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호세아 11:1-7)
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은혜로우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하늘 아래 어느 민족보다 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베푸셨고 많은 것을 주셨다. 나는 그들이 여기서 꾸짖음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은 주시되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죄가 악화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회개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이 어렸을 때 그들을 인자히 대하셨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처음에 애굽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택하심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신 7:7, 8). 그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약하고 무력하며 어리석고 패역했을 때, 그들이 의지할 데 없이 추방당한 아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자기의 호의를 그들에게 알리셨다. 그는 유모가 젖먹이를 기르듯 그들을 양육하시며 그들의 버릇없는 태도에도 관용을 베푸셨다. 성인 아니 노인들이라도 어릴 때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선하게 베푸신 일들을 가끔 회상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2. 그는 그들을 종살이 집에서 구해내셨다. "내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그것은 아들이기에,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하신 행위이다.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해방을 요구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아들, 자기 장자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죄와 사탄의 예속으로부터 불러내셔서 자기 자녀의 영화로운 자유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들 한다. 즉 헤롯이 죽자 아기 예수와 그 부모는 애굽에서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마 2:19, 20). 그래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출애굽 사건과 그리스도의 출애굽에 대한 예언적 사실을 말하면서 이중적 국면을 띤다. 전자는 후자의 예표였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다대한 은총의 증거요 보증이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들이 무자비하게 그를 축출하였을 때 마땅히 돌아오시지 않을 수도 있던 그 땅에 다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애굽에서 그리스도를 불러내신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를 그로 말미암아 영적 노예 상태에서 불러내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3. 그는 그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고 아비나 교사로서 뿐만 아니라 어미나 유모로서도 그들을 돌보며 수고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토록 자신을 낮추시며 겸비하셨다. "내가 에브라인에게 걸음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어린아이에게 이끄는 줄로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으며 그들의 팔을 잡으면서(개역 성서:내팔로 안을지라도) 그들을 지탱시켰다. 하나님은 의식법의 규례로써 그들에게 자기 계명의 길로 걷는 것을 가르치셨다. 성년이 못된 그 백성에게는 그것이 교사 또는 아비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들의 팔을 붙잡고 인도하였으니 이는 그들로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을 붙잡아 주셨으니 이는 그들로 실족하여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역시 이와 같이 후원을 받는다.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3).
4.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거나 조그마한 고장이라도 생기면 하나님은 그들의 의원이 되셨다. "내가 저희를 고쳤다. 나는 저들을 자상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치료하였노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뿐이시다. 나는 너의 모든 어려움을 고치고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출 15:26 참조).
5. 하나님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방법에 의해 그들로 하여금 그를 섬기게 하셨다(4절).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 하나님은 불쌍한 영혼들을 그 자신에게로 이끄신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이 이끄시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로 올 수 없다(요 6:44).
(1) 그는 사람의 줄로 이끄신다 즉 그것은 사람들이 끌거나 끌릴 때 사용되는 인도의 원리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람으로서 취급하셨다. 그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또 편안하고 인자한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셨다. 그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 대하듯 아담(원의는 사람)의 줄로 그들을 다루셔서 그들을 곧 낙원으로 데려가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2) 그는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다. 이것은 전자보다 더 강한 줄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강제로 자기를 섬기게 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거나 완력으로 구속하지 않으셨다. 그는 끌어당기는 매력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강하였다. 그의 매력은 매우 감미롭고 따사했기에 그는 그들을 자비로 압도시킬 수 있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인도자로 삼은 모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왕왕 이웃 사랑을 의무니 속박이니 한다. 그것은 사랑의 속박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향기름으로 이끌어 들이시며(아 1:3, 4) 인자함으로 인도하신다(렘 31:3).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므로 우리도 우리의 가르침과 다스림 하에 있는 자들을 마찬가지로 도리에 맞게 온화하게 다루어야 한다.
