성을 다시는 피조물에게 바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를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이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두 번 다시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라 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불합리하고 얼빠진 짓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이득에 열중하거나 외면적 경건 행위를 자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도 사실상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해 "너희는 우리 신이라" 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의 입에서는 탄원의 말이 나오고 있다.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어떤 공로로부터 용기를 얻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는 공로는 어떠한 용기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얻으려고 희망해야 하며 그 긍휼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의 커다란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고아를 특별히 돌보신다는 것이다(시 68:4, 5). 그는 자기 율법에서도 그랬고(출 22:22) 섭리로도 그리하신다(시 27:10). 의지할데 없는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이다. 하나님께는 그런 무의무탁자에게 대한 긍휼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긍휼을 받을 온당한 대상인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서 긍휼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그들을 위한 자비가 축적되어 있고 그들은 그것을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이것은 자비와 은혜를 원하는 자에게 타당한 훌륭한 원리로서 나오며 신앙의 좋은 격려자가 된다.

(1) 그들은 자기들의 비참한 형편과 사정을 호소한다. "우리는 고립무원한 고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얻을 줄로 기대해도 된다. 그는 그들이 사면초가의 형편에 있음을 바로 알고 계시며 또 그 점을 기꺼이 인정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안을 향한 좋은 단계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대담성이 없다면 하나님 없는 우리 자신을 고아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하며 그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측은히 보아 주시기를 소망해야 한다.

(2)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형편에 놓인 자에게 언제나 인자하셨다는 점을 들어 탄원한다. "고아는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을 수 있으며,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비 없는 자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도움받을 데가 없는 자를 도와 주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믿음과 소망을 크게 격려한다.

 

14:2 없음.

 

14:3 없음.

 

14:4

자비의 확약(1) (호세아 14:4-7)

앞에서는 돌아 오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찾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무의 길로 자기에게 돌아있는 자들을 자비의 길에서 꼭 만나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선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도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듯이(슥 1:13), 우리에게도 선한 약속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앞에 나온 말씀을 가지고 가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으며 그 말씀은 우리 믿음의 잔치가 된다. 후자는 전자의 말씀이 어떻게 상응하는지 살펴보자.

Ⅰ.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탄원하며 돌아오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순종하면 그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확언하신다. 이것이 여기서 약속되는 여타 모든 은총의 기초로 제시된다.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리니 이는 나의 노가 떠났고 따라서 모든 선한 것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사 12:13). 하나님이 죄인에게 크게 노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노여움은 풀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자. 그의 진노는 돌이켜 떠날 수 있는 노여움이다. 그 진노는 자기 불의로부터 돌이키는 자들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와 화해하며 자기의 온전하신 뜻과 화해하는 자들에게 화해를 허용하실 것이다.

Ⅱ. 그들의 불의를 제해 달으라고 기도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원의:물러남)을 고치겠다고 확언하신다. 그는 그렇게 약속하셨다(렘 3:22). 하나님께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것은 비록 영혼의 위험한 병이요 상처라고 하더라도 치료가 전혀 불가능한것은 아니라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이 치료를 약속하신 때문이다. 즉 패역한 죄인이 그들의 의원되신 하나님께 치료를 의뢰하고 그의 치료 방법에 응하기만 한다면 그가 그들의 패역을 치료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유하는 자비로써 그들의 패역하는 죄를 거치실 것이며 새롭게 하는 은혜로써 그들의 물러나는 결심(11:7)을 고치실 것이다. 그들의 불의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다.

Ⅲ.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받아 주시도록 기도하는가? 보라,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겠다" 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를 계속 범하는 동안에는 그들을 미워하셨다(9:15). 그러나 그들이 돌아 오며 뉘우치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진노를 그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흡족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도모하신다. 그는 즐거이(자유로이:흠정역) 사랑하신다. "이것은 절대적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그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그래서 이전의 노여움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아낌없는 사랑이다. 그는 그들에게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도량이 넓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주는 일이나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을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즐거운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는 타락의 날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고 말씀하셨듯이(11:8) 회개의 날에 "내가 어찌 너를 다시 받아들이겠느냐?" 고 말씀하시진 않을 것이다. 또 이 사랑은 공로로 얻지 않는 사랑이요. "예방적 사랑" 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신다. 그들이 사랑 받을 만한 공로나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기쁜 마음에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신 7:7, 8).

