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호세아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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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이스라엘의 타락과 심판의 위협 (호세아 10:1-8)

Ⅰ. 여기서 이스라엘이 추궁받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적 심판을 부르는 국민적 죄였다. 선지자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규탄한다. 이는 그들에게 아부한다. 해서 그들에게 하등 유익될게 없었던 때문이다.

1. 그들은 의의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1절). "이스라엘은 빈 포도나무라" (흠정역).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나무에 비유되어 마땅하다. 포도나무는 겉보기에는 약하고 별반 볼 게 없으나 사실은 가지가 뻗어나가 열매를 많이 맺는다. 신자들은 그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나무의 뿌리에 동참하며 그 자양분을 나누어 먹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특성은 빈 포도나무 즉 그 안에 수액이나 진액도 없는 빈 포도나무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맺을 것으로 기대되던 좋은 열매가 나오지 않는다. 만약 좋은 열매가 결실되었더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다 존귀케 했을 터였다. 악한 포도나무까지는 되지 않았더라도 빈 포도나무가 되어 그 안에 선한 것이 없는 자들이 많다는 데 주목하자.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모든 나무 중 가장 쓸모없는 나무다. 그런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겔 15:3, 5). 그리고 포도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곧 들포도를 맺게 될 것이다. 선을 끼치지 않는 자들은 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빈 포도나무인 것은 그 자신을 위해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흠정역). 그 안에 있는 선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그 선한 것을 제 스스로 취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제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다(롬 14:6).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을 자기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먹고 마신다(슥 7:5, 6). 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자신의 모든 재물을 비우고 약탈당하게 된다. 이는 그들이 그 모든 재물을 욕망의 추구에 쓰며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없어지게 될 것을 각오하는 게 마땅하다.

2. 그들은 제단과 우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들에게 후하면 후할수록 우상을 섬기는 데 더욱 많은 낭비를 했다. 그 땅이 맺은 열매가 많을수록 그들은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우상을 아름답게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그에게 더욱 많은 죄를 자행하며 사람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악을 행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며 그의 인자하심을 남용하는 것이 된다. 그들이 우상 예배에 인색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데 풍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재산이 많이 늘어나면 날수록 우리는 그에 비례하여 경건과 자선의 행위를 더 많게 해야 한다.

3. 그들의 마음이 나뉘었다(2절).

(1) 그들 사이에는 분열이 있었다. 그들은 우상에 대해서도 이견을 드러내어 일부는 이런 우상을, 또 일부는 저런 우상을 좇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여러 왕에 대해서도 의견이 불일치했다. 별개의 이해 관계로 그들은 각기 제 세력권을 형성했고 이 일로 그들의 마음은 나뉘어 두 가지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경원(敬遠) 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우정 따위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저희가 이제 죄를 받을 것이다" 는 말씀이 뒤따른다. 한 백성의 분열과 원한은 많은 범죄의 원인과 파멸의 전조라는 데 주목하자.

(2) 그들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애착심도 남아 있었으나 우상에 대한 사랑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렸고 그것이 그들의 두마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주권자시기에 결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전부냐 아니면 무(無)냐의 둘 중 하나만 택하실 것이다. 사탄은 거짓된 어미처럼 "내 것도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왕상 3:26)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렇게 되려는 경우에는 "아니다, 그로 그 모든 것을 가지게 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나뉜 마음은 죄를 받을 것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에 반역하는 것으로 배격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과 맘몬(재물의 신) 사이에서 나뉜 마음은 비록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가장하더라도 발견의 날에 죄가 드러날 것이다.

4. 그들은 극히 엄숙하게 말하고 행한 것을 양심적으로 지키지 않았다(4절).

(1) 그들은 맹세도 양심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맹세는 극히 엄숙한 말이다. 그들은 말 즉 말만 내었다. 그들의 의도는 말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verba dare-즉 헛 말을 했다. 그들은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웠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기만적이었다. 그들은 할례의 언약을 기만했다.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잘못을 고칠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자기 하나님께 거짓으로 대하는 자들이 온 인류에게 거짓되었다고 해서 이상해할 것은 없다. 그들은 극히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배반하는 습관이 붙었다. 백성은 충성의 맹세를 어겼고 왕들은 등극시의 서약을 어겼다. 그들은 제휴하고 있던 열국과의 동맹도 깨뜨렸으며 사인간의 계약도 거리낌없이 위반했다.

