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호세아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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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이스라엘에 대한 권면 (호세아 12:1-6)

Ⅰ. 에브라임은 어리석다는 질책을 받는다. 에브라임은 곤경에 처했으면서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한 때문이다(1절). "에브라임은 먹는다." 즉 하나님과 불화하면서 인간의 원조라는 헛된 소망을 품는다. 그는 실망을 맛보면서도 여전히 같은 노름을 추구하며 탐욕스레 헐떡이며 잡을 수도 없는 동풍을 따라 간다. 설령 잡는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힘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독만 주는 것이다. 동풍은 인간이나 짐승에게 다 유익하지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그는 바람을 심는다는 말씀(8:7)도 있었다. 그는 심은 대로 거둔다. 즉 그는 광풍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둔 대로 먹는다. 그는 바람, 즉 동풍을 먹는다. 피조물로 자기 신뢰를 삼는 자는 스스로 우롱하는 자이며 자기 영혼을 속이며 또 괴로움을 준비하기 위해 큰 수고를 하는 자이다. 그는 날마다 거짓을 더한다. 즉 자기 인방과의 통신과 연합을 날마다 증가시키지만 그 인방들은 거짓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에게 황폐케 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피난처로 삼은 바로 그 나라가 그들을 멸망시키는 장본인으로 증명될 것이다. 거짓에 안주하며 의존하는 자들은 희망을 그 위에 견고히 세우기 위해 계속 거짓을 더하기에 혈안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뒤엉킨 많은 거짓으로 한 가지 진실을 이루려 거나 많은 상한 갈대와 썩은 토대로 하나의 성한 갈대를 이루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큰 망상에 불과하며 그들을 크게 황폐시키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은 그런 거짓을 많이 불리면 불릴수록 더욱 많은 실망을 예비하며 자비로부터 더욱 더 멀리 달아나는 셈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엄숙한 동맹에 의해 앗수르인을 자기 세력권 내에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서명과 비준과 맹세에 의한 동맹 체결이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앗수르와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강력한 군주도 기대와는 달리 자기 약속에 예속될 것이다. 그들은 자국의 값비싼 토산품을 많이 진공하면 애굽을 동맹국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애굽의 호의를 얻고 또 그 우호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다. "저희가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그러나 애굽인은 공물을 수회하자 신의를 저버렸고 에브라임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을 먹는 것이었다. 이것이 거짓과 포학을 더하는 짓이었다.

Ⅱ. 유다와 야곱도 쟁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다 포함한다(2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신다." 유다는 바로 앞에서 여호와와 함께 다스렸고 성도들에게 신실했지만 이제 여기서는 타락하기 시작한다. 또는 그들이 비록 다윗가와 아론의 집을 고수하며 왕권과 제사직의 언약에 충실하여 전자로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후자로는 성도에게 신실했을지라고 너무 우로 치우쳤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과 쟁변하시며 그들을 벌하려고 하셨다. 사람이 몇몇 일 특히 중요한 일에서 의롭다는 것을 것으로 징계를 면제받지 못하여 잘못하는 일로 책망을 받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일부 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해는 그리스도께서 칭찬하고 시인하시면서도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고 하셨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야곱의 자손은 하나님께 친근한 백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사와 범죄대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백성의 죄도 보시며 반드시 그 죄에 대해 그들과 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Ⅲ. 에브라임과 유다는 다 같이 그 조상 야곱을 상기하게 된다. 그들은 야곱의 자손이었고 또 그의 이름으로 불리웠다(그것은 영예로운 이름이었다). 또 그들은 야곱이 한 일과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 하신 일도 상기하게 된다. 이는 그토록 훌륭한 조상을 두고도 타락하며 그토록 찬연한 이름에 먹칠한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 조상 야곱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야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겠다고 위협하시면서 야곱이라고 부르신다(2절). 그러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그 사랑스런 이름을 잊어버리겠느냐?" 는 암시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1. 야곱 개인에 대한 세 가지 영화로운 일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간결한 암시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그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 태중에서 에서와 투쟁하는 야곱(3절). 이 기사는 창세기 20장 26절에 나온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 그것은 용감한 행위였고 우월에 대한 노력이었으며 언약의 생득권에 대한 경건한 야망이었다. 에서는 그 생득권을 경멸했고 따라서 언약의 모독자로 낙인찍혀 마땅했다. 그러나 야곱의 타락한 후손들은 열방과 뒤섞이며 그들과 연합함으로써 그 면류관을 더럽히며 조상이 그토록 영화롭게 취득한 명예를 띠끌 속에 팽개쳐 버렸다. 주권이 야곱에게 주어진 것도 바로 그 때였다(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그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로 인지되었다(내가 야곱은 사랑하나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사랑도 이웃에게 대한 지배권도 다 상실해 버렸다.

