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게 대한 기소장 (호세아 7:1-7)
혹자는 앞 장의 결어 부분을 취하여 본장의 서언으로 삼아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또는 돌이키려고 할 때 즉, 내가 막 그들에게 자비의 길로 돌아 오려고 할 때 심지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나라와 일반 백성)의 죄와 사마리아(조정과 수도)의 악이 드러나도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이스라엘의 현상태에 대한 일반적 개념(1, 2절). 그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펴보자.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로이 선처하려고 계획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병들고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병은 위중하고 악성 질병이어서 치명적일 가망이 있었다(사 1:6).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의사가 되겠다고 제의하셨고 치료를 떠맡겠다고 나섰다. 길르앗에는 자기 백성의 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향유가 있었다. 그들의 병세는 악했지만 절망적은 아니었다. 아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셨을 때는 희망조차 있었다.(1) 하나님은 그들을 개혁시키려 하시며 그들과 죄를 분리시키고자 하셨다. 그는 자기 율례와 선지자들로써 그들 중에 만연해 있던 부패를 깨끗이 숙청하시려고 하셨다.
(2) 하나님은 그들을 환난에서 구출해 내려고 하셨고 그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셨다. 몇 가지 치료가 시도되었고 때로는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는 듯한 기미도 보였다. 그들의 악화된 병이 회복될 듯한 희망마저 엿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리석음은 다시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죄 많고 불행한 영혼이 치료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기 죄와 불행 가운데서 멸망당한다고 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탓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치료하려고 하셨고 또 그럴 능력도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파멸을 자기 수중에 떠맡으시겠다고 제의하셨다. 하나님이 병든 교회와 국가를 치료하고자 하시는 적극성을 나타내시는 특별한 경우가 더러 있으며 그때 그것은 희망찬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위기를 주의 깊게 감시하여 활용한다면 사정이 아무리 악화됐더라도 생명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2. 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방해하며 자기 문에 빗장을 걸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료하려 하실 때에, 즉 그들이 개혁과 평강의 가능성을 보일 때에 그들의 죄와 악이 드러났다. 그들의 죄와 악은 하나님의 은총의 흐름을 막았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취소시켰다.
(1)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병세와 검진과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에, 숨겨지고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던 악이 드러나고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감춰졌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실 따름이다. 하나님은 외과의로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검진을 하시다가 그 상처가 치명적이어서 불치의 상처라는 것을 발견하시자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대해 친절하신 의도를 품고 그 병세를 살피러 내려오셨다가(창 18:21 의 표현처럼) 그들의 악이 너무나 흉악하며 그들이 죄악 중에서 너무나 완악하고 뻔뻔스럽고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서 자기가 의도하셨던 은총을 그들에게 떳떳이 베푸실 수 없었다. 죄인들은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모으셨을 테지만 그들은 원치 않았다.
(2) 그들을 개혁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을 때에 그때까지 억제되고 있던 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자기들을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의 조치를 기화로 그를 더욱 격동시켰다. 그들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이 베풀어졌을 때 악은 더욱 성급해지고 더 난폭해지며 더욱 높이 팽창하였다. 그들은 형편이 잘 풀리기 시작하자 더욱 교만해지고 방종하며 안심하게 되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좋은 일들이 우리를 향해 나아오고 있을 때 그 진로를 바꾸게 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베풀려고 하실 때 우리 스스로 나쁜 짓을 저질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우행이요 파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앙화를 입힌 것은 무엇이었는가?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궤사를 행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다(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그들은 서로 사기를 쳤다(다른 이들은 그렇게 읽는다). 또는 그들은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존경의 고백에서 그에게 위장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치료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치료받기 위해서 그의 지배를 기꺼이 받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 입으로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며 그 혀로 아첨을 한다.
