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부갓네살의 황금 신상 (다니엘 3:1-7)
이 기사의 사건 연대에 관해 확실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 신상이 느부갓네살의 꿈과 관련이 있다면 그 때로부터 오래지 않아 이 신상이 건조됐다고 할 수도 있다. 흑자는 이것을 느부갓네살 통치 칠년 경으로 계산한다. 그것은 곧 여호야김이 포로되기 일년 전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느부갓네살은 경배시키기 위해 금으로 신상을 건립했다. 바벨론은 이미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이 교만한 왕은 또 하나의 우상을 더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단한 분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많은 신들을 세우는 자들은 자기들이 세운 신들이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며 또 우상에게 대한 욕심은 너무나 욕구부족이어서 그들은 그 수를 무한정하게 늘릴 것이며 끝없이 우상 편력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진기함과 다양함을 좋아한다. 그들은 새 신들을 택하였다(삿 5:8). 많이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이 가지고 싶어할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 신상을 세운 것은 자기의 절대적 왕권을 행사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세우기 위함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 신상의 값비쌈. 그것은 금으로 된 신상이었다. 물론 전체가 순금으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그가 부유했다고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다만 금으로 입혔을 것이다. 거짓신들의 숭배자들은 우상 건립과 숭배에 심적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 보통이란 점을 잊지 말자. 우상 숭배하는데는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사 46:6) 이것은 참 하나님 예배에 인색한 우리들의 낯을 뜨겁게 만든다.2. 이 신상의 웅대함. 그것은 고가 육십규빗이요 여섯 규빗이었다. 그것은 정상인의 신장을 열 다섯 배나 능가하였다(보통 사람의 키는 4규빗 즉 6피트로 계산되므로). 그것은 마치 괴물스런 크기로 생명없는 존재를 보상하려고 하려는 듯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어째서 이 신상을 세웠는가? 어떤 이들은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이 신상을 건립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크게 공경하는 발언을 했고 몇몇 유대인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아마 자신의 상으로 이 신상을 세웠을 것이며 이 신상을 통해 경배받으려고 목적했을 것이다. 교만한 왕들은 스스로 신의 예우를받기 좋아했다. 알렉산더대왕도 그랬다. 올림푸스의 쥬피터 신의 아들로 자처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꿈에서 본 신상의 정금 머리가 자기를 나타내며 보다 못한 금속으로 된 부분은 그 다음에 계승할 나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신을 전체의 신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신상을 전부 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그가 받았던 좋은 감명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완전히 사라졌는가!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라고 고백했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그 명명백백한 법칙을 무시하고 상을 세워 절하게 하며 이건 우상 숭배를 계속할 뿐만 아니라 새 신들을 지어내려고 궁리하기까지 한다. 강한 확신이라도 건전한 회심이 결여되어 있는 수가 종종 있다는 데 주목하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죄의 부조리성과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는다.
(2)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꿈과 꿈의 해석이 이제는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 그는 꿈과 그 해석을 듣자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예배자로 굴복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대담한 경쟁자로서 자기를 세운다. 그때에 그는 신상의 정금머리가 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의 형평과 함께 교만해져서 지난일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신탁을 부인하며 자기가 만유 중에서 만유의 주로 행세하려 한 것이다.
Ⅱ. 이 신상의 낙성식에 참집하도록 명령받은 대상은 모든 관리와 지도급 인사들을 망라하여 전국 대회를 이룬다(2,3절). 사자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파되어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집하도록 연락한다. 방백들과 제후들 그 나라의 모든 귀족들 그리고 모든 문관과 무관, 군대의 수령들과 지휘관들, 재판관, 재무관,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들은 어떤 수고와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전부 다 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는 우상의 큰 영광을 위해 큰자들을 불러모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릴 것이라고 언급된다고 (시 68:29). 느부갓네살은 만약 자기가 이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든 신상에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하층민들도 자연히 이들을 따르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의 참석령에 복종하여 이 광대한 왕국의 모든 치안 관리와 관원들은 각 지방의 사무를 젖혀두고 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온다. 매우 어리석은 일로 인해 그들 중 다수가 많은 비용을 들여 장거리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우상이 무감각한 존재이듯 우상 숭배자도 미련한 것이다.
Ⅲ. 신상 앞에 선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신호 소리를 따라 엎드려 신상에게 절하라는 선포가 내린다. 반포하는 자는 이것을 운집한 군중에서 큰 소리로 선포한다. 그 자리에는 참집 명령을 받은자들 외에 그 수행원과 종들 드리고 무수한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다. 물론 백성들은 초청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다음 사실을 주목해야 했다.