(2)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네 조상 야곱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그 힘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크신 권능으로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에게 힘을 넣어 주셨다" (욥 23:6 참조). 야곱이 함께 씨름한 천사는 하나님이라고 호칭되므로 언약의 천사 곧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된다. 하나님은 야곱의 격투자인 동시에 그의 조력자였다. 하나님은 전자의 측면에서 보다 후자의 측면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셨고 마치 왼 손으로 대적하면서 오른 손으로는 후원하여 보다 큰 힘을 주입시키시듯 하셨다(포코크 박사의 견해는 그렇다). 야곱은 귀향시에 이런 저런 위험을 당했다. 그때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대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로 하여금 자기 길을 기쁨 속에서 계속 행하게 했다. 그의 믿음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위에서 작용했을 때 그를 대적하던 선적 섭리에 의한 두려움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그가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에서로부터 의 구원과 축복을 바라 그가 드린 기도를 가리킨다. 그는 천사와 겨루워 이기고 울며 간구하였다. 야곱이 참피온처럼 씨름했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는 데에는 극히 큰 용기와 극히 부드러운 마음씨가 뒤섞여 있다. 기도와 눈은 성도가 특히 영광스런 승리를 얻게 되는 무기라는 것을 주목하자. 이렇게 해서 야곱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왕자가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이스라엘이란 호칭을 얻었지만 그들은 그런 이름에 합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몰수당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배반함으로써 자기들의 영향력을 상실한 때문이다.

(3) 하나님과 벧엘에서 만난 야곱.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갈 때 첫 번째 그를 만나셨고 (창 28:10) 그가 돌아 올 때 두 번째로 그와 만나셨다(창 35:9 이하). 이것은 양자를 다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에 다 야곱에게 말씀하셨고 그와의 언약을 쇄신하셨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거기서 야곱의 자손인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고 말해 무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과 말씀하신 두 경우 다 그의 후손에 관한 담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다" (창 28:14). "내가 네 후손에게도 이 땅을 주리라" (창 35:1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야곱 및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렇게 책망받는 것은 지당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념해서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장소에 송아지를 세우고 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벧엘을 벧아웬 즉 죄악의 집으로 바꿔 버렸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들에게 심히 크고도 귀중한 약속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무시함으로써 그 혜택을 상실하였다.

2. 야곱의 이야기로부터 두 가지 추론이 유도되는데 이는 야곱의 후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1) 이 정보의 활용. 하나님과 야곱 간에 있은 일에서 우리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다. 그는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의 자손 만대를 통한 그의 기념 칭호이다(5절). 자기 교회의 기념을 망각하고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며 만군의 여호와를 발람과 바꾼 자들에게는 이것이 큰 수치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기념을 간직하고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기념을 보존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그 기념 칭호로써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기억하게 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 가지 기념 칭호가 나오는데 이로써 그는 다른 모든 자들과 구별되고 우리한테 인정받고 칭송을 받으신다.

[1] 전자는 그의 자존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여호와이시다. 이것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말과 흡사하다. 이것은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도 계시는 분 그리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분이라는 말이다.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이며 그의 독특한 이름이다.