(2) 그들은 재판에서도 양심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재판은 극히 엄숙한 행위였다. 사람들이 위증을 예사로 하고 위약을 밥 먹듯이 할 때 공정한 재판은 베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기 좋은 치료의 약초가 되었어야 할 재판이 좋은 소출을 위해 갈고 경작하는 밭이랑에서 해롭고 독한 인진처럼 돋아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대한 예배상의 부패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시행되는 사법상의 부패도 크게 노여워하시며 백성의 부정은 우상 숭배나 불경건과 마찬가지로 그와의 논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그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인간의 혜택과 공동체의 선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재판정의 모독도 성전의 모독만큼 확실히 복수당할 것이다.

Ⅱ. 이런 죄로 이스라엘이 벌받아야 할 심판은 어떤 것인가? 그들은 국가적 문제와 종교적 문제에서 다 죄를 지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부문에서 다 벌을 받게 된 것이다.

1. 그들은 왕이나 통치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정의가 압제로 변했기 때문에 정치를 맡아 국가의 축복이 되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국가의 중한 부담이란 불평을 듣게 될 것이며 (3절) 백성을 잘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백성을 보호할 능력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르기를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 즉 우리는 왕이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선을 베풀고 도와 줄 자도 없으며 자멸을 막고 원수의 파멸을 저지시킬 자도 없으며 공안을 유지시키고 우리 싸움을 싸워 줄 자도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결과가 온 것은 마땅하다. 우리가 왕들의 보호 하에서 안전할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배척을 받는다. 그렇다면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 당한 지금 왕에게서 무슨 좋은 것은 기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는 자들은 피조물의 위안과 기쁨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데 유의하자. 부하들의 충성도 신앙없는 군주에게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군주가 힘을 얻어 그들을 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신다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은총과 그에게 대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은 "인간들 중 아무리 위대한 자라도 우리를 대적하여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의기양양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에서 뛰쳐나가는 자들은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자라도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 하고 자포자기의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않으시면 내가 어떻게 너를 돕겠느냐?" 고 말한 자는 왕이었다. 그런데도 "왕이 우리를 도울 수 없으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 고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없는 일을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왕을 두려고 혈안이 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왕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왕이 자기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던 의지물에게 싫증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왕이 그들을 도울 수 없게 되었을 때 한 불평이지만 그것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다. 그들의 통치는 약화될 뿐만 아니라 끝장나게 될 것이다(7절). 사마리아는 이제 남은 전부이며 왕성이다. "그런데 그 왕은 물위에 거품같이 멸망할 것이다." 포말은 맨위에 떠올라 수면 위에서 크게 허세를 부리지만 그것은 물결의 동요로 일어난 거품덩어리에 불과하다. 다윗가를 배반한 뒤의 이스라엘 왕도 그런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통치는 기초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왕을 세울 때는 극히 위대한 왕이라도 물거품보다 나을게 없다. 하나님이 심판으로 그들과 다투러 오실 때는 그들을 물거품처럼 쉽사리 흩으실 수 있으며 분해시킬 수 있고 무로 환원시키실 수 있다.

2. 그들은 우상과 우상 숭배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왕들 뿐만 아니라 신들도 실망시키는 백성의 형편은 비참하다.