3.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의 통치에 대한 불신이 그 모든 악의 근저에 깔려 있었다(2절).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며 심중에 이르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인데도 마치 그것을 보지 못하시는 듯이 행동하며 그의 이름이 질투의 신인데도 그 일을 주목하지 않으시기라도 하시는 듯 행동한다. 하나님은 결코 망각이란 것을 모르는 영원한 마음이시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그가 그것을 잊기라도 하신 듯이 행동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심판자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가 그 일을 계산하지 않으시기라도 하는 듯이 행동한다. 이것은 바로 죄인의 무신론이다. 하나님은 사물을 판단하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사물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판단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하나님을 무지하거나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며 그들 자신에게 대한 저주스런 기만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시 94:7).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은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아니, 누가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그 점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행위에 대해 생각해야 마땅할 때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대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들이 그 기만을 깨우칠 때가 올 것이다.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쌌다. 즉 그들은 마침내 악의 절정에 도달하여 그들의 죄가 그들의 사면팔방에 나타난다. 그들의 모든 이웃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이 그들을 포위한다. 그들은 환난에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탈출하지 하신다. 따라서 그들로 곤혹을 당케 하는 죄가 내 목전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내가 그 여러 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여러 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유하심으로써 자기 등 뒤로 던져버리시기까지는 우리 죄가 여전히 그의 목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여러 악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조만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예표가 되는 심판으로써 그들과의 다툼을 시작하셨다. "도둑이 안으로 들어오며 밖에서는 강도떼가 노략질한다" (흠정역). 혹자는 그들이 서로 도둑질하고 노략질했다는 것을 그들의 악한 사례로 이해한다. Nec hospes ab hospite tutus 즉-주인과 손님이 서로 두려워하며 서 있다.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비적들이 암약했고 그 도둑들은 그들의 집과 상점을 털며 호주머니를 훔쳤다. 강도 떼 즉 외국의 침입자들은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며 밖으로 노략질했다. 이스라엘의 치료는 요원했다. 도둑과 약탈자들은 날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사처를 남겼고 이 모든 것은 죄의 결과였으며 하나님께 강도 행위를 한 데 대한 벌이었다(사 42:24; 말 3:8; 11).
Ⅱ. 조정 즉 왕과 방백 그리고 그들 주위 사람들의 죄가 특별히 기술되고 있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이 나오고 있다.
1. 왕들과 방백들은 백성의 악과 모독을 기뻐했고 이로써 그들은 대담하게도 더욱 악한 일을 행했다(3절).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악한 법과 악한 선례를 따르는 것을 보고 즐거움을 느꼈다. 백성들은 그들의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부도덕의 다른 본보기를 따랐다. 백성은 악한 길을 걷고 있는 그들에게 아첨과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헤롯은 그의 악이 백성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을 알자 그 악행을 계속했다(행 12:3). 하물며 백성이랴! 특히 그들은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했다. 그들은 방백의 총애자들에게는 거짓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방백이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거짓 비난과 혹평을 마구 퍼부어 대었다. 중상 모략과 악의에 찬 이야기에 기쁨을 표시하는 자들 주변에는 그런 이야기꾼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며 거짓말로 그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잠 29:12 참조).2. 조정에는 폭음과 주연이 아주 풍성하다(5절). 그들에게는 왕의 날 즉 왕의 탄생일이나 등극일이 즐거운 날이었다. 그들은 아마 그런 날을 기념일로 지켰을 것이다. 또는 그 날은 왕이 정한 공휴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왕의 날이라고 부른다. 방백들은 그날 회집하여 왕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올리며 왕을 그들 중에 모셔다가 즐겁게 하며 술병으로 병나게 만들었다. 왕은 보통 과음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큰 축제일이 되면 왕은 방백들의 교만한 농간과 좋은 술의 유혹과 무리들의 흥청거림에 넘어가서 과음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강조하는 건강의 축배로 과음하게 되었다. 왕은 과음에는 좀체로 익숙지 못했으므로 병이 나게 되었다(흠정역: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병으로 그를 병나게 하며). 그것은 범죄 곧 crimen loeesoe majestatis-즉 대역죄로 규탄되어 마땅했다. 그들은 왕에게 강요하여 병나게 한 때문이다. 그날이 그들의 왕의 날이라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들은 왕을 존귀케 한다고 하면서 그를 극도로 명예롭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그에게 큰 모욕이 되고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하물며 관을 머리에 쓴 왕에게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랴! 이웃을 취하게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15) 지위가 높은 자면 자일수록 취한다는 것이 더 큰 수치가 된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지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다(잠 31:4, 5). 술취하는 죄가 인간에게, 특히 왕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관찰하자
(1) 건강상. 그것은 그를 병나게 했다. 숙취는 자연스런 생리를 어긋나게 강요하는 압력이다. 술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홀린다. 취하지 않을 땐 아주 멀쩡한 사람도 취하면 전혀 딴 사람이 된다. 술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그들의 영적 복락과 영원한 행복에 손상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재적 몸에도 혼란과 질병을 가져다준다.
