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환상 (다니엘 10:1-9)
이 환상의 연대는 "고레스 왕 삼 년" 이라고 되어 있다. 즉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이후의 통치 3년이었다. 그후 다니엘은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Ⅰ. 이 예언의 일반적인 이념을 살펴보자. "그 일은 참된 것이었다" (1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와 같이 참되다. 다니엘이 본 환상들은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한 예언자의 말씀에 대해 이것을 엄숙히 증명한다. Et hoc paraturmfjsep est verificare-즉 그는 그것을 기꺼이 증명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하늘로부터 말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확고한 것이요 신뢰할 만한 것이리라. "그러나 지정된 시간은 길었다" (KJV 만 이렇게 번역됨-역주). 안티오커스 통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약 3백 년 동안이었다. 그동안 그것의 실현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영적이고 영원한 사물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이 예언에서 세계의 종말과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먼 미래의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작정된 시간이 길었다" (우리 성경-"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역주)라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언이라기 보다는, 역사인 것처럼 그에게 명백해졌다. 그는" 그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도 명백하게 다니엘에게 전해졌고, 또 그가 분명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기가 "그 환상을 이해했다" 고 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에게 공상력이 아니라 이해력을 낳았던 것이다.
Ⅱ. 다니엘은 이 환상을 보기 전에 고행을 했다. 그것은 그가 환상을 기대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고행은 순수하게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경건한 동정과 신앙심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다니엘은 "만 3주간을 슬퍼하였다" (2절). 그것은 다니엘 자신의 죄와 자기 백성들의 죄, 그리고 그들의 환란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의 슬픔의 실제의 이유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자유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로된 땅에 남아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의 태민과 무관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특권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다니엘을 더 괴롭혔던 것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니엘도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의 슬픔의 이유는 유대인들이 적들에 의해서 성전 중건을 방해받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적들은 "모사들을 고용하여 저들을 쳤고, 저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려 했다" (스 4:4, 5). 그리고 "고레스 시대에도 계속"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곧 아닥사스다에게서도 자기들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냈다. 아닥사스다는 스구디아인과의 전쟁으로 고레스가 부재 중일 때 나라를 대신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몹시도 느리게 진행되고, 많은 방해를 받고, 그 우방은 약한데 적군은 강한 것을 보고 슬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슬퍼하는 동안, 다니엘은 "좋은 떡을 먹지 않았다." 음식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적게 먹었다. 먹는 것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도 스스로 금욕을 하였다. 사실상 단식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의 슬픔과 고행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자주 먹던 좋은 떡을 먹지 않았다. 단지 조야하고 거치른 것만을 먹었다. 그 떡은 자기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이상은 먹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식품이나 맛있는 진미는 고행의 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다니엘은 세 주간이 차기까지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했다" (3절). 비록 다니엘은 대단히 늙었지만 몸이 쇠약해 있으므로 영양이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또 대단히 지위가 높아서 맛좋은 음식을 계속 먹어왔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만일 그가 그렇게 금욕을 했다면, 그것은 그의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니엘의 신앙심을 입증하고 돕는데 필요하다면, 그는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들을 부인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평범한 생활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Ⅲ.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사람에 대한 서술이 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 외에 그 어떤 분도 아니았는 점이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그는 헛데겔 강변에 있었다(4절). 아마도 그 강가를 걷고 있었을 것이다. 산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이삭이 명상하기 위해서 언덕을 거닐었던 것처럼, 신앙과 묵상을 위해서 강가를 거닐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지위가 있는 자였으므로, 약간 떨어진 곳에는 그의 종들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다니엘은 "눈을 들어 바라다 보았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곧 "그리스도 예수 그 사람" 을 보았다. 그분은 분명히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계 1:13-15)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옷은 제사장의 옷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날인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은 대로 "세마포" 를 입으셨다. "그의 허리" (요한의 환상에서는 그의" 가슴)는 우바스의 정금으로 만든 "황금의 띠가 둘려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그것의 종류에 있어서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 허리를 동인 것" 은 그가 아버지의 종으로서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부지런히 임하려는 그의 자세를 나타낸다. 그의 모습은 온순하였다. "그의 몸은 황옥" 같았다. 그이 용모는 경외스러웠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무서워 떨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은 눈을 현란시키는 "번갯불"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마치 횃불처럼" 빛났다." 그의 "팔과 다리" 는 "빛난 놋" 과 같았다(6절).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마치 "우리들의 소리" 처럼 대단히 강하고 날카로왔다. Vxo Dei-즉 하나님의 목소리는 즉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나타나셨고, 그런 그리스도의 현현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 그리스도를 지극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그에게 바치자.2.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겸비를 찬탄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종의 형상을 입고, "자신을 비우시사" 너울을 내림으로써 그 모든 광채를 가리셨다.