(1) 그들이 만든 우상과 세운 제단은 훼파되며 약탈되며 승리한 적군에게 공동 노략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끼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2절). 하나님은 앗수르인의 손을 빌어 그렇게 하실 것이며 앗수르인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하나님께서 쳐서 깨치며 헐어 마땅하다는 데 주목하자. 벧엘에 있던 금송아지는 최고의 우상이었고 사마리아의 거민이 가장 열애하던 것도 바로 그 우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우상의 파멸이 예고되고 있다. "그 영광이 떠나간다" (5절). 그 송아지가 엎드러져서 파손될 때는 더 이상 경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송아지를 앗수르로 옮겨다가(단의 송아지가 그 얼마전 그랬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듯이) 예물로 야렙왕에게 드리리라." 그 송아지는 값비싼 노획품으로 (왜냐하면 그것은 금송아지였고 게다가 숭배자의 헌물로 장식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승리의 전리품으로 앗수르 왕에게 운반되었다. 이보다 영광스러운 전리품이 어디 있으며, 완전한 정복을 이보다 명백히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8절에는 "이스라엘의 죄 즉 그들이 자기 죄의 내용으로 삼은 우상이 파괴될 것이라" 는 말씀이 나온다. 열왕기에서는 "이 일이 죄가 되었다" (왕상 12:30)고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애착심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죄의 양식과 연료를 파괴해 마땅하다는 데 유의하자. 우상과 함께 아웬의 산당 곧 벧아웬 또는 벧엘의 산당은 파괴될 것이다(5절). 그곳은 하나님의 집(벧엘의 의미는 그렇다)이라고 불리웠으나 이제는 죄의 집, 아니, 죄 자체로 불리고 있다. 왕들은 정의의 칼로 산당을 마땅히 제해야 했지만 그러질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칼로 그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래서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서 날 것이다. 즉 그 단들은 폐허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제단들은 하나님과 선한 자들에게 가시와 찔레처럼 역겨운 존재였고 죄와 저주의 열매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시와 찔레 속에 묻히는 것은 당연하다.

(2) 우상과 제단과 산당의 파괴는 그들에게 슬픔과 수치와 공포를 야기시킬 것이다.

[1] 그 파괴는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다 줄 것이다. 벧엘의 송아지가 파괴될 때 그곳의 백성은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송아지를 국가의 수호자로 우러러보았는데 그 송아지가 없어지니 자기들은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이 일은 우상 열애라는 미망 속으로 빠져 들어간 불쌍하고 무지한 백성을 비통하게 슬퍼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미가가 "너희들이 나의 지은 신들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삿 18:24)라고 한 것과 같았다. 그 우상을 기뻐하신 제사장들도 이제는 그 백성과 함께 슬퍼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신으로 삼든지 간에 결국 그 신을 상실하고 슬퍼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어떤 좋은 것이든지 세상 것을 잃고 과도히 슬퍼하면 이는 우리가 그것을 우상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은 언제나 우상을 섬기면서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그 우상에 대해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스런 환락은 조만간에 애곡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들에게 수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6절). 에브라임은 자기가 신뢰하던 신들을 신뢰하고 숭배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획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나님의 법궤와 제단은 백성이 배척하기까지는 결코 철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의 제단은 백성이 거기에 몰두할 때 훼파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시는 죄가 바로 전자에게 대한 멸시와 후자에 대한 존경임을 나타낸다.

[3]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5절). 사마리아의 거민은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 때문에 고통 중에 있을 것이며 신들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자신과 그 자녀와 가족 때문에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애굽의 신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듯(출 12:12)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엄습하며 그들의 우상들에게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는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땅을 진동시키실 때(사 2:21) 우상 숭배자들은 벌벌 떨게 된다. 그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8절). 우상 숭배의 옹호자들은 이와 같이 바위와 산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피난시켜 달라고 헛되이 요청하게 된다(계 6:15, 16).

 

10:2 없음.

 

10:3 없음.

 

10:4 없음.

 

10:5 없음.

 

10:6 없음.

 

10:7 없음.

 

10:8 없음.