(2) 명예상. "왕은 이처럼 대취하면 오만한 자로 더불어 악수하는 도다." 일국의 통치를 맡은 그가 술이 취하게 되면 자신의 통치도 주체하지 못할 뿐더러 다음 두 가지도 잊게 된다.
[1] 왕으로서의 품위. 그는 함께 앉으면 추문을 일으킬 광대와 익살꾼과 친숙하게 됐다.
[2] 왕의 도리. 그는 무신론자나 종교를 모독하는 오만한 자들과 연합했다. 그는 왕으로서 마땅히 그런 자들을 침묵시키며 면박을 주어 수치스럽게 해야 했다. 그는 오만한 자 즉 불경건의 극치에 도달한 자들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오만한 자들과 밀착하여 그들처럼 말하고 행하며 자기 권세를 행사한다. 그는 그들과 협력하여 자기 통치의 손을 내민다. 선함과 선한 자는 왕왕 주정뱅이의 노래가 된다(시 69:12; 35:16). 왕이 어려 자기를 술취하는 자로 더불어 악수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전 10:16 참조).
3. 조신들 사이에는 음란과 불결이 팽배해 있었다. 이것은 4, 6, 7절에서 언급되며 술취함에 대한 책망은 그 중간에 나온다. 술은 욕망의 불을 일으키는 기름이다(잠 23:33). 간음하는 자는 육체의 정욕으로 불 붙은 자이며 여기서는 몇 번이고 빵 굽는 자가 달궈 놓은 화덕에 비유되고 있다(4절). 그들은 그 마음을 화덕같이 예비한다(6절). 그들은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 있다(7절).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음란한 마음은 가열된 화덕과 흡사하다. 음란한 욕망과 애욕은 화덕을 덥히는 연료와 같다. 음란은 안에서 일어나는 불이며 그 자체 내에 열을 보유한다. 그래서 간음자와 밀통자는 로마서(롬 1:27)의 표현처럼 음욕이 불일 듯한다. 화덕의 열은 강하다. 특히 본문의 표현은 그렇다. 화덕을 달구는 자는 불을 일으켜서 쉬지 않고 계속 가열시킨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발효시킨 뒤 화덕에 넣기 직전까지 가열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표현은 죄다 음란이 최고로 달궈진 때의 화덕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그것은 빵 만드는 자에게 너무도 뜨거운 화덕과 같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 화덕은 너무도 뜨거워서 불을 일으키는 자는 빵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에는 열을 좀 식히기 위해 가열작업을 중지한다. 음란한 마음의 욕망은 이와 같이 뜨겁다.
(2) 음란한 자는 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회를 기다린다. 그들은 마음을 화덕처럼 준비하고는 먹이를 잡기 위해 엎드려 기다린다.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란다(욥 24:15). 그들은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에 일어나는 것 같다. 빵 만드는 자가 화덕에 불을 피우고 충분한 연료를 넣은 뒤 침상으로 가서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화덕이 아주 뜨거워져서 빵을 만들기에 안성마춤으로 되어 있다. 그와 같이 이들 악한 백성들은, 모종의 악한 계교를 꾸미고 탐욕과 야심과 원한이나 음란에 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럴 때는 그 악을 행하는 데 완전히 심취되어 비록 일시적으로는 그 욕망을 억누를지라도 부패한 애욕의 정염은 안에서 여전히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마치 구멍만 있으면 불길이 새어나오듯 기회가 오면 그들의 악한 의도는 즉시 돌출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 화덕같이 뜨겁다. 마음속의 욕정은 화덕 안의 불길과 같아서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이처럼 악한 애욕으로 자기 자신을 뜨거운 화덕같이 만드는 자들은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불을 끄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달궈진 화덕같이 되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극렬한 풀무 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말 4:1).