Ⅳ. 그리스도의 출현이 다니엘과 그의 수행원들에게 끼친 놀랄 만한 영향력, 그리고 그들을 두려워 떨게 한 무서움이 서술되어 있다.
1. 다니엘의 수행원들은 "그 환상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그 환상을 보는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적합한 일이 못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계시도 있다. 아무도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제외하지 않는 이상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환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였던 다니엘에게만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의 동료들도(다메색 도상에서)" 빛" 은 보았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다" (행 9:7; 22:9).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진 것이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받는 영광임을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들(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나타내시지만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신다" (요 14:22).그러나 그들이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도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들은 목소리 때문인지 혹은 그들이 어떤 이상한 진동이나 격동을 느껴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다" 아마도 힛세겔 강변에 서 있던 버드나무사이에 숨었을 것이다. "양자(養子)의 영" 을 받지 못한 많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속박의 영" 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의 수행자들이 처했던 놀라움은 환상의 사실성에 대한 확인이 된다. 그 환상은 다니엘만의 허황한 꿈이나 그 자신이 만들어 낸 과열된 상상력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수행원들에게도 진실하고 강력한 그리고 이상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2. 다니엘만은 그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도 그 모양을 똑바로 보고 견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니엘의 눈을 부시게 했을 뿐만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압도하였다. 그래서 "그의 몸의 온 힘이 다 빠져버렸다" (8절). 모세처럼 다니엘도 "나는 심히 두려워 떨었다" 라고 말했다. 그의 기력은 이 영광스런 환상에 대한 진지한 숙고나 그 환상의 두려움에 대하여 자기의 마음을 강화시키는 데에 모두 기울여졌기 때문에, 그의 몸은 기력이 하나도 없는, 생명이 없는 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다니엘에게는 힘이 없었다. 거의 시체가 되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였다. 혈색이 없어졌다. 그의 "아름다움" 은 "썩은 듯" 하였고, "힘이 다 없어졌다." 아무리 지위 높고 선량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살 수가 없다. 그 영광의 빛을 조금만 보아도 여기서의 다니엘처럼 거의 죽게 된다. 그러나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있는 대로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며 그 광경을 견딜 수 있다.그러나 비록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그토록 기절했을 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말소리는 들었고," 알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도록 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들의 경외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공포심으로 변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환상이 하나님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그 때에, 곧 그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위로하여, 그를 거룩한 평온 속에 눕혀 잠들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나의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9절). 다니엘은 그가 환상을 보았을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엎드렸고, 잠들었다. 그것은 그가 듣고 보는 것에 대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겨기에 매혹되어서였다. 죄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얼마나 두렵게 느껴질 것인가? 그러나 그의 말씀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충만히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장래 일에 대한 환상 (다니엘 10:10-21)
그리스도가 다니엘에게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다니엘에게 더 많은 근심이 주어진다. 여전히 다니엘은 놀라고 있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데 대단히 어렵고 느리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선한 말과 위안이 될 말"로 응답을 받고" 지원" 을 받는다. 어떻게 다니엘이 점차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며 같은 취지를 가진 여러 가지 구절들을 수집하는가를 살펴보자.