 

10:9

심판의 위협 (호세아 10:9-15)

Ⅰ. 그들은 하나님이 왜 그들과 회계하러 드시는지 그 이유를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의 열조와 선조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들이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하다는 말(9:9)은 이미 들었는데 여기서도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의 시대로부터 범죄하였다" (9절)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기브아 시대에 자행된 악이 여기서 재생되며 판에 박은 듯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저질러진 죄가 모든 중간 시대를 통해 면면히 계속되고 계승되어 여기까지 이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죄의 양은 오래도록 계속 충진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그 죄는 계속 더 불어나고 있다. 또는 "네가 기브아 시대보다 더 많이 범죄하였도다(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죄는 기브아 시대의 극악한 죄를 능가한다. 그때의 죄는 몹시 악했다. 이는 저희가 거기에 서 있었던 때문이다. 범인들은 자기들을 방어하려고 섰고 그들의 악함을 징계하겠다고 나선 이스라엘 지파들도 서 있었다. 그 때 행악자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전투에서 다 승자가 되었다.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에서 그들은 세 번째 회전 때까지는 그 악인들을 붙잡지 못했고 마지막 전쟁에서도 600명이 도주했으므로 그들 전부를 붙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 죄는 그들의 죄보다 더 악하다. 그러므로 너는 불의의 자녀에게 대한 전쟁이 너를 붙잡으려 이길 것이라는 것밖에 기대할 게 없다. "

Ⅱ. 그들은 하나님의 따끔한 심판의 경고를 받는다. 그 심판은 그들에게 임하고 있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살려 두셨다. 비록 그들은 몹시 도발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인내와 관용에 감화를 받을지 않을지 시험해 볼 의사를 지니셨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원하는 때에 저희를 징계하리라. 그것은 내가 목적하는 것이며 기뻐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망하게 하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다(신 28:63).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과 파멸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의 징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징계가 어떤 것인지 주목하자. "기브아 전투 때 다른 모든 지파가 베냐민 족속을 쳤듯이 만민이 모여서 저희를 치리라." 랍비 중 어떤 이는 이렇게 부연해서 설명한다. 저희가 내 이름으로 견책하는 선지자를 통해 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만민의 손을 빌어 저희를 징계하리라. 만민은 저희가 두 가지 고랑에서 스스로 결속할 때 모여서 저희를 치리라(흠정역). 이때는 그들이 말하자면 이중 참호 속에서 스스로 요새화 하려고 생각할 때를 말한다. 또는 이 때는 "저희가 두 가지 죄에 걸릴 때" 를 말한다. 즉 이것은 그들이 자주 책망받던 현세적 음행과 영적 음행이나 단과 벧엘의 두 송아지나 예레미야 2장 13절에 언급되는 두 가지 큰 죄를 의미한다. 또는 이 때는 "내가 저희를 그 두 이랑에 묶을 때" 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앗수리인에게 예속시키실 것이다. 앗수르인은 그들을 밭 가는 소처럼 멍에를 지울 것이며 그들은 두 이랑에 매어 밭을 오르내리며 막대기가 두려워 거기서 뛰쳐나오지 못할 것이다. 갈대아 주석은 "그들을 치려고 모이는 자들은 한 쌍의 암소가 그 두 이랑에 매이듯 그들을 지배하리라" 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유민이 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원수의 노예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열국의 종살이 간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대하 12:8).

Ⅲ. 그들은 자기들의 고생과 역경에 친숙하지 못한 것도 몹시 비참한 포로생활을 면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1절). 에브라임이 얼마나 상냥하고 아름다운지 살펴보자.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입에 망을 씌우지 않았으므로 마음대로 먹을 자유가 있으며 일 자체도 무미건조하고 쉬웠으며 그 자체가 기분풀이로 되고 삯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비록 그 목이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라. 즉 내가 그들을 길들이거나 그들로 앗수르인과 다른 정복자들을 태우게 하리라. 그 정복자들은 사람들이 자기가 타는 짐승들에게 하듯(시 66:12) 그들을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유다 또한 밭을 갈게 되며 야곱도 흙덩이를 깨뜨리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즉 유다 사람도 학대를 받게 될 테지만 에브라임 만큼 혹사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안일과 쾌락에 너무 방종하는 자들에게 고생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이 말씀을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 율법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취하신 온화한 방법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왜 순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는 농부가 소를 사역시키기 위해 훈련하듯이 그들을 다루셨다. 에브라임은 길든 암소처럼 부리기에 적당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목을 잡아 자기 손길에 익숙하게 하셨고 그 위에 마구 또는 계명의 멍에를 메우셨으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는 그들로 그의 규례안에서 훈육받아 이방인의 관례에 유혹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그들을 순종 가운데 보유하시기 위해 온갖 가능한 방법과 그럴 듯 한 수단을 사용하셨다. 그는 유다로 밭을 갈게 하고 야곱으로 흙덩이를 깨게 하셨다. 그는 그들로 자기들에게 적당한 교훈을 지키는 일에 종사시켰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순종을 보존하려고 하지 않고 곁길로 뛰쳐 나갔던 것이다.