4. 그들은 개선과 교정에 알맞은 방법을 거역한다. 그들은 그 재판장들을 삼킨다. 그들 중에는 선량한 재판관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재판관들은 그들이 가열시켜 놓은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재판관들에게 제동을 걸고 충돌하며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며 자칫하면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다. 아마 그들은 선한 재판장들을 돌로 쳤으리라. 또는 혹자가 생각하듯 그들은 하나님을 격동시킴으로써 사법의 축복을 박탈당하며 모든 것을 혼란의 도가니 속에 몰아 넣었을 것이다. 그들의 왕들은 모두가 차례로 엎드러지고 왕들의 가문도 그들과 함께 넘어졌다. 왕국은 혼란의 와중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사분 오열 상태로 나뉘며 대량의 유혈 사태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에는 불만과 원한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분노와 악의로 화덕같이 뜨거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재판장을 삼키고 왕들을 엎드러지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진다(잠 28:2). 그러나 이 모든 환란과 무질서의 와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런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이 자기들을 치려고 펼쳐진 것을 보고 치지 않으시기를 기원하며 분발해서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하나도 없다(사 64:7). 환난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자는 죄로 가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 중에서 강퍅해진 것이다.
에브라임의 홀린 죄 (호세아 7:8-16)
우리는 이스라엘 조정의 부패상과 사악한 형편을 관찰했으므로 이제는 나라 전체의 모습을 알아보게 되지만 그 역시 별반 나을게 없다. 정수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병의 침범을 받아 성한 데가 하나도 없다.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사마리아의 악뿐만 아니라 에브라임의 죄도 드러났고 방백의 악뿐만 아니라 백성의 죄도 발각되었는 데 여기에는 다양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Ⅰ.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완전하고 특유한 백성이 되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하였다(8절).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별하셨듯이 그들 스스로 이방인과 구별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열방에 혼잡되고 그들과 연합하며 그들에게 동화되어 자기의 특성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홀로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웠다(시 106:35). 그들은 열방사이를 오르내리며 다른 이방을 대적하기 위해 한 이방의 도움을 청했다(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하나님만 고수했더라면 어느 이방민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2.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한 쪽은 타고 다른 한 쪽은 밀가루 반죽 그대로여서 그 어느 쪽도 사용할 수 없는 케이크와 같다. 아합 시대처럼 지금도 그들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서성거린다. 때로는 하나님을 항해 열성을 내다가도 다른 때에는 바알을 향해 뜨거워진다. 얼마간 독실한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자기 모순과 불일치로 일관하며 언제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왕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슬프다.
Ⅱ. 그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심판은 그들의 파멸을 위협하고 있었다(9절). 다음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좀과 썩게 하는 것 같으셨다. 그들은 일면 외국인의 침식으로 소리없이 그리고 서서히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우고 부식되었다. 이방인들은 그의 재력과 재물을 탕진시키며 그의 수효를 감소시키고 땅의 소산물을 소모시켰다. 공공연한 전쟁으로 그들을 삼키는 자도 있었다(왕하 13:7). 평화와 수호 조약을 핑계로 막대한 재물을 착취하며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더욱 많은 대가를 바쳐야 했다(왕하 16:9). 이런 일은 에브라임이 이방과 혼합되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과 뒤섞이도록 허용함으로써 얻은 결과였다. 그들은 에브라임이 의지하고 믿던 것을 삼켰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시 52:7) 자들은 이방인에게 곧 삼킬 것으로 자기 힘을 삼는 자이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비정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다. 백발이 얼룩얼룩하게 된다. 즉 한 나라의 쇠미의 슬픈 징조가 여기 저기 나타난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듯(히 8:13) 그 나라에는 환난과 우환이 그치질 않는다. cura facit canos-즉 근심은 머리를 잿빛으로 변화시킨다. 살구나무가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아서 색이 바래지는 것처럼, 이것은 악한 날이 오고 있으며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전 12; 1, 5 참조).2. 그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했다. "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를 치기 위해 펼쳐진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이 들려 있지만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사 26:11). 그는 자기 파멸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방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보다 작은 심판 아래서도 우매하다는 것은 보다 큰 심판의 도래의 전조라는 데 주목하자.