[2] 후자는 만유에 대한 그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의 모든 무리를 마음대로 부리시며 명령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분이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할 즈음 하나님의 두 군대 즉 마하나임을 보았다(창 32:1, 2).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기념 칭호로 우리에게 전했다. 하나님의 이름, 칭호 그리고 그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은 그의 기념 칭호이다. 그의 칭호를 나타낼 상도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계시된 것은 다수 즉 만대를 통한 그의 기념 칭호가 된다.

(2) 권면으로서의 이용(6절). "내 조상 야곱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했다는 게 과연 사실이며 그 칭호는 여전히 그를 기념하는 칭호인가?" 그렇다.

[1]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미혹의 길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 돌아 오라. 야곱의 하나님이었던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내 하나님이시다. 너는 부당하게도 매정히 그를 배반하였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으로써 그에게로 돌아오라. 네 하나님되신 분께 돌아 와 그를 사랑하며 청종하며 의지하라."

[2] 그에게로 돌이킨 자는 온갖 거룩한 처신과 경건으로 그와 동행해야 한다. "너는 인애와 공의를 지켜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곤고한 자를 원조함으로 인애를 지키며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지불함으로써 공평을 지켜라. 모든 자에게 친절하라.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을 행하지 말라. 경건과 공평을 지키라(그렇게 읽을 수도 있음). 이 세상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라. 독실하고 정직하라. 이런 일들을 때때로 행할 뿐만 아니라 행할 때에 주의하여 항심을 품으며 양심적이 되라."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 의지하는 생활을 하라. "항상 네 하나님을 바라보며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원조와 공급을 받으려는 신앙의 기대를 품으라." 하나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은 제 잘못만 아니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서 위로받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눈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신적 능력의 보호와 신적 은총의 영향력 아래서 거룩한 안전감과 심적 평정을 유지하며 의심스러운 사건에도 불안해 하지 말고 바라보며 믿음으로써 우리 심령을 침착하고 평탄하게 가지자. 이것이 바로 언약으로 우리 하나님되신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12:2 없음.

 

12:3 없음.

 

1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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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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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책망 (호세아 12:7-14)

Ⅰ. 여기에는 죄에 대한 책망이 나온다. 하나님이 한 백성과 쟁변하러 오실 때에는 자신의 의를 증명하시기 위해 그들의 불의를 증명하신다. 에브라임은 자기 하나님께 돌아와 공의를 지키라는 요청을 받았다(6절). 이제 그런 요청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켰고 정의와 공평의 법을 위반했다고 책망하신다.

1. 에브라임은 제 2 석판의 율법을 거스려 부정을 범했다고 책망받는다(7, 8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책망받는 죄는 무엇인가? 그는 상고이다. 이것을 고유명사로 하여 "저는 가나안 또는 가나안인이다" 라고 읽는 사본도 있다. 가나안은 야곱과 이스라엘로 명명될 가치가 없고 가나안인이 그랬던 것처럼 저주와 함께 복지로부터 추방되어 마땅한 존재였다(암 9:7 참조). 그러나 가나안은 때때로 상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다가, 에브라임이 장사에서 사술을 사용한다고 책망받는 본문에서는 상인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그러나 그는 상품의 교역에 의해 부유해지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고 그들은 농사 뿐만 아니라 상업에 있어서도 가나안인을 계승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했다(신 33:19). 그런데 그들이 만일 공정한 상인이었더라면 수치는커녕 명예와 축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얼굴로만 정직했을 뿐 실제로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거래에서 속임수를 부렸던 가나안인과 같은 상인이다. 에브라임은 속이며 그럼으로써 착취를 한다. 폭력뿐만 아니라 기만에 의한 압제도 있다는 데 주목하자. 방백과 지주와 주인이 백성과 소작인과 종을 압제하는 것만 압제가 아니다. 상인도 왕왕 거래하는 자들을 압제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압제하는 상인은 고객의 무지를 이용해 속이며 그들의 궁핍과 필요를 기화로 폭리를 취하며 빚을 징수하는 데 엄하고 가혹하다.