Ⅰ. 다니엘은 대경실색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알았다. 다니엘을 "만졌던 손" 이 먼저 "다니엘의 무릎과 손바닥" 을 일으킨다(10절). 힘과 위로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낙담하여 불안해하던 사람들에게는 점차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들은 먼저 약간의 도움을 받지만 후에는 더 큰 도움을 받는다. "이틀 후에는 그가 우리를 소생시킨실 것이고, "" 사흘 후에는 그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경멸" (슥 4:10)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비의 시작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그후 천사가 다니엘을 도와 일으켰을 때에, 다니엘은 "떨면서 일어난다" (11절). 다시 넘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기" 이전에, 먼저 저들이 자기 자신들의 약함을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러나 나중에 그의 수족에 많은 힘이 생겨서 견고하게 설 수 있었을 때에도, 그는 "그의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을 하지 아니했다" 고 한다(15절). 다니엘은 무엇을 들었는지 몰라 놀란 사람처럼 벙벙하여, 두려움과 감탄에 젖어서, "자기보다" 훨씬 높으신 분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잠잠했다."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약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다니엘은 그의 발만 아니라 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다니엘은 "그의 입을 열었다" (16절). 그리고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 했다. 그 이유는 그가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오 나의 주여!(비록 천사들은 자기 자신을 예언자들과 "동역자인 종" 이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계 22:9), 다니엘은 천사를 이렇게 불렀다), 다니엘은 천사를 이렇게 불렀다) 이 이상을 인하여 슬픔이 내게 더하나이다. 그 이상은 갑자기 격렬하게 나타났으며, 내가 당신의 빛과 순결을 보았을 때, 죄로 가득찬 슬픈 마음이 내게 임하나이다."
자기의 순결을 상실한 인간은, 순결을 간직한 축복받은 천사들의 영광을 보거나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음을 주목하자.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천사들을 향하여 머리를 들 힘도 없나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치 반쯤 귀먹은 사람처럼 다니엘은 불평하기 시작한다(17절).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출현과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나이다. 아니, 내게는 호흡조차 없나이다." 그것으로 다니엘은 "실신" 하였으므로, 숨을 계속 쉴 수도 없었고, 생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라는 보물이 "질그릇" 에 담겨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다행인가를 살펴 보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서 투정댄다는 것은, 마치 시내 산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면 들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게 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요" (출 20:19)라고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에게 말했던 때의 마음과 똑 같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다니엘이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면, 우리도 어떻게 견딜수 있었겠는가?
이제 다니엘은 그의 무죄한 침묵에 대한 변명으로서 "내 주여, 이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17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우리와 거룩한 천사들 사이에 막대한 거리와 불균형이 있으며, 우리와 거룩한 하나님의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있고, 조금의 균형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마땅히 든다. 또한 우리는 "어두움의 이성(理性)에 의해서 우리들의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티끌과 재와 같은 우리들이 어떻게 영광의 여호와께 말할 수 있겠는가?
Ⅱ. 다니엘과 이야기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된 거룩한 천사는 다니엘에게 가능한 모든 격려와 위로를 주었다. 여기에서 다니엘을 "만지고" "이야기했던" 그 천사는 다니엘이 그의 환상 가운데서(5,6절) 보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가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천사는 8장 16절에서 그리스도가 다니엘에게 지시하도록 전에 한 번 보냈던 천사 가브리엘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영화로운 출현(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영광의 하나님의 출현처럼 행 7:2)은 천사의 할 말에 주의를 끌고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죽은 자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렸을(계 1:17) 경우에도 요한을 위로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일를 천사를 시켜서 행하셨다. 그 천사는 다니엘이 그 이전에 보았던 환상에서 보다는 훨씬 낮은 영광에 있는 천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아들들(인생)의 모양과 같았고" (16절 한글성경은 그대로 "인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18절). 이전처럼(9:21), "그가" 그저 "나타났을 때," 다니엘이 환상을 본 경우처럼 그렇게 혼란에 빠지지는 아니했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다니엘에게 세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1. 천사는 다니엘을 돕기 위해서 그의 "손을 뻗쳐 어루만져," "그의 손바닥과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10절). 여전히 다니엘이 엎드려 있자, 천사는 "그의 입술을 만졌고" (16절). 여전히 어리벙벙하자 다시 천사는 다니엘을 "만졌다" (18절). 그리고 다니엘을 강건케 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여전히 비틀거리면서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우리의 모든 슬픔을 치료하고 우리의 나쁜 것을 고치는 데 가장 훌륭한 것임을 주목하자.하늘로부터 한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며 우리의 입을 열게 하며 우리를 강건케 하신다.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할 "마음을 주시고 할"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천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임을 다니엘에게 확신시킨다. "너는 크게 은총을 받은 사람이니라" (11절). 