1. 왕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금신상에게 엎드려 절해야 한다고 엄한 명령을 내렸다는 것. 그들은 다른 때에는 어떤 신을 섬기든간에 이 시간만큼은 이 신상을 경배해야 했다.2. 그들은 모두가 꼭 같은 시각에 절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들이 이 우상 예배에서 서로 교제한다는 표시였다. 그 표시로 음악의 연주가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악기의 협주는 낙성 예식을 빛내고 우상 예배를 꺼려하는 자들의 마음을 녹여 왕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떼 도않으면 안 데 도움이 될 터였다. 예배시의 이 환락과 즐거움은 영적예배에 생소한 자들의 육욕적, 세상적 마음에는 매우 쾌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께는 영적 예배가 합당하다.
Ⅳ. 대회장에 참석한 자들은 전부가 이 명령에 손응함(7절). 그들은 악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관악기와 현악기가 망라된 소리였다. 그들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 등의 가락이 황홀하다고 생각했다(그것은 그들의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알맞았다). 그들은 마치 북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병사들처럼 일제히 엎드려 절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은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듯 금신상에게 앞드려 절했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칙령이 선포됐다. 해서 놀랄 것은 못된다(6절). 여기에는 그들을 순종에서 유혹하는 음악의 매력과 그들을 겁주어 순응케 하려는 극렬한 풀무의 공포가 함께 나온다. 그들은 이 같은 시험에 압도되어 모두가 굴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이 지시하는 데로 가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자. 무사려한 세상 사람들은 달콤한 음악 연주나 맹렬한 풀무로 말미암아 극히 나쁜 일에 이끌릴 것이다. 거짓 예배는 이런 수단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참소받은 세 사람 (다니엘 3:8-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 집회의 목적을 알았을 법도 한데 그들이 이 집회에 참석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다니엘은 공무로 출타중이었거나 왕의 허락을 얻어 참석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왕의 총애를 너무나 두터이 입고 있었으므로 감히 그를 참소할 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어째서 참소를 받았는가?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왕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했지만 이 대대적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반대 증언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에 절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비록 자기들의 군주가 세운 우상이었고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황금 진상이 될 터였지만 그들은 공직에 있었기에 그 신상에 대항하여 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Ⅰ.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이 세 유대인을 참소하였다. 즉 그들이 왕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절). 이 참소자들은 아마 일부 술객과 점장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갈데아인들이라고 호칭되었다(2:4). 그들은 다니엘에 대한 원한 때문에 그의 친구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들을 무색케 하였고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던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은 기도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고 따라서 그들 술사들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던가! 보라!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대적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나중에 자기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판자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선한 말을 했던 것이다(렘 18:20).
우리는 이런 배은망덕한 자들을 만나더라도 이상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는 이들 갈대아인들은 아마 이들 세 유대인의 자리를 탐내며 그들의 승진을 시기하던 부류였을 것이다.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이 갈데아인들은 왕에게 대한 온갖 경의와 또 통상적인 찬사인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란 말과 함께 왕하여금 칙령에 대해 직접 고한다. 그들은 왕의 명예와 이익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실은 왕과 왕국을 파멸시킬 일로 그를 유도하고 있다.
1. 그들은 왕에게 근자에 제정한 법을 상기하도록 호소한다. 즉 그것은 민족이나 언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이 금 신상에 옆드려 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법률로써 위반자에게 부과하기로 되어 있는 형법도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 형벌은 위반자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는 것이었다(10,11절). 법이 그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옳은 법이든 옳지 못한 법이든 왕은 이를 살펴 생각하라는 것이다.2. 그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이벳느고 세 사람이 이 칙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밀고한다(12절).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함정에 빠뜨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이 법을 제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그가 직접 그들을 보고 있었기에 참소나 밀고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세할 기회만 노리던 이들의 원수들은 이를 놓칠세라 그들을 고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사태를 악화시키고 왕을 더욱 격분시키기 위해
(1) 그 참소자들은 왕에게 이 범법자들의 높은 지위와 신분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유대인이었고 외국인 포로였으며 멸시받는 민족이었다. 그런데도 왕은 이들을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왕의 총애를 그토록 많이 받으면서 왕의 명령에 거역한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며 용납할 수 없는 무례였다. 게다가, 그들의 높은 관작은 그들의 왕명 거역을 더욱 말썽많게 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나쁜 본보기가 될 것이며 남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엄격한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죄한 자들에게 격노를 발하는 권력자 주변에는 그 분노를 더 악화시키는 무리들이 들끓을 수 밖에 없다.
(2) 이들은 이 일이 악의와 고집과 왕의 권위에 대한 멸시감에서 자행된 것이라고 시사한다. "이 사람들은 왕을 높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왕이 섬기라고 요구하시는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기도 않습니다."