6. 그는 그들을 오래도록 신음하게 만들던 무거운 짐을 제거하셨다. "내가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다." 이것은 자기 가축에게 자비로워 혹사로 곤비케 하지 않으려는 선한 농부의 따뜻한 보살핌을 가리킨다. 아마 당시에는 소의 멍에를 자갈이나 굴레로 조여서 입에 망을 씌웠을 것이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이처럼 안락한 즐거움을 제한 당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편히 해 주셨고 그들의 어깨에서 중한 짐을 덜어 주셨다(시 81:6). 자유 특히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큰 자비라는 것을 명심하자.
7.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셨다. 애굽에서는 그들을 인도해 내셨고 농부가 소의 멍에를 푼 뒤 꼴을 주는 것처럼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셨다. 그는 그들의 진영 주위에 만나의 비를 내리셨고 천사들의 음식인 하늘의 떡을 뿌리셨다. 다른 피조물들은 자기가 먹을 양식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식들에게 하듯 자기 백성 앞에 먹을 것을 두셨다. 그는 친히 그들의 음식을 차리고 고기를 베는 자가 되셨으며 인자의 축복을 예비하셨다.
Ⅱ.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배은망덕했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청종치 않았다. 그는 사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모세와 다른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을 죄로부터 부르시며 자기에게로 부르시고 일과 의무에로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그들은 충고를 받은 개개의 사례에서 반역했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선한 일에 대한 설득을 위해 압력을 가중시키면 시킬수록 그들은 더욱 뻗대며 악한 길을 고집하며 불순종을 위한 불순종을 하였다. 그 자손들의 마음은 이런 우매함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 자손들은 걷기를 배우자 말자 곧 자기들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2. 그들은 우상을 좋아하여 숭배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 가증스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거듭 촉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알들 즉 이런 저런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던 것이다. 우상숭배는 처음부터 그들을 쉽사리 사로잡힌 죄였을 뿐만 아니라 줄곧 그들이 범하던 죄이기도 했다.
3.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무시했다. "저희는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구원의 도구인 모세와 아론만 쳐다보았고 더구나 일이 잘못될 때면 그들과 다투었을 뿐 그 두 사람을 부리시는 하나님을 보지는 않았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엄격한 훈련을 시키실 때 그것이 곧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자기들을 고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징계가 완전한 치료에 필요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보다 잘 승복했을 터였다. 배은망덕의 밑바닥에는 무지가 깔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2:8).
4. 그들에게는 배반심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책망 중에서 가장 비판받는 조항이다(7절).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도다." 여기에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모두가 악하다.
(1) 그들은 물러간다. 그들에게는 건실함도 지속성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매진할 듯이 보이다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속이는 활처럼 된다.
(2)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물러간다. 하나님은 최고 선이시고 생명과 생수의 근원이시며 그들의 하나님과 소유주였다. 그는 그들의 지배자요 시혜자였다. 그는 결코 그들로부터 돌이키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광야 같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에게서 물러갔던 것이다.
(3) 그들은 물러가기를 "결심한다." 그들은 기꺼이 범죄하려 한다. 그들의 본성 가운데에는 악한 것에 대한 경향성이 있다. 가장 선할 때에도 그들은 고작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하찮은 일도 그들을 그릇된 길로 끌어갈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유혹에 기꺼이 달려든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범죄를 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대담하다(전 8:11). 그들의 성벽은 악을 향해 치우쳐 있다. 그들의 후퇴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말과 행동이 제시되더라도 그들은 후퇴와 타락을 고집한다.
(4) 그러나 그들은 신앙 고백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저희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내게 대한 관계를 고백하는 백성이다. 저희는 내게 속해 있고 나는 저희를 위해 많은 것을 행했기에 저희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 나는 저희를 자식처럼 양육했고 길렀다. 그런데도 저희는 내게서 물러간다." 우리는 회개시에 우리의 물러남(타락)뿐만 아니라 퇴보하겠다는 우리의 회개시에 우리의 결심이나 경향성도 슬퍼해야 하며 우리의 실제 범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래적 타락,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죄 곧 육욕적 마음도 슬퍼해야 한다.
5. 그들은 이상하게도 회개와 개혁을 혐오하였다. 그들의 완고성에 대해 두 가지 표현이 나온다.