19절에서도 다시" 크게 은총을 받은 자" 라는 말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 이외에 성도들의 상심한 영혼을 재생시킨는데 효과적인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주목하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야말로 크게 은총(총애)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는다.3. 천사는 좋은 말과 위로의 말로써 다니엘의 희망을 격려하였고, 그의 두려움을 진정시켰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두려워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19절)라고 말했다. 아무리 자애로운 어머니도, 천사가 여기에서 다니엘을 위로했던 것 이상의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서, 슬퍼하고 놀란자녀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재앙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평화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근거 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평안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그 평화가 바로 "그들의 힘" 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능력으로써 우리를 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실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실 것이다" (욥 23:6). 바로 여기서 천사가 그렇게 했다. 환상의 광채로 인해서 다니엘에게 힘이 다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강건함을 허락하셨고, 다니엘은 그것을 알았다(19절).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게 곧 힘이 났도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써 생명을 주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강건함과 기백을 주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강하라!" 하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에 따라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다니엘은 하나님의 강건케 하는 말씀과 은총의 효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행할 준비가 되었다. "이제 주께서 말씀하시옵소서. 나는 들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나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행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그것도 주께서 나를 강건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자들에게(여기에서의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힘을 더하신다" 는 것에 주목하자(사 40:29).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선하게 이용해야만 하며,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우리가 따르도록 하자. 그러면 그 뜻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 뜻 안에서 완전히 설 것이다.
4. 천사는 다니엘의 단식과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확신시킨다. 마치 고넬료에게 말하는 것처럼(행 10:4) "두려워말라. 다니엘아" (12절)라고 말한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이상한 사신을 보고 비보가 전달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3주간의 고행과 간구를 통해서 "비범한" 사신을 하늘에 보냈고, 그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가지고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이것이 기도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이것으로 기도를 다듬어야 한다-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이신 바 되었느니라." 마치 이전에 기도를 시작하던 때와 같았다(9:23).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 정적한 자에게는 "번개빛" 이듯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듣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시 119:130). 우리가 하나님을 의무의 길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첫날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의 길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첫날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의 길에서 기꺼이 만나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다.5. 천사는 교회를 위한 다니엘의 기도가 하나님께 수락되었다는 증거로서 교회의 미래를 상태를 다니엘에게 지시해 주기 위한 목적에서 보냄을 받았다고 알려 주었다. "무슨 이유로 내가 네게 왔는지 아느냐? 만일 내가 너에게 무슨 사명으로 왔는지 안다면 너는 그렇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이미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거기에 잘 순응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네 말로 인해서 왔느니라(12절). 너의 기도에 은혜스러운 응답을 가지고 온 것이니라. "이와 같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 (사 58:9)라고 말씀하신다. 기도의 능력을 보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가! 얼마나 놀라운 발견들이 그 기도 안에 있는지를 보라!
그러면 천사는 무슨 사명으로 다니엘에게 왔는가?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14절). "내가 말일(末日)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은 대단히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감추어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것들에 대한 지식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다니엘은 언제나 교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교회의 상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그에게는 특별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기가 일생 동안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를 알았으리라. 다니엘은 자기 백성들이 현재 만난 난관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난과 속에서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사는 그의 백성들 앞에 아직 더 큰 난관이 남아 있음을 말해야 했다. "보병을 보고 달아난다면, 기병대와 어떻게 싸우랴?" 우리 앞에 더 큰 난관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면, 현재의 고난에 대한 불평은 완화될 것이다.