Ⅱ. 이 참소에 따라 경건한 세 유대인은 곧 왕 앞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다. 느부갓네살은 분노가 폭발하여 그들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했다(13절). 그토록 많은 나라를 지배하던 이 강한 왕이 자기의 마음은 제어하지 못하고(잠 25:28) 그토록 많은 백성과 포로를 거느리면서 자신의 야만적 격정에 완전히 노예가 되며 포로가 됐다는 것은 그의 위엄과 명예에 커다란 손상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스스로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서 이성적인 인간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여간 부적합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 사람이 자기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이들의 종교가 우상 숭배를 금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는 이들이 자기 권위를 무시하려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왕된 자기에게 존경과 충성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금 신상을 봉헌하는 신앙 예식 도중에 이토록 격노하며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의 슬기는 적어도 분노를 지연시킨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터였다(잠 19:11). 진정한 신앙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진정시키고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미신과 거짓 신에게 대한 신앙은 사람의 격정에 불을 부치고 분과 노를 유발시켜 그들을 야수로 돌변시키는 법이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데(잠 19:12), 느부갓네살의 진노도 그러했다. 그가 이와 같이 노해 있을 때 이 세 사람은 왕앞에 끌려 나온 것이다. 그들은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왔다.
Ⅲ. 사건이 간략하게 그들 앞에서 설명되고 그들은 동의 여부를 질문받는다.
1. 왕은 그들이 남들이 절할 때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고의였는지 물었다(14절). "짐짓 그리하였느냐?(그게 사실이냐? 흠정역)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않은 것은 고의적, 계획적 행위였는가? 아니면 부주의로 인한 행위였는가? 너희는 내가 기르고 양육한 자들이다. 너희는 내 비용으로 교육받고 부양받은 자들이다. 나는 너희에게 그토록 친절했고 그토록 많은 일을 해 주었다. 너희는 지혜로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니까 왕에게 대한 의무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그런데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내가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의 종들의 충실성은 왕왕 그 원수와 박해자들에게 놀람이 된다. 그들은 이들이 자기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벧전 4:4).2. 왕은 이들을 새로 시험하고 싶었다. 그들이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보고 마음을 바꿀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왕은 그들에게 다시 조건을 제시한다(15절).
(1) 왕은 그들을 위해 다시 음악을 연주시키겠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뜨려 순응시키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들이 귀머거리 독사와 달리 귀를 막지 않고(시 58:4) 뱀홀리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려고 한다면 그들의 이전 과오는 사면될 것이었다.
(2)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고집하여 우상 참배를 거절한다면 그들을 즉시 극렬한 풀무 속으로 던지겠다고 왕은 다짐한다. 그들은 일각의 유예도 없이 풀무불 속에 던짐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돌이키든지 아니면 타죽든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왕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신뢰심에서 거역하면서도 의기양양해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무례하게도 하나님께 도전한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건져 낼 수 있거든 건져내 모라지!" 그는 자기가 한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라고 인정했던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2:47 참조). 교만한 자들은 바로처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 (출 5:2)고 말하거나 느부갓네살처럼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겠는고?" 라고 말하기를 즐긴다.
Ⅳ.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들의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한다(16-18절). 우리는 여기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백절불굴의 정신과 활달한 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들을 세 소년이라고 부른다(실로 이들은 어린 사람들이 었다. 1:4).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세 용사 즉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존재한 자 중 첫 삼인(삼하 22:8 이하)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이들은 금 신상의 숭배자들을 향해 과도한 격분을 터뜨리거나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그들을 모욕하거나 능멸하지도 않았다. 또 경솔하게 시험을 억지로 떠맡거나 순교를 자청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불의 시험에 정식으로 불림을 받자 용기를 가지고 훌륭히 행동했다. 그것은 선한 명분을 위해 고난당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행동이요. 용기였다. 이 우상을 만든 악한 왕도 이들 만치 담대하지 못했다. 우상을 쳐서 증거한 이들은 왕을 폭군이나 우상 숭배자라고 부르지 않는다(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노여워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들의 침착과 냉정은 본받을 만하다. 그들은 침착하게 답변한다.
1. 그들은 은혜와 아량으로 죽음을 멸시하며 자기들이 처한 곤경을 일소에 부친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께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그들은 음충하게 대답을 거부하거나 입을 다물고 서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왕에게 말했다. 그들은 왕의 요구에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왕은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므로 사건은 이미 확정된 터에 논난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읽는 게 더 낫다. "우리는 왕께 대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답변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준비를 하고 나왔습니다."(1)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왕의 말에 따라야 할지 않을지 생각하느라고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결심하기 전에 잠깐 동안 숙고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계명으로 죄와 의무가 즉시 결정되고 무엇이 옳은지가 명약관화한 터에 생사를 숙고할 필요가 없었을까? 죄를 피하려고 하는 자들은 유혹과 담판해서는 안 된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를 유혹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명백한 악일 때 우리는 이성보다는 분노와 혐오감으로 그것을 배척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서서 그 유혹을 생각하지 말고 "사탄아, 물러가라" 고 말해야 한다.