[1] 에브라임은 굉장히 교묘하고 교활하게 속였다.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진다." 그들은 저울을 사용하여 마치 매우 엄정한듯이 추와 눈금으로 상품을 매매한다. 그러나 이것은 속이는 거짓 저울이다. 거짓 추와 거짓 눈금으로 된 거짓 저울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올바르게 행한다는 구실로 최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상인이 정직하든 거짓되든 간에 물건을 달고 돈을 지불할 때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상인이 어떤 저울을 들고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보고 계신다. 고객들은 상인이 거짓 저울을 교묘히 사용하는 손재주를 눈치 채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며 아신다. 장사는 사람의 재주로써 비밀이 되지만 사람이 죄로써 불법의 비밀이 된다는 것은 유감이다.

[2] 에브라임은 아주 많은 즐거움과 자만심을 가지고 속인다. "저는 사취하기를 좋아한다." 사취(흠정역:압제)는 아주 악한 일이다. 그러나 사취를 좋아하는 것은 훨씬 더 악한 일이다. 그의 양심은 그를 제지하고 책망해야 하는데도 그렇질 못한다. 만일 그랬다면 설사 죄를 범했더라도 그것을 기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타락은 너무나 심해서 양심의 가책도 굴복시켜 버린다. 그는 사취에 의한 이득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사취하기를 좋아하기까지 하며 죄를 위해 죄를 짓고 자기의 죄를 눈치채지 못하는 자들보다 자기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2) 그는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시키는가? 악인들은 잘못을 지적받아도 변명할 말이 있다. 어떤 때는 경박하게 말머리를 돌리거나 또 다른 때는 회피하기도 한다. 에브라임은 공통적 사취에 대한 기소를 받고 있다. 이제 그에 대한 변론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는 혐의를 부인하거나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참회의 고백도 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고집한다. 그가 거짓 저울을 사용했다는 것이 유죄라고 가정하자.

[1]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상당한 재산을 획득했다는 것을 주장한다. 선지자가 그들의 사취와 죄와 하나님의 저주를 말하고 싶으면 마음껏 얘기하라는 것이 그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그 일에서조차 아무런 위험이나 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일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만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실로 부자가 되었도다. 내가 재물을 얻었도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 일로 대단한 이익을 얻었다." 세속적인 마음은 왕왕 세상적 번영과 성공을 가져오는 악한 방법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에브라임이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광고할 뿐이다.

첫째, 이 세상 재물을 본질적인 것(substance:재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다. 재물은 본래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잠 23:5).

둘째, 재물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고 "나는 부자가 되었다. 내가 가진 재물은 순전히 내 재간과 노력의 덕이다. 내가 재물을 얻었노라. 내가 이 재산을 얻은 것은 오로지 내 능력과 내손의 힘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셋째, 우리의 소유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넷째, 재물은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부자라" 고 기뻐하며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재물은 영혼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극히 훌륭한 사람에게 특유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확실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 것이다(약 1:9, 10).

다섯째, 불의한 축재가 무죄하며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매한 자의 번영은 그를 속히 멸망시킨다(사 47:10; 잠 1:32).



[2] 에브라임은 자기는 좋은 평판을 유지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죄인에게 흔한 일이다. 그들은 사역자에게 책망을 받으면 이웃 사람에게 호소한다. 이웃 사람은 그 죄인의 악한 점을 모르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또는 선지자들의 책망을 나쁘게 생각하여 정면으로 대들 것이다.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고 에브라임은 말한다. 세상적인 마음은 이웃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근거로 자기를 좋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에브라임은 아주 안심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모든 이웃은 그를 사업에 부지런한 자로 알았다. 그들은 그의 모든 수고를 목격하고 그를 칭찬했다. "저는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시 49:18).

둘째, 어느 누구도 그가 장사에게 속이는 줄을 알지 못했다. 그는 너무나 재치있게 행동했으므로 그가 부정하게 행한다고 말할 자는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둘 중 하나이다.

