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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스라엘의 죄 (호세아 2:1-5)

어떤 이들은 본장의 첫 마디를 앞 장의 끝맺는 말로 삼고 여기에 나오는 약속들을 거기에 추가시킨다. 이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겠다는 큰 일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를 중심으로 함께 모이게 될 때는 기뻐서 의기양양하여 서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갈데아 주석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내 백성아! 위로를 얻으라, 위로를 얻으라'고 말해야 했다는 해석을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에게 암미라 루하마라 하라. 그들을 다시 그렇게 부르라. 그들은 이상 더 로암미와 로루하마라는 수치 아래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내 백성이 될 것이며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은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를 것이며,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인정할 것이며, 그런 이유로 서로를 포옹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여 자기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게 하고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하게 할 것이다.

아니면 이 말씀은 그 다음에 오는 말과 통일성을 갖는 것 같으므로 각성과 겸비의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미(2절)는 형제자매(1절)와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열 지파의 교회, 백성의 단체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형제들이었다. 또 어미는 특별한 의미에서 우두머리들이나 지도자들과 동일시된다. 그들은 나머지 무리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어머니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어미와 쟁론해야 할 자녀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다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들 중에 있으면서 그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고 쳐서 중언하던 경건한 자들. "경건한 자들이여! 담대히 나가서 백성 중에 막연한 우상 숭배와 부패를 쳐서 증거하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은 바알 숭배자와 쟁변하라. 여기 제시된 논증으로 그들을 각성시키려고 노력하라." 개인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예배에 대한 공중의 모독을 각자의 자리에서 신원하며 변호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자녀들은 부모라도 잘못하면 겸손히 절도 있게 그들과 논쟁할 수 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요나단은 다윗에 대해 사울과 쟁론하였다.

2. 그들 중에 있으면서 그 시대의 재난에 동참하던 수난자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불평하지 말고 언쟁하지 말며 하나님이 인자한 아버지처럼 대하지 않고 자기들을 가혹하게 다루시기라도 한 듯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 쟁론하고 비난해야 했다. 비난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바로 그들의 어머니였다. "너희 어미는 너희 허물을 인정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사 50:1 비교). 그것은 그녀의 자업자득이며 너희는 너희의 모든 불행을 너희 어미 탓으로 돌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기 어미와 어떻게 쟁론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Ⅰ. 그들은 그녀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상기시켜야 했다. 그녀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어떤 자비를 베푸셨고 그녀를 얼마나 총애하셨으며 또 계속해서 총애하시려고 계획하셨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야 했다. 그들은 형제 자매에게 자기들이 암미와 루하마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그의 자비의 그릇이었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1절).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 탓이 아니었다면 조용히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에게 대한 의존은 우리의 배반과 반역을 크게 악화시키는 것임을 유의하자.

Ⅱ. 그들은 하나님과의 혼약 위반을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녀를 꾸짖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녀를 더 이상 자기 아내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도 그녀의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 주어야 했다.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하라. 저는 영적 음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모든 명예와 위로를 상실했으며 그를 격동시켜 이혼장을 주게 만들었다고 말하라." 우리를 일깨워서 회개시키는 데는 하나님의 격노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격노케 되어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시고 우리를 일축해 버리신다. 우리는 바로 그 격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배격하겠다고 경고하실 때는 우리가 주위를 돌아보고 어떤 경로를 취할 것인지 생각할 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남편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점을 그녀에게 따끔히 말해야 했다(5절). "저희 어미는 행음하였다. 저희 회중은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며 행음하였다(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의 부추김을 받아 우상을 따라 행음하였다.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으니 우상을 만들고 예배하였다." "우상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불리운다(9:10). 우상 숭배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는 것(사 44:19)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대한 수치이기도 하다. 또는 이것은 죄인의 수치감을 느끼지 않고 뻔뻔스럽게 죄를 지으며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렘 6:15)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럽게 하였으니 즉 그녀는 자기를 보는 모든 자로 하여금 그녀를 부끄러워하게 하였다. 그녀 자신의 자녀들은 그녀와의 관계를 부끄러워한다."

Ⅲ. 그들은 그녀에게 하나님께 대한 지독한 배은 망덕을 들어 책망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녀의 은인이요 시혜자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며 이것을 이유로 내세워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충성을 우상에게 바쳤다(5절).

이 점에서 그녀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다." 이는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을 내게 준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녀의 악한 결심.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들과 섭리를 통해 그녀를 우상 숭배로부터 이끌어 내겠다고 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를 고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어떤 반대되는 것이 제안되더라도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나 나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자들을 따르겠다" 고 말했다. 갈데아 주석은 이것을 이스라엘이 동맹을 요구하고 의지하던 나라들로 이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던 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섬기던 우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우상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자기들의 연인이라고 부른다.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또 죄짓기로 결심하는 자들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죄를 계속 짓겠다고 공공연히 발언하며 시인하는 자들이다. 우상 숭배자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자. 그들은 생명조차 갖지 못한 우상을 자기들의 연인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우리의 연인이라고 부르기를 배우자. 하나님께 대해 좋은 생각을 유지하며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높이 평가하자.

2. 이 결심의 근거가 되는 큰 실수.

"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겠다. 왜냐하면 저희가 신체 유지에 필요한 내 떡과 내 물을 주며 몸을 감싸는 데 필요한 내 양털과 내 삼을 내게 주며 즐거운 것들 곧 내 거름과 내 술을 내게 주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세상적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감각적 물질이 가장 좋은 것이 되며 가장 강력한 매력을 갖는다. 그들은 이런 것을 추구하는 데는 자기들이 무엇을 따라 가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규례와 법도를 그들 앞에 제시하셨는데 (신 4:8) 그것은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만한 것이요, 꿀보다 더 단 것이었다(시 19:10). 또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은총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보다 더 한 기쁨을 마음에 줄 터였다 (시 4:7).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좋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름과 마실 것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했는가? 그리로 그들은 최고의 애정을 보낼 터였다. O curroe in terram anima et caelestium inanes - 즉 오! 타락한 마음이여! 땅을 향해 구부러지고 천적인 모든 것은 전혀 없도다.