Ⅳ.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을 주시며 자기들을 선하게 다니어 주시기를 기도하는가? 보라,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라" 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5절).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실 은총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네게 하늘의 이슬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8)는 것이 그들의 조상 야곱이 이삭에게서 받은 축복이었다. 이것은 곧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을 보증한다(엡 1:3). 그리고 이것은 패역의 치료에 뒤따라 나온다. 사유하시는 자비에는 항상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참 이스라엘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슬처럼 되어 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그들을 가르칠 것이며 그의 교훈이 그들에게 이슬처럼 떨어질 것이다(신 32:2). 그는 그들에게 비와 같이 임하실 것이므로(6:3)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위로로써 그들의 원기를 북돋울 것이어서 그들의 영혼은 물 댄 동산 같을 것이다(사 58:11).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자에게도 이슬 같으실 것이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그가 이슬 같았듯이 참회개자에게도 그러하실 것이다. 이슬은 만나를 품고 있었다(출 16:14; 민 11:9). 성령의 위로는 이슬에 감추어진 만나와 같다. 하나님은 풍부한 이슬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듯이 하늘로서 그들에게 떡을 주실 것이다(요 1:16).

2. 그 은총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그 은총은 그들에게서 어떤 결심을 산출할 것인가? 그들에게 풍성하고 즐거이 시여된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슬처럼 되어 주시고 자기 은혜를 방울방울 적하시키셨던 이스라엘들, 그 영혼들은 어찌 되는가?

(1) 그들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악하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하게 되었듯이 그들 역시 그 은혜에 의해 더욱 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어디에서든 점점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위로 자랄 것이며 더욱 번성할 것이다. 그들은 백합화 같이 필 것이며 자랄 것이다. 백합은 다른 구근 식물이 다 그렇듯 성장이 매우 빠르다. 백합 뿌리는 겨우내 땅 속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 이슬로 다시 기운을 얻으면 순식간에 쑥쑥 자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때때로 어린 회심자를 매우 빨리 성장시킨다. 백합은 제 키대로 다 자라게 되면 매우 아름다운 화초가 된다. 이와 같이 은혜도 영혼을 아름답게 만든다(겔 16:14). 새벽 이슬로 산출되는 것은 성결의 아름다움이다(시 110:3).

[2] 그들은 아래로 자라며 더 견고하게 될 것이다. 백합은 참으로 빨리 자라며 모양도 예쁘게 자라지만, 곧 시들어 버리며 사람들이 쉽사리 따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백합의 꽃과 함께 백향목의 뿌리도 가진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다. "저가 레바논같이 즉 레바논의 나무처럼 뿌리가 박힐 것이라." 레바논의 나무들은 뿌리를 깊이 박으므로 절대로 뽑히지 않는다(암 9:15). 영적 성장은 대부분 뿌리의 성장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가 그리스도께 많이 의존하여 그로부터 수액과 미덕을 많이 뽑아 올리면 올릴수록 우리는 더욱 더 신앙적 원칙에서 행동하게 되며 그 신앙적 원리 속에서 더욱 견실하고 확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이 박히게 된다.

[3] 그들은 사면으로 자라게 된다(6절). 그 가지는 사방팔방으로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포도나무같이 자랄 것이다(흠정역). 포도나무 가지는 다른 어느 나무보다 멀리 퍼진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로 비유되었다(창 49:22). 외부로부터 교회에 접합되는 자가 많고 유망한 세대가 일어날 때 이스라엘의 가지는 퍼지게 된다. 개개의 신자들에게 선행이 풍부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하며 온갖 선한 은사가 늘어날 때는 그들의 가지가 퍼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된다.

(2) 그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다 은혜롭고 열납받게 될 것이다. 은혜는 사랑스러운 것이어서 은혜의 소유자를 참으로 사랑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1] 보기에 좋은 나무.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다." 감람나무는 항상 푸르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도다" (렘 11:16). 규례와 법도는 교회의 아름다움이며 교회는 그 규례로써 현재나 미래나 늘 푸르다. 성결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마음으로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며 일치된 행실로 그 신앙 고백을 의롭게 하며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럴 때 그들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다(시 3:8).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은 의로운 나무에 대한 약속이다.