(2)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궁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도록 호출된 이상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마 10:19). 그들은 직접적인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회피적인 대답을 궁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의 비위를 맞추는 듯한 인상도 주지 않는다. 그들의 답변에는 아첨으로 보이는 말이 전혀 없다. 그들은 참소자들처럼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란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기교적으로 환심을 사려는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말이 명백하고 솔직하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는 왕에게 대답하려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흠정역). 의무를 자기의 주된 관심사로 삼는 자들은 사건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다(17절).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초개처럼 여길 수 있게 한 것도 바로 이런 확신과 신뢰였다. 그들은 온갖 두려움과 위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멸시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바고 그 믿음으로써 그들은 죄짓기보다 고난을 택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본 때문이다.(히 11:25, 27). "만일 그럴 것이면, 만일 우리가 곤경에 처한다면,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풀무불에 던짐을 당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진 않지만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는 그를 충실히 선봉합니다."
(2) "우리는 이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그의 명예를 위해 헌신합니다. 우리는 그의 일에 종사하고 우리의 보호와 공궤와 보상을 그에게 의지합니다."
(3) "우리는 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사야 어떻든 우리가 풀무 속으로 던지우지 않도록 방지하거나 아니면 풀무 가운데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끝까지 후원해 주실 능력이 있으시며 그들을 대항하여 무장한 모든 괄세를 통제하고 위압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이 그런 능력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할 수 있나이다."
(4)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라고 바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토록 많은 우상 숭배자 앞에서 그들을 구출하신다면 하나님의 위명이 여간 높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고 도전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원수의 모독을 침묵시키기 위해서도 기적을 나타내신다(시 74:18-22; 신 32:27). "그러나 하나님이 설사 우리를 극렬한 풀무를 가운데서 구출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왕의 손에서는 건져내리시리다." 느부갓네살은 다만 육체를 괴롭히고 죽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뒤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느부갓네살의 영향을 벗어나며 그의 손에서 구출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은 고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사람이 우리에게 행할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리 악한 일을 자행한다한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또는 사망 중에서 구출하실 것이다.
3. 그들은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기들의 원리를 고수하겠다고 굳게 결심한다(18절).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출하시는 것을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셔셔(그가 구출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우리를 왕의 손에 떨어지게 하시며 왕의 손에 의해 엎드러지게 하시더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그들은 자기의 신앙 고백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께 굴복하지도 않을 것을 맞대 놓고 직접 고했다. 그들이 만일 혈육과 상의했더라면 왕께 순응하라는 속삭임을 많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 때는 죽음 곧 사망을 달리 피할 길이 없던 때가 아닌가!
(1) 그들은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하나님 예배를 단념하라고 요구받지 않았다. 이 금 신상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은 구두 고백이나 선서가 요구된 것도 아니요 단지 엎드려 절하라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을 남몰래 간직한 채 이 일을 행할 수도 있었다. 림몬의 당에서 절한 나이만처럼(왕하 5:18)이들도 내심으로는 이 우상 숭배를 혐오하면서 절할 수도 있었다.
(2)그들은 우상 숭배의 길로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단 한 번의 행동뿐이었다. 그것은 단일 분이면 끝날 행동이었다. 위험만 지나고 나면 그들은 나중에 이에 대한 유감을 표시할 수 있었다.
(3) 이 일을 명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그 절대권 아래 있었다. 그들은 왕의 신하인 동시 포로이기도 했다. 설사 경배한다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강압과 위협에 의한 타의적 행동이어서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이 될 터였다.
(4) 왕은 그들의 양육자요 은인이였다. 그는 그들을 키우고 가르쳐서 중용하였다. 비록 우상 경배 행위가 지나친 양보 즉 양심의 양보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순종해야 마땅하였다.
(5) 그들은 이방 나라로 쫓겨난 몸이다. 이렇게 쫓겨난 자들에게는 그 추방이 사실상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삼상 20:19)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질상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려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고 그것은 심판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신 4:28). 그들의 풍조에 휩쓸린다고 해도 그들이 정상 참작을 받은 것은 그 흐름이 너무 세찼기 때문이다.
(6) 그들의 왕들과 방백과 조상들 그리고 제사장들조차 하나님의 전에 우상을 세우며 거기서 우상을 경배하지 않았던가? 우상에게 절할 뿐만 아니라 제단을 세우며 향을 피우며 희생을 드리다 못해 자녀까지도 바치지 않았던가? 열 지파 모두가 오랫동안 단과 벧엘에서 금 송아지 신들을 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들이 자기 열조보다 신앙을 더 엄격히 지킬 것인가? Com munis error Facitjusjus- 즉 모든 사람이 행하는 것은 옳은 일임에 틀림없다.