(1) 그들은 돌아오기를 싫어했다(5절). 타락의 경향성은 너무나 강해서 그들은 시험을 통해 타락의 우매함을 뻔히 보고 또 하나님을 버렸을 때 자기들의 형편이 더욱 악화되었음에도 계속 해서 패역을 행했다. 그들은 "내가 이방인을 사랑하여 그들을 따라가리라" 고 말한다. 그들은 귀환을 명령받고 돌아오라는 요청과 간청을 받았다. 또 돌아오기만 하면 친절한 접대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오기를 싫어하였다(원의:거절하였다).
(2) 비록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에 계신 자에게로 불렀을지라도 일어서는 이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사역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런 비참한 타락의 늪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우상 숭배로부터 그들을 불렀다. 우상 숭배는 그들로서 본분 이하의 일이었고 따라서 그들보다 무척 위에 계신 참되신 하나님을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숭배는 그들을 평가절상시키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높은 천적인 일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부름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자(흠정역: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인데도 그들은 그를 그렇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존귀하게 하는 것은 일체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려 하지 않았다. 또는 그들은 스스로 높이려고 하지 않고 타락과 불행의 상태에서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타락과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져서도 거기서 만족한 채 누워 있었으며 머리를 들지도 않으며 영혼을 떨쳐 일으키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뒷걸음질치는 자녀들에게 굉장히 많은 수고를 하며 그들을 지극히 높이 계신 분께로 부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데 주목하자. 아무도 분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하나도 없고 일어나는 자도 없다는 데 주목하자.
Ⅲ.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분노하시며 그것은 또 지당하다. 그들을 위협하는 분노의 표징이 어떠한지 주목하자.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처음보다 더 악한 상태로 몰아넣으실 것이다(5절). 애굽 땅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더 가혹한 종살이를 하러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앗수르 사람이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앗수르인은 바로 왕보다 그들을 더 혹사할 것이다. 그들은 애굽땅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애굽은 이스라엘 가까이 있어서 고국 소식도 보다 자주 전해들을 수 있고 또 보다 신속한 환국을 바랄 수도 있는 땅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멀리 떨어진 앗수르로 끌려갈 것이다. 그곳은 고국과의 모든 통신과 귀국 희망으로부터 단절된 땅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싫어한 까닭에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의무로부터 떠나 돌아가지 않으려는 자들은 위로를 상실하며 안락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2. 매우 안전하고 안락한 복지 가나안을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땅에서도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 심은 그들의 거주를 위태하고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6절). 칼 곧 전쟁의 칼, 외적의 칼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며 승리할 것이며 그들을 굴복시킬 것이다.
(1) 이 심판은 멀리까지 미칠 것이다. 칼은 그들의 성읍을 공격할 것이며 백성의 보금자리와 부유한 곳간을 다 노릴 것이다. 칼은 그들의 빗장(흠정역:가지)에도 다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촌락민이나 도시민 또는 성문과 빗장으로 해석한다. 또 혹자는 세입과 재물 또는 자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 이 심판은 오래 계속될 것이다. 칼은 그들의 성읍에 "머무를" 것이다(원의는 그렇다). 다윗은 석 달을 대적 앞에서 도망하는 것이 세 가지 중에서 회피해야 할 유일한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칼은 석 달을 훨씬 상회하여 이스라엘 성읍들에 머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계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대한 심판을 계속하셨던 것이다.
(3) 이 심판은 완전한 종결을 지을 것이다. 칼은 그들의 빗장(가지)을 깨뜨려 없이할 것이며 모든 것을 완전히 황폐시킬 것이니 이는 그들의 계책을 인함이다. 즉 그들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제 맘대로 행했고 자기들하고 싶은 대로 행하였으며 그들 자신의 계획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을 통해 그들을 그들 자신의 계획에 내맡겨 버리신 것이다. 죄인의 혼란은 그 자신의 계교에 기인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을 구원해 줄 터였으나 그들 자신의 계획이 그들을 망친 것이다.