[2] 향기로운 나무. "그 향기는 레바논 같을 것이라" (6절).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7절). 이것은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대한 칭찬이었다(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7). 교회는 온갖 향품이 나는 동산에 비유되며(아 4:11, 13) 그 모든 의복에서는 향기가 난다(시 48:5).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사람들에게 시인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령한 제사로부터 향기를 흠향하시며(창 8:21) 그들은 무수한 자기들의 형제들에게 용납받는다. 은혜는 영혼의 향품이며 이름의 향기여서 그 이름을 보배로운 기름처럼 만든다(전 7:1). "그 기념은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될 것이다" (다른 사본). 현재 소생하는 그들의 안락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라진 뒤에 남는 명예도 레바논의 포도주 같을 것이다. 레바논의 포도주는 향긋한 맛이 여운을 남긴다. 교회는 융성하며 그 믿음은 온 세상에 선포되고 화제가 된다(롬 1:8). 그리고 그 이름은 만세에 기억케 된다(시 45:17). 번성하는 성도들의 기억은 현재도 미래도 송축될 것이며 믿음으로 선한 증거(또는 소물)를 받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로 비유된다. 이 나무들은 유용한 열매를 많이 내어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영광을 돌린다. 아니, 교회의 그늘은 즐거운 것이다(7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것은 하나님의 그늘이며(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메시야의 그늘(갈대아 주석은 그렇게 해석한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한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하나님의 그늘이며 그들은 거기서 안전과 편안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그늘 즉 교회의 그늘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약속은 교회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의 것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자기 백성을 고수하는 자의 것이다. 뜨거운 볕에서 피난처만을 바라며 그늘로 도망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해당되지 않는다(시 27:4). 이것은 개개의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오게 될 때는 그의 그늘아래 거하는 모든 자 즉 자녀와 종복이나 백성이나 친구들이 다 번성하게 된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눅 19:9). 이 교회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은 돌아 올 것이다. 그들의 저상한 사기는 돌아 올 것이며, 그들이 원기를 회복하고 편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실 것이다(시 23:3). 그들은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다. 씨를 뿌리면 먼저 죽어 다시 소생해야 많은 결실을 맺는다(요 12:24). 하나님이 백성은 곡식이나 포도주처럼 세상의 축복이 되리라고 약속된다. 우리가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 쓸모있고 도움을 준다는 것은 여간 크고 귀중한 자비가 아니다. 거기에는 위로와 명예가 뒤따른다.

 

14:5 없음.

 

14:6 없음.

 

14:7 없음.

 

14:8

자비의 확약(2) (호세아 14:8,9)

이제 우리는 본 예언서의 결론을 들어보자.

Ⅰ. 본문은 에브라임에 대해 말하며 에브라임에게 말하고 있다(8절).

1. 에브라임의 회개와 개선.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혹자가 읽듯이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 숭배를 끊어야 하는지 에브라임과 토론하시며 설득하신다." 에브라임아! 나와 우상이 무슨 상관이냐? 나와 우상 간에 무슨 일치점이 있느냐? 나와 우상이 어찌 조화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느냐?(고후 6:13, 14)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나와 언약을 맺으러 나아오려면 우상과의 연합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그런 경지까지 데리고 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에브라임의 말이(하나님이 그 말을 에브라임의 마음에 넣어서 말하게 하신다)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에브라임은 "내가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내 신이라 하지 아니 하리라" (3절)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약속보다 죄를 굴복시키는 데 훨씬 더 확실하고 힘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친히 자기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며(시 119:122) 이 말을 에브라임의 마음과 입에 넣어 주신다. 우리가 하시라도 어떤 좋은 말과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 언행을 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다. 에브라임은 우상을 자기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엄숙히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브라임으로 하여금 다시는 우상과 관계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신다. 에브라임은 우상을 철폐하게 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도 극도의 혐오감으로써 그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생활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등지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였고(4:17), 우상을 너무나 좋아하여 누가 보더라도 우상과 사이가 틀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역사하셔서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는 우상을 사랑한 만큼 그에 비례하여 우상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2) 성화(聖化)된 고난의 혜택. 에브라임은 우상 숭배 때문에 아픔을 당했다. 우상숭배는 에브라임에게 이런 저런 심판을 가져 왔는데 결국 그 열매는 자기 죄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사 27:9).

(3) 회개의 속성. 회개는 다시 죄와 관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참회자의 언어는 이렇다. "나는 죄와 관계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나는 죄를 충분히 맛보았다. 이제는 죄를 미워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는 결코 그따위 죄와 관계를 맺지 않겠다. 아니, 죄의 기회와도 상관하지 않겠다." "너는 네 우상에게 '나가라'고 말할 것이며 시험하는 자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할 것이다" (사 30:22).