그는 사기 행위를 숨겼으므로 아무도 발견하지 못 했다. "어떤 불의가 있든지간에 그것을 발견할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것은 마치 불법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거나 영혼을 망치지 않으며 사람 앞에 노출되고 추문을 얻게 되는 것만 문제라는 듯한 투이다. 하나님이 모든 은밀한 일, 비밀의 사기 행위를 죄다 심판에 붙인다면 인간의 눈에 발각되지 않는다 해서 유익할 것이 무엇이랴!

에브라임은 사기 행위를 변명했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저희가 내게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악한 것은 전혀 없고 오직 변명할 만한 것뿐이며 경미해서 용서받을 만한 죄뿐이다. 그런 것은 말할 만한 가치도 없는 죄다." 이런 것은 하나님이 전혀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 자신조차 무시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행이라 할 수 있는 죄이며 상례적인 것이고 누구나 다 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즐거운 동시에 이익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죄라 할 만한 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을 더 나쁘게 여길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대로 보지 않으시며 인간의 판단과는 달리 판단하신다.

2. 에브라임은 제 1 석판의 계명을 범해 우상을 숭배했고 책망을 받는다(11절). 이것은 특별히 헛된 죄이다. 우상 제조와 숭배는 헛된 일이다.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우상은 이익을 주지도 못하고 속일뿐이다. 여기서 선지자는 우상 숭배로 악명 높은 두 곳을 언급하고 있다.

(1) 요단 저편의 길르앗은 앞에서 우상 숭배자란 낙인이 찍혔다(6:8).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길르앗에 불의가 있느냐?)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며 슬피 애곡할 만한 일이다. 무엇이라고? 길르앗에서 우상 숭배를 한다고? 길르앗은 비옥하고 즐거운 고장이었다(렘 22:6). 그런 곳에서 여호와께 악으로 보답한단 말이냐? 길르앗은 변경에 위치하여 대적들의 수모를 당할 우려가 있는 지방이었기에 특히 신적 보호의 필요성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불의로써 그 보호로부터 뛰쳐 나오다니! 길르앗에 불의가 있느냐? 그렇다.

(2) 길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길갈에서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고(9:15 참조) 하나님께 반대되는 이방신이나 아니면(하나님이 정하신 제단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길갈에 세운 제단은 씨 뿌릴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나 인분더미 같았다(8:11). 또 어떤 이는 "길르앗에만 불의한 것이 있느냐?" 고 읽는다. 길르앗은 다른 나라들과 국경을 접한 변경 지역에 있다. 그곳 사람들만 그렇게 미신적이냐? 아니다. 그들은 길갈에 있는 자만큼 악하다. 하나님은 길르앗에서 그들의 조상 야곱을 라반의 분노로부터 보호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거기서 불의를 행하려느냐?