(2) 쾌락과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학대이며 모욕이다. 그는 우리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것도 주신 분이시다. 우상 숭배자들은 세레스(Ceres)를 곡식의 여신으로 삼고 바카스(Bacchus)를 술의 신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어리석게도 자기들에게 낙토와 그 땅에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신 8:18)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3) 많은 자들이 세상적 번영으로 인해 죄 중에서 강퍅해진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동안 이런 물질들을 풍성히 소유했고 따라서 그런 것들이 이들 우상으로부터 시여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가 하늘 여신(황후: 흠정역)에게 분향할 때에는 식물이 풍부했다" (렘 44:17, 18)고 설파했다.

Ⅳ. 그들은 그녀에게 회개하고 개혁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녀가 음행을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와 의절할 것이다.

" 그러므로 저로 음란을 제하게 하라" (2절). 그녀에게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라. 우상이 비록 친근하다곤 하나 아직까지 헤어질 가능성은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개선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인과 벌이는 변론은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저로 그 음란과 음행을 제하게 하라." 여기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말이 중복되며 복수형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들이 범한 음행의 풍성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려고 하시기에 앞서 그들은 이 모든 음행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로 하여금 마치 목불인견의 가증스런 물건인 듯 음행을 보지 않게 하라. 그녀로 음행에게 "여기서 나가라" (사 30:22)고 말하게 하라. 그녀로 그 얼굴과 가슴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녀로 창녀들처럼 행하지 않게 하라. 얼굴 화장과 젖가슴의 노출로 악한 심성을 드러내거나 타인을 악에 꾀어 들이는 일을 하지 않게 하라. 이와 같이 그녀로 하여금 우상 숭배의 온갖 희열과 쾌락을 부과시킴으로써 자기도 열중하고 남도 거기에 끌어들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그녀로 이 모든 것을 제하게 하라. 온갖 집요한 죄의 길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음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런 음행을 회개하고 거기서 돌이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다.

1. 진정한 참회자는 공공연한 죄 뿐만 아니라, 은밀한 죄도 버릴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음행 뿐만 아니라 유방 사이에 은밀히 자리잡은 음란도 제거할 것이다. 그 죄는 혀 밑에서 구르는 달콤한 떡 조각같다.

2. 그들은 죄의 외면적 기회를 피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죄의 경향성도 억제할 것이다. 우상 숭배자는 자기 눈을 따라 행했다. 그들의 눈은 우상을 따라가며 행음했다(겔 6:9; 신 4:19).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 눈 앞에서 제해야 했다. 이는 그들로 우상을 섬기고 싶은 유혹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포도주가 붉을 때 그것을 쳐다보지 말라" (잠 23:31).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끼가 뿌리에 놓여져야 한다. 마음의 부패한 본성과 기질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은 가슴(유방) 사이에서 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가슴의 제일 깊은 곳, 가장 높은 곳을 점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아 1:13).

Ⅴ. 그들은 그녀가 만일 회개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 결과는 틀림없이 치명적일 것이며, 완전한 멸망이 되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기리라!" (3절) 이것은 여기서 판결 형식으로 나오지 않고 경고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저로 음란을 제하게 하여 내가 저를 벌거벗기지 않게 하라"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죄인들이 자격만 갖추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경고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엄정하고 질투하는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다루듯 그녀에게 대하시리라는 것이다. 자기 집안을 잡종의 혈통으로 가득 채우고도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부정한 아내를 다루듯 하실 것이다. 그는 그녀와 그 자녀를 문 밖으로 쫓아내어 구걸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4절). 민족의 재난에 동참하는 개개의 사람들과 신진 세대들은 파멸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란한 자녀이며 그 열조의 유전으로 받은 헛된 행실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기고 굶주리게 되리라는 것이 경고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이 떡과 물과 양털과 삼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물건들을 박탈하심으로써 그런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실 것이다.

1. 그녀는 옷을 벗길 것이다.

"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기리니, 저가 자랑하고 또 연애하는 자들의 눈을 끌려던 모든 장식물을 내가 벗길 것이다. 또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가 세상에 들어오던 때처럼 벌거벗겨서 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욥 1:21).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추위와 수치에 노출시키리라. 부끄러운 일을 행한 저는 수치를 당해 마땅하다(5절)."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나 거지와 다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날은 바로 그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그 때처럼 비천하고 불행한 상태로 환원시키겠다고 위협하신다. 그들에게 이웃의 존경을 얻어 주거나 멸시로부터 그들을 숨겨 준 것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겔 16:4, 39 참조).

2. 그녀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기 명예 뿐만 아니라 위안물과 필수품도 빼앗길 것이다. 그녀는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광야같이 될 것이고, 마른 땅같이 되어 목말라 죽게 될 것이다. 자기 연인들이 준 것이라고 하여 그 떡과 물과 기름과 술을 그토록 자랑하던 그녀는 필수적 음식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그 땅은 거민들에게 물질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설령 땅이 산물을 공급한다 해도 그것은 대적에게 탈취되어서 정당한 소유주가 양식 부족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그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내가 저를 광야에 있던 때처럼 그대로 만들 것이며 황무지에 있을 때와 같이 만들 것이니 거기서는 저가 때때로 목말라 죽을 뻔하였다. 3절 전반부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저를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처음에 민족으로 형성된 것은 막막하고 황량한 광야에서였던 때문이다. 그들은 그 조상들처럼 비통한 처지에 있게 될 것이다. 그 조상들의 시체는 광야에 널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악화된 형편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자손들이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도록 보존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이는 저희 어미가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심판의 위협 (호세아 2:6-13)

하나님께서는 패역하고도 우상 숭배하는 이 백성에게 계속해서 위협하신다. 그가 경고하시는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으시기 위함이요, 그가 경고하시는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으시기 위함이요, 그가 위협하시는 것은 치지 않으시기 위함이다.

"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칼을 가실 것이로다" (시 7:12). 그러나 인생이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칼을 칼집에 꽂으실 것이다. 그들은 회개치 않으며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임했다. 그것이 미리 경고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악함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신적 판결의 집행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대한 충고로 기록되고 있다.