(7) 그들이 만약 왕의 명령을 따른다면 자기 목숨과 지위를 보전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있는 동포들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을 오래도록 줄 수 있는 터였다. 그들은 젊은이였고 자라나는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적 설득에 대답하고 그들을 침묵시키는 데는 하나님의 단 한 마디 말씀이면 족하다. "너는 아무 형상이든지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그 세 사람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죄짓느니 보다 고난을 당해야 하며 선한 것을 얻기 위해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의 불의 가운데서 사느니 차라리 성실 속에서 죽겠다고 결심한다. 고국에 남아있는 동포들이 선택에 의해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던 반면 바벨론에 있던 이 세 사람은 강제에 의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우상의 나라에서 우상 숭배를 열렬히 반대하였다. 실로 이 모든 것을 참작하면 풀무불에서 그들을 구출한 것이 자연계의 큰 기적이듯 이 죄 많은 우상 숭배로부터 그들을 구출한 것은 은혜의 세계에서 큰 기적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왕의 진미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용감히 결심한다. 보다 작은 사례에서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과 의무에 확고히 집착하면 보다 큰 사례에서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준비와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이 점에서 우리도 어떤 구실로든 우상을 숭배하거나 우상 숭배자의 연합을 운위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풀무 속의 세 사람 (다니엘 3:19-27)
Ⅰ. 하나님의 신실한 세 종은 풀무불 속으로 던짐을 당한다. 느부갓네살은 참 하나님께 대해 많이 알고 또 많은 것을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교만과 허영심에서 금 신상을 건립하여 경배를 강요했다고 하나 이 청년들의 말에 그가 새삼스레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는 전에 이들이 자기의 모든 박사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최소한 그는 이들의 우상 숭배 거부를 이유 있다고 생각해 주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1. 그들의 말에 각성하긴 고사하고 그는 열화같이 노하고 한층 난폭해졌다(19절). 그는 분이 가득하고 그들을 향해 낯빛을 변했다. 사람이 격정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 난폭해지고 심지어 안색이 변하여 지혜있고 이성있는 사람에게 큰수치가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진노함으로써 옥좌에 앉은 군주의 위엄과 재판석에 앉은 재판관의 존엄을 그물에 걸린 들소의 무서운 분노와 바꾸었던 것이다. 격노한 자들이 거울 속에 바친 자기 얼굴을 보기만 한다면 자기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그 모든 노여움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될 것이다.2. 이들의 자질과 존귀한 직책을 참작하여 처벌을 완화시키기는커녕 느부갓네살은 풀무를 최고로 가열시키라고 명령했다. 즉 그는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에 다른 행악자의 처형시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고 명령했다. 그는 연료를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많이 넣으라고 명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보다 빨리 끝내게 할테지만 여기에는 왕이 이들의 죄를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칠 배나 더 악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죽음을 보다 치욕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난 폭군의 미련한 실례 속에서 영광을 이끌어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이 그들의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긴커녕 그들의 구원을 보다 혁혁하게 해 준 까닭에서이다.
3. 왕은 이들을 옷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한 풀무불 속에서 던지라고 명하였고 그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20,21절). 그들을 결박한 것은 몸부림치거나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옷입은채 결박한 것은 왕의 명령이 급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들을 보다 서서 그리하여 그리고 차츰차츰 태워 죽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한 것은 기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의 옷조차 그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적이 더욱 많은 평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마치 그들의 죄에 대한 혐오감으로 그들의 옷도 그들과 함께 태워버리려는 듯이 그들을 고의와 속옷과 곁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였다. 이런 죽음은 얼마나 두려운가!(23절)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는데 그런 자를 붙잡다니 얼마나 두려운가! 폭군이 그런 형벌을 내릴 만큼 강퍅하다는 것과 신앙 고백자들이 하나님께 독죄하느니 이런 형벌을 감수하겠다고 할 만큼 담대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어떠한가?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저 풀무 속으로 던져버리고 불과 유황불로 영원히 타오르는 불 못으로 던지는 둘째 사망은 이에비할 바가 아니다. 느부갓네살이 자기 풀무를 최고로 뜨겁게 달군다고 해 보았자 그 속에 던짐을 당하는 자의 고통은 몇 분이면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옥불은 고통만 줄 뿐 죽이지는 않는다. 저주받은 죄인의 고통은 보다 격렬하여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한 자는 쉼을 얻지 못하며 중보도 얻지 못가고 고통의 중단도 없을 것이다(계 14:10, 11). 이에 반해 바벨론의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풀무불에 던짐을 당한 세 사람의 고통은 곧 끝날 터였다.