하나님의 참으심 (호세아 11:8-12)
Ⅰ.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후퇴가 나온다(8, 9절).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내심에서는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은혜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즉 공의와 자비 간에 토론이 벌어지는데 승리는 분명히 자비 편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하늘이여, 이 사실에 놀라라. 땅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이히 여기라.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안에서 벌어지는 그런 투쟁이 하나님 속에서 벌어진다거나 하나님의 마음이 동요하고 불확정적이란 말은 아니다. 그는 단 한 가지 마음이시며 그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표현 양식을 따른 것이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가 가혹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데도 그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과 앞 문단의 말씀을 연결해 보면 그 의미는 매우 놀랍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결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물러가며 비록 그들이 부름을 받지만 일어나는 자가 없다는 말씀이 나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제 나도 그들을 멸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에게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는 말씀이 잇달아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자비는 지고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자유롭고 완전하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는 말씀이 뒤따라 나오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1) 공의가 이스라엘에 대해 내놓는 제안과 제의가 암시되고 있다. 즉 아비가 도저히 개과시킬 수 없는 자식을 버려 폐적시키고 의사가 불치의 환자를 포기하듯 에브라임도 포기하며 파멸에 내어 주라는 것이다. 어린양을 사자에게 내어 주어 갈갈이 찢게 하듯 이스라엘도 대적에 내어 주라. 이스라엘을 아드마와 스보임 같게 하라. 이 두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유황과 불로 멸망된 도시들이다. 그들이 완전히 파멸당하게 하여 재기하지 못하게 하라. 그들로 죄 가운데서 폐허가 된 그 두 도시처럼 되게 하라. 율법에 기록된 저주 곧 온 땅이 유황과 소금이 되며 소돔과 아드마를 고모라의 무너짐같이 되게 한다(신 29:23)는 저주가 그들 위에 임하게 하라는 것이 정의의 제의였다.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이렇게 버림을 받아 마땅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다루신다고 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으실 것이다.
(2) 이런 제안에 대해 자비는 반대를 표시한다.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랴!" 자비로운 아비가 스스로 내가 어찌 패역한 아들을 버리겠느냐고 다짐하듯 하나님도 그리고 말씀을 하신다. "그는 비록 패역하지만 내 아들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럴 마음이 생기겠는가? 에브라임은 사랑스럽고 소중한 자식이었다.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그의 멸망은 무르익었다. 심판은 그를 나포할 준비를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그를 놓고 버리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내게 가까운 내 백성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선한 자도 더러 있다. 그들의 자녀는 언약의 자녀들이다. 만일 그들이 파멸한다면 대적이 기뻐할 것이다. 또 그들이 회개하고 개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느냐?"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특히 자기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백성을 버려 전멸을 당하게 하기 싫어하신다. 가혹한 처사에 대한 언급에서 자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여기서 살펴보자. 우리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게 될 때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속이 뒤집어진다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애정이 용솟음치는 것을 의식하시는 듯이 말씀하신다. "내가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도다" (원어는 같음, 애 1:20). 이에 잇달아 나오는 것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한다" 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동했고 그들의 죄와 곤고를 인하여 근심하셨다(삿 10:16 참조). "내가 그를 책망할 때마다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하도다" (렘 31:20).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에 대한 희생물과 죄인의 구세주로 내놓으실 때는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고 말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는 자기 아들을 아까와하지도 않으시고 내놓으셨다. 여호와께서는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사 53:10). 그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아까와하지 않고 내놓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인내하시는 날에 사용하는 언어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렇게 멀리 떠나가고 진노의 큰 날이 이를 때에는 아무런 애도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는 그들이 재앙을 만날 때에 웃기까지 하실 것이다(잠 1:26).