Ⅰ. 그들은 당황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모든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고 모든 기대가 무산될 것이다. 이것은 6, 7절에서 경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경고에는 하나의 약속이 첨가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이것이 그들이 우행을 깨우쳐 주며 그들을 의무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란 약속이다. 그와 같이 하여 선이 악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자비의 표징이다. 이것이 그 환난의 복된 열매요, 결과이므로 그 예고나 환난 자체를 위협이라고 불러야 할지 약속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하기 어렵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길에서 어려움과 물의를 야기 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공적 계획이나 일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그 계획이나 일로 진전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리라. 가시와 엉겅퀴는 죄와 저주의 산물이어서 할퀴고 찢고 성가시게 한다. 나는 그런 방해물로 길을 막겠다."

우리의 길이 그런 방해물로 막힐 때는 우리의 발전이 저지되고 우리는 가던 길을 돌아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겠다. 나는 내 동맹을 추구하며 외국 세력과의 연합을 의지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는 이 모든 계획에서 좌절을 당할 것이며 그 시도가 진전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시로 그 길을 막을 것이다. 그래서 안 되면 나는 담을 쌓을 것이다."

작은 난관이 극복되어 그녀의 계책을 깨뜨리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어려움을 내세우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하실 때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 길을 찾지 못할 그런 울타리와 담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이 바뀌고 있다.

즉 "내가 네 길을 막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라" (흠정역: 역주). 이것은 성서에 흔히 나오는 것으로 완곡한 표현 방법이다. "죄인아, 너는 내가 네 길을 막는다는 것을 주목해라. 죄인의 방관자된 모든 자들아, 너희는 이 일의 결과가 어떤지 주목하라. 너희는 저가 자기 길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여러 길 중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찾지도 못하는 나그네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 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앗수르인과 애굽인을 움직여 보호자로 삼으려고 노력할 것이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녀와 동맹을 맺게 되지도 않을 것이며, 그녀를 도와 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도와도 헛될 것이며,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을 것이다. 그녀는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우상들에게 구하지만 기대하던 만족을 그들에게서 얻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신뢰하고 아첨하던 신들은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이 될만한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이것은 소돔과 수리아인이 당했던 그런 심판이 될 것이다(창 19:11; 왕하 6:18).

소돔 사람들은 눈이 어둡게 되어 문찾기에도 곤비하였고 수리아인들도 그랬다. 죄의 추구를 아주 굳게 결심하고 있는 자들은 대개 극도의 장애물을 만난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잠 22:5).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스스로 거스리심을 보이시며(시 18:26), 자기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대항하신다(레 26:23, 24).

애곡하는 선지자는 "주께서 내 길을 둘러쌌다" 고 호소한다(애 3:7, 9).

하나님의 길과 의무의 길은 왕왕 가시로 막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시로 막힌 길은 죄스러운 길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2) 이것은 실로 발람이 당했던 것과 같이 그런 인자한 책망이며 자비이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앞으로 나아가다가 천사의 제지를 받았던 것이다(민 22:22). 악한 길 위에 있는 방해물과 장애물은 큰 축복이며 그렇게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를 범죄로부터 금하고 푸른 초장 밖에서 배회하는 것을 제지하며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며(욥 33:17) 죄의 길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울타리요 담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서 계속 행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죄로부터 막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은혜와 섭리를 억제하시는 데 대해서도 하나님을 송축할 만한 이유가 있다.

2. 하나님이 그들의 길에 야기 시키시는 이런 어려움은 그들의 마음에 돌이키고픈 생각을 야기 시키게 될 것이다.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내 연인들을 따라 잡지 못하므로 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즉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에게 스스로 낮추고 그가 다시 나를 받아들이도록 소원하리라. 이는 그 곁에 있을 때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이 타락한 배반자들로부터는 두 가지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1) 그들은 배반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을 때가 그를 버린 이후 어느 때보다 더 나았다는 것을 자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세상과 육신의 봉사와 바꾼 자들은 누구나 조만간 자기들이 개악(改惡)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선한 교제를 계속하며 선한 의무의 길로 행하며 시간의 선용과 자기 언행을 양심적으로 하던 그 때가 자기들에게 더 나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길을 잃은 이래 참 위안과 자기 향유를 얻지 못했다.

진정한 위로와 향락은 하나님을 모실 때 있었던 것이다.



(2) 자기 의무로 되돌아오려는 선한 의도.

"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녀는 본 남편의 인자함과 도량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가 자기를 다시 은총 속에 받아들이고 그녀의 처지를 다시 호전시키리라는 것을 의심 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만족을 추가하려다가 실망에 부닥치게 될 때 그 실망은 결국 우리를 창조주께로 향하게 만든다. 만족은 그 분께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모압이 산당에서 피곤할 때 그는 성소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사 16:12).

탕자는 껍데기만 남고 자금이 바닥나자 그 아비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눅 15:17, 18)고 말한다.

Ⅱ.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안락물이 그들에게서 탈취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바로 그 물품들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한 때문이다(8, 9절). 그들의 땅은 풍성했다. 이제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그들은 은혜롭게도 풍족한 것을 받았었다. 하나님께서는 필수품으로서 곡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쁨을 위해 포도주를 주셨고 단장을 위해 기름을 주시기도 했다. 아니, 그는 저희의 은과 금도 더하여 주었다. 이로써 그들은 다른 나라와 교역하여 열방의 생산물을 국내로 가져 왔고 후손을 위해 이들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은과 금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양털과 삼도 주셨고 장식물이 될 것도 충분히 주셨다(겔 16:10). 하나님은 배은망덕하고 감사치 않을 자들(이것을 예견하신다)에게도 관대한 혜택자가 되신다는 것을 주목하자.

2. 그들은 자기들의 풍요를 극히 비열하게 남용했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의 명예를 강탈했다.

" 곡식과 포도주는 내가 저에게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모든 위로물이 하나님의 아낌없으신 섭리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재삼 재사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우상의 사제들에게서 곡식은 이런 우상이 준 것이요, 포도주는 저런 우상이 준 것이라는 식의 말을 너무나 자주 들어서 크신 시혜자와의 관계와 그에게 대한 의무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인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일부러 잊으려 했고(벧후 3:5) 이 점에서 그 임자를 아는 소나 주인의 구유를 아는 나귀(사 1:3)보다 그들은 더 무지몽매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고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궁리하지도 않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받은 바 선물에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드리지도 않았고 마치 주신 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처럼 행동했다.