2.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은혜로이 주목하기를 기뻐하신다. "내가 저를 듣고 돌아보았도다" (흠정역). "내가 저를 들었다. 그래서 돌아보리라" (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죄인의 참회하는 생각과 결심을 인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죄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의 참회를 기대하며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며(흠정역, 욥 33:27)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렘 8:6). 그리고 회개의 기미라도 엿보이면 그는 즐거워하신다. 에브라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탄식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된다(렘 31:18, 20).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반가이 맞듯 참회자를 자비로이 맞이하신다. 그는 에브라임을 돌아보았다. 이것은 에브라임이 참회의 고백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와 선한 심사를 계속할지 않을지를 보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에브라임을 돌아보신 것은 그의 위급한 형편을 따라 그에게 유익을 끼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3.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위로하고 그의 결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에게 자비를 주시기로 내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나무로 비유되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무에 비유하신다.

(1) 그는 그 백성에게 나무의 가지 같으실 것이다.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곧 네게 그러리라." 중동에서는 잣나무가 심히 크고 무성하여 햇볕과 비를 피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모든 참회자에게 기쁨과 방어가 되어 주신다. 그들은 그의 보호와 세력 아래서 안전하게 거하며 편안히 지내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의 상황이 요구함에 따라 태양(Sun)과 방패(Shield) 또는 그늘(shade)과 방패(Shield) 또는 그늘아 심히 기뻐할 것이다(아 2:3). 하나님은 온갖 기후에 상응하는 전천후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사 4:6).

(2) 그는 그 백성에게 나무의 뿌리 같으실 것이다.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이것은 우리가 받는 열매(우리는 모든 위안물을 다 하나님 덕으로 얻는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 우리가 맺는 열매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힘을 얻어 우리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의의 열매를 맺든지 간에 그 모든 칭찬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역사하사 선한 것을 지향하고 행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Ⅱ. 본서의 예언을 듣고 읽는 모든 자에게 대한 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닫겠느냐?" 아마 선지자는 설교를 마칠 때면 으레 이런 말로 끝맺었을 것이다. 이제 본 예언서를 마치면서도 마찬가지로 결론을 내린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전한 진리로 이득을 얻는 자의 특성. "누가 지혜로우며 총명한가? 그는 이런 일을 깨달으며 알리라." 이런 일들을 이해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그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자임을 증명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다. 만일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무의 이행에 지혜롭고 실천적 신앙에 총명한 자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를 아주 깨닫기 쉬운 것이다(요 7:17). 여호와의 비밀은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흠정역, 시 25:14). "누가 지혜가 있는가?" 이 말씀은 소원과 불평을 다 암시한다. 즉 이런 일들을 듣고 읽는 자는 그것을 깨닫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선지자의 소원이 암시되고 있는 동시에(그들이 지혜로우면 좋으련만!) 그런 자가 드물다는 불평도 들어 있다(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2. 여기에서 교훈되고 있는 일들의 훌륭함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닫고 아는 것은 우리의 지혜요 의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교훈의 길로 행하도록 요구하신다. 그의 교훈은 정당하며 영원한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며 공평의 규칙과 부합하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으로 직행하는 경향을 갖는다. 하나님은 섭리의 길로써 우리를 향해 오신다. 그의 섭리는 모두 정당하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는 어떤 잘못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일은 전부가 잘 행해지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그의 심판이나, 회개하는 자에게 대한 은총이나 다 정당하다. 그의 심판과 은총이 아무리 왜곡되고 곡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일들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공평하다.

3.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교훈을 각기 상이하게 이용한다.

(1) 선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직한 도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며 또 그럴 것이다. "위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의인은 교훈에 있어서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좇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나 역사에서나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할 것이다. 또 그들은 그 두 가지와 다 잘 화합할 것이며 그 양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에 잘 순응할 것이다. 의인은 그들의 큰 목적지를 향한 그 길로 행할 것이며 그 길에 미달하지 않을 것이다.

(2)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정직한 길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될 것이다. "죄인은 그들 자신의 그릇된 길에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정직한 도에도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정직한 도에도 걸려 넘어지리라." 어떤 자에게는 초석이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시며, 걸리는 반석(롬 9:33)이 되신다. 생명을 주기로 작정된 것이 남용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사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도 그들이 적당히 활용하지 않으면 그들을 죄중에서 더 완악하게 하며 그들의 파멸에 기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입의 말씀과 그 손의 심판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달라진다.

Recipitur ad modum recipientis-즉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질에 따라 영향을 달리한다. 동일한 햇볕이 밀납을 녹이기도 하고 진흙을 굳게도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에 걸려 넘어지며 만세반석 위에서 터지는 자들은 모든 죄인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 실족을 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길르앗의 향유로부터 독약을 빠른 자들이다. 시온에 있는 죄인은 이것을 두려워할지어다.

 

14:9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