Ⅲ. 그들은 패역하게도 자기들의 악한 길로 계속 행하였고 책망을 받았음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10절). 전과 다름없이(5:5)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된다. 겸손케 하는 섭리 아래서도 그들의 마음은 겸손케 되지 않으며 그들의 욕망은 억제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은 얼굴의 교만 때문이다(시 10:4). 그들은 회개와 개혁으로써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으며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믿음과 기도로써 그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한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갈 때까지는 결코 무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헛되이도 다른 자에게 구원을 구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Ⅳ. 그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자기 꾀에 도취하여 매우 그릇된 방법을 취했다(11, 12절).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원의:마음)가 없다. 비둘기처럼 무해하며 원한을 품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비둘기처럼 어리석고 지혜가 없으며(무심하며) 자기를 방어할 줄도 모르고 자기 안전을 도모할 줄도 모른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1. 이 비둘기의 어리석음은 다음과 같다.(1) 이 비둘기는 제새끼를 빼앗기고도 슬퍼하지 않고 다시 그 자리에 둥우리를 지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은 원수에게 자기 백성을 포로로 빼앗기고도 느낀 바가 없이 자기들을 야만스럽게 학대하는 자들과 계속해서 상종한다.
(2) 이 비둘기는 미끼에 쉽사리 유혹받아 그물에 걸리며 다른 조류들처럼 자기 위험을 식별할 마음도 지혜도 갖고 있지 않다(잠 1:17).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잠 7:23) 그들은 자기들을 파멸시킬 인접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다.
(3) 이 비둘기는 놀램을 당할 때 비둘기 집에 머물고 있을 용기를 갖지 못하고 날개짓을 하며 이리저리 배회한다. 자기 주인의 세심한 보호 아래서 안전을 기할 수 있는 비둘기 집을 떠나 한 곳에서 피하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도피처를 삼지만 결국 자신을 더욱 더 많이 노출시키게 된다. 이 백성 역시 그러했다. 고난을 당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며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 같이 하나님께로 날아오지 않았다(사 60:8). 하나님은 공격하는 온갖 맹금류로부터 그들을 안전히 지켜 주실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뛰쳐나와 애굽을 향하여 도와 달라고 부르짖으며 헛된 원조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앗수르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기도로써 하나님에게서 보다 가까운 보금자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천국에 두고서 피난과 구원을 피조물에게 의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지각없는 짓이다. 피난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지각이 없고 지혜가 없는 백성이다.
2. 이 어리석은 비둘기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12절). "저희가 애굽과 앗수르로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들 위에 치리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거하여 살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추격을 각오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그들은 올무에 걸린다. "내가 그물을 그 위에 치며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리라. 이는 저희로 자기 어리석음을 보며 돌아 것일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은 흔히 피난처를 기대하던 곳에서 올무를 발견하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2) 그들은 낮춤을 당한다. 그들은 외국 동맹군을 자랑하고 신뢰하면서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떨어뜨리겠다. 공중의 새처럼 아무리 높이 날더라도 나는 맞아 떨어지게 하겠다." 하나님은 스스로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는 자들을 떨어뜨리실 수 있으며 떨어뜨리실 것이다(옵 3, 4).
(3) 그들은 어리석음 때문에 혼찌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저희를 징계하리라." 우리가 피조물을 신뢰하다가 맛보는 실망은 꼭 필요한 훈련이거나 징계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로써 우리는 다음 번에는 더 지혜로와질 수 있다.
(4) 이 모든 일로서도 성서는 그대로 성취된다. 그것은 그들의 공회가 들은 대로이다. 인간의 도움이 헛되며 인간에게 도움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도 여러 번 들었으며 그들의 종교적 집회에서 봉독과 설교와 노래로써도 부지기수로 들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도 하나님이 그들의 악함에 대해 어떤 심판을 내리시리라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이제 들었던 대로 보게 될 것이며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공회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 주목하고 그 말씀의 규제를 받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공개적이고도 명백한 경고를 받았다는 것은 죄인이 정죄 시에 하나님을 의롭게 인정시킬 것이며 그들의 죄를 가중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회중이 여러 번 들었던 것이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아, 네가 그 일이 어떻게 될지를 경고받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제 너는 그것이 헛된 말이 아님을 보는도다" (슥 1:6 참조).