4. 이들을 결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진 용사들 자신이 불꽃에 타죽거나 질식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섭리였다(22절). 이 세 사람을 빨리 불 속에 집어넣되 효과적으로 틀림없이 집행하라는 왕의 명령은 엄했다. 용사들은 이 세 사람을 풀무 가운데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풀무 입구까지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자기를 보호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다니엘에 관한 외경에 의하면 화염이 풀무 입구에서 49 규빗이나 치솟았다고 한다. 아마 하나님께서 바람을 명하여 불길이 직접 그 용사들에게 맹렬히 닿아 그들을 질식시켰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피해입은 자기 종들을 위해 신원하시며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 행위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그 범죄 행위로써도 박해자들을 벌하셨다. 그러나 이들 용사들은 잔혹한 일의 하수자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는 더 큰죄를 범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용사들은 부당한 명령을 집행했으므로 화를 입어 마땅하다. 이들은 아마 왕의 명령을 쾌히 집행하고 이 일에 종사하게 됨을 기뻐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나중 계산을 위해 예비된 셈이었다. 교만한 폭군들이 벌받을 날은 오고 있다. 그 날에는 그들이 범한 잔혹 행위 때문에 벌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잔혹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한 데 대해서도 벌받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이 이 세 신실한 종들을 풀무에서 구출하심. 이들이 삼키는 불길 한 가운데로 던짐을 당했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들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며 그들의 뼈가 회신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1. 느부갓네살은 그들이 불 속에 거닐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놀라 급히 일어났다. 그의 판결을 집행하던 자들의 죽음이 그를 놀라게 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차례는 느부갓네살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느낌을 받아 놀라서 급히 일어났을 것이고 그 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풀무로 갔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해 마음이 극히 강퍅한 자들을 놀람으로 치실 수 있다는 떼 유의하자. 영혼을 지으신 분은 자기 칼로 영혼에 다가가게 하실 수 있으시며 강대한 폭군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경악한 가운데 그는 자기 주위의 모사들을 불러 묻는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그는 자기 주위의 모사들을 불러 묻는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 일은 왕의 명령뿐만 아니라 중신회의의 결정에 의해서도 시행된 듯하다. 그들은 왕이 행하도록 명령한 일에 동의함으로써 죄와 비난을 왕과 함께 받으려고 했으리라. 그들은 "왕이여, 옳소이다. 우리가 그 일의 집행을 명령했고 그 일은 실시되었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렇지만 내가 풀무 속을 들여다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가운데 다니는구나!" (25절)하고 말한다.(1) 세 사람은 결박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들의 옷조차 그을지도 못한 불이 그들을 결박한 밧줄을 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괴롭히고 방해하기 위해 원수들이 주는 바로 그 시험을 통해 마음이 활달하게 된다.
(2) 그들은 상하지도 않았고 호소하지도 않았으며 고통을 느끼거나 최소한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다.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않았고 연기는 그들을 질식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도 여느 때처럼 살아있었다. 자연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 자기 목적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는 게 주목하자.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사 43:2)는 말은 이제 여기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불의 세력을 멸하며(히 11:34)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였다(엡 6:16).
(3) 그들은 불 가운데로 다녔다. 풀무는 커서 그들이 지닐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들은 상하지 않았기에 다닐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편안했기에 즐거운 낙원이나 동산처럼 거닐 마음이 생겼다.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않겠느냐?(잠 6:28) 그들은 두로왕이 화광석 즉 불처럼 번쩍이는 자기 보석 사이에서 즐거이 왕래하듯(겔 28:14) 불가운데로 다녔다. 그들은 자신이 상하지 않음을 보고 나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상하지 않음을 보고 나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불 속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구출도 맡겼다. 그들은 구출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불 가운데서 오르내렸다. 외경 중 하나는 세 사람 중 하나민 아사랴가 불 가운데서 한 기도와(여기서 아사랴는 이스라엘의 재난과 죄를 슬퍼하며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세 사람이 불 속에서 부른 찬미의 노래를 대략 싣고 있다. 이들 기도와 찬송은 신앙의 훌륭한 요소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티우스처럼 이것이 후기의 어떤 유대인에 의해 저작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도와 찬미를 성서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4) 불 속에는 이들 셋 외에 넷째가 보였는데 느부갓네살의 판단으로는 그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 그는 신적 품성을 가지고 나타났고 하늘 사자로 나타났으며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혹자는 "천사와 같았다" 고 읽는데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호칭된다(욥 38:7). 외경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풀무로 내려왔다" 고 서술한다.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하나님이 극사자를 보내셨다" (28절)고 말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있을 때 사자 입을 막은 것도 천사였다.(6:22). 혹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즉 피조된 천사가 아닌 언약의 사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육하시기 전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가끔 나타나셨다. 이것은 때가 차면 세상에 오실 그의 위대한 사명을 참으로 적절히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택함받은 자들을 불 속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셔서 그들과 함께 다니신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은 그의 은혜로우신 임재가 고난 중의 그들과 함께 하신다 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심지어 극렬히 타는 풀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도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함께 행하시므로 그들은 해받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이 곧 자신께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이로써 증명하셨다. 그들을 풀무 속으로 던지는 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던지는 자들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 58:9 참조).