Ⅳ. 그들은 기도와 참회와 개혁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초대되고 권면받는다(12, 13절). 다음을 주목하자.

1. 그들이 요청받은 의무. 그들은 하나님의 밭(고전 3:9)이다. 그래서 그 의무는 농사일에서 차용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압제자의 예속 하에 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복귀해야 했다.

(1) 그들은 묵은 땅을 갈아야 했다. 그들은 잡초와 가시 같은 모든 부패한 애욕과 욕망을 마음에서 씻어내고 자기 죄로 인해 겸비하며 죄의식에서 상하고 회개하는 심령을 품어야 했다. 그들은 죄를 기억하고 슬픔과 수치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땅을 가는 것은 씨앗을 받아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 위함이다(렘 4:3 참조).

(2) 그들은 의의 씨를 제 자신에게 뿌려야 했다. 그들은 의의 규칙인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선행에 복귀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행위와 서로를 향한 정의와 자비의 행위를 넘치게 해야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했다(갈 6:7, 8). 모든 행위는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들로 의를 심게 하라. 그들로 심어야만 되는 것을 심게 하며 행해야 할 것을 행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은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여호와를 찾아야 했다. 그들로 여호와를 쳐다보고 그의 은혜를 바라게 하며 그에게 뿌려진 씨앗을 축복하도록 요구하게 하라. 농부는 밭 갈 때나 씨뿌릴 때나 하나님께 눈길을 돌리고 그에게 적기의 강우를 구해야 한다.

2. 이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지금이 그 일을 할 때다. 농부는 파종기에 씨를 뿌리며 그 시간이 지나면 더욱 부지런히 일에 전념한다. 여호와를 찾는 일은 매일 해야 할 일이지만 섭리와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특별한 때도 있다는 데 유의하자. 그런 때는 특별히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이다.

(2) 우리가 만일 우리 할 일을 다 한다면 하나님도 자기 역할을 다 하실 것이다. 우리가 만일 스스로에게 의를 심으면 즉 우리가 그의 은혜에 의지하여 의무의 이행에 정성을 들이며 열심이라면 그도 우리에게 은혜를 소나기처럼 퍼부으시며 의를 비처럼 내리시며 의를 심어야 할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비처럼 내리실 것이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 적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때가 차면 오실 분이셨고 그들은 그의 강림을 위해 스스로 예비해야만 했던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의로운 여호와로 오실 것이며 우리에게 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이다. 그가 가져오실 것은 영원한 의였다. 그는 그 의를 우리에게 풍성히 허락하실 것이다. 그가 비처럼 내려오실 것이 시편에 예언되었다(시 72:6).

(3) 우리가 만일 의를 심는다면 긍휼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약속(갈 6:8)과 부합한다. 우리는 "자비의 양대로" (원의는 그렇다) 거두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부요한 긍휼을 따라 큰 보수가 될 것이다. 보상은 우리처럼 받기만 하는 인색한 피조물에게 어울리는 대로가 아니라 주기만하시는 무한하신 자비의 하나님께 어울리는 대로이다. 그것은 부채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공로로 거두는 게 아니라 자비로 거둔다. 그것은 파종된 것이요 심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주신다.

(4) 우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었다(13절). 우리의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런 일은 부지기수다. "너희는 죄를 섬기느라고 무척 많은 고통을 당하며 악의 불길 속에서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네게 이득이 될 일로 짐이 무겁다고 불평하며 날이 덥다고 원망하려느냐? 너희는 자신의 영혼을 망칠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원상으로 회복하지 않겠으며 무언가 해서 네 영혼을 구원하지 않겠느냐?"