예언이 중지된 이후, 그리고 메시야의 출현의 때가 가까이 온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날" 에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를 다니엘은 알아야 했다. "그 이상(환상)은 오래 후의 일이다." 이 환상이 교회에게 준주요 의도는, 이 환상이 있은 후 약 3백 년에 안티오커스 시대에 성취될 것을 예견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천사가 다니엘에 알리도록 위임받은 것, 그리고 다니엘이 천사에게 기도하도록 격려된 것은 어떤 호기심이 강한 명상도 아니며, 도덕적 예지도 아니다. 또 다니엘의 전망도 아니다. 또한 비록 그가 천사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교회에 다 전하라고," 사도 요한에게 명령되었던 천사의 전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였다(계 1:1). 여기서도 그렇다. "내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21절). 즉 하나님의 확정된 뜻과 예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령" 은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글(책)" 이라 변경될 수 없다. "나는 내가 기록한 것을 기록하였느니라" (영문은 이러하다). 세상에 공포된 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위한 책이 있는 것처럼, "그의 보고 가운데 봉인된" 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을 위한 책도 있다. 그 양자는 모두 "진리의 글" (책)이다. 아무 것도 그것에 덧붙여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 감추어진 것들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단지 때때로 극히 적은 부분만이 하나님의 의사의 책에서 베껴져, 여기에서 다니엘에게서처럼 교회를 위해 예언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이 "계시된 것들" 이다. 심지어는 "이 율법의 말씀들" 이다. 그것은 "우리와 또 우리 자손들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리의 글" 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평화" 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6. 천사는 다니엘에게 교회의 대적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했다. 그 적대자들로부터는 고난이 다시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교회의 보호자들을 설명한다. 이 보호자들에게서는 최종적인 승리와 안전을 확신할 수 있다.(1) "지상의 왕들" 은 교회의 적이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대적하고,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때문이다(시 2:2). 천사는 다니엘에게 그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사의 국왕이 이십 일 일 동안 천사를 가로막았다." 그 3 주간은 꼭 다니엘이 금식하며 기도하던 기간과 같다. 바사의 아닥사스다왕은 유대인 사건을 방해하는 일에 바빴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재앙을 유대인들에게 행했다. 그리고 천사는 아닥사스다왕의 모든 일을 방해하도록 고용되었다. 그래서 천사는 지금까지 다니엘 방문을 부득이 연기했던 것이다. 그것은 천사가 한 때, 한 곳밖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말처럼, 바사의 이 새로운 왕은 성전을 훼방함으로써 천사가 다니엘에게 가져와야 했던 좋은 소식을 방해하였다. 지상의 왕들과 그 왕들의 제국들은 분명히 때로는 교회에 유익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많이 교회에 해로웠었다. "내가 바사의 왕들에게서 나간 후에, 즉 그들의 왕국이 유대인에 대한 불친절 때문에 몰락한 후에, 헬라의 왕이 올 것이다(20절). 바사 왕국처럼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던 헬라 왕국도 곧 유대인들에게 성가신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하는 교회의 상태이다. 하나의 적이 제거되면, 또 다른 적을 만나게 된다. 9개의 머리를 가진 뱀 히드라의 머리가 바로 저 옛뱀의 머리이다. 하나의 폭풍이 지나가면, 곧 다른 폭풍이 일어난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은 교회의 보호자이시며, 또 보호자가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서 하늘의 천사들도 교회의 안내자와 보호자가 될 것이다.
[1] 천사 가브리엘은 여기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단히 분주하다. "바사의 왕에 대적하여" 21일 동안 그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바사와 왕과 함께 남아서" 유대인 사건을 돌보는 대사 역할을 하느라고 분주하였던 것이다(13절). 그리고 비록 바사의 왕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나쁜 일을 행했지만(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것을 방해하시지 않으셨다면 훨씬 더 많은 재난이 임했을 것이고, 그들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가브리엘은이 사명을 다니엘에게 급속히 전하고 난 뒤, "바사의 왕과 싸우기 위해서 돌아갈 것" 과, 계속해서 그를 대적할 것, 그리고 결국 그 교만한 왕을 겸손하게 복종시킬 것을(20절) 결심한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헬라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또 다른 재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2] 여기에 우리의 왕이신 미가엘이 나타난다. 그는 교회의 위대한 보호자이시며 군장(君長) 중의 첫째이다(13절). 어떤 사람들은 이 미가엘을 피로 된 천사이나 가장 높은 천사장으로 이해한다(살전 4:16; 유9). 또 다른 사람들은 "천사장 미가엘" 이 그리스도 자신이며, 다니엘이 이상 가운데서 보았던 "계약의 천사," 천사들의 주(主)라고 생각한다(5절). "미가엘이 나를 돕기 위해서 왔느니라" (13절).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미가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느니라" (21절).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지 천사들이 머리인 것은 아니다(히 2:5). 그는 교회의 일을 주재하시며, 실제적으로 교회에 선을 베푸신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주관" 한다고 했다. "구원의 상속자들" 을 위해서 천사들을 부리는 자는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교회의 편이 아니라면, 그것은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과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도다" (시 118:7).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시 54:4).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