2. 하나님은 이 논쟁 끝에 은혜로운 결정을 하신다. 오랜 토론 끝에 자비는 결국 정의를 이기고 기뻐하며 꼼짝 못할 말로 정의를 견제하는 데 성공한다. 유예기간이 좀더 연장되고 하나님이 비록 노하셨지만 그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선포되고 있다. 그들이 전혀 무사하진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판결을 경감시키며 엄한 형벌을 완화시키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정한 진노를 보이실 것이며 앙심 깊은 진노를 보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진멸당하지 않고 징계와 교정을 받을 것이다.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부과된 심판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죄대로 심하게 시행되진 않을 것이다. 그는 군인들처럼 "다시 멸하러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다(원의는 그렇다). 군인들은 한 번 마을을 약탈한 뒤에도 더 많이 탈취하기 위해 두 번째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는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어 치우는 것과 같다(욜 1:4). 9절 끝에는 "내가 성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리라" (한글 개역:내가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그 뜻은 "내가 사마리아나 다른 성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나는 아드마와 스보임의 그러나 성읍에 행한 것처럼 완전히 멸하고 황폐시키는 대적으로서 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 는 뜻이다.
3. 이 결정의 근거와 이유가 나온다.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라." 자비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격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되고 하다.
(1) 그는 어떤 분인가? 그는 다른 일에서와 같이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살려 주시는 일에 있어서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과 같은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는 그것을 참을 수도 참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격노는 그의 긍휼을 압도했을 것이고 그는 자기의 맹렬한 노여움에 대한 구실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노여움은 흔히 인간을 지배하는데 반해 하나님은 자기 진노의 주인이기도 하다. 만일 세상의 군주가 정의와 긍휼의 기로에 서 있다면 아마 그 일을 어떻게 조정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정의로우신 자기 명예를 확보하면서 자비의 명예도 진작시킬 수 있는 묘방을 강구하실 줄 아신다. 인간의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하늘이 땅보다 높듯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 생각과 길보다 높다(사 55:9 참조). 우리 신앙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 그는 거룩한 자이시다. 혹자는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토록 패역한 백성을 배척하실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함에 아무런 수치를 입히지 않고 불쌍한 죄인을 살려 주고 용서할 줄 아신다. 아니, 그는 이로써 자신의 성결을 크게 영화롭게 하신다. 그는 신실하고 공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로써 자기 의를 선포하신 그리스도는 값 주고 사함을 사셨고 그는 그것을 약속하셨다.
(2)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그는 그들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자이시다. 그의 거룩함은 자기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된다. 부패한 땅과 타락한 사대에도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고 감사를 돌리는 자들이 더러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자기처럼 거룩하라고 요구하셨다(레 19:2). 우리 가운데 거룩하신 자가 거하시는 한 우리는 안전하고 복되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떠나실 때에는 우리에게 여간 해롭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향력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Ⅱ. 이스라엘을 위해 선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적극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려고 계획하시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그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실 것이다(10, 11절). 그들은 여호와를 좇을 것이다. 이것은 3장 15절의 은총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열 지파에 대한 언급인데 에스라 당시 두 지파와 함께 돌아온 이스라엘인에게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규합되고 구체화된 복음교회에서 보다 완전히 성취되었다. 고대 유대인은 이것을 메시야 시대의 일로 간주했다. 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 곧 곳곳에 이산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의 예언으로 간주한다. 다음을 관찰하자.
1. 그들은 어떻게 부름을 받고 규합되었는가? 여호와께서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소리를 발하는 사자 같을 것이다(갈대아 사본).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 불리우며 그의 복음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요 1:23).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을 때는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았다(계 10:3). 복음의 소리는 사자의 포효소리처럼 멀리 들렸으며 그것은 큰 소리였다(욜 3:16).2. 이 부름은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 그것은 사자의 울부짖음이 삼림 중의 모든 짐승에게 주는 인상과 같았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암 3:8)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그가 소리를 발하시면 그 자손들이 떨게 될 것이다. 마음이 복음에 닿은 자들이 떨며 놀라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고 부르짖으며 복음으로 구원을 믿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때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자손들은 서편에서부터 떨며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동쪽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돌아온 자들도 동쪽에서 귀환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나안 서쪽에 있는 이방인의 부르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은 특히 서쪽으로 퍼져 나간 때문이다. 그들은 떨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감동되어 떨면서 올 것이다. 그들은 서쪽에서부터, 서쪽에 산재한 열국에서 복음의 경보를 듣고 황급히 또 조심스레 떨면서 주의 산 복음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사 2:3). 사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두루 행하며 전파한 복음의 표적과 기사의 능력(롬 15:18, 19)을 언급하고 있다. 그 때에는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면서 왔던 것이다. 육적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에 흩어졌음에 대해 그들이 그곳에서 효과적으로 소집되리라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11절). "저희가 떨리라.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라." 비둘기는 신속하고도 꾸준한 비상으로 정평이 있다. 제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비둘기는 특히 그렇다(사 60:8).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무리들이 교회로 모여드는 것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은혜의 선택에 속한 자들은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지 기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며 그로써 감동을 받을 것이다. 애굽에 있는 자와 앗수르에 속한 자들은 함께 올 것이다.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될 것이며 교회 안에서 통합될 것이다. 애굽과 앗수르의 통합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나온다(사 19:23).