(2)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수를 섬기며 공경했다.

" 저희는 그것들로 바알을 위해 썼다." 그들은 금과 은으로 신상을 장식했고(렘 10:4) 우상 숭배를 위해 자신을 단장했다(13절, 겔 16:17-19 참조). "저희가 그것으로써 바알 즉 바알 우상을 만들었다" (난외주는 그렇게 읽는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위해 우리 힘을 복돋게 하고 우리 순종의 수레바퀴에 기름이 되게 하기 위해 주신 섭리의 선물들을 육욕의 양식과 기름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대해 매우 모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3. 그들에게서 그 풍요를 탈취하신 것은 지극히 마땅했다.

"그러므로 내가 도로 찾으리라, 내가 그들과의 거래를 변경할 것이며 다른 경로(방도)를 취할 것이며 내가 저에게 준 곡식과 다른 좋은 것들을 빼앗으리라. 내가 그것들을 회수하리라." 이것은 법률 용어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부당하게 유보당한 것을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 회수하거나 소작인이 땅을 황폐시켰을 때 지주가 locum vastatum - 즉 황폐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풍요를 "내 곡식" 과 "내 포도주" 와 "내 양털" 과 "내 삼" 이라고 부르신다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그런 것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부른다(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알리신다. 그는 소작인으로서 그 사용을 허락했을 뿐이며 청지기로서 그 관리를 위탁했을 뿐이다. 그는 그 재산권을 여전히 보유하셨다.

"그것은 내 곡식이요, 내 포도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위안물의 향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권리와 소유권이 명명백백히 하나님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것도 알리신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회계해 드려야 할 것들이다. 그들은 자기 주인의 뜻을 따라 땅을 점유하는 소작인과 같다. 소작인이 등기부 사본으로 마치 자기가 부동산의 소유자이기라도 한 듯 그 부동산을 분배한다면 자기 재산을 몰수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의 권리를 부인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풍족한 것을 빼앗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도로 찾으실 것이며 자유롭게 하시거나 해방시키실 것이다. 이는 그것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남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탄식하는데 거기서 해방될 것이라고 한다(롬 8:21, 22).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둘 것으로 기대하고 확신하던 그 시절에 바로 그 시기에 그것들을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항구에서 난파를 당할 것이다. 슬픔의 날에 농작물은 없어질 것이다(사 17:11). 그는 불순한 기후나 비이성적 사람들로써 그것들을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를 남용하여 그의 불명예가 되게 하는 자는 그 자비를 오래 누릴 줄로 기대할 수가 없다.

Ⅲ.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명예를 상실할 것이며 수치를 노출하게 될 것이다(10절).

"내가 저의 수치(음란: 흠정역)를 드러낼 것이며, 그녀의 모든 악을 밝히 드러내며 공표하여 수치가 되게 하리라. 내가 그 일의 징벌로써 그 일이 얼마나 극악하며 가증스럽고 역겨운지 나타내 보이겠다. 저는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내가 이제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겠다. 그녀는 잘못을 이래저래 감춰서 줄였지만 이제는 극심한 죄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들이 동맹을 구하고 의지하던 인근 열방의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저를 경멸하게 될 것이며 저의 연약함과 궁핍과 나쁜 품행을 인하여 저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그녀와 사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겼다" (애 1:8)는 말씀에서 성취되었다. 또는 그녀는 그 연애하는 자로 섬기던 해와 달이 보는 앞에서 그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것과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비교하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방백들의 뼈를 그 요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던 해와 달 아래 쬐리라" (렘 8:1, 2). 죄는 수치를 가져온다는 데 주목하자. 부끄러운 일을 행한 자들은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 뻔뻔스런 음녀는 온 동리에 끌려 다니며 망신당하는 창녀의 분깃밖에 기대할 게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이처럼 다루실 때는 저를 그의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들도 사람도 의지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의탁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공의의 손길에서 구출 받을 수가 없다.

Ⅳ. 그들은 그들의 모든 쾌락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음울한 가운데 남게 될 것이다(11절).

"내가 그 모든 희락을 폐하리라." 그들은 비록 자기 하나님을 떠나 행음 하였을지라도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금지되었다(9:1).

죄악과 진노 아래 있으면서도 아주 쾌활하고 즐거워하며 기쁜 듯이 사는 자가 적지 않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웃음 가운데서 슬프든 기쁘든 간에 저희 즐거움의 끝에 근심이 있을 것은 확실하다(잠 14: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희락을 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버로우즈(Burroughs)선생이 관찰하듯 죄와 희락은 결코 오래 결합하지 못한다. 사람이 만일 저희 희락에서 죄를 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저희 죄에서 희락을 제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성한 희락의 기회를 빼앗아 버리실 것이다. 성스런 희락의 기회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기들을 경건하게 지키도록 제정하셨고 이들은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절기들이었다. 그들은 순수한 여호와 예배에서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들 절기는 계속 지켰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진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포기한 지는 오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송아지 우상이 있던 단이나 벧엘 또는 다른 회집 장소에서 예배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들 절기를 지키지도 않았고 진정한 신앙심으로 지키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전으로서 이 절기가 희락과 잔치와 가무 음곡과 사교의 시기였기 때문에 지켰을 뿐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고 부인했으면서도 헛된 세상적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경건의 모양은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의 월삭과 안식일은 하나님이 견디지 못할 악이 되었던 것이다(사 1:13).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월삭과 그들의 안식일이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그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그는 이들을 인정치 않으신다) 그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2) 하나님은 이들을 폐하실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죄로써 신앙 생활과 의식의 본질을 폐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으로 이들의 나머지 잔영을 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세상적 환락의 유지물을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되는 경건한 의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절기 때의 들뜨고 흥청거리는 기분을 위해서일 따름이다. 그들의 예배에서 이런 것이 결여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의식에 쓰는 양식을 빼앗아 버리실 것이다(12절).

"내가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훼파하리라."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규례를 통해 절기 때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 때 만약 그의 말씀과 법도를 훼파시킨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즐거움의 수단이 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훼파하신다는 것은 지당하다.