Ⅴ.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했고 그가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시기 위해 취하신 여러 가지 방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13-15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자애롭게 대하셨던가! 그는 자기 백성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군주와 같으셔서 그들의 번영을 여간 괘념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을 구속하셨다(13절). 처음에는 그들을 애굽 땅에서의 구출하셨고 그 뒤로는 그들을 많은 고통에서 건지셨다. 그는 그들의 팔을 연습시켜(동여매어, 흠정역) 강건케 하셨다(15절). 골절되거나 탈골된 팔처럼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외과의가 부러진 뼈를 접합시키듯 그들을 다시 조정하셔서 동여매시고 강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수리아에게 승리하게 하셨고(왕하 13:16, 17) 그들의 해변을 수복시켜 주셨으며(왕하 14:25, 26) 전쟁케 하시려고 능력으로 그들에게 띠를 띄우셨다(시 18:39). "비록 내가 그들을 징계했을지라도(그렇게 읽는 자도 있다), 내가 어떤 때에는 그들의 잘못을 징계함으로써 그들을 가르치며 다른 때에는 그들의 팔을 강건케 하여 그들을 구원할지라도, 내가 그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좋은 수단과 나쁜 수단을 다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비도 심판도 통하지 않았다.2.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위는 여간 뻔뻔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이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악행을 계속한 모든 사람들의 각성과 겸손을 위해서이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극악한지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석하시며 분개하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1) 그는 그들에게 구혼하시며 스스로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으나 그들은 언제나 신실한 친구로 나타나셨던 그가 마치 원수이기라도 한 듯,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를 떠나듯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유리하였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피조물에게서 안식을 얻지 못하며 정착지도 찾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할 뿐이다. 그들이 하나님 예배를 타기하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도망치며 그에게 대한 충성에서 물러났을 때가 곧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친 때다.
(2) 그는 그들에게 자기 율법을 주셨다. 그의 율법은 전부가 다 공정하고 거룩하고 선했다. 그는 그 율법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길에 두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들은 높은 손과 곧은 목으로 범죄했고 고의적으로 그리고 터무니없이 죄를 지었다(글 뜻은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의 울타리를 돌파했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3) 그는 자기의 진실을 그들에게 알리셨고 온갖 가능한 증거를 다 들어 그들에게 대한 자신의 진지한 호의를 입증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거스려 거짓을 말했다. 그들은 거짓 신들을 세워 하나님과 경쟁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부인했고 그를 인정치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를 거짓으로 말했다(렘 5:12). 그들은 선지자를 통해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배척하며 비록 죄 중에서 계속 행할지라도 자기들은 평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직접적인 반향이었다. 그들은 위선적인 신앙 고백과 신앙의 과시와 개선의 약속으로 여호와께 거짓을 말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자기에게 대한 거짓말로 간주하셨다.
(4) 그는 그들의 의로우신 주요 왕이셨다. 그는 항상 공평으로 야곱을 다스리셨고 공공의 이익을 위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다(14절).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들고 그에게 대항하며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다른 신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5) 그는 그들을 위해 복리를 계획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악을 꾀했다(15절). 죄는 해로운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해이며 그의 주권과 존엄에 대한 반역이다. 이 말은 죄인이 자기창조주께 가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힘껏 가해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깜짝 놀라거나 부주의로 죄를 짓지 않고 계획적으로 죄를 안출해 내는 것은 여간 악한 게 아니다. 포코크 박사가 인용하듯 유대인에게는 "범죄의 생각이 범죄보다 더 악하다" 는 격언이 있다. 앙화를 계획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앙화를 입히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영국법에서는 국왕 시해의 음모와 왕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대역죄에 해당한다. 악한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그것이 비록 헛된 일로 판명되더라도 그 생각에 대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이에 대한 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화 있을진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13절).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은 화가 따라온다는 것과 그들이 흉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그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잇달아서 "패망할진저" 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의 화는 실질적 효과를 갖는다는 데 주목하자. 패망은 그들을 선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손의 심판은 그의 입의 심판을 확증시킨다. 하나님이 저주하고 화 있겠다고 선언한 자들은 저주받으며 참으로 화를 입는다.
Ⅵ. 그들은 헌신적 신앙을 가장했지만 그 신앙은 진실하지 못했다(14절).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려 펼쳐졌을 때 그들은 다소 하나님께 구하긴 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시자 그들은 그를 찾았다.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나이다(사 26:16).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위선이었다.