2.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풀무에서 불러낸다(26절). 그는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에 가까이 가서 그들에게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명했다. 그는 굉장히 인정스럽고 염려스럽게 말한다. 그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도우려는 자세로 서있다. 그는 그들이 기적적으로 보존됐다는 사실에서 자기가 악을 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을 가만히 내어보내지 않는다. 아니다, 그가 친히 와서 데리고 나가려 한다(행 16:37 참조). 왕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관찰하자. 그는 이들을 명예로운 칭호로 부른다. 느부갓네살이 이들에게 맹분을 터뜨렸을 때는 아마 반역자, 역신등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정한다. 그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그의 손에서 능히 건져낼 신으로 등장하신 것이다(15절 참조).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극히 교만한 자에게도 자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은 인간 중 가장 교만한 자보다 높으시며 그들이 큰소리치는 일로도 하나님께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출 18:11).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누가 자기 종인지 알리시며 하나님 자신이 자기 종을 인정하고 그들의 편에 서신다는 것을 알리신다. 엘리야는 "주께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6)하고 기도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버렸던 자들을 이제 포옹한다. 그는 이들이 하늘의 총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나님께서 박해자들의 눈을 여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전에 행한 핍박을 최대한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 모양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던 넷째는 물러갔는지, 보는 데서 승천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 세 사람에 대한 사실만 언급되고 있다.
(1) 그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이 갈데아의 우르(불이란 뜻)에서 나왔듯 불가운데서 나왔다. 유대 전승에서는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를 거절하다가 불 속으로 던짐을 당했고 이들 세 사람처럼 불속에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석방 명령을 듣자 바로 나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더 이상 지체치 않았다. 그들은 불에서 꺼낸 그을은 나무처럼 나왔다(슥 3:2).
(2) 그들은 모든 놀란 구경군들에게 전혀 상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다(27절). 그를 관찰하기 위해 내노라 하는 굵은 인물들은 부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들의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구주께서 자기의 고난받을 종들에게 어떤 실질적 피해도 입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시키고자 "너희 머리털 하나도 성치 않으리라" (눅 21:18)고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은 이 점에서 문자 그대로 옳은 말씀이었다. 그들의 옷은 빛깔도 변하지 않았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하물며 그들의 몸이랴! 불은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다. 갈데아인들은 신의 한 형상으로써 숭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불을 억제하심으로써 그들의 왕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도 멸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려고만 하신다면 물뿐만 아니라 화염도 그 소리에 갈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셨다(시 29:7). 소멸하는 불이 되는 분은 우리 하나님뿐이시다(히 12:29). 그가 말씀만 하셔도 다른 불은 소멸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왕 (다니엘 3:28-30)
방백들과 수령과 도백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대인들은 이 세 사람의 몸을 세밀히 관찰하고 조사하였다. 그들은 이 세 사람에게 대해 편파적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엄격한 신체검사는 이 기적의 확실함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분명히 알려졌으니 우리가 부인할 수 없도다" (행 4:16). 이 일이 느부갓네살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Ⅰ. 그는 자기 예배자들을 능히 보호하시고 기꺼이 보호하시려는 신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28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의 백성이 그에게 바치는 충성은 신실하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보호는 강력하니 그 어떤 백성과 신들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충성과 그의 보호에 대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왕자신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찬양한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사람의 인정과 찬양을 받으셔야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자기를 내놓고 기꺼이 저주하던 자들의 입에서 찬송을 고백받으실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1.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영광을 돌린다. 즉 하나님은 자기 예배자들을 극히 강력하고 유해한 대적들로부터 보호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이다.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29절). 그가 세운 금 신상도 이런 능력은 갖지 못했다. 자기 숭배자들을 자기에게만 집착시키고 다른 신을 숭배하느니 죽음을 택하게 하는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 달리 없었고 다른 신들은 자기 숭배자들을 이렇게 지켜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끝까지 지탱하셨다. 하나님이 다른 신들이 행할 수 없는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면 그는 다른 신이 요구치 않을 순종을 요구하실지도 모른다.2.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영광을 돌린다. 즉 하나님은 기꺼이 이 일을 행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28절).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벨은 자기 숭배자들이 풀무 아구에서 타는 것을 구하지 못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거절한 이유로 풀무 가운데 던짐을 당했을 때 타지 않도록 구원하셨다. 느부갓네살은 이 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얻은 모든 성공이 그들의 죄 때문이란 것을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압도하기라도 한양 자랑했던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하나님께 신실하여 이 삼인처럼 그 하나님만 섬겼더라면, 이 삼인처럼 느부갓네살의 손에서 구원되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에게 필요한 교훈이었다.