그들은 이런 즐거움을 누리면서 그 찬미를 연애하던 자들에게 돌렸다. "이것은 나를 연애하던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나는 이런 것들로 인해 별들에게 감사하며 이런 것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동맹을 맺어 준 이웃 국가에게 감사를 한다. 이것은 다 그들 덕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훼파하실 것이며 광풍으로 시들게 하실 것이다. 아니면 그는 국토를 황폐시킬 외국 원수를 불러들일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포도밭은 수풀이 될 것이다. 전쟁 때 흔히 그러하듯 둘러싼 담이 무너질 것이다.

모든 것은 임자 없는 공유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들짐승들이 그들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동풍에 시들어서 이들 유실수가 숲 속의 나무보다 나을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열매가 있든지 간에 그것은 시들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이며 그것은 들짐승 차지가 될 것이다.



(1) 이것은 그들이 누리던 환락의 파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희락을 폐하실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 일을 행하신 것인가? 월삭과 안식일의 폐지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들과 쉽사리 헤어질 수 있으며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며 그녀의 관능적 쾌락을 빼앗으리라. 그러면 그녀는 참으로 화를 입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훼파는 육욕적 마음의 모든 희락을 폐하게 만든다는 데 주목하자. "너희가 내 신들을 가져갔으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라고 말할 것이다.



(2) 이것은 그녀의 우상 숭배에 대한 벌이 될 것이다.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내가 저들이 신으로 삼아 섬긴 모든 바알 예배에 대해 저와 계산하리니 저희 조상의 날부터 이 날까지라."

바알 숭배는 사사 시대까지 소급한다. 내가 아는 대로는 이것이 그 때 즉 바알들의 시일까지 소급해서 가리키는 것 같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제 2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갚겠다고 위협하신다. 다른 어느 죄보다 이 죄를 이렇게 벌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그 죄가 흔히 오랜 관행으로 스스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죄의 양이 꽉 찼으므로 이전의 모든 죄를 계산하게 되었고 이 세대에게서 그 값을 요구하게 되었다. 아니면 바알들의 시일(날들)은 그 날의 슬픔의 날의 갚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날들은 그녀가 우상에게 향을 사르고 예식을 빛내기 위해 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던 날이다.

이는 저가 바알에게 드리는 존경이 보다 영화롭게 나타나고 더 크게 생각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니면, 그녀는 자기 남편이 준 귀걸이와 패물로 자신을 단장하여 자기 연인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하려는 아내와 같았다. 그녀는 자기의 연인들을 따라가며 늘 마음에 생각한다. "그러나 저가 나를 잊어버렸다" 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와의 관계, 그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기억력이 약해 하나님의 일을 잊어버린다고 하면서 다른 일들은 충분히 기억하는 자는 많다. 이것은 그들이 헛되고 거짓된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기들이 받은 고마운 일은 까마득히 잊었기 때문이다.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없음.

 

2:13 없음.

 

2:14

자비의 약속 (호세아 2:14-23)

본장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죄로 파산한 이스라엘의 상태가 암담하고 음울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견제된 이스라엘의 상태가 밝고 즐겁게 나타난다. 이같이 경고에 바싹 뒤쫓아서 약속들이 나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아니 파멸의 경고가 근거한 죄의 선언에서 이런 약속이 나오고 약속이 연결 부호로써 경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저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렸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그러므로 연결부호인 "그러므로" 다음에 감탄 부호가 곧 잇달아 나온다는 것은 적절하다. "보라!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원문은 그렇다: 역주).

"저가 나를 잊어버렸다" 고 말할 때는 누구나 "그러므로 내가 저를 포기하고 잊어버리며 더 이상 돌보지 않겠다" 는 말이 나올 줄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겠노라." 하나님의 생각과 자비의 길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무한히 높다는 데 주의하자.

하나님의 이치는 전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인출되는 것이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악함을 이용하여 훨씬 더 훌륭하게 나타나도록 하신다(사 57:17, 18).

그녀는 진노의 위협에도 제지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자비의 제안에 감화를 받을지 안 받을지 시험하실 것이다. 혹자가 "나중에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고 번역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매 한가지다. 목적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자비를 위해 긍휼히 여기실 자들에게 자유로운 은혜를 확대시킨다는 데 있다. 이제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Ⅰ. 비록 그 때 그들이 쓸쓸하고 거의 절망 상태에 있었지만 다시 위로와 소망으로 소생하게 될 것이다(14, 15절). 여기에 나오는 묘사는 출애굽시의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광야를 경유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포로기의 고독하고 비탄스런 상태는 그들이 나던 날 애굽에서의 상태에 비유되었다(3절). 그들은 처음 형성될 때처럼 사랑과 자비의 기적으로 재형성될 것이다. 그들은 그때와 같은 희열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십 지파의 왕국에서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주로 지목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교회 인도와 구출일 것이다. 또 이것은 각기 영혼의 하나님께로의 전향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본문의 의도라고 생각할 만하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로운 방법을 취하실 것이다.

(2) 그는 맨 처음 출애굽 때와 같이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출애굽 때 그는 거친 들에서 그들을 교훈하시며 자기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제 그들이 포로된 땅은 그때의 광야와 같이 그들에게 환난의 풀무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서 택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국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같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다(3절). 그것은 위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이 약속의 일부가 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광야의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섭리 아래서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가난하기에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것이며 자기들의 불의에 대한 징벌을 기뻐 받게 될 것이고 자기들에게 들려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 광야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 광야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여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신 8:2, 3, 15, 16).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예비하시는 대상자들은 먼저 거친 들로 데려감을 당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고독하고 한적한 데로 불려간다. 이것은 이 세상의 번잡에서 나와 하나님과 보다 자유로이 사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죄악감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의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아주 어쩔 줄 모르게 하며 그 자체로는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그는 이런 각성에 의해 위로받을 준비를 시키시며 때로는 외부적 고생과 고통에 빠지게 하여 교훈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신다.