(1) 그들은 개인적 환난 중에서 은밀히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성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을 때에도 성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침상에서 고통으로 징계받고 많은 뼈가 강렬한 고통에 시달릴 때 (아마 그들은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울부짖으며 신음하며 기도 형식으로 호소했다. 아마 그들은 선한 말을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항에 걸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살피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심(원의:마음)으로 부르짖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기에게 대한 부르짖음으로 간주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그의 마음이 믿음과 열성의 기도를 했을 뿐인데도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을 들었다(출 14:15). 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많은 말을 했지만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옳지 못했고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그의 존귀를 위해 몰두하지 않았고 그에게 대한 봉사에 전념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영혼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정수다. 이런 본질을 갖추지 못한 기도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골라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욥 6:26). 그러나 그런 본질을 갖춘 기도라면 비록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하더라도 열납받을 수 있는 기도가 된다.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전혀 기도하지 않는 자라는 점을 주목하자.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기도를 시인하사 기뻐 받으시기는커녕 그것을 슬피 부르짖는 것이라고 부르신다. 흑자는 그것이 그들의 시끄러운 기도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 바알에게 하던 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는 그것은 그들의 기도 속에서 새로 나온 야수 같은 격렬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그들은 돌을 향해 으르렁대며 채찍을 보고 울부짖으면서 그 손을 주목하진 않았다. 또는 이것은 그들의 위선적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긴 고사하고 도리어 그를 노엽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의 기도에 노하셨다. 궁전(흠정역, 성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암 8:3).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재난을 비웃으실 것이다. 또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그들이 그의 권세를 비웃었던 까닭이다.
(2) 공공의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을 은총을 탄원하려고 회집했을 때도 그들은 위선적이었다. 그들은 유행을 좇아 스스로 모였다. 전체적 애곡의 때에 거룩한 회를 소집하는 것은 항용있는 일이었다(습 2:1). 그러나 그들이 모인 것은 곡식과 포도주를 위한 기도회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이 원하고 강우 부족으로 감수될 까봐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그들이 목하 당하고 있던 심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은혜를 위해 간구하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회개를 주시며 그들의 죄를 사유해 주시고 진노를 돌이키시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아 가지 말도록 하기 위해 모여 기도했을 따름이다. 세상적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현세적 자비에만 탐욕을 부리며 오직 현세적 심판만 두려워하여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 이상의 다른 것은 감지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2. 그들은 개혁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도 진실한 게 아니었다(16절).
(1)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죄가 나온다. "저희가 돌아온다." 그들은 마치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가장한다. 그들은 회개하는 체하며 자기 행위를 교정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여긴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네가 돌아 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렘 4:1) 그들은 충성에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나를 향해 돌이킬 뿐만 아니라 내게로 돌아 오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들의 이런 가식은 그들을 속이는 활처럼 만든다. 속이는 활은 쏘기에 알맞은 듯이 보이며 굽거나 당기는 데에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그 활에 힘이 실리면 활도 시위도 끊어지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긴 커녕 궁수의 발앞에 떨어지고 만다. 회개와 개혁을 향한 그들의 시도도 그와 같았다.
(2) 이스라엘 방백의 죄가 나온다. 그들이 책망 받는 것은 그 혀의 거친 말(그 혀의 분노, 흠정역)이다. 방백들은 일이 잘 안 될 때면 하나님과 그 섭리와 자기들 주위의 모든 자들을 헐뜯고 언쟁하였다. 그들은 자기들 문제대로 무슨 말을 해도 좋으며 노발대발하며 호령하며 저주하며 욕하며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 자기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보다 높은 하나님이 계시며 그는 그 혀의 거친 말에 대해 그들을 부르실 것이며 그들 자신의 말이 자기들 위에 떨어지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3) 이스라엘과 그 방백들에 대한 벌이 여기에 나온다. 방백에 대해서는 그들이 적군의 칼이나 자기 백성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는 벌이 규정된다. 어떤 방백은 적군의 칼날에 엎드러질 것이며 또 다른 방백은 자기 백성의 칼에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인들에게 도망하여 구조를 청할 때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될 일이다(11절). 그들의 죄와 벌은 그들을 주위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역하며 속이려 들으며 사람들에게 대한 태도에서 격정적이고 난폭한 자들은 반드시 그 이웃에게 조롱거리가 된다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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