Ⅱ. 여기에는 죄에 대한 진노의 위협이 나오고 있다.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정한 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즉 내가 너로 이스라엘인들이 장막에 거하면서 사십년 간 방황하던 때와 같은 상태에 있도록 하겠다." 그것은 광야에서 정해진 기간이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셔서 오늘의 자기들로 양육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 재산을 자랑하며 그 재물을 늘이기 위해 죄된 경로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장막 시절로 환원시키며 가난하고 비천하며 황량하고 정착못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위협하신다. 사람들이 죄로써 장막을 집으로 변화시킬 때 하나님이 심판으로써 그 집들을 다시 장막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지당하다. 14절 말씀도 확실히 위협이다.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속아서 자신의 평가를 그릇되게 하며 언젠가 그 잘못을 깨우칠 때가 있을 것이다. 에브라임은 죄라 불릴 만한 불의가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다(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라 할 만한 불의가 그에게 있으며 만일 그가 회개하여 고치지 않는다면 그 불의가 발견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 그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역겨운 죄였다. 에브라임은 자기불의로 하나님을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다. 그 죄는 하나님께 극히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고 종내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쓰라린 것이 될 터였다. 자기 지식과 확신에 반한 그의 범죄는 너무나 고의적이어서 누가 보더라도 그의 의도가 하나님을 극도로 격동시키는 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2. 그것은 필연코 에브라임을 파멸시킬 죄였다. 하나님을 격동시켜 진노의 불을 점화시키는 죄는 그럴 수밖에 없다.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몰수된 생명을 탈취하실 것이다.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죄없다 아니하시고 죄의 삯인 사망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다. 그의 피가 그 자신의 머리로 돌아 갈 것은(삼하 1:16), 그 자신의 죄가 그를 쳐서 증거하며 그 혼자만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멸망할 때는 그의 피가 그 자신 위에 임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2) 하나님이 그의 몰수된 명예를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하나님은 그의 주이시다. 그는 우상 숭배와 여타 죄로 주를 수치스럽게 했으며 그와 그의 이름과 가족들에게 불명예를 입히며 남들로 하나님을 비방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멸시하는 자는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는 말씀대로 에브라임에게 수치를 돌리실 것이다. 수치스런 죄에는 수치스런 형벌이 뒤따른다는 데 주목하자. 에브라임이 자기 하나님을 경멸하면 하나님도 그를 낮추셔서 그의 모든 이웃이 다 그를 멸시하게 될 것이다.

Ⅲ. 이전의 자비에 대한 회고가 나온다. 이전의 자비는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비열한 배은망덕의 민족이라는 정죄를 내린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면 그들은 낯을 붉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비천한 데서 끌어 올리셨다. 자랑했을 때 그는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 (신 26:5)는 고백을 망각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해마다 그들에게 고백하게 규정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것을 상기시키신다(12절). 그들은 그 조상 야곱의 명예를 기억해야 했다. 야곱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그때 그는 강력한 왕자나 다름 없었다(3절).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동안에는 그 명예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조상 야곱이 라반의 가련한 종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했다. 이것은 자기들이 불린 재산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뻐기는 그들을 낮추기에 족했다. 야곱은 악한 형을 피해 아람으로 도망했고 거기서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탐욕스런 삼촌을 섬겼으며 아내를 얻기 위해 양을 쳤으니 이는 그에게는 아내를 살 만한 재산이 없었던 때문이다. 야곱은 가난하고 비천하고 도망 다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야곱은 양을 치며 장막에 거주하는 검박(儉朴)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거짓 저울은 그 후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에서의 아내들은 가나안인의 딸들이었지만 야곱은 가나안인이 아닌 아내를 얻기 위해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그 후손이 가나안인으로 전락하며 열방과 뒤섞이는 것은 수치였다. 하나님은 야곱의 도주시에나 종살이할 때에나 그를 놀랍게 보호하셨다. 그래서 그 수는 심히 많게 되었다. 마른 땅의 뿌리로부터 그의 이름을 지닌 훌륭한 민족이 움터 나온 것이다. 이것은 그와 그 후손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자를 찬송하게 하며 동시에 그들의 창시자요 시혜자이신 하나님께 배은망덕했다는 오명을 그들에게 돌린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불행에서 구출하셨고 빈궁과 종살이로부터 건시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늘의 모습으로 향상시키셨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감을 한층 더 강화해야 했고 다른 신들을 섬길 경우 죄책감은 더욱 깊어야 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예속으로부터 구속해 내심으로써 그들에게 대한 특별한 권리를 획득하셨다. 그들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듯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는 바다에서 곧 홍해에서 그들을 바로의 진노로부터 보호하셨고 광야의 온갖 위난에서 보호하셨으며 그들을 먹여 살리셨다.

(3) 하나님은 선지자 곧 모세를 통해 이 일을 해내셨다. 모세는 여수룬의 왕(신 33:5)이라고 불리지만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한 일은 하나님의 지시와 그의 말씀의 권능에 의해 선지자로서 행한 일이다. 그가 사용한 권세의 징표는 제왕의 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그는 그 지팡이로써 애굽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축복을 불러 왔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행 3:22). 우리가 진리의 권능에 의해 죄와 사탄의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고 구출되는 것은 선지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다. 다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배은망덕한지를 설명해 준다.