(2) 그는 그들을 개유하여 말로 위로하실 것이며 그들을 설득하여 그 마음에다 말씀하실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말씀과 성령에 의해 자기에게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격려하여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는 이전에 진노의 위협으로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셨듯이 이제는 은총의 약속으로 개유하실 것이다. 전에는 거칠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자기 선지자와 섭리를 통해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사 40:1, 2).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의 손을 통해 저의 마음에 위로를 말할 것이다" (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제안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개유 받았다. 이것은 각성한 죄인의 마음에다 대고 어느 모로 보나 그의 처지에 적합한 것을 말해 주며 죄 때문에 근심하고 주를 따라 애곡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위로의 말씀을 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통해 참으로 효과적인 말을 마음에 하며 양심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특권이다) 얼마나 복된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방황하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최선의 길은 아름다운 회유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안식의 약속으로써 그의 멍에를 지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회심의 작업은 유죄 선고뿐만 아니라 위로의 말씀에 의해서도 촉진될 수 있다.



(3) "그는 거기서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실 것이다."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로 하여금 자기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겸손하게 만드신 바로 그 때와 장소로부터 그는 그녀에게 복을 베푸실 것이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좋은 일을 베풀며 이전의 대적 행위를 취소하실 것이다. 그는 그녀의 포도원을 거칠게 하였으나(12절) 이제는 그녀에게 전체 포도원을 통째로 주실 것이다. 마치 거칠게 되어 못 쓰게 된 모든 포도나무에 대해 포도원을 복구받고 이자까지 지급받아야 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포도원(복수형에 주의: 원주)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생계를 위한 곡식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포도원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들(아 8:5)에게 예비된 복음의 특권과 위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한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수여하실 포도원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거친 들에서 포도원을 주실 수 있으시다. 피곤한 자가 휴식을 반기듯 거친 들에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포도원이 가장 인정을 받는다.



(4) 그는 그녀에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실 것이다. 아골 골짜기는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곳이었다. 아골은 괴로움의 골짜기란 뜻이다. 왜냐하면 아간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를 괴롭히신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 전쟁의 시작이었다. 저주된 물건을 그곳에 내다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신다는 것과 그들의 승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을 소망할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로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시고 그들이 의무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복된 전조가 될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 중에서 저주받은 물건을 제거하며 죄를 억제함으로써 진중을 괴롭힌 아간을 돌로 친다면 그들 내부의 적의 제압은 가나안의 열왕에 대한 승리의 증거가 된다. 또는 이것이 그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죄에 대한 진정한 괴로움은 소망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괴롭히는 죄는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골 골짜기는 매우 비옥하고 즐거운 골짜기여서 혹자는 포도밭으로 유명한 엔게디와 동일시한다(아 1:4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온 가나안 땅의 모형과 보증으로써 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써 모든 신자에게 은사와 은혜와 이 생의 위로물을 주실 것이며 그것은 천국의 보다 완전한 좋은 것들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가 되면 그 좋은 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심어 줄 것이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리고 전체의 문맥은 이와 동일한 취지를 갖는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귀환을 큰 기쁨으로 맞을 것이다.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노래하기를: 흠정역) 어렸을 때와 같이 하리라." 이것은 명백히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부른 예언적 개선가를 가리킨다(출 15:1).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구출받을 때는 그 노래를 되풀이할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 노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새로운 시기에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노래는 이전 노래보다 열등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희락을 폐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11절) 이제는 그 모든 희락을 재생시키실 것이다. 그녀는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 부를 것이다. 하나님이 이전의 자비를 되풀이하실 때 우리도 이전의 찬미를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모세의 노래가 신약에서도 되풀이됨을 볼 수 있다(계 15:3). 이스라엘의 노래에 대한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 성취를 보았다. 복음은 우리에게 풍성한 찬송 제목과 기쁨의 자료를 제공해 주며 그것이 어디서 받아들여지든 간에 그 능력으로 기쁨의 마음과 찬미의 마음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을 열어주는 땅이다. 우리는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Ⅱ. 이제까지 그들은 비록 무척이나 바알 숭배에 탐닉해 왔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 일에서 손을 뗄 것이며 온갖 모양의 우상과 우상 참배를 포기할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착할 것이며 그가 지정하는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16, 17절). 어느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확실히 보증하고 표징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죄 사이를 갈라놓으신다는 사실이다.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을 극히 쉽사리 얽매던 죄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불의였고 그들을 지배하던 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 우상 숭배는 완전히 폐지될 것이며 그들 사이에는 그 잔재가 조금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1. 바알 우상들은 일컬음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바알들의 날에 그토록 시끄러운 소리를 야기시켰던 바알 중 어느 하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것이다. "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왕상 18:26). 바알들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제거될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너무나 사용되지 않아서 마치 이스라엘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름인 양 완전히 망각될 것이다. 그 이름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하며 듣는 것도 역겨워할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바알에게 대한 이전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여 바알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 금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극히 엄격하게 지킬 것이다(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출 23:13; 시 16:4). 이와 같이 사도는 모든 육신의 정욕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할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엡 5:3). 그렇지만 구스인의 피부가 어찌 변하겠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시리라는 것이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제할 것이며(17절) 우상의 이름을 끊으리라(슥 13:2)."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받던 죄악을 미워할 것으로 만듦으로써 언어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할 것이다" (습 3:9). 랍비 중 한 사람은 이 약속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도 관련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이방인의 전향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결합하고 있던 우상 숭배에서 돌이켰던 것이다(살전 1:9).

2. 바알이란 말 자체도 그 순수한 의미에서조차 타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내 남편(Ishi)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Baali)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두 단어는 다 내 남편이란 뜻이며 신에게 대해 사용되어 왔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며(사 54:5), 네 바알이시며, 네 소유주와 후원자요, 보호자시다." 따라서 많은 선한 백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내 바알(Baali)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악한 이웃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바알이란데서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네가 다시는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니 내가 내 바알이란 이름을 제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 자체는 매우 결백한 것이라도 우상 숭배에 오용될 때는 철폐해야 하며 그 사용도 제거해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이것은 아무 것도 우상을 기억케 하는데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물며 우상을 유명하게 하는 일이랴! 하나님을 내 남편(Ishi)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 바알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좋고 그 의미도 같다면 그 말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고 부르면 타인들이 자기들의 옛 바알(guondam Baal)을 상기할까봐서이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왜 이쉬(Ishi)란 말로 불리시기를 원하고 "내 바알"이란 말로 불리기를 원치 않으시는지 그 이유가 여기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다 "내 남편" 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쉬'(Ishi)는 사랑과 감미로움과 친밀성을 띤 명칭이고 '내 바알'은 경외와 복종의 호칭이다. 이쉬는 Vir meus - 즉 내 남자이고 'Baali'는 dominus meus - 즉 내 주인이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는데 이 때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오며 그 앞에서 거룩하고 겸손한 자유를 행사하라고 권면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교훈받는 경우가 더 많다. 이쉬(Ishi)는 주인이신 남자(인간이란 말과 병용: 역주)란 말이다. 이것은 복음시대에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남편이 되시고 자기 동포(형제: 원의)와 같이 되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쉬" 라고 부를 것이다.