Ⅱ. 왕은 세 사람의 신앙적 일관성을 칭찬하고 그것을 그들의 명예로 서술한다(28절). 느부갓네살은 이 삼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할 만큼 설득되진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모든 신들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내 하나님"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이 하나님께만 집착하여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절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을 칭찬한다. 스스로는 신앙이 없으면서 자기 신앙에 투철하고 확고불변한 자들을 분명히 옳다고 인정하는 자들은 많다는 데 주목하자. 비록 그들은 신앙에 밀접해지도록 설득당하진 않지만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을 칭찬할 것이다. 사람들이 만일 홀로 섬김을 받으실 하나님께 자기 이름을 바쳤다면 어떤 대가가 요구되더라도 그들의 원리를 지키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이다. 참된 신앙을 변치 않고 고수하면 모든 사람이 불확실한 신앙과 배반, 그리고 표리부동한 이중 행위를 비난할 때 신앙없는 자들에게까지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삼인을 칭찬했다.
1. 그들은 대국적으로 자기 생명조차 초개처럼 여기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양심의 증언에 견주어 보아 자기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기 보다 차라리 그 몸을 버려 풀무 속으로 던짐을 당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충성을 단 한 번이라고 다른 신에게 비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기 육체보다 영혼을 우선시하는 자들은 인간들한테 칭찬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느니 자기 생명을 버리려한다는 데 주목하자. 믿음 때문에 고난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믿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이다.2. 그들은 왕의 명령을 떳떳이 거역하면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바꾸었다(원의). 즉 그들은 왕의 명령을 거역했고 이로써 그로하여금 명령과 위협을 무시했으며 그를 회개시키고 그의 명령과 위협을 철회시켰다." 왕들이라고 그들이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과 상반될 때는 하나님께 순종야 한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들은 자기 하나님을 은혜로이 신뢰하면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일로 자기들 편에 서시리라고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풀무에서 구출하사 세상의 자기들 위치로 돌려보내시거나 아니면 풀무를 통과하여 천국에 있는 그들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라도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이런 신뢰로 그들은 왕의 진노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들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견실한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건실한 충성을 낳는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공석상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해 직접 행한 이 명예로운 증언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던 나머지 유대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이웃은 그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라고 자신 만만히 촉구할 수가 없었고 그들 자신은 수치스러워서 우상 숭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 형제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음으로써 왕에게 극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들 자기 종들에게 행하신 일은 포로된 가운데 있는 유대인의 신앙을 더 돈독히 하는 데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상 숭배 기질을 퇴치하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들이 포로로 보내진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 일이 그들에게 그런 복된 효과를 끼쳤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세 형제를 풀무에서 구출하셨듯 자기들도 이 포로의 풀무에서 구출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Ⅲ. 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비방을 엄금하는 칙령을 반포한다(29절). 우리는 꼭 정당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의 죄악과 환란이 다 하나님께 대한 갈데아인의 비방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도 그런데서 고무받아 하나님을 모독했을 범하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진정한 회심자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배할 정도로 감회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비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남들의 비방도 용납지 않겠다고 작정한다.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말을 하거나 비난이난참람된 말을 하거나 그 하나님을 무시하여 말하면 그들은 극악범으로 간주되어 처죄될 것이며 사무엘의 칼에 도룩된 아각처럼 그 몸을 쪼갤 것이며 그 집은 파괴되어 거름더미로 될 것이다." 무수한 바벨론 사람들의 목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이 기적은 이 칙령을 정당화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로 중의 유대인들을 편안케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법령으로 말미암아 비난과 모독의 불화살에서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비난과 모독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받았을 터였다. 교회의 대적들이 비록 회심하지 않더라도 입을 막고 혀를 놀리지 않는다는 것만해도 교회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며 좋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교도 군주가 참람자의 교만한 입술에 이토록 재갈을 몰린다면 기독교도 군주는 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우리는 이 일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법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애정이 없어 하나님을 칭찬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심중에 하나님께 설만(褻漫)히 말할 만한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Ⅳ. 왕은 이 삼 인의 권리 박탈을 취소시킬 뿐만 아니라 이전 지위로 복귀시키고("그들을 형통하게 한다" :원의) 이전보다 더 유리한 지위로 승진시킨다. 그는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다. 이것은 이 삼 인의 영광이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 중에 있는 동포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신앙에 견실한 자를 등용하고 중용하는 것은 통치자의 지혜라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 충실한 자는 국가에 충성을 바칠 가능성이 높고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가 자기 수하인이 될 때는 통치자가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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