[1] 그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배척했다. 이것은 왜 그들이 그 앞에 다른 신을 두어서 안 되는지 그 첫째 이유로서 십계명 서두에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2] 그들은 그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능멸하며 핍박했다. 그들은 그의 선지자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했다. 그들은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에 부응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지자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 광야에서 보호하신 까닭에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은 크게 가중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3. 하나님은 그들의 성장시에 그들의 교육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본보기를 10절에 열거된다. 선지자로 그들을 인도하셨듯이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흙에서 형성된 인간은 흙에서 먹을 양식을 얻는다. 이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은 예언으로 살지고 훈육되었던 것이다. 모세에서 비롯하여 모든 선지자에게로 면면히 계승된 하나님의 계시는 수십 세기를 통해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를 줄곧 양육시켜온 원동력이었다.

(1) 선지자들이 그들 중에서 세움을 입었다(암 2:11). 모세에서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예언의 영이 다소라도 없던 때는 없었다.

(2) 이 선지자들은 선견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상과 몽상을 얻었고 하나님은 그런 수단으로써 자기 의사를 그들에게 직접 나타내셨다. 거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사라는 확신이 뒤따랐다(민 12:6).

(3) 그는 이상을 많이 보이셨다. 그는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많이 말씀하셨다. 한 가지 이상을 보여 듣지 않으면 다른 이상을 또 보내셨다. 선지자들은 다양한 이상을 받기도 하고 같은 이상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4)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께로서 받은 것을 분명히 충실하게 그들에게 전달하였다. 시내산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기들과 같은 사람을 통해 말씀해 주시도록 요청했고 하나님은 그대로 해 주셨다.

(5)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 그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것은 자기의 전언을 보다 이해하기 쉽고 보다 많이 기억하게 하며 보다 많은 감동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본 이상은 왕왕 비유였고 그들의 담화는 매우 적절한 비료로 가미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빙자하여 비유를 베푸셨듯 자기 아들을 통해서도 비유를 베푸셨다. 왜냐하면 그는 입을 열어 비유를 많이 말씀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는 별도로 우리가 듣는 설교를 기록해 두신다는 데 주의하자. 우리는 순수하고 풍성하고 능력있는 은혜의 수단을 오랫동안 누려왔고 하나님의 의사에 대해 자주, 충실히, 그리고 친숙하게 들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불의의 길을 고집한다면 다른 날 책임져야 할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Ⅳ. 여기에는 장차 있을 또 다른 자비가 암시되고 있다. 그들은 비록 죄와 진노 가운데 있지만 이것도 기억해야 했다(9절). "나는 애굽 땅에서부터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는 그때 거기서 너를 내 백성으로 삼았고 그 이래로 일련의 끊임없는 자비의 섭리를 통해 네 하나님으로 자인해 왔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비록 네가 악하지만 네게 대해 자비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로 장막에 거하게 하리라. 그것은 광야에서 거하던 것 같지 않고 명절일에 거하던 것 같을 것이다." 그것은 큰 기쁨으로 지내는 초막절 같을 것이다(레 23:40).

1. 그들은 비록 부자가 되고 재물(본질적인 것)을 얻었다고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장막 상태에 있을 뿐이며 세상 재물로는 영원한 도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만한 이유를 얻게 되며 공중 의식에서 그렇게 행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장막절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뒤에 지킨 명절이다(스 3:4).

3. 다른 여러 약속처럼 이것도 복음의 은혜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복음의 은혜는 천국을 향한 도상의 신자들에게 장막을 제공하며 기뻐할 재료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하나님 안에서 얻은 기쁨이니 장막절에도 그러했다(슥 14:18, 19).

 

12:8 없음.

 

12:9 없음.

 

12:10 없음.

 

12:11 없음.

 

12:12 없음.

 

12:13 없음.

 

12: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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