Ⅲ. 그들은 비록 전 피조물이 자기들과 전쟁 상태에 있기라도 하듯 끊임없는 환난 중에 있었지만 이제는 마치 전 피조물과 우호 동맹이라도 한 듯 완전한 화평과 평온을 누리게 될 것이다(18절). "그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언약을 세우리라."

1. 그들은 재앙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아무 것도 그들을 해치거나 화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Tranquillus Deus ranquillat omnia - 즉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하실 때는 모든 피조물로도 우리와 화평케 하신다. 하등 피조물들은 들짐승이 그들의 포도밭을 먹어치우거나(12절) 사나운 짐승이 하나님의 쓰라린 심판의 하나로 행하던 것처럼(겔 14:15) 그렇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공중의 새와 기는 곤충도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공의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는 그들도 매우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언약을 통해 그것들은 그들에게 유용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이익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등 피조물도 지배하시며 자기가 원하시는대로 그것들을 언약 속으로 끌어들이신다는 데 주목하자. 그는 들짐승으로 하여금 자기를 존경하게 하실 수 있으시며(그렇게 약속하셨다. 사 43:20) 자기 백성의 안락에 기여하도록 하실 수 있다. 하등 동물이 이처럼 우리에게 대한 봉사의 약속 아래 놓이게 된다면 우리측의 언약 이행 태도는 그들을 학대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뱀을 집을 수 있는 기적적 능력을 부여했을 때(막 16:17, 18) 이것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특별히 포로 귀환시의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내가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라," 겔 34:25)과 일치하며 모든 성도에게 대한 보다 일반적 약속과 일치한다.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이요(욥 5:22, 2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을 것이라(시 91:13)."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야수보다 인간 서로가 더 위험하다. 그러므로 나아가서 하나님은 전쟁을 그치게 하시며 원수를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내가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리라."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시 46:9) "그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을 위해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라도 그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잠 16:7). 이것은 복음 시대에 칼이 보습으로 될 것이란(사 2:4) 약속과 일치한다.

2. 그들은 재앙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평안히 지키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늘의 보호 아래 있는 줄 알기에 음부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처럼 평안히 눕게도 하실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들의 음행을 인하여 이혼장을 그들에게 주셨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에는 그들을 언약 속으로, 혼인 언약 속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19, 20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등 동물과 언약을 세우신 것은 크나큰 은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 언약의 성질. 그것은 사랑과 선택에 의해 성립되고 최근친을 형성하는 혼인 언약이었다.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이 말은 세 번 나온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과 혼인한 자들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신성하고 불가침의 안전을 그들에게 부여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며, 보호하실 것이며 부양하실 것이다. 그는 남편된 도리를 다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과 결합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쏠리도록 하실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은혜로이 열납하실 것이다. 믿는 영혼은 그리스도와 혼약맺은 자이다(고후 11:2). 복음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요 아내이다. 그가 만약 자기 은혜의 능력을 통해 그들에게 장가들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결코 그와의 결혼 관계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분리는 우리편에서 시작되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에 반해 연합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장가드신다.

2. 이 언약의 기간.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리라. 언약 자체는 위반이 불가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도 이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며 네 편에서도 깨뜨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언약의 축복은 영원할 것이다." 유대 랍비 중 한 사람은 이것이 그녀가 절대적으로 영원한 장차 올 세상의 삶에 도달하리라는 약속이라고 말한다.

3. 이 언약이 세워질 방법.

(1) 의와 공변됨으로, 즉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심에 있어 진실하고 의롭게 다루실 것이다. 그들은 언약을 위반했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그렇지만 내가 의로 그 언약을 갱신하겠노라"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배역하는 자녀들을 다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이 조정될 것이다. 그는 자기 공의를 생각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의 공의를 생각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의 공의는 이 언약의 중보자에 의해 충족될 것이며 이것은 언약의 명예를 훨씬 더 높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주 배반하던 백성과 언약을 맺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지혜에 오명을 입히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판단(한글 개역: 공변됨)으로 행하리라. 경솔히 행치 않고 적당히 숙고하여 행하리라. 나로 하여금 혼자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게 하며 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게 하라."

(2) 은총과 긍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언약 체결에서 인자하고 은혜롭게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말씀처럼 선하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과의 언약을 지키시는 데 공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언약 안에 보존하심으로 자비로우실 것이다.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기 쉬울 정도로 약점이 많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극단적으로 주목하신다면 그들은 곧 그 언약의 혜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고려함으로써 성립되는 은혜의 언약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의 모든 범죄도 그들을 밖으로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영원한 인자로 모으실 것이다.

(3) 진실함으로, 언약의 각 조항은 꼭 그대로 수행될 것이다. 그들을 부르신 분은 진실하시니 그가 이 일을 이룰 것이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

4. 그들이 자기들 편에서 이 언약을 굳세고 신실하게 고수하게 될 수단.

"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보다 완전히 그리고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알려는 마음을 그들을 주시리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타락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은인인 줄을 모르는 데 기초했다(8절).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 가르침을 받아 그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훌륭한 이해력과 올바른 지식을 주심으로써 인간의 영혼에 대한 자기 세력을 유지하신다는 데 주목하자(히 8:11 참조).