3. 이 인상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들은 두려움에 눌려 방주로 도망갈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좇을 것이며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좇을 것이다(갈대아 사본). 그들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을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대장되신 그리스도의 휘하에 편입할 것이며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지시 아래 투신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좇아 제자들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제자됨에 합당한 태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경건하고 성스러움을 띠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끌어가며 우리를 그에게서 떠내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자. 그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면 종들은 떨며 그에게서 도망치지만 자녀들은 떨면서 그에게서 피난하는 것이다.
4. 그들은 귀환시에 어떤 향응을 받게 되는가?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복음의 부름에 나아오는 모든 자들은 복음 교회를 이름과 집으로 삼게 된다. 각 교회는 그들의 집이며 그들은 개개의 교회에 속한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사람이 자기 집에 있을 때처럼 그 안에서 편안과 안전을 누린다. 그들은 집을 소유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 위에 있는 그의 장막이나 하늘에 영원한 거소도 그들의 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말일에 그들이 서게 될 분깃이기 때문이다.
Ⅲ. 여기에는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슬픈 불평이 나온다. 이것은 앞 약 속의 대상이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암시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거짓과 궤휼로 하나님을 에워쌌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제단 주위를 에워싼다고 할 때 즉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모든 예배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었던 것이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께 드릴 소원을 가지고 기도와 찬송으로 그를 에워쌀 때도 그들은 그 입으로 거짓을 말하며 그 혀로 아첨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그럴 듯한 아름다운 말이었으나 그들의 의도는 불순하여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약속과 고백은 전부가 속임수였는데도 그들은 그런 것들로써 하나님을 포위하여 그를 자기들 중에 붙잡아 두며 그의 떠나심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Ⅳ. 여기에는 두 지파에 대한 유쾌한 칭찬이 나온다. 두 지파는 순전성을 고수했다. 그 점은 열 지파의 패역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소와 하나님이 유독 유다 지파에게 대해 자비를 예비하시는 이유(1:6, 7 참조)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성도들 또는 지극히 거룩하신 자에게 신실하기 때문이다" (흠정역).
1.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린다. 유다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참 자유일 뿐만 아니라 존귀와 주권이기도 하다.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린다. 즉 유다의 방백과 총독들은 하나님과 함께 다스린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명예와 이익을 유지시키기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이다(삼하 23:3). 또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명예가 되며 여기의 유다처럼 그들의 칭송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한다. 유다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왕자이다.2. 유다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신실하며 하나님 예배와 그의 성도들 즉 그의 방백 및 백성에게 근접하여 행한다. 성도들에게 신실하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발걸음을 충실히 뒤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선인의 길로 행했다. 또 그렇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이며 하늘에서의 영향력이 큰 자이다. 그러나 유다가 "아직도" (흠정역에 있음) 하나님과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유다 역시 배반하고 타락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거짓과 궤휼로 하나님을 에워싸는 자들이 무한히 많은데 충심으로 하나님을 고수하고 그의 성도들에게 신실한 남은 자를 하나님이 두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위선자와 모든 거짓말장이들이 분깃을 얻지 못할 때도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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