(5) 우리는 죄에 대한 봉사에서 결코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악을 밭 갈고(이것은 죄라는 힘든 작업을 말한다) 죄를 거두었다(즉 범죄로써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타작 때까지 계속했다. 그렇지만 나을 게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가 사기였다. 그들은 거짓열매를 먹었다. 그 열매는 거짓에 불과하여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은 썩었다. 어두움의 일은 열매가 없는 일이다(롬 6:21; 엡 5:11). 죄의 소득은 죄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6) 죄를 섬김으로 얻는 우리의 위로와 신뢰는 기어코 우리를 낭패시킨다.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너는 피조물에게 의지하고 네 힘과 계략에 의존하였기에 악으로 밭가는 모험을 감행하였지만 네 희망은 너를 속였다. 그러므로 너는 돌아 와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여 여호와께 대한 네 소망이 너를 속이지 않으리라."

Ⅴ. 그들은 세상적 행위와 세상적 신뢰 때문에 전적인 멸망의 경고를 받는다(14, 15절). "네가 악을 심고 네 자신의 길을 의뢰하였으므로 국내의 봉기로든, 외적의 침입으로든, 네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그 중 어느 하나로도 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고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하물며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우랴."

1. 그들의 성읍들과 성채는 대적의 먹이가 된다. 그들이 신뢰하여 재물을 쌓아둔 산성들은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훼파한 것같이 탈취되고 약탈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은 근자의 어떤 사건을 가리킨다. 아마 살만은 일부 성읍이나 집(벧아벨은 아벨의 집이란 뜻이다)을 정벌한 살만에셀 왕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 그는 공략을 시작할 때 매우 가혹하게 행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수비대들을 두렵게 하여 속히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마리아가 그처럼 훼파되리라고 말씀하신다.

2. 거민들은 벧아벨에서 있었던 것처럼 칼에 부쳐질 것이다. "그 때에 어미는 자식 위에서 부숴질 것이다."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남기는지 주목하자. Jusque datum sceleri-즉 악은 제마음대로 다닌다. 인간이 그처럼 비인간적인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죄의 결과가 어떠한지 살펴보자. Homo homiui lupus-즉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가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양이기도 하다(Homo homini aquns).

3. 왕의 피도 평민의 피와 함께 임리할 것이다(15절).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에게서 이스라엘 왕국은 끝이 나고 끊어졌다. 이것은 그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반역으로 인해 멸절된 그 앞 왕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일은 새벽에, 아침이 갑자기 동터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행해질 것이다. 또는 이 일은 정해진 때에 행해질 것이다. 새벽은 제 시간이 되면 꼭 찾아온다. 또는 재난의 밤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날이 밝을 것으로 기대하는 새벽에 그들의 모든 소망은 그들의 왕의 돌연한 멸절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7절). 왕들은 우리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께는 역시 인간이어서 인간처럼 죽을 것이다. 끝으로 이 모든 파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유혈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는 "벧엘의 이같이 저희에게 행하리라" (15절)고 말씀하신다. 벧엘은 송아지가 있던 곳이다. 그들의 모든 악이 있는 것으로 일컬어진 길갈은 벧엘 바로 곁에 있었다. 거기에는 그들의 큰 악(원의:악 중의 악)이 있었고 죄의 총화와 본체가 있었다. 그들에게 이같이 행하고 이 모두를 대파괴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런 파괴를 초래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앗수르 왕이 너희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고 말하시지 않고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떤 화를 입든지 간에 그렇게 행하는 것은 바로 죄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요새가 약탈되고 파괴되는가? 여인과 자녀가 살해당하는가? 왕이 끊어지는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죄다. 죄는 영혼과 몸과 재산 등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벧엘이 너희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너를 징계하는 것은 네 자신의 악이며 너를 책망하는 것은 네 자신의 패역이다" (렘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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