Ⅴ. 그들에게는 하늘이 놋과 같고 땅은 철과 같았지만 이제는 하늘이 이슬을 내게 될 것이며 따라서 땅은 소산을 내게 될 것이다(21, 22절). 하나님께서는 복음 교회에 장가드시고 그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들과 혼인하셨는데 어찌 만물을 그들에게 거저 주시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거저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경건에 속하는 모든 것, 그들이 필요로 하고 원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주셨다.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께 혼인한 자들인 까닭이다. 그들이 먼저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더불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추가될 것이다. 그런데 이 곡식과 포도주의 약속은 영적 의미로도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 따위를 은유로 한 현세적 축복이 약속되고 있는데(이것은 야곱의 축복에서도 먼저 나온다. 창 27:28). 이것은 영혼과 관계 있는 축복과 은혜의 유출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곡식과 포도주를 도로 찾으시겠다고 경고하셨다(9절). 그러나 이제 그는 일상적 자연의 경로와 질서로 그것들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은 기근의 심판 아래 있는 동안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땅에게 곡식과 포도주를 요구하였다. 땅은 기꺼이 그들에게 그런 산물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은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되지 않으면 곡식과 포도주를 산출할 수 없으며, 받지 않으면 줄 수가 없다(시 5:9 참조). 그러므로 땅은 하늘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부르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달라고 입을 벌리고, 비가 거절될 때에는 우울한 모습으로 비를 탄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의 열쇠를 가진 분이 그 자물쇠를 열고 병뚜껑을 열지 않으면 비를 내려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돕지 않으시면 행할 수 없다" 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친히 언약을 세우실 때는 자연의 수레바퀴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가동할 것이며 자비의 시냇물이 보통의 경로를 따라 흐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응하리라(들으리라)" 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네 기도를 받아들이리라(맨 처음에 나오는 "응하리라" 를 갈데아 주석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말을 은혜로이 주목하실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늘을 듣겠노라(응하리라). 내가 하늘에게 응답하겠노라. 그러면 하늘은 땅을 듣고 응답하여 땅에 적절한 비를 쏟을 것이다. 그러면 땅은 곡식과 포도주를 들고 습기를 공급할 것이며,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을 듣고 이스르엘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것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여기서 피조물(제 2원인) 상호 연관성을 살펴보자. 그것들이 사슬처럼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또 제 1원인에 대한 피조물의 필수적 의존성을 주목하자. 우리는 통정상 방법과 정해진 수단을 따라 우리의 모든 위안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실망할 때에는 작은 산과 산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에 얼마나 적극적이며 그 명예를 얼마나 갈구하는지 주목하자. 곡식은 땅에게 부르짖고 땅은 하늘에게, 하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이 모든 것은 자연이 그들에게 공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얼마나 즉각적으로 구원을 베푸려고 하시는지 주목하라. "내가 응하리라. 아무렴, 응하고 말고" 라고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면 하물며 하늘보다 높으신 자기 아들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이 피조물의 위안에서 독특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시냇물의 물 근원까지 추적할 수 있으며 일반 자비에서 언약의 사상을 맛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을 배나 즐겁게 한다.

Ⅵ.그들이 비록 이산되고 시몬과 레위처럼 야곱 중에 나뉘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나뉘고 흩어지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내가 저를 위하여 땅에 물을 댈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으리라. 저의 흩어짐은 타작 마당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 같지 않고 보다 소출을 크게 하기 위해 밭에 뿌려지는 씨앗 같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뿌려지든지 밑으로 뿌리를 내려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좋은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심으리라." 이것은 이스르엘이란 이름을 암시한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로서 또는 하나님을 위해 파종되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하나님께로부터 흩어짐을 당했듯이(이것은 그 단어들의 한가지 의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파종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심는 것을 증가시킬 것이며, 소출이 많아지게 하실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박고 신앙 고백자가 모든 곳에 생겼을 때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으리라" 는 약속은 성취되었다. 이 땅의 최대 축복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교회를 두시고 그로부터 온갖 영광의 공물이 나오며 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심으신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확보하실 것이다.

Ⅶ. 그들이 과거에 로암미(-백성이 아니라-)와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였음에 반해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받을 것이며 다시 그와 언약을 맺게 될 것이다(23절).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고 버림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니었고, 내 백성이 아니었고, 내 백성으로서" 각광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열방과 공통적으로 방임되었다. 배척받은 유대인의 경우가 그랬다. 이방인의 경우도 이와 같았거나 더 비참하였다(사도는 이것을 말한다, 롬 9:24, 25). 그들의 소망을 갖지 못했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회로 연합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는가?

1.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오랫동안 은총밖에 있으면서 진노의 자녀였던 자들이 하나님께 은총을 얻고 그의 사랑의 자녀로 되었다. 만일 무한하신 자비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었을 터였다. 지옥 이쪽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은 이방인과 나그네 되었던 자들을 자기와의 언약 관계에 두셨다. 그는 그들에게 "너는 네 백성이라 내가 너를 내 백성으로 인정하며 축복하며 부양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주는 내 하나님이라. 내가 주를 섬기며 예배하고 주의 명예에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헌신하리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신자가 받는 행복의 총계는 그들과 하나님간의 상호 관계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약속의 관절(冠絶)이다.

(2) 이 관계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근거한다. 우리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먼저 "저들은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권능의 날에 기꺼이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공언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이상 달리 바라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행복을 확신시켜 주는 것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며, "너는 내 백성이라" 고 성령을 통해 증거하신다.

(4)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기쁘게 받아들인 자는 그렇게 고백하고 공언해야 하며 기도로 그에게 나아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고백해야 한다.

(5) 언약 안에 성도의 교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우리 언약의 위로를 더해 준다. 성도의 수는 많으나 여기서는 단수로 표현되고 있다. 본문에는 "내가 저희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라" 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그 안에서 하나된 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런 자로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들 역시 "주는 우리 하나님이라" 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한 몸으로 간주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한다. 아니면 이것은 언약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이제는 복음 아래서 개개의 신자들과 그런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각자에게 "너는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신다. 옛적 수만의 이스라엘인에게 하실 때처럼 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도 기쁨으로써 "너는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를 초대하고 격려하여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하게 하시며 모세와 온 이스라엘이 그랬듯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드신다. "그는 내 하나님이시오,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로다" (출 15:2).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2:18 없음.

 

2:19 없음.

 

2:20 없음.

 

2:21 없음.

 

2:22 없음